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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029. 묵상글 ( 연중 제30주일. - 자비하신 하느님의 무자비.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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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029. 연중 제30주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자비하신 하느님의 무자비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고 자비하신 분이시며,
그러므로 우리도 사랑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만일 우리가 이웃에게 무자비하면 하느님께서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우리가 무자비한데도 하느님은 사랑이시니 우리에게 자비하시겠습니까?
오늘 탈출기의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어떤 과부나 고아도 억눌러서는 안 된다.
너희가 그들을 억눌러 그들이 나에게 부르짖으면, 나는 들어줄 것이다.
나는 자비하다.”
그러므로 힘없는 이들에게 무자비한 사람에게 하느님께서는 무자비하십니다.
힘없는 이들의 부르짖음을 무시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편애가 아니고,
하느님의 사랑은 정의의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먼저 하느님의 사랑은 편애가 아닙니다.
부자만 사랑하시고 가난한 사람은 사랑하지 않으시지 않고,
부자라고 더 사랑하시거나 가난하다고 덜 사랑치 않으시며,
반대로 가난한 사람만 사랑하시고 가난하다고 더 사랑치 않으십니다.
지금도 그런 면이 있지만 전에 저는 부자를 좋지 않게 보고,
가난한 사람은 거의 무조건 편들고 도우려는 면이 있었습니다.
여기에는 하느님의 사랑과 정의를 닮으려는 그런 측면도 있지만
그보다는 가난한 사람을 돕는다는 고상한 자기 만족감의 차원이 있었고,
부자들에게는 제가 우위를 점하지 못하지만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도움을 통해 우위를 점하는 교만 차원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사랑을 필요로 하고
청하는 사람에게는 누구에게나 자비하시고 그 사랑은 똑같습니다.
다만 가난한 사람은 하느님 사랑을 필요로 하고 청하는 데 비해
부자는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은 편이지요.
다음으로 하느님의 사랑은 정의의 사랑입니다.
불의한데도 괜찮다고 하시는 사랑이 아닙니다.
교황 프란치스코가 말씀하신 대로
불의한 사람에게는 불의에서 돌아서게 하는 것이 하느님의 자비이고,
불의에서 돌아서도록 불의에 대해서는 벌을 내리시는 것이 자비인데
그때는 자비하신 하느님도 무자비하십니다.
그러므로 이것이 자비하신 하느님의 무자비입니다.
이것이 또한 무자비하신 하느님의 자비입니다.
이 자비를 제대로 알고 실천하라는 하느님의 계명을 듣는 오늘 우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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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029. 연중 제30주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유대인들은 십계명에 기초한 여러 세부적 법규정들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248조항의 명령법과 365조항의 금령법으로, 합하여 613조목이나 되었습니다. 주님은 이러한 많은 조항들을 하느님사랑과 이웃사랑으로 간결하게 말씀하십니다. 모든 율법과 예언서 핵심은 사랑임을 드러내 보이십니다.
하느님 사랑은 먼저 성서를 통하여 주님을 더 깊이 알고 사랑하게 됩니다. 그래서 예로니모 성인은 ‘성서를 모르면 그리스도를 모르는 것이다’라고 성서집필을 통해서 깨닫게 됩니다. 이 깨달음은 지식이 아니라 사랑으로 일치되는 데서 나옵니다.
또한 기도 없이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기도는 하느님을 만나 대화하고 그분을 알아가는 과정입니다. 기도를 통하여 인격적인 사랑의 만남이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기도는 갈수록 깊어지는 이러한 깨달음에서 흘러나오는 사랑입니다.
이웃사랑을 말할 때 먼저 우리 내면에서 대면하고 싶지 않는 이웃들과 화해하고 사랑으로 품어 안아야 합니다. 그 이웃들은 미워하고 보기싫고 대면하고 싶지 않는 나의 어두운 과거의 모습들입니다. 연약하고 결점투성이의 자기모습을 깨닫게 되면 겸손의 마음의 생겨납니다. 이 겸손의 마음은 상대방을 자신보다 더 낫게 여기고 상대방의 부족한 면이나 잘못된 점을 이해하고 용서하는 마음입니다. 바로 겸손은 이웃사랑의 원동력입니다.
바로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기쁜 소식을 전하는 복음의 원천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기에 앞서 자신이 먼저 복음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복음의 사람은 앞서 말한 하느님 말씀으로 살아가는 사람이고 기도의 사람이며 겸손을 지닌 사람입니다.
성 프란치스코는 바로 이러한 복음의 사람이었습니다. 성인은 사랑의 전문가였고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그것은 사랑의 출발점이자 모든 덕행의 기초인 겸손에서 비롯되었습니다. 특별히 “꾸지람 앞에서의 겸손”을 통하여 참된 사랑의 마음을 보여준 성인의 삶을 본받는 한주간이 되기를 빕니다.
“다른 사람이 해 주는 충고와 책망과 꾸지람을 마치 본인이 자기 자신에게 하는 것처럼 그러한 인내심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종은 복됩니다. 책망을 들을 때 자기 잘못을 쾌히 인정하고 조용히 받아들이며 겸손하게 고백하고 기꺼이 보속하는 종은 복됩니다. 변명하는 데 빠르지 않고 본인이 범하지 않은 죄에 대해서도 수치와 책망을 겸손되이 참아 견디는 종은 복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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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일요일 성체의 날✝️
자기와 반대되는 다른 사람의 행동과 말에 대해 연민의 마음으로 있는 그대로 바라봅니까?
