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양 대티골 치유의 숲길
봉화에서 국도를 따라 20km를 넘게 들어가야 영양에 도착한다.
영양의 일월산 자락에 자리잡은 대티골은 지금으로부터 약 300년 전
윗대티에 충주 지씨, 아랫대티에 고성 이씨가 처음 이주하여 살기 시작했다고 한다.
대티골 치유의 숲에는 대표적인 오지인 경북 봉화 영양 청송과 강원도 영월을 잇는
200km의 도보길인 ‘외씨버선길’의 일부가 포함되었는데 외씨버선길은
영양 출신의 시인 조지훈 씨의 ‘승무’에서 이름을 따왔다.
대티골의 진정한 숲길은
윗대티 부근의 일원산 숲속으로 나있는 마을 숲길들이다 댓골길, 옛마을길, 칠밭길들이 그 숲길인데
마을 사람들이 다듬어서 치유의 숲으로 가꾸고 있다.
대티골의 숲길의 시작은 아랫대티의 자생화공원에서부터 시작되는데
이 공원 안에는 일제시대 때 이곳에서 광물이 발견되면서
일월산과 봉화의 장군봉 등지에서 캐낸 광물을
이곳으로 가져와 광물을 부수고 약품 처리를 하여 제련을 하던 제련소가 있다.
숲길은 마을을 관통하는 반변천을 따라 물길을 거슬러 올라가다가
김정수 동장댁에서 우측 옛국도길로 접어든다.
옛국도길은 원래 영양군 일월면과 봉화군 재산면을 잇는 일제가 만든 31번 국도였다.
일월산에서 캐낸 광물을 봉화 장군광업소로 실어가기 위해서이다.
해방 후에는 일월산의 우량목들을 베어내 옮기는 임도로 사용됐다.
수탈의 길이었던 이 옛국도길은 우측으로 난 잘 포장된 새로운 31번 국도가 생기면서
사람의 발길은 끊어졌고 길은 오랫동안 방치되어 있었다.
금강송이 즐비한 옛국도길 중간에 서있는 ‘영양 28km’ 등의 빛바랜 이정표가
수탈과 훼손의 아픈 역사를 증언한다.
옛국도길이 다시 살아나기 시작한 것은 5-6년 전 부터다.
대티골 사람들이 막히거나 무너진 숲길을 보수하고
정비해 생태 치유의 길로 가꾸면서이다.
대티골 숲길은 칠밭목에서 외씨버선길과 방향을 달리한다
칠밭목에서 시작되는 대티골 숲길은 지금까지 걸어온 옛국도길과는 사뭇 모양새가 다르다.
그 이름들은 숲길을 만들기 위해 억지로 지어낸 이름이 아닌 듯 싶다.
오래전부터 마을사람들이 불렀던 순수 자연을 닮은 이름들이다.
텃골, 깃대배기, 깨밭골, 말머리등, 샘물내기, 왕바우골, 그루목, 쿵쿵목 등
숲길을 걸으며 만나는 이정표도 정겹기 그지없다.
숲길은 이름과 닮아서인지 예전 화전민들이 살았던 흔적이 지금도 역력히 남아있다.
낙동강의 상류 지류인 반변천이 이곳에서 발원한다.
동학 2대 교주 해월 최시형이 이곳에서 은신하며 수도했다고도 하며,
일월산은 이곳 사람들에 의해 영산이라고 불린다.
높이 1,219m의 일월산 자락에 몸을 숨기고
살아오는 민초들의 삶은 질곡과 애환으로 얼룩져 있다.
또한 일월산의 산나물은 특히 맛과 향기가 뛰어나서 5월 중순이 오면
온 마을의 잔치격인 산나물축제가 대티골 자생화공원에서 열린다.
윗 대티골 마을을 지나며...
닭실마을과 청암정
경상북도 봉화군 봉화읍 유곡리에 위치한 전통마을이다.
조선 중기의 학자였던 충재 권벌(1478-1548)이 이곳에 정착한 후
마을이 번성하면서 안동권씨 후손들의 집성촌이 되었다.
조선시대 실학자 이중환이《택리지》에서 ‘깊은 두메로, 병란과 세상을 피해서
살 만한 곳’으로 묘사할 만큼 외부와 떨어져 있다.
마을 은 북고남저(北高南抵)의 지형을 보이며, 마을 앞으로는 내성천 계곡이 흐른다.
그 주위로는 붉은 껍질의 소나무인 춘양목이 빽빽하게 들어서 있다.
수탉과 암탉이 서로 마주보고
사랑을 나누며 알을 품고 있다는 금계포란(金鷄抱卵)의 형상을 하고 있다고 보았다.
예로부터 경주의 양동마을, 풍산 하회마을, 안동 내앞마을과 함께
삼남(충남,전남,경남)지방의 4대 길지로 손꼽히던 장소라 전해진다.
마을 이름인 닭실은 ‘닭 모양의 마을’이라는 뜻의 유곡(酉谷)을 이르는 우리말로,
마을 뒷산의 형태가 닭이 날개를 치며 우는 모습과 같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1526년에 권벌이 본가 옆에 지은 청암정이 유명하다
정자가 세워진 곳의 바위 모양이 거북이와 비슷하여 구암정으로도 불렸다.
마을 특산품으로 한과가 유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