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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정욱의 미술 토크』 Ⅵ
- ▣낭만주의,▣사실주의,▣인상주의,▣후기 인상주의,▣표현주의와 인상주의,▣
◆ 『서정욱의 미술 토크』 Ⅵ···목차
65. 감성으로 표현된 낭만주의- 차가운 머리보다 따뜻한 가슴으로…격정이 내뿜는 에너지를 그리다
65-1. 테오도르 제리코, 『메두사호의 뗏목(Le radeau de la Méduse)』 65-2.들라크루아가 그린 쇼팽
66. 그대로를 그린 사실주의 - 꾸밈 없는 현실, 때론 아름다움보다 힘이 세다
66-1. 사실주의 화가와 작품 -⊙구스타브 크루베 『오르낭의 매장』 외, ⊙오노레 도미에 『삼등열차』
67. 고정된 시각을 바꾼 인상주의-1863년 프랑스 미술계 발칵 뒤집어 놓은 이 작품,현대미술의 시작이었다
67-1. 인상주의 화가와 작품-⊙에두아르 마네,⊙알렉상드르 카바넬,⊙클로드 모네,⊙르누아르
68. 개성시대 미술 시작, 후기 인상주의 - 불만이 낳은 또 다른 미술…
68-1. 후기 인상주의 화가와 작품 - ⊙고흐⊙고갱⊙로트렉⊙모네⊙카미유 피사로⊙쇠라⊙세잔
69. 표현주의와 인상주의…자화상도 극과 극- 감정을 드러냈던 화가, 감췄던 화가
65.감성으로 표현된 낭만주의
- 차가운 머리보다 따뜻한 가슴으로… 격정이 내뿜는 에너지를 그리다
비극적 재난 그린 ‘메두사 호의 뗏목’ - 낭만주의 미술의 시작이자 대표작
풍부한 감성으로 거침없이 감정 표현 - 절제·규칙 중시한 신고전주의와 비교
메두사 호의 뗏목.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끊임없는 선택의 순간을 맞게 된다. 그리고 그때마다 고민에 빠진다. 마음 한편으로는 왠지 이렇게 하고 싶기도 한데 곰곰이 생각해보면, 그래서는 안 될 것 같기도 하고…. 고민은 깊어만 간다. 사람의 마음속에는 늘 두 가지가 함께 존재한다.
이성과 감성이다. 대부분 이성은 무엇을 절제하게 만들거나 따져보게 만들지만, 감성은 가슴에서 자연스럽게 우러나오며 때로는 이유 없는 열정에 빠지게도 한다. 그 열정의 순간 알 수 없는 희열을 느끼기도 한다. 하지만 늘 감성적으로 행동할 수는 없다. 순간을 후회할 때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또 고민할 수밖에 없다.
미술사에는 그중 똑 부러지게 하나만 선택한 사람들이 나온다. 그들은 차가운 머리보다는 따뜻한 가슴으로, 신중한 사고보다는 몸에서 우러나오는 대로를 표현했다. 후에 그들은 낭만주의 미술가라고 불렸다.
미술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음악에도 있었다. 프레데리크 쇼팽이다. 그는 서른아홉 해라는 짧은 생을 살았지만, 언제나 멋을 즐겼고 자유로운 영혼처럼 가슴을 울리는 피아노곡을 작곡했다. 그래서 낭만주의 음악가로 불리기도 하고 피아노의 시인이라고도 불린다. 이름조차 낭만적이다.
그런 낭만주의 음악가 프레데리크 쇼팽을 낭만주의 대표 화가 들라크루아가 낭만적으로 그렸다. 그래서 그가 그린 초상을 볼 때는 평조차 낭만적으로 해야 한다. 드로잉이 어떠하고 색감이 어떠한지 그런 것은 어울리지 않는다. 들라크루아는 쇼팽을 느끼면서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에너지를 그렸을 것이다.
우리는 그 에너지를 감상해야 한다. 쇼팽과 들라크루아는 잘 어울렸고, 잘 통했다. 그들은 착실한 삶보다는 강렬한 삶을 원했다. 괴테의 말처럼 “느낌은 모든 것이다”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르겠다.
들라크루아의 ‘사르다나팔루스의 죽음’.
미술사에서 낭만주의자들과 항상 비교되는 사람은 신고전주의자들이다. 그들은 낭만주의자들을 무척 싫어했다. 당연하다. 그들은 신중하게 정해진 규칙을 좋아했고 넘치지 않는 절제를 실천했으며 꼼꼼히 계획한 후에만 그림을 그렸다. 그래서 빈틈이 없다. 붓 자국조차 허용하지 않던 그들이다.
그러니 낭만주의자들이 얼마나 무책임한 철부지처럼 보였을까. 그런 신고전주의 화가 앵그르가 그린 파가니니와 낭만주의 들라크루아가 그린 파가니니를 보면 재미있게 비교된다. 앵그르의 파가니니는 비록 밑그림이지만 파가니니의 모습이 정확히 보인다. 반면 들라크루아의 파가니니는 색칠까지 다 되어 있지만 흐름만 보인다.
이처럼 신고전주의자들은 정확한 소묘를 중시했으며, 색상도 절제해 사용하고 있었던 반면 낭만주의자들은 자신의 감정을 거침없이 표현했다. 당연히 경쟁 관계는 때론 과열되기도 했었다.
