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527
6월20일[연중 제11주간 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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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강론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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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BxbM78N20A4 (도현우 안토니오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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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교회는 법정이 아니라 치유의 장소입니다!>
매일 우리가 접하는 복음 말씀, 때로 정말이지 신기하고 또 신비롭습니다. 어떤 날은 우리에게 건네시는 한 말씀이 어찌 그리 제게 딱 필요한 말씀인지? 어찌 그리도 제 가슴을 후벼 파시는지? 어찌 그리도 따뜻이 저를 위로하시는지?
오늘 말씀 한 구절만 하더라도 그렇습니다. 밥 먹듯이 죄를 짓고 사는 우리 죄인들에게 얼마나 큰 위안의 말씀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분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신다.”(마태오 복음 5장 45절)
우리 주님의 자비는 바다같이 넓으며, 동시에 누구에게나 공평하십니다. 선인에게는 약간 빈정 상하는 일이 될수도 있겠지만, 주님께서는 선인에게뿐만 아니라 악인에게도 매일 아침마다 화려하고 찬란한 일출을 선물로 주십니다.
그게 다가 아닙니다. 하루가 저물 무렵에도 똑같은 방식으로 주님께서는 선인뿐만 아니라 악인에게도 또 다른 선물, 장엄하고도 황홀한 석양을 선물해주십니다.
어디 그뿐인가요? 오늘 이 아침, 주님께서는 선인에게나 악인에게나 하루 24시간이라는 금쪽같은 보물을 골고루 나눠주셨습니다.
속절없는 세월이 흐르는 강물처럼 흘러가고, 이제 나이 들어 돌아보니, 끔쪽같은 세월을 많이도 허비하고 말았습니다. 실망과 상처, 무기력과 나태함으로 그 아까운 날들을 무가치하게 소모했습니다.
우리가 악하고 불충실함에도 불구하고, 선인에게 베푸시는 그 크신 은총과 축복에 깊이 감사드리며, 부단히 악의 땅에서 선의 나라로 건너와야겠습니다.
“그대는 거리에서 넘어질 때마다 다시 일어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죄를 지을 때마다 지은 죄에 대해 참회하십시오. 또다시 죄를 지을지라도 실망하지 말고, 새롭게 뉘우치십시오. 약속된 상급에 대한 희망을 잃지 마십시오. 교회는 법정이 아니라, 치유의 장소입니다. 여기 교회에서는 그대의 죄를 셈하지 않고, 그대에게 용서를 베풀 따름입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살레시오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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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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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만약 지옥에 있는 사람이 회개한다면?>
몇 년 전에 있었던 사건입니다. 사채로 1,000만 원을 빌려 차를 구입하고 택시영업을 하던 24살의 김씨는 생각보다 수입이 높지 않아 원금은커녕 눈덩이처럼 불어난 빚 때문에 매달 이자만 100만 원씩 갚아야 했다고 합니다.
김씨는 인터넷으로 가출청소년들을 고용해 전기충격기를 주며 자신의 집 부모님의 통장을 훔치고 통장번호를 알아 오라고 했습니다. 성공하면 각자에게 1000만 원씩을 주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어머니의 비명을 듣고 아버지가 뛰어나와 그들을 제압했고 그들은 도주했다가 2시간 만에 잡혔습니다. 나중에 그것이 아들이 꾸민 짓임을 알고 부모는 경찰들에게 대신 사죄를 했습니다.
공범들도 아들의 지시로 한 행동이니 잘못이 없다고 선처를 호소했습니다. 재판에서는 패륜적인 범행을 저지른 데에 엄중한 처벌이 요구되지만 아들을 용서하는 부모님에게 진정성이 있고 잘 교육하겠다는 의견을 수렴하여 김씨에게 징역 2년, 집행유예 2년, 사회봉사 160시간을 선고했습니다. 이것이 부모님의 사랑입니다. 자녀는 부모에게 원수가 될 수 없나 봅니다. 이렇게 인간의 사랑도 엄청난데 하느님의 사랑이야 그 얼마나 크겠습니까?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원수를 사랑하라. 사실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즉, 하느님께서는 완전하셔서 원수까지도 사랑하신다는 뜻입니다. 원수까지도 사랑한다는 말은 원수가 없으시고 모든 이를 받아들이신다는 뜻입니다.
