文 化 財 (9) 江原地方
(01) 淸澗亭 -江原有形文化財 제32호 -高城郡 土城面 淸澗川河口언덕에 있는 朝鮮時代의 亭子로 關東八景의 하나이다. 처음 지은 年代는 알 수 없으나, 中宗 15년(1520) 郡守 崔淸이 고쳐 세웠다는 기록으로 보아 그 이전에 세운 것으로 보인다. 高宗 21년(1884) 甲申政變때 燒失되어 1928년에 再建한 앞면 3칸·옆면 2칸 팔작지붕의 樓閣形式 亭子이다. 추녀 밑에 걸린 [淸澗亭]扁額은 1953년 雩南 李承晩大統領이 쓴 것이다.
(02) 束草 香城寺址 三層石塔 -보물 제443호 -束草市 雪岳洞 7번國道에서 雪嶽山으로 들어가는 어귀에 있는데, 塔주위는 절터의 모습을 전혀 알 수 없다. 이 석탑은 2段의 基壇위에 3層塔身을 세운 新羅石塔樣式으로, 新羅末~高麗初에 건립한 것으로 보고 있다. 이 석탑은 東海岸에서 新羅時代石塔으로는 가장 북쪽에 있어 保存價値가 매우 크다.
(03) 洛山寺 虹霓門 -江原道 有形文化財 제33호 -襄陽郡 降峴面 朝鮮 世祖 13년(1467) 世祖가 洛山寺에 行次하고 절입구에 세운 무지개모양의 돌문이다. 당시 강원도는 26개의 고을이 있었는데, 世祖의 뜻에 따라 각 고을의 首領이 石材를 하나씩 내 26개의 花崗石으로 虹霓門을 만들었다고 한다. 위에 1963년에 세운 樓閣은 앞면 3칸·옆면 1칸으로 周邊地形을 이용해 虹霓石周圍에 自然石을 쌓아 特異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虹: 무지개 홍 *霓: 무지개 예)
(04) 義湘臺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48호 -襄陽郡 降峴面 新羅 文武王 16년(676) 洛山寺를 창건한 義湘大師를 기념하기 위해 1925년에 건립한 亭子로, 원래 義湘이 낙산사를 지을 때 머물면서 參禪하던 곳으로 옛부터 ‘義湘臺’라고 불렀다고 한다. 6角의 아담한 의상대는 낙산사에서 紅蓮庵 觀音窟로 가는 길 海岸언덕에 있어, 좋은 展望臺이며, 난간을 비스듬하게 세운 것이 특징이다. (*湘: 강 이름 상)
(05) 江陵 鏡浦臺 -보물 제2046호 -江陵市 苧洞 關東八景의 하나로 鏡浦湖水북쪽 언덕에 있는 樓閣이다. 高麗 忠肅王 13년(1326)에 건립했으며, 朝鮮 太祖와 世祖는 경포대에 올라 四方의 경치에 讚辭를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앞면 5칸·옆면 5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마루의 높이를 다르게 한 立體的平面인데, 1899년 郡守 鄭憲時가 重修하면서 남쪽과 북쪽에 樓마루를 加設하고 ‘得月軒’과 ‘候仙檻’이라고 했다. 내부에는 肅宗의 御製詩와 栗谷 李珥가 10살때 지었다는 [鏡浦臺賦]를 비롯해 有名人들의 글을 걸었다. (*苧: 모시풀 저 *讚: 기릴 찬 *候: 기후 후 *軒: 집 헌 *檻: 난간 함 *珥: 귀고리 이)
(06) 江陵 船橋莊 -國家民俗文化財 제5호 -江陵市 雲亭洞 孝寧大君의 11代孫 李乃蕃(1703~1781)이 건립한 조선후기의 전형적인 上流住宅으로 悅話堂·안채·東別堂· 活來亭 外 附屬建物로 이루어졌다. 10代 300여년이 지난 현재까지 그 後孫들이 거주하며 原形을 잘 보존하고 있어, 조선시대 士大夫家의 名聲과 傳統을 이어가고 있다. (*乃: 이에 내 *蕃: 우거질 번 *悅: 기쁠 열)
(07) 江陵 烏竹軒 -보물 제16호 -江陵市 竹軒洞 朝鮮中期의 木造建物로, 申師任堂과 栗谷 李珥가 태어난 집으로 朝鮮 中宗때 건축해 韓國 住宅建物중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에 속하며, 정면 3칸·측면 2칸의 팔작지붕建物로 栱包는 주택건축에서는 보기 드문 二翼工形式이다. 柱心包집에서 翼工집으로 변천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중요한 구조이다. (*翼: 날개 익)
(08) 七事堂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7호 -江陵市 溟州洞 朝鮮時代에 7가지 公務(戶籍·農事·兵務·敎育·稅金·裁判·風俗)를 보던 官廳建物이다. 仁祖 10년(1632)에 再建하고 英祖 2년(1726) 擴張했다. 高宗 3년(1866) 鎭衛隊의 廳舍로 썼으나 燒失되어 이듬해에 다시 지었다. 日帝時代부터 1958년까지 郡守나 市長의 官舍로 사용하다가 1980년 옛 모습을 되찾았다. 앞면 7칸·옆면 3칸의 팔작지붕 ‘ㄱ字形’건물이다.
