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틴어의 키비스(civis:시민)나 키빌리타스(civilitas:도시)에서 유래하였다. 문명이라는 용어는 실제에 있어 매우 다양한 뜻으로 쓰이나 문화와 대치(對置)되는 것으로 파악하는 입장과 문화의 특수한 한 형태로 파악하는 입장으로 크게 나누어 볼 수 있다. 전자는 독일철학이나 사회학에서 전통적으로 볼 수 있으며 인류의 정신적이고 가치적인 소산을 문화라고 하는 데 대하여 물질적 ·기술적 소산을 문명이라고 한다. 이 견해는 통속적인 용법으로 널리 보급되어 사용되고 있다.
후자의 견해는 제2차 세계대전 후 문화인류학의 보급에 따라 일반화되었다. 여기에 따르면 문화 중에서 도시적인 요소, 고도의 기술, 작업의 분화, 사회의 계층분화를 갖는 복합문화(문화의 복합체)를 큰 단위로서 파악한 총체를 문명이라고 한다. 전자의 입장 가운데 A.베버에 의하면 문명은 주체(主體)를 떠나 직선적으로 발전, 누적되어 무한하게 진보하는 기술적 수단의 총계(總計)이지만 문화는 주체와의 관련하에 일회에 그치는 역사적 개체이며 누적되는 것이 아니므로 진보라는 척도로써는 측정할 수 없다고 한다.
그 밖에 18세기 몽테스키외나 루소 등의 백과전서파는 문명을 야만(barbarism)과 대치시키지 않고 봉건제 ·군주제와 대치시켜 문명이란 말 속에 봉건사회에서 시민사회로의 진보라는 뜻과 계몽의 의미를 포함시켰다. 이러한 생각은 사회진화론의 바탕에서도 볼 수 있는데, 예를 들면 모건 등이 주장한 몽매(蒙昧:savagery) ·야만 ·문명(civilization)이라고 하는 단계적인 구분이다.
토인비는 고대에서 현대에 이르는 모든 세계문명을 포괄적으로 다룬 드문 역사가로서, 문명의 단위를 국가보다는 크고 세계보다는 작은 중간적인 범위에서 구하였다. 그는 서구문명 ·인도문명 ·극동문명 ·정교(正敎) 그리스도교 문명과 같은 현존하는 문명에서 고대문명까지 거슬러 올라가 21개의 문명을 들었고, 그 발생 ·성장 ·쇠퇴 ·해체과정을 논하였다. 이들 문명 중에서, 모체가 된 고대문명은 모문명(母文明)이라 부르며, 이들은 서로 독립해서 발생하였다고 하였다. 모문명은 구(舊)세계의 이집트 문명, 수메르 문명, 미노스 문명, 중앙 아메리카의 마야 문명, 남아메리카의 안데스 문명, 아시아의 중국 문명 등 6개이며, 여기에 더하여 고대 인도의 하라파 문명이 독립적으로 발생하였다고 보면 7개가 된다. 이 중에서 중국 문명은 중간에 이민족의 지배를 받으면서도 현재까지 4,000년 동안 계속 살아 있다. 그러나 모문명이 독립적으로 발생하였다고 하는 주장은 충분히 논증된 것은 아니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 된 문명의 발생지와 발생기에 대해서는, 정설이라고 단언할 수는 없지만 BC 4000년대 오리엔트로 보는 것이 통설이다. 각 문명의 기원을 보면, 이집트 문명은 BC 2800년경, 미노스 문명은 BC 2600년경, 하라파 문명은 BC 3000년기(紀)의 중간, 중국 문명은 BC 2000년 초, 신대륙의 문명은 BC 1000년대 전기(前期)로 보고 있다. 한때 세계의 고대문명이 단일문화로부터 전파되었다고 하는 설(예:이집트 기원설)도 있었으나 현재 이를 인정하는 사람은 없다. 문명의 기원을 큰 하천의 유역에 한정시키거나, 관개시설 또는 유목민에 의한 농경민 정복에서 구하는 등의 여러 설이 있으나 모두 부분적으로 해당할 뿐, 모든 고대문명에 해당하는 일반론으로서는 인정되지 않고 있다.
문명발생의 근본적인 요인을 생산력의 일정한 수준에서 구하는 이론은 일반론으로서는 인정할 수 있지만, 개개의 문명 사례(事例)에 대해 개별적 ·구체적 논증은 충분히 얻지 못하고 있다.
또 다른 문명 [文明, civilization] 설명
인류가 이룩한 물질적·사회조직적인 발전.
