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용두암에 서다
제주의 아침은 바다에서 열린다. 아직 도시가 완전히 깨어나기 전, 용두암으로 향했다. 바람에는 짭조름한 소금기가 묻어 있었고 파도는 검은 현무암에 몸을 부딪치며 하얗게 부서졌다. 수평선 너머에서 번져 오는 빛이 바다와 하늘의 경계를 조금씩 지우고 있었다. 제주에서는 해가 뜨는 일조차 하나의 여행이 된다.
용두암 앞에 섰다. 바다를 향해 길게 목을 빼고 솟은 검은 바위가 정말 용 한 마리를 닮았다. 파도가 밀려들 때마다 금세라도 바다를 박차고 하늘로 날아오를 듯하다. 오랜 세월 화산과 바람, 파도가 함께 빚어 놓은 자연의 조각이다. 사람은 돌에 이름을 붙였지만, 바위는 이름을 얻기 훨씬 전부터 이 자리에 서서 제주 바다를 바라보았을 것이다.
카메라를 들었다. 렌즈 안으로 들어온 것은 용두암만이 아니었다. 하늘에는 물고기 비늘 같은 구름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푸른 하늘을 가득 채운 구름 사이로 아침 햇살이 스며들었다. 자연이 하루에 단 한 번 펼쳐 보이는 거대한 전시회 같았다. 셔터를 누르는 순간 문득 생각했다. 사진을 찍는다는 것은 풍경을 소유하는 일이 아니라, 지나가는 순간에게 잠시 머물러 달라고 부탁하는 일인지도 모른다고.
용두암의 얼굴은 빛에 따라 달라졌다. 해가 구름 뒤로 숨자 바다는 짙은 남빛으로 가라앉았다. 먹구름 아래 작은 틈이 열리더니 한 줄기 햇살이 바다로 쏟아졌다. 마치 하늘이 바다 한가운데 등불 하나를 켜 놓은 듯했다. 그 빛 아래 먼 바위가 조용히 서 있었다. 어둠이 짙을수록 빛은 더욱 선명했다. 살아가는 일도 이와 닮지 않았을까. 삶의 모든 날이 환할 수는 없지만, 어두운 날에 만나는 작은 빛 하나가 때로는 긴 시간을 견디게 한다.
시간이 흐르자 하늘은 다시 모습을 바꾸었다. 노란빛이 번지고 주황빛이 물들더니 어느 순간 붉은 불꽃 같은 노을이 바다를 덮었다. 검은 용두암은 화려한 하늘 앞에서 더욱 선명한 실루엣이 되었다. 파도까지 붉은 빛을 받아 출렁였다. 조금 전까지 푸른빛이던 세상이 전혀 다른 얼굴로 변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 변화 앞에서 한동안 말을 잃었다. 사람은 변화를 두려워하면서도 자연의 변화 앞에서는 감탄한다. 구름이 흩어지고 빛이 사라지고 파도가 밀려왔다 물러나는 것을 아름답다고 말한다. 그런데 정작 자신의 삶에서 무언가 달라질 때는 쉽게 불안해한다. 용두암 앞에서 바라본 바다는 말없이 가르쳐 주었다. 변한다는 것은 사라지는 것만이 아니라 새로운 풍경이 시작되는 일이기도 하다고.
수천 번, 수만 번 파도를 맞았을 용두암은 오늘도 그 자리에 서 있다. 그러나 자세히 생각하면 바위 또한 조금씩 변하고 있을 것이다. 바람에 깎이고 파도에 씻기면서 우리가 알아차리지 못할 만큼 천천히 다른 모습이 되어 간다. 변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존재조차 시간 속에서는 변한다. 어쩌면 견딘다는 것은 처음 모습 그대로 남는 일이 아니라, 조금씩 깎이고 달라지면서도 자신의 자리를 지키는 일인지 모른다.
파도가 발아래 돌을 적셨다가 물러간다. 둥근 돌들이 서로 몸을 부딪치며 낮은 소리를 낸다. 한 번의 파도는 아무것도 바꾸지 못하는 것 같지만 수많은 파도가 모서리진 돌을 둥글게 만든다. 사람의 마음도 그렇다. 기쁨과 슬픔, 만남과 이별이 수없이 드나들면서 거칠었던 마음의 모서리를 조금씩 다듬는다. 세월이 깊어진다는 것은 어쩌면 그렇게 마음 하나가 둥글어지는 과정일 것이다.
다시 카메라를 들었다. 이번에는 사진을 서둘러 찍지 않았다. 렌즈 밖의 풍경을 먼저 오래 바라보았다. 사진에는 바다의 냄새가 담기지 않고, 얼굴을 스치는 바람도 담기지 않는다. 파도가 바위에 부딪치는 소리도 온전히 담을 수 없다. 여행에서 가장 오래 남는 것은 사진보다 그 순간 마음속으로 들어온 감각인지도 모른다.
용두암을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하늘은 또 다른 빛으로 바뀌고 있었다. 아침부터 바라본 구름과 햇살과 노을 가운데 같은 풍경은 한 번도 없었다. 파도 역시 단 한 번도 같은 모습으로 해안에 닿지 않았다. 그런데 우리는 자꾸만 어제와 같은 오늘을 산다고 생각한다. 사실 세상에는 똑같은 하루가 없다. 오늘의 구름도, 오늘의 파도도, 오늘 이곳에 서 있는 사람도 다시는 똑같이 돌아오지 않는다.
그래서 여행은 장소를 찾아가는 일이면서 시간을 만나는 일이다. 용두암에서 만난 것은 제주를 대표하는 바위 하나만이 아니었다. 빛이 머물다 떠나는 시간, 파도가 와서 사라지는 시간, 그리고 그 앞에 잠시 서 있는 한 사람의 시간이었다. 제주 바람이 다시 불어왔다. 용두암은 말없이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천천히 그 곁을 떠났다. 등 뒤에서는 여전히 파도가 부서지고 있었다.
먼 훗날 용두암을 다시 찾는다면 바위는 여전히 그 자리에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때의 하늘도, 바다도, 지금의 나도 같지는 않을 것이다. 그래서 오늘 바라본 풍경이 더욱 귀하다. 여행은 결국 아름다운 곳을 얼마나 많이 보았느냐가 아니라, 한순간을 얼마나 깊이 바라보았느냐에 달려 있는지도 모른다. 그날 용두암에서 나는 제주를 본 것이 아니라, 흘러가는 시간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알았다. 삶도 파도처럼 끊임없이 밀려오고 물러가지만, 그 모든 순간이 지나간 자리에는 저마다 한 줄의 빛이 남는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