저는 이 대목에서 이런 의문이 들었습니다. ‘만약 지옥에 있는 사람도 회개하면 하느님께서 하늘나라로 받아들이실까?’
하느님께는 원수가 없으십니다. 즉, 지옥에 가는 이들은 하느님께서 미워하셔서 억지로 밀어내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지옥에 있는 사람이라도 지금 당장 회개한다면 하느님은 받아주실 준비가 되어있다는 뜻입니다.
그렇지만 지옥에 가 있는 이들은 절대 회개할 수 없습니다. 최후의 만찬 때, 예수님께서도 가리옷 유다가 당신을 배신하도록 놓아주십니다. 더 이상 당신의 영역에 있는 이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는 회개할 수 있는 단계를 넘어버린 것입니다. 그렇다고 예수님께서 유다를 미워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그가 언제라도 돌아오면 반드시 다시 안아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유다는 절대 돌아오지 않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지옥에서 그런 혹독한 고통을 겪으면서도 회개하지 않을까요? 이것은 우리가 회개를 우리 힘으로 한다고 착각하기 때문에 이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회개는 그분의 성령의 힘이 우리를 끌어오는 것이지, 우리가 우리 행동을 바로잡는 수준이 아닌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세리와 죄인들과 어울리시니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이 예수님을 비판하였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잃어버린 양 한 마리의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당신은 목자이고 세리와 죄인들이 잃어버린 양들입니다. 그들이 죄인들이기에 예수님은 그들을 되찾아 오기 위해 그들과 함께 머물러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결론을 지으십니다.
“이와 같이 하늘에서는, 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인 아흔아홉보다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더 기뻐할 것이다.”
그런데 언제 양 한 마리가 회개하였습니까? 예수님께서 직접 가셔서 찾아오신 것이 아닙니까?
그렇습니다. 회개는 스스로 돌아오는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오셔서 우리 마음을 돌려주시고 우리를 안아 안전한 길로 옮겨주시는 하느님의 행위가 주된 것입니다.
우리는 그저 그분을 보고 도망치지만 않으면 되는 것입니다. 즉, 믿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로마 백인대장 코르넬리우스에게 천사가 나타나 그를 교회의 수장인 베드로에게 인도하셨던 것처럼, 회개는 하느님의 힘, 더 구체적으로는 성령께서 그 사람 안에 가셔서 그를 당신께 대한 사랑으로 끌어오지 않으면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나 지옥은 하느님께서 그 마음 안에 머물 수 없는 상태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고 진주를 돼지에게 주지 말라고 하시는 이유는 그들이 전혀 받아들일 수 있는 상태가 아님을 말씀해 주시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하늘’에 사십니다. 지옥은 하늘과 가장 먼 ‘땅’의 맨 밑바닥입니다. 그 곳에는 하느님께서 가시지 않습니다. 그저 밟히기만 하고 더러워지기만 할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곳이 지옥이고 그런 마음이 지옥인 것입니다. 그런 이들은 성령께서 스며들지 못하기 때문에 회개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유다가 지옥으로 갈 것을 알면서도 목을 매달아 하느님의 자비를 거부한 것과 같습니다.
