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으로 파란만장한 일생을 살았던 김대중 전 대통령의 자서전이 나왔다. 대통령 후보로만 27년, 그의 삶은 그 자체가 한국현대정치사였다. 그처럼 역사의 중심에서 일생을 보낸 사람은 격동의 한국현대사에서 다시 찾기 어려울 것이다. 그는 자서전 서문에서 이렇게 썼다.
"돌아보면 파란만장한 일생이었다. 정계에 입문하여 국회의사당에 앉는데까지 9년, 1970년 대통령 후보로 선출된 후 대통령이 되기까지는 무려 27년이 걸렸다. 다섯 번의 죽을 고비를 넘겼고, 6년간 감옥에 있었고, 수십 년 동안 망명과 연금 생활을 했다. 대통령 후보, 야당 총재, 국가 반란의 수괴, 망명객, 용공분자 등 나의 호칭이 달라질 때마다 이 땅에는 큰 일이 있었다. 그 한가운데 서 있었다."
이 말은 조금도 과장이 아니다. 워낙 겪은 일이 많은 분인지라, 책의 분량이 만만치 않다. 1권과 2권을 합하여 근 1400여 쪽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이다. 김대중 대통령 자신의 구술을 바탕으로 경향신문 김택근 논설위원이 대표집필 했고, 김대중 대통령 자신의 검토와 수많은 관련인사들의 자문과 감수를 받았다고 한다. 가히 '정본 자서전'이라 하기에 손색이 없다.
▲ 1권과 2권을 합하여 근 1400여 쪽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의 <김대중 자서전>이 나왔다. ⓒ연합
김대중 대통령은 이 자서전을 통해 처음으로 당신의 어머니가 작은댁이었음을 고백했다. 어린 시절은 물론이고 정치인이 된 뒤에도 그는 이 문제 때문에 "많은 공격과 시달림을 받았지만 침묵"했었다고 말했다. 김대중은 이 이야기를 길게 하지 않고 다만 "하늘에 계신 어머니 당신이 이 세상에서 맺었던 모든 인연과 화해하셨을 것"이라는 표현으로 말할 수 없는 아픔을 감싸 안았다.
그가 태어난 해는 1924년. 일제는 1944년부터 조선청년들에 대한 징병을 실시했다. "묻지마라 갑자생"이라는 말은 일제 때는 징병 1기로, 한국전쟁 때는 국민방위군으로 이리저리 끌려다녀야 했던 1924년 갑자년 생들의 고단한 삶을 상징하는 표현이다. 김대중이 바로 그 갑자생이다. 일제하에서 전쟁터에 끌려갈까봐 걱정하던 평범한 청년이던 김대중은 호적을 고쳐 징병을 모면했고, 그러던 사이 해방을 맞았다. 해방 후 목포에서 사업을 하며 건국준비위원회와 진보적인 신민당에 잠시 몸담았던 김대중은 이 경력 때문에 평생 '용공분자'라는 비난과 의심을 수구진영으로부터 받아야 했다.
"김구, '좌우합작'에 뛰어들었어야…조봉암, 난국 돌파하는 요령 부족"
이 책에서 눈길을 끄는 것은 김대중이 살아오면서 직간접으로 접했던 수많은 지도자들에 대한 평가이다. 특히 백범 김구와 조봉암에 대한 평가에서는 김대중의 삶의 자세가 묻어난다. 김대중은 '정치인' 김구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김구 선생을 감히 평한다면 길이 빛난 독립투사였으며 절세의 애국자였지만 정치인으로는 아쉬운 점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좌우 합작' 논의가 있을 때 선생은 그 속으로 뛰어들었어야 했다. 분단을 막아야 한다면 처음부터 적극적으로 행동에 나서야 했다. 그리고 신탁통치를 받아들여 3년이나 5년 후에 독립을 모색했어야 했다. 때를 놓쳐 남쪽만의 단독정부를 수립한다고 결정되었다면 총선에 참여했어야 옳다고 본다. 김구 선생이 전면에 나서 총선에 참여했다면 소속 정당은 과반 의석을 확보했을 것이다. 그렇게 됐다면 이승만과 한민당은 궁지에 몰렸을 것으로 본다. 이것은 나만의 추측이 아니라 다시 민심의 도도한 흐름이었다." (1권 67쪽)
김대중은 "역사에 가정법을 동원하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은 없지만"이란 단서를 달고 만약 김구가 5.10선거에 참여했더라면 이승만은 대통령이 되지 못했을 것이고, 이 땅에 반공을 빙자한 친일파에 의한 독재가 발붙이지 못했을 것이라고 아쉬워했다. '정치인' 김대중은 "정치인은 최선이 아니면 차선을 선택해야 한다. 상황이 나쁘면 최악을 피하고 차악을 택해야 할 때도 있는 것이다. 정치인이란 현실을 살펴 미래를 향한 진리를 구하는 것이지 진리만 붙들고 현실을 도외시하면 안 된다는 것이 정치인으로서의 내 생각이다"라고 밝혔다.