몸짓이나 말은 그 행동을 이루는 의도에 따라 완전히 다른 의미를 가진다. 입으로 말하는 경우에도 의도가 매우 중요하다. 어떤 사람이 동료와 싸우고 그를 바보라고 부르면서 욕설을 퍼 붓는다. 그는 성이 나서 말한다. 또 어떤 사람은 진흙탕에서 노는 아이들에게 다정스럽게 바라보고 부른다. 그는 사랑으로 말한다. 이 양자의 경우 똑같은 말을 했지만 그 마음은 정반대다. 이같은 결과를 결정하는 것은 말하는 사람의 의도이다.
어떤 상황에서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것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것이다. 나한테 유익하든 그렇지 않든 상대방의 말과 행동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것이다. 그 방법은 상대방의 행동을 내가 좋아하느냐 싫어하느냐를 떠나, 판단이나 평가를 내리지 않으면서 관찰한 바를 명확하고 구체적으로 말하는 것이다.
의식은 단순히 경험의 자료를 받아들이고, 인식은 자료를 분류하고 감각은 입력되는 사건을 감지한다. 이 세 단계는 단지 수동적으로 입력되는 정보를 소화한다. 그러나 마음의 의지작용은 수동적인 반응이아니라 적극적으로 싫고 좋은 감정을 발생시킨다. 마음의 의지 작용이 행동에 새로운 사건의 연결고리를 만들어 낸다. 사건의 출발점은 마음의 의지작용이다. 고통의 참다운 원인, 진실한 원인, 진실한 의미의 바라봄은 마음의 의지적 작용이다.
평화의 마음은 우리 마음 안에서 폭력이 가라앉고 자연스럽게 본성인 연민으로 돌아간 상태를 말한다. 우리는 전혀 폭력적이지 않다고 생각하면서 말할 때에도 종종 본의 아니게 자기 자신이나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입히고 마음을 아프게 한다. 그래서 평화 대화의 출발점은 연민의 마음을 가진 대화이여야 한다.
평화 대화는 상대방의 말속에 담겨진 근본적인 원의가 무엇인지를 사랑과 연민의 마음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여기에서 존중하고 공감하는 마음이 일어난다.
이런 평화 대화를 통해서 우리는 외부의 비판이나 평가를 들었을 때 습관적으로 보이는 반응, 곧 변명하며 물러나거나 아니면 반격하는 행동 양식을 바꿀 수 있다. 우리 자신이나 상대방 그리고 우리의 의도와 우리가 맺고 있는 관계를 새로운 시각으로 보게 된다. 분석이나 비판보다는 우리가 무엇을 관찰하고, 그에 대해서 어떻게 느끼며 무엇을 원하는가에 초점을 둘 때, 우리가 가지고 있는 연민의 깊이를 인식하게 된다. 다른 사람뿐만 아니라 자신의 내면의 소리에도 귀 기울임으로써 존중과 배려, 그리고 공감하는 마음을 기르게 되어 진심으로 서로 주고받기를 원하는 마음이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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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페소 평화 관상 기도의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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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029. 연중 제30주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마태 22,39)
가을이 익어가는 10월의 마지막 주일입니다. 오늘 말씀의 주제는 우리 삶을 익어가게 하는 ‘사랑' 입니다. 이 세상에서 사랑보다, 우리 인간을 익어가게 하고 변화되게 하고 풍성하게 하는 것은 없을 것입니다.
오늘 <제1독서>는 약한 자에 대한 사랑입니다. 모든 사람이 다 하느님 사랑의 대상이지만, 특히 이방인, 과부, 고아 그리고 병든 자, 헐벗은 자 등이 하느님 사랑의 초점이 됩니다. 그것은 마치, 가정에서 건강하고 튼튼한 자녀보다 병들거나 불구된 자녀에게 부모의 관심이 더 먼저 흐르는 것과 같습니다. 혹 누가 불구된 자녀를 무시하고 업신여기면, 부모의 가슴이 더 아프고 더 쓰릴 것입니다.
사실, 출애굽기 3장 14절에 나타난 하느님의 이름인 “야훼”의 뜻에는 울부짖는 백성의 소리를 들어주시는 분, 곧 울부짖는 백성들과 꼭 함께 하시는 분이란 의미를 품고 있습니다. 그래서 교종 요한 바오로 2세께서는「자유와 해방」(1986)에서, “가난한 이들을 위한 우선적 선택과 사랑”을 신학의 기본입장과 기본정신으로 강조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밀접하게 연결시키십니다. 아버지이신 하느님 안에서 우리는 모두 형제요, 자매들인 까닭입니다. 그래서 아버지의 아들딸들을 미워하면서 아버지를 사랑한다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자기의 형제를 미워하는 사람은 거짓말쟁이입니다.
제 눈으로 보는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자가 어떻게 눈으로 보지도 못하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1요한 4,20)
그렇습니다. 진정 하느님을 사랑한다면, 하느님께서 주신 자신과 타인들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또한 진정 자신과 형제를 사랑한다면, 자신과 형제를 주신 하느님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진정한 하느님 사랑은 이웃 사랑과 하나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 진정한 자기 사랑은 자신에 대한 존귀함에서 오며, 자신에 대한 존귀함은 하느님께로부터 옵니다.
사실, 이러한 ‘참 사랑’의 계명은 우리에게 새로운 관점을 요구합니다. 새로운 변혁, 새로운 틀의 패러다임을 요구합니다. 그것은 근본적으로, 이웃을 남으로 보지 않는 관점입니다. 아니, 애시 당초 ‘남’이란 없다는 관점입니다.