(09) 江陵 臨瀛館 三門 -국보 제51호 -江陵市 龍岡洞 高麗時代 江陵客舍의 정문으로 客舍建物은 없어지고 門만 남아 있다. 客舍는 高麗~朝鮮時代 각 고을에 두었던 地方官衙의 하나로 王을 상징하는 나무패를 모셔 두고 초하루와 보름에 宮闕을 향해 절하는 望闕禮를 행했으며, 왕이 파견한 中央官吏나 使臣들이 묵기도 했다. 이 객사는 高麗 太祖 19년(936) 83칸으로 지었으며, 門樓의 扁額 ‘臨瀛館’은 恭愍王이 쓴 것이라고 한다. 몇 차례의 補修하고, 日帝强占期에는 학교로 이용하기도 했으며, 헐린 뒤 1967년 江陵警察署가 들어서고 현재는 마당에 客舍門만 남아 있다. 簡潔하고 素朴하나 洗鍊된 彫刻솜씨는 高麗時代 建築樣式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瀛: 바다 영 *衙: 마을 아 *闕: 대궐 궐 *愍: 근심할 민)
(10) 太白山 天祭壇 -國家民俗文化財 제228호 -太白市 所道洞 太白山은 <三國史記>등 여러 기록에서 神山으로 섬겨 祭天儀式의 장소였는데, 天祭壇은 이런 祭를 올리는 祭壇이다. 천제단은 太白山頂上에 있는 天王壇을 중심으로 북쪽의 ‘將軍壇’과 남쪽 아래에 있는 이름 없는 下壇으로 구성되었다. 天王壇은 2m남직한 높이로 自然石을 쌓아 남쪽으로 壇을 조성한 圓形祭壇으로, 그 위에 4角 祭壇과 大倧敎에서 檀君을 모신 장소로 [한배검]이라고 쓴 비석이 있다. 部族國家時代부터 天祭를 지냈다고 하니 역사가 매우 오래되었음을 알 수 있다. 太白山 天祭壇은 新羅, 高麗, 朝鮮을 거쳐 日帝强占期까지 天祭를 지낸 儀式이 전해지며, 開天節에는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장소로 이어지고 있으며, 江原道民體典의 聖火採火場所이다. (*倧: 상고 신인 종)
(11) 鐵原 勞動黨舍 -國家登錄文化財 제22호 -鐵原郡 鐵原邑 1946년 共産治下에서 地域住民들의 강제노력동원과 募金으로 건립한 地上 3층건물로, 社會主義 리얼리즘系列의 건축특징과 時代性을 잘 반영하고 있는 건축물로, 언덕을 이용한 基壇設定과 對稱的平面, 比例가 정돈된 立面으로 共産黨舍의 당시 權威를 표현하고 있다. 일부 構造體의 철근콘크리트사용과 花崗石과 콘크리트, 벽돌 및 木材의 混用을 통해 당시의 建築一面을 엿볼 수 있으며, 分斷과 戰爭의 悲劇을 증언하는 중요한 자료로, 현재 安保觀光地로 활용하고 있다. (*稱: 저울 칭 *崗: 언덕 강)
(12) 漢灘江 大橋川 玄武岩 峽谷 -천연기념물 제436호 -鐵原郡 東松邑~京畿 抱川市 官仁面 漢灘江沿岸에는 玄武岩平原이 발달하고 있으며, 현무암평원을 貫流하는 漢灘江流路에는 景觀이 특이한 玄武巖峽谷이 형성되었다. 鐵原 大橋川 玄武岩峽谷은 그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것으로 新生代 第四紀 地質과 지형발달 이해할 수 있다. 峽谷의 谷壁 곳곳에 현무암의 柱狀節理가 아름답게 분포하고 있다. 주상절리는 地表로 분출한 鎔巖이 冷却될 때 수축되면서 형성된 六角기둥인 柱狀節理가 아름답게 분포했는데 河床뿐만 아니라 峽谷의 絶壁에도 발달했다. 玄武巖峽谷은 길이 약 1.5Km, 깊이 20∼30m로 景觀이 빼어나며 주변에는 孤石亭, 蓴潭溪谷등의 觀光地가 있다. (*抱: 안을 포 *灘: 여울 탄 *鎔: 쇠 녹일 용)