들라크루아는 앵그르의 그림을 “빛바랜 소묘화”라고 평가했고, 심지어 앵그르는 들라크루아를 “인간의 탈을 쓴 악마”라고 인신공격까지 했다. 앵그르가 그린 ‘마담 이네 무아테시에의 초상’과 들라크루아의 ‘사르다나팔루스의 죽음’을 보면 차이를 비교해보기 쉽다.
신고전주의 화가 앵그르의 ‘마담 이네 무아테시에의 초상’.
낭만주의 미술의 시작은 언제였을까? 그것이 시작된 작품으로 알려진 것이 ‘메두사 호의 뗏목’이다. 내용은 이렇다. 1816년 7월 2일 군인과 승객을 태우고 세네갈로 향하던 군함 메두사 호가 서아프리카 바다에서 난파된다.
어쩔 수 없이 선장을 비롯한 군인과 승객들은 6개의 구명보트로 옮겨 타게 됐고, 149명의 선원과 승객들은 임시로 뗏목을 만들어 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선장은 뗏목을 묶어 두기로 한 약속을 어기고 먼저 달아난다.
덕분에 메두사 호의 뗏목은 13일간 정처 없이 표류하게 됐고, 뗏목이 발견되었을 때는 149명 중 15명 정도만이 살아 있었다고 한다.
화가 제리코는 이 사건을 그리기로 한다. 왜냐하면, 그 표류 기간 뗏목에는 얼마나 다양한 감정들이 혼재되어 있었을까? 그것을 그려보고 싶었던 것이다. 그래서 제리코는 당시 생존자를 일일이 만나 증언을 들었으며, 처형된 죄수들의 시체를 보면서 죽은 사람을 그렸고 뗏목에서 미친 사람들을 그리기 위해 정신병 환자를 찾아다녔다.
낭만주의 화가답게 열정도 대단했던 것 같다. 그림은 완성되어 1819년 살롱에 전시됐다. 가로 7m, 높이 5m의 그림은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기에 충분했다. 그 큰 화폭에 온갖 격정이 뒤섞여 있었으니까. 바로 화제가 된 이 그림은 비난과 찬사를 한꺼번에 받으며 유명해지게 되었고, 지금은 낭만주의를 상징하는 대표 그림으로 자리 잡았다.
감성경영, 감성디자인, 이런 말이 등장하는 것을 보면, 이성만 가지고 해결되지 않는 것도 세상에는 많은 것 같다. 사진=필자 제공
[출처] : 서정욱아트앤콘텐츠 대표 : <서정욱의 미술 토크> - 65.감성으로 표현된 낭만주의 - 차가운 머리보다 따뜻한 가슴으로… 격정이 내뿜는 에너지를 그리다 / 국방일보 ,2021. 4. 20.
65-1.테오도르 제리코, 『메두사호의 뗏목(Le radeau de la Méduse)』
Jean Louis Theodre Gericault - La Balsa de la Medusa, 1818-19, oil on canvas, 716 X 491 cm,
Museo del Louvre,
1818-1819년 사이에 테오도르 제리코가 그린 이 그림은 1824년 조례에 의해 국가가 화가의 친구인 데르도 도르시로부터 6.500,프랑에 구입했다. 주제 자체는 상당히 도발적인 선택이다.
사실적이며 거의 신문 기사로 다루는 대 사건과 차이가 없다. 실제로 메두사호 사건은 그야말로 일대 사건이었다.
그러나 다른 차원에서 보면 이 주제는 낭만주의적인 것으로서 삶과 죽음, 희망과 절망을 표현하고 있다고 봐도 무방하다. 기법에 있어서는 오히려 고전주의적이다. 육체의 표현이 거의 조각과 같은 열정을 담고 있으며 이는 곧 프랑스 사회가 지나가야할 정치적인 격동의 시기을 예고하고 있다.
실제로 이 작품은 제리코 자신이 겪게 되는 사회적 정치적 그리고 예술적 긴장이 고조된 시점에서 나온 것이다. 즉 억압적인 군주제도에 대한 일종의 항거인 것이다.
Diagram showing the outline of the two pyramidal structures that form the basis of the work.
The position of the Argus rescue vessel is indicated by the yellow dot.
화폭 전체 구조는 아무런 균형을 보여주지 않는다. 오히려 의도적으로 불균형과 무질서를 강조하여 주제를 부각시키고 있다. 매우 강렬한 두 개의 직선 혹은 플랜이있다고 볼 수 있다. 하나는 뗏목이고 다른 하나는 배경으로써 멀리 드러나는 경치다. 불안정한 바다위에서 펼쳐진 피라미드형 구조를 취하고 있다.
독자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왼편 아래쪽에 있는 시체에서부터 오른 쪽 편의 구조선을 향해 손짓하기 위해 서있는 선원으로 이르는 ‘올라가는’ 직선을 따라갈 것이다. 재현된 동작들은 매우 논리적이다.
검증된 사실과도 일치하기 때문이다. 뗏목을 타고 살아남은 15명은 결국 아귀스에호에 의해서 구출되었다.
그러므로 이 직선이 상승하는 의미는 비록 구름은 어둡고 짙었지만, 결국 난파자들의 겪은 절망으로부터 살아남았다는, 일종의 성공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제2 열(플랜)에 보이는 광채도 이를 뒷받침 해준다. 이같은 상징성은 뗏목에 있는 자들의 동작과 제스쳐로도 다시 확인된다. 동작은 고전적이다. 서양인들의 논리에도 적합하다, 감상의 충위에서 서양인들은 일반적으로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시선을 이동하는 것이다.