김대중은 또 자신이 조봉암에게 과거 공산당의 핵심 간부였다가 전향한 조봉암이야말로 "국민에게 왜 공산당이 나쁜지를 알리는 적임자"라며 왜 공산당을 그만두었는지에 대해 이야기 할 것을 권유했던 사실을 고백했다. 이에대해 조봉암은 "김 동지 말이 맞긴 한데, 그럴 경우에 지지층이 이탈할 수도 있다고 우려하는 사람도 있습니다"라고 답했다고 했다. 김대중은 이렇게 썼다.
"나는 실망했다. 지도자라면, 적어도 조봉암 같은 큰 정치인이라면 국민을 위해 결단할 때 결단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자신에게 집결되는 표도 중요하지만 그 표에 대해서 할 말을 하는 그런 용기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설사 그 표가 떨어져 나가더라도 그렇게 했어야 했다. 그런데 그는 망설이고 있었다. 그 후 선생이 간첩 혐의로 사형을 당했기에 더욱 아쉬웠다. 내가 아는 조봉암 선생은 인간미가 넘치는 매력적인 인물이었다. 단지 난국을 돌파하는 요령이 부족했다." (1권 98~99쪽)
김구와 조봉암에 대한 평가를 보면 김대중이 어떻게 살아왔고 살아남았는지가 분명해진다. 김대중은 이 험난했던 한국현대사에서 숱한 죽을 고비를 넘겨가며 살아남았고, 마침내 평생의 소원인 대통령까지 되었다. 그는 "상황이 나쁘면 최악을 피하고 차악을 택"하는 인내와 "난국을 돌파하는 요령"을 김구와 조봉암의 좌절이라는 역사적 비극으로부터 배웠다. 정말 그는 친일파가 득세하여 반공을 내세워 독재를 일삼던 이 땅에서 김구와 조봉암처럼 죽임을 당하지 않고 '살아남아' 자신의 꿈을 정책으로 집행해 볼 기회를 가진 정치인이었다. 그 자신의 표현에 따르면 그는 "원칙을 고수하면서도 방법에서는 유연한 실사구시"를 추구했다.
"87년 대선, 나라도 양보했어야…"
1970년대와 1980년대 청년 학생들은 김대중이 진보적이지 못하다고, 정치노선이 선명하지 못하다고 비난하거나 낮게 평가했던 적이 있다. 그 자신이 "나라도 양보를 했어야 했다. 지난 일이지만 너무도 후회스럽다"라고 이 자서전에서 고백한 1987년의 대통령 선거에서 보인 분열과 패배의 책임은 그에게 결코 벗겨지지 않는 멍에로 남아있다. 한 때 열심히 운동하던 사람들 중에도 김대중이 싫다고 신한국당이나 한나라당으로 가버린 자도 한둘이 아니다. 특히 1997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김대중이 5.16 군사반란의 '원흉' 김종필과 손잡았을 때, 진보진영의 많은 사람들은 '대통령병 환자' 김대중에게 손가락질을 해댔다.
