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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역사적 예수인가? 이 글은 2003년 봄 한인철 목사님이 “역사적 예수와 한국의 그리스도인”이라는 주제로 9주 동안 신앙인아카데미에서 했던 강연 중 첫 번째 강의로, 녹취한 것을 정원석 님이 풀어주었습니다. - 편집자 한 인 철 (연세대학교 연신원 교수, 교목) 처음 아홉 번에 걸친 강의의뢰를 받고는 응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만, 제가 꼭 와야겠다고 생각한 이유는 지금 대한민국의 기독교계에서 역사적인 예수 문제를 거론하는 이런 모임이 있다고 하는 것 자체가 역사적인 사건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물론 일부 교회, 예를 들면 신반포교회나 새길교회는 이미 역사적 예수에 깊이 관심하고, 어느 정도는 역사적 예수에 그 기초를 두고 있습니다. 새길교회는 아예 공동체적으로 우리는 역사적인 예수에 기독교의 터를 두고 그 길을 간다고 선언을 했지요. 그 교회는 교파도 없고 (이 강연을 하고 있을 때만 해도) 담임목사도 없는 상황에서 자유롭게 교회의 미래를 결정할 수 있었습니다만, 일반교회에서는 이렇게 하기가 좀 어렵습니다. 그런데 교회바깥에서 이런 관심사를 갖고 여기 모였다고 하는 것은 한국 안에서의 새 기독교 운동의 효시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르는 굉장히 역사적이고 의미 있는 사건이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들이 한국 기독교 변화의 모퉁이 돌 혹은 겨자씨와 같은 역할들을 할 수 있게 되기를 기대해 봅니다. 제가 강의하는데 다소 당황스러운 점이 있더라도 마음을 편안하게 여시기를 바랍니다. 저는 새로운 교단을 만들 생각도 없고, 교주가 될 생각도 없습니다. 단지 기독교가 가야 할 바람직한 길이 뭐냐 하는 것을 함께 모색해보자 하는 거니까 마음을 여시고, 같이 생각하면서 이야기를 따라오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참고도서 소개 오늘은 "왜 역사적인 예수냐" 하는 문제를 말씀드리겠습니다. 먼저 참고도서 몇 권을 소개합니다. 첫 번째 로버트 펑크(Robert Funk)의 「예수에게 솔직히」라는 책은 꼭 사서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두 번째 마커스 보그(Marcus Borg)의 ꡔ새로 만난 하느님ꡕ 이 책도 굉장히 중요하고 좋은 책입니다. 오강남 선생님의 ꡔ예수는 없다ꡕ라는 책은 상당 부분이 ꡔ새로 만난 하느님ꡕ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이 분의 독특한 필치와 접근으로 인해 아주 재미있습니다. 또 도미닉 크로산(Dominique Crosan)의 ꡔ예수는 누구인가ꡕ라는 책은 잡으면 금방 읽습니다. 크로산의 책은 다 중요한데 ꡔ역사적 예수ꡕ는 두꺼운데다가 내용이 전문적이어서 읽기가 다소 어렵습니다. 좀더 심도 있게 가고 싶은 경우에 도전을 해보시기 바랍니다. 그 다음은 성공회 주교인 쉘비 스퐁(Shelby Spong)의 ꡔ기독교 변하지 않으면 죽는다ꡕ입니다. 김준우 박사께서 번역했는데, 아주 잘 되었습니다. 이 책들을 읽어가면서 강의를 들으시면 입체적인 효과를 가져올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1. 역사적 예수와 신앙의 그리스도 1)역사적 예수: 역사상의 한 인간으로서의 실제 예수 오늘 제가 말씀드리려고 하는 것은 "왜 역사적 예수냐?"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당연히 예수지 뭘 또 새삼스럽게 역사적 예수냐 하는 생각이 들 수도 있습니다만, 그 표현에는 특별한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기독교 신학에서는 역사적 예수라는 말과 관련하여 대비되는 한 표현을 쓰는데, 그것은 케리그마의 그리스도(Kerygmatic Christ)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케리그마, 영어로는 'proclamation' 즉 선포라는 의미로서 신앙의 그리스도라고도 합니다. 