'미개'와 대응하는 진보된 인간생활의 총체를 이른다. 라틴어의 'civis'(시민)와 'civitas'(도시)에서 유래한 바와 같이 특별히 도시문화를 가리키는 경우가 많다. 19세기말에 '문화'를 최초로 정의한 타일러(1832~1917)는, '문명'과 '문화'를 동일시했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T. 홉스 등은 '문명'과 '사회'를 동일시하고 문명 이전을 무질서상태(자연상태)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자연상태라고 부를 만한 무질서한 세계는 미개사회까지 포함, 인간사회에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밝혀져 이 개념은 무너졌다. 고대의 여러 문명은 몇몇 지역에서 시기를 달리해 발생한 것으로 밝혀졌다.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에서는 BC 3500~3000년경, 인더스 강 유역에서는 BC 2500년경, 중국에서는 BC 1500년경에 각각 문명이 형성되었고 신대륙에서는 멕시코 계곡과 페루에서 기원 전후에 탄생했다. 신대륙의 문명은 구대륙의 문명과는 독립적으로 발생했다는 것도 밝혀졌다. 고대문명이 발생한 이들 지역을 통해 농경의 발전에 따른 인구증가, 부의 축적, 직업의 분화, 도시의 형성, 치수(治水), 토기·직물의 제작 등을 볼 수 있다.
문명과 도시
문명의 발전에 있어서 도시가 수행한 역할은 크다. V. G. 차일드는 도시가 문명의 기본적 요소임을 역설하고 신석기시대의 농경문화에서 문명에로의 추이를 '도시혁명'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도시는 문명을 표시할 뿐만 아니라 문명을 창출하는 것이라는 개념이 생겼다. 그러나 메소아메리카(Mesoamerica)의 저지대에 번창했던 올멕 문화(BC 800~300경)의 중심은 도시라기보다는 제사 중심지라고 해야 할 것이며 올멕 문화와 거의 같은 시기에 형성된 남아메리카의 차빈 문화에서도 도시의 발달은 미약하다. 그러므로 문명과 '도시성'(urbanism)을 동일시할 수는 없으나 매우 밀접한 관계에 있는 것은 사실이다.
문명의 형성에 따라 도시가 발전하면 자연이 주는 위협에서 해방되어 생활이 보다 쾌적해지지만, 다른 한편 자연의 파괴도 진전된다. 고대도시 중에는 인구 1만~2만에 이르는 곳도 있었다고 하지만, 후대로 내려와서 예를 들면 16세기 서유럽의 도시는 그렇게 대규모였던 것은 아니며 2,000~2만 정도의 인구였다. 17세기에 와서 인구가 겨우 10만 이상 되는 도시가 출현한다. 고대문명에서도 도시는 저장·관개(灌漑) 등으로 많은 자연재해를 피할 수 있었지만 도시생활은 신체적·정신적 건강에 부적당한 요소를 초래하게 되었다. 교역, 채광(採鑛), 군사활동, 성벽·도로·상수도·하수도의 건설, 신전(神殿) 등의 웅장한 건축 등을 통해 고대도시는 환경을 대규모로 파괴·변형하게 되고, 그 진행방향이 현대도시의 모습을 향해갔다. 고대 로마의 하수도는 공중변소에 직결되어 테베레 강을 오염시켰다. 도시화가 진전될수록 자연이 주는 위협에서 해방되었지만 환경파괴 역시 심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이것은 분명히 문명의 발전, 도시화에 내포된 심각한 딜레마였다.
이와 같은 문명화·도시화에 따른 자연파괴는 19세기에 와서는 이전과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심해졌다. 과학과 기술의 진보에 따른 기계화의 진전, 산업혁명 이후의 대량생산의 실현, 대공장의 건설로 환경파괴는 급속하게 진행되었기 때문이다. 석탄사용, 강철제조, 화학공장은 대기와 하천을 한층 더 오염시켰다. 이와 같이 문명 자체는 자연의 극복과정에서 발달했지만, 그 문명의 발달은 결국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는 자연의 파괴·변형을 촉진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모순은 고대도시에서도 이미 나타났었지만, 현대에 와서 극단적인 형태를 띠게 된 것이다(→ 공해).
현대의 기술문명
현대문명이라고 하면 무엇보다도 기술문명을 생각하게 된다. 이 경우의 문명개념에는 2가지가 합류되어 있다. 하나는 독일계의 문화사회학자, 특히 M. 베버(1868~1958)가 제시한 문화에 대한 문명개념으로서, 문명이란 무한히 진보한다고 생각되었던 기술적인 여러 수단의 총체를 의미한다. 또하나는 민족문화에 대한 세계문화화로서, 문화가 대개의 경우 민족·언어·전통과 결합되어 있어서 국경을 넘어가는 일이 없는 데 비해 문명은 민족과 국가를 초월해 보급되어가는 것을 가리킨다. 이처럼 국경을 넘어 퍼져가는 것을 M. 모스는 '문명현상'(fait de civilization)이라고 불렀다.