교종 요한 바오로 2세는 문헌 <새 천년기>에서, 친교의 영성에 대해서 다루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친교의 영성을 삼위일체의 심오한 신비체 안에서, 타인을 “나의 일부인 사람들”로 생각하고 형제들에게 주어진 하느님의 선물을 “나를 위한 선물”로 여길 줄 아는 능력을 의미합니다.’
이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한 몸, 한 생명’이 되고, 한 아버지 안에 한 형제자매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형제의 기쁨을 자신의 기쁨으로, 형제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으로 지니게 되고, 형제의 바람과 요구를 깊이 공유하며 깊고 참된 우정을 지니게 됩니다.
바로 이러한 관점에서야, 비로소 이웃과 자신이 분리되지 않고 한 몸이 되고, 이웃을 자신의 몸처럼 사랑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웃 사랑은 흔히 생각하는 남에게 베푸는 시혜나 자선이 아니라, 바로 한 몸으로서의 자기 자신에게 베푸는 사랑이 됩니다. 형제 사랑이 진정한 하느님 사랑이 되고, 하느님 사랑이 진정한 자기 사랑이 됩니다. 사랑은 서로 한 생명이 되고, 하느님은 사랑이 됩니다. 이웃이 곧 하느님이 되고 아내에게는 남편이, 남편에게는 아내가 곧 하느님이 됩니다.
이처럼 ‘사랑의 계명’은 새로운 관점, 새로운 사고와 인식의 틀을 요구합니다. 그것은 ‘남’을 사랑하는 이웃 사랑이 아니라, 하느님인 이웃을 사랑하는 것으로의 전환이요, ‘자신의 몸’인 이웃을 사랑하는 것으로의 전환입니다. 이처럼, 복음은 우리의 혁명을 요구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복음서는 한 권의 혁명서입니다. 곧 사랑의 혁명서입니다.
그래서 프란치스코 교종께서는 한 강론(2014,11,15)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만약 그리스도인이 혁명가가 아니라면, 그는 더 이상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은 은총의 혁명가가 되어야 합니다. 참으로 아버지 하느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죽으심과 부활을 통해 우리에게 주신 은총은 우리를 혁명가가 되게 만듭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성령을 받고 뒤집어진 사랑의 혁명가들입니다. 그리고 이 사랑의 혁명은 변화와 실천 안에서 성취되고 완성되어 집니다. 사도 요한은 말합니다.
“말과 혀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으로 진리 안에서 사랑합시다.”(1요한 3,18)
바로 이것이 오늘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사랑의 소명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마태 22,39)
주님!
당신 사랑으로 새로 나게 하소서!
내 자신을 통째로 바꾸어 새로워지게 하소서!
이웃을 타인이 아니라, 내 자신으로 사랑하게 하소서.
그의 아픔을 내 아픔으로, 그의 기쁨을 내 기쁨으로 삼게 하소서.
이웃 안에서 주님이신 당신을 섬기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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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029. 연중 제30주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지금은 사랑할 때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고 사랑 안에 있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머물고 하느님께서도 그 사람 안에 머무십니다. 따라서 하느님을 뵙고자 한다면 사랑해야 합니다. 이 시간 사랑함으로써 주님을 만날 수 있다는 진리를 깨우치고 주님의 사랑을 전할 수 있는 지혜와 능력을 얻기를 기도드립니다.
사랑해야 한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랑을 구체적으로 표현한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사랑이 참되기 위해서는 그 대가를 치러야 합니다. 사랑하면, 상처를 입고 자기를 비워야” 하기 때문입니다(성 마더데레사). 다시 말하면, 하느님을 사랑한다면 그 사랑의 행위가 이웃 사랑을 통해 드러나야 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십시오. 어렵고 힘들지만, 사랑의 절정인 십자가의 주님을 바라보며 사랑해야 합니다. “이웃을 사랑할 때 우리의 눈이 맑아져 하느님을 뵈올 수 있는 능력을 받게 됩니다”(성 아우구스띠노). 사랑하십시오. 사랑하면 사랑할수록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을 더 얻게 됩니다. 내 방식의 사랑을 고집하지 말고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그 사랑으로 사랑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인간으로 오셨듯이 우리도 눈높이 사랑을 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노래 한 곡 불러드리겠습니다.
“사랑은 언제나 오래 참고…온유하며…. 사랑은 시기하지 않으며 자랑도 교만도 아니하며. 사랑은 모든 것 감싸주고, 바라고 믿고 참아내며 사랑은 영원토록 변함없네. 믿음과 소망과 사랑은 이 세상 끝까지 영원하며, 믿음과 소망과 사랑 중에 그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그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사도 바오로가 코린토인들에게 보낸 첫째 편지의 말씀을 노래했습니다.
자! 그러면 고린도 전서 13장의 말씀에 견주어서 우리 사랑의 정도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나는 오래 참습니다. 나는 친절합니다. 나는 시기하지 않습니다.
나는 자랑하지 않습니다. 나는 교만하지 않습니다.
나는 무례하지 않습니다. 나는 사욕을 품지 않습니다.
나는 성을 내지 않습니다. 나는 앙심을 품지 않습니다.
나는 불의를 보고 기뻐하지 아니하고 진리를 보고 기뻐합니다.
나는 모든 것을 덮어주고 모든 것을 믿고 모든 것을 바라고
모든 것을 견디어 냅니다.