역사적 예수와 신앙의 그리스도, 이 두 가지 용어가 기독교 안에서는 굉장히 중요한 용어로 사용됩니다. 우선 역사적 예수란 말은 19세기에 유럽의 기독교 신학자들이 처음 강조해서 쓰기 시작했는데, 1800년대 중반이후 근 100여년 가까운 동안에 300여권의 역사적 예수 연구서가 나왔습니다. 그 기간이 역사적 예수에 관심가졌던 제 1기였습니다. 그리고 2기라고 할 수 있는 때가 1960년대 초반부터 한10여년 가까이 주로 유럽에서 또 한번 역사적 예수 연구가 활발했던 시기가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1985년부터 미국에서 다시 한번 붐이 일었는데, 도미닉 크로산, 로버트 펑크, 마커스 보그 같은 사람들이 중심이 되어 예수 세미나(Jesus Seminar)라는 모임을 만든 것이 그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역사적 예수가 3기까지 왔는데, 3기에 이르는 동안 역사적 예수라는 말을 쓸 때 사람들이 머리 속에 그리고 있었던 것은 성서의 기록을 기초로 신학자들이 전통적으로 믿어 온 그리스도가 아닌, 실질적으로 2000년 전 이스라엘 땅에서 구체적으로 살았던 예수였습니다 ("Jesus as he really was"). 그러니까 그 예수가 실제로 어떻게 가르쳤고, 어떻게 행동했고, 어떻게 죽었고, 또 어떻게 부활했는지를 역사적인 관점에서 연구한 결과로서의 예수입니다. 그 예수는 우리가 성서에서 읽은 그 예수와 다를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 가라사대로 언급된 내용 중 상당부분은 초기 신학자들 혹은 초기 목회자들이 선교를 하는 과정에서 자기들 나름대로 예수를 보는 관점을 갖고 각색한 말이거나 행동일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어떤 위인에 대해서 전기 작가가 글을 쓰는 경우라면, 객관성을 유지하기 위해 면담도 하고 현장 확인도 하고 근거 있는 주(註)도 달지만, 종교적 성격을 띤 인물들의 경우에는 그 사람이 말하거나 행동한 것으로 기록한 것 중 상당 부분들은 그 사람을 신격화하기 위해서 슬쩍 덧칠을 하는 경우들이 있다는 얘기입니다. 그런 덧칠들을 다 제거하고 실제의 그 인간 예수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하는 것을 되찾고 거기에 기독교의 기초를 두려고 하는 그 움직임을 '역사적 예수 운동'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역사적 예수를 연구하는 이유는 기독교의 기초를 역사적 예수에 두어야 기독교가 바로 선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2)신앙의 그리스도: 교회가 공동체적으로 고백한 예수로서의 그리스도 그러면 신앙의 그리스도라고 하는 말은 무엇인가? 기독교 선교 초기에 교회는 공동체적으로 예수에 대해 나름대로 신앙 고백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성서기록에 의하면 예수를 메시아, 다윗의 아들, 사람의 아들(인자), 하느님의 아들로 불렀고, 또 어떤 경우에는 하느님이라고 칭한 경우도 요한복음에 한번 있었습니다. 그래서 인간 예수를 있는 그대로 표현한 게 아니고, 그 예수를 우리가 어떻게 고백할 것인가 하는 관점에서 예수의 가르침과 삶과 죽음과 부활에 대해서 기록한 그 기록상의 예수, 이것을 선포된 그리스도라고 얘기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초기에 기독교인들 중 주류를 이뤘던 상당수의 사람들은 인간 예수가 실제로 누구냐 하는 관점에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한 게 아니고, 이 예수는 약 700여년전부터 유대인들이 기다려왔던 바로 그 메시아라는 생각에서 출발한 것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예수의 생애를 보게 되면 예수의 말 중에 너무 지나치게 인간적이어서 품위가 없어 보이는 것들에 수정을 가할 수 있는 거죠. 