현대문명은 과학기술이 만들어낸 기계, 컴퓨터 시스템이 인간생활의 모든 영역에 침투하고 거기에 광범하고 조밀한 네트워크를 형성하며 '기술환경'이라는 새로운 인간환경을 조성함으로써 과거의 문명과는 구별된다. 이 기술환경은 공장과 기업에서의 과학적 관리법, 컨베이어 시스템에 의한 대량생산, 매스 미디어, 활발한 광고선전, 대량소비와 레저 등 '문명현상'의 집합이며 산업화된 제국 간에 국경을 넘어 나타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동서체제의 상위를 초월해 공통적이다. 그러므로 기술문명은 보편주의적이며, 세계를 일체화해가고 있다.
기술문명은 '문명현상'을 집적해감으로써 인류의 복지를 실현하기 위한 수단을 이미 만들어냈다. 그러나 베르그송 이래 많은 사상가들이 논하고 있는 바와 같이 현대문명은 인간의 신체를 인공적으로 확장해 나간 것이며 영혼이 결여된 존재인 것같이 보인다. 문명의 개념은 프랑스의 백과전서파와 볼테르(1694~1778) 등이 진보의 관념에 입각한 정신적·인간적 자각을 내포한 것으로 제기한 것이므로, 현대문명의 문제를 생각하는 경우, 기술적 수단의 총체로서의 문명과 국경을 넘는 '문명현상'에 대해 고찰되어야 할 것이다.
고대오리엔트문명 [古代-文明]
BC 3200년경부터 알렉산드로스(알렉산더) 대왕이 통일할 때까지 약 3,000년간 오리엔트 지방에 번영했던 세계 최고(最古)의 문명.
‘오리엔트’라는 말은 로마인이 태양이 솟아오르는 동방을 ‘오리엔스(Oriens)’라고 부른 데서 유래하며, 이집트와 서아시아 일대를 총칭한다. 이 지방의 중심지는 티그리스 ·유프라테스강의 유역인 메소포타미아와 나일강 유역인 이집트로서, 두 지방 모두 BC 3000년 전후에 국가가 성립되고 문명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문명의 중심이 지중해 연안으로 옮겨감에 따라서, 고대 오리엔트문명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사라져갔다. 18세기 후반부터 오리엔트 각지에 남아 있는 유적들이 서양인들의 주목을 받아, 그곳에서 발굴된 조각품이나 점토판문서(粘土板文書) 등에 대한 연구가 일어났다. 1822년 프랑스인 J.F.샹폴리옹은 이집트의 성각서체(聖刻書體:신성문자)를 해독하고, 1847년 영국인 H.C.롤린슨(1810∼95)은 설형문자(楔形文字)를 해독함으로써 고대 오리엔트에 관한 문헌연구가 본격화되었다. 19세기 중엽부터 유적의 발굴조사는, 수천 년 간 토사(土砂)에 파묻혀 있던 고대도시와 신전(神殿) ·궁전 ·분묘 등을 발굴하여 역사적 사실을 밝혀냈다. 이후 문헌학 ·고고학의 양면에 걸친 연구에 따라 아시리아학(學) ·이집트학을 중심으로 고대 오리엔트문명의 해명은 크게 진전되었다. 오늘날에는 고대 오리엔트문명을 제외하고 인류문화사를 논할 수 없게 되어 그 세계사적 의의는 매우 크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문명이 오리엔트 지방에서 일어난 원인은, 인류역사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자연의존적인 수렵과 채집경제로부터 맨 먼저 벗어나서 농경 ·목축이라는 생산경제로 전환한 데 있다. 그 결과, 생활에 여유가 생겨 분업(分業)이 생기고, 건축 ·도자기제조 ·기계 등의 각종 기술이 발달함으로써 이집트 ·시리아 ·팔레스타인 지방에서 메소포타미아에 걸친 ‘기름진 초승달 지대’가 고대 오리엔트문명의 모태가 되었다. 문명발생을 설명하는 요소로는 국가의 성립, 문자 사용, 야금술(冶金術)이나 기념건조물의 발달 등을 들 수 있다.
수메르 [Sumer]
바빌로니아 남부에 위치하며 세계 최고(最古)의 문명이 발상한 지역·민족, 또는 그 문명의 명칭.
