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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10. 4일(월)
한국천주교 성지순례책자를 용수성지에서 구입한 후 곧바로
제주도 성지를 아내와 함께 시작했습니다.
대정성지, 김기량 순교현양비, 관덕정 순교 터, 중앙성당,
새미 은총의 동산을 거쳐 집에 오니 5시가 넘었습니다.
제주성지 중 추자도에 있는 황경한 묘만 순례하지 못했습니다.
두번 방문한 경험이 있지만 순례도장을 받지 못했습니다.
제주도의 성지도 여러번 방문했지만
이번 순례는 순례도장을 받기위한 목적입니다.
육지의 성지는 11월과 12월에 걸쳐 순례할 계획입니다.
162.관덕정 순교 터
1886년 조불수호통상조약을 계기로 조선에서는 공식적인 박해가 끝났음에도
지방에서는 부패한 관리와 완고한 유생들과 천주교인들과의 충돌이
결국에는 박해라는 양상으로 바뀌었는데,
그중 하나가 1901년 발행한 제주 신축교안이었다.
지방 관리와 기득권을 주장하는 토호 세력 등의 결탁으로 유도된 이 사건은
중앙 정부의 새로운 제세 정책에 불만을 가진 백성들의 민란(이재수의 난)으로 출발했으나,
사건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민란군은 공격 대상을 천주교로 돌렸다.
관덕정은 본디 조선 세종 때 군사들이 훈련하는 연무장에 세운 정자였는데,
제주 신축교안 때 많은 신자들이 이곳 관덕정에서 민란군에게 처형당하였다.
제주교구는 2003년 11월 7일
'1901년 제주 항쟁 기념사업회'와 함께 화해 선언문을 발표하였다.
곧 교회는 과거 전통 사회와 문화를 제재로 이해하지 못하고
선교 활동을 펼쳤던 점들을 인정하고,
제주도민들도 봉기 과정에서
무고한 천주교인들이 희생되었다는 점을 인식함으로써,
과거사에 대한 일방적 시각을 버리고 화해와 화합의 새로운 길을 열었다.
163 김기량 순교 현양비
제주사라미으로 처음 세례를 받았으며, 제주 최초의 순교자인
김기량 펠릭스 베드로는 제주시 조천읍 함덕리에서 태어났다
제주의 복음화를 위해 노력하던 중 병인박해(1866)때
통영의 게섬(현 통영시 산양읍 풍화리)에서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가슴 위에 대못이 박히는 처형을 당하여 51세(1867)나이로 순교하였다.
제주교구는 제주선교 100주년(1999) 기념사업의 하나로 2005년 4월 24일,
그의 고향에 부지를 마련하여 순교현양비를 세웠으며,
2015년 12월 12일 '제주교구 레지오 마리에 도입 60주년 기념 감사미사 및
성모상과 기념비 축성식'을 가졌다.
김기량 펠릭스 베드로는 천주가사를 지어
만민평등과 형제애를 드러내었다.
김기량 (펠릭스베드로)
1816 ~ 1867. 1
김기량(金耆良) 펠릭스 베드로는 1816년 제주 섬 함덕리
(현 제주도 북제주군 조천읍 함덕리)의 중인 집안에서 탄생하였다.
사람들은 그를 ‘김 선달’이라고 불렀다.
그는 배를 타고 다니면 장사를 하던 사람이었는데,
1857년 2월 18일(음력 1월 24일) 동료들과 함께 무역차
바다로 나갔다가 풍랑을 만나 표류하게 되었다.
그로부터 1개월 이상이 지난 3월 26일,
펠릭스 베드로는 중국의 광동 해역에서 영국 배에 구조되었다.
그때 동료들은 탈진하여 죽은 상태였다.
이후 펠릭스 베드로는 홍콩의 파리 외방전교회 극동 대표부로 보내졌으며,
이곳에서 프랑스 선교사들과 조선 신학생 이 바울리노를 만나게 되었다.
바울리노는 당시 그곳에서 휴양 중이었다.
바울리노는 펠릭스 베드로를 만난 다음날부터
그에게 천주교 교리를 가르치기 시작하였다.
그러자 펠릭스 베드로는 여기에 마음이 쏠려 기도문을 외우기 시작하였고,
그의 신앙심은 얼마 안되어 아주 깊어지게 되었다.
그런 다음 그는 1857년 5월 31일 홍콩의 부대표인
루세이유(J. J. Rousseille) 신부로부터 세례를 받고 조선으로 귀국하였다.
귀국 직후 펠릭스 베드로는 고향인 제주로 내려가기 전인 1858년 3~4월에
페롱(S. Feron, 權) 신부와 최양업(토마스) 신부를 만날 수 있었다.
이때 신부들은 그가 ‘제주의 사도’가 될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았다.
