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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운 지옥
홍 성 원
화창한 봄날 오후다.
H는 그러나 추위를 많이 타서 결혼 때 맞춘 검정 코트를 걸치고 있다. 그는 지금 차를 기다리고 있다. 그가 차를 기다리는 장소는 이대 입구, 즉 이대에서 신촌 큰길로 쭉 나와서 바른편으로 약간 내려가면 육교가 있고 그것을 건너 바른쪽 계단으로 내려가면 먼저 급행버스 정류장이 있고 그 아래쪽에 일반버스 정류장이 있는데 그는 바로 이 두 정류장의 중간쯤에 서 있는 것이다. 그곳에는 언제나 여대생들이 많이 서 있었다. 그녀들은 멀리서 보면 모두 예뻐 보이지만 가까이 가 보면 모두 시원찮은 얼굴들이고 또 차를 타고 그곳을 떠나면 그녀들은 다시 예쁘게 느껴졌다.
H는 코트 포켓에 두 손을 찌르고 씩씩하게 달려오는 버스들을 쳐다본다. 그는 일정한 직업이 없기 때문에 외출을 잘 하지 않았고, 외출을 잘 하지 않아서 신촌으로 이사 온 지가 일 년이 다 돼가는데도 늘 이 정류장에 멎는 버스들이 어느 코스, 즉 동대문이 종점이라고 써 붙인 버스라면 그것이 아현동·서대문·광화문을 거쳐 종로로 해서 가는지, 혹은 아현동 슈퍼마켓·서울역·남대문·미도파 화신으로 해서 동대문으로 가는지 항상 버스 차장들에게 묻지 않으면 어리둥절했다. 그는 문득 서울시 당국이 괘씸하게 느껴졌다. 언젠가 그는 무교동에 버스 정류장이 있는 것을 알고 버스가 광화문 정류장에 멎었을 때 그곳을 그냥 지나쳐 무교동에서 내리리라고 생각했다. 한데 버스는 전번 외출 때까지 분명히 있었던 무교동 정류장을 그냥 지나 그를 종로에 있는 북센터 근처의 정류장까지 실어갔다. 그는 차장에게 따졌다. 그러나 차장이 화를 낼까봐 퍽 부드럽게 오빠처럼 물어보았다.
“어이, 언제부터 무교동 정류장이 없어졌지?”
“닷새 전이에요.”
그럴 테지, 닷새 전이겠지, 닷새 전이니까 내가 모를밖에…… 그러나 그는 그 후로부터 한 달쯤 후에 다시 버스를 타고 이번에는 무교동에 버스 정류장이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미리 광화문 정류장에서 내렸으나, 웬걸 광화문 지하도를 거쳐 연다방 쪽으로 가다 보니 어느새 다시 무교동에 버스 정류장이 새로 생겨서, 그는 화가 나서 서울시 당국과 교통부 당국과 여당 등을 미워하다가 그것이 일정한 사람이 아니고 여러 명이 뭉친 집단임을 깨닫고 미워할 수 있는 한 명의 사람을 찾던 중에 결국 아무것도 모르고 있을, 대한민국에서는 제일 높아서 시떡하면 칭찬도 듣고 욕도 잘 듣는 그 양반을 잠깐 동안 미워했었다. 그러나 그것은 소용없는 일이었다. 그 양반은 그런 일까지는 모르고 있을 것이었다. 그는 아마 오 원짜리 동전만 꿀꺽 따먹는 고장 난 공중전화라든가, 청소차가 한 번도 와본 일이 없어서 매 호구마다 시멘트 쓰레기통을 사놓고 개인적으로 쓰레기 치우는 값을 한 달에 백오십 원씩 물고 있음에도 가을 김장철에는 동회에다 별도로 오백 원씩의 오물 수거료를 꼬박꼬박 지불하는 억울한 시민들의 사정이라든가, 겨우내 물 한 방울 얻어먹지 못하고 수도료를 기본요금이라고 해서 한 달에 백오십 원씩 꼬박꼬박 지불해야 하는 높은 지대에 사는 주민들의 분통 터질 노릇들 따위들은 모르는 것이었다. 알 리가 없었다.
차가 왔다. H는 본능적으로 차 옆구리에 써 붙인 행선지를 읽어보았다. 그러나 읽어봤자 동대문·남대문·서대문 따위는 알 수 있었으나 양쪽에 붙은 종점들, 가령 사당동·남가좌동·양재동 따위는 알 수가 없었다. 그는 서울에서 이십 년째 살았지만 외출을 할 때마다 자기가 새로운 촌놈이 된 듯한 기분이었다. 서울은 매시간 끊임없이 변하고 있었다. 길이 뚫리고, 육교가 놓이고, 고가도로가 뻗고, 아파트가 들어섰다. 술값이 올랐고, 연탄값이 올랐고, 석유값도 올랐지만, 아무것도 내리지는 않았다. H는 서울시가 너무 빨리 변해서 자기가 방금 비행기 편으로 울릉도에서 날아온 듯한 기분이었다. 어제까지도 청계천으로 가던 버스가 청계천5가에 공사가 시작되었다고 갑자기 노선을 바꾸어 을지로 쪽에 손님들을 부려놓았다. 열흘 전까지도 한 말에 삼백 원 하던 석유값이 열흘 후에 가보니까 삼백오십 원으로 되어 있었다. 그는 요즘 이 나라가 잘살아보겠다고 아우성치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아우성에 대해서는 아무 불평이나 불만 따위를 품지 않았다. 요컨대 그가 불만을 품는 것은 왜 그가 잘 살게 된 때에 태어나지 못하고 잘살아보려고 아우성을 치는 이런 고약한 시 대에 태어났는가 하는 것이었다.
“어이 이 차 어디로 가나? 서대문 가나? 광화문도 가나?”
“네 가요, 광화문도 가요!”
H는 버스를 탔다. 버스 안에는 좌석들이 대개 찼고 운전수 뒤쪽의 높은 좌석만이 비어 있었다. H는 그곳에 앉았다. 차가 움직였다. 갑자기 철판을 씌워놓은 엔진 덮개 사이로 눈알을 뽑을 듯한 매운 연기가 피어올랐다. 그는 왜 이 좌석만이 비어 있는가 그제야 알았다. 그는 차장을 돌아보았다. 차장은 마침 어느 손님으로부터 오백 원짜리 큰 돈을 받아 쥔 채 그것이 못마땅해서 손님에게 눈을 흘기고 있는 중이었다.
“잔돈 없으세요?”
차장이 손님에게 말했다.
“없어.”
“어디서 내리시죠?”
“다음 정거장.”
“어머 그럼 어떡해요, 왜 진작 말씀하지 않았어요.”
“미안하다 임마, 그래서 내가 미리 미안하다구 하지 않았니.”
H는 불쑥 손님에게 화가 났다. 그는 손님이 왜 차장에게 미안해해야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아니 알고 있었다. 손님은 차장과 싸우고 싶지 않은 것이었다. 손님은 차장들이 얼마나 억척스럽고, 욕을 잘하고, 싸움을 잘하는지 알고 있었다. 그래서 한바탕 ‘오백 원은 돈이 아니냐, 잔돈을 안 갖고 다니는 네가 잘못이지 내가 왜 너한테 미안해 해야 되느냐’라고 따지고 싶지만 그것이 부질없고 시끄럽고 창피해서 얼른 미안하다는 말로 차장과의 싸움을 피하려는 것이었다. 엔진 덮개에서 눈알을 뽐을 듯이 다시 맹렬하게 연기가 피어올랐다. 그것은 흡사 영화에서 본 일이 있는 유황천의 연기처럼 맵고 지독한 것이었다. H는 드디어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 좌석에서 일어나 통로로 물러 나왔다. 차장이 열심히 잔돈을 세다가 그에게 불쑥 손을 내밀었다.
“뭐야?”
하고 그가 물었다.
“안 내리세요?”
“안 내려.”
“그럼 왜 입구에 서 계세요?”
그는 차장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연기가 피어올라 눈알이 아파서 이리로 나왔다고 말해주고 싶었지만 그는 꾹 참았다. 그는 대개의 서울 시민들이 그렇듯이 절대로 공중들 앞에서는 앞으로 나서지 않기로 하고 있었다. 그는 이 아마존족의 후예 같은 억척스런 차장과는 아무 말도 하기 싫었다. 그러나 그는 자기 대신 다른 사람, 즉 약간 조급하고 화를 잘 내고 불의를 참지 못하는 어떤 사람이 자기 대신 나이는 어리지만 베어링처럼 닳고 닳아서 걸핏하면 싸움을 걸려고 하는 이 차장에게 ‘차를 좀 정비해서 다녀라, 이게 굴뚝이지 어디 버스냐’ 하고 호통을 질러주기를 희망했다. 그러나 아마 그런 호통쯤에는 차장이 꿈쩍도 하지 않을 것이다. 그녀들은 사실 교통순경을 제외하고는 어느 누구에게도 꿈쩍할 만큼 놀라는 일이 없었다. 그녀들은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십 원짜리 두 장으로 보일 뿐이었다. 말하자면 그녀들은 모든 승객들을 ‘이십 원 위에 이십 원 없고 이십 원 밑에 이십 원 없다’로 볼 것이었다. 슬픈 일이었다.