지금의 이라크 지방에 해당한다. 수메르는 티그리스·유프라테스 두 강으로 형성된 지방으로 BC 5000년경부터 농경민이 정주하여 BC 3000년경에는 오리엔트 세계 최고의 문명을 창조하였다. 이들은 두 강의 중·상류 지역 또는 엘람지방에서 이주하여 온 것으로 보인다. 이 지방에는 소택지(沼澤地)가 많고 두 강에서 연유한 홍수나 페르시아만(灣)의 높은 조수로 인하여 일찍부터 간척·배수·관개·축제(築堤) 등의 토목공사가 필요하여 촌락 간 협동작업이 행해졌고 이를 통해 유력한 씨족은 강력한 발언권을 행사하였다.
이들의 문명은 시기에 따라 알 우바이드기(期), 우루크기, 젬데트나스르기의 3기로 구분된다.
① 우바이드기는 BC 3300∼BC 3100년경에 해당하는 문명으로 채색토기를 수반한 펴묻기[伸葬]와 니그로풍의 여자 토우(土偶)가 있었으며, 기단 위에 만들어진 신전을 중심으로 한 작은 규모의 도시도 나타났다. 그러나 이것은 비(非)수메르적인 서아시아 고(古)민족의 문명이라고 하는 설도 있다. ② 우루크기는 BC 3100~BC 2900년경의 문명으로 금속의 사용이나 수메르 문명의 특징인 신전(지구라트)의 건축이 시작되었고 원통인장(圓筒印章)도 발명되었다. 또 여러 가지 기술이 발달하여 도시국가가 성립되고, 고형(古型)의 설형문자가 사용되는 등 수메르문명이 형성되었다. ③ 젬데트나스르기는 BC 2900∼BC 2600년경으로 전기(前期)문명이 발전하여 역사시대로 이행하는 시기이다.
그러나 수메르인의 민족이나 언어의 귀속, 원주지에 관해서는 분명하지 않은 점이 많다. 이 무렵의 정치는 촌락 공동체시대의 평등한 원리가 남아 있어 일반 시민의 성년남자로 구성되는 민회(民會)와 씨족장들의 장로회가 민주적으로 운영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전쟁과 같은 도시의 사활에 직결되는 상황에서는 일시적으로 도시의 전권이 위임되는 왕이 선출되었다. 초기 왕조시대에 들어서면 우루크·우르·키시·니푸르 등의 유력한 도시국가가 패권을 다투었다. 이 중 니푸르의 엔릴신(神)은 각 도시의 왕들이 선망하여 수메르의 종교상의 중심적인 신으로 되었다. 초기 왕조시대에는 500년 간 각 도시국가가 병립·항쟁하였고, 각 도시는 신의 소유라고 생각되어 성벽으로 둘러싸인 신전을 중심으로 한 시역(市域)과 주위의 농경지로 이루어져 있었다. 도시에서는 정치·경제·군사·생활 등이 모두 신전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므로 신전공동체 또는 신전국가라고 할 정도였다.
도시간의 항쟁이 자주 있자 점차 왕권이 신장되는 한편 세습화되었다. 또한 도시신(都市神)을 제사하는 신전은 방대한 수입이 있었으므로 사제계급은 세속적으로도 큰 권력을 가지게 되었다. 도시국가는 수리권(水利權)이나 농경지·교역로의 확보를 둘러싼 인접 도시와의 항쟁과 내부의 왕과 사제계급의 대립으로 약체화되었다. 초기 왕조시대 말기에는 라가시왕 우르카기나의 사회개혁이 있었으나 실패하여 움마의 왕 루갈자기시에게 통합되었다. 그러나 움마도 BC 2300년경에 셈계(系)인 아카드의 사르곤왕에게 멸망되어 수메르의 도시국가시대는 끝났다. 180년 간의 사르곤왕조 후 수메르는 한때 다시 번영하여 우르 제3왕조를 일으켰으나 5대만에 동방의 엘람에게 멸망됨으로써 수메르는 셈족에게 동화되고, 이후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졌다.
그러나 수메르의 문화는 세계 최고의 문명으로서 오리엔트 역사상 많은 공적을 남겼다. 그들은 그림문자[繪文字]로부터 독특한 설형문자를 발명하여 고대 오리엔트에서 널리 사용하였다. 또한 12진법과 태음력을 사용하였고 수메르법이라는 법전도 만들었다. 우르 제3왕조시대의 《우르 남무 법전》이나 《슐기 법전》은 단편적이지만 오늘날까지 남아 있으며 문학·신화·종교에 관한 책도 전해진다. 노아의 방주의 원형이라 할 수 있는 홍수전설을 담고 있는 《길가메시서사시》도 잘 알려져 있다. 수메르는 자신들의 역사기록은 남기지 못하였으나 《왕명표(王名表)》에는 많은 왕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우르 제1왕조 이전은 전설적인 부분이 많다. 건축·미술·공예에도 뛰어나 신전의 기단에서 발전하였다고 생각되는 지구라트[聖塔]는 평면의 직사각형 기단을 계단상으로 쌓아 올린 바빌로니아 특유의 것으로 바벨탑의 원형이 되었다.