실제로 인간 예수는 말을 더듬거렸을지도 모르고 실수를 할 수도 있었겠지만, 사람들에게 품위 없어 보일 수 있는 이미지들은 제거되고 메시아의 이미지에 어울리는 말들로 각색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신적인 존재로 추앙받는 사람들의 경우, 너무 인간적인 것이 많이 알려지다 보면, 그것이 종교적 추앙을 받는데 저해가 될 수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 일례로, 골고다 처형장에서 예수의 주검의 처리과정은 참으로 비참한 것이었다고 합니다. 유대인의 왕이라 하면 기독교인들은 다 좋은 의미로 이해하는데, 당시의 역사적 관점에서 보면 그 말은 내란음모를 획책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는 왕이 되려고 한 적이 없었지만, 내란음모죄로 사형 당했습니다. 십자가형을 받으면 보통 짧으면 3시간, 길면 12시간 안에 죽는다고 하는데, 죽게 되면 그 시체를 가져다 장사를 지내는 게 아니고 그 골짜기에다 유기를 했다고 합니다. 그러면 들개나 새들이 와서 다 쪼아 먹고, 나중에는 뼈만 남아 대구 지하철 참사의 경우처럼 누구의 시신인지 구분할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가 장사지내져서 돌무덤 속에 들어갔다는 기록은 거의 사실이 아닐 것이라고 합니다. 복음서에 보면 니고데모가 유대의 국회의원이었기 때문에 시신을 달라고 해서 무덤에 안치를 하고 장사를 지냈다는 내용들이 암시적으로 나오지만, 그런 일이 일어날 가능성은 거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그렇게 했는가? 그것이 역사적 진실이라 하더라도, 당시 예수를 메시아로 믿었던 사람들은 메시아의 시신을 짐승들이 뜯어 먹어 뼈만 남았고, 그나마 어디 있는지도 모른다는 말을 차마 할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시신이 거둬들여지고 격식을 갖춰서 장사를 지내고 돌무덤에 갇혀지고 그리고 거기서부터 부활하는 이미지로 각색을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당시 초기 기독교도들로서는 그 예수를 메시아로 받아들인다는 게 어려웠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렇게 된 예수에 기초한 오늘날의 기독교가 너무나 많은 문제를 내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선포된 메시아로서의 예수, 그 이미지에 걸맞게 그려진 예수로부터 본래의 역사적인 예수를 해방시키자는 것입니다. 그리고 가톨릭, 성공회, 개신교를 포함한 기독교의 기초를 역사적 예수에 다시 한번 두어 보자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신앙의 그리스도에 기초한 전통적인 기독교를, 다시 역사적인 예수에 기초를 둔 기독교로 탈바꿈하는 것이 앞으로 가능할 수 있을지 이런 것들을 검토해 보자는 것이지요. 제가 교회에서 교인들에게 이런 강의를 하면, 처음에는 신선하다고 하면서 좋아합니다. 그러다가 조금 있으면 불안해지기 시작하고요, 더 지나면 "이렇게 가고도 기독교라고 할 수 있을까요? 그래서 뜻에는 공감하지만 저는 따를 수가 없습니다" 하는 단계로 갑니다. 이처럼 역사적 예수에 기독교의 기초를 두는 일은 얼핏 당연해 보이지만, 막상 실제로 시도해보면 생각처럼 만만치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타당성이 있다면 생각을 다시 해 보아야겠지요. 일단 진도를 나가보겠습니다. 2. 전통적인 한국 기독교: 신앙의 그리스도와 4영리(靈理) 1) 니케아-칼케돈 신조 (327년, 451년)에 근거한 신앙의 그리스도 전통적인 한국 기독교라는 표현은 자주 사용하기는 하지만, 다소 모호합니다. 