어떻습니까? 부족함을 알았으면, 채울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마태22,37).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마태22,39). 온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 이 두 계명에 달려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사랑해야 합니다. 사실, 진정한 사랑은 이유를 묻지 않으며 이익을 따지지 않습니다. 사랑은 존재에 있습니다. 존재하기 때문에 사랑하고 사랑하기 때문에 존재합니다(성 베르나르도). 일상생활 안에서 사랑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어른이든 어린이든 약한 사람이건 힘이 센 사람이건 할 것 없이 누구나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다고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위해 보내주신 예수님을 알아야 온전히 사랑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의 죽음을 통하여 당신의 사랑을 보여주신 예수님,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시던 예수님을 만나야 비로소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을 알지 못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1요한4,7-8). 하느님과의 친교가 깊으면 깊을수록 이웃을 더 많이 사랑할 수 있습니다. 크고 거창하게 사랑하려 하지 말고 사소하다고 생각하는 일상 안에서 사랑할 소재를 찾으시길 바랍니다. 때로는 친절로, 때로는 온유로, 밝은 미소로, 이야기를 들어 주는 것으로, 청소하는 것으로, 설거지를 도와주고, 환자를 방문해 주고……어떤 의견에 공감해 주는 것으로…상대를 존중하며 인정해 주고, 칭찬의 말 한마디로…… 사랑하시길 바랍니다. 지금, 미루지 않는 사랑으로 사랑할 수 있길 희망합니다.
사랑할 기회는 너무도 많습니다. 그 기회를 놓치지 마십시오. 지금은 사랑할 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그것을 보고 너희가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요한 13,34-35).라고 말씀하십니다. 따라서 많이 사랑함으로써 하느님을 제대로 만나고 그 만남의 기쁨도 이웃에게 전할 수 있길 바랍니다. 하느님께 대한 사랑은 반드시 이웃 사랑을 통해 드러나게 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기도하지 않고서는 항구하게 사랑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랑하기 위해 기도가 필요합니다. 기도 해야 합니다. “그분의 뜻을 알아듣기 위해 기도가 필요합니다. 그분의 뜻을 사랑으로 받아들이기 위해 기도가 필요합니다. 그분의 뜻을 실천하기 위해 기도가 필요합니다”(마더 데레사). 그러므로 먼저 기도 하십시오. 그리고 사랑하십시오. 그리고 하고 싶은 대로 하십시오. 우리 인생의 참된 가치는 사랑입니다. “사랑은 사랑으로 무엇을 이루는 게 아니라 사랑은 그 사랑을 지켜낼 때 가치가 있습니다.” 사랑은 하느님에게서 왔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그 사랑으로 사랑할 수 있는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새로워지길 바랍니다.
“사랑 자체이신 하느님께서는 사랑 때문에 우리를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분과 하나가 되면서 서로 사랑할 수 있도록 우리를 창조하셨습니다. 하느님을 사랑하지 않으면서 이웃을 사랑한다는 것은 착각입니다. 뿐만아니라 이웃을 사랑하지 않으면서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주장하는 것 역시 착각입니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 사랑의 이 두 차원은 함께 결합되어 그리스도의 제자를 특징짓습니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갈라 놓으려는 착각이 있습니다”(프란치스코 교황).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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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029. 연중 제30주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성지순례 중에 초남이엘 갔습니다. 초남이는 호남의 사도 유항검 아우구스티노가 살던 고향의 이름입니다. 유항검 아우구스티노는 그곳에서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집안이 소유한 땅은 300만평이 넘었다고 합니다. 여의도 땅의 3배가 넘는다고 합니다. 그의 땅에서 나는 소출은 3만석이 넘었다고 합니다. 그런 유항검은 1784년 이승훈에게 세례를 받았고, 이제 부유한 삶이 아니라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삶을 선택하였습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삶은 부유함 대신에 가난함을 택할 수도 있고,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삶은 건강한 몸 대신에 아픈 것을 택할 수도 있고, 오래 사는 것보다 일찍 죽는 것을 택할 수 있는 삶입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사람은 아픈 사람은 고쳐주고, 마귀는 쫓아내고,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이제 유 아우구스티노에게는 빈부귀천이 따로 없었습니다. 그는 교회의 가르침을 몸소 실천하면서 모두에게 모범을 보여주었으며, 가난한 이웃은 물론, 자신의 종들에게도 애긍과 희사를 베풀었습니다. 유항검 아우구스티노는 사람들에게 교리를 가르쳤고,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사제가 없는 조선에 사제를 영입할 수 있도록 노력하였습니다.
이런 유항검에게 시련이 찾아왔습니다. 욥에게 시련이 닥쳤던 것처럼 유항검은 모든 재산을 빼앗겼습니다. 그에게는 ‘파가저택(破家瀦澤)’이라는 벌이 내렸습니다. 그의 집은 모두 부수고, 웅덩이를 만들어 돼지들이나 살게 했습니다. 다시는 그가 살던 집에 사람이 살지 못하도록 하였습니다. 단순한 재산의 몰수가 아닌 대역 죄인에게 내리는 벌이었습니다. 유항검은 사랑하는 가족들과 생이별을 하였습니다. 둘째 아들 유일석(柳日碩)[6세]은 흑산도로, 셋째 아들 유일문(柳日文)[3세]은 신지도로, 딸 유섬이(柳暹伊)[9세]는 거제도로 각각 유배되었습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어린 아이들과 생이별하는 아픔을 겪어야 했습니다. 유항검은 능지처참의 형벌을 받아 순교하였습니다. 그의 아들과 며느리인 유중철 요한과 이순이 루갈다도 순교하였습니다. 재산의 몰수, 사랑하는 가족과의 이별, 순교로 모든 것이 끝난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면서 모든 것이 묻혀버릴 것 같았습니다.
