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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산이씨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후손들 원문보기 글쓴이: 길리성
을사보호조약 (乙巳保護條約) 을사늑약( 勒約)
한일협약 (韓日協約)
제 1차 <한일협약 ( 韓日協約) >
<러일전쟁> 으로 예상을 뒤엎고 <일본>이 승리하자 ,< 대한제국> 과 <러시아>의
모든 <조약>이 <폐기> 되었다 . 1904년 < 러시아> 와의 전쟁중 에도 <일본>은
그해 8월8일 < 윤치호>와 <하야시> 공사 사이에 제 1차 <한일협약>
이 체결 됐는데 , 협약내용 에는 <일본>이 추천한 <외국인> 1명을
<외교고문> 으로 삼는다 .라는 내용대로 <외교 고문>은
< 친일파 미국인 > 스티븐스( Stevens) 가 추천 됐고
< 일본인 고문>이 수명 왔다 . 그러나 <외교고문>
스티븐스 는 월급은 <대한제국>에서 받고 일은 < 일본>을 위해
일을 했기 때문에 후에 <전명운 , 장인환 >의사 에게 <미국>에서 죽임을 당한다 .
( 사진은 1908년 3월 23일 <미국> 쌘프란시스코 에서 <전명운 , 장인환>의사 의 총에
사살된 <친일파 미국인> 스티븐스 의 기사 ) 이사건은 <미국전역>을 떠들썩 하게
했고 , 통역 을 맡은 <이승만> 의 궤변 과 배반 으로 <미국전역>의 동포들을
두번 울렸다 . <이승만> 은 " 나는 살인재판 에 통역 을 할수 없다 . " 였다 .
1905년 3 월 7일 , 봉천회전( 奉天會戰) 과 < 발틱함대 >의 전멸로
< 러시아>는 전의를 상실 , 소강상태에 이르자 <일본 과 미국> 은
<가쓰라 태프트 조약 ( The Katsura Taft Agreement)> 을 맺고 (1905 . 7 )
< 1905년 9월 5일 > < 러 일> 간 < 포츠머스 조약>을 맺어 <러시아>는 완전
<한반도>에서 손을 떼게 하고 <일본> 은 본격적 으로
< 대한제국> 의 < 침탈>을 감행 한다 .
가쓰라 태프트 조약(The Katsura Taft Agreement)
당시 일본은 “대한제국”을 , 미국은 “필립핀”을 속국화 하는데
서로 간섭을 않겠다는 일종의 야합적인 은밀한 조약임
1905 년 11월 9일 , < 일본의 특명 전권대사 > 이등박문
< 이토 히로부미 : 伊藤博文> 은 < 서울> 에 도착한 다음날 , < 11월 10일 >
< 고종황제>께 일왕의 친서를 바치는데 , 내용은 " 짐이 (내가) 동양평화
유지를 위하여 대사를 특파 하노니 " 대사의 지휘를 일종
( 하나같이 복종) 하여 조치 하소서 " . 였다 .
< 1905년 11월 15일 , > 일본공사 < 하야시 곤스케 >와 <대한제국 > 주재(駐在)
일본군 사령관 <하세가와 長谷川> 이 증원군 을 <일본>에서 파송받아
< 궁궐 : 경운궁 > 밖과 안을 겹겹이 애워싸 <대한제국> 의 <황궁>을
공포속에 몰아넣고 불안감을 조성하며 < 이등>이 <고종황제> 를
강요와 압박을 하였으나 , 끝내 <조약승인>을 거부
하였다 . < 고종황제>로선 최선의 방어 였다 .
그러나 , <일본>은 이미 <고종황제> 의 거부를 예상하고 <4일전> 11월 11일 ,
< 외무대신 박제순>을 <일본공사관> 으로 불러 <조약체결>을 강박하고 ,
<이토 히로부미>는 모든 <대신: 大臣> 과 원로대신( 元老大臣)심상훈
( 沈相薰) 을 그의 숙소로 불러 <조약체결>에 찬성하도록 회유와
강압을 되 풀이 하므로 써 , 예상치 않은 의외로
많은 지지를 얻게 되는 성과 에 고무되어 <고종황제>를
강박 하였으나 < 거부>를 당하고 말았던 것이었다 .
을사보호조약 (乙巳保護條約) 을사늑약(勒約)
< 11월 17일 > 마침내 <일본>은 경운궁 에서 <어전회의 ( 御殿會議)> 를
열도록 했으나 , <5시간>이 지나도록 결론이 나지않자 , < 이토 히로부미>는
<하세가와 >군 사령관 과 <헌병대장>을 대동하고 수십명의 <일본헌병>들의
호위를 받고 직접 <궐>내로 들어가 노골적 으로 위협과 공갈로 <황제>와
<대신>들을 모욕하며 <메모용지>에 <연필>을 들고 <대신>들에게
<가><부>를 따져 물었다 . 이때 조용하던 <궐내>가 술렁이며
큰소리로 < 통곡>하는 소리가 들렸다 .