그러나 화폭이 상징하는 것과는 반대로 구조선을 아주 조그맣게 그려넣었는데 이는 필시 절망적인 상황을 강조한 것이 아닌가 한다. 그럼으로써 극적인 효과를 기대한 것인지도 모른다.
색체와 밝기에 있어서는 이 그림에 사용된 색조는 매우 제한적이다. 전체적으로 베이지 색에서 검은 색으로 이동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중간 단계로 옅은 갈색조에서 짙은 갈색을 거쳐간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전체적인 분위기가 뜨겁다는 분위기를 풍기면사도 전체적으로 나름의 조화를 이루어 극적이며 어떤 몸부림을 치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물론 화폭에 담긴 지배적인 색조는 베이지 색이며 전체적으로는 색조에 광택이 결핍되어있다. 그러나 이 같은 색조에도 예외가 있다면 그림의 왼편 하단 죽은 시체를 안고 있는 노인이 걸친 스톨라(성직자가 걸치는 어깨 숄)의 빨강색 색조이다.
낭만주의 회화의 특징은 색조의 모호한 사용과 각 색조를 구분짓는 흐릿한 윤곽 내지는 경계이다. 이것이 물론 고 다가올 인상주의를 예고하는 것도 사실이다. 사실 이 그림에서도 그 색체들의 경계는 모호하기 그지없다. 혹은 화가의 의도적인 작업의 결과일련지도 모른다.
더구나 원본 그림을 직접 눈으로 보고 있다면 그나마 더 확실한 분석이 가능할 지도 모르지만 이렇게 복사본을 가지고는 확신을 가지고 말하기 어렵다. 또 한가지 주목한다면 이 그림에서 화가는 긁는 수법을 많이 사용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이는 제리코의 다른 작품에서도 자주 드러난다.
색조의 밝기는 전체적으로 역시 어둡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보다 밝은 색조를 드러내는 먄도 있는 데 제 2플랜, 즉 뗏목 뒤로 드러나는 경치 부분이 여기에 해당된다. 그러나 이 대조는 분명하게 드러나지는 않는 다, 왜냐면 두 층위 다 같은 색조를 사용했기 때문이다.
역사적 문맥은 앞서 언급한 것을 참조할 것이다. 제리코는 생존자들의 증언에 의해 이 사건이 사회적인 이슈가 한창일 때 이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표류하는 메두사의 뗏목이 겪은 고뇌를 표현하기 위해서 극적으로 그 비극을 마감하는 순간, 즉 생존자들이 보일 듯 말 듯한 아귀스 호를 발견한 순간을 그림으로 포착하고 있다.
작품은 실제 사회적, 정치적 그리고 제리코 자신도 어쩔 수 없이 참아야만 했던 예술적 긴장이 한창일 때 제작되었다. 그러므로 이는 예술을 질식시키려는 전제주의 체제에 대한 한 예술가의 의견 표명일 수도 있다.
메두사의 생존자들은 한 시대, 즉 군주제의 한 이미지이며 동시에 이 그림은 시사문제와 감수성이 회화로 재현된 한 모델이기도 하다. 뗏목의 맨 가장자리에 서서 구조선을 향해 신호를 보내는 검은색으로 표현된 한 남자의 제스쳐는 그만큼 정치적이면서도 상징적이다.
화가는 아무튼 이 그림을 통해서 자신의 재능을 과시하고 대중들에게 어필하려고 했었던 것 같다. 그래서 1919년 살롱에 출품하여 논쟁의 대상이 되었으며 낭만주의 회화를 예고했던 것이다.
1816년 7월2일, 아프리카 서안 브롱곶(지금의 모리셔스 중부 해안) 50㎞ 해상. 프랑스 군함 메두사호가 암초에 걸렸다. 보름 전 프랑스 중서부 로슈포르 항구를 떠난 메두사호의 목적은 세네갈 식민지 개척. 나폴레옹의 명으로 45척을 건조했던 40문 프리깃 중 한 척으로 1810년 건조된 메두사호의 출항은 국민의 관심을 모았다.
패전으로 국민의 사기가 땅에 떨어진 상황에서 식민지 개척을 ‘과거의 영광 재현을 위한 도전’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왕정복고로 즉위한 루이 18세는 메두사호뿐 아니라 보급선 등 3척을 딸려 보냈다.
화려한 출항과 달리 메두사 선단은 치명적인 문제를 안고 있었다. 무엇보다 선장의 자질이 떨어졌다. 45세 쇼마레 선장은 승선 경험이 부족했음에도 왕당파 귀족 출신이라는 이유로 감투를 썼다. 자리를 얻으려 돈을 쓴 쇼마레 선장은 뒷돈을 받고 사람을 더 태웠다.
정원 326명인 메두사호에 400명이 넘게 탔다. 최대한 이른 시간에 도착하려는 욕심에 쇼마레 선장은 선원들의 충고를 무시하고 연안에서 속도를 올렸다. 결국 사구와 암초를 만나 난파했지만 구명정이 절대적으로 모자랐다.