그는 자기를 찾으러 세상에 오신 예수님께서 그를 안아 하늘로 데려가도록 자신을 내어놓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원수까지도 사랑하라는 말은 하느님께서 그러하시듯 우리가 누구도 거부하거나 내몰아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저 사람과 있으면 힘만 들고 상처만 입어. 저 사람과 가까이 하지 말아야지!’ 이래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분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신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누구도 판단하지 않고 모두를 받아들일 자세가 되어 있다면 비로소 하느님의 완전성을 닮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지옥에 있는 사람이라도 회개할 수 있으면 당장 그를 안아주실 분이라는 것을 명심해야겠습니다. 따라서 우리도 누구를 밀어내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좋은 사람들과만 어울리려 해서도 안 됩니다. 마치 태양이 모두를 비추고 비가 모두에게 내리듯이 우리 사랑은 그렇게 모두에게로 향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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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꽃동네 오웅진 신부님의 팔순 감사미사에 다녀왔습니다. 신부님과는 23년 전에 인연이 있었습니다. 수녀님과 함께하고 싶었는데 본당의 여건상 수녀님을 모시기 어려웠습니다. 꽃동네 오웅진 신부님께 꽃동네의 수녀님을 파견해 주실 수 있는지 청하였고, 오웅진 신부님은 기꺼이 2명의 수녀님을 파견해 주었습니다. 수녀님들은 꽃동네 수도회의 영성을 보여주었습니다. 늘 겸손한 자세로 신자들을 대하였고, 본당의 어려운 일들은 솔선해서 하는 모범을 보여주었습니다. 수녀님들은 주일미사가 끝나면 성당에서 남은 주보를 정리하였고, 화장실 청소를 하였습니다. 예비자 교리, 가정방문, 봉성체에 함께 해 주었습니다. 제가 휴가를 가면 공소예절을 해 주었습니다. 수녀님은 김수환 추기경님께 예쁜 손 편지를 보냈습니다. 김수환 추기경님은 기꺼이 ‘대림특강’을 해 주셨습니다. 수녀님의 예쁜 손 편지가 한 몫을 했습니다. 당시 서울대교구에서 가장 규모가 작았던 성당에 대한 김수환 추기경님의 배려가 있었습니다. 저는 사제생활 32년 중에 가장 행복했고, 보람 있었던 시간을 수녀님들과 함께 보낼 수 있었습니다.
오웅진 신부님께서 뉴욕에 오신다는 이야기를 들었고, 팔순 감사미사가 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예전에 있었던 인연을 생각하며 기쁜 마음으로 신부님의 팔순 감사미사에 참석하였습니다. 23년이 지났지만 신부님은 여전히 건강하였습니다. 3시간 미사에 2시간 넘는 강론을 하였는데 하나도 지친 모습이 없었습니다. 사랑하면, 내어주면 나머지는 하느님께 다 알아서 해 주신다는 신부님의 말씀이 가슴에 남았습니다. 마땅히 해야 할 것을 충실하게 하는 사람에게 볼 수 있는 자신감이 있었습니다. 이제 막 서품을 받은 새 사제에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나는 평생 성무일도를 하였습니다. 나는 매일미사를 한 번도 거르지 않았습니다. 신부님도 그렇게 하세요.” 신부님은 새 사제에게 ‘강복’을 청하였고 새 사제는 신부님에게 ‘첫 강복’을 하였습니다. 신부님은 하느님과 함께 했기에 행복하다고 하였습니다. 과거에도 행복했고, 지금도 행복하고, 앞으로도 행복할 거라고 하였습니다.
신부님은 21세기는 ‘융합의 시대, 영성의 시대’가 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나는 어떤 시대를 살고 있는가?’를 늘 생각하라고 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성자에게 모든 권한을 주셨고, 성자는 하느님의 뜻에 순명하였고, 성령께서는 교회를 통하여 은사를 주시는 것처럼 신앙은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친교를 따르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고독사, 저출산, 유산’과 같은 문제는 관계의 단절에서 비롯된다고 하였습니다. 꽃동네가 추구하는 영성은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께서 보여주시는 ‘관계’의 회복이라고 하였습니다. 신부님은 60세가 되는 생일에는 노숙자 60명을 모시고 식사를 하였다고 합니다. 70세가 되는 생일에는 노숙자 700명을 모시고 소풍을 다녀왔다고 합니다. 80회 생일에는 한국에서 멀리 미국까지 와서 ‘영성센터’ 건립을 위한 모금을 한다고 하였습니다. 가난하고, 병들고, 고독한 사람들을 위해서 평생 일하였다고 하였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바로 예수님이라고 생각하였다고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다른 모든 것들을 채워주셨다고 하였습니다.
신부님은 인간에게 있는 3가지 욕구를 이야기하였습니다. 소유욕, 지배욕, 사랑의 욕구가 있다고 하였습니다. 소유에 대한 욕구는 마치 바닷물을 마시는 것 같아서 가지면 가실수록 더욱 큰 욕망이 생긴다고 하였습니다. 지배에 대한 욕구는 갈등과 분열의 원인이 된다고 하였습니다. 사랑에 대한 욕구는 하느님께로부터 온다고 하였습니다. 소유와 지배는 문화와 역사를 발전시키는 동력이 되지만, 소유와 지배는 전쟁과 폭력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고 하였습니다. 기후위기, 자연파괴, 생물의 멸종은 지배와 소유의 욕망에서 비롯된다고 하였습니다. 사랑의 욕구는 하느님께로부터 온다고 하였습니다. 사랑은 온전히 내어 주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성체와 성혈’의 모습으로 모든 것을 내어 주셨다고 하였습니다. 그 사랑에서 희망의 꽃이 핀다고 하였습니다.