실제로 그는 가족과 그의 사공들에게 교리를 가르치는 데 열중하였으며,
다음해 봄에는 육지로 나와
교구장인 성 베르뇌(S. Berneux, 張敬一) 주교를 만나 성사를 받기도 하였다.
펠릭스 베드로는 이후로도 육지를 오가면서 열심히 신앙 생활을 하였다.
그러던 중 1865년에는 두 번째로 난파하여 일본 나가사키에 도착하였으며,
그곳에서 프티장(Petitjean) 신부를 만나고 다음해 귀국하였다.
이후 그는 육지로 다시 나와 리델(F. Ridel) 신부를 방문하고,
그 자리에서 자신의 사공 2명을 영세시키기도 하였다.
이 무렵 그는 다음과 같은 천주가사를 지어 불렀다고 한다.
어와 벗님들아 순교의 길로 나아가세.
그러나 순교의 길로 나아가기는 어렵다네.
나의 평생 소원은 천주와 성모 마리아를 섬기는 것이요,
밤낮으로 바라는 것은 천당뿐이로다.
펠릭스 베드로는 능히 주님 대전에 오르기를 바라옵나이다.
그러나 제주의 복음화를 위한 김기량 펠릭스 베드로의 노력은
1866년의 병인박해로 중단될 수밖에 없었다.
박해가 일어난 직후 그는 여느 때처럼 무역을 하러 경상도 통영으로 나갔다가
그곳의 게섬(현 경남 통영시 산양읍 풍화리)에서 천주교 신자라는 사실이 밝혀져 체포되었다.
이윽고 통영 관아로 끌려간 펠릭스 베드로는 여러 차례 문초와 형벌을 받아야만 하였다.
그러나 그는 결코 여기에 굴복하지 않고 굳게 신앙을 지켰다.
더욱이 옥에 갇혀서는 함께 있던 교우들에게
“나는 순교를 각오하였으니,
그대들도 마음을 변치 말고 나를 따라오시오.”라고 권면하였다.
이후 통영 관장은 대구 감사에게
‘펠릭스 베드로와 그 동료들을 배교시킬 수 없다’는 사실을 보고하였다.
그러자 감사는 ‘그들을 때려 죽이라’는 명령을 내렸고,
이에 따라 펠릭스 베드로와 그의 동료들은 다시 혹독한 매질을 당해야만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목숨이 붙어 있자,
관장은 그들 모두를 옥으로 옮겨 교수형에 처하라고 명령하였다.
이때가 1867년 1월(음력 1866년 12월)로, 당시 펠릭스 베드로의 나이는 51세였다.
이때 관장은 특별히 그의 가슴 위에 대못을 박아 다시는 살아나지 못하도록 하였다고 한다.
164 대정 성지
정난주 마리아 [황사영 알렉시오 부인]묘
신앙의 불모지인 이 땅에서 정 마리아는
수난하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에 대한 증거자로서 신앙의 모범을 보여준 분이다.
그녀는 1773년 나주 본관 정약현(丁若鉉)과 경주 본관 이씨(李氏) 사이에서 태어나
명련(命連)이란 아명을 받았다.
일찍부터 천주교에 입교하여 전교에 힘썼던 당대 최고의 실학자
약전(若銓), 약종(若鍾), 약용(若鏞) 형제가 그녀의 숙부들이었고
어머니는 이 나라 신앙의 성조인 이벽(李檗)의 누이였다.
황사영(黃嗣永)과 혼인한 그녀는 1800년에 옥동자 경한(景漢)을 출산하였다.
남편인 황사영은 1775년에 태어나 약관 16세 초시, 17세에 복시에 장원급제하여
정조대왕으로부터 칭찬과 학비를 받은 매우 영특한 인재였으나
천주교를 신앙함으로써 현세적 명리에 등을 돌렸다.
중국인 신부 주문모(周文謨)에게 세례를 받은 그는 전교에 전력을 다하다가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충북 제천의 배론으로 피신하여 이른바 황사영 백서(帛書)를 썼다.
박해의 실상을 기술한 이백서는 북경 구베아 주교에게 발송되기 직전에 발각되어
황사영은 대역죄인으로 체포되고 동년 음 11월 5일 서소문 밖에서 능지처참으로 순교하였다.
그 결과 어머니 이윤혜는 거제도에, 처인 정 마리아는 제주도에,
아들 경한은 추자도에 각각 귀양을 가게 되었다.
정 마리아는 1801년 음 11월 21일 두 살 난 아들을 품에 안고 귀양길에 올랐으며
추자도에 이르러 어린 아들과 생이별하는 아픔을 겪어야 했다.
추자도에 격리된 아들은 어부 오씨(吳氏)에 의해 하추자도 예초리에서 키워졌으며
그 후손은 현재 추자도에서 살고 있다.