차가 굴레방다리, 가구상 앞을 지나 농협중앙회 앞을 지나고, 광화문 정류장을 지나고, 장의사가 있는 무교동 정류장에 멎었다. H는 차에서 내렸다. 시계를 보았다. 그는 그곳에서 가까운 신문사 문화부에 다니는 친구 B와 오후 다섯 시에 연다방 이 층에서 만나기로 되어 있었다. 한데 시계는 고장도 아니건만 아직 다섯 시 이십 분 전이었다. 그는 이 이십 분의 시간이 어리둥절할 만큼 처리하기 곤란했다. 그는 길을 가로 건너가 맞은편 상가 쪽에 붙어 있는 범문사에 들러 책 구경이라도 할까 생각했다. 하지만 그 책방에는 거저 준다면 모르지만 돈을 주고 사고 싶은 책은 한 권도 없었고, 옛날에 약 팔백 권쯤의 책을 사 모았다가 그것을 모두 팔아먹은 기억이 있어서 H는 왠지 모든 책방들에 적개심 비슷한 것을 느끼고 있었다. 그는 연다방 앞을 지나 무심코 무교동 복판의 작은 네거리에 도착했다. 그러나 그는 그곳에 도착하자 문득 바른쪽 길가에 있는 서린호텔이 생각났다. 그는 서린호델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빠찡꼬’ 생각이 번개처럼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는 걸음을 빨리했다. 시계를 다시 보았다. 정류장에서 이곳까지 오는 동안 이미 오 분이 지나 있었다. 그는 문득 십오 분을 죽이기 위해서는 ‘빠찡꼬’ 코인을 얼마치나 사야 될까 하고 생각해 보았다. 재수가 좋으면 오백 원 정도로도 십 분쯤은 넉넉히 죽일 수가 있을 것 같았다. 아니 혹시 옛날 언젠가처럼 수박 세 통이 떠오를 지도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재수가 아주 옴 붙어서 오백 원이 단 일 분에 날아갈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오백 원이 삼십 초에 날아가더라도 그는 그 이상은 절대로 하지 말자고 다짐했다. 오백 원이다, 오백 원만 하고 너는 용감히 그곳을 나와야 한다, 만일 오백 원에서 한 푼이라도 더하면 너는 정말 개새끼 중의 개새끼다. 암, 개새끼고 말고!
H는 급한 듯이 게임 룸으로 들어섰다. 천장이 얕은 좁은 게임장에는 각종의 쇠붙이 소리들이 요란스레 벽을 울렸다. 어디선가 코인이 쏟아지느라고 기계가 기관총을 쏘듯 유쾌하게 털털거렸다. 그는 곧장 코인을 사기 위해 커튼이 쳐진 유리벽 앞으로 걸어갔다. 오백 원 권 한 장을 유리구멍 밑으로 디밀고 그는 오백 원어치를 다 달라는 표시로 손가락 다섯 개를 모두 펴보였다. 코인이 곧 작고 때 묻은 플라스틱그릇에 담겨 나왔다. 그는 그릇을 한 손에 받쳐 들고 빈 기계를 찾아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마침 바른쪽 기계들 중에 세 번째 기계가 비어 있었다. 그는 코인그릇을 기계 밑에 놓고 엄숙한 표정으로 잠시 주위를 둘러보았다. 십 여 명의 사람들, 넥타이를 맸고, 싱글*들을 입고 있고, 구두들이 반짝이고, 수염이 말끔히 면도질된 사람들, 등 뒤에서 보면 미스터 김 같기도 하고 미스터 박 같기도 해서 이름은 물론 국적까지도 알아볼 수 없는 똑같은 복장의 사람들이 마치 기계들과 대화라도 하듯 진지한 표정으로 게임들을 하고 있었다. H는 드디어 시선을 바로하고 자기 앞에 서 있는 ‘빠찡꼬’ 기계를 바라보았다. 기계가 마치 새 손님을 맞아 한 팔을 쳐들고 어서 옵쇼, 하는 것 같았다. 그는 우선 이 기계가 잘 나오는 기계인가 바야흐로 안 나오기 시작하는 기계인가를 알아보기 위해 코인 두 개만을 넣고 손잡이를 잡아당겨보았다. 세 줄의 꽃판이 빙글빙글 돌다가 종·탱자·살구의 순으로 보기 흉하게 가로 나타났다. 그는 다시 코인 세 개를 차근차근 구멍으로 밀어 넣었다. 다시 당겼다. 이번에는 꽃이 두 개 떠올라서 코인들이 한 번 반쯤 쿵쾅거리며 밑으로 쏟아졌다. 이 기계는 아마 잘 나오는 기계인지도 몰랐다. 누군가가 직사하게 코인만을 쏟아 넣고 잘 나올 즈음에 떠나버린 기계인지도 알 수 없었다. 바른쪽에 서 있던 키 큰 사내가 코인이 떨어졌는지 엉거주춤 기계에서 물러섰다. 사내는 H가 하는 모양을 담배를 뻑뻑 피우며 어깨너머로 보고 있었다. 그러나 다섯 개씩을 넣고 네 번이나 열심히 돌렸지만 H의 기계는 아슬아슬하게 꽃 하나씩이 어긋나버렸다. 한 번은 수박이 양쪽에 떠오르고 가운데 수박만이 한 칸 밑으로 처진 적도 있었다. H는 초조했다. 코인이 벌써 반 이상 줄어들었다. 등 뒤에서는 열여덟 개짜리 종 세 개라도 떠올랐는지 기계가 흡사 타자기를 두드리듯 타타타타 소리를 내며 열심 으로 코인들을 내뱉었다.
“아깝습니다.”
키 큰 사내가 H의 등 뒤에서 갑자기 H에게 말을 걸어왔다.
“예?”
“아까 그 수박 두 통 말입니다.”
“아, 예……”
H의 기계도 드디어 실수를 해서 살구 열매 세 개를 예쁘게 떠 올렸다. 기계가 흡사 불평이라도 하듯 제법 풍성하게 코인들을 밑으로 내쏟았다.
그는 계속 게임을 했다. 그의 기계는 귀신이라도 들린 듯이 연거푸 우당퉁탕 코인들을 내뱉기 시작했다. H는 약간 불안해졌다. 그는 이 기계가 틀림없이 몸살이 났거나 고장이라고 생각했다. 기계 밑에는 이미 백여 개의 코인들이 넘쳐날 만큼 수북하게 쌓여 있었다. 그는 새로운 고민에 사로잡혔다. 문득 B와의 약속시간이 생각나서 손목에 찬 시계를 보았다. 다섯 시 삼 분이었다. 아, 어쩌다가 내가 오늘 이렇게 즐거운 고민을 하게 되었는가? 그러나 그는 결심했다. 이놈들을 모두 돈으로 환불하자. 아마 기계 밑에 쌓인 코인이 백이십 개는 착실히 넘으리라. 오백 원 본전을 공제하더라도 공짜로 주운 돈이 칠백 원이 넘지 않는가? H는 유쾌했다. 돈을 따서 유쾌한 것이 아니고 저 완강한 ‘빠찡꼬’ 기계들을 패배시킨 것이 유쾌한 것이었다.
H는 게임 룸을 나왔다. 그리고 서린호텔을 등 뒤로 두고 연다방 쪽의 모퉁이를 돌아가자 이미 ‘빠찡꼬’에 대한 모든 원한·흥분·유쾌함 따위가 이상한 서글픔 속으로 용해되어버렸다. 언제나 이렇다. ‘빠찡꼬’도 그렇고 포커노름도 그렇고 술타령도 그렇고 문화영화도 마찬가지였다. 그것들은 열심히 할 동안은 모르지만 하고 나면 모두 엄청난 웅덩이, 약간 우울하고 적당히 슬프고 구역질이 조금 나고, 한없이 깊고 끝이 없고 바닥이 없고 어둡고 음습하고 끈끈하고 치덕치덕하고, 아니 이런 요사스러운 것들이 모두 한데 뒤섞여서 무어라고 꼬집어 말할 수 없는 도무지 요령부득인, 요컨대 한마디로 말하자면 고약한 기분들이 되는 것이었다.