대개 전통적인 한국 기독교라고 할 때에는, 기독교 초기의 세계 교회 회의에서 결정된 신조, 즉 AD 325년의 니케아 회의와 451년의 칼케돈 회의에서 결정된 신앙고백문에 기초한 신앙의 그리스도를 믿고 받아들이는 기독교를 말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핵심은 두 가지 입니다. 하나는 예수는 하느님과 동일본질(homoousios)이라는 것으로서, 이에 근거하여 에페소회의에서는 성령까지 포함한 삼위일체의 교리를 만들었습니다. 예수를 어떻게 볼 것이냐의 문제에 대해, 한 쪽에서는 율법선생 중에 탁월한 사람, 예언자 중에 탁월한 사람, 엘리야와 동격에 두려는 주장, 모세와 동격에 두려는 의견이 있었지만, 다른 한 쪽에서는 예수를 유대인이 기다려 온 메시아라는 주장이 있어 예수 그리스도라는 표현이 생겨났습니다. 그리고 곧 메시아는 신의 아들과 동의어로 사용되면서, 처음에는 신의 아들, 다음에는 신의 외아들, 마지막에는 신과 동격으로 보자는 의견까지 나왔습니다. 당시에도 예수를 하느님과 동일본질이라 주장하는 것은 예수를 신격화, 우상화하는 것이고, 유대인의 유일신 신앙에도 맞지 않는다는 반론이 있었지만, 아무튼 결론은 하느님과 동일본질이라는 쪽으로 났습니다. 또 하나는 예수는 죄가 있는 보통 인간과 달리 죄가 없다(sinless)는 것입니다. 예수가 하느님과 동일본질이라고 하는 말과 죄가 없다고 하는 말은 당시로서는 동어반복적인 의미였습니다. 2) 신앙의 그리스도에 근거한 사영리 그 후 니케아-칼케돈 신조는 세계 모든 기독교의 교리적 기초가 되었고, 한국도 예외가 아니었는데, 니케아 칼케돈 신조의 한국식 버전이 곧 사영리(four spiritual principles)라는 것입니다. 재미있는건 사영리는 CCC(Campus Crusade for Christ: 윌리엄 브라이트가 미국에서 창설한 대학생 선교회)가 만들었지만 대부분의 한국기독교가 사영리를 따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영리의 내용은 요약하면, 첫째 예수는 인간을 사랑하시고 인간을 구원하시길 원한다는 것이고, 둘째 인간은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셋째 예수는 죄인을 구원하는 하느님의 유일한 길, 그래서 십자가를 지고 우리 대신 죄를 사하기 위하여 죽으셨기 때문에 그 예수가 유일한 길이라는 것이고, 마지막으로 죄인인 인간은 예수를 구원자로 받아들여야만 구원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전통적인 한국 기독교라고 할 때, 이는 니케아 칼케돈 신조에 근거를 둔 사영리 교리를 받아들이고 있는 대부분의 한국교회를 말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3. 전통적인 한국기독교의 강점과 약점 그런데 이러한 전통적인 한국 기독교는 강점도 있고 약점도 있습니다. 신앙의 그리스도에 기초한 기독교의 강점은 첫째, 사람들을 죄의식으로부터 해방시켜 마음의 안정을 얻게 해주는 역할을 한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사영리 교리를 받아들여서 기독교인이 된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경험한 것은 마음이 편안해졌다는 것입니다. 한국갤럽 조사 연구소에서 1997년에 조사하고 1998년에 펴낸 『한국인의 종교와 종교의식』이라고 하는 보고서에 보면, 한국 개신교인의 66.7%는 마음의 평안을 얻기 위해 교회에 나간다고 대답하고 있습니다. 한편 올바른 삶을 살기 위하여 라고 하는 사람은 4.6% 밖에 없을 정도로 삶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둘째로는 내세신앙을 가짐으로 죽음의 불안을 극복할 수 있게 해준다는 것입니다. 살아서는 죄의식으로부터 해방되어 마음의 평안을 주고, 죽어서는 천당 가서 영생 복락을 누릴 수 있다는 이 두 가지가 사영리 교리가 교인들에게 줄 수 있는 최대 강점입니다. 