한 사람의 삶에서는 겉으로 보이는 어떻게 살아왔나보다 어떻게 죽었나가 그의 삶의 색깔을 보다 분명히 보여주는 경우가 있다. 수없이 타협하고 돌아가야 했던 김대중의 삶은 어쩌면 2009년 8월의 그의 '전사'가 아니었으면 대통령이 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원칙을 져버린 권모술수에 능한 한 정치인의 삶으로 저평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명박 정권의 등장 이후 민주주의 위기, 남북관계의 위기, 서민경제의 위기 등 3대 위기가 닥치고, 급기야 노무현 대통령이 서거하는 절박한 상황에서 늙고 병든 김대중은 뜬구름 잡는 우아한 얘기만 하지 않았다. "나는 그렇게 살아오지 않았다!" (2권 585쪽)라는 한마디는 참으로 무게가 있었다. 노무현 대통령의 서거 이후 입원하기 전까지 두 달 동안 이 땅에서 90을 바라보는 노인 김대중만큼 열심히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세력과 맞장을 뜬 사람은 없다. '행동하는 양심'이었던 그는 '행동하지 않는 양심'은 결국 악의 편이라며, 하다못해 바람벽에 대고 욕이라도 하라며 자신보다 젊은 모든 사람들을 독려하다가 지쳐 쓰러졌다. 김구와 조봉암과는 또 다른 의미에서 민주주의 전선에서 쓰러진 것이다.
눈물 많은 정치인 김대중
김대중은 눈물이 많은 정치인이었다. 1987년 10월 대통령 선거 과정에서 처음으로 망월동 묘지를 방문하여 광주 유가족들과 부둥켜안고 통곡했고, 1994년 1월 문익환 목사의 빈소에서 오열했고, 2009년 5월 노무현 대통령의 장례식에서 권양숙 여사의 손을 잡고 울음을 터트린 것은 필자의 기억에 또렷이 남아있다. 이 자서전을 보니 그 때 이외에도 김대중은 여러 번 눈물을 흘렸다. 1971년 의문의 교통사고를 당해 간신히 목숨을 건졌을 때, 함께 사고를 당한 택시기사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펑펑 울었고, 납치사건에서 살아 돌아와 기자회견을 하며 눈물을 흘렸고, 1980년 신군부에 의해 투옥되었을 때, 대전교도소에 있던 큰아들 홍일이 보낸 편지를 받고 눈물이 앞을 가려 몇 시간 동안 봉투를 어루만지기도 했다. 어디 김대중만 울었었나, 그는 지지자들의 눈물을 타고 대통령이 되었다. 그가 대통령 선거에서 떨어졌을 때, 특히 1992년 대통령 선거에서 떨어졌을 때 그의 지지자들은 슬픔을 넘어 절망의 눈물을 흘렸고, 1997년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되었을 때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 노무현 전 대통령 장례식에서 권양숙 여사의 손을 잡고 오열하는 김대중 전 대통령. ⓒ연합
"한여름밤, 나는 초인종을 눌렀다. 막 퇴근한 가장처럼"
김대중 자서전은 모두 2권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1권은 대통령이 되기까지, 2권은 대통령 취임이후 서거까지의 기간을 담았다. 김대중이라는 인물이 워낙 오랜 기간 한국현대사의 한복판에 있었다보니 1400페이지라는 적잖은 분량도 그가 겪은 일을 담기에는 턱없이 부족해 보였다. 김대중은 대통령 후보로만 27년을 보냈는데, 27년이란 우리 독립운동사에서 역사가 가장 긴 단체인 임시정부의 활동기간과 일치한다. 1924년 출생부터 1997년 말의 대통령 선거까지 70년이 넘는 기간을 담은 1권은 호흡이 대단히 빠른 반면, 대통령 재임기간 5년을 500여 쪽 이상 할애한 2권의 호흡은 1권과는 전혀 다른 책이라 할 만큼 좀 쳐지는 느낌이 든다. 2권에 서술 된 사건이나 내용은 '일지'라 할 만큼 여러 가지 일을 빠짐없이 담다보니 너무 번잡해져버렸다. 집중과 선택의 아쉬움이 남는다. 1권의 경우 김대중만이 증언해 줄 수 있는 흥미로운 사건들이 대단히 많은데, 너무 호흡이 빠르게 처리된 점이 아쉽다. 이것은 어쩌면 현대사학도의 욕심일지도 모른다. 일반 독자들이 책을 읽기에는 1권은 아주 잘 쓰였다. 한국현대정치사의 큰 흐름의 여운을 남기면서 빠르게 전개된다. 특히 1973년 납치사건에서 살아 돌아와 귀가하는 과정을 한 단락으로 묘사한 부분은 참으로 압권이다. "대한민국, 한여름 밤, 나는 초인종을 눌렀다. 막 퇴근한 가장처럼."