이 층 연다방에는 B가 아직 나와 있지 않았다. H는 기다렸다. 다방에는 조명을 은근하게 하기 위해 커다란 갓을 씌운 등불들, 팔걸이가 달린 얕은 의자들, 구멍이 얼금얼금 뚫린 가슴 높이의 석유스토브, 야트막한 포마이카다탁*들, 시끄러운 음악들, 시끄러운 대학생들, 수족관 속에 가만히 떠 있는 금속조각 같은 엔젤피시들, 옆 좌석에 혼자 앉아 있는 젊은 여자를 힐끔힐끔 홈쳐보는 남자들의 탁한 눈들 따위가 있었다. 오 분쯤 기다리다 B가 드디어 안경을 번쩍이며 다방으로 들어섰다. H는 B를 보자 웃음이 나왔다. 그는 B를 좋아했다. 친구를 좋아했다. 그러나 그는 웃음을 곧 거두었다. 언젠가 그는 어느 다방에서 졸지에 부자가 된 친구 P를 기다린 적이 있었다. H와 P는 퍽 오랫동안 사귀었고, 중간에 많이 싸우기도 했고, 다시 화해하고, 또 싸우고, 이제는 하도 많이 싸우고 화해해서 피차 싸움이나 화해가 부질없는 짓이라고 알고 있는 사이들이었다. 한데 그날 H는 P에게서 새로운 사실을 한 가지 발견했다. H는 P를 보자 반가움에 겨워 아무 계산 없이 웃음이 나왔다. 그는 그런 때 웃는 웃음에는 아무 위장이나 의지 같은 것을 담지 않았다. 친구가 반갑고 날씨가 좋아서 감정이 작동시켜 저절로 나오는 웃음이었다. 한데 H가 P를 보고 웃자 P는 별안간 어리등절한 표정을 지었다. 아니 겉으로는 어리둥절한 척 했으나 그 속에는 다른 의미, 가령 ‘너는 나한테 항상 웃어야 된다. 너는 나를 반가워하고 있다. 하지만 네가 나를 반가워한다고 나도 너를 반가워할 이유는 없다. 나는 웃지 않겠다. 너 혼자 웃어라’라고 하는 표정을 그 어리둥절한 표정 속에 조심스레 감싸고 그것을 H가 조금쯤만 눈치 채게 해서 H가 쩔쩔매게, 화도 낼 수 없게, 나는 웃는데 넌 왜 웃지 않느냐고 드러내놓고 따질 수도 없게, 고스란히 그 고약한 감정을 H 혼자 당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H는 P와 오랫동안 사귀었지만 아직 P에게 그런 고약함, 즉 가까운 친구를 그런 식으로 골탕 먹이는 기묘한 우정이 숨겨져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그러나 그날만큼은 그의 그것이 의심할 여지없이 너무 노골적으로 밖에 드러났다. 말하자면 그는 H에게 오버액션을 한 것이었다. H는 그 뒤로부터 자기 웃음을 약간 절약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래서 그는 B를 보고 웃다가 지금 약간 머쓱해진 것이었다.
B는 안경을 쓰고 있었다. 그리고 B에게는 안경이라는 것이 백에 한 사람쯤 있을 둥 말 둥 할 만큼 썩 잘 어울리는 물건이었다. B는 서른세 살이었다. 충청도 대전이 고향이고, 착하고 예쁜 마누라가 있고, 딸만 둘을 낳았고, 집장수한테서 산 집이 있고, 키는 좀 작은 편이고, 자기 말로는 소싯적에 씨름을 퍽 잘했노라고 했지만 H의 생각에는 글쎄…… 라고 할밖에 없는 친구였다.
H는 B가 앉기를 기다렸다.
“미안하다.”
B가 H의 맞은편 자리에 앉으며 늦게 나온 것을 변명했다.
“미안한 건 아는구나.”
“뭐 했니, 그동안?”
“이럭 저럭……”
두 사람은 탁자 위로 담뱃갑들을 꺼내 놓았다. 레지가 왔다.
“뭘 드시겠어요?”
“커피.”
B는 잠시 우물쭈물했다. 그는 무언가 깊이 생각할 때는 한 손으로 안경테를 만지는 버릇이 있었다. 그런데 그는 지금 안경테를 만지고 있고 무엇을 먹을까 깊이 생각하는 중이었다. 그렇다, 그는 분명히 무슨 차를 시킬 것인가 깊이 생각하는 중이었다. 그들은 요즘 사소한 일들에 깊이 생각하는 버릇들이 들어 있었다. 그들이 깊이 생각하는 사물들은 예를 들면, 오늘 점심은 설렁탕으로 할 것인가 잡채밥으로 할 것인가, 마주앉은 저 아가씨는 놈팡이가 있을까 아직은 혼자일까, 광장에서 태운 김일성의 허수아비는 누가 밤을 새워서 꼼꼼히 만들어낸 걸작일까, 내가 오늘 열두 시 오 분 전에 집에 들어가면 마누라는 내 오입을 눈치 챌까 못 챌 것인가, 미스 최는 내가 자기를 사랑하는 것만큼 나를 정말로 사랑하고 있는가 하는 따위들이었다. 그러나 그것들은 중요한 일들이었다. 그것들이 중요한 일들이라는 것은 그것들이 그들의 머릿속에 자주 떠오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하긴 요즘처럼 엉망진창이 된 세상에는 중요한 일들과 중요하지 않은 일들을 구별하는 것만도 대단히 힘든 일이었다. 옛날에는 그것들의 구별이, 술집에 길게 써 붙인 메뉴처럼 분명 했는데 요즘은 분명하지 않았다. 우선 엣날에 존경받던 점잖음이라는 것을 생각해보자. 그건 옛날에는 어땠는지 모르지만 요즘에는 스피츠라는 서양 발바리개가 앞발을 쳐들고 뒷다리만으로 걷는 재주처럼 어색한 것이 되었다. 그럼 교육은? 이건 바지를 입을 때 어느 쪽 다리를 먼저 바짓가랑이에 디미는가 하는 따위를 가르치는 데 불과하다. 권위, 이것은 대변을 보기 위해 변소 쪽으로 결어가는 점 잖은 걸음걸이였다. 사랑, 인생은 육십 세까지 계속되는데 사랑은 겨우 이십 세에서 끝나지 않는가? 문명, 한쪽에서는 종삼을 없애고 한쪽에서는 터키탕을 짓는 사팔뜨기 같은 것 말인가? 평화, 전쟁은 우리 눈에 분명히 보이는데 평화는 왜 보이지도 않는가? 지조, 지조라구? 웃기지 마라. 만일 요즘 세상에 지조라는 것이 있다면 나는 서울에서 부산까지 땅콩을 코로 굴려 보이겠다. 대체로 이런 식이다. 이런 식 일 수밖에 없다.
B가 드디어 결심 했다
“난 반숙으로 하지.”
레지가 돌아갔다. 두 사람은 담배를 피워 물었다. H는 B가 오늘따라 퍽 피곤해 보인다고 생각했다. 두 사람은 지금 피차 만나본다는 것 외에는 아무런 용무도 없었다. 아니 그것에는 만나본다는 용무가 있었다. 그것은 용무였다. H가 이윽고 상체를 굽히고 B에게 말을 꺼냈다. B는 대화 중에는 언제나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서 B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서는 반드시 상대편이 몸을 앞으로 굽혀줘야 했다.
H가 말했다.
“나 방금 서린호텔에 들러 왔다.”
“짜식.”
“칠백 원 땄다.”
B는 서린호텔이 무엇을 뜻하는지 잘 알았다. 그러나 그는 H의 말에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B의 버릇이었다. 그는 상대편이 무슨 말을 시작하면 말 대신 눈으로만 서두름 없이 다음 말을 기다리곤 했다. H는 야속했지만 할 수 없이 다음 말을 계속했다.
“널 만나려구 여기까지 나왔다가 시간이 일러서 그쪽으로 찾아갔어. 헌데 기계가 망령이 들었는지 연거푸 우당퉁탕 코인들을 뱉어놓는 거야.”
“좋아, 칠백 원 땄다구 했지? 그 돈으로 술 사라.”
“네가 술 사달라는 건 겁나지 않아.”
“그럼 사줘.”
H는 아차 하고 후회했다. 그는 B를 겁내야 옳았다. B는 이제 겁내도 좋은 제법 당당한 술꾼이 된 것이었다. 사실 B는 작년까지만 해도 맥주 두 병 정도면 팔목까지 벌겋게 술이 올라 입에서 기관차처럼 씩씩 소리를 내곤 했다. 한데 그가 요 며칠 전에는 향도라는 술집에서 정종 반 되를 비우고도 거뜬히 술을 견뎌냈다. 그는 이제 어린애가 고추와 파 요리 먹는 것을 배우듯이 제법 그 씁쓸한 술맛을 즐길 줄 알게 된 것이었다. H는 슬며시 화제를 돌렸다.
“너 며칠 전 신문을 보니까 뭔가 제법 아는 체했더군.”
“뭐 말이야?”
“동도서기(東道西器)니 순치의 관계니 하며 퍽 어려운 말들만 골라가며 늘어놓았더군.”
“폼 한번 잡았지.”
“동도서기란 말 어디서 주워들었어?”
“야, 넌 내가 한국학의 권윈 줄 모르는구나?”
“나한테두 폼 잡기냐?”
B는 웃었다. H도 웃었다. 그러나 그 웃음들은 신문이라는 거대한 거짓말, 소설이라는 거대한 엉터리들을 피차 너무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이제는 도저히 구제할 수 없이 된 맥 빠지고 허전하고 에라 하고 내팽개치는 웃음들이었다. H는 B의 이 점이 퍽 좋았다. 그는 솔직한 것이다. 그는 신문에서는 폼을 잡았지만 친구들한테는 폼 잡기를 거절했다. 아마 그는 이런 경우, 즉 자기가 어떤 일에 너무 몰두해서 폼이 조금도 섞여 있지 않았더라도, 백이십 프로쯤 진지했더라도, 더 이상 진지할 수 없을 만큼 진지했더라도, 적어도 친구들한테는 일부러 폼을 안 잡으려 했을 것이다. B가 다시 말을 꺼냈다.
“너 이번 달에 어딘가 단편 하나 썼지?”
“어디냐?”
“× ×”
“무슨 얘기야?”
“소 잡는 얘기.”
“재미나냐?”