그것은 지금까지 <일본인> 들의 무례한 행위와 공갈 협박에 , 분노를 참던
참정대신 < 한규설 ( 韓圭卨)>의 통분의 통곡소리 였다 . < 이토>와<헌병대장>은
항변하며 통곡하는 <한규설>을 제압시켜 <별실>에 가두고 " 반항하면 죽여 버려!
라고 외쳤다 , <회의결과>는 참정대신 <한규설 > 탁지부대신 <민영기 >
법무대신 <이하영> 이 무조건 < 불가 (不可)>를썼고 ,
(친러파)였던 학부대신 < 이완용> , 군부대신 <이근택> , 내무대신 <이지용> ,
외무대신 <박제순> , 농상공부대신 <권중현> 은 모든 책임을 <황제>에게 전가하며
<찬의>를 표시 하였다 . 이 <찬성>한 5명을 < 을사5적> 이라한다 .
< 이토 히로부미>는 각료 8대신 가운데 5명이 <찬성>했으니 <조약안건>은
가결 됐다고 선언 하고 궁내부대신 <이재극>을 통해 그날밤 <고종황제>의
칙재(勅裁)를 강요 하였다 . 같은날짜로 외무대신 <박제순> 과 <하야시 곤스케>
간의 이른바 이협약의 정식명칭 인 < 한일협상조약>이 체결 되었다 .
이 <조약>은 제 2차 < 한일협상조약> 인 셈이다 .
( 사진은 끝까지 반대한 " 참정대신 "< 한규설 : 1856 - 1930> 경술국치 이후
<일본>이 주는 <작위>도 거부 하였다 . )
( 11월 15 일자 에 유포된 <을사5적>을 성토하는 < 성토 격문 >
< 을사 5 적 >
외무대신 박제순(朴齊純) 내무대신 이지용(李址鎔)군부대신이근택 학부대신 이완용(李完用)농상대신 권중현 (權重顯)
( 을사보호조약) 이 체결된 < 경운궁 > 중명전 ,
( 현 덕수궁 내 건물 )
是日也 放聲大哭 (시일야 방성대곡 ) 張 志 淵 (장지연) 황성신문 2.101호 (1905. 11. 20)
" 오늘이여 목놓아 크게 우노라 ! 당시 신문원본 을 쉽게 풀이한것을 옮겨 보았음 .
지난번 이등( 伊藤: 이토) 후작이 내한 했을때
어리석게 우리국민들은 <후작>은 평소 동양삼국 의 정족 안녕을
주선 하겠노라 , 고 자처했던 사람이라 , 오늘 내한함이 필경
우리나라의 독립을 공고히 할 방책을 권고키 위한 것이라 , 하여
인천항 에서 서울까지 관민상하 (官民上下)환영하길 마지 않았다 . (이하 생략 )
그러나 , 대황제 폐하 의 성의 (聖意)가 강경하여 <조약> 이 성립되지 않은것을
<이등후작> 자신도 잘 알것인데 , 슬프도다 ! 저 개 돼지 보다 못한 소위
우리 정부의 대신이란 작자들이 자기 일신의 영달과 이익을 위하여 ,
위협에 겁먹어 머뭇대거나 벌벌 떨며 나라를 팔아먹는 도적이
되기를 원했노라 ,( 이하생략) 참정대신 이란자는 우리정부의
수석( 首席) 임에도 부(否)자 로서 책임을 면 하려 했더란 말인가 ?
김청음 (金淸陰)처럼 통곡하며 문서를 찢지도 못했고 ,
정동계( 鄭桐溪)처럼 배를 가르지도 못해 그저 살아남고자 했으니
그 무슨 면목으로 강경하신 황제폐하 를 뵈올것 이며 , 그 무슨 2천만 동포와 얼굴
을 맞댈 것인가 ? 아 ! 원통하고 분한지고 , 우리 2천만 동포여 , 노예된 동포여 ,
살았는가 ? 죽었는가 ? 단군 ,기자, 이래 4천년 국민정신이 하룻밤 사이에
홀연히 망하고 말것인가 ? 원통하고 원통하다 ! 동포여! 동포여!
( < 시일야 방성대곡> 을 요약하여 쉽게 옮겨 봤다 .
