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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련기는 송나라 사람 《수양오로도》王连起|宋人《睢阳五老图》考
2021년 11월 15일 11:15 펑파이 뉴스 소스:이페어케이
북송 인종 때 명신 두연과 주무필세장·풍평·왕환치사 후 수양으로 귀향하여 안집부시행락이라 하였다.수양오로회.당시 명인은 대부분 노래와 호응이 있었다땅의 화가가 그들을 위하여 그렸다.그림, '수양오'라고도 한다.그림'이라고 썼다.
첸밍이 서문을 작성하는데, 송원밍청이 있다여러 가지 발문이 있다. 이 그림은 최근 천 년 동안 전해졌으나, 근대에 이르러서야 사람에 의해 분할 매각되었다.출제. 오로상과 부분 문제오늘날 미국에 흩어져 있는 세 가지한 박물관에서 송원명가는 장찬·양만리와 같다범성대, 조맹부우집·두본·주백기 등 명청까지 50여 개의 제목이 현재 상하이박물관을 소장하고 있다.오로 도상은 모사, 표정과 자태가 매우 사실적이고 예술 수준이 높아 중국 인물 초상화의 발전사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이 같은 발제자는 없는 사람도 많다.열거)의 발문은 따로 있을 경우 모두 법서 진품으로 정할 수 있다.그러나 이처럼 회화, 서예, 문헌, 문학 등 여러 면에서 중요한 가치를 지닌 작품은 연구에서 제대로 다뤄지지 않았다.
20세기 50년대에 타이베이는 이름을 날렸다학자 이림찬과 장신(莊申)이 일찍이 이 그림을 토론하는 글을 썼으나, 처음 보는 이미지 때문에 아직 그렇지 않았다전체 주제의 발문을 보고, 소홀하게 되었다문헌 고증 혹은 그림발도 목도 없이 단지 의지하다행문을 추리하기 때문에 할 수 없다이 그림과 관련된 종류를 분명히 말하다종문제. 특히 둘선생이 이 그림을 근대에 전해내려온 경위는 모두 그림과 발끝에 온전히 소장했던 장곡손씨로부터 탐문해 왔으며, 이 그림이 분할되어 해외에 팔린 것도 바로 장씨 집안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두 분의 말씀에 요령이 없으면 자명하다.장씨 글에는 모사본이 나열돼 있고, 1등과 2등, 3등까지 나열돼 있다.발묵적(發墨籍)을 보면 송지명(宋至明)의 모사본이 많이 나왔고, 모사본이 세 가지나 남아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장씨의 주관적인 억측인 이른바 제 몇 번째 모사본은 전혀 관련이 없다.대륙이 이 그림을 다룬 글에서 나는 상박관보에 실린 이준걸 선생의 송인오로도에 대하여(1) 단문 한 편만 보고 1983년 수전(手展) 도미(美)를 언급하면서 메트로폴리탄예술박물관에 필세장 초상 외에 오로도(五老圖)라는 제목이 18개이고 명나라 야오광효(姚廣孝), 신시행(申時行), 청나라 서형(徐形), 좌종당(左宗唐) 등 발문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그들은 "연구를 조사할 수 있도록 즉시 사진 자료를 요구하였다"고 한다.또 "상하이박물관은 《명주집 주앙록 수양오로도제발책》을 소장하고 있는데, 그 안에 기록되어 있다.수양오로도서계인 '대송지와 병신(3년, 1056) 추석날 돈명일서'가 있다."이 글에서 이씨가 첸밍이 '오로도서'가 메트로폴리탄박물관에 있다는 '오로도(五老圖書)'에 관한 이린찬의 말을 인용한 바 있다.그러나 이준걸 선생이 미국 메트로폴리탄미술관에 요청한 사진에는 이 돈의 서열이 없는 것 같다.이 서문은 『오로도』의 저자를 연구하는 데 매우 중요하다.
본인은 1980년대에 서방을 따랐다달 선생은 상하이박물관에서 수양오로도의 발문을 본 적이 있다.2002년 여름, 또 전용이다상해 박물관에 가서 이 문제를 보다발책, 명유구림본명일자임본 및 명인초록의 이미 산실된 이 그림의 발문.1999년부터 20년까지00년 미국 메트로폴리탄예술박물관, 프린스턴대 학술방문 중 미국 플릴미술관에 각각 소장돼 있는 왕환(사진1), 풍평상(사진2), 예일대 박물관의 주관(사진3), 두연상을 방문해 자세히 본 적이 있다.[그림4] 미국 메트로폴리탄미술관의 필세상 [그림5]여러 가지 문제가 머리를 싸매고 생각하며 깨끗이 정리되었는데, 지금은 상해박물관이 개관 50주년에 국제 학술 세미나를 개최하는 기회를 빌려 《수양오로도고》를 시작하여 방가에 입증하고, 동호인들과 진일보한 토론의 기회를 얻기를 희망한다.
[도일] 송나라 사람 《쥐양오로도》지왕환, 미 플리어 미술관 소장 같다 〔图一〕宋人《雎阳五老图》之王涣像 美国弗利尔美术馆藏
[그림 2] 송나라 사람 《쥐양오로도》풍평은 미국 플릴 미술관 소장 〔图二〕宋人《雎阳五老图》之冯平像 美国弗利尔美术馆藏
[도삼] 송나라 사람 《쥐양오로도》지주관상 미 예일대 박물관 소장 〔图三〕宋人《雎阳五老图》之朱贯像 美国耶鲁大学博物馆藏
[도사] 송나라 사람 《쥐양오로도》지두연상 미 예일대 박물관 소장 〔图四〕宋人《雎阳五老图》之杜衍像 美国耶鲁大学博物馆藏
[도오] 송나라 사람 《쥐양오로도》필생 미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소장 〔图五〕宋人《雎阳五老图》之毕世长像 美国大都会艺术博物馆藏
이 그림(제발 포함)의 현황
수양오로도의 이미지 부분은견본설색화는 여러 곳이 파손되고 색이 어두웠는데, 지금은 책장으로 한 점 한 점씩 보인다.모두 한 줄로 휘호하고 그것을 기록하다관직, 성씨, 연세.플릴 미술관 소장두 폭은 '예부시랑치'이다사왕환구십세" "가부랑중치사풍평팔17세 예일대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2점은 치스치궈공 두옌80 병부랑중치스 주관88세, 메트로폴리탄예술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2점은 사농경치사필세장 아흔네 살이다.그중 왕환·풍평 및 두연·주관도 그림만 있다제목 없이 미국 메트로폴리탄예술박물관의 필세장상만 있고 북송 첸밍일 소행서 서문이 있는데, 이는 수양오로도에 나오는 유일한 북송인 먹물일 뿐 아니라 첸밍일 같은 세가(世家) 자제 출신 북송사환 명인의 묵적 유본이다.특히 '수양오로도'의 제작 원인과 제작 경위를 전문적으로 기술하고 있다.이 전문[그림6]을 베껴서 아래와 같이 기록한다.