H는 웃기만 했다. 재미나냐고? 재미날 턱이 없었다. 요즘 소설들은 재미가 없었다. 언제부터인지 요즘 소설들은 철저하게 재미가 없어졌다. 마치 한국의 모든 소설들이 재미없기로 약속이나 한 것 같았다. H는 그러나 B가 재미나냐고 물은 것이 다른 의미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B는 그 소설이 잘된 소설인가를 묻는 것이었다. B는 H와 친구였다. 그러나 그들은 친구 사이지만 보통 사람들이 친구가 되듯이 친구가 된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유년 시절의 공통의 기억들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B가 생각하는 학교·철둑길·개천 따위와 H가 기억하는 저녁연기·노을·배추밭 따위는 서로 달랐다. 그들은 다 커서 친구가 되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군대를 다녀온 뒤 애인들을 한 명씩 끼어 차고 이제 슬슬 결혼이나 해볼까 할 즈음에 친구가 되었다. 말하자면 그들은 그때 상대편이 얼굴이 잘생겼다든가, 저놈과 잘 사귀면 저놈의 아버지 회사에 취직이라도 되지 않을까 하는 따위로 친구가 된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우연히 알게 되었고, 처음에는 꽤 까다롭게 서로를 경계했고, 조금조금씩 접근하다가 너무 접근했다 싶으면 확 물러났고, 이쪽이 차를 사면 저쪽이 저녁을 살 만큼 조심스러웠고, 꽤 오랫동안 밀고 당기고 하다가 이젠 안심해도 좋다, 라고 생각할 즈음에 아주 느리게 아주 확고하게 새로운 공통의 기억들을 만들어가며 셈 대신 이해로, 돈 대신 웃음으로, 감정 대신 이성으로, 오랜 시간에 걸쳐 친구가 되었다. 그들은 머리와 가슴으로 사귀었기 때문에 자질구레한 감정으로는 쉽게 싸움이 되지 않았다. 그들은 이해로 사귀었기 때문에 피차 체면이나 복잡한 절차들이 필요 없었다. 그들 사이에는 어려운 말들과 자질구레한 말들이 자연스레 생략되었다. 그들의 이런 언어의 절약은 글이나 소설을 평하는 데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공중들 앞에 나서기 전에는 테마니 플롯이니 메타포*니 서프라이즈 엔딩이니 새타이어*니 하는 말 따위를 잘 쓰지 않았다. 그리고 그런 말을 쓰지 않는 것은 비단 친구의 소설이나 글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었다. 모든 글들, 이름만 몇 번 신문에서 읽었지 한 번도 만나본 일이 없는 어느 평론가의 적의에 찬 글이라든가, 남자인지 여자인지도 잘 모,르는 어느 아리송한 작가의 소설이라든지, 이름이 스키나 코프로 끝나서 막연히 슬라브계 작가일 거라고만 추측하는 친구의 글들에 대해서도 그들은 팍 수월하게 ‘재미있었다’ ‘약간 지루했다’ ‘드물게 좋았다’ ‘끝부분에서 잡쳤다’라는 말만으로 의견들을 표시했다. 요컨대 그들은 많은 말들을 의식적으로 생략하고 있었다. 피차가 잘 아는 번거로운 말들은 숨이 차고, 귀찮고, 부질없어서 생략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그런 짧은 표현들 속에서도 피차 충분할 만큼 서로의 말들을 깊고 폭넓게 순식간에 이해했다. 그것들은 흡사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스무고개의 답과 같은 농축된 말들이었다. 그들은 때로 네 사람이 한자리에 앉아 마치 같은 꿈을 꾸고 난 사람들처럼 똑같은 의견들을 말할 때도 있었다. 그들은 그런 때 서로의 얼굴들을 놀라움에 차서 멍하니 쳐다보며 ‘아, 자네도 그렇게 생각했나’라고 눈으로만 은근히 기쁨들을 나누었다. 좌우간 그것은 그들 사이에만 통하는 대단히 협소한, 그러나 밝고 유쾌한 비밀의 통로였다. 그러나 모든 글 쓰는 친구들이 그들의 의견과 같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아니 친구인 그들 사이에도 때로는 맹렬하게 의견들이 대립되었다. 그들은 그런 경우, 다시 안 볼 것처럼 용서 없이 단호히 서로 다투었다. 그들의 다툼에는 우정 따위는 이미 멀찌감치 옆길로 치워졌다. 그것은 우정과는 별개의 것이었다. 우정 이란 술을 마실 때, 돈을 꾸어 쓸 때, 오입에 동행할 때, 포커를 할 때, 청첩장을 보낼 때, 슬플 때, 너무 기뻐서 혼자 참기가 곤란할 때, 자살이 하고 싶을 때, 자살을 말리고 싶을 때 등에만 요긴한 것이었다. 그런 다툼에는 우정이 오히려 눈 위의 혹처럼 거북스럽기만 할 뿐이었다. 그들은 좌우간 맹렬하게 다투었다. 그리고 그 맹렬히 다투는 것이 바로 그들의 놀랄 만한 장점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들은 아무리 심하게 다투는 경우라도 몇 가지 룰은 지킬 줄 알았다. 그것은 그들이 좀더 진지하게, 좀더 열심히, 정정당당하게 싸우기 위해서도 반드시 지켜져야 할 룰이었다. 그들은 우선 자기의 상대편을 ‘자넨 왜 그렇게 보기 흉한 코를 가지고 있는가’라든지, ‘자네 말은 내가 확인해보진 않았지만 틀림없이 엉터리같이 보이네’ 라든가, ‘나는 자네가 지금까지 지껄인 말을 한마디도 귀담아듣지 않았네’라든가, ‘자넨 마치 자네와 내가 친구라도 되는 듯이 말하는군’ 하는 따위의 말로 친구를 공박하지는 않았다. 요컨대 그들은 그런 말들을 함으로써 공연히 우정을 상하게 하거나 주먹질을 유발시키거나 대화를 쓸데없이 공전시키거나 하고 싶지는 않은 것이었다. 하지만 그들에게도 때로는 같은 종류의 글을 쓰지만 그들의 친구는 아닌, 다른 무리의 글 쓰는 사람들로부터 싸움이 걸려올 때가 있었다. 그들은 그런 도전을 받았을 때 상대에 따라 퍽 심한 곤욕을 느끼는 것 같았다. 그들이 곤욕을 느끼는 이유는 상대가 너무 노골적으로, 대화보다는 싸움을 더 좋아하는 듯한 포즈를 취하거나, A 플러스 B는 AB다라는 명제로 싸우다가 그것은 옆으로 비켜놓은 채 느닷없이 ‘야 너는 바보다, 나는 너를 바보라고 했다. 억울하면 어서 덤벼라’라는 스타일로 나오기 때문인 것 같았다. 그런 때 B와 H의 친구들은 약간 슬픈 듯한 표정들을 지어 보였다. 아마 그들은 슬프기도 했지만 무지하게 세상이 싫어지고, 별안간 산다는 것이 우스워지고, 나같이 순진한 놈은 언제 맞아 죽을지 모르겠구나 하는 겁도 났을 것이다. 그들은 결국 그런 종류의 싸움은 애당초부터 원치 않았었다. 그런 싸움질은 흡사 두 명의 권투선수가 링 위에서 한참 주먹으로 잘 싸우다가 갑자기 한 친구가 형세가 불리하니까 링 밑으로 뛰어 내려가 시퍼런 식칼을 집어 들고 덤비는 것과 비슷한 꼴이었다. 그것은 추했다. 대단히 추하고 볼품사나운 싸움이었다.
H와 B는 차들을 다 마시고, C를 불러내기 위해 C에게 전화를 걸었고, 뜻밖에도 K와 S가 C와 함께 있는 사실을 알아내고 그들과 합세하기 위해 연다방을 나왔다. 밖은 그동안 해가 많이 기울어서 온통 컴컴한 그늘 속에 잠겨 있었다. 퇴근시간이 막 지나서인지 거리에는 행인들이 빽빽하게 왕래하고 있었다. 그들은 C의 회사가 가까이 있어서 슬슬 산책 삼아 그곳까지 걷기로 했다.
두 사람은 가락국숫집 모서리를 지나 많은 사람들과 함께 횡단보도를 건넌 뒤, 다시 과학서적을 파는 책방 앞을 지나서 바른편 길 건너로 택시 정류장을 끼고 곧장 올라가다가, 국민학교 정문을 바른쪽으로 버리고 C가 밥을 버는 어느 출판사 건물로 들어갔다. 그러나 C는 봉이라는 다방으로 모두들 떠났으니 두 사람에게 그리로 오라는 전갈만을 남기고 자리에 없었다.
그들은 정말 봉다방에 모여 있었다. S가 먼저 두 사람을 발견하고 손가락을 까딱 K의 머리 위로 쳐들었다.
“오래간만이야.”
S가 말했다.
“죽지 않구 살아 있었군.”
H가 대답했다.
“앉아라.”
C가 주인처럼 말했다. H와 B는 앉았다.
“악당들이 한자리에 다 모였군.”
B가 말했다.
“넌 어떻게 나왔니?”
K가 불쑥 H에게 물었다.
“놀러.”
“그동안 왜 꼼짝두 안 했어?”