쇼마레 선장은 귀족과 장교 등 ‘고귀한 신분’을 구명정 6척에 먼저 태웠다. 나머지는 메두사호에서 나온 판자로 길이 20m, 폭 7m짜리 대형 뗏목을 급조해 실었다. 쇼마레 선장은 뗏목을 연결한 구명정의 속도가 나지 않자 로프를 끊어버렸다.
망망대해에 버려진 159명이 탄 뗏목에서는 지옥도가 펼쳐졌다. 격랑에 몸을 맡겨야 할 양쪽 가장자리에 앉은 사람들은 보다 안전한 중앙을 차지하려 싸웠다. 넷째 날 67명만 남은 상황에서 일부가 굶주림과 갈증으로 인육을 먹고 피를 마셨다.
함께 출항했던 쌍범선 아르고호가 사고 보름 뒤 뗏목을 발견했을 때 생존자는 15명만 남았다. 발견 즉시 5명이 더 죽어 결국 10명만 살았다.
프랑스 왕정은 사건 자체를 숨겼으나 수많은 사람이 죽어간 사건을 숨길 수는 없는 법. 사고 두 달 보름 뒤부터 왕정 반대 논조의 글이 신문에 실리며 시민들의 분노를 자아냈다.
관직을 돈으로 사고파는 왕정의 습성도 도마 위에 올랐다. 뗏목에 남기를 자원했던 군의관과 항해사가 이듬해 책을 내서 사건을 고발하고 28세의 화가 테오도르 제리코는 1819년 대작 ‘메두사호의 뗏목’을 그렸다.
무능하고 부패한데다 국민의 생명을 하찮게 여긴 부르봉 왕가는 1830년 끝내 무너졌다. 분노를 넘는 날카로운 기억과 기록의 힘, 그 파장이 역사를 만든다.
이 그림을 보고 그림에서 느껴지는 격정과 힘에 압도되지 않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프랑스 낭만주의의 선구자였던 테오도르 제리코(1791~1824)가 그린 이 그림은 오늘에는 낭만주의의 운동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으로 간주된다.
낭만주의는 고전적인 18세기 미술에서 탈피하여 감정과 사실성을 강조했다. 이 그림은 고전주의와 낭만주의를 이어주기 때문에 더욱 흥미롭다. 1819년 살롱전에 이 그림이 소개되자 사람들은 경악했다.
이 그림은 난파된 프랑스 정부의 전함 ‘메두사 호’에서 일어난 실제 사건을 재현한 것이다. ‘메두사 호’가 난파되자 무능력한 선장과 장교들은 150명의 선원과 승객들을 버리고 구명보트를 타고 가버렸는데, 그 중 살아남은 15명은 임시 뗏목위에서 절망에 빠져 심지어 동료의 시신을 먹는 야만적인 행위를 하면서 죽어가다가 구조됐다.
제리코는 당대 실제로 일어났으며(메두사 호는 1816년에 난파됨) 관련된 모든 사람들이 심한 비난을 받았던 야비하고 불손한 이 사건을 전통주의자들의 사랑을 받았던 거대하고 웅장한 역사화와 유사한 방식으로 그렸다.
이 그림에서는 소용돌이치는 움직임과 감정을 증폭시키는 엄청난 에너지를 가진 붓질과 소름끼칠 정도로 사실적인 묘사를 볼 수 있다(제리코는 오른쪽의 인물들을 자세히 그리기 위해 시체를 연구했다).그러나 인물들의 몸과 피라미드형 구성은 양식적인 면에서 고전적이라고 할 수 있다.
대중들은 분노했지만, 이 그림은 예술적으로는 호평을 받았으며, 들라크루아 같은 화가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젊은 나이에 낙마 사고로 요절한 프랑스 낭만주의의 천재 화가 테오도르 제리코의 주요 작품은 세 점에 불과하지만, 그의 작품들은 프랑스 낭만주의 미술의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제리코는 인간의 감정과 정치적‧사회적 부조리에 반항하는 작품을 제작했고, 이는 그의 대표작 <메두사 호의 뗏목>을 통해 잘 나타난다. 제리코가 27세의 나이에 제작한 이 그림은 신고전주의의 영웅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당시 실제 일어난 비극적인 조난 사건을 다루고 있다.
이 그림은 전통적인 역사화의 요소를 내포하고 있지만 처음으로 당대의 사건에서 진실을 포착했고, 낭만적인 감수성을 통해 극적으로 표현된 주제는 고요하고 정적인 질서가 지배적인 신고전주의와의 결별을 알리고 있다.
1816년 7월 2일 세네갈을 식민지로 삼기 위해 떠난 해군 군함 메두사 호가 난파했다. 선장과 상급 선원, 일부 승객은 여섯 개의 구명 보트를 타고 대피했지만, 나머지 149명의 선원과 승객은 뗏목을 만들어 탈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이 뗏목을 구명 보트에 매달아 끌고 가기로 했던 선장은 이를 잘라내고 도망갔다.
13일 동안 물도 식량도 없이 표류한 이들의 뗏목은 죽음과 질병, 폭동과 광기, 기아와 탈수, 식인의 생지옥이 되었다. 구조될 때까지 살아 남은 이는 15명에 불과했는데 이후 이 사건은 국가적인 스캔들이 되었다.