(13) 麟蹄 鳳頂庵 五層石塔 -보물 제1832호 -麟蹄郡 北面 龍垈里 雪嶽山 小靑峰북서쪽 아래 鳳頂庵(△1,244)에 있는 부처의 眞身舍利를 奉安한 높이 3.6m의 石塔이다. 新羅 善德女王때 慈藏律師가 唐나라에서 道宣律師로부터 受戒한 후 袈裟, 鉢盂와 釋迦世尊의 眞身舍利를 나누어 받아 가지고 돌아와 善德女王 12년(643) 탑을 세우고 舍利를 奉安했다고 한다. 鳳頂庵이 韓國 五大 寂滅寶宮의 하나가 되었다. 石塔은 鳳頂庵오른쪽 암벽 뒤에 거대한 巖壁을 地臺兼 基壇으로 삼아 覆蓮받침 위에 初層塔身을 세운 5層石塔으로, 2층이상의 塔身의 높이는 비슷하면서 塔身과 屋蓋의 폭이 4/5정도의 比率로 줄어 均衡을 이룬다. 慈藏이 세웠다고 하나 各部의 作風으로 보아 高麗時代의 塔으로 추정된다. 탑의 모양이 原形대로 잘 보존되어 있고 精巧한 均衡比가 돋보인다. (*麟: 기린 인 *蹄: 급 제 *鉢: 바리때 발 *盂: 사발 우 *覆: 다시 복 *蓋: 덮을 개)
(14) 平昌 月精寺 八角九層石塔 -國寶 제48-1호 -平昌郡 珍富面 慈藏律師가 창건한 月精寺에 있는 탑으로, 그 앞에는 供養하는 모습의 石造菩薩坐像(국보 제48-2호)이 마주보며 앉아 있다. 탑은 8角의 2段基壇위에 9층 塔身을 올린 뒤, 머리장식을 얹어 마무리했다. 塔身部는 일반적인 석탑이 위층으로 올라 갈수록 급격히 줄어드는데 비해 2層 塔身부터 거의 같은 높이를 유지하고 있으며, 1층 탑신의 4면에 작은 龕室(佛像을 모시는 방)을 마련했다. 지붕돌은 여덟 곳의 귀퉁이마다 風磬을 달았다. 지붕돌 위로는 머리장식이 완벽하게 남아 있는데, 아랫부분은 돌로, 윗부분은 金銅으로 만들어서 화려한 아름다움을 더해주고 있다. (*龕: 감실 감 *磬: 경쇠 경) 高麗時代에는 4角平面에서 多角形의 多層石塔이 우리나라 북쪽지방에서 주로 유행하는 흐름 속에서 만든 것으로, 高麗前期 석탑을 대표하는 작품이다. 당시 佛敎文化特有의 화려하고 귀족적인 면모를 잘 보여주고 있으며, 전체적인 比例와 彫刻手法이 착실해 多角多層石塔을 대표할 만하다. 또한 靑銅으로 만든 風磬과 金銅으로 만든 머리장식을 통해 金屬工藝의 手法을 살필 수 있어 중요한 자료이다.
(15) 太宗臺 -강원도 문화재자료 제16호 -橫城郡 講林面 講林川邊에 있는 태종대는 朝鮮 太宗과 그의 스승 耘谷 元天錫에 관련된 逸話가 있는 곳이다. 耘谷은 太宗이 王位에 오르기 전에 ‘王子의 亂’으로 실망해 官職을 버리고 이곳에 隱居헸다. 太宗이 卽位後 스승을 찾아 이곳에 왔으나, 스승은 빨래하는 할머니에게 거짓으로 말하고 避身했다. 太宗은 할머니가 알려준 바위에서 기다리다 스승이 자신을 만나려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돌아갔다. 그 뒤 이곳을 太宗이 머물렀던 곳이라고 [太宗臺]라 부르고 碑石과 碑閣을 세워 보호하고 있다. (*耘: 김맬 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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