[도6] 첸밍일 『쥐양오로도서』 미국 메트로폴리탄예술박물관 소장〔图六〕钱明逸《雎阳五老图序》 美国大都会艺术博物馆藏
남편이 영광스러운 명성을 누리며 종말을 고했다.오늘날의 지정궁 사사상국두공(治政宮師相國杜公), 아도민식(雅度敏識), 규장엄묘(圭壯嚴廟), 청덕명망(淸德命望), 구준(龜準)이 당세공적을 쌓고 스스로 이끌어 군대에 감사하다.얻기 힘든 것을 보고 편안히 누리며, 그것을 힘든 것을 행하는 자는 편안하게 지낸다.연신(延申) 수양(陽陽)은 태원왕공(太原王公)과 고위위위 하동필경(河東必京), 병부패국주공(兵部敗國朱公), 가부시평풍공(嘉部始平風公), 함이기년(咸以紀年)에 관을 달고 향재를 유람하며 한가한 나날을 보내며 안집하여 오로회(五老會)를 지냈다.시를 지어 노래하며 즐거워하다.송(이 글자는 도변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어서 마치 '제'와 같이 '앞'인 것 같다) 사람의 모습은 기록에 남아 있다.옛 당나라 백낙천은 낙양에 거처하였는데, 구로회를 위하여 오늘날에도 서로 전수하여 승전지로 여기고 있다.지금으로부터 수백 년 떨어져 있는 무능력자.오늘을 옛날로 보면, 열렬하고 거만하여 지나가지 않는다.명일유공의 문은 오래되었는데, 이향민세계에는 상품이 배가되었다.오늘 거짓으로 열쇠를 지키되 해든나리가 그림으로 말미암아 그 서문을 인용하여 향교의 만일을 대신하여 노래하였 도다지병신 추석날, 전명일서.
지화병신은 송인종지화(仁宗至和) 3년(1056)으로 그 해 9월에 개원하였다.우, 다음 해 두연이는 8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전인일(錢明日) 이 서(書)의 이 페이지에는 청종실(淸宗室) 성욱(盛 题)의 소자(小字) 한 줄이 있는데, 그 광서(光書) 15년(1889)에 이 그림을 구입했다고 한다.개지에 이재선 광서 경인(16년1890) 관전소자 일행이 있고, 금성전서 관전 두 줄의 관어경씨 반묘원(1914)이 있다.
뒤에 청주가 존예서 대자 '수양오로'라는 글자가 있는데, 이는 원본 그림으로 여겨진다.17년(全)의 인수(引首)로 명왕(明王) 손소서(孫所書)인 《수양오로도권기( ,陽五老圖權記)》가 있으며, 소행(小行書)은 명홍무무무무무진(明洪武三十四辰, 이십일일년(二十一年)에 이르러 명해효행서(明亥孝行書)가 명악십사(明樂四 年)에 이르러 명(明 十四)의 행서(明 明)이다.명행서 《수양오로도후기》. 광서 18년(1892).
[도칠] 이건발 《쥐양오로도》 미국 메트로폴리탄예술박물관 소장 〔图七〕李幹跋《雎阳五老图》 美国大都会艺术博物馆藏
[도팔] 신시행발 '쥐양오로도' 미국 메트로폴리탄예술박물관숨기다 〔图八〕申时行跋《雎阳五老图》 美国大都会艺术博物馆藏
[도구] 좌종당발 《쥐양오로도》 미국 메트로폴리탄예술박물관숨기다 〔图九〕左宗棠跋《雎阳五老图》 美国大都会艺术博物馆藏
상해박물관에 소장된 《수양오로도제발책》은, 매 페이지 좌하귀에 담묵이 있다숫자 번호는 메트로폴리탄의 발 왼쪽 하단 번호와 일치하는 것으로 메트로폴리탄 소장의 발책에서 추출된 것임을 알 수 있다.그러나 메트로폴리탄의 발문은 기본적으로 연대순으로 배열되어 있는데, 이 책자는 뒤바뀌었다.발자 인명을 원상대로 베껴 쓸 때 내가 쓴 기원기년(元原紀年)을 명기하면 그 앞뒤의 순서가 그대로 드러난다.
장찬행서[그림10], 소흥을묘(昭興乙卯, 5년, 1135)
[도10] 장찬발 《쥐양오로도》 상해박물관 소장〔图十〕蒋璨跋《雎阳五老图》 上海博物馆藏
두정행해서 병진(丙辰, 6년, 1136)을 소흥하고, 두연을 백조라고 불렀다자칭 삼손
전단예행서(錢端禮行書)로 소흥무진(昭興武辰, 18년, 1148)을 전명일(錢明日)이라 하였다.선증백조(先曾白祖); 왕나행 해서(王行行 해서) 소흥13년(계해, 1143)
계남수행서, 건도 3년(정해, 1167)에 대농이 있다.공4세손 희문이 휘막부라 하여 다시 빼앗아 보내니 권말에 의하여'라고 하였더라
사사환행서에는 연금이 없는데, 그 중에는 "주병부 관수는 죽이지 않는 것을 청한다"는 구절이 있다주씨 후손이 소장한 것 같다.
홍매해서(洪梅해서) 순희(淳熙) 4년(정유, 1177)에 '진필공(眞必公)'이 있다.손의'라는 문항처럼 필씨가 소장하고, 사(謝)·홍(洪) 두 문제 또는 순서가 뒤바뀌었다.
장귀모 행서는 시를 지으면 연금이 없다.
유언 명행서 무년금
범성대행서[그림11], 순희갑진(淳熙甲辰, 1184)
[그림11] 범성대발 《쥐양오로도》 상해박물관 소장 〔图十一〕范成大跋《雎阳五老图》 上海博物馆藏
양만리 행서, 소희 신해 섣달그믐 전날(2년, 섣달그믐은 119)2년 초) 구양히센행초서, 소희임자(小熙壬子, 3년, 1192)
홍적행서 무년발중언급 "수양오로도 초장필공손가소희 신해(2년, 1191) 병부 주공 손신암은 고택의 터전으로 귀향했다.
무금서 '주씨 종덕당'도 있다.《철망산호》 저서는 이 구절을 홍수와 같이 한다적발미 "번양홍적경서"를 연결하여 녹음하였는데, 그 글자가 약간 작고 자세히 검사하면 필법이 일치한다.
여단 예행초서, 소희임자(昭熙壬子, 3년, 1192)는 2행을 관전하였다.
하이행서, 정사(丁巳, 경원 3년, 1197)
정거부라는 제목은 연월이 없다.
야오쑤이, 마후, 원명선관금, 연월이 없다.
이도탄행서, 원치와 개원(1328).
조원용, 마조상관금, 연월이 없다.
단천우행서, 무진(1328)
조기이전서삼행지순삼년(1332)
태불화전서삼행후지원7년신사(지정원년,1341);
유 데친 행서제시. 세월은 없다.
한용행서·관금·연월 없음
유관 해서에는 연금이 없다
곽배, 전경관금, 원통 갑술(2년, 1334년)
장저행서제에는 연금이 없다
서 "자영"자는 서제[圖十二]를 행하는데, 그 문제는 다음과 같다.