이 사건은 20여 년간 전장에 나가본 적도 없는 무능한 왕당파가 왕정 복고기에 지휘관으로 임명되어 벌어진 인재이기도 했다. 하지만 프랑스 정부는 생존자 중 한 명인 그 배의 외과 의사가 이 비극의 전모를 밝히는 이야기를 출판할 때까지 사건의 많은 부분을 은폐하려 했다.
이 사건은 열정적인 젊은 화가인 제리코를 매료시켰고, 그는 이 사건을 주제로 한 작품을 1819년 살롱에 출품하기로 했다. 제리코는 긴 시간 동안 철저한 조사와 수많은 사전 작업을 하면서 그림의 구성을 준비했다. 그는 기록을 모으고 생존자들을 만나 면담하면서 이들 중 몇몇을 모델로 고용했다.
그는 정신 병원에 가서 광인들을 관찰했고, 시체 안치소와 병원을 찾아 죽어가는 사람과 이미 죽은 이들의 몸 색과 질감을 직접 보며 연구했다. 심지어 제리코는 메뒤즈 호의 목수를 고용해 실제 크기의 뗏목을 제작했으며, 밀랍으로 모형을 만들기까지 했다.
이런 철저한 준비 과정을 거쳐 제작된 그림은 충격적이리만치 강렬하고 끔찍했으며, 처참한 세부까지 정확했다.
<메두사 호의 뗏목>은 생존자들이 13일간의 표류 뒤에 수평선 멀리 구조선을 발견하는 순간을 묘사한다. 뗏목은 파도의 움직임에 따라 위로 솟구쳐있고, 돛은 바람에 부풀어있다.
관람자는 뗏목을 내려다보고 시체를 직접 대면하는 듯한 인상을 받기도 하지만, 대부분 실제 사람 크기로 그려진 거대한 그림 속의 인물들도 관람객들이 참여하고 있다는 박진감을 강조한다.
Jean Louis Theodre Gericault - La Balsa de la Medusa, 1818-19, (Detail)
화면의 인물군은 그림의 왼쪽 돛대와 먼 곳에서 지나가는 배를 향해 필사적으로 손을 흔드는 인물을 중심으로 두 개의 피라미드를 이룬다. 왼쪽 하단 전경에는 한 아버지가 무릎에 놓인 죽은 아들을 애도하는 장면이 보이고, 뗏목 가장자리에 놓인 다른 시체들은 곧 파도에 떠내려갈 듯하다.
중앙의 인물들은 방금 구조선을 보았고, 한 사람이 이를 다른 이에게 가리킨다. 오른쪽 상단에 있는 흑인 선원은 빈 술통 위에 앉아 구조선의 관심을 끌기 위해 손수건을 흔들어댄다.
시선은 전경의 누운 시체에서부터 중앙의 생존자들의 몸을 따라 차츰 대각선 오른쪽 위로 올라가 마지막으로 오른쪽에 선 남자가 흔드는 천에 도달하면서 감정도 점점 고조된다.
그림은 전체적으로 어둡고 갈색조인데, 제리코는 이것이 비극과 고통을 효과적으로 암시한다고 보았다. 인물들의 창백한 신체는 카라바조 풍의 강한 명암법으로 잔인한 운명을 강조한다.
어떤 이들은 구조선을 향해 희망 어린 손짓을 하지만, 절망한 다른 이들은 무감각하게 바라보고 있다. 이런 대조적인 인물들의 감정은 제리코의 작품에 흐르는 낭만주의적 영감을 반영한다.
제리코가 기대한 것처럼 <메두사 호의 뗏목>은 1819년 살롱에 출품하면서부터 찬사와 비난을 동시에 받으며 큰 화제거리가 되었다.
비평가들은 주제의 공포와 끔찍함에 매료되거나, 시체더미를 묘사한 것에 대해 혐오를 드러냈다. 하지만 이런 논쟁조차 제리코의 명성을 높였고, 이 작품을 프랑스 낭만주의 회화를 대표하는 작품으로 자리매김하게 했다.
부조리에 대한 저항과 해방에의 희망
제리코가 발표한 《메두사의 뗏목》에 들라크루아는 실제로 제리코의 모델이 되어 그림 속에 등장하기까지 했는데, 뗏목의 바닥 중앙에 등을 보이고 엎어져 있는 검은 머리의 남자가 바로 들라크루아이다(들라크루아의 자화상을 보면 그림 속의 그를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매우 정확한 뒷모습이다).
메두사는 식민지 세네갈과 프랑스 사이를 운항하던 정기선의 이름이다. 1816년 여름, 메두사가 서부 아프리카 해안에서 난파하자, 선장은 배의 파편으로 얼기설기 만든 뗏목에 이백여 명의 하급 선원과 식민지인들을 태우고 자신은 구명보트에 올라탔다.
그마저도 비좁아서 이미 뗏목의 반이 물에 잠긴 상황에, 해안까지 뗏목을 끌고 가겠다던 선장은 바다 한 가운데서 구명보트와 뗏목의 연결선을 끊어버렸다.메두사의 뗏목은 약 2주 간의 표류 끝에 열댓 명만이 구조되어 살아 돌아왔고, 생존자들의 증언은 극한 상황에 처한 인간 본능의 처참한 바닥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식인과 살상 등 뗏목에서의 참상이 충격적일 뿐 아니라, 무능하고 부도덕한 선장이 이끌었던 거대 함선의 마지막이 당시 샤를 10세 정권의 부패 및 실정으로 연결되어 사회적으로도 큰 파장을 일으킨 사건이다.