신앙의 그리스도에 기초한 기독교는 위의 큰 공헌에도 불구하고, 또한 진지하게 그리고 심각하게 재검토하지 않으면 안 될 중대한 문제점 혹은 약점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중 첫 번째 문제는, 이것은 학생들로부터 여론 조사를 해서 알고 있는 것입니다만, 배타주의입니다. 기독교인 비기독교인 할 것 없이 대학생들이 기독교에 대해 가장 많이 비판하는 것이 기독교의 배타성과 독선, 그리고 폭력성입니다. 두 번째 문제점은, 본인은 이것이 기독교의 가장 중대한 문제점이라 생각하는데, 우리 신앙이 전통적인 기독교에 머무는 한, 역사적인 예수에 기초를 둔 예수의 삶을 재연할 수 있는 가능성이 막힌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를 믿으면, 예수처럼 살지 못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어폐가 있는 듯 들립니다만, 하나하나 짚어 보면 실제로 그렇습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당연히 예수처럼 살아야지요' 라는 말에 사람들은 '그렇죠' 라고 대답하는데, 실제로는 예수를 믿는 사람은 예수처럼 안 사는 것이 현실이고 이것이 아이러니거든요. 여기에는 세 가지 교리적인 이유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첫째로, 예수는 하느님인데 반해서 우리는 하느님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가 그렇게 살 수 있었던 것은 본질이 하느님이기 때문이고,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원죄를 가진 죄인이라, 예수처럼 못 사는 것은 당연하다고 보는 것입니다. 둘째로, 우리가 그렇게 못살기 때문에 예수가 우리를 구원해 주려고 십자가를 지고 죽었는데, 왜 이미 구원을 얻은 마당에 굳이 예수처럼 살아야 되느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오죽하면 예수를 믿겠느냐 이것입니다. 세 번째는 더 기가 막힙니다. 예수처럼 우리가 사는 것은 율법신앙에 해당된다는 논리입니다. 바울은 구원은 믿음으로 얻는 것이지 행함으로 얻는 것이 아니라고 했는데, 예수처럼 살려는 것은 바로 행함으로 구원 받으려고 하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믿고 구원 받았으면 그것으로 끝이지, 예수처럼 살려고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지금 저나 여러분들은 이 세 가지를 부정적으로 이해하고 있지만, 만약 제가 이 세 가지를 잘 정리해서 긍정적으로 얘기한다면 교인들은 아마 "아멘~"할 겁니다. (웃음) 그런데 기독교인이 예수처럼 살지 않는 데에는 교리적인 이유 세 가지 말고도 더 심각한 문제가 하나 있는데, 그것은 매우 인간적인 이유입니다. 설사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를 사는 것이라는 점을 내가 받아들인다고 하더라도, 솔직히 예수처럼 살고 싶지는 않다는 것이지요. 안 그래도 충분히 인생이 피곤하고 힘든데, 이 시대를 예수처럼 살라고 하는 말은 저주(?)에 가깝다고 보는 것입니다. 더러 거짓말도 하고 사기도 치고 부정부패도하고 이렇게 하면서 살아도 생존하기가 힘든 판국에, 예수처럼 살려면 버려야 할 것이 너무나 많으니까 그게 맞다고 하더라도 그렇게 살고 싶지는 않은 것입니다. 제가 실례 하나를 들겠습니다. 『예수는 누구인가』라는 책을 번역하고 나서, 감리교에서 목회를 하는 후배들이 그 소문을 듣고 '우리도 목회 한 번 똑바로 해볼 테니 어디 조용한 데 가서 저녁도 하면서 어떻게 목회를 하는 것이 바른 것인지 솔직하게 얘기해 주시오'하고 제안을 했습니다. ‘참 살다보니 별 일이 다 있다’ 싶어, "내가 무슨 얘기 하더라도 상관 없지?"하는 다짐을 받고나서 조용한 방 하나를 빌려 역사적 예수 얘기를 죽 했어요. 다 얘기한 다음에 제가 결론적으로 물었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공부했는데, 만약에 역사적인 예수에 터를 두고 교회를 변화시킨다고 할 때 최대의 문제가 뭐라고 생각하느냐?" 