우르 및 에리두·우루크·라가시·키시·납푸르·움마·알 우바이드 등의 발굴은 고도의 도시생활의 자취를 보여주고 있는데, 특히 우르의 왕묘에서 발견된 많은 유품은 이들의 높은 기술적 수준과 예술적 재능을 나타내고 있다. 두리새김[丸彫]으로 된 조각으로 우루크의 《여성 두상(頭像)》, 텔 아스마르·마리에서 발견된 《사제상(司祭像)》 《예배자상》이 있고, 부조에는 《와르카의 큰 잔》 《독수리의 비(碑)》가 대표적이다. 수메르에서는 점토 이외의 원료가 산출되지 않아 석재나 광석·귀금속은 모두 무역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일찍부터 원격지무역이 행해져 동쪽은 인더스 유역, 서쪽은 아나톨리아·시리아·이집트까지 미쳤으며, 그 무역을 통하여 수메르문명은 오리엔트 각지로 전파되었다.
미노스 [Minos]
그리스신화에 나오는 크레타의 왕.
제우스와 에우로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며, 라다만티스와 사르페돈의 형제이다. 에우로페는 나중에 크레타섬을 다스리던 아스테리오스의 아내가 되어 3형제는 아스테리오스의 의붓아들이 되었다. 아스테리오스는 에우로페와의 사이에서 아들을 얻지 못했으므로, 미노스가 라다만티스와 사르페돈을 물리치고 크레타의 왕이 되었다. 왕이 된 뒤 태양신 헬리오스의 딸 파시파에와 결혼하여 글라우코스와 안드로게오스 등의 아들과 아리아드네와 파이드라 등의 딸을 낳았다.
왕위 계승을 다툴 때 포세이돈은 미노스에게 신들에 대한 제물용으로 아름다운 황소를 주었는데, 그는 이 황소가 마음에 들어 신들에게 바치지 않았다. 노한 포세이돈은 파시파에로 하여금 황소를 사랑하게 하여 머리는 소이고 몸은 사람인 괴물 미노타우로스가 태어났다. 이에 미노스는 명장(名匠) 다이달로스에게 영원히 빠져 나올 수 없는 미궁을 짓게 하고 미노타우로스를 그 안에 가두었다.
한편 안드로게오스가 아테네에서 사나운 황소의 뿔에 받혀 죽자 아들의 죽음에 노한 미노스는 기도를 하여 아테네에 전염병이 돌게 하였고 이로 인해 아테네에서는 소년 소녀를 미노타우로스의 제물로 바쳐야만 했다. 미노타우로스는 제물로 거짓 꾸민 아테네의 영웅 테세우스에게 처단되었는데, 이 때 미노스의 딸 아리아드네가 미궁에서 빠져 나오는 방법을 알려 주었다.
미노스는 다이달로스가 아리아드네에게 미궁에서 탈출하는 방법을 일러 준 사실을 알고(또는 파시파에가 황소와 정을 통하는 것을 내버려 둔 사실을 알고) 다이달로스와 이카로스 부자를 미궁에 가두었다. 다이달로스는 밀랍으로 붙인 날개를 달고 도망쳤고, 미노스는 그를 쫓아 코칼로스가 다스리던 시칠리아섬까지 갔다. 그곳에서 코칼로스의 권유로 목욕을 하게 되었는데, 다이달로스가 설계한 파이프를 통하여 욕조에 뜨거운 물이 차서 데어 죽었다. 죽은 뒤에 형제인 라다만티스와 함께 저승의 심판관이 되었다고 한다.
미노스는 제우스의 총애를 받아 그로부터 통치술을 배웠으며, 바다의 패자(覇者)로서 그리스의 여러 곳을 다스리면서 공정한 통치자이자 뛰어난 입법자로 이름을 떨쳤다고 한다. 에게문명의 또 다른 이름인 미노아문명은 미노스라는 이름에서 비롯된 것이다.
마야 [Maya]
고대 멕시코 및 과테말라를 중심으로 번성한 인디오 문명 및 이를 이룩한 민족의 명칭.
마야문화가 번성한 지방은 3개 지역으로 구분되나, 그 중심을 이룬 것은 과테말라 북부의 페텐지방으로부터, 서쪽은 멕시코의 타바스코, 동쪽은 벨리즈지방에 이르는 중앙지역이다. 여기에 유카탄반도(半島)의 북부지방 및 과테말라고지(高地), 차파스지방으로부터 태평양 연안에 이르는 남부지방 등 2개 지역이 포함된다.