모든 시련을 끝까지 참아낸 욥에게 하느님께서는 축복을 주셨던 것처럼 하느님의 자비와 은총은 유항검을 과거의 먼 기억 속으로 버려두지 않았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유항검과 그 가족들을 기억하셨습니다. 유항검과 가족들의 묘는 전주 치명자 산꼭대기에 모셔졌습니다. 치명자 산은 성지가 되었고, 많은 순례자들이 유항검과 그 가족들을 위해서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분들의 뜨거운 열정과 신앙을 배우려고 합니다. 순례자들의 기도는 헛되지 않았습니다. 2014년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유항검과 그 가족들을 복자품에 올렸습니다. 거제도에 묻혀있던 딸 유섬이의 묘지도 발견되었습니다. 돼지들이 살던 유항검의 집터는 초남이 성지가 되었습니다. 그가 교리를 가르치던 곳은 교리당이 되었습니다. 200년 전에 잊혀질 것 같았던 유항검 아우구스티노와 그의 가족들은 교회가 존재하는 한 언제나 우리의 기억 속에 남아 있을 것입니다. 200년 전에 호남의 사도였던 유항검 아우구스티노는 이제 복자가 되어 천국에서 빛나는 별이 되었습니다. 우리 신앙인들이 따라야 할 이정표가 되었습니다.
오늘 탈출기는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가난한 사람, 고아나 과부를 업신여기거나, 무시하지 마십시오. 그들에게 받을 것이 있어도 무리해서 그들의 처지가 너무 힘들지 않도록 하십시오.’ 하느님께서는 자비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가난한 사람을 도와주고, 과부나 고아를 돌보아 주는 것은 우리가 선행을 베푸는 것이고 그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지만 사실 그것은 나를 하느님께로 이끌어 주는 은총의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유항검 아우구스티노 복자는 그런 삶을 살았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은 온 마음과 생각과 정성을 다해서 하느님을 사랑하십시오. 이것이 가장 큰 계명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의 몸처럼 여러분의 이웃을 사랑하십시오. 이것이 율법과 계명의 근본정신입니다.’ 남을 위한 희생과 봉사는 자랑할 것은 아닙니다. 가난한 이를 도와주고 가진 것을 나누는 것은 생색을 낼 일도 아닙니다. 오히려 감사할 일입니다. 그러한 삶을 통해서 우리는 하느님을 만날 수 있고, 하느님과 함께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유항검 아우구스티노 복자는 그런 삶을 살았습니다.
오늘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환난과 박해를 이겨낸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말씀을 충실하게 따른 사람들에게 큰 축복이 주어지리라고 말해 주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큰 환난 속에서도 성령께서 주시는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들여, 우리와 주님을 본받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여러분은 마케도니아와 아카이아의 모든 신자에게 본보기가 되었습니다.” 유항검 아우구스티노 복자는 조선의 모든 신자들에게,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 신앙의 본보기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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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029. 연중 제30주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오늘 바리사이들이 모입니다. 왜 그렇지요? 주님이 사두가이들에게 면박을 주었다고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이 먼저 예수님을 공격하려고 모입니다. 그들은 예수라는 목수의 아들에게 사두가이들의 명성이 땅에 떨어진 것을 듣고, 자신도 그런 일을 당하지 않으려고 준비하는 것입니다.
그들의 마음은 어땠을까요? 분명 분노와 흥분, 그리고 걱정과 근심, 두려움과 시기로 분열되어 있었습니다. 공격이 최선의 방어라는 말은 어쩌면 바리사이들의 모습에서 나왔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언제나 방어만 하시기 때문이지요.
자! 이제 공격합니다. 예수님을 스승님이라고 추켜세우면 말입니다. “스승님, 율법에서 가장 큰 계명이 무엇입니까?”
그러자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라고 하시고는 둘째는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라고 하십니다.
왜 바리사이들이 예수님에게 이런 질문을 했을까요? 왜냐하면 이스라엘 민족을 바리사이들이 다스리면서 율법은 쪼개지고 쪼개져서 점점 더 많아졌기 때문입니다. 처음에는 십계명이었는데, 그것이 갈라지고 갈라져서 수백 개의 율법이 되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많은 계명을 주님은 두 가지로 설명하십니다. 하느님을 향한 것과 이웃을 향한 것으로 말입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오늘 보여 주시는 모습은 물론 계명 중에 최고의 계명을 알려 주신 것도 있지만 그것과 더불어 중요한 것은 ‘조화’를 보여 주신 것입니다.
바리사이들, 사람들이 분열시키고 갈라놓은 율법은 조화로이 두 가지로 만드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도 이러한 모습을 지녀야 하기 때문입니다.
분열보다는 조화를 선택하십시오. 남의 잘못을 하나하나 따져 묻지 마십시오. 그것이 바로 분열이고 그것이 오늘의 바리사이들의 모습입니다.
우리는 주님 닮아 조화로워야 합니다. 수백 수천 가지의 갈라진 마음을 사랑으로 묶는 사람들이 우리가 되기를 주님께서는 바라십니다.
거인의 어깨에 올라타 세상을 바라보다.
구글 스칼라에는 아이작 뉴턴의 “거인의 어깨에 올라서서 더 넓은 세상을 바라보라.”라는 명언에 쓰여 있습니다.
지금 저의 모든 글은 이미 많은 신앙의 선조들이 통찰한 것입니다.
지금 저의 모든 나눔은 이미 많은 신앙의 모범들이 찾아낸 것입니다.
지금 저의 모든 신앙적 느낌은 이미 많은 신앙의 선생들이 만나 온 것입니다.
그저 거인의 어깨에 올라타듯이 신앙의 선조들의 어깨와 성경을 마주한 모든 신앙 선조의 어깨 위에서 다시금 영적인 바람을 맞는 것뿐입니다.