모든 자서전에서 똑같이 마주하게 되는 문제이지만, 당사자가 말하고 싶어 하는 문제와 독자나 연구자들이 알고 싶어 하는 문제가 일치하는 법은 없다. 아무리 솔직하고 자세한 자서전도 감추거나 빠트린 것이 있다. 여기에는 의도적으로 감춘 것도 있을 것이고, 당사자가 중요하게 여기지 않아서 언급하지 않은 것도 있을 것이다. 자서전의 집필자인 김택근 논설위원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집에서 청소하는 사람이나 밥하는 사람이나 모두 20년 이상 DJ 곁을 머물던 이들이다. 사람을 내치지 않더라"라고 썼지만, 늘 감시와 회유와 공작의 대상이 되었던 김대중의 정치적 동지들 중에는 김대중에 의해서 내쳐진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그런 갈등의 이야기에 대해서는 권노갑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1997년 말 외환위기가 닥쳤을 때, 외환위기를 불러온 책임을 물어 재벌개혁과 관료개혁을 해야 한다고 역설했던 당선자가 대통령에 취임한 뒤 왜 원래 구상했던 재벌개혁과 관료개혁에서 멀어졌는지, 1971년 대통령 선거에서 돌풍을 일으킬 때 대중들의 가장 적극적인 호응을 끌어낸 예비군 폐지문제를 왜 대통령이 된 뒤 안보 환경이 1971년과는 비교가 되지 않게 좋아졌음에도 불구하고 거론조차 안 했는지 아쉽게도 아무런 설명이 보이지 않는다.
'서자'로 태어나 민주주의 '적통'을 세운 거인의 삶
나는 인권 대통령 김대중의 주요업적 중의 하나로 그가 2001년 8월의 한국-베트남 정상회담에서 한국의 월남전 참전과 관련, 불행한 전쟁에 참여해 본의 아니게 베트남인들에게 고통을 준데 대해 미안하게 생각한다며 사과한 것을 주저 없이 꼽는다. 그런데 자서전에는 1998년 정상회담 당시 불행한 과거사를 한국 대통령으로서 처음 언급한 사실만 기록돼 있을 뿐, 한국군에 의한 베트남 민간인 학살사건이 크게 여론화된 뒤 김대중 대통령이 베트남에 정식으로 사과한 일이나, ODA의 자금으로 민간인 학살 지역 40여 곳에 학교를 지어준 일은 빠져있다. 또 2002년 10월 양심에 따른 병역 거부 문제가 불거졌을 때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인권대통령으로서는 뜻밖에도 양심적 병역 거부는 절대 용납할 수 없다는 태도를 취한 일도 전혀 나오지 않는다. 이런 사안들은 자서전이 아니라 평전이 쓰여질 때 중요한 쟁점이 될 수 있는 대목인데, 당사자의 입장을 들을 수 없는 점이 아쉽다.
김대중은 참으로 파란만장한 인생을 산 거인이었다. 민주주의는 그의 일생을 관통한 신념이요 가치였다. 그가 동구 사회주의 체제가 붕괴한 원인을 사회주의가 잘 못 돼서가 아니라 민주주의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본 것은 참으로 김대중다운 탁견이라 할 수 있다. 김영삼에게 민주주의란 대통령이 되기 위한 수단에 불과했다면, 김대중은 "민주주의가 후퇴한다면 나의 삶은 아무 의미가 없다"라는 말을 삶과 죽음을 통해 보여주었다. 한국의 민주주의는 이제 김대중이 남긴 역사와 유지를 떠나서는 이야기 할 수 없다. 한국의 민주화 운동이란 분단과 친일파의 득세로 이지러진 민주주의를 바로 잡아 나가는 과정이었다고 할 수 있다. '서자'로 태어난 김대중은 이 힘겨운 여정에서 민주주의의 '적통'을 확립했다.