H는 대답 대신 웃었다. 그리고 S의 하얀 얼굴을 바라보았다. S도 웃고 있었다. S는 잘생긴 얼굴은 아니지만 여자처럼 곱다랗게 생겼고, 웃을 때는 송곳니가 살짝 드러나고, 좀 긴 편의 얼굴이고, 코가 유난히 길고, 윗눈꺼풀이 얇아서 눈이 상큼해 보이고, 전에는 이발을 잘 하지 않아서 턱 밑으로 돼지비계에 가끔 섞여 나오는 것 같은 몇 대의 깜짝 놀란 수염들이 삐죽삐죽 듬성듬성 박혀 있었으나 결혼 후에는 좀 깨끗해졌고, 어딘가 슬픈 듯한, 사는 데 지친 듯한 하얀 얼굴이라 누구에게나 특히 손위의 여자들에게 사랑 아니면 귀여움을 받을 얼굴이고, 실제로 그는 그런 귀여움과 사랑을 많이 받아서 이제는 그런 것을 받는 데 몸 전체가 습관이 되어 있고, 늘 생글생글 웃고는 있지만 마음속에는 시펴런 자존심과 차진* 분노와 견딜 수 없는 이웃에 대한 사랑 따위를 품고 있고, 자기는 그런 것들을 밖으로 드러내기에는 적합지 않은 얼굴과 음성을 가졌다고 스스로 알고 있어서 절대로 그런 것을 밖으로 드러내놓지 않고, 나이가 육십이 되더라도 늙을 것 같지 않은 얼굴이고 H가 지금까지 보아온 사람들 중에는 가장 예민한 감수성을 가지고 있고, 그 감수성은 그의 소설이고, 그러나 때로는 자기도 깜짝 놀랄 만한 어마어마한 결심들을 불쑥 하고, 그것을 또 용케 견뎌내고, 자기의 글에 병적 일 정도의 결백성을 가지고 있어서 그게 방해가 되어 요즘은 글이 잘 안되고, 착하고, 순진하고 화 안 내고, 사랑할 수는 있지만 미워할 수는 없는, 그래서 이웃들이 저 자식은 어떤 재주로 저렇게 희한한 기술을 습득했나 하고 부러워 못 견디는 그런 친구였다.
“어이 밥 때가 다 되었는데 그냥 이렇게 앉아만 있기냐?”
누군가가 말했다.
“배고프다, 누구 저녁 사라.”
S가 역시 웃으며 누가 저녁을 살 것인가, 누가 그런 영광을 차지할 것인가 하는 듯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나 아무도 그런 영광에 선뜻 응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렇다, 그것은 영광이었다. 그들은 가난한 것이다. 짜증이 날 만큼 가난한 것이다. 만일 그들 중에 누구 한 사람이라도 퍼블릭카 정도만 자가용으로 굴릴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그들을 만날 때마다 자기 혼자서 그 영광을, 기천 원이면 충분할 그 영광을 염치없이 독차지하려 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잘 안 되었다. 금강구두 한 켤레 값 정도가 잘 안 되었다.
“나가자.”
C가 불쑥 말했다.
“어디루?”
S가 반가운 듯 반문했다.
“밥 안 먹어?”
“너 살래?”
“누가 사든지.”
다섯 명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밖은 이제 해가 완전히 져서 짙은 어둠이 컴컴하게 깔려 있었다. 차들이 오렌지색 라이트들을 휘두르며 유솜 건물 옆을 번쩍번쩍 지나갔다. K와 C와 S가 뒤따라 다방을 나왔다. 그들은 잠시 다방 앞에 선 채 추운 밤공기에 깜짝 놀라 손들을 포켓에 찌르고 지나가는 차들, 하늘의 별들, 아크릴 간판들, 자기 구두들을 쳐다보고 있었다.
“어디가 좋을까?”
C가 다시 일행에게 물었다.
“너 정말 밥 먹을래?”
K가 문득 C에게 물었다. K가 너 정말 밥 먹을래 하고 물은 것은, 자기는 밥보다는 술이 더 생각난다는 뜻이었다.
“야, 밥도 팔고 술도 파는 집으로 가자.”
H가 갑자기 끼어들었다. 그도 K와 같은 생각이었다. 밥보다는 술이 더 먹고 싶은 것이었다.
“그럼 새집으로 가야겠군.”
C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새 집이 어디야?”
“저쪽이야, 좀 걸어야 돼 .”
“가까운 데루 가. 향도집 같은 데두 좋지 않아.”
“쌔끼, 남의 사정두 모르구…….”
“무슨 사정? 왜?”
“야 임마.”
하고 K가 문득 S의 어깨를 탁 쳤다.
“넌 그런 것두 모르니? 향도집은 재가 안 통한단 말이야, 알아들어?"
“뭐……? 흐흥, 알았어. 향도집은 안 통하구 새집은 외상이 통한단 말이지?”
“머리를 써, 머리를. 한마디 하면 팍 알아먹어야지.”
“야, 느덜 왜 이러니?”
하고 C가 펄쩍 뛰었다.
“난 돈이 없단 말이야. 모두 주머니들을 털잔 말이야.”
주머니를 턴다, 하고 H는 잠깐 생각해보았다. 그것은 좋은 일이었다. 그리고 전에도 가끔 해온 일들이었다. 그것은 약간 쑥스럽긴 하지만 그렇게 하고 나면 항상 마음들이 가벼워지는 일이었다. 그들은 서로의 사정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사정만 아는 것이 아니고 상대편의 주머니 속과, 집에 저금해놓은 돈과, 앞으로 잡지사에서 받을 원고료와, 아직 쓰진 않았지만 앞으로 받게 될 원고료와 각자의 식탁에 놓일 반찬들까지도 알고 있었다. 그것은 슬픈 일이었다. 너무 뻔해서 슬픈 일이었다. 그들은 아무것도 숨기거나 가릴 수가 없었다. 도대체 그들은 숨기고 가릴 재산이라는 것이 없었다.
그들은 어느새 국민학교 앞까지 와 있었다. 밤공기가 몹시 찼다. 하늘에는 별들이 불티처럼 좍 떠 있었다. 그들의 바른쪽에 있는 넓은 길 양쪽으로는 차체가 유난히 큰 자가용차들이 어깨를 맞대고 십여 대나 서 있었다. 그곳에는 외등이 달린, 한식 가옥의 대문을 모조한, 그러나 퍽 뻔뻔스럽고 오로지 추잡해 보이기만 하는 고급 요정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 H는 힐끗 그곳을 쳐다본 뒤 기분이 약간 우울해졌다. 그는 저런 고급 요정을 평생에 꼭 두 번 가본 일이 있었다. 그런데 그 두 번이 모두 자기가 술값을 치러야 할 괘씸한 경우들이었다. 그는 저런 종류의 요정을 꽤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가 저런 것을 기억하는 이유는 언젠가 그것을 소설에 써먹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곳에는 우선 여자들이 있었다. 여자들은 모두 젊었다. 그러나 예쁘지는 않았다. 가끔 예쁜 여자가 있었으나 그것들은 자주 이 방 저 방으로 불려 다녀서 차라리 좀 못생겼지만 옆 자리에 꽉 붙어 앉아 있어주는 그런 여자들이 나았다. 그곳의 음식들은 다른 보통의 음식점 음식들과 별로 다른 것이 없었다. 다른 것이 있다면 음식 자체보다 음식을 담아놓은 그릇들이 좀 달랐다. 그러나 가끔 엉뚱한 음식, 가령 고들뻬기라는 씀바귀 김치라든가, 해삼 내장으로 만들었다는 누런 색깔의 젓이라든가, 마〔山芋〕 뿌리를 생으로 으깨어놓은 뻑뻑한 콩죽 같은 것이 나오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들은 원숭이 골 요리, 모기 눈알 요리, 중국의 제비집 요리 따위처럼 신기하다는 것 외에는 맛도 없고 비위에도 안 맞고, 먹고 난 뒤에는 별로 기분도 좋지 않았다. 그러나 H그런 곳에서 가장 심한 배반감을 느끼는 것은 음식이나 술이나 여자 따위가 아니었다. 그곳은 H에게는 뿌연 땟국들이 둥둥 떠 있는 뜨끈뜨끈한 목간통과 비숫한 곳이었다. 그곳은 아래턱이 둘로 겹치고, 허리띠가 무지하게 크고 고혈압을 걱정하는 사람들만이 때를 뽑기 위해 가는 곳이었다. 그 목간통에는 박수소리가 있고, 양담배 연기가 자욱하고, 여자들의 옷 밑으로 끊임없이 움직이는 살찐 손들이 있고, 부드러운 틸로 된 목구멍 에서 울려나오는 듯한 기름진 웃음이 있고, 아무리 술을 마셔도 취하지 않는 계산에 밝은 번쩍번쩍하는 눈들이 있고, 홍정이 있고, 아첨이 있고, 촌지가 있고, 그러나 그런 것들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있을 턱이 없었다. H는 그런 목간통에 앉아 있으면 자기가 왠지 못 올 곳에 온 듯한, 많은 사람들이 그의 등 뒤에서 침을 튀기며 손가락질을 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는 그런 기분이 드는 이유를 자기가 돈에 대해 너무 깊은 원한을 품은 탓이라고 풀이했다. 그것은 어느 정도 사실이었다. 그는 분명히 돈에 대해 원한이 있었다. 원한이 있고말고! 쌍놈의 돈!
그들은 새집에 도착했다. 새집은 밥과 술을 함께 파는 방이 여럿 딸린 커다란 음식점이었다. 그들이 자리를 잡고 앉자, 여자가, 앞치마를 두르고 통통하게 살찐 여자가 주문을 받으러 왔다. 그녀는 아무 말 없이 그냥 상머리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지친 모양이었다. ‘뭘 드시겠어요’ 하는 말도 묻기 힘들 만큼. 지금은 그런 여자들이 지쳐 있을 시간이었다.
“뭘루 할까?”
C가 물었다.
“글쎄, 뭘루 할까.”