이글을 쓴 <장지연>은 너무슬퍼 술에취해 끝을 맺지 못하고 <기절>
하여 동료가 마지막을 이어썼다는 설(說)이 있다 . 이때 신문은
<검열>을 받아야 하는데 <검열>을 받지 않고 <발행>하여
<장지연>은 구속되고 <황성신보>는 3개월 <정간>을
당했다 . 그러나 그 <파급효과>는 엄청난 <의병>
항쟁과 <반일감정>을 불러 일으켰다 .
충정공 (忠正公) 민 영 환 ( 閔 泳 煥 ) 1861- 1905
(명함 에 연필로 다급하게 쓴 민영환>의 유서 .
국민 과 각국공사관 에 보내는 2통 의 유서를 남겼다 .
< 민영환>은 <을사보호조약> 에 항거 ,
1905년 11월 18일 , 조병세 (趙秉世) 와 백관을 거느리고 대한문 에 나가 강력히
반대 하였으나 일본헌병 들의 강제해산 으로 실패 , 다시 종로 <백목전도가>에
소청을 열고 상소 를 의논 하던중 , 대세가 기울어 짐을 보고 <전동> 이완식
(李完植) 의 집에가서 <유서2통>을 남기고 <1905년 11월 30일 새벽 6시> 에
소지하고 있던 칼로 <자결>했다 . 의정부대신 에 추증 되고 고종 의 묘정 에
배향 , <1962 년 ,>대한민국 건국공로 훈장 중장(重章) 이 추서 되었다 .
밑에 유서내용 을 일부 공개 하겠다 .
( 유서 내용 ) : 대한 2천만 동포에게 남기는 글 .
슬프다 . 국치와 민욕이 이에 이르렀으니 , 우리 인민은 장차 <생존경쟁>
속에서 모두 멸망하게 되었다 . 무릇 삶을 요하는자는 반드시 죽고 , 죽음을
기하는자 는 반드시 삶을 얻는다는 진리를 여러분은 어찌 모르겠는가 ?
( 이하 일부생략) 부디 우리동포 형제들 은 천만으로 분려를 배가하여 자기를
굳게하고 학문에 힘쓰고 결심육력 하여 우리의 자유와 독립을 회복 하면 ,
죽은자 가 마땅히 땅속에서 기뻐 웃을 것이다 . 슬프다 .
그러나 조금도 실망하지 말라 . < 민영환 >
이때에 민영환 , 조병세 ,이한응 , 홍만식 (홍영식 의 형), 송병선 , 이상철 ,
전봉학 ,등도 자결로 항거 하였다 .<을사5적> 이근택 , 권중현 , 은 의병
들의 습격을 받았고 , 이완용 , 박제순 ,의 집엔 불을 질렀다 .
통감부 설치 이후 국내각지 에서는 의병 이 일어났는데 ,
민종식 (충청도 ) , 최익현 , 임병찬 (전라도 ) ,
신돌석 (경상도 ) 유인석 (강원도 ) 등이 일본인
배척 운동을 전국적 으로 전개 하였다 .
< 1906 년 1월 29일>에 작성된 <을사체약 무효 선언서 > 는
1906년 6월 22일 에 헐버트 특별위원 에게 건내 졌고 또 같은날
( 1906 , 6 , 22 ) 프랑스 <대통령>에게 보내 <무효>를 호소 했으나
실효를 얻는데 실패하고 말았다 .
<고종황제> 는 억울함을 포기치 않고 , 국내외 의 압력에도 < 1907년 4월 20일 >
이준 (李儁) , 이상설 (李相卨) 이위종 ( 李瑋鍾) 에게 < 1907 년 6월 15 일 >
네덜란드 <헤이그> 에서 열리는 만국평화회의 에 <특사>로 보내
을사보호 조약 의 무효선언서 를 공개하고 <대한제국>의 억울함 을
온천하에 호소 하려 했으나 참석불가 로 실패한다 .
( 윗 사진은 네덜란드 < 헤이그 > 의 " 만국평화회의 " 의 회의장 전경 .
<1907 년 6월 15 일>)
이준 ( 1858 - 1907) 열사는 불참을 통분히 여겨 분사( 憤死) 했다 .
1896년 <독립협회 > 초대 <평의장 >을 거쳐 <헌정연구회> 를 조직 하였고 ,
1907년 4월 1일 <국채보상연합회의소장> 이 되어 모금운동 을 벌렸으나
< 친일단체> 일진회 의 방해공작 으로 좌절한 직후 <고종황제>의 특사 로
<헤이그 >에 파견 되어 분사한 것이다 ( 1907년 7월 14일 )
내가 중학교 땐 이준열사 는 배를 갈라 내장을 꺼내어 만국회의장 ,
각국 대표단 의 얼굴에다 피를 뿌리고 죽었다.고 배웠다 .