그래도 그 어깨 위에 올라가고 싶습니다.
오늘도 그 어깨 위에서 주님의 숨결과 바람을 만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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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029. 연중 제30주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갑곶성지에 있을 때, 손을 자주 다쳤습니다. 성지 바깥일을 하다가 나무에 찔린 적도 있고, 요리하다가 칼에 베인 적도 있습니다. 강화도 시골길을 자전거 타고 가다가 돌부리에 걸려 넘어져서 손을 다치기도 했습니다. 심지어 책을 읽다가 책에 베인 적도 있지요.
올 초부터 인천 송도에 위치하고 있는 성 김대건 성당에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전에는 그렇게 손을 많이 다쳤었는데, 이곳에서는 다친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갑곶성지에 문제가 있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갑곶성지와 달리 이곳에서는 손 쓸 일이 그렇게 많지 않기 때문입니다. 주방 일도, 또 바깥일도 하지 않으며, 자전거 도로는 잘 되어 있어서 넘어질 일도 없었습니다.
손을 많이 다치는 이유는 손을 많이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다친다고 손 사용하는 것을 멈춰야 할까요? 아닙니다. 손 사용을 멈출 수 없으니 조심할 뿐입니다.
마음을 다친 분을 종종 만납니다. 어쩌면 이들도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마음을 많이 쓰기 때문에 마음을 다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상처받았다고 마음 쓰는 것을 멈추는 것이 옳을까요? 다칠 수도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마음은 써야 합니다. 멈추는 것이 아니라 조심하면서 계속해서 마음을 써야 지혜로운 사람일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을 사랑 실천하는 데 써야 합니다. 그 과정 안에서 상처받는 것이 싫겠지만,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그렇게 마음을 써야 합니다. 당연히 힘든 일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사랑하는 마음을 크게 보십니다. 그리고 이 사랑으로 하느님 나라의 영원한 생명을 약속하셨습니다. 마음을 많이 쓸수록 그만큼 다칠 확률이 높아집니다. 하지만 하느님 나라에도 더 가깝게 나아갈 수 있습니다.
이런 이유로 “율법에서 가장 큰 계명은 무엇입니까?”라는 바리사이들의 질문에,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이다. 둘째도 이와 같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예수님 시대의 율법에는 365개의 금령과 248개의 규정이 있었습니다. 이를 모두 외운다는 것이 얼마나 힘들었을까요? 또 이를 지키기도 얼마나 힘들었을까요? 특히 이를 지켜야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하는데, 알지도 못하고 또 지키기도 힘드니 구원의 길에서 제외된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바로 이들에게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쉬운 길을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바로 사랑을 통해서입니다.
이 사랑을 마음에 담고, 이 사랑을 실천하면서 마음을 써야 합니다. 물론 아픔과 상처가 가득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 나라는 그만큼 가까워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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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악마는 삶의 상처와 어떤 경우에는 실수를 이용하여, 예수님꼐서 우리를 정말로 사랑하시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느끼게 할 수 있습니다(성 마더 데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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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029. 연중 제30주일. 키엣 대주교님.
사랑의 율법
새로운 계명, 사랑의 율법에는 다음과 같은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온 마음과 지혜를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하라.
사람들은 누구나 좋은 것을 바라고 좋은 것을 사랑합니다. 선과 아름다움, 진리의 근원이시고 작은 결함 조차 없으신 완전한 분이신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나의 모든 것, 내 모든 힘을 다해 주 하느님을 사람해야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만드셨고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을 주셨습니다. 이러한 분께 온 마음을 다해 사랑하는 것은 당연한 인류의 본분입니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하라
주님의 두번째 계명이지만 이것은 첫째 계명과 ‘사랑’이라는 점에서는 비슷하므로 하나의 계명으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주님에 대한 사랑’과 ‘형제를 사랑하는 것’은 ‘하나의 사랑’일 것입니다. 진실된 사랑은 한계와 배척이 없기 때문에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형제를 배척하지는 않을 것 입니다. 만일 사람을 배척하는 사람이라면 주님에 대한 사랑도 거짓된 사랑일 것입니다.
형제에 대한 사랑은 주님에 대한 사랑으로 검증될 것입니다.
요한 사도는 “누가 ‘나는 하느님을 사랑한다.’ 하면서 자기 형제를 미워하면, 그는 거짓말쟁이입니다. 눈에 보이는 자기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그분에게서 받은 계명은 이것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 형제도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요한Ⅰ 4, 20-21)
형제를 사랑하는 사람은 곧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형제들사이에 우리의 주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최후의 심판날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 (마태오 25,40)
모든 다른 계명도 이 계명에 귀속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 계명을 온전히 따른다면 교회의 율법을 지키고 새로운 세상의 건설에 기여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이 계명을 따른다면 세상은 진실된 사랑이 넘치는 인간 중심의 세상이 될 것이며, 그곳이야말로 다음 세상인 천국이 시작되는 곳일 것입니다. 아멘.
함께 묵상해 봅시다.
1. 온 마음과 지혜를 다해 주님을 사랑하고 있습니까?
2. 사랑을 주는 기쁨과 받는 기쁨은 어떻게 다릅니까?
3. 사랑은 주고 받는 것이라고 합니다. 주님께 사람을 듬뿍 드리고 있습니까? 응답을 받지 못해 서운합니까? 주님과 나의 사랑에 대해 생각해보세요.