S가 C를 마주보았다.
“어이, 여기 뭐뭐 되지?”
H가 여자에게 물었다.
“다 돼요.”
“다 되다니?”
“저길 보세요.”
일행들은 저기를 보았다. 저기에는 각종 요리 이름들이, 마치 그것 자체가 요리인 양 현란스럽게 붙어 있었다.
“우선 밥부터 시키지?”
B가 오래간만에 입을 열었다.
“그래 밥부터 하자.”
S가 동의했다. 그러나 H와 K와 C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들은 S와 B가 술이 약해서 이런 곳에 와서는 남의 기분을 싹 무시하고 용서 없이 밥을 시킨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H들은 밥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들은 오래간만에 친구들을 만났고, 지금은 밥보다 술을 마시기에 더 제격인 시각이고, 술을 흠뻑 마신 뒤 한바탕 떠들고 싶은 기분들이었다. K가 드디어 말했다.
“그래 둘은 밥 먹어라, 우린 술로 한다.”
“빈속에 좋지 않아……”
S가 웃는 얼굴로 자못 걱정스레 K에게 말했다. 그러나 S의 그런 말은 조금도 건방져 보이거나 어색하게 들리지 않았다. 그의 장기였다.
“야, 우리 무슨 술로 할까?”
K가 S를 무시 하고 H와 C에게 몸을 돌렸다.
“소주로 하지.”
H가 말했다.
“그래 소주다.”
C도 동의했다.
“안주는? 안주는 뭘루 할까?”
“어이 여자, 안주는 뭐가 있어?”
“제육·편육·똥그랑땡…….”
“비싼 것 말구.”
“낙지·두부찌개·빈대떡……”
“좋아, 우선 낙지 하나 두부찌개 하나로 하지.”
“식사는 뮐루 하시겠어요?”
“그건 저쪽 동네에 물어봐.”
여자가 B쪽으로 몸을 돌렸다. B가 말했다.
“대구탕 둘.”
여자가 돌아가고 잠시 좌석에 침묵이 흘렀다. 그 침묵은 느닷없이 기습처럼 찾아온 침묵이었다. H는 등을 벽에 기댄 채 맞은편 벽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B는 한 손으로 안경테를 만지며 마루에 서 있는 여자들을 바라보았다. K는 한 팔꿈치를 밥상 위로 고인 채 손가락 끝으로 무언가를 쓰고 있었다. C는 왼손의 새끼손가락으로 귓구멍을 침착히 도(道) 닦듯이 후비고 있었다. S는 그러나 어떤 말이 하고 싶어서 네 명들을 이쪽저쪽 조심스레 둘러보았다. S가 불쑥 K에게 말했다.
“업 다이크 부부들 재미있던데?”
“……”
“그거 로렌스의 채털리 이상이야.”
“……”
“그 친군 소설을 무슨 보고서처럼 쓰는 것 같아. 자기 의견은 조금두 안 비치구, 있는 그대루 늘어만 놓은 거야.”
K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고개만은 열심히 끄덕여 보였다. 그의 버릇이었다. 그는 고향이 전라도 어느 섬이라고 했다. 그곳은 육지에서 오는 배가 하루에 한두 번밖에 찾아주지 않는 쓸쓸한 섬 같았다. 그러나 어린 K는 배가 섬에 와 닿을 때마다 조그만 바위 위에 대뚝 올라앉아 한 손으로 턱을 고이고 배에서 내리는 사람들, 타는 사람들, 바다 저쪽 뭉게구름, 생선상자 따위들을 멍하니 바라다보았다고 했다. 하지만 지금의 그의 얼굴에는 바위에 쪼그리고 앉아 바다를 슬픈 눈으로 바라보던 그런 어진 소년의 모습은 조금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는 도수가 높은 안경을 쓰고 있었다. 이마만 조금 넓었으면 대단한 미남이 될 뻔한 얼굴이었다. 그는 걸음을 걸을 때는 등을 앞으로 둥글게 굽힌 채 큰 머리통을 ‘저게 뭘까?’ 하는 듯이 쑥 앞으로 내밀고 걸었다. 그는 웃을 때는 즐거워 죽겠다는 듯이 눈을 거의 다 감고 높은 소리로 거침없이 웃었다. 술이 취해서 기분이 흔쾌하면 그는 으앙 소리를 치며 프랑켄슈타인이 영화에서 보여주는 것 같은 퍽 기묘한 제스처로 익살을 부렸다. 그는 카뮈가 초기에 쓴 「표리」라는 수필을 대단히 좋아했다. 요컨대 그는 흥이 많고, 집요하고, 애증의 구별이 선명 했고, 자신에게 끊임 없이 정직하려고 노력 했고, 그 정직성이 절제 없이 내뻗어서 자신도 모르게 적을 만들었고, S 못지않게 감수성이 예민했지만 S 때문에 자기 감수성을 양보했고, 때로 너무 자신만만한 척해서 남들을 깜짝 놀라게 했고, 눈이 나빠서 안경을 썼음에도 사물들을 항상 먼 곳에서 관찰했고, 말짱했을 때의 그보다는 술 취했을 때의 그가 더 좋았고, 아무리 진지한 말들을 한 후에라도 돌아가는 버스 속에서는 그것을 까맣게 잊어버릴 줄 알았고, 나는 대범한 사람이다라고 얼렁뚱땅 연극을 하려 했으나 그것이 연극이라는 것을 들킬 만큼 순진했고, 놀랄 만큼 수줍음을 잘 탔고, 아직은 여러 명의 친구 중에 유일한 총각이지만 곧 결혼할 모양이고, 결혼 상대의 여자로는 남자가 귀가했을 때 발 같은 것도 닦아줄 수 있는, 의지는 있지만 고집은 없고 아는 것은 많지만 남편한테는 아는 체 안 하는 그런 백만 불짜리 여자라야만 된다고 주장했고, 그는 결국 주는 것보다는 빼앗는 것이 더 많은 친구였고, 사귈수록 재미난 친구였고, 그래서 그의 주위에는 많은 친구들이 열심히 따라다녔고, 앞으로도 계속 따라다닐 것이었다.
음식이 왔다. s와 C가 기다렸다는 듯 쟁반에서 주섬주섬 음식들을 상 위로 늘어놓았다. 그들은 모두 시장하던 참이었다. 시장은 좋은 것이었다. 그것은 모든 기다림 중에서 가장 보람 있고 구체적인 기다림이었다.
“야 그거 맛있어 뵈는데?”
S가 낙지 접시를 부러운 듯이 턱으로 가리켰다.
“못써 임마, 그러지 마!”
K가 예수의 은배(銀杯)라도 감추듯 낙지 접시를 후딱 자기 앞으로 끌어당겼다.
“인심 고약하다!”
B가 소독저*의 껍질을 벗기며 말했다
“고약한 것 인제 알았니?”
“옛날부터 알았지.”
소주가 왔다. 이 홉들이 두 병이었다. H는 즐거웠다. 그는 술을 사랑했다. 아니 술 자체보다는 술에 취한 자신을 더 사랑했다. 그는 술병 하나를 집어 들었다. 손바닥에 문득 서늘한 냉기가 전해왔다. 소주만이 낼 수 있는 소주 특유의 체온이다. 그것은 늦가을의 서리처럼 싸늘한 체온이었다. 그는 소주의 첫 잔을 좋아했다. 소주의 첫 잔은 입에서는 달고 목구멍에서는 차고 배 속에서는 뜨거웠다. 그는 소주가 목구멍을 타고 배 속에 들어가, 잠자는 위를 흔들어 깨우고 점액질의 위벽을 슬슬 어루만지며, 처음에는 느리게 나중에는 빠르게 눈에 보이지 않는 수천 개의 불씨들이 되어 두꺼운 위벽을 뚫고 활기에 차서 와 함성을 지르며 거미줄 같은 모세혈관으로 고무줄 같은 질긴 동맥으로, 투구를 쓰고 작은 창을 쥔 장난기 많은 꼬마병정들이 되어, 영차영차 합창을 하며 여기도 집적 저기도 집적 기관차처럼 뛰어다니다가, 나중에는 사람이 술을 먹은 건지 술이 사람을 먹은 건지 어리둥절하게 만드는 그 활기와 혼미와 G 마이너스 현상이 좋았다. 그것은 기분 좋은 지옥이었다.
“자, 잔 받아라.”
C가 H에게 술잔을 내밀었다. H는 술잔을 받았다. 그는 문득 소주의 색깔이 무슨 색깔일까 하고 생각해보았다. 영어로는 화이트 리커, 백주(白酒)라고 되어 있었다. 그러나 소주가 흴까? 소주는 화이트일까? 아니다. 그것은 소주에 대한 명예훼손이다. 소주는 희지 않고 맑은 것이다.
“야, 너 뭐하니?”
K가 H에게 재촉했다.
“기도한다.”
“빨리 돌려.”
H는 잔을 돌렸다.
“근사한데?”
C가 말했다.
“뭐가?”
“소주 말이야.”