언어연대학적 연구에 따르면 마야어족의 조상은 북아메리카 인디언의 작은 부족으로서, 이들이 남진(南進)해서 BC 3000년대 중반에 서부 과테말라 고지에 정착한 것이라 한다. 그 후 1000년 사이에 이 부족이 두 어족으로 갈라져 하나는 북서로 진출하여 멕시코만(灣) 연안의 아스테크어족(語族)을 형성하였고, 다른 하나는 북쪽으로 나아가 페텐저지(低地)에서 유카탄지방에 이르러 유카테크어족이 되었다. 다시 BC 1000년대 전반에 마야 어족의 모체(母體)로부터 촐 및 촌탈 등 두 어족이 갈라져 나와서 중앙지방의 저지에 들어가 북부의 유카테크어족과 접촉하였다.
E.톰프슨에 따르면 촐어족이 마야 고전문화를 창조한 것이라 한다. 초기 마야에 관한 고고학적 자료는 극히 드물어 과테말라 태평양연안의 오코스(BC 1500) 및 콰도로스(BC 1000) 문화나 과테말라 고지카미날퓨 유적(遺蹟)의 알레파로기(期) 및 라스 차루카스기(BC 5,6세기경)에서도 이들 문화 후에 형성되는 고전(古典) 마야적인 특징은 볼 수 없다. 그러나 초기 마야의 기원에는 멕시코의 올멕 및 이자파문화의 영향이 컸다는 학설이 거의 굳어졌다. 가장 오래 된 마야적 문화는 페텐지방 서부의 시에문화와 북부의 마몬문화인데, 마몬문화의 연대는 BC 5세기로 추정되어 카미날퓨의 라스 차루카스기(期)와 비슷하다.
시에문화는 고전 마야유적인 알탈드 사크리피시오스와 세이발의 하층에서, 또한 마몬문화는 와샤크툰과 티칼의 하층에서 볼 수 있다. 이 문화에 이어 카미날퓨의 밀라프로레스기(期)와 중부 저지(低地) 마야지대의 차카넬문화에 이르러 마야문화의 기본양식이 확립되었으며, 밀라프로레스기에는 그 뒤에 발달되는 신성문자(神聖文字)의 원형(原型)이 나타났다.
안데스문명 [Andean civilization]
16세기, 에스파냐가 아메리카 대륙을 정복하기 이전 남아메리카의 안데스 지대에 번영한 문명.
이 문명은 이미 BC 1000년경에 싹트기 시작하였으며 메소아메리카문명과 함께 아메리카 대륙에서의 고대문명의 2대 중심을 이룬다. 안데스 지대에 살았던 최고(最古)의 인류는 약 1만 년 전으로 추정되며 이들은 채집(採集)과 수렵생활을 하였다. 안데스 문명은 고고학상으로 형성기(形成期:BC 2500∼BC 300), 고전기(古典期:BC 300∼AD 1000), 후고전기(後古典期:1000∼1532)의 3기로 나누어진다.
황하문명 [黃河文明]
중국 황허강 중류, 하류 지역에서 발생한 문명.
문명을 문화의 가치체계를 떠받치는 물질적·기술적 기초라고 정의할 경우 황허 문명의 연대 범위는 농경이 시작된 신석기시대부터 청동기가 나타난 은(殷)나라를 거쳐, 철기가 거의 완전히 보급된 전한시대(前漢時代)까지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종래는 문명을 미개의 상대적인 말로 이해하고, 문자의 발명과 도시의 성립 등에 중점을 두어, 황허 문명의 연대도 청동기시대 이후로 보는 것이 보통이었다.
메소포타미아문명 [Mesopotamian civilization]
비옥한 반월지대(半月地帶)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티그리스강 ·유프라테스강 유역을 중심으로 번영한 고대문명.
