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과 인연은 전혀 다른 뜻이다.
인연은 불교적 용어이다.
일본의 엔무스비(縁むすび)와 한국의 인연은 운명과 인연의 중간쯤 되는 의미로 해석하면 옳을 것이다.
인연(因緣)의 산스끄리뜨어는 ‘헤뚜 쁘라띠아야’다.
‘헤뚜 쁘라띠아야’는 일반적으로 연기(緣起)와 같은 의미로 사용된다.
연기와 같은 의미로 쓰이는 ‘인연’은 ‘인’과 ‘연’을 나누어 구체적으로 설명하는 경우에도 자주 쓰인다.
예를 들어 어떤 한 원인과 그것에 대한 조건을 뜻하는 경우, 씨앗이 싹을 틔울 때 그 씨앗을 인(因)으로, 그리고 햇빛·물·땅·온도 등의 조건을 연(緣)으로 본다.
이 때 인을 친인(親因)·내인(內因) 등으로, 연은 소연(疎緣)·외연(外緣) 등으로도 부른다.
운명(運命)은 인간을 포함한 모든 것(혹은 우주만물)이 나아갈 길과 인간과 우주만물를 지배하는 초인간적인 힘 또는 그것에 의하여 이미 정해져 있는 목숨이나 처지를 말한다.
이것에 순응하며 살아가는 사람도 있고, 반대로 깨기 위한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으며 운명 같은 건 없다고 하는 사람도 있다.
운명은 모든 사물을 지배하는 불가피한 필연의 힘이며, 누구라도 따를 수밖에 없고, 예측하기 어려운 절대적인 힘이다.
또한 운명은 명확한 목적의지를 갖는 합리적인 힘으로서가 아니라 오히려 비합리적·초논리적인 힘으로 작용하는 것이다.
일찍부터 운명은 신격화되어 신앙·숭배의 대상이 되었으며 또는 추상화되어 신학·철학의 주제가 되어왔다.
너무 자주 사용해서 그 의미가 퇴색되는 단어들이 있다고 느껴질 때가 있다. <패스트 라이브즈>에서 말하는 '인연'도 그렇다. 특히 '이것도 인연이지' 라는 너스레를 떨며 만났던 사람들이 너무도 빠르게 변해가는 걸 볼 때면 더욱 그런 생각이 든다.
나에겐 <패스트 라이브즈>는 그런 '인연'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 보게 만드는 영화였다.
하지만 앞서 미국에서 <패스트 라이브즈>를 봤던 미국인들은 결코 나와 같은 생각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니, 할 수 없었을 것이다. 미국인들에게 '인연'은 낯선 외국의 단어이다. 한국인이 <패스트 라이브즈>를 볼때, 인연이라는 이미 익숙한 단어를 보다 낯설게 바라볼 준비를 해야 하는 것과 달리, 미국인은 <패스트 라이브즈>를 볼 때 처음 마주하는 이 단어가 영화에서 어떤 의미로 쓰이는지 파악할 준비를 해야 한다.
예를 들어, 해성(유태오)의 술자리에 문득 끼어있는 수염 기른 남자가 한국인들에겐 익숙한 뮤지션 장기하임을 미국인들은 결코 알지 못할 것이다. <패스트 라이브즈>는 그 간극을 무시하지 않고 영화 속에 보존한다. 그렇기에 한국인으로써 우리는 이 영화를 더 흥미롭게 바라볼 수 있다.
<패스트 라이브즈>는 비록 어색할지언정 인물들이 한국말을 하고, 한국 로케이션 장면의 비중이 절반 정도를 차지하는 영화이다.
하지만 <패스트 라이브즈>는 기본적으로 미국 영화이다. 특히 <패스트 라이브즈>에는 서부극과 마피아 영화 등 중요한 장르들을 탄생시키며 이어져 내려 온, 미국을 대표하는 정서 중 하나인 이민자 정서가 짙게 깔려있다. 그러니, 기본적으로 <패스트 라이브즈>는 미국인의 시선으로 바라보도록 설계된 영화이다.