[도12] 주자영·조맹부발 《쥐양오로도》 상해박물관숨기다 〔图十二〕朱子荣、赵孟頫跋《雎阳五老图》 上海博物馆藏
자영은 여섯 살 때, 금병의 축탈을 틈타, 단(舟)에 덧붙여 강을 건너, 고모사에서 길렀다씨네는 늘 부모님을 그리워하며 슬픔을 이기지 못합니다.어느 날 필공손 시자영이 증조 병부 화상으로 수양오노인을 천하에 알 수 있었다.내년엔 그 밖의 역귀봉사하시기 바랍니다.필씨가 다시 그 완결을 도모하여 옛 근본으로 자영에 이르게 하다.어찌 밤낮으로 삼가 구하지 않을 수 있으랴, 선계명을 받들어 무릇 우리 종인들과 그 손자들은 존경하는도다!당시 을축중춘, 손자가 수계경서를 영배하였다.
발문의 내용을 보면, 자영은 남송인이고, 주관의 손자인 홍적발중소이다.이를 '신암(信庵)'이라 하며, 필씨 후손이 주씨 후손에게 귀속되기 쉬운 시기에 홍적발(洪光發)은 남송(南宋) 광종(光宗)의 '소희(昭熙) 신해(辛亥, 1191)'라고 명언하고, 자영(子榮)의 발(發)은 영종(寧宗) 개희(開熙) 원년(元年, 1205)이다.
자영발동지후위원조맹부행초서발2행(子榮發同紙後爲元趙孟 行行草書發二行)은 서예풍격으로 미루어 짐작된다.조씨 말년 예순일곱 살의 연우7년(1320) 무렵이다.
두본예서제[그림13], 무년식
[도13] 두본발 《쥐양오로도》 상해박물관 소장 〔图十三〕杜本跋《雎阳五老图》 上海博物馆藏
중옥륜도행서 후지위안(至元) 6년(1340)
이기행서, 지정 9년 기축(1349)
우집행 해서, 태정을축(2년, 1325)
유치, 주인영, 조감, 등거천행 해서관금, 치화개원(13)28);
왕수성행서제목은 연월이 없다.
고손지 해서, 연금이 없다.
주백기전서발[그림14], 지정임인(至正任仁, 22년, 1362년));
[그림14] 주백기발 《쥐양오로도》 상해박물관 소장 〔图十四〕周伯琦跋《雎阳五老图》 上海博物馆藏
염거경전서관금, 명홍무신(元年, 1368);
오관행서(吳寬行書), 성화(成化) 15년(기해, 1479)
오관이 다시 발걸음을 옮기자 홍치기미(弘治己未, 12년, 1499)가 되었다.
성화기해(成化己亥, 15년, 1479)는 정민정행서제이다.
동기창행서제 숭정원년(무진, 1628)
뮤원익관금, 왕세정행서발.
주륜행서, 가정신축(20년,1541), 발미10여 자를 파내다
전겸익행서제, 숭정경오(3년, 1630)
장조염기금성(공북)언, 양진행서, 을묘(을나라)4년, 1915)
정효서는 서발(書發), 병진(丙辰, 민국 5년, 1916), 기(記)병술관은 성백희좌에서 을묘장몽사과가 복상하였다.
오호범행서, 계미(민국 32년, 1943)발;
담택개행서, 신사(辛巳, 민국 30년, 1941) 문제.
이상 상해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수양오로도》 제목 발책의 전부입니다인명록이 끝나다.
한 획을 달아야 할 것은, 이림찬 선생의 글이 《철망》에 근거했다는 것이다.산호'라는 저서에서 이 책에 수록된 모든 송원의 발전문초록을 대부분 입수하였다회예술박물관 소장 제목은 발문을 마친 후 다시 전문을 베낀다.
이 그림의 관련 문헌 기록
두연 등의 오로회에서 가장 먼저 언급된 것은 북송 왕벽지이다.
경력 말에 두치는 노령으로 남경으로 물러나 태자빈객과 관직왕을 치렀다고 공고하였다환·광록경 치사필세장, 병부랑중지사주관, 상서랑 치사풍평오로회를 위해 음취상권하니 사대부 고지.치공은 옛 친구로 기덕의 덕을 쌓았고,특히 천하가 경모한다. 병부의 시운: 구로일 뿐만 아니라 오로귀도 없으니, 장군이 서낙하지 마라.일반적으로 보면, 다섯 사람은 나이가 80여 명인데, 건강하고 서로 매우 기뻐하기 때문에, 기공시가 되었다.운:5인4백여 세로 분조와 월계관으로 불립니다.필년 최고는 시구다10여, 그러므로 그 시운: 재주가 송구스럽게도 최고의 해를 예기치 못하였다.때마침 구양문충이 수양에 남아 감탄하였는데, 그 시관을 빌어 차운(次運), 졸장운(章章雲) : 듣설우(聞說友)많이 놀면 노래하고 화합해야지, 새 시를 굳이 빌려서 읽겠느냐.
왕벽지는 송영종(宋英宗) 치평(治平) 4년(1067)에 진사(進士)하였다.면수연담록'에 기록된 이야기는 송철종 소성의 옛이야기이다.오로 활동 시간까지 거리가 멀다가까운 만큼 그 기록은 믿을 만하다.다만 오로연집부시(五老延集詩)라고 기록했을 뿐이다.
면밀하게 기억하면 오로회뿐 아니라 오로도 언급된다.그림':
선배 기년 석덕으로 한가로이 시골에 머물며 시주의 즐거움을 누리며 풍류를 즐겼다.운은 한 때 부러워했다. 후대에 서로 사모하여 그림으로 그려서 좋은 일로 전해지는 것은 일일이 다 말할 수 없다수예. 지금 잠깐 표본을 본다면 이것으로 치경행앙지(致景行向至)의 뜻입니다.당향산구로...송지도구로...치화오로즉두연(승상,기)국공, 팔십), 왕환(예부시랑, 구십), 필세장(사농경)아흔네 살), 주관(병부랑중, 팔십팔), 풍평(가부랑)중·팔십팔), 시전이 밝으면 요긴한 곳에 남아 수양하게 된다이 그림으로 차례를 정렬을 그린다.
참석자마다 직관 연세를 표시했을 뿐만 아니라, 그 사람까지 적었다고 말했다.그림은 첸밍이 그린 것이다.이 문제들은 뒤에서 토론할 것이다.
명도목의 《우의편》 제2조기 《수양오로도》운.
《수양오로도》는 곤산 주씨, 주씨개오로일 병부에 있다낭중관이 있은 후 어사는 하늘이 드러내어 그 여운을 남긴다.그림에는 돈명일서, 구양공·사마공이 내린 시는 모두 없고, 현재 남송 및 원인의 발문이 남아 있다.