▲ 서자로 태어나 민주주의의 적통을 확립한 김대중 전 대통령. 그는 2009년 8월 영면에 들었다. ⓒ연합
노근리 사건을 다룬 영화 <작은 연못>이 '의미심장한 선전'을 하고 있다는 기사에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극적인 장치 없이 전쟁의 본질이 학살이라는 것을 우직하게 밀고 나간 영화가 관객들의 눈길을 끌었다는 사실은 영화의 기획과 제작과정을 먼발치에서 지켜 본 역사학도에게는 매우 고무적인 일이다. 노근리 사건을 영화로 만들어보자는 얘기가 처음 오간 것이 2001년 11월이고, 시나리오 개발이 시작된 것이 2003년 3월로 참 오랜 산고 끝에 영화가 나왔다. 혁명가 김산의 생애를 다룬 영화 <아리랑>의 기획에 참여하게 된 인연으로 <작은 연못>의 초기 논의과정에 몇 마디를 보탰는데, 먼저 시작된 <아리랑>은 아직 시나리오도 완성 못했으니 <작은 연못>의 '의미심장한 선전'이 반가우면서도 부러울 뿐이다.
▲ 작은 연못
옆에서 지켜 본 영화의 제작과정은 신기하고도 감동적이었다. 송강호, 문성근, 문소리, 박광정, 강신일, 이대연, 유해진, 박원상, 김뢰하, 전혜진, 이성민, 김승욱, 최종율 등 142명의 배우가 출연료를 받지 않고 나오고, 수많은 스태프들, 그리고 편집과 CG 등 후반기 작업을 담당한 분들도 자신의 시간과 기술을 아무 조건 없이 내놓았다. 영문도 모른 채 죽어간 노근리 사람들을 넘어 전쟁이란 전쟁이 이름도 남기지 않고 죽여 버린 사람들에게 뒤늦게나마 몸뚱이로 인사를 드린 것이다. 제대로 돈 들여 만들었으면 50억은 가볍게 넘었을 제작비는 이렇게 해서 10억 아래로 떨어졌다. 이렇게 만들어진 영화는 일찍이 없었다.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의 제작과정도 감동적이었지만, 돈을 내는 것보다 어려운 게 몸뚱이로 참여하는 일이다. 한국의 영화인들은 다시는 전쟁과 학살이 없어야 한다는 마음을 이렇게 몸으로 표현했다.
영화를 함께 본 학생들은 학살의 느닷없음에 충격을 받았다고 했다. 모든 전쟁에서 학살은 필연이고, 학살은 전쟁의 다른 이름이지만, 특정한 개인이나 집단에게 학살은 <작은 연못>이 보여주는 것처럼 느닷없이 찾아온다. 그렇게 느닷없는 학살은 노근리에서만 일어난 게 아니다. 미군에 의한 학살만 해도 60여 건, 진실ㆍ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에 접수된 민간인학살 관련 진정사건의 총 수는 8천여 건에 달한다. 천안함 희생자들처럼 한 명 한 명 이름을 부르는 것은 고사하고, 학살이 일어난 동네의 이름만 기록하는 것도 숨이 가쁘다. 전투에서 죽은 사람보다 학살로 죽은 사람이 더 많다는 끔찍한 현실의 단면을 <작은 연못>의 카메라는 담담하게 보여준다. 라울 힐베르크의 <유럽유태인의 파괴>같은 기록이나 다큐멘터리 <쇼아>처럼 영화의 가감 없는 담담하고 건조한 묘사는 불편한 진실을 더 생생하게 전해준다.