3시간의 미사와 2시간이 넘는 강론이 자칫 힘들 수도 있었지만 제게는 가뭄 끝에 내린 ‘단비’와 같았습니다. 신부님은 ‘정의와 사랑’에 대한 이야기로 강론을 마무리 하였습니다. “정의는 사랑을 포용할 수 없지만 사랑은 정의를 포용합니다. 사랑이 없는 정의는 진리가 될 수 없습니다. 정의롭지 못한 상황에서는 억울하고, 분노가 생기기 마련입니다. 정의를 실현하였을 때라도 불안감이 생깁니다. 하지만 사랑하면 억울함도 사라지게 됩니다. 사랑하면 불안감도 사라지게 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오웅진 신부님은 예수님의 말씀을 온 힘과 정성을 다하여 따르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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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5,43-48: 원수를 사랑하여라.
“원수를 사랑하여라.”(44절) 그리스도께서 이렇게 명령하신 것은 원수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 자신을 위해서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자신에게서 나쁜 것을 없애 버리기 위해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신다. 미워한다는 것은 당사자는 아무런 해도 입지 않을 수 있지만, 미워하는 사람은 영에 큰 해를 입는다. 그러기에 우리는 그들을 위해 기도해 주어야 한다. 스테파노가 순교할 때, 자기에게 돌을 던지는 이들을 위해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이를 보여 주었다(사도 7,60 참조). 예수님께서는 사랑하라고만 하시지 않고 기도하라고 하셨다.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45절) 이렇게 원수를 사랑할 때, 그분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받은 우리는 그분의 자녀가 될 수 있다. 아드님과 같은 참 자녀가 되는 것이다. 하느님께서 아드님을 통하여 우리를 자녀로 부르시는 것은 우리가 당신 모습이 되도록 하시려는 것이다. “그분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신다.”(45절) 여기서 해는 그분의 지혜를, 비는 진리의 가르침이 적셔주는 것을 뜻한다. 이 지혜를 어떻게 받아들이느냐가 우리의 몫이다.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46-47절)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자신을 위한 것이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 자체가 기쁨이기 때문에 보물을 지닌 것은 아니다. 그러나 원수를 사랑하는 것은 하느님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기 때문에, 자기가 자기 본능을 넘어 행동하는 것이므로 그는 큰 보물을 지닌 것이다. 하느님의 상속자는 행실로 하느님을 닮지 않는다면 완전한 상속자가 아니다. 하느님을 우리가 누릴 수 있고, 그분을 참으로 누릴 수 있으려면 그분의 뜻을 따라야 하지 않겠는가? 언제나 사랑할 수 있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이것이 우리가 가야 하는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길이다.
“하늘의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완전한 사람이 되어라.”(48절) 오늘 복음은 “모든 것은 선으로 완전해진다.”라고 결론지을 수 있다. 우리가 가진 믿음은 원수를 사랑하라고 한다. 믿음은 분노가 앙갚음으로 바뀌는 것을 막을 뿐 아니라, 분노를 해를 입힌 사람에 대한 사랑으로 부드럽게 바꾸어 놓기도 한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하느님 상속자들의 삶으로 부르시고 그리스도를 본받는 모습을 보이도록 부르신다. 그렇게 함으로써 아버지의 선하심을 본받을 수 있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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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네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 그리고 네 원수는 미워해야 한다.’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 그분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신다. 사실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 그것은 세리들도 하지 않느냐? 그리고 너희가 자기 형제들에게만 인사한다면, 너희가 남보다 잘하는 것이 무엇이겠느냐? 그런 것은 다른 민족 사람들도 하지 않느냐? 그러므로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태 5,43-48)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라는 율법은 구약성경에도 있습니다. “너희는 마음속으로 형제를 미워해서는 안 된다. 동족의 잘못을 서슴없이 꾸짖어야 한다. 그래야 너희가 그 사람 때문에 죄를 짊어지지 않는다. 너희는 동포에게 앙갚음하거나 앙심을 품어서는 안 된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나는 주님이다.”(레위 19,17-18)