제리코가 선택한 장면은 수평선 너머에서 희미하게 모습을 드러낸 배를 보고 미친 듯이 구원을 청하는 생존자들의 모습이다. 거대한 캔버스 하단의 반을 채운 처참한 시체들을 딛고 올라선 생존자들은 마치 피라미드처럼 정점을 향해 거세게 솟구쳐 올라 극적인 순간의 광란을 강조했다.
제리코는 시체 안치소에서 주검을 스케치하고 뗏목의 모형을 스튜디오 안에 만드는 등 사실적인 재현을 위해 폭넓은 준비를 했지만, 이 작품 또한 『민중을 이끄는 자유』와 마찬가지로 구체적인 사건을 그린 역사화라기 보다는 보편적인 알레고리의 성격을 더 강하게 갖고 있다.
건장한 근육질의 고전적인 인체 누드는 실제 뗏목에서 기아 속에 겨우 살아남은 이들과 달랐고, 특히 세차게 뗏목을 흔드는 바람에 맞서 꼭대기에 올라 선 건장한 흑인의 뒷모습은 들라크루아의 ‘자유’ 만큼이나 강렬하게 부조리에 대한 저항과 해방에의 희망을 표출하고 있는 것이다.
제리코의 <메두사 호의 뗏목>:낭만주의 회화에 표현된 정치적 개념 의식
9세기 낭만주의 회화는 개인의 열정과 개성의 표현을 진정한 예술의 목적이라는 개념을 토대로 예술가의 현실 주제에 대한 개입과 상상력의 시각화를 그 특징으로 뽑을 수 있다.
프랑스 대혁명 이후 프랑스 낭만주의 시대는 새로운 감상자 계층의 형성과 미술 시장의 활성화로 인해 프랑스의 문화적 자부심이 팽배하였다. 그리고 19세기 초에 확립된 이러한 프랑스 낭만주의의 전통은 1900년경까지 지속하여 왔음을 알 수 있다.
프랑스 낭만주의 회화의 시초라고 불리는 테오드로 제리코(Théodore Géricault, 1791~1824)는 1819년 <메두사 호의 뗏목>(The Raft of the Medusa)을 통해 당시 정치적 사건의 시각적으로 재현하는 회화를 출품한다.
제리코의 <메두사 호의 뗏목>은 실제 사건에 기인한 작품으로서 1816년 실제 ‘메두사 호’ 침몰에 영감을 받은 제리코가 문헌 자료와 증언 기록 등을 모아 계획적으로 그린 작품으로 볼 수 있다.
당시 프랑스의 사회사적 배경과 함께 제리코가 보이는 회화적 특징을 연구함으로써, 제리코가 <메두사 호의 뗏목>을 통해 반영하고자 하였던 시대 의식을 알아볼 수 있다.
[도판 1] The Raft of the Medusa, Théodore Géricault, 1819-1819, Oil on canvas, 491cm x 716cm,
Louvre, Paris.
Detail from the lower left corner of the canvas showing two dying figures
제리코의 작품 <메두사 호의 뗏목>(The Raft of the Medusa)은 난파된 프랑스 왕실 전함 ‘메두사 호’에서 일어난 실제 사건을 재현한 작품이다. 1816년 7월 망명 프랑스 귀족 출신인 뒤루아 드 쇼마레가 지휘하던 실 전함 메두사 호가 침몰하였고, 150명의 사람이 서둘러 만든 뗏목에 의지하였다.
15일을 뗏목에서 버틴 사람 중 10명만이 구조가 되었다. 당시 코레아르와 사비니라는 2명의 생존자가 난파 당시의 일을 글로 적었고, 제리코는 이 사건에 영감을 받아 <메두사 호의 뗏목>을 그리게 된다. 그의 작품은 1819년 살롱전에 출품되었으며 현실 사건과 연관하여 극적 표현을 강조했다는 것에 의의가 있다.
특히 ‘메두사 호’ 사건은 당시 언론을 통해 보고되었을 때, 25년간 배를 탄 적 없는 선장 쇼마레가 식민지 개척을 위해 관료를 매수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사회적으로 큰 파문을 일으킨다.
제리코는 <메두사 호의 뗏목>을 통해 불안과 공포로 정신 이상 증세를 보이는 사람들의 자연에 대한 항거 모습의 표현과 더불어 정권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반영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는 작품을 나타내고자 하였다.
미술사학자 베네딕트 니컬슨(Benedict Nicolson)은 제리코가 긴 시간 동안 철저하게 사건을 조사하고 작품에 사용되는 이미지의 구성을 사전 작업을 통해 구성했다는 점을 빌어 주제적 측면에서의 <메두사 호의 뗏목>을 강조하였다.
Plan of The Raft of the Medusa at the moment of its crew's rescue.
<메두사 호의 뗏목>에 나타나는 표현적 특징을 살펴보자면, 생존자들이 열흘간의 표류 끝에 구조선을 발견하는 장면을 다룬다. 뗏목은 파도의 움직임에 따라 표현되었고, 돛은 바람에 부풀어 있다. 작품 구성은 삼각형 구도를 이루고 있으며, 왼쪽으로부터 파도가 일어 돛을 덮치는 대립적인 힘을 나타낸다.