제주목 관노로 정배된 정 마리아는 온갖 시련을 신앙으로 이겨냈으며,
풍부한 교양과 학식으로 주민들을 교화시켜 노비의 신분에도 불구하고
‘서울 할머니’라 불리우며 이웃들의 칭송 가운데 살아갔다.
신앙만을 유일한 위안으로 삼고 37년 동안 하느님께 봉헌된 삶을 살다가
1838년 음 2월 1일 병환으로 숨을 거두자 그녀를 흠모하던 이웃들이 유해를 이곳에 안장하였다.
정마리아의 삶은 그 자체가 복음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신앙 증거의 연속이었기에
우리는 그녀를 ‘신앙의 증인’으로 추모하면서
제주 선교 100주년 기념사업의 하나로 이 묘역을 새로 단장, 성역화하였다.
그녀의 삶은 우리들의 신앙 생활에 새로운 결단의 계기를 마련해 줄 수 있는
영원하고도 소중한 표양이 될 것이다.
165 새미 은총의 동산
묵주기도의 호수와 성모동굴이 있으며
주님의 은총과 순례객의 기도가
마르지 않는 생물처럼 이어진다는 의미의 새미은총의 동산,
예수님 생애 공원과 야외 십자가의 길,
십자가 형태로 건립된 삼위일체 대성당 등이 있다.
새미 은총의 동산은 천주교 제주교구 제3대 교구장이었던 김창렬(金昌烈) 바오로 주교가
‘신자들의 공경과 심신을 고취시키는 방법이 무엇일까?’,
‘제주 신자들이 한 곳에 모여 기도할 수 있는 장소가 있다면 좋지 않을까?’하고 생각하던 중
이시돌 목장의 금악 본당 임피제(McGlinch) 신부와
지금의 장소가 이상적이라는 의견 일치를 보아 1991년 10월 28일에
축성식을 거행함으로써 ‘새미 은총의 동산’이 조성되었다.
'새미 은총의 동산'의 옛 이름은 '구 삼뫼소 은총의 동산'인데
'삼뫼소' 라는 단어의 출처가 명확하지 않고 역사적으로 불려진 사료에 의거하여
이름을 바로잡고 지역사회와의 융화를 위하여
'새미'라는 지명을 사용하여 변경을 하게 되었다.
'새미소'는 샘+이+소(沼:늪, 연못), 이를 한자로 천미악(泉味岳)이라 한다.
오름 정상부에 샘(새미*새미소)이 있음에 연유하여
샘 자체가 흐름으로 전이 되어진 경우이다.
5개의 봉우리가 샘을 중심으로 빙 돌아가며 이어져 있다.
새미(SAEMI)의 영문표기는 [Sanctus: 거룩한] [Anima:영혼] [Evangelium:복음]
[Mediator:중개자] [Imago Dei:하느님의 모상]의 머리 글자를 딴 것이다.
예술작품으로 재현된 그리스도의 일생을 통해
하느님의 거룩한 복음을 전하고자 조성된 공원으로
하느님과 인간의 영혼을 중재하는 성스러운 곳을 뜻한다.
즉 '새미 은총의 동산'은 주님의 은총과 순례객들의 기도가
마르지 않는 샘처럼 끊임없이 이어지는 동산이 되는 것을 말한다.
삼위일체 대성당
십자가의 길
임피제 맥그린치 신부 묘소
166 용수 성지
김대건 신부님 표착 기념관
1845년 8월 17일 중국 상하이 진자샹(金家巷)성당에서
페레올 주교 주례로 사제품을 받은 성 김대건 신부는
8월31일 조선으로 귀국하기 위해 라파엘호를 타고 상하이항을 출발했다.
길이25자(7.5m), 너비9자(2.7m), 깊이7자(2.1m)인 라파엘호에는 페레올주교,
다블리신부(안 안토니오신부), 김대건신부와 조선신자 11명이 승선했다.
조선신자 중에는 나중에 성인품에 오른 현석문(가롤로)과 최 형(베드로)도 있었다.
상하이 출발 다음날부터 풍랑을 만난 라파엘호는 망망대해에서 28일간 표류 끝에
9월28일(일요일) 제주 차귀도(옛날이름은 죽도)에 표착했다.
이곳에서 조선땅에서의 감격스런 첫미사를 봉헌한 일행은 라파엘호를 수리하고
물과 양식을 얻어 10월1일 제주를 떠나 10월12일 충청도 강경나바위에 도착했다.
167 황사평 성지
신축교안 때 희생된 천주교 신자들을 모신
1910년 신축교안으로 인해 관덕정에서 처형된 뒤,
별도천에 버려졌던 천주교 신자들의 유해가 안장(1904)된 곳.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1984)을 맞아
제주교구 기념 사업의 일환으로 황사평 묘역 성역화가 추진되어
무명 순교자들의 묘역이 정비되는 등 본격적인 묘역 공원화 사업이 진행되었다.