▲ 작은 연못
수십 만 명이 이렇게 죽어갔는데, 그걸 다룬 영화가 나오는데 전쟁이 끝나고 60년 가까운 세월이 흘러야했다. 민주화가 시작되고서야 비로소 우리는 학살이라는 '죽이는 이야기'를 접하게 되었다. '과거청산'이라는 이름으로 친일잔재청산과 민간인학살과 군사독재시기의 죽음과 고문과 용공조작을 우리 사회의 의제로 가져온 노무현이라는 대통령은 바위에서 뛰어내려야 했다. 전쟁을 부추기는 자들, 아니 전쟁을 못해 안달이 난 자들이 목소리를 높이는 오늘, <작은 연못>은 전쟁이란 어떤 것인가를 낮은 목소리로 들려준다. <작은 연못>은 민주화 운동과 더불어 성장한 문화역량이 아무도 기억하지 않았던 자들의 죽음에 바친 헌사이다. 2010년 4월, 작은 연못가에 소박한 묘비명이 처음 섰다. 이름 없이 죽어간 사람들이 묻힌 곳은 망망대해와도 같은데.
[기고] 그들이 '광복'을 싫어하는 이유 : "건국절? 차라리 8·29를 '문명절'이라 해라"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를 작은 소동이 벌어지고 있다. 광복절의 명칭을 버리고, 그 날을 건국절로 하겠단다. 1919년(기미년)부터 민국 연호를 셈하기 시작하겠다고 말했던 이승만도 놀랄 만한 일이다.
광복과 건국은 절대로 서로 경쟁하는 개념이 아니었다. 이승만이 왜 하필 8월 10일도 아니고, 20일도 아니고, 8월 15일을 정부 수립일로 정했겠는가. 그것은 바로 우리 민족이 일본 제국주의로부터 해방이 된 8월 15일의 의미를 이어받아 정부 수립을 더욱 뜻깊게 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광복을 지우고 '건국'만을 내세우겠다니. 참으로 뉴라이트들이 하는 짓이란….
그들은 '간절하나 허망한 욕심'을 역사라 주장한다
솔직히 이런 글을 쓰는 것조차 민망하기 짝이 없다. 역사를 공부하다 보면, 모든 역사적 사실을 쓸 수 있는 것이 아니고 거기서 일어나 특정 사건들을 취사선택하는 것이기 때문에, 보는 이의 관점에 따라 서술하고자 하는 역사의 내용이 달라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런 견해의 차이는 우리의 역사 이해의 수준을 높여주고, 건설적인 토론을 가져온다.
▲ 역사를 공부하다 보면, 모든 역사적 사실을 쓸 수 있는 것이 아니고 거기서 일어나 특정 사건들을 취사선택하는 것이기 때문에, 보는 이의 관점에 따라 서술하고자 하는 역사의 내용이 달라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지금 뉴라이트들이 내놓는 얘기는 역사를 공부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대응을 하기조차 민망해진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수립 경축식 전경. ⓒ건국60주년 기념사업위원회
그런데 지금 뉴라이트들이 내놓는 얘기는 역사를 공부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대응을 하기조차 민망해진다. 지금 이 소동은 견해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역사를 서술하다 보면 실제 일어난 일이 있고, 그것을 바라보는 나의 이야기가 있고, 너의 이야기가 있고, 그들의 이야기가 있을 수 있다. 이런 차이를 갖고 상호 토론하고 교류하면서 역사 인식이 진화된다. 그런데 여기, 엉뚱한 자들이 종종 끼어든다. 그들은 실제 일어난 일을 자신의 관점으로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이래었었었드랬으면…'이라는 "간절하나 허망한 욕심"을 갖고 그것을 역사라고 주장한다. 참, 같이 놀아주기 난감한 사람들이다.
'광복'과 서로 대립하거나 배제하는 것은 아니지만, 경쟁이라면 경쟁할 수 있는 용어로 우리가 떠올릴 수 있는 것은 '해방'이다. 그 차이가 심하다고 할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해방은 좌파 쪽에서 조금 선호했고, 광복은 우파 쪽이 조금 선호한 용어였다. 빼앗긴 것을 되찾는다는 의미에서 광복이 호소력이 있었지만 좀 복고적인 냄새가 난다는 의미에서 진보적인 사람들은 해방을 선호했다.