조기미 《철망산호》 권삼 저술 《수양오로도》, 전.명일 《오로도서》 뒤에 《오로회시》가 기록되어 있고, "진적 제시는 병망한다"고 주석을 달았다."두연, 왕환, 필세장, 주관, 풍평 순이었다.'관' '환' '한' '보'를 운으로 하여 칠률시를 짓고 화답하다.후에 《차운차관오로도》로 불린 구양수·안수·장상영·범중엄·부필▲한기,호이,소송,소옹,문언박,사마광,장재,정희, 정이, 소식, 황정견, 소철, 범순인의 운과 시는 위의 진품과 함께 사라진다.후제 "소흥래제발"계 : 장찬、 杜绾 、 钱端 礼 、 胡安国 ( 下 注 " 真迹 亡 " ) 、 朱熹 ( 注"진적망"), 여조겸, 왕나, 계남수, 사견, 홍매, 장귀모, 유언명, 범성대·구양히슨 ·홍적 ·황영 ·사여회 ·양만리 ·유단례 ·하이 ·주자영 ·조맹부 ·우집 ·이도탄 ·정거부, 야오쑤이, 마후, 원명선, 유치, 조감, 등거천, 단천우, 왕수성(誠), 조원용(曹元用), 마조상(馬祖常), 장저(張 、), 유데(兪 韩), 한용(韓用), 조기이(趙期夷), 곽증(郭 、),첸충, 위위룬다오, 타이포화, 류관, 두번, 리치, 저우버치, 왕손.후제 한 단락은 성이 없으면 이 책의 편집자로 삼아야 한다.글에 의하면 다음과 같다. 赵琦美《铁网珊瑚》卷三著录《睢阳五老图》,钱明逸《五老图序》后录有《五老会诗》,下注“真迹诸诗并亡”。依次为杜衍、王涣、毕世长、朱贯、冯平。依“冠”“桓”“寒”“看”为韵作七律诗唱和。后以《次韵借观五老图》冠之的欧阳修、晏殊、张商英、范仲淹、富弼、韩琦、胡瑷、苏颂、邵雍、文彦博、司马光、张载、程颢、程颐、苏轼、黄庭坚、苏辙、范纯仁的依韵和诗,下注“以上真迹俱亡”。后题“绍兴以来诸跋”计:蒋璨、杜绾、钱端礼、胡安国(下注“真迹亡”)、朱熹(注“真迹亡”)、吕祖谦、王铚、季南寿、谢觌、洪迈、张贵谟、游彦明、范成大、欧阳希逊、洪适、黄缨、谢如晦、杨万里、俞端礼、何异、朱子荣、赵孟頫、虞集、李道坦、程钜夫、姚燧、马煦、元明善、刘致、曹鉴、邓巨川、段天祐、王守诚、曹元用、马祖常、张翥、俞焯、韩庸、赵期颐、郭畀、钱琼、斡玉伦徒、泰不华、柳贯、杜本、李祁、周伯琦、王逊。后题一段不具姓氏,当为此书的编者。文曰:
정묘 시월 기망으로 주씨 여매로부터 진품을 배관하고, 이 책자에 따라한 번 교열해 보았습니다. 그런데 나라 초에는 제명의 발어가 모두 실려 있지 않았으며, 송나라의 여러 명의 공제가 영영하였는데, 정말입니다.행적이 다 잃어버린 것은 정말 애석하다.동모염거경, 수춘이간, 하동여쇼, 자성왕행, 천태방효아이, 허난고손지, 오군야오광효오흥부현, 곤부육득거, 옥봉하창, 곤양장화, 석포엽성해창소평, 소정, 황해상유, 장주오관, 신안정민정사마초. 홍치기미, 오관이 다시 발설하였을 때 주씨계손 희주는 장원으로 한림에 급제하였다.
이 대목에서 이림찬 선생은 '그래픽 두루마리 발어'인 줄 알았다.사실 그것은 이 책 편집자의 기록일 뿐, 이미 부족한 발은 수록할 수 없다는 유감을 표시한다。
상해박물관에는 명주집 주앙록 《수양오로도제발》책이 소장되어 있다명유구 《임양오로도》에는 만명 위완초등인 응주(應朱)가 기록되어 있다.여매가 청하여 지은 제시는 천계연간(天啓年間, 1621~16)에 쓰여졌다.27). 이로써 상록지문의 정묘는 명희종 천계7년임을 알 수 있다.(1627), "이 책으로 대과하다" 정주집주앙이 기록한 책도.
변영예 《식고당서화회고》 화권15, 이를 귀속시켰다남송(南宋) 무명씨. 그 기록은 《철망산호(鐵網山號)》와 거의 같으며, 《유소》(有少)이다.철망산호' 송나라와 시·호안국·주희가 발한 "진품은 죽었다""소주. 오자도 많아 베껴 썼을 법도 한데 왕손에게는 오자가 있다.정정이 많았습니다.
청내부가 편찬한 《석거보급삼편》과 호경의 《서청찰기》>와 《청궁기일서화록(淸宮期日書畵錄)》에 저술된 《수양오로도(蘇陽五老圖)》는 완전히 다른 것이다.모사본 하나. 내 스승 서방달 선생의 《고궁 구장서화록 수정》'에 기록된 주를 '명인무본(明人무본은 '명인무본'이다.양인개 선생 《국보부상록》'라는 책에서 일찍이 이 책에서 "부의는 청궁에서 들고 나와 민간으로 유랑하여 장춘에서 유랑하였다창보샹은 베이징 박문(博聞)을 판다"고 말했다.오늘 영인본을 보니, 도정 열 발 선생이 소장하고 있다. 이 글의 뒷부분에서 논할 것이다.
육심원 《양배관과안록》 권23 저서에 《유봉주림》이 있다.수양오로도'책.그중 상해박물관은 《임수양오로도》라는 산실된 이름을 소장하고 있다주집 주앙록 《수양오로도제발(蘇陽五老圖題發)》책의 녹문이 모두 수록되어 있다.이 중에서 진적 원본을 알 수 있으며, 《철망산호》《식고당서화회고》없는 제목의 발문 내용.송나라 사람을 짓는 시와 발은 모두 오현충이 주이발의 요청에 응하여 베꼈다 응하여 베꼈다녹, 숭정 계유(6년, 1633) 오씨 발기(發記.원인의 발은 주백기를 제외하고, 예이천이 베꼈고, 주백기가 베꼈다.주간(周啓祥)서(書)는 이간(李幹)·왕손(王孫)·이숭(李崇)·여소(呂昭)이다.그 후 수많은 발주집 주앙(이발)예성후인 예이취안 등을 베껴 적으시거나 본인이 베껴 적으시기 바랍니다.일일이 제시하지 않는다. 이유상록에서 《수양오로도》의 발문이 후안국·주희·여와 같이 전해지는 과정에서 산실되었음을 알 수 있다.조겸과 같은 사람도 일부 발문을 썼는데, 저서는 이미 산실된 것으로 생각하지만, 지금도 살아 있으니, 예를 들면 야오광효(姚廣孝)부터 오관(吳寬)까지 이런 문제는 더 들어가야 한다.보고 교정하다.