그러면서 제가 스스로 대답했습니다. "최대의 문제는 정말 목회자가 예수의 길을 진짜로 갈 생각이 있느냐. 그게 최대의 문제다." "큰 교회 가고 싶고, 사택도 넓었으면 좋겠고, 봉급도 많았으면 좋겠지?", "(감리교 같으면) 감리사도 하고 감독도 했으면 좋겠지?" 목사들을 앉혀놓고 강의를 한 다음에 예수처럼 살겠느냐는 물음을 던진다는 게 말이나 되겠습니까? 당연히 그래야지요. 그러자 조용해졌습니다. 질문도 없고 썰렁한 분위기가 되더니 삼십대 초반의 젊은 목회자가 입을 열었습니다. "솔직히 얘기하라고 하시니 말씀드리는데. 전 역사적 예수 안 되겠습니다. 솔직히 그런 길을 가고 싶지는 않습니다. 옛날 그대로 할랍니다." 그게 기독교가 당면해 있는 현실입니다. 그러니 어떻게 교인더러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 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의 길이라는 게 목회자도 가고 싶지 않은 길인데, 차라리 몰랐을 때가 속 편한 겁니다. 몰라서 못 갔다고 발뺌할 여지나 있으니까.. 하지만 막상 알게 되었을 때에는 ' 정말 내가 이 길을 갈 것이냐 하는 현실적인 도전에 직면하게 됩니다. 이 경우 많은 사람들은 나는 예수처럼 살고 싶지 않다고 차마 말하지 못하면서, 그 인간적인 이유를 교리적인 이유로 포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4. 왜 역사적 예수인가? 왜 역사적 예수인가? 저의 대답은 간단합니다. '역사적인 예수에 뿌리를 두지 않은 기독교는 참된 의미의 기독교라고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니체는 '즐거운 학문’에서 "신은 죽었다"고 선언하면서, 자신이 볼 때는 예수가 죽은 이후에 인류 역사상 기독교인은 단 한 명도 없다고 했습니다. 그는 바울을 상당히 비난하는데, 그 이유는 바울 때문에 예수의 복음(福音)이 화음(禍音)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기독교인이 예수가 살았던 삶을 살지 않아도 되는 교리 체계를 만들고. 일종의 면죄부를 줬다는 것입니다. 예수의 삶을 회피할 수 있는 우회도로를 신학적으로 정립해 줬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이후 요한복음과 바울에 근거를 둔 전통적인 기독교는 더 이상 예수의 삶을 살지 않게 되었는데, 니체는 이러한 기독교가 과연 기독교라고 할 수 있느냐고 묻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신앙의 그리스도, 즉 예수를 그리스도를 고백하고 하느님의 아들, 하느님으로 고백하는 것이 무의미하다고 보지 않습니다. 우리가 높은 분을 부를 적에는 존칭을 붙이고, 또 특별한 삶을 산 분들에게는 그에 적절한 칭호를 붙여 줍니다. 그렇죠? 어떤 때는 의사, 열사, 혹은 선생님. 이북에서는 목사를 목사선생님이라고 한다는데, 우리나라에서도 정말 존경 받게 되면 목사 칭호 대신 선생이라고 써 주는 것을 보게 됩니다. 문익환 선생님, 함석헌 선생님, 유영모 선생님, 김교신 선생님처럼... 그러니깐 정말 존경하는 분에 붙이는 칭호는 그 사람의 삶을 요약해주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 칭호는 유의미하지만, 그 사람의 삶의 진실이 빠진 채 칭호만 남는 것은 사기가 될 수도 있습니다. '아프리카의 아버지'는 슈바이처에게 줄 수 있는 최대의 칭호입니다. 그런데 만일 슈바이처의 삶의 진실에 대해서 아무것도 아는 바가 없이 '아프리카의 아버지'라는 것만 남아서 아프리카의 교주가 됐다고 해 보십시오. 슈바이처가 실지로 아프리카에서 뭘 어떻게 했는지 아는 것이 없고 오직 아는 것은 이 사람이 태어날 때부터 아프리카의 아버지로 DNA를 갖고 태어났다는 것밖에 모른다면 이것은 사기 집단으로 가는 직행코스입니다. 기독교도 그 길을 갈 수가 있다는 것이지요. 사실 예수에 대한 많은 부분이 윤색되어 있어서 사람들이 그 진실을 다 모르고 있는 것이지요. 