이 말씀에서 ‘이웃’은 동족, 또는 동포, 즉 이스라엘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이웃은 ‘모든 사람’입니다.>
“네 원수는 미워해야 한다.”라는 율법은 구약성경에 없습니다. 그렇지만 ‘원수’를 우상숭배자로 좁혀서 생각하면, 구약성경의 전반적인 가르침은 우상숭배를 미워하라는 것이기 때문에 원수를 미워하라는 율법이 있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원수는 우상숭배자들과 박해자들을 포함해서 ‘내가 원수라고 생각하는 사람들 전부’입니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라는 말씀은, “너희는 모든 사람을 ‘똑같이’ 사랑하여라.”라는 계명입니다. 사실 세상 사람들 가운데에서 ‘원수’는 원래 없습니다. 내가 원수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을 뿐입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은 다 ‘이웃’입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사랑’은 ‘선의 실현과 완성’입니다. 사람들은 흔히 ‘사랑’이라는 말을 세속에서 말하는 사랑과 혼동하기 때문에 원수를 사랑하라는 계명을 이해하지 못하거나 실천하기가 어렵다는 생각을 합니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라는 예수님의 계명은 “원수를 좋아하여라.”라는 뜻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꾸짖으신 일이 많은데, 그들을 싫어하셔서 그러신 것이 아니라, ‘그들의 위선’을 싫어하셨기 때문입니다. 잘못을 꾸짖어서 바로잡는 것도 사랑입니다.
<사랑한다면 잘못을 꾸짖어서 바로잡아야 합니다. 앞에서 언급한 레위기의 율법에도,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하라는 율법 앞에 “동족의 잘못을 서슴없이 꾸짖어야 한다.”라는 말이 있었습니다. 죄와 잘못을 보면서도 꾸짖지 않는 것은 사랑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의 반대말은 무관심이라는 말이 생긴 것 같습니다.>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라는 말씀은, “박해자들의 회개와 구원을 위해서 기도하여라.”라는 뜻입니다.
사실 박해자들도 ‘잃은 양’일 뿐입니다. 그들의 세속적인 힘이 신앙인들보다 더 강해서 박해를 하는 것인데, 하느님의 심판대에 서면 정말로 무기력하고 불쌍한 존재가 될 것입니다.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라는 말씀은, 아버지 하느님의 자녀라고 말만 하지 말고, 자녀답게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라는 가르침입니다. ‘아버지의 뜻’은 ‘모든 사람의 구원’입니다.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다.”(마태 18,14)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마태 7,21)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요한 3,17)
<사람들은, 원수를 사랑하는 일은 어렵다는 생각만 하고, 그래도 그것을 실천해야 한다는 생각만 하면서, 누군가가 ‘나를’ 원수로 생각하면서도 나를 위해서 기도하고, 나에게 사랑을 주는 그 힘든 일을 하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못 할 때가 많습니다. 왜 ‘나의 원수’만 생각하고, 내가 누군가의 원수일 수도 있다는 생각은 못 하는가?>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라는 말씀은, “사랑에는 울타리도, 편 가르기도, 차별도 없어야 한다.”라는 가르침입니다. “그것은 세리들도 하지 않느냐?”라는 말씀은, “자기들끼리만 사랑하는 것은 죄인들이나 하는 짓이다.”, 즉 “죄를 짓는 일이다.”라는 뜻입니다. 울타리를 쳐 놓고서 그 안에서 자기들끼리만 사랑하는 것은 ‘죄’라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코린토 신자들을 이렇게 꾸짖었습니다. “여러분은 아직도 육적인 사람입니다. 여러분 가운데에서 시기와 싸움이 일고 있는데, 여러분을 육적인 사람이 아니라고, 인간의 방식대로 살아가는 사람이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까?