이 그림의 전래 경위
《수양오로도》의 전래 경위는 역대 제발에서 알 수 있다개요.이림찬선생님의 글에서 일찍이 두 차례 서술한 바 있습니다.현재 관련 자료를 귀납하면 아래와 같다。
장찬 소흥을묘(1135)는 "벌람의 빛, 필씨있다"며 필씨 집에 머물 예정이다.소흥병진( )興丙辰, 1136)에 두전발(杜跋發)한 운(雲)"이 그림을 첸씨네 집에서 맛보았다."거나, 성이 일시적인 차람이었을 뿐, "오늘날"이다.'복개권복상'이라면 필씨일 것이다.소흥무진(114)8) 전인일(錢明日)의 증손자인 전단례(錢端禮)는 우대태수필소동처( 太臺太守必小棟處)에서 "취관소"를 받았다.수양오로도라고 하는.왕나발은 필세장의 아버지 필사안을 수찬하였으니, 물론이다역시 필씨가 이 그림을 소장하고 있다.홍적 발중이 되어서야필씨 후손에서 주씨 후손으로의 귀환을 구체적으로 지목한 소희 신해(1191).원나라 때, 이 그림은 주씨 후대의 손, 특히 당시의 주씨에 의해 보존되어 왔다후세 사람들은 유명한 화가 주덕윤을 배출하여 이 그림으로 원대의 많은 명인의 발문을 얻었으며, 명초에 이르러서도이 그림은 주 씨 후손의 손에 그대로 남아 있다.그 사이 주덕윤의 장남 주복길은 영하수변(寧夏守邊)에서 홍무(洪武) 21년(1년)에 유실되지 않도록 하였다.388) 오중교(吳中交)는 두 동생의 길(吉)과 몽길(蒙吉)을 만나 "장제가묘(藏家廟)"를 지냈다.복길청인은 한 권을 영하(寧夏·이간발)로 가져왔다.주집 주황록 주복길홍무무무진(洪武武武辰, 21년, 1388년) 시월제, 주봉길(朱峰吉)은 세팔월제로 주씨형제의 두 글 내용은 《양이관과안록(楊梨館過眼錄)》 권23 저술도 볼 수 있다.
오관 등의 발문을 보면, 이 그림은 한때 명초 화백 하창지 화백이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나중에 다시 주씨로 돌아가세요.신시행(申時行) 발(發) 및 주집(朱集) 주황(周黃)이 베낀 주륭동(朱隆洞)명만력계사(明萬歷啓巳, 21년, 1593)가 지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이 그림은 일찍이 돌아왔다.신씨로부터, 만력병오(萬歷丙午, 34년, 1606)는 주씨(朱氏)에 복속되었다.후대. 위완은 초발에서 당시 소장자였던 주여매를 언급하며 "영선한 사람"이라고 했다.장황일과(裝黃一過)라고 한다. 그 발년금은 숭정(崇貞)유(啓酉, 6년, 1633)청강희 경술(九年, 1670) 귀장발이 그림은 조카가 하늘의 뜻을 간직하고 있음을 보여준다.귀씨가 주씨에게 돌려달라고 권하다.강희 46년(1707년)) 서형발(徐形發), 이 그림은 주씨흠안무수(朱氏흠安務修)에게 돌아갔다.같은 해 주흠이 발원하였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편안하였다운: "그림은 비늘을 향하여 내려오고 견소는 논박하여 권서에게 불리하고…무려 십금(十金)을 복원하여 위군성명수고군(衛郡城名手考君)이라 하였다."수양오로도가 권개장된 시점은 강희 46년 정해(丁亥)인 1707년임을 알 수양오로도가 권개장된 것을 알 수 있다.
이후 이 그림의 소장 상황은 기록되지 않았다.그러나 명유구(明裕求)에서 《수양오로도(蘇陽五老圖)》(그림 15, 현재 티베트 상해박물관에서 《양배》를 보았다.관과안록(館過眼錄) 후) 육원순 건륭경인(陸元淳, 35년, 17년70) 수양오로도가 주씨 집을 마지막으로 떠났음을 알 수 있다.종족, "건륭기축(34년, 1769) 겨울, '오로관을 얻다'그림'은 원래 친척 집에서 먼저 삼백 금으로 질량을 얻었는데, 천 금으로 계산하였다친척이 하씨인데 또 천금을 준비하다니.누구에게 팔렸는지는 모두 알 수 없다.
[그림 15] 유구림 《쥐양오로도》 풍평상해박박물관 소장
광서 4년(1878) 좌종당발(左宗唐發) 당시 소장자왕하헌은 이 그림을 좌씨에게 기증하려 하였으나, 좌씨는 이를 거절하고, 오로후인을 만난 것처럼 권하였다'이것 저것'을 줄 수 있다.보아하니 이 좌문 양공은 참으로 고인이 좀 있는 것 같다지풍. 왕씨는 누구에게서 얻어 상해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오로도제발》책'에서 금성지언(양진서), 오호범발(吳湖凡發)은 왕씨우동(王氏友同)임을 알 수 있다치초년에 디만 농가에서 관세에 의지하여 탈취해 왔다.금·오 두 사람은 모두 듣고 있다매넌의 아들 구와이라이(小平子·추칭).그 일은 적평자의 《평등각 필기》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이자명(李慈銘) 발중(發中)을 보면, 왕하헌(王夏軒)은 이 그림을 종실인 성욱(盛 ()과 함께 팔았다고 한다.백희), 성욱은 '광서 15년 9월'로 기록돼 있다.
《수양오로도》의 성백희 이후의 체장 상황에 관하여 상해는소장하고 있던 발책의 마지막에는 김공백과 오호범의 두 발이 또렷이 말하였다.현재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공백은 이 책을 성제주(盛祭酒)에서 보고 제수(祭酒)가 이미 세상을 떠났다.이 책은 수년 동안 반묘의 원경씨(園景氏)에게 귀속되었는데, 공백(孔伯)이 다시 만나자 책에는 수어(數語)를 알고 있던 사람이 들어 있다.공백은 또 이 책자가 함, 동간에 리양 디메논 대령(大令)을 오래 간직하고 있었다.대령관 강서에는 장리 아무개가 이 책을 호탈하였으나 대령은 거절할 수 없었다.모씨는 또 그 유상으로 음좌문양, 문양은 그쪽으로 물러났다.이 공백은 태령의 아들 초청이 말한 것을 들었다.지금은 그 때로부터 불과 40년 밖에 되지 않았는데, 이 책은 이미 주인이 바뀌었다.올가을, 오흥장몽반 묘의 정원 경씨로부터 이 책을 구입하여 얻다.공백은 관직을 빌려서 마침내 비단을 순순히 남겨두었다.동관자 가선(嘉善) 장조렴(張祖嚴)이 공백의 말을 받아 적고, 전당 양진(楊晋)이 서사할 때을묘중양 나흘 전.
발중 소위 반묘의 정원 경씨, 즉 완안 경현 박손인데, 그는 저서가 있다책 《삼우당 서화목》.장몽과는 장곡손의 아버지이다.
다음은 우후판 선생의 발.