독립 운동 진영의 우파들이 광복이라는 말을 선호했음은 임시정부가 조직한 군대의 이름이 광복군이었고, 임시정부에 참여한 제 당파가 모인 연합체가 '한국광복진선'이었고, 해방 후의 정부(건국 후)가 이 날을 광복절로 삼았고, 독립운동가 출신들이 모인 최대의 단체가 광복회인 점에서 잘 나타난다. 또한 좌파가 해방을 조금 선호했음에도, 광복이란 용어를 거부하지 않았음은 1936년 김일성이 조직한 연합전선체의 명칭이 '조국광복회'였던 것에 잘 나타난다.
나 자신도 해방이나 광복이란 말이 꼭 건국과 대립되는 용어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민족 해방 운동가들과 일제의 압제 속에서 고통 받던 대중들이 꿈꿨던 해방, 또는 광복이란 일본 제국주의의 굴레를 벗어나는 것도 있지만, 우리 손으로 우리가 꿈꿨던 정부와 사회를 건설하는 것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일각에서는 건국 60주년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면 임시정부를 완전히 부인하는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임시정부도 대한민국을 완전히 '건국'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임시정부가 '건국 강령'을 채택한 것 아니겠는가. 건국은 해방 또는 광복의 마무리 작업이라 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광복과 건국은 절대로 배타적인 개념이 아니다.
그들이 '광복절'을 싫어하는 이유
그런데, 왜 저들은 수십 년간 아무 탈 없이 잘 사용해온 광복절의 명칭을 바꾸자며 황당한 일을 벌이고 있을까. 우리 민족 대다수에게 건국과 광복은 대립되는 개념일 수가 없지만, 몇몇 사람들, 그리고 그들의 생물학적 또는 정치적 후예들에게는 해방이나 광복의 의미가 전혀 다르게 다가올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광복'하면 누가 떠오르겠는가. 이승만 정부가 제정한 광복절 노래에도 나와 있듯이, "기어이 보시려던 어른님, 벗님", 즉 독립 운동 과정에서 스러져간 선열들을 떠올리게 됨은 너무나 당연한 일 아니겠는가. 순국선열들을 떠올리게 되면, 그 반대편에는 당연히 친일파가 어른거리게 마련이다.
순국선열에 대한 묵념을 빠트릴 수 없는 광복절은 당연히 친일파를 떠올리게 되는 날이다. 악질 친일파들에게 우리가 광복절이라는 이름으로 기념하고 있는 1945년 8월 15일은 정말 죽을 뻔했던, 기분 나쁜 날이다. 민족 구성원의 대다수는 일제의 압박에서부터 벗어났지만, 극소수의 친일 세력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박탈당했을 뿐만 아니라 생사가 어찌될 지를 가늠할 수 없는 불안의 구렁텅이로 빠진 날이었다.
그들에게는 참으로 '다행히'-민족 전체에게는 엄청난 불행이었지만 분단이 됐고, 외세가 들어왔다. 그런 혼란 속에서 친일파는 살아남았다! 그냥 살아남은 게 아니다. 보통 친일파가 아니라 친일파 중에서도 가장 악질이라고 할 수 있는 민족 반역자들이 일제 잔재를 청산해야 한다고 주장하던 민족적 양심을 가진 세력을 거꾸로 청산하고 살아남은 것이다. 얼마나 감격스러웠을까. 그래서 그들은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 기념일을 건국절이라는 이름 아래 기념하려고 한다.