나일강 유역에서 번영한 이집트 문명, 인더스강 유역의 인더스 문명, 황허강[黃河] 유역의 황허 문명 등과 더불어 세계 4대 문명의 발상지의 하나로 바빌로니아 ·아시리아 문명을 가리킨다. 그러나 넓게는 서남아시아 전체의 고대문명을 지칭하는 경우도 있다. 셈족에 속하는 아카드인(人) ·아무르인 ·아시리아인 ·칼데아인 등과 인도-유럽 인종에 속하는 히타이트인 ·카사이트인 ·메디아인 ·페르시아인 및 수메르인 ·엘람인 등이 활약하였으며, 공통의 문자로서 설형문자가 사용되었다. 메소포타미아 문명은 18세기 후반에 탐험가와 여행가들이 이 지방에 대하여 보고를 하게 되면서 관심을 끌게 되었는데, 그 중에는 조각품의 일부 또는 명문(銘文)이 들어 있는 벽돌을 가지고 돌아온 사람도 있었다. 또, 구약성서에 실린 유명한 ‘바벨탑’이나 헤로도토스의 《역사(歷史)》 등 고전시대의 작품을 통하여 메소포타미아에 대한 관심이 점차 높아졌다. 그런데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해명은 아시리아학(學)의 발달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19세기로 접어들면서 설형문자의 해독과 유적(遺蹟)의 고고학적 발굴을 병행해서 진행하였는데, 독일의 G.F.그로테펜트(1775∼1853)와 영국의 H.C.롤린슨(1810∼1895) 등의 노력으로 페르시아어(語)가 먼저 해독되었다. 그 중 롤린슨에 의한 베히스툰의 암석 절벽면에 3개국어로 씌어진 다리우스 대왕의 전승기념비문(戰勝記念碑文)에 대한 해독(1847)은 특히 유명하다. 한편, 1842년 프랑스인 P.E.보타가 아시리아의 수도였던 니네베를 발굴하여 약 2만의 책자로 된 고문서를 발견함으로써 아시리아학의 탄생을 보게 하였다. 설형문자는 그 후 엘람어 ·바빌로니아어 ·수메르어 등이 연이어 해독되고, 한편 고고학적 발굴도 A.H.레야드, V.프라스, H.러섬 등에 의하여 니네베 ·코르사바드 ·아슈르 ·바빌론 ·님루드 등 여러 지역에서 진행되어, 출토품은 각각 대영박물관과 프랑스의 루브르미술관으로 옮겨졌다.
19세기 말에 독일과 프랑스의 조사대도 참가하게 되었고 조사의 대상지도 바빌로니아로 옮겨져 제1차 세계대전 때까지는 바빌론 ·우루크 ·라가슈 ·니푸르 등지가 발굴 조사되었다. 1920∼1930년대에는 우르 ·알우바이드 ·키슈 ·우루크와디얄라강 유역의 카파제 ·텔아스마르 및 유프라테스강 중류의 마리 등이 조사되었다. 또한 수메르 이전의 문화 해명을 위하여 아시리아 지방에 대한 관심을 재차 가지게 되어, 텔할라프 ·테베가우라 ·니네베 등이 발굴되었다. 이라크 본국에서도 1940년대 이후 에리두 ·하수나 ·텔 우카이르 등을 발굴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후는 우루크 ·니무르 ·님루드 등의 계속적인 발굴조사와 더불어 하틀러 등의 새로운 유적 발굴이 진행되고 있다. BC 7000∼BC 6000년경, 북(北)이라크의 자그로스 산록지대에 정주한 가장 오래 된 농경민은 동시에 목축도 행하여 자르모 ·하수나 문화를 남겼다. 그들은 그 후 발달한 촌락문화, 즉 하라프문화를 아시리아 각지에 전파시켰다. 아름다운 채문토기(彩文土器)가 만들어졌고, 금속인 구리의 사용도 가장 오래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 무렵 남부의 수메르지방에서도 최초의 정주생활을 하여 에리두 문화를 이룩하였다.
다음의 우바이드 문화는 BC 4000년 전반기에 해당되며, 촌락은 점차 팽창하고 발전하였다. 구리의 야금술이 발달하여, 분포 범위도 수메르에서 지중해 연안까지 확대되었다. 우루크 문화는 수메르 문명의 성립기로서 파악된다. BC 3200년경에는 그림문자가 사용되었으며, 도시국가가 탄생하였다. 젬데트 나수르 문화를 거쳐 BC 2800년경부터 약 450년 간은 도시국가가 병립(?立) 항쟁한 초기 왕조시대가 계속되었다. 도시의 중심은 신전(神殿)이었으며, 이 관리를 담당한 신관(神官)의 지위는 높아 정치 ·경제 ·군사 ·제례 등의 실권을 장악하였다. 도시국가 중에서도 우르 ·라가슈 ·우루크 ·키슈 ·니푸르 등이 유력하였으며, 우르의 왕묘(王墓)나 각 도시의 발굴 결과에서 그 문화수준이 매우 높았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은 건축 ·미술 ·공예 등의 분야 외에도 설형문자의 발명, 60진법 ·태양력의 채용 등 생활 전반에 걸쳐 있었다. 또 교역을 통하여 수메르의 제품이 동방(東方)의 각지에 전해졌으며, 이 문명이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원류가 되었다. 도시 국가는 말기가 되면서 라가슈 ·움마 ·우루크 등이 서로 패권을 잡으려고 항쟁을 하다가 BC 2350년경 셈계(系) 아카드인(人)의 사르곤 1세에 의해 통일되었다. 그는 강력한 군대로 페르시아만에서 지중해에 이르는 지역을 지배하여 중앙집권제를 확립하고 아카드제국을 수립하였다. 아카드인은 설형문자를 채용하여 제국 내에 보급시키는 등 수메르 문명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이렇게 180년 동안 계속된 아카드 시대에 수메르인과 아카드인 두 종족이 융합함으로써 수메르 문명은 점차 셈화(化)하여 바빌로니아 문명의 기초를 이루었다.