리양적씨 장서화는 지부(至富)로 왕숙명(王淑明)의 《청변은거도(靑邊隱居圖)》와 이 《수양오로도(壽陽五老圖)》를 압상비보로 기록하였다.매넌 선생은 강서 관직을 빼앗아 평자의 장청인 변도발(變圖發)을 사상했다.옛날에는 장부와 함께 예고궁에서 서화의 역경을 살펴보았는데, 이 말을 할 때마다 자주 하소연하였다.나중에 오흥 장씨(蔣氏)가 이 책을 받아 얼마 지나지 않아 오흥 장씨(張氏)를 다시 보게 되었는데, 지금까지 5, 6년, 다시 청강 손씨(增江孫氏)를 보게 되었다.옛 문물은 주인이 바뀌었다고 전해지는 것이 없다.임오하절에 손방서 형이 친형인 욱봉 선생을 위해 얻었다고 언급하고, 소중히 여겼으며, 가벼이 여기지 않아 책경소가 되었다.계미 늦봄, 시한재, 쾌상순일.구양문충공 등 북송의 명현 18가 시제를 모아 합포지주를 물색해 400년 한을 달래고, 특히 쾌거하면 오로지행(五老之行)뿐이 아니다.또한 오로송은 원래 코끼리인 티벳의 패션이 남아 있어 오흥 장씨가 구미를 나누어 팔았다고 하는데, 언제 완벽한 것을 볼 수 있을지 천년의 공죄가 정평이 나 있다.욱봉 선생은 그 영보이다.천암오호범 근면.
위의 두 발에서 알 수 있듯이, 이 그림은 청나라 함풍동치간(咸豊同治間)이 디만농의 소장(所藏)이었다가 왕하헌(王夏軒)으로 귀향하여 성욱을 재판매한 시기가 광서 15년(1889)에 이르러 다시 안경현의 손에 들어왔다.을묘(乙卯, 민국 4년, 1915) 가을, 장몽과(蔣夢果)로 귀속되었고, 장씨는 오로의 상을 각각 외국에 팔았다.정확히 어느 해인지는 알 수 없으나, 민국 5년(1916), 상해 관복초(官福初)에 대본화책인 《고화류진(古畵遺眞)》을 편찬하였는데, 그 중에 '송수양오로도책(宋蘇陽五老圖策)'이 있다.오로전고 후에 발인명시험이 있다.첸밍이, 왕손, 리간, 야오광샤오…. 리쯔밍.메트로폴리탄예술박물관이 소장한 '필세장상(必世長像)' 후제와 발문이 같다.이곳이 이 그림과 발제문을 입장(入藏)한 것은 1917년이다.때론 장곡손씨가 어렸는지 모를 일이다.그러나 이림찬, 특히 장신장 선생이 서화 감식자로 알고 있어 수양오로도가 국외로 팔려나간 시점을 모를 리 없다.그런데 장 씨는 장신 선생에게 어떻게 알렸을까.장문운: "장곡손에 의하면선생은 '디만논 소장책본' 오로도가 항일승리 후 대만으로 이주하기 전 상하이에서 한동안 목격됐다고 고발했다"고 전했다.이미 1917년 이 그림과 일부 발문이 장 씨의 집에 의해 미국으로 팔려갔는데 어떻게 항전 승리 후에도 상하이에서 한동안 볼 수 있었을까.
오흥 장씨 자는 장정강, 청강 손씨 자는 손욱봉, 손방단 곤중이다.후손 씨는 이 발책을 상하이박물관에 기증했다.
이림찬 선생은 '도본의 전래 경위'를 이야기하면서 '치화원년 이도탄유기(致和元年 이도탄有記)' 아래 청거부·야오쑤이·마후·원명선·유치·주인종·조감·등거천(鄧巨川) 등을 '동년'(1328)으로 분류했다.그러나 사실 야오쑤이는 황경 2년(1313), 마후는 연우 3년(1316), 청거부는 연우 5년(1318), 원명선은 지치 2년(1322)에 각각 출몰해 치원년(1328)에 관금을 낼 수 없었다.
수양오로도의 모사본 문제
오로도 모사본에 대해 먼저 언급한 것은 대만 대륙잡지 제13권 3기의 장신(莊申) 쑤이양오로도(蘇陽五老圖) 보술이다.그중 세 번째 부분의 소제목은 '그림의 본수'다.오늘 한 단락을 베끼다.
국내 여러 감고 전문가 중 한 명인 장곡손 선생의 안학은 믿을 만하니 그의 의견에 따라 디만농이 구장했던 오로도(五老圖)를 인종지(仁宗至)와 3년(1056년) 북송(北宋)의 원회화첩으로 보는 오로도(五老圖)는 본인이 우문하지 않았다.
이 판본이 오늘날까지 전해지는 이상 북송시대에는 본래의 책 페이지 형식이 남아 있는 것을 보면 건도 3년(1167년)에 필세의 중표로 인해 권본으로 바뀐 '오로도(五老圖)'가 북송의 진본이 아닐 수 있다.하물며 3년에서 건도 3년 사이에 100여 년이 걸렸으니 다른 모사본이 다소 나올 가능성도 없지 않다.1167년 잠정 표구본인 '오로도(五老圖)'의 제1모본, 즉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송(宋)인의 첫 모본이라는 대담한 시나리오를 다시 한번 생각해 보자.
상하이박물관이 소장한 『오로도제발(五老圖題發)』 책자에는 계남수 건도 3년(1167) 발은 "건도 3년 여름 6월 기축, 대농공 4대손 희문, 휘막으로 다시 박탈하여 주시라"고만 돼 있다.'재장탈'과 '재장탈'이 어떻게 '모사본'이 됐을까.장 씨의 한 단락에 대담하다는 말을 두 번이나 했으니 간이 큰 것만은 틀림없다.사실 그는 오로도(五老圖)가 권이고 책(策)이라는 문제에서 이림찬 선생을 논박하기 위해 장곡손에게 가르침을 청했고, 장씨는 이를 피하려고 미국으로 헐어 팔았던 사실도 상하이에서 본 적씨 소장본이 책장이라는 사실을 장씨에게 허위로 설명했을 뿐이다.사실 적씨 장본은 왕하헌, 성욱, 경박손을 거쳐 장몽과 즉 장곡손의 아버지로 돌아갔고, 장곡손은 감상에 능하다는 이유로 장씨가 탄복했다는 최소한의 전과를 어찌 모를 수 있겠습니까?오로도(五老圖)는 한 장씩 두 장으로 나뉘어 있고, 원래 연접처에 있던 수양세가(養陽世家) 인이 분리돼 있다.권개책 때문이란 걸 장씨가 모를 리 없다.가탄장신은 장씨의 말을 믿었기 때문에 요구하였다회의의 성문이 위의 두 차례의 대담성을 초래하였다!나는 이 두 개의 가장 적당한 글자로 이 노선생을 말하고 싶지 않다.
주자영의 발문을 인용하면 필씨 후손이 수양오로도(蘇陽五老圖) 원본을 주자영에게 넘겼을 때 필씨가 '다시 그 완을 도모한다'고 했다.이것이 바로 이미 알려진 첫 번째 모본이다.안타깝게도 이 판본과 관련된 어떤 기록도 본 적이 없다.