국가 정체성? 제헌 헌법이나 읽어보시지
지금 광복절을 건국절로 바꾸자는 해괴한(건국절이라는 용어가 해괴한 것이 아니라, 그들의 속셈이 참으로 해괴한 것이다) 짓을 벌이는 자들은 입만 열면 대한민국의 국가 정체성을 내세운다. 그런데 솔직히 저자들이 대한민국 제헌 헌법이나 제대로 읽어보고 국가 정체성을 떠벌이는지 의문이다. 대한민국 국가 정체성의 뿌리를 우리가 어디에서 찾을 수 있겠는가. 그것은 대한민국 임시 정부와 제헌 헌법이 아니겠는가.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우리 제헌 헌법은 3.1운동의 정신을 계승한다는 것을 헌법 전문에서 분명히 했고, 또 부칙에서는 친일 반민족 행위자 처벌에 대한 헌법적 근거를 마련했다. 우리의 제헌 헌법은 오늘날 우리가 촛불 집회에서 즐겨 노래하듯이 '대한민국은 민주 공화국이고, 대한민국의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자유민주주의 원칙을 천명했다.
그리고 경제면에서는 지금 뉴라이트들이 떠들어대는 시장 만능주의 내지는 민영화 지상주의가 아니라 사회주의적 통제 경제에 가까운 경제 민주주의를 원칙으로 삼았다. 중요 산업 국유화, 토지 국유화, 무상 교육, 무상 치료와 같은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건국 강령-임시정부 뿐 아니라 해방 전야 모든 민족 해방 운동 세력의 공통된 약속 등-을 골자로 한 것을 이어받았기 때문에, 대한민국은 좌파는 물론이고 백범 김구 선생과 같은 중간파(남북협상파)가 참여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이와 같은 진보적인 내용을 헌법에 담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이 대한민국의 정체성이다.
이 정체성에 입각할 때 광복과 건국은 절대로 대립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렇게 수립된 대한민국의 첫 번째 과제는 역시 친일 반민족 행위자의 청산이었다. 그러나 대한민국 '건국' 1년이 채 안 된 1949년 5월과 6월, 남노당 프락치 사건, 반미특위 해산, 백범 김구 선생의 암살 등 반민족 행위자들이 주축이 된 친위 쿠데타가 일어났다. 이들은 대한민국의 핵심 과제였던 친일 잔재 청산을 좌절시켰다. 그리고 이들이 장악한 대한민국에서 국가보안법은 초헌법적 지위를 차지하게 됐다. 저들이 입만 열면 떠들어대는 국가 정체성이란 제헌 헌법에 기초한 정체성이 아니라 바로 '국가보안법 정체성'이다.
그 '아버지'들조차 쑥스러워할라
광복절을 건국절로 바꾸자고 주장하는 자들은 현재의 근현대사 교과서가 자학사관에 빠져있다면서, 이른바 "대안교과서"라는 화려한 '쉬래기'를 내놓았다. 저들은 객관적인 역사를 서술한다고 표방했지만, 사실 군사독재정권 시절 국정 국사교과서보다도 훨씬 더 편향적인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혀 있다.
1970~80년대의 국정 국사교과서는 친일파 민족 반역자들에 대한 언급을 회피했다. 저들이 감추고자 했던 친일 문제를 자꾸 들춰내면, "말 많으면 빨갱이"라고 탄압을 받았다. 그러나 그 시절, 친일의 혐의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던 군사정권의 실력자들은 자신들의 친일 경력을 감추려고 했을지언정 감히 그것을 미화할 엄두를 내지는 않았다. 그게 그들의 최소한의 미덕이라면 미덕이었다.
그런데 지금 저들은 친일을 대놓고 미화하려 하고 있다. 저들에게 박정희는 산업화의 아버지, 이승만은 건국의 아버지, 친일파는 현대 문명의 아버지였다. 어쩌면 이완용은 '실용의 아버지'일런지도 모른다. 너무 많은 아버지를 가진 저 자들은 그 '아버지'들조차 쑥스러워할 그런 짓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일본 제국주의의 한국 지배에 연연하지 말고, 독재 정권 아래에서도 법정에 끌려가 애국가를 부를만한 자유가 있었다고 감격해야 한다는 뉴라이트들이여, 차라리 솔직하게 그렇게 광복절을 지워버리고 싶으면 광복되기 이전 독립운동가들이 국치일로 아프게 기억했던 8월 29일도 이름을 바꿔야 하지 않겠는가. 당신들의 아버지들이 그 자랑스러운 현대 문명을 받아들인 '문명절'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