어떤 이는 ‘나는 바오로 편이다.’ 하고 어떤 이는 ‘나는 아폴로 편이다.’ 하고 있으니, 여러분을 속된 사람이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까?”(1코린 3,3-4) 여기서 ‘육적인 사람’이라는 말은, ‘신앙이 없는 사람’, 즉 믿음 없는 세속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라는 말씀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완전한 사랑’을 주시는 것처럼 우리도 그렇게 ‘완전한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는 가르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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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인천교구 정천 사도 요한 신부님]
마지막(여섯 번째) 대당 명제에 해당하는 오늘 복음은 사랑에 관한 계명을 언급하면서 여섯 부분으로 이루어진 단락 전체를(5,21-48 참조) 갈무리하고 있습니다. 이는 율법에 대한 예수님의 새로운 풀이를 꿰뚫는 핵심이 바로 사랑임을 암시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웃과 원수를 구분하는 기존의 관행에서 벗어나, 모든 이가 사랑의 실천 대상이 되어야 한다고 가르치십니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이 명령은 어떤 면에서 가혹하게 들립니다. 정말 악의적이고 잔인한 행동으로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안겨 준 사람이 있다고 가정할 때, 백번 양보하여서 그 원수를 용서하는 일까지는 어떻게든 노력하여 본다고 하더라도 그를 과연 사랑까지 할 수 있을까요? 그렇게까지 하여야 하는 이유가 도대체 무엇인지 쉽게 이해되지 않습니다.
결국은 다시 그 근거와 동기를 찾는 일이 중요해집니다. 오른뺨을 때린 자에게 왼뺨마저 내주는 것으로 모자라 그 원수를 사랑까지 하여야 하는 이유, 그것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께서 바로 그러한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분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신다.” 이처럼 하느님께서는 당신께 등을 돌리고 온갖 불의를 일삼는 자에게도 같은 은혜를 베푸시고 같은 사랑으로 보살펴 주십니다. 곧 하느님께서는 편협한 사랑이 아닌 완전한 사랑을 지니신 분이십니다. 아버지의 사랑이 그러하다면 자녀들의 사랑도 그러한 완전함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루카의 병행 구절은 이를 자비로 바꾸어 표현합니다. 곧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6,36) 우리가 감히 하느님 자비와 사랑의 완전함에 어떻게 도달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것을 향하여 나아가려는 의지를 가지는 것과 가지지 않는 것은 전혀 다른 결과를 낳습니다.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고 도움을 청하며 조금씩 앞으로 나아갈 때,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완전함에 가까워지도록 우리를 이끌어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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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박영봉 안드레아 신부님]
<원수 사랑>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아직 ‘원수’(로마서 5장 10절)였던 때에도 우리에 대한 사랑으로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당신처럼 우리의 원수들까지도 사랑하라고 당부하십니다.
복음의 법은 율법의 계명들을 완성합니다. 복음은 우리가 너그러우신 하느님처럼 원수를 용서하라고 하십니다.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사랑이 없으면 …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사랑은 모든 덕에 앞섭니다. 모든 덕의 실행은 사랑에서 활력을 얻고 사랑으로 고취됩니다. “사랑은 완전하게 묶어주는 끈”(콜로새서 3장 14절)이고, 모든 덕의 바탕이며, 덕들을 연결하고 질서를 지어줍니다.
애덕은 그리스도인들이 닦아야 할 덕의 근원이며 귀결입니다. 애덕은 우리의 인간적 사랑의 능력을 확고하게 하고 정화합니다. 애덕은 인간적 사랑의 능력을 하느님 사랑의 초자연적 완전함으로 들어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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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박형순 바오로 신부님]
신자이기 때문에 지켜야 할 계명 가운데 가장 큰 계명이 ‘사랑’입니다. ‘사랑’은 가장 잘 지켜야 하는 계명이지만, 동시에 가장 지키기 어려운 계명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사랑하라고 계속해서 이야기하십니다. 그냥 하는 사랑이 아니라, 이웃은 물론 원수까지 사랑하라 하시네요. 참 어렵습니다. 내가 미워하는 사람, 나를 미워하는 사람을 어떻게 사랑할 수 있을까요?
다시 오늘 복음을 읽으면서 사랑과 관련된 구절만 살펴봅니다. 신약의 언어인 그리스어에는 사랑에 네 단계가 있습니다. 첫째는 ‘에로스’입니다. 우리가 아는 육체적인 사랑입니다. 둘째는 ‘스토르게’입니다. 이것은 혈연으로 연결된 사랑을 의미합니다. 셋째는 친구 사이의 우정을 의미하는 ‘필리아’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이 ‘아가페’입니다. ‘아가페’는 사랑의 가장 높은 단계로, 하느님께서 사람을 향하여 품으시는 사랑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 오늘 복음에서 들려주시는 사랑이 바로 ‘아가페’입니다. 오늘 복음이 전해 주는 사랑은 이웃에게도, 원수에게도, 곧 모든 사람에게 하느님께 받은 사랑을 전하는 ‘사랑의 실천’을 의미합니다.