왼쪽 아래 두 구의 시체가 미끄러져 가는 장면을 포함하여 대부분 인물이 실제 사람 크기로 거대하게 그려졌다. 인물군은 왼쪽 돛대와 지나가는 배를 향해 손을 흔드는 인물 중심으로 두 개의 피라미드를 이룬다.
또한, 중앙의 인물은 대각선 오른쪽 위로 올라가 마지막으로 오른쪽 인물이 흔드는 천에서 극적인 모습이 보인다. 작품의 구성은 장면을 극대화함으로써 뗏목의 구조 상황에 초점을 두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9세기에 발생한 비극적인 사건을 소재로 택한 제리코는 당시 사회와 예술 전반에 대두하는 자기 표현과 더불어, 정치적 사건의 시각적 구현을 나타낸다. 19세기 프랑스 낭만주의는 외국으로 망명했던 문학자들이 귀국하면서 퍼트린 문학 정신에서 비롯되었다.
특히 샤토브리앙(François René Châteaubriand, 1768-1848)의 자아에 대한 숭배는 프랑스 낭만주의의 토대를 마련한다. 낭만주의는 18세기 말에서 19세기 중반에 이르기까지 절대 군주의 시대가 지나고 프랑스인들의 민족적 자부심이 고양되던 시기에 형성된 사조로서 1789년에 일어난 프랑스 대혁명의 소산물로 볼 수 있다.
혁명 시기에 미술사에서 나타난 큰 변화 중 하나는 언론의 표출이었다. 이후 제1 제정 아래에서 엄격하게 검열되었던 언론은 루이 18세가 발표한 헌장으로 이전보다 자유로운 모습을 가지게 된다.
아놀드 하우저(Arnold Hauser, 1892-1978)에 따르면, 혁명과 낭만주의의 관계 아래 예술은 한마디로 한 개인이 다른 개인에게 자신의 의사와 감정을 전달하는 매개체가 되었다.
특히 프랑스 언론의 변혁에서 <주르날 데 데바 (The Journal of Debates)>(1789)와 <콩스티튀시오넬(The Constitutional)>(1815) 등을 포함한 잡지사들은 당시 화가들과 작가들에게 지면을 내주었고, 문예란 형식으로 살롱전에 대한 평을 실을 수 있도록 하였다.
따라서 19세기 낭만주의 화가들은 당대의 정치적, 사회적
차원의 개입을 통해 직접적인 현실 수용이 가능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도판 2] Cuirassier blessé quittant le feu, Théodore Géricault, 1814,
Oil on canvas, 349cm x 266cm, Louvre, Paris.
이 시기와 맞물려 제리코는 1814년 살롱전에 <전쟁터를 떠나는 부상당한 기갑병(Cuirassier blessé quittant le feu)[도판 2]을 출품하였다. 이 작품에서 이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은 당대의 패잔병으로, 작품에서는 그의 육체적 상처보다 정신적 상처를 강조한다. 제리코는 이 작품을 통해 역사화도 초상화도 아닌 당대 새로운 유형의 회화를 선도한다.
다수의 제리코의 회화를 연구한 Lorenz Eitner (1919-2009)에 따르면, <전쟁터를 떠나는 부상당한 기갑병>은 익명의 인물을 통해 당대 사건과 감정을 암시한다. 즉, 이 작품은 애국적인 표현이 담긴 역사화가 아니라 근대적 정치 개념을 한 개인에 투영시킨 작품으로서 의의가 있다. 이로부터 제리코는 현실적 사건을 작품에 반영하는 회화 기법에 관심을 두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9세기 낭만주의 회화의 수용 방식은 개성적 표현의 법칙과 기준이 개인에게 있다는 예술적 자유와 맞물리게 된다. 낭만주의 시대와 낭만주의 예술가들은 객관적이고 전통적인 가치에 기준을 종속시키기보다, 스스로가 기준을 만들고 그 기준에 의해 평가받기를 원하는 표현적인 성격이 강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프랑스에서는 18세기 후반부터 19세기까지 모든 미술가들에게 개방된 살롱 문화가 감상자 수의 증가를 만들며 개인 전람회, 아뜰리에 전람회 등 전시 형태가 늘어남에 따라 자연스럽게 미술 감상자 계층도 확보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를 통해서 볼 때, 제리코의 회화에는 당시 주목받는 사건에 대한 관심과 정치적 메시지가 반영되어 있고, 19세기 낭만주의 회화사에서 회화가 사람들에게 가져다 줄 영향을 인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무엇보다 제리코가 사건의 경위 파악을 위해 생존자들을 직접 만나고 동시에 그들의 경험을 강조하는 서사적 표현을 통해 사건의 경위를 덮으려는 당국의 왕정파 언론에 정치적 개념 의식을 표출했던 것으로 보인다.
사회적으로 나폴레옹의 워털루 패전 이후, 왕정복고 시대에 군주제 부활 속에 발생한 비극적인 사건을 통해 제리코는 정부와 언론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워주고자 하였는데, 이는 그가 당시 자유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나폴레옹 실각 이후 다시 일어난 군주 통치에 반감을 품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결과적으로 제리코의 <메두사의 뗏목>은 ‘메두사 호 사건’의 선장인 뒤루아 드 쇼마레에게 책임을 묻을 수 있는 결정적 역할을 한다는 것에 의의가 있다.