그러나 요즘 , 새로운 설(說) 이 등장 , 단지 얼굴에 난 악성종기 를 건드려
급사 했다 , 는 설(說)인데 , 누가 지어낸 것인지..? 아마도 당시 친일지
< 경성신문 > 에 " 오랜 기차여행 의 여독 과 종양이 패혈증 을 일으키는
단독 이 재발되어 사망 했다고 기사화 됐는데 , 이는 통감부 의 주도로
기사화 됐을 것이다 . <일본>으로선 < 악재 >이 므로 은폐와 외곡이 불가피
했을 것이다 . 증거로 순국한 열사를 < 궐석재판>까지 열어 < 종신형>을
처한 점이다 .그러나 오늘날 다시 <자연사>가 고개를 든다 .
“뉴 라이트” 에 의해 ......
( 이준열사 옆의 전문은 1907년 4월 20 일 < 고종황제 > 의
옥새가 찍힌 특사 <위임장 >이다 .)
( 네덜란드 < 헤이그 >에 있는 이준 열사의 묘 (순국당시 묘에서
유골을 환국 (還國) 한후 다시 세운 기념비 .
( 옆사진 은 왼쪽부터 이준 , 이상설 , 이위종 제씨 )
<헤이그> 밀사사건 은 단순히 이준열사 의 분사 , 할복 , 자연사 , 병사 ,를
떠나 국내사정 을 더욱 악화 시켰다 . <일본>통감부 의 압박은 이완용 , 송병준
에게 고종황제 의 퇴위를 강요 하도록 종용 한다 , <친러파>였던 이완용 이
<친일파>로 변하여 <을사보호조약>을 체결토록 하고 <퇴위>까지 강제하는
불충을 저질렀으니 <친일파>송병준은 고종황제 께 큰소리로 " 친히 일본
도쿄로 가셔서 " 일본 <천황폐하>께 사죄를 하던가 , 자결을 하시오 ".
라고 외치며 고종 의 따귀를 쳤다 , 하는데 . 진위 는 가릴수 없으나 ,
더했으면 더했지 덜하진 않았을 것이다 .
( 퇴위 를 당하는 < 고종황제 > 이젠 힘없는 궁궐에 노인으로 전락 한다 . )
왕조 500 년 을 더듬어 봐도 <왕>에게 손사례 나 삿대질 , 큰소리는 절대
불가하며 이는 불충과 국치 (國恥) 와 민욕(民辱) 으로 다스려 3족 을 멸 하는
형벌이 마땅할 것이나 , 힘없는 <황제>는 이 굴욕을
감내 해야만 했고 , 폐위 를 당해야만 했다 .
( 고종황제 께 퇴위 하라고 큰소리치며 압박을 가했던 < 친일파 송병준 >
사람은 외형으로 판단해선 안된다는 말이 실감 난다 . 송병준 은 민영환 의
식객으로 , 별볼일 없을때 민영환 의 주선으로 출세 를 한 사람인데 , 공교롭게
후손들이 민영환 의 땅을 송병준 땅이라고 소송을 제기해 계루중 에 있다 한다 .
개도 사흘 먹이면 주인을 안다 했다 . 이자는 개만도 못한 인간 이다 .
주인을 물려 드는 미친 분견 (糞犬) 인 것이다 . 옆에 인물도
카멜레온 같은 이완용 이다 .
오늘날 이땅에 진정한 보수세력 이 존재 할까 ? 암만 눈 씻고 상하 좌우 를
살펴봐도 , 실망스런 군상들만 친일에 보수란 지저분 한 덧칠만 입힌
삐에르 같은 붉은입술 에 흰칠로 분장한 세력들 뿐이다 , 당연히 진정한
보수는 존재 치 않는다 . 다만 , 친일에 덧칠한 기형적 보수만 존재할
뿐이다 .라고 결론을 내는게 정답일 것이다 .
굳이 보수를 원한다면 , 묵묵히 그때그때 , 참된 국가의 정책에 순응하며 국가와
민족발전에 저해 되는 이적행위 를 증오하면서 비판을 아끼지 않으며 도덕적
가치관 을 사랑하는 , 국난에 목숨을 아낌없이 던져 , 애국관까지 겸비한
이웃이 진정한 보수 일 것이다 . 이웃의 불행에 마음아파 하며 사회에
땀을 흘리며 국가와 민족을 위해 눈물과 목숨을 버리는 이가
진정한 보수세력 일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