사랑의 출발점이 내가 원하는 사랑, 내가 좋아서 하는 사랑이 아니라, 하느님께 받은 사랑의 전달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러한 사랑을 우리에게 바라십니다.
그리고 그 사랑을 떠오르는 태양을 통해서, 하늘에서 내리는 비를 통해서 우리에게 무조건 베풀어 주십니다.
원수를 사랑하기 어렵습니다. 나를 미워하는 사람을 좋아하기 어렵지요. 그럼 우리 함께 하늘의 태양을 보면 좋겠습니다. 하늘에서 내리는 비를 함께 맞아 보는 것은 어떨까요?
우리의 눈을 부시게 만드는 태양이, 하늘에서 내리는 비가 하느님께서 무조건 베푸시는 사랑임을 기억해 봅시다.
태양을 보면서, 비를 맞으면서, 그 사랑을 나와 가까운 사람부터 시작하여 원수에게까지 전달할 수 있다면, 우리의 부족한 사랑은 하느님의 완전함을 향하여 움직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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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나도 다른 사람의 원수가 될 수 있다>
살아가면서 나를 아프게 하는 사람을 만납니다. 그래서 나는 ‘상처를 많이 받았다.’라고 말합니다. 사실 상처를 주는 사람은 멀리 있지 않습니다. 나와 관련이 되지 않은 사람에게는 상처가 되지 않고 쉽게 잊어버립니다. 아주 가까이 있기에 마음을 진정시키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아내가 될 수 있고 남편이 될 수도 있습니다. 자식이 될 수도 있으며 부모나 이웃, 절친한 친구, 동료가 될 수 있습니다. 상처를 풀지 못한 채 시간이 흐르면 미움이 쌓이고 마음의 병이 되고 결국은 원수가 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 그분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 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신다”(마태5,44-45). 고 말씀하셨습니다. 미움을 사랑으로 정복하라는 말씀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아버지께는 원수와 박해하는 사람, 악인과 선인, 의로운 사람과 불의한 사람이 따로 없습니다. 다 내 자식이요, 사랑해야 할 대상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아낌없이 사랑을 베푸십니다. 오로지 사랑만이 충만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원수를 만드는 것은 바로 나입니다. 사랑으로 충만하다면 원수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나는 하느님이 아닙니다. 그러니 상처를 받을 수 있는 연약함을 지녔고, 그렇기 때문에 상처를 받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그러므로 ‘상처를 받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할 것도 아니고, 혹 아픔이 이미 시작되었다면 그 아픔을 오래 가지고 있지 않아야 합니다. 더러운 것이 내 몸에 들어왔는데 왜 그것을 끌어안고 있습니까? 내보내야지요. 상처를 준 그 무엇이 내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인식하면 내보내는 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내가 싫어하는 사람, 원수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깊이 보면 우리 자신들이 다른 사람의 원수가 될 수도 있습니다.