말씀의 실천
1. ‘눈에 보이는 자기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 형제도 사랑할 줄 알아야합니다’
바로 내 옆에 있는 가족과 이웃, 사회를 돌아보십시오. 그들에게 나의 사랑과 관심을 보여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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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029. 연중 제30주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사랑의 여정
“사랑의 전사, 사랑의 학인, 사랑의 형제”
“주님을 찾는 마음은 기뻐하여라.
주님과 그 권능을 구하여라. 언제나 그 얼굴을 찾아라.”(시편105,3-4)
오늘 입당송 시편도 은혜롭습니다. 방금 우리는 하느님께 간절한 마음으로 화답송을 노래했습니다.
“하느님, 내 힘이시여, 내 당신을 사랑하나이다.”
수도사제 생활, 만34년 참 많이도 강론에 인용했던 주제가 ‘사랑’입니다. 사랑에도 간절해야 합니다. 사랑은 ‘감상하라’ 있는 것이 아니라 ‘고백하라’, ‘살라’ 있는 것입니다. ‘사랑’의 ‘삶’을 살라고 ‘사람’입니다. 사랑해서 사람입니다. 바로 이것이 사람의 정의입니다. 언제 들어도 마음 설레게 하는 사랑이란 말마디입니다.
하루하루 사랑하라 하느님께 주어지는 선물의 하루입니다. 사랑하기에도 턱없이 짧은 인생, 미워하고, 싫어하고, 두려워하고, 불안해 하고, 아파하고, 걱정하고 지내기엔 너무 억울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젠가 그날이 아닌 오늘 지금 여기 가까이에서부터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래야 인생 허무하지 않습니다. 후회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삶의 의미이며 모두입니다. 마지막 심판도 사랑에 의한 심판입니다.
인생 무지에 대한 답도, 인생 허무에 대한 답도 사랑뿐입니다. 사랑밖에 길이 없습니다. 사랑밖에 답이 없습니다. 오늘 우리는 하느님 사랑에 목말라, 하느님 사랑에 배고파 이 거룩한 미사에 참석하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인류에게 주신 최고의 사랑의 선물이 저는 감히 사랑의 성체성사 미사라 말하고 싶습니다. 도대체 미사없이, 하느님 없이, 예수님 없이, 이 삭막한 광야인생 무슨 맛으로, 무슨 기쁨으로, 무슨 재미로 어떻게 살아갈까 싶습니다. 아무리 말해도 사랑이야기는 끝이없습니다.
가을은 기도의 계절입니다. 9월 순교자 성월에, 10월은 묵주기도 성월, 11월은 위령성월 말그대로 기도의 계절입니다. 그러다 보면 한해도 훌쩍 떠나버립니다. 기도의 계절에 이어 수확의 계절입니다. 저는 여기에 하나를 더 붙입니다. 산많은 대한민국 어디서나 황홀한 단풍사랑으로 불타오르니 “사랑의 계절”, 얼마나 멋집니까? 기도는 사랑입니다. 기도의 계절은 저절로 사랑의 계절이 됩니다. 그래서 그런지 가을에는 시의 계절이라 할만큼 시도 유난히 많습니다. 예전에 써놨던 두편의 시를 나눕니다.
“가을엔 이쁘지 않은 게 하나도 없다
모두가 이쁘다
작은 풀잎, 나뭇잎들,...
작은 것들 하나하나도
사랑으로 타오르는 단풍되니
모두가 이쁘다”-2000.11.16.
“이 좋은 가을날
산에 갈 수도 없다
산을 가져올 수도 없다
아예 산되어 살기로 했다
단풍물든 장엄한 가을산으로
사랑하는 이여
놀러오지 않으렴?
넉넉하고 편안한 가을산
내 사랑의 품으로”-1999.10.26.
20년 훨씬 지난 시이지만 지금도 여전히 유효합니다. 찾아오는 손님들이 때로 빈손으로 왔다 미안해할 때 가장 많이 드리는 바로 다음 한마디입니다.
“형제님 자체가 참 좋은 선물입니다. 그런데 무슨 선물이 필요합니까? 형제님 자체가 하느님의 참 좋은 선물입니다.”
언젠가 꽃 한송이를 가져온 분에게는 다음 같이 짧은 시를 써드리며 위로하고 격려했습니다.
“꽃이 꽃을 가져오다니요,
그냥 오세요,
당신은 꽃보다 더 예뻐요.”
사실 마음 예쁜 사람은 꽃보다 더 예쁘고 빈손으로와도 반갑고 기쁩니다. 답은 사랑뿐입니다. 허무와 무지의 어둠을 밝히는 것도 사랑의 빛입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하나하나의 사람을 통해 반사하는 하느님 사랑의 빛입니다. 이 미사분위기가 이처럼 밝은 것은 여러분이 주님의 반사체가 되어 주님의 빛을 반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우리 인생 여정은 사랑의 여정입니다. 날로 사랑 깊어지는 사랑의 여정입니다.
평생 공부가 사랑이요 우리는 졸업이 없는, 죽어야 졸업인 “사랑의 학교”에 재학중인 사랑의 학인입니다. 아무리 사랑을 공부해도 사랑에는 영원한 초보자일뿐입니다. “사랑은 아무나 하나?” 평생 보고 듣고 배우고 실천해야 할 사랑공부입니다. 평생 사랑의 학인에 이어 평생 사랑의 전사인 우리들입니다. 사랑의 학교에 이어 사랑의 전쟁입니다. 영원한 현역의 사랑의 전사인 우리들 역시 죽어야 끝나는 사랑의 영적전쟁입니다. 살아 있는 그날까지 온힘을 다해 사랑의 전투를 해야 하는 평생 사랑의 전사인 우리들의 신원입니다.