1993년 제주 선교 100주년 기념사업회가 황사평 묘역의 성역화를 재차 추진하여,
제주교안의 희생자 김 토마스와 라크루 신부의 복사
신재순(아우구스티노)의 묘를 순교자 묘역으로 이장하고,
이어서 초창기 제주지목구장으로 활동한 헨리(Henry, 1909~1976) 대주교를 비롯한
성골롬반회와 파리외방선교회 소속의 선교사,
제주출신의 저명한 성지로서의 면모가 한층 정비되었다.
168 황경한 묘
오늘은 짝꿍인 바울리나 생일입니다.
저는 생일과 축일이 같은 날이어서
1년에 한 번만 축하를 받지만,
아내는 생일과 축일 두 번 축하를 받습니다.
바울리나는 작년에 교우자매님들과 추자도를 방문하려고
숙소도 예약하고 배편도 미리 예약하여 돈도 지불했지만
연안여객선터미널까지 갔다가 기상의 변화로 실패한 적이 있습니다.
아내는 첫 번째 방문이고,
나는 산티아고 가기 전 제주 올래완주를 위해 추자도를 방문하고
이번이 두 번째 입니다.
추자도는 날씨가 좋지 않으면 배가 출항하지않아
운이 좋아야 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올래꾼들의 가장 난 코스가 18-1코스인 추자도라고 합니다.
거리도 길고 산을 넘나들기에 힘도 들지만,
날씨가 허락하지 않으면 갈 수 없기 때문에 한 번 만에
추자도를 정복하기가 어렵기 때문이지요.
오늘은 드물게 너무나 좋은 기상조건이었습니다.
하늘엔 구름 한 점 없고, 파도도 잔잔했습니다.
9시 30분 제주항을 출발하여 10시 40분 상추자도항에 도착했습니다.
음식점에서 이른 점심겸 생일식사를 하고
순환버스(1인 1,000원)를 타고 먼저 하추자도에 있는
모진이 해수욕장 정류소에서 내려
황경한 묘소까지 오르막길을 500미터쯤 올라갔습니다.
산티아고 가기 전 (2017년 4월) 올레길을 걸으며 예행연습 할 때,
추자도의 올레길을 걸었습니다.
올레길을 걷다보면 최경한의 묘소를 볼 수 있습니다.
제주도를 바라볼 수 있는 양지 바른 곳이었습니다.
마치 어머니 정난주 마리아를 그리며 눈물짓고 있는 듯 보였습니다.
2017년 방문했을 때는 황경한 묘만 외로이 있었지만
최근 성지로 새 단장하여 잘 조성되어 있었습니다.
기도한 후 제대와 정난주 마리아상 등을 둘러보았습니다.
잠깐 휴식하며 바다를 보면서 유배길에 정 마리아가
어린 아기를 바위위에 놓고 가는 모습을 상상해 보기도 하고,
성장한 황경한이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후
멀리 제주를 바라보면서 어머니를 그리워하며 눈물흘렸을
심정을 헤아려보기도 했습니다.
아래 사진들은 최근에 조성된 성지모습
황경한 묘소에서 눈물의 십자가(아기 경한이를 놓은 바위)까지
순례길로 조성되어 있었는데
가는 도중에 예초리와 눈물의 십자가로 가는 갈림길에서
짝꿍은 걷는 데 자신이 없다고 예초리 버스 정류소로 가서
나는 언덕을 올라 다시 계단(240여개)을 내려가서 있는
눈물의 십자가를 다녀왔습니다.
예초리에서 2시 30분 출발하는 버스를 타고 상추자로 와서
추자공소를 방문하여 순례도장을 찍고
성체조배한 후 여객터미널로 돌아왔습니다.
추자도의 특산물인 조기, 멸치젓갈, 완도 다시다, 김자반 등을
구매하고 오후 4시 30분 배로 제주에 5시 40분 도착했습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사위가 보내준 아이스크림 케익을
한림에 들러 찾아가지고 집에 와 마지막 축하를 했습니다.
저녁생각이 별로 없었지만 중국인들의 생일음식인 장수면을 대신하여
국수를 삶아 오래살라는 의미로 케익과 함께 먹었습니다.
미역국은 음식점에서 끓여주어 그것으로 대신했지요.
몸은 피곤했지만 의미있는 하루를 보낸 것 같아
바울리나와 나는 행복감을 느끼며 일찍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 2023년 6월 23일 목포성지 산정동 성당에서
성지순례 축복장 수여식이 있었다.
참석하고 싶었지만 여러사정으로 참석하지 못해
본당으로 전달된 주교님 축복장을 받았다.
아내 바울리나가 아주 기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