따라서 <메두사 호의 사건>은 정치적 사건을 시각적으로 구현한 작품으로 볼 수 있으며 화가 개인의 정치적 개념 의식을 표현하고자 하는 의도가 근본적으로 회화의 바탕에 깔렸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는 19세기 낭만주의 회화가 이제 막 이성 중심에서 벗어나 예술가의 상상력과 감수성에 새로운 가치를 부여한다는 사실을 통해서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65-2.들라크루아가 그린 쇼팽
-연상의 여인 상드와 함께한 작품 누군가 둘로 나눠 팔아 치워
화가가 그린 예술가의 초상 중 가장 유명한 작품은 외젠 들라크루아(1798~1863)가 그린 작곡가 프레데리크 쇼팽(1810~1849)의 초상일 것이다. 낭만주의 화풍의 거장 들라크루아 앞에서 포즈를 취한 ‘피아노의 시인’은 허공에 시선을 둔 채 어딘지 모르게 불안해 보이는 얼굴이다.
그것은 이 초상화가 원래 피아노를 치는 쇼팽의 모습을 담고 있었기 때문이다. 즉 자리에 편히 앉아 화가를 응시하는 고전적 자세의 초상화가 아니라, 피아노를 연주하는 장면을 담았기 때문에 초상화 속 쇼팽은 자기감정을 억누르지 못하고 동요하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이다.
이 초상화는 원래 쇼팽과 그의 연인 조르주 상드(1804~1876)를 동시에 담은 작품의 일부분이다. 그러니까 들라크루아는 하나의 캔버스에 쇼팽과 상드 두 사람을 모두 그린 것인데, 어찌된 일인지 이들의 초상은 둘로 분리돼 팔려나갔다.
초상화는 원래 쇼팽이 캔버스 오른편에 앉아 피아노를 연주하고, 상드가 그 왼편에 앉아 연인의 연주에 귀 기울이는 모습이었다.
들라크루아가 그린 상드(왼쪽)와 쇼팽(오른쪽)을 현대회화에서 재현한 작품. 원래는 이런 모습이었을까?
잘 알려진 것처럼 쇼팽과 상드는 19세기 중엽 파리 문화계에서 유명했던 ‘세기의 연인’이다. 상드는 쇼팽보다 6년 연상이었고, 남성 위주의 19세기 파리 사회에서 남장한 모습으로 살롱에 드나들며 소설가로 활동할 만큼 당찬 성격이었다.
인기 절정의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였으나 늘 병약한 데다, 폴란드 출신이라 파리에 가족이 없던 쇼팽은 연상의 여인 상드에게서 연인이자 어머니 모습을 발견했다.
여러모로 어울리지 않는 커플이었지만 이들은 1838년부터 1847년까지 사실혼 관계를 유지했다. 피아노 협주곡 1번과 발라드 4곡 등 쇼팽의 대표작들이 상드와의 동거생활 기간에 탄생했다.
그러나 쇼팽과 상드의 딸 사이에서 이상 기류가 감지되면서 두 사람은 헤어지는 길을 택했고, 이 결별로부터 2년이 채 지나지 않아 쇼팽은 폐결핵으로 서른아홉 젊은 나이에 숨을 거뒀다.
파리 화단에서 최고 낭만주의 화가로 손꼽히던 들라크루아를 쇼팽에게 소개해준 사람도 상드였다. 두 사람은 1838년 처음 만난 이후부터 쇼팽이 숨을 거둘 때까지 절친한 친구로 지냈다. 들라크루아가 쇼팽과 상드의 초상화를 그린 이유 역시 이 세 예술가가 서로 친한 사이였기 때문일 것이다.
'쇼팽의 초상’, 외젠 들라크루아, 1838년, 캔버스에 유채, 46×38cm,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 소장.
사실 들라크루아가 이 초상화를 그린 이유는 아직까지 밝혀지지 않았다. 이 초상화는 들라크루아가 1863년 사망했을 때까지 그의 스튜디오에 보관돼 있었다. 만약 쇼팽이나 상드 둘 중 한 명이 초상화를 의뢰했다면, 완성된 초상화는 이 둘 가운데 한 명의 집에 보관돼 있었을 것이다.
아니면 쇼팽과 상드가 결별한 후 각자 짐을 챙겨 다른 집으로 이사하면서 이 초상화가 갈 데가 없어지자 들라크루아 집으로 되돌아왔을지도 모른다. 일설에 의하면, 이 초상화를 그리려고 들라크루아가 자기 스튜디오에 피아노를 빌려다 놓기까지 했다고 한다.
아무튼 초상화는 끝내 갈 데를 찾지 못했고, 들라크루아가 사망한 후 누군가가 이 초상화를 둘로 쪼갰다. 작품을 하나로 파는 것보다 둘로 나눠 팔면 더 많은 돈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쇼팽과 상드, 두 사람을 동시에 담은 특별한 작품이자 들라크루아의 걸작 중 하나인 쇼팽과 상드의 초상은 이렇게 어이없이 훼손되고 말았다.
현재 ‘쇼팽의 초상’은 프랑스 파리 루브르 박물관에, ‘상드의 초상’은 덴마크 코펜하겐 오르드룹고르 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 들라크루아 작 : '상드의 초상' (1838) 오드럽 가드 컬렉션
[출처] : 전원경 문화정책박사.런던미술관 산책 저자 :<예술가의 초상>-들라크루아가 그린 쇼팽 / 주간동아.2014.6.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