다음은 평생 형제로, 사랑의 형제로 사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아버지로 모신 하느님 가정내의 한 형제자매로 살아가는 우리들의 신원입니다. 사랑의 여정앞에 반드시 놓아야 할 말마디가 “투게더together”, 즉 “더불어”입니다. 그러니 혼자가 아닌 더불어의 사랑의 여정입니다. 평생 사랑의 학인에 학우애學友愛가, 평생 사랑의 전사에 전우애戰友愛가, 평생 사랑의 형제에 형제애兄弟愛가 저절로 따라 오기 마련입니다. 이게 바로 주님의 제자들인 우리의 삼중신원입니다.
무슨 사랑입니까? 우리의 영원한 사랑이신 예수님께서 오늘 복음에서 명쾌하게 밝혀주십니다. 시공을 초월하여 믿는 모든 이들에게 주어지는 사랑의 의무입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이다. 둘째는 이와같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온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 이 두 계명에 달려 있다.”
끊임없이, 한결같이 사랑할 때 비로소 행복한, 자유로운, 부요한 사람입니다. 사랑할 때 영혼 건강, 정신 건강, 마음 건강입니다. 만병통치약이 사랑이요 만병의 근원이 사랑 결핍입니다. 끊임없이 사랑하고 사랑받을 때 자존감 높은 사람이요 존엄한 품위의 기품있는 사람입니다. 사랑역시 적극적 의지의 선택이요 실행입니다. 온 마음, 온 목숨, 온 정신을 다하여 주 우리 하느님을 선택하여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결같은, 끊임없는 사랑의 훈련, 사랑의 습관입니다. 그러니 사랑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영적도식이 선택-훈련-습관입니다. 바로 이런 사랑의 영성훈련과 습관화를 위해 여기 수도자들은 평생 날마다 바치는 사랑의 공동전례기도입니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사랑은 분리된 것이 아닙니다. 구별할 수는 있어도 분리할 수는 없습니다. 진정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들은 하느님을 사랑하듯 온 마음, 온 목숨, 온 정신으로 일상의 삶을, 수행들을 사랑합니다. 저도 주님 사랑하는 온 마음으로 강론을 씁니다. 진정한 하느님 사랑은 저절로 이웃사랑으로 드러나기 마련입니다. 이웃사랑은 물론 자기사랑, 자연사랑으로까지 연장됩니다. 하느님 사람의 진위를 검증하는 잣대가 이웃사랑, 자기사랑, 자연사랑입니다. 저는 이웃사랑에 반드시 자기사랑, 자연사랑을 추가합니다. 그리하여 사랑의 이중 계명은 사랑의 사중계명이 됩니다.
오늘 제1독서 탈출기는 이웃 사랑의 실례를 보여주는 약자 보호법입니다.
1.너희는 이방인을 억압하거나 학대해서는 안된다.
2.너희는 과부나 고아도 억눌러서는 안된다.
3.너희가 내 백성에게, 가난한 이에게 돈을 꾸어주었으면 그에게 채권자처럼 행세해서도 안된다.
그리고 주님은 못박듯이 말씀하십니다.
“나는 자비하다.”
주님은 친히 약자들의 보호자되심을 확언하십니다. 참으로 약하고 병든이들의 배경이 되어주시는 하느님을 생각한다면 주님을 대하듯 이들을 대하게 될 것입니다. 루가복음중 주님의 평지설교의 결론같은 말씀도 기억하실 것입니다.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평생 주님을 닮아갈수록 자비로운 사람입니다. 그러니 사랑의 여정은 예닮의 여정, 하닮의 여정이 됩니다. 날로 주님을 닮아가고 있는 자비의 얼굴인지 주님 거울에, 미사에 거울에 비춰보시기 바랍니다.
특히 강조하고 싶은 것이 회개와 사랑입니다. 하느님 앞에 회개 없이는 겸손도, 사랑도 없습니다. 늘 새로운 시작도, 늘 새로운 사랑도 회개를 통해 가능합니다. 사랑의 여정과 함께 가는 회개의 여정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테살로니카 신도들에 대한 끝없는 사랑과 신뢰가 깊은 울림을 줍니다.
“여러분은 환란 속에서도 성령께서 주시는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들여 주님을 본받는 사람이 되었습니다...여러분은 어떻게 우상들을 버리고 하느님께 돌아서서 살아 계신 참 하느님을 섬기게 되었는지, 또 여러분은 어떻게 하느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으키신 그분의 아드님, 예수님께서 하늘로부터 오실 것을 기다리게 되었는지 말하고 있습니다.”
날마다 우상들을 말끔히 털어버리고 하느님께 돌아서서 살아 계신 참 하느님을 섬기는 일이 바로 참 좋은 회개입니다. 날마다 끊임없는, 한결같은 회개를 통해 오롯한 마음, 오롯한 눈길로 오시는 주 예수님을 맞이하는 우리들이요, 이런 회개의 은총으로 날로 순화純化되고 성화聖化되고 심화深化되는 우리의 사랑입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주님의 전사가, 주님의 학인이, 주님의 형제가 되어 “사랑의 여정”에 항구할 수 있도록 도와주십니다.
“주님은 살아 계시다!
나의 반석 찬미받으시리니,
내 구원의 하느님 드높이시다.”(시편18,47).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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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029. 연중 제30주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오롯한 사랑>
님께서
오롯한 사랑으로
나를 빚으시어
이렇듯
사랑으로
내가 있기에
나를
빚으신 님을
오롯이 사랑하고
나를
빚으신 님을
오롯이 사랑하기에
님께서
빚으신 나를
오롯이 사랑하고
님께서
내게 주신 이웃을
오롯이 사랑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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