그렇다. 소주는 근사했다. 그리고 그들은 이렇게 모여 앉아 가끔 근사할 필요가 있었다. 그들은 지독한 고생들을 하고 있었다. 그들의 고생은 대한민국에서는 가장 심한 고생 중의 하나였다. 그러나 그들의 그 지독한 고생을 대한민국에서는 백오십 원이나 이백 원 정도로 대우하고 있었다. 그들은 공부를 많이 했다. 과거에도 많이 했고 지금도 하고 있고 미래에도 계속할 것이었다. 아무도 그들만큼 공부를 많이 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그들은 억울했다. 갑자기 억울했다. 특히 그들이 심하게 억울함을 느끼는 경우는, 우스운 친구가, 악수 이외에는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친구가, 민주주의는 자유다, 라고만 알고 있는 친구들이 어느새 그들보다 더 많은 돈을 벌어 “난 이제 소주 같은 건 못 마시겠어. 요즘은 맥주나 조니 워커가 내 몸에 맞더군” 하고 말할 때였다. 똥 같은 놈들이었다. 그러나 그 똥들은 돈을 버는 것이 아니고 돈을 갈퀴로 긁고 있었다. 그들은 식사 중에도, 변소에 쭈그리고 앉아 있을 때도, 포동포동 살이 찐 여비서의 배 위에 올라가 있을 때도, 그리고 정신없이 쿨쿨 잠을 잘 때도 돈을 벌고 있었다. 아니 돈이 벌려지고 있었다. 그러나 H들은 그렇지가 못했다. 그들은 정직 했다. 그들은 네모반듯한 이백 개의 구멍들이 그려진 원고지 장수로만 돈을 벌었다. 그곳에는 터럭만 한 에누리도, 요란스런 박수소리도, 동전 한 푼의 특혜도 없었다. H는 문득 자기의 방, 앉아서 무수하게 밤을 새운 그 옹색한 그의 작업장을 생각해보았다. 그곳에는 테이블과 의자가 있고 욱광(旭光) 이라는 회사의 일본제 다 낡은 전기스탠드가 있고, 원고지에 구멍을 뚫기 위한 송곳이 하나 있고, 글이 잘 안되어 끙끙 앓는 H의 뜨끈뜨끈한 이마가 있고, 간밤에 먹다 남긴 끈적끈적한 커피 찌꺼기가 있고, H를 지금까지 억지로 먹여 살린 파카 21의 만년필 한 자루가 있고, S가 ‘H형에게’라고 자필로 쓴 S의 소설집이 한 권 있고, 석 달 동안 줄곧 붓방아만 찧다가 결국 갈가리 찢어버린 어느 단편의 파지가 있고, 이틀 밤을 앉아서 새운 H가 걱정스러워서 공연히 들락날락하는 H의 아내가 있고, 소설도 실패하고 생활도 실패해서 분노가 훨훨 타오르는 H의 붉은 눈이 있고, 네 시간에 겨우 두 장을 써놓고 냉수를 더듬어 찾는 H의 떨리는 손이 있고, 글 쓰느라고 정신이 없는 H의 두 손가락 사이에서 어느새 다 타버린 뜨거운 담배꽁초가 있고, 어디선가 벌써 새벽을 알리는 “변소 퍼요!” 소리가 우렁차게 들려오고, 속달이라는 퍼런 고무도장이 찍힌 원고 독촉장이 휴지통에 누워 있고, 그리고 ‘지금은 아침이다’라고 알리는 눈부신 햇살이 창문에 와 있었고, H의 초조가 있고, 후회가 있고, 분노가 있고, 그리고 그런 것들이 한데 뜰뜰 뭉친, H에게는 가장 무서운 좌절이라는 것이 있는 것이었다. H는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자기 앞에 앉은, 자기와 똑같은 기억들을 가지고 있는 친구들을 둘러보았다. 아아, 바로 저 얼굴들이었다. 저렇게 착하고 수더분한 놈들이 바로 그의 친구들인 것이었다. 그는 별안간 고함쳤다.
“술 줘, 빨리!”
“술 줘?”
“그래 임마.”
“짜식, 급하긴……”
C가 술을 따랐다. H는 술을 천천히 음미하듯 마셨다.
“야, 느덜두 한 잔씩 받아라.”
K가 S와 B에게 말했다.
“그래 한 잔 줘.”
B가 선뜻 응했다.
“이거 술이 모자라지 않어?”
K가 빈 병을 서운한 듯이 들여다보았다.
“한 병 더 시킬까?”
H가 말했다.
“그래 하나 더 하자.”
C가 손뼉을 딱딱 쳤다.
“여기 이거 하나 더!”
C는 빈 병을 여자의 코앞에 불쑥 디밀었다. 여자가 돌아갔다.
술이 마치 물결이 출렁이듯 H의 머리 위로 문적문적 밀고 올라왔다. 그는 기분이 좋았다. 친구가 있고 방바닥이 뜨듯하고 집에는 밤을 새울 아무 일거리도 없는 것이다. C가 문득 상머리 저쪽에서 생각이라도 난 듯 거창하게 입을 열었다.
“야, 나 곧 이사 갈 거다. 이젠 아파트생활 확 물렸어.”
“어디루 갈 거야?”
B가 물었다.
“몰라 아직. 어쩌면 답십리 쪽으로 가게 될 거야.”
“야 이왕이면 우리 동네루 오라구.”
“그쪽은 어려워. 집 값이 너무 틀려.”
“얼마짜릴 구하는데?”
“백십 만 원.”
H는 술이 깨는 듯한 기분이었다. 그는 아직 자기 집이 없었다. 그리고 앞으로도 언제쯤 자기 집을 갖게 될는지 막연했다. 그는 C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C의 얼굴에는 리얼리티가 있었다. C는 무장을 갖춘 병정처럼 강인했다. H는 C가 얼마나 성실하고 얼마나 부지런하고 얼마나 끈덕진가를 잘 알았다. 그는 꿀벌처럼 부지런했고, 면도칼을 가는 가죽 띠처럼 강인했고, 새끼를 거느린 어미 짐승처럼 신중했다. 그는 비상한 기억력을 가지고 있었고, 그것을 전화번호를 술술 외우는 것으로 공공연히 자랑했다. 그의 지나친 성실성과 근면성 때문에 그는 가끔 ‘C 이퀄 성실이다’라고 친구들로부터 오해를 받았다. 그러나 그는 알맞게 성실할 뿐 무슨 일에도 지나치는 법은 없었다. 그는 가슴이 따뜻해서 모든 사람을 사랑했다. 모든 사람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는 늘 바쁘게 움직 였다. 사람들이 놀거나 일할 자리를 그만큼 잘 만드는 사람을 H는 아직 본 일이 없었다. 그의 신중함과 깊은 공부와 따뜻한 가슴에 친구들은 늘 빚을 졌다. 친구들 마음속에 들어앉은 그의 자리가 얼마나 큰지를 본인은 모르고 있었다.
C가 다시 말했다.
“야, 우리 봄철두 되었는데 어디 한번 놀러 안 갈래?”
“좋지.”
K가 말했다.
“언제쯤 갈까?”
C가 구체적으로 나왔다.
“글쎄…….”
“야, 넌 어떠냐?”
C가 B에게 물었다.
“좋아, 그런데 시간들이 있을까?”
아무도 대답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들은 한동안 서로의 얼굴들만 쳐다보았다. 시간들이 있느냐고? 시간들은 있었다. 너무 많아서 탈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자기 방에서 손톱이나 깎고 주간지나 뒤적일 시간이지 놀러 갈 시간은 아니었다. 그들은 지쳐 있었다. 스물네 시간 지쳐 있는 것이었다. H는 저들이 왜 지쳐 있는가 이유를 알았다. 저들은 글을 쓴다는 직업 외에 별도의 다른 직업들을 갖고 있었다. 그들의 직업은 한마디로 말해서 소액의 생활비를 마련하려는 무지하게 권태로운 싸움이었다. 그들은 그러나 그 권태로운 싸움터를 버릴 수가 없었다. 버리기는커녕, 매일 아침 여섯 시에 일어나 허겁지겁 칫솔을 물고, 허겁지겁 아침밥을 뜨고, 허겁지겁 버스를 타고, 허겁지겁 일터로 달려가고, 그것이 이제는 습관이 되어서 저절로 새벽 여섯 시에는 눈이 떠지도록 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들이 진짜로 지친 것은 새벽 여섯 시의 기상과, 급히 먹은 아침밥과, 발등이 밟히는 만원버스 따위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오히려 그런 것들은, 나는 살아있구나 하는 뜻밖의 기쁨으로 즐길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권태, 집에서 직장까지 정확히 이십팔 분이 걸리는 십삼 번 급행버스라든가, 자기 맞은편 책상에 앉아 있는 유난히 코가 뾰족한 미스터 송의 얼굴이라든가, 무심히 책상에서 고개를 들었을 때 언제나 창밖으르 보이는 코카콜라 선전판이라든가, 천장에서 흡사 콩을 굴리는 듯한 저 하염없고 단조로운 타자기 소리 따위가 못 견디게 권태로운 것이었다. 그들은 권태에 지친 것이었다. 권태가 그들을 물컹물컹하게 만든 것이었다.