아카드 시대 말기에는 혼란상태가 계속되었으며, 이어 구티인의 왕조가 100여 년 계속하게 된다. 수메르인은 BC 2100년경 우르 제3왕조 때에 번영을 회복하였으나 엘람인의 침입에 의해 5대 109년 만에 멸망하였다. 그 후 이신 ·라르사두 왕조에, 아무르인에 의해 건립된 바빌론 제1왕조가 끼여서 한동안 3왕조의 정립시대(鼎立時代)가 계속되었다. 이 중 바빌론 제1왕조 제6대 왕인 함무라비왕은 이신 ·라르사 ·마리 등을 정복하고, 엘람에서 시리아에 이르는 대제국을 건설하였다. 이로 인해 셈계 종족에 의한 바빌로니아 세계가 성립하였고, 바빌론은 오리엔트의 중심도시로서 번영하였다. 함무라비왕의 사적(事蹟) 중 법전(함무라비법전)의 제정과 달력 ·도량형의 통일, 아카드어의 보급 등은 매우 중요한 업적이다. 이 때부터 아카드어는 오리엔트 세계의 공통어로서 널리 사용되었다.
이어 BC 2000년대 전반(前半)에는 인도-유럽 어족을 중심으로 한 민족이동이 오리엔트 세계 전역에서 일어나, 메소포타미아에서는 산 속의 민족이라 불리던 히타이트 ·푸루리 ·카사이트인 등의 침입이 잦았다. 그 중 BC 1530년경에 히타이트인의 침입으로 바빌론 제1왕조는 멸망하였으며 그 후 약 1000년 동안 메소포타미아에는 이민족이 꼬리를 물고 침입하여 분립 ·항쟁의 시대가 계속되었다. 아슈르시(市)를 중심으로 BC 2000년경에 성립한 아시리아는 철제의 무기를 가진 강력한 군사적 국가로 발전하여, BC 15∼BC 14세기에는 이집트와의 접경까지 정복하고, BC 12세기에는 티글라트 필레세르 1세가 히타이트의 쇠퇴를 틈타 지중해안에서 소아시아까지 판도를 크게 넓혔다.
BC 8세기가 되자 사르곤 2세(재위 BC 722∼BC 705) ·아슈르바니팔(재위 BC 668∼BC 628) 등 과감하고 용맹한 왕들에 의해 번영의 최성기를 맞이하였으며, 오리엔트의 일체화를 꾀하였다. 광대한 영토는 강력한 군대와 관료집단, 정비된 역전제도(驛傳制度) 등에 의해 통치되었다. 문화면에서도 부조(浮彫)와 도시계획에 뛰어났고, 또한 미술은 사실적(寫實的) 경향을 띠었다. 아슈르바니팔왕의 니네베 왕궁 부속의 도서관에는 오늘날까지도 소중한 점토서판(粘土書板)이 다수 보존되어 있다. BC 612년 아시리아는 메디아에게 멸망되었으나, 칼데아의 나보폴라사르(재위 BC 625∼BC 605)가 재차 바빌론을 수도로 칼데아 제국, 즉 신(新)바빌로니아 제국을 건설하였다.
다음 왕인 네부카드네자르 2세(재위 BC 605∼BC 562)는 이집트군을 아시아로부터 추방하고 시리아 ·팔레스티나 지방까지도 지배하였다. 이스라엘 민족의 ‘바빌론 포수(捕囚)’는 이 때 있었던 것이다. 그는 바빌론을 정비하여 지구라트를 재건하였는데, ‘바벨탑’은 이를 가리키는 것이다. 그러나 칼데아의 번영은 오래 계속되지 못하고 BC 538년 신흥세력인 페르시아에 멸망되었다. 이로써 2500년이라는 장기간 서남아시아의 중심이었던 메소포타미아의 영광은 끝나고, 문화의 중심은 이란고원으로 옮겨가게 되었다. 메소포타미아 문명은 폐쇄적인 이집트 문명과는 매우 대조적이었다. 지리적 환경으로 보아 티그리스 ·유프라테스 두 강 유역은 항상 이민족의 침입이 잦았고, 국가의 흥망과 민족의 교체가 극심하였기 때문에 이 지역에 전개된 문화는 개방적 ·능동적이었다. 메소포타미아 문명은 주위에의 문화적 파급과 후세에의 영향을 고려해 볼 때 세계사적 의의가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