두 번째 모본은 명홍무 21년(1388) 주복길이 동생에게 원도를 전달할 때 언급돼 행방불명됐다.
명성화 20년 갑진(1484) 사마천발 수양오로도 운(雲)이 "…지금 행부 곤산주생질(昆山朱生質) 수양오로도(蘇陽五老圖)로 제식(祭識)를 청하고… 목숨이 붙어 위안을 삼고 사모하는 듯…." 또 다른 오로도(五老圖) 모사본이 나왔음을 알 수 있다.사마씨 발은 산실되었으며, 그 문견은 주집(朱集)인 주황록(朱黃錄) 《오로도제발(五老圖題發)》에 나온다.지금도 행방이 보이지 않는다.
주륜가정신축(周倫嘉靖辛축, 20년,1541) 발에서 《수양오로도(蘇陽五老圖)》에 대해 언급하였다. "지금 태재는 충공비의 상자 상자를 가볍게 여기지 않으며, 주판무는 노군(魯君)이 임이전하여 불상사에 대비하였으니 가이코보이영야(以可寶而永也)"라고 하였다.어찌 보면 주무노가 한 권 임했으랴.상박장 일명본인지 아닌지는 따져봐야 한다.
특히 임본이 없기를 원하며, 유 씨의 생졸은 시험을 기다리고 있다.이 책에는 문징명 예서 '수양오로(蘇陽五老)'라는 글자가 있어 진품을 검증한다.따라서 이 모사본은 가정(嘉靖) 38년 기미(己未, 1559)보다 늦지 않은 연정(年征)의 졸이다.
《석거보급삼편》의 연춘각 저술본으로 부의는 일찍이 궁을 들고 나왔다가 오늘 귀경길에 10발 선생이 되었다.견청 선생이 화첩 영인을 소장하고 있다.
다만 세 명의 명인이 쓴 발 가운데 오관, 문징명, 위선, 호류동발(胡 比東發)을 아직 비교하지 못하였으니 시대의 양식으로 볼 때 이미 흉한 것 같다.이를 통해 무발(無發) 후 위발(僞發)을 하거나, 도발(圖發) 전오(全吳)·문(文) 이후의 명인들이 그림을 모방해 발작을 일으켰음을 알 수 있다.
문헌과 실물을 보면 《수양오로도》는 모본이 6점이나 되지만, 현재 남아 있는 것은 《석거》저록본과 유구본, 명인일명본 등 3종뿐이다.
《수양오로도》 연구 중의 기타 문제
내가 위의 몇 가지 질문을 써내려갈 때 이렇게 지루하다니 독자의 시간을 빼앗길까 봐 조마조마했다.그러나 아래의 녹화된 3단 최신 수양오로도의 설명에서 알 수 있듯이, 나의 서술, 특히 발문의 필사본은 자세하지 못하다.나는 반드시 이림찬 선생에게 배워야 한다!
① 임수중 선생은 팔대본 양장 《해외장중국고대명화》 제2권 《수양오로왕환상》을 편집했고, 임수중 이계생의 소개로 "두연 왕환 필세장 주관 풍평은 모두 수양(현재의 하남성에 속함) 사람으로 고관치사(高官)하고 장수하여 '수양오로'라 불렸으며…이상의 오도록은 《석거》를 편찬하였다.청궁에서 들고 나와 민간에 떨어진 푸이는 창춘 창바이샹(常伯祥)에서 베이징 박문(博聞)을 팔았고, 이후 미국으로 유입됐다.
2. 상해문예출판사 〈해외중국명화정선〉. 박송년 선생이 〈수양오로도〉에 대해 쓴 설명에는 "오로 생전에 두루마리 그림으로 그렸기 때문에 그 정체가 사실적이고, 두루마리 그림들이 군학의 골재관에 놓이기 시작하였고, 인종지와 3년 한림학사 첸밍일(錢明一)의 서문을 거쳐 필씨(必氏), 주씨후인(朱氏) 등이 보관하였다.이 그림은 건륭제 연간에 책장으로 변장하고 민국 연간에 미국으로 흘러들어가는데.
3. 〈정십발선생장화(程十發先生藏畵)〉 중 〈수양오로도(蘇陽五老圖)〉의 설명. "이 권은 구(舊)모사본으로 인물의 사실전신(實實傳神)과 선이 가늘고 매끄러운 것으로 원래 오로는 일찍이 분해되어 미국 박물관 두 곳으로 흘러들어갔으나 그 권후 사마광발(司馬光發)이 발하여 국내에 현존하고 있다.이 책은 『철망산호』 『우의편』 『서청찰기』 등 저술이 있는데, 가경 때 입궁해 연구 가치가 높다."
수양오로도(蘇陽五老圖)의 본도와 모사본의 구분과 기록의 상황, 전래와 소장 상황, 발제(發)의 존세 상황, 권개책의 상황, 전문(前文)의 내용을 독자에게 이해시키고 이를 통해 이들 여러분이 기억하는 시비곡직(是非曲直)과 구별된다는 점에서 더 이상 자세히 말할 수 없다.그러나 오로에 대한 문제, 이 그림을 시간의 문제, 북송인의 화시 문제, 서발에서의 사실 및 문자 개정에 관한 문제 등은 좀 더 설명할 필요가 있다.
오로자가 모두 수양인이 아니라 벼슬을 치러 수양에서 노후를 보낼 뿐이다.가장 눈에 띄는 것은 두연. 오로지회(五老之會다.구양수가 지은 '두연묘지' '송사·두연본전'은 두를 '월주산음(越州山陰)', 즉 지금의 소흥인(小興人)으로 명기했다.송나라 사람 중에 노령으로 벼슬을 하고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는 것은 흔한 현상이다.구양수 치사 후 영주에서 거처하다.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이는 그의 어린 시절에 아버지를 여의고 전모의 형에게 학대를 받아 의붓아버지에게 용납되지 않았던 어린 시절과 관계가 있다.
오로중 필세장은 송(宋)의 명상(名相) 필사안자(必士安子), 왕환(王換)은 둔전랑중왕여자(敦田郞中王麗子)로, 《송사(宋史)》에 붙었기 때문이다.다른 풍평의 이름은 구양수의 문집, 주관의 이름은 장방평의 문집에만 있다.모두 장수이지 모두 고관이 있는 것은 아니다.
수양오로도(蘇陽五老圖)의 제작 시기는 지화(至和) 3년(1056)으로 정해졌다.그러나 그 서문인 첸밍이 필세장의 직함 앞에 고(故)라는 글자를 붙인 것은 필씨가 사라졌음을 말해준다.연작도라면 '그림 그리기'가 아니라 '유정 추서하기'다.두연경력 4년(1044)에 배상하였고, 5년(1045) 정월에 사위 소순흠이 공원휴지로 돈을 팔아 연회객이 한 끼를 먹고 옥살이하는 바람에 두연은 사직을 강요당하여 120일 만에 재위하였다.그는 예순아홉 살에 태자소사(太子少師)로 벼슬에 올라 수양에서 10여 년 동안 살았다.오로지회(五老之會)는 왕벽지기에 따르면 경력(慶歷)에서 시작되어 전명일씨(錢明日氏)가 서문을 짓기 이전 수년간 그림을 그렸다.