그들은 소주 한 병을 더 시키고, 제육 한 접시를 새로 시키고, 처음에는 누군가의 소설 이야기를 했는데 그것이 어느새 덴마크의 포르노 이야기로 옮아가더니 나중에는 여자 이야기, 오입 이야기, 와이담 등으로 변해버렸고, 그것이 끝나자 이제는 더 이상 할 말들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누군가가 이제 그만 가볼까 하자 그것을 신호로 모두 일어나 코트들을 주워 입고 열한 시 오 분에 술집을 나왔다. 밖에는 깜짝 놀랄 만큼 세찬 바람이 불고 있었으며 가게들이 반 이상 문을 닫아 골목길이 몹시 어두웠다. 그들은 큰길까지 나가는 동안 웅열웅얼 노래를 부르기도 했고, 지나가는 바걸들을 우쭐우쭐 쳐다보기도 했고, 하늘도 한번 쳐다보았고, 길가에 세워둔 컴컴한 자가용차 안을 혹시 어느 남자와 여자가 맞붙어 있지나 않나 하고 들여다보았고, 그러나 그런 재미난 일이 그들 앞에 나타날 리 없었고, 약간 시무룩한 채 묵묵히 자갈들을 발길로 걷어차며 결국 큰길까지 나와버렸다.
큰길에는 그들 외에도 귀가 지각생들이 상당히 많았다. 바람이 마치 심술 난 개구쟁이처럼 훤한 대로 위로 요란스레 흙먼지를 몰고 갔다. 그들은 어느 버스 정류장 앞에 섰다. 그곳에는 버스가 석 대 머물러 있었으나 한 대가 떠나버려서 두 대가 되었고 다시 두 대가 더 와서 지금은 넉 대가 되어 있었다.
“자, 인제 모두들 흩어지지.”
B가 불쑥 일행에게 말했다.
"그래 헤어지자.”
C가 말했다.
"그럼 잘 가라.”
K가 미련 없이 몸을 돌리며 한 손을 번쩍 머리 위로 쳐들었다.
“잘 가라.”
B와 C가 동시에 말했다. K는 몸을 돌렸다. 그는 총각이었다. 총각이라 걸릴 것이 없었다.
“야, 난 어떡허지?”
S가 문득 C에게 말했다.
“뭘?”
“집이 도봉동인데 지금 버스가 있을까?”
“있을 거야, 빨리 뛰어가봐!”
“혹시 없으면 어떡허지?”
“할 수 있어?”
“씨팔, 큰일인데……
“택시두 없을까?”
“엠병, 여관에서 자구 갈까부다.”
“마누란 어떡허구?”
“마누란 지금 집에 없어. 시골 내려갔어.”
“짜식, 너 계획적이었구나?”
“뭐가?”
“너 혹시 몸 풀구 싶은 것 아니냐?”
“흐흥, 그래 천 원만 꿔라.”
“야, 너 왜 이러니? 천 원이 어딨니?”
“그러지 말구 빨리 꿔줘. 늦어서 오늘은 집에 못 가.”
C가 후딱 H 쪽을 돌아보았다.
“야, 이 자식 오입자금 빌려달랜다. 빌려줄까?”
“빌려줘!”
C가 주머니를 뒤적뒤적 한 뒤 다시 S를 돌아보았다.
“몸조심해라, 임마. 그리구 페니실린 만든 사람한테 감사해야 돼.”
“알았어.”
S는 돈을 받았다. 그리고 곧 몸을 돌렸다.
“다음에 보자.”
“그래 잘 가라.”
S는 떠나갔다. 이젠 H와 B와 C만이 남았다. 그들은 바람 쪽으로 등을 돌리고 S의 껑충껑충 뛰어가는 듯한 뒷모습을 우두커니 지켜보았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뿐이고 S는 곧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B가 불쑥 C에 게 말했다.
“우린 택시루 가는 게 어때?”
“아참, 같은 방향이지. 그래 그게 좋겠군.”
“여기선 택시가 못 설걸?”
“위 쪽으루 좀 올라가볼까?”
“그래 올라가보자.”
두 사람은 H를 향했다.
“넌 여기서 버스 탈 수 있지?”
“응,”
“다음에 보자.”
“오케이.”
B와 C가 고개를 끄덕인 뒤, 바람을 마주 받으며 광화문 쪽으로 걸어갔다.
H는 이제 혼자 남았다. 그는 갑자기 혼자 남게 되자 걷잡을 수 없는 취기를 느꼈다. 포켓을 더듬어 담배를 찾았다. 담배가 없었다. 술집에서 다 태운 것이다. 그는 휙 몸을 돌려 주위를 열심히 두리번거렸다. 담배가게를 찾는 것이다. 담배가게가 저만치 있었다. 그는 그쪽으로 걸어갔다. 그러나 담배가게는 이미 문짝들을 닫아걸었다. 그는 다시 몸을 돌렸다. 누군가가 그를 답답하게 막아섰다.
“지금 몇 시나 됐습니까?”
H는 그를 바라보았다. 덩치가 큰 중년 사내였다.
“이십 분 전 열두 시요.”
사내가 돌아섰다. H는 다시 버스 정류장으로 돌아왔다. 취기가 점점 심해져서 그는 연거푸 눈을 껌벅거렸다. 많은 사람들이 택시를 잡기 위해 거리를 이리저리 단거리선수들처럼 뛰어다녔다. 버스 한 대가 새로 도착했다. 차장이 무어라고 쨍쨍하게 소리쳤다. 그는 얼핏 신촌이란 말을 들었다. 그곳으로 뛰어갔다. 그러나 그는 버스 바로 앞에서 어느 여자와 부닥쳤다. 눈앞이 캄캄했다. 여자도 몹시 아픈듯한 표정이었다.
“미안합니다.”
여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급히 그의 곁에서 떠나갔다. 그는 차장을 올려다보았다.
“이 차 신촌 가지?”
H는 차를 탔다. 차는 손님들이 거의 없어 병원 복도처럼 깨끗하게 비어 있었다. 그는 좌석에 앉았다. 갑자기 몸이 떨려왔다. 추위 때문인지 술 때문인지 알 수가 없었다.
“빨리 좀 가자 야!”
누군가가 그의 등 뒤에서 달겨들듯이 고함을 쳤다. H는 그러나 몸이 떨려서 그런 것에는 아무 관심도 없었다. 그는 차창으로 고개를 돌리고 눈을 확 부릅떴다. 배경이 캄캄한 차창 유리에 문득 자신의 얼굴이 비쳐 보였다. 그는 잠시 자신의 얼굴, 눈동자가 게슴츠레 풀려 있고, 코가 삐죽 앞으로 굽어 있고, 언제 보아도 너무 넓적하다고 생각되는 낯익은 그 얼굴을 우두커니 쳐다보았다. 그것은 추한 얼굴이었다. 추하고 멍하고 조금도 재미없는 얼굴이었다. 그는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눈을 감았다. 문득 집에 있을 아내와 딸, 안방과 건넌방, 가구와 일용품 따위들이 머리에 떠올랐다. 그는 갑자기 목이 졸리는 듯한 괴로움을 느꼈다. 집안 구석구석에까지 웅크리고 앉은 가난, 소설의 어려움 따위들이 한데 뭉친 괴로움이었다. 그는 다시 눈을 떴다.
一취직을 할까? 취직을 해서 아늑하고 안전한 달팽이 껍질 속으로 기어들어 갈까?
一비겁한데?
―비겁하다고? 그러나 넌 소설의 어려움에 벌써 확 질리지 않았나? 지치지 않았나? 패전지장이 무슨 변명 인가?
―그러나 아니다! 씨팔 아니다. 아니라면 아닌 줄 알아, 임마!
그는 다시 고개를 내둘렀다.
―씨팔, 지금까지 넌 깨끗하게 살아왔다. 두 눈을 뜨고 귀를 활짝 열고 누구한테나 ‘넌 틀렸어!’ 하고 삿대질을 하며 살아왔다. 헌데 이제 와서 귀를 막고 눈을 가리고 달팽이 껍질 속으로 ‘본인 후퇴합니다’ 하고 기어 들어가? 곤란한데, 곤란하지, 곤란하고말고. 넌 아마 지금의 상태를 지옥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그래 그건 지옥인지 모른다. 아니 분명히 지긋지긋한 지옥이다. 그곳에는 리더도 없고, 길잡이도 없고, 명령하는 사람도 없고, 오직 순도 백 프로 이상의 완전무결한 자유가 있을 뿐이다. 그건 지옥 같은 자유다. 사막 같은 자유다. 길도 없고 의무도 없고 오직 성실만이 대뚝하게* 남아 있는 자유다.
―그러나……
―그러나?
―그래 그러나!
―그러나 뭐냐?
―그건 즐거운 지옥이다. 눈 뜬 지옥이다. 알아들어?
―씨팔……
차가 움직였다. 바람이 차창으로 흙먼지를 휙 끼얹었다. 그러나 H는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그는 오늘 술이 좀 과한 것 같았다. 그러나 내일은 좋아질 것이었다. 그는 건강 하나만은 하늘의 복처럼 타고난 인간이었다.
『현대문학』 185호(1970. 5); 『납도 기행』 (문학과지성사 1999)
홍 성 원
홍성원(洪盛原) 1937년 경남 합천에서 태어나 수원에서 성장하고, 고려대 영문과를 졸업했다. 1964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단편 「빙점지대」가 당선되고, 『동아일보』 50만 원 고료 장편모집에 『디데이의 병촌(兵村)』이 당선되어 등단한 뒤 전업작가로 활동해왔다. 지식인의 고뇌와 현실대응 문제, 군대나 병원 같은 근대적 권력조직의 메커니즘에 대한 해부, 억압적인 정치현실에 대한 비판, 소외된 주변부인의 삶의 형상화 둥 다채로운 소재로 많은 작품들을 발표했다. 주요 작품으로 「즐거운 지옥」 「폭군」 「무사와 악사J 「혼들리는 땅」 『먼동』 『남과 북』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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