그런 의미에서 다른 것을 다 양보한다 하더라도 역사적인 예수를 빼놓고 기독교를 말하는 건 그건 기독교라고 말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신앙의 그리스도에 기초해서 기독교가 만들어진 그 자체를 잘못된 역사라고 한 칼에 부정하려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만,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한 것이 역사적인 예수의 삶에 터를 둘 때 그 고백이 의미가 있는 것이지, 예수라는 사람이 태어날 때부터 하느님의 아들이었다 혹은 하느님 자신이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위험하고, 자칫 인간을 신격화하기 위한 이데올로기가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이 역사적인 예수를 외면하거나 덮어두고, 예수에 대한 어떤 신앙고백적인 언어만 난무한다면, 그것은 좋게 말하면 왜곡된 소문, 더 나아가서는 종교체제를 만들기 위한 이데올로기일 수도 있습니다. 이 말은 기독교가 실제로 지난 2000년 동안 그런 길을 걸어 왔는지도 모른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가장 핵심적인 것은 역사적인 예수에 철저하게 터를 둔 기독교인이라야 예수가 살았던 삶을 살게 될 것이라는 점입니다. 목표는 예수를 믿는 것이 곧 예수를 사는 것이 되도록 하는 것입니다. 기독교가 그 길로 갈 수는 없겠는가 하는 것이 제가 생각하는 대안의 방향입니다. 1992년 12월에 김영삼씨가 대통령이 된 직후, 1993년에 소위 신한국건설이라고 해서 부정부패 비리척결, 중단 없는 사정 등등 대단했습니다. 전 그때 매우 흥분했었습니다. 하느님 나라가 세상에 현실화된다면 이런 것일 수 있겠구나. 이것은 하느님 나라의 맛보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 때 비리로 잡혀간 사람들 중에 기독교인의 비율이 비공식적으로 회자되었는데, 약 60%가 기독교인이었다고 합니다. 기독교인에 대한 부풀린 통계에 의하면. 가톨릭 개신교 합해서 25%정도 되고, 그 중에 가톨릭이 한 9%정도 된다고 합니다만.. 이중, 삼중 교적자들을 고려해서 거품을 빼보면 약 10% 전후가 될 것입니다. 그런데 비리인사의 60%가 기독교인이라는 것은 놀랄 일입니다. 기도모임 한다면서 수 천 만 원짜리 비싼 옷 사러 돌아다니던 고관부인들이 잡혀 들어가서는, 성서에 손 얹고 거짓말하고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왜 그렇게 됐을까요... 그것이 혹시 전통적인 기독교가 가지고 있는 이 틀이 그 사람들이 운신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준 게 아니겠느냐 하는 생각입니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겠습니다. |
첫댓글 종의 신앙에서 아들의 신앙으로 바꾸어졌다 라고 고백을 하여도 불안과 공포 불신앙과 의혹 여러가지 시험이 엄습해 오는게 인간의 본 모습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주님을 사랑 한다는 베드로 고백처럼 저 또한 주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하겠습니다 방랑자님 한인철 목사님의 좋은글 올려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우리나라 기독교가 오래도록 헤매고 있지요? -바른길을 간다고 여기며?- 목회자 먹고사는 문제를 따로 직업을 갖어야 하는 제도가 생겨야 바른말로 설교도하고, 진실을 앞세우고 그 바탕위에 직분을 다하지 않을까요?
목회자는 교회에서 주는 모든것으로 해결 해야 된다고 생각 합니다 티코를 주면 티코를 타고 벤츠를 주면 벤츠를 타고 양식은 신도들이 십시일반 밥 지을때 마다 한숫가락씩 뜨는 성미를 통하여 양식을 제공 받아야 마땅 합니다 대부분의 교회들이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인간은 어리석음에 늘 부족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