그림에 쓴 글씨는 후세 사람이 첨가한 것이어야 한다.그것은 오로(五老)의 향년이었기 때문이다.첸밍이 서문을 썼을 때도 두연은 일흔아홉 살이었다.치밀하게 살피지 않아 후세 사람들에게 잘못을 남겼고, 첸밍이 그린 것으로 착각하기도 했다.
북송인의 화시 문제.이 그림은 원래 구양수 등 북송인의 화시묵적이 없는 것으로 간주된다.송원 인의 발문에 이와 시묵적에 대한 언급이 없었기 때문이다.명인의 저서 운기(雲記)는 '진적(眞籍)이 죽었다'는 후대 소장자들의 자아선양을 받은 것이다.제목이 아닌 오로회의 오로시와 함께 지은 시들이기 때문이다.왕벽의 기억은 아주 또렷하다.《구양수문집·거토집》 권12에 이 시가 실려 있다.'오로시 차운을 빌려서 감사한다'는 제목이다.시기는 황우 3년(신묘1051)이다.구양수 연보를 보면 구양수는 황우 2년(1050) 7월부터 황우 4년(1052) 3월까지 지응천부(知應天府)를 거쳐 난징유수사(南京遺守司事)를 겸했다.명인은 이 시의 마지막 구절인 '신시(新詩)를 왜 아까워 전람(傳覽)'을 '신시(新詩) 왜 아까워 도람(圖見)'으로 고쳐 쓴 적이 있다.남송 축목은 《사문류취전집(事文類集前集)》에 오로시와 《송시기사(宋詩紀事)》 권팔초록(權八草錄)을 기록했고, 첸밍이서(錢明日書)에 주운(朱雲)을 적어 '시기공년 팔십'이라고 적었다.그림 위의 글자에 근거하여 실제적으로그 해에는 일흔아홉 살이었다.아직도 믿는 사람이 있다.사실 조금 생각해 보면 북송의 이러한 명공들이나 경상대로, 혹은 도학의 앞잡이, 벼슬을 위하든 강학이든 천하의 모든 방면에서 어떻게 수양거제라는 무명 화수가 그린 그림을 볼 수 있었을까?구양수 황우 3년(1051) 시는 제목이 아니라 미작일 가능성이 높다.화시의 범중엄, 호원은 이듬해 도산으로 돌아갔다.그림쓰기는 불가능할 것 같다.이런 종류의 그림은 일부 문인 아집처럼 사실적이지 않고, 줄거리가 있는 세트는 그저 개개인의 사진, 즉 오늘날의 집회 같은 사진일 뿐이다.물론 사진의 작가가 명가라면 이름을 붙일 수도 있다.그러나 송나라 사람 첸밍이 송나라 사람, 즉 현지인이라고 불렀듯이, 천 년 후의 우리가 저자의 이름을 찾는 것은 거의 헛수고다.
《철망산호》《식고당서화회고(式古堂書畵匯考)》에 기록된 후안국발(胡安國發)은 주관이 전연(渊淵)의 맹(盟)에 있을 때 포로를 우대한다고 진언하였다.진위를 알 수 없으나, 이 일은 사실무근이다. 요나라 사람 남침에 북송의 군신이 황망하고, 승상 도구가 정력을 다해 저항하여 겨우 무승부를 하고, 또 해를 넘겨 화전을 바치니, 무슨 포로가 우대할 수 있겠는가!이것도 송나라 사람이라면 필씨, 주씨 후손의 자아선양일지도 모른다
첸밍이 서문에서 한 글자가 수정되었다.이림찬 선생은 비록 《철망산호》라는 저서를 베꼈다.이 글자는 '송(宋)'이지만 메트로폴리탄박물관의 사진을 보면 '전(前)'처럼 보이더니 '전(前)'으로 정해졌고, 수양고 송지(宋地)에 대한 언급은 있었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본인은 메트로폴리탄에서 일하는 동안 이 서서의 원본을 반복해서 살펴보니, 원서에 비해 도정의 잉크가 확연히 새로워짐을 느꼈다.분명히 명대 이후 무식한 자가 함부로 고친 것이다.수양에 따라 송나라는 무왕이 주왕을 벌주하면서 시작되었고, 위자를 송공으로 봉했다.진치는 수양현, 당승현은 군, 현성은 송성으로 바뀌었다.지금의 하남 상구 경내에 있다.즉 당나라 때 장순(張巡), 허원(許遠)이 안사(安史)에 대항하여 강회(江會)의 땅을 막은 자였다.송경덕 3년(병오, 1006)에 송주를 태조 구번(舊번)으로 삼아 응천부(應天府)로, 대중상부(大中祥布) 7년(1014)에 남경(南京)으로 세웠다.송인(宋人)이란 후인(後人)을 가리켜 산둥(山東)사람은 치인(齊人), 산시(山西)성은 진인(晋人)이라고 부르는데, 여기서 현지
아직 몇 가지 문제는 편폭에 한정되어 약식하고 논할 수 밖에 없다.그림의 예술적 특징, 발제자의 전략고정, 발제자의 서예예술적 가치 등이 그것이다.발서체(發書體)는 거의 전서·예·진·행·초·장초가 모두 갖추어져 있다.주백기와 주덕윤(朱德潤)은 절친한 친구로 지내며 묘지명(墓志銘)을 썼으며, 조맹부좌상(趙孟 座座上)에서 알게 되었다는 등 발자(發者)의 상호관계를 맺고 있다.이 중 두본은 원나라의 명인(12761350)으로 자는 백원, 청강(강서) 사람으로 학자들은 청벽선생, 대소전, 분예, 진, 초, 그리고 외번, 몽골 문자를 모두 수록한 오성운(五聲運)을 말한다.공서(工書)는 예서(禮書)가 공경(功敬)을 잘 썼고, 그 발문이 '두본경제(杜本敬題)'라고 해서 이림찬(李林燦), 장신(莊申) 두 분이 그를 두본경(杜本敬)이라고 불렀다.틀린 글도 아닌데 이문, 장문에 이런 표현이 여러 번 등장한다.사실 홍마이·홍적·장귀모는 '경서(敬書)'라는 제목을 붙였다.물론 청나라 사람인 당한 문제는 당한이 쓴 것으로 잘못 쓴 사람도 있다.더 유명한 하경관자는 할 수 없이 글을 써서 하경관 경관할 수 있다!
이림찬 선생 글에는 오로를 한데 모아 전시하고 싶다는 소망이 담겨 있다.본인도 공감한다. 상하이박물관은 물론 미국 플릴미술관, 메트로폴리탄예술박물관, 예일대 박물관도 수양오로도상, 모사본, 모든 발문의 공동 전시를 열고 관련 학술세미나를 한 번 연다면 의미가 있을 것이다.
(본문 원제는 〈송인 〈수양오로도〉고〉이며, 전문은 〈고궁박물관보〉에 간행되었다.펑파이 신문은 저자의 권한을 거쳐 전간되었을 때 주석은 등재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