그리고 <패스트 라이브즈>에서 미국인들이 가장 공감이 갈 인물은 노라도 해성도 아닌, 바로 노라의 남편인 아서다.
<패스트 라이브즈>의 시작을 장식했으며 작중 가장 중요하기도 한 장면, 와인바에서 노라와 해성, 아서가 같이 대화를 하는 장면은 아서의 입장에선 아주 무력한 순간처럼 느껴질 수밖에 없다.
아내가 낯선 남자와 얘기를 내밀한 얘기를 하고 있는데 그걸 막을 수도 심지어는 이해할 수조차 없다.
노라가 전달해 주는 짤막한 번역은 아서의 심정을 더 괴롭게 만들 법하다.
두 사람의 실제 대화를 자막으로나마 전해 들을 미국인들 역시 그 둘이 정확히 어떤 얘기를 하는지는 알 수 없을 것이다.
단어 '인연'이 영어로 100퍼센트의 번역이 불가능한 단어이듯이.
아서의 입장에서 영화를 바라본다. 그는 노라가 말한 '인연'의 사용처를 결코 정확하게 알 수 없을 것이다.
노라가 말해준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는 관용구가 한국에서 아주 흔한 표현이라는 것도 알 수 없다.
노라가 말해준 '인연'의 무게는 그에게 미지의 단어로써 더욱 무겁게 다가온다.
아서가 말하는 자신과 노라의 관계가 너무나 평범해 보인다는 자책 역시, 그저 소꿉친구와 어른이 되어 만난 인연 사이 무게감의 차이가 아니라, 언어와 문화의 차이를 더 깊게 느끼는 것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해성을 떠나보내는 장면에서, 해성과 노라의 사이에는 두 사람의 인연-8000겹이라고 언급되는 그 레이어-가 쌓여 있다. 그럼에도 해성을 떠나보낸 노라는 아서와 함께 아직 인연이 덜 쌓인, 몇 개의 계단만이 보이는 가정으로 올라가며 영화를 마무리 짓는다.
그렇다면 작중에 정말로 한국인인 사람은 해성 뿐이다. 그렇기에 그는 우리가 바라보아야 할 중요한 인물이다. 노라가 해성을 다시 찾은 이유가 자신의 과거에게 인사를 건네기 위함이라면, 해성이 노라를 찾아간 이유는 무엇일까?
해성이 노라에게 하는 말들을 생각해본다.
"만약 네가 서울을 떠나지 않았다면, 우리는 서로 사귀었을까? 결혼도 했을까?"
노라에게 해성이 자신의 지나온 과거인 것과 반대로, 해성에게 노라는 자신이 다른 선택을 내렸다면 갔을 지도 모르는 어떤 미래에 있는 인물처럼 느껴진다.
해성은 그 미래를 확인해 보기 위해 미국으로 향한 것이다. 작중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미래의 생'에 대한 얘기를 꺼내는 인물 역시 해성이다.
두 사람의 설정 역시 그렇다. 노라는 이미 결혼을 했지만, 해성은 결혼을 앞두고 망설이고 있다.
그렇기에 노라는 어쩌면 해성이 왔다 가는 이 짧은 여행 사이에 실질적으로 변화를 겪지는 않는다.
그녀는 결론적으로 흔들리지 않고 가정을 지켰다.
그렇다면 어쩌면 이 여행으로 정말 변한 사람은 해성일지 모른다. 그렇기에 <패스트 라이브즈>는 집으로 돌아가는 노라와 아서가 아니라 비행기를 타러 가는 해성의 모습으로 끝난 걸지도 모른다.
그는 '있었을 지도 모를 미래'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자신이 마주할 진짜 미래를 마주하러 한국으로 돌아가고 있다.
<패스트 라이브즈>라는 제목처럼 만약 영화에도 전생이 있었다면 <비밀의 언덕>이 이 영화의 전생이 아니었을까.
영화가 끝나고 12년후, 24년후, 혹은 120년 후 다음 생에서는 어떨까?
영화속 현재도 수많은 <패스트 라이브즈> 중 하나가 되고, 미래에 둘은 어느 골목길에서 다시 만나 영원을 약속할지도 모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