가끔 신자들의 기도소리를 들어보면 ‘세상에 못된 사람이 너무 많은데 회개할 수 있게 해 달라’고 청합니다. 이러저러한 상태를 낱낱이 고발하는 식으로 얘기해 놓고는 ‘그러니 고쳐주십시오’. 하는 식입니다. ‘자기는 아무런 잘못도 없고 회개할 이유도 없는데 남들이 잘못해서 이지경이 되었으니 그들을 좀 어떻게 해 주십시오.’ 하고 간절히 기도하고 있으니 안타까운 일입니다. 다른 사람도 나도 다 하느님의 모상을 닮은 인간이고, 질그릇처럼 깨지기 쉬운 연약함을 지녔다는 것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원수를 사랑하여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무리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하느님을 믿는 우리에게는 이미 원수가 없습니다.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주시는 하느님만을 바라볼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나도 다른 사람의 원수이니 오늘은 하느님의 풍성한 은총으로 하느님의 마음을 닮을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하느님의 마음을 간직하여 모두가 사랑해야 할 사람으로 보인다면 비로소 하느님의 자녀라 말할 수 있습니다. 사실 사람들로부터 온갖 멸시를 받고 죄인취급을 받았던 세리들도 서로를 사랑하며 서로 상대방을 헐뜯지는 않았습니다. 하느님을 모르는 이방인들 사이에서도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서로를 존중하고 우애를 베푸는 것은 아주 보편적인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사랑해야할 소명이 있을 뿐입니다. “성인은 착한 사람을 착하게 대하고 착하지 않은 사람 또한 착하게 대하니 이는 덕이 오직 착하기 때문이다.”(노자49장) “사랑은 사랑일 뿐, 상대에 따라서 달라지거나 있다가 없다가 한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다.”(이현주)
그러므로 지금의 처지에 안주하지 말고 적극적인 사랑의 실천을 통하여 하느님의 완전함을 드러내시기 바랍니다. 많이 사랑하십시오. 그리고 많이 행하십시오. "희망은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습니다." 이미 “우리가 받은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어졌기 때문입니다.”(로마5,5)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사랑은 어떤 사랑일까요? 원수사랑!이죠. 그렇다면 가장 아름다운 사랑은? 당연히 원수사랑!이랍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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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빅터 플랭클의 ‘죽음의 수용소’를 보면,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도 사람들이 웃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열심히 웃을 일을 찾았습니다. 옹기종기 모여 앉아서 우스갯소리를 나누며 고통을 이겨냈습니다. 매일 밤 하나씩, 재미있는 이야기를 만들어서 서로에게 들려주는 시간을 갖기도 했습니다. 주제는 ‘우리가 석방된 후에 벌어질 수 있는 재미있는 일들’이었습니다. 그날을 상상하며 배꼽 잡으며 웃었다고 하네요.
아우슈비츠라는 죽음의 수용소, 결국 가스실로 끌려가 죽을 수밖에 없다는 유다인 강제 수용소입니다. 말로만 듣고 책이나 영상을 통해 보게 된 ‘아우슈비츠’라는 공간은 죽음만이 있고 어떤 희망도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이 죽음의 한 가운데에서도 유머를 통해 희망을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지금 이 죽음의 수용소에 감금되어 있지 않으면서도 웃을 일이 없다고 단정 짓고 있는 사람이 많아 보입니다. 우리 안에는 어떤 상황에서도 희망을 만들 힘이 있는데도 그 힘을 무시하고 그냥 그 힘을 버리고 있었던 것이 아니었을까요?
우리 삶은 죽음의 수용소가 아닙니다. 특히 주님께서 희망을 간직하지 못하는 우리와 언제나 함께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따라서 안 좋은 상황만 볼 것이 아니라, 희망의 주님을 바라봐야 했습니다. 이를 위해서는 주님께서 강조하신 말씀에 집중하고 따르면서 주님과 함께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강조하셨던 ‘사랑’을 오늘 복음에서 “원수를 사랑하여라.”(마태 5,44)라고 확대하십니다. 예수님 말씀 중에서 아마 가장 실천하기 힘든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구약시대에도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은 있었습니다. 그러나 원수까지 사랑하라는 것은 불가능한 명령으로 보였을 것입니다. 이는 이웃과 원수의 차별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어느 특별한 사람만을 사랑하시지 않지요. 악인이나 선인, 의로운 이나 불의한 이를 가리지 않고 모두 사랑하십니다. 따라서 하느님을 따른다면 하느님처럼 우리도 모두를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악인에게 해를 비춰주시고, 불의한 이에게도 비를 내려 주시는 주님 사랑이 불공평해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주님의 사랑은 우리가 생각하는 정의를 훨씬 뛰어넘습니다. 이렇게 하늘의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우리 역시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마태 5,48 참조). 그래야 주님과 함께할 수 있으며, 어떤 상황에서도 희망을 간직하면서 살 수 있습니다. 지금 자리를 죽음의 수용소가 아닌, 하느님 나라로 만들 수 있게 됩니다.
주님과 함께하기 위해 과연 사랑을 적극적으로 실천하고 있습니까? 그 사랑의 크기가 크면 클수록 하느님 나라도 가까워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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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사랑이 간다>
마태오 5,43-48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네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 그리고 네 원수는 미워해야 한다.’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 그분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신다. 사실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 그것은 세리들도 하지 않느냐? 그리고 너희가 자기 형제들에게만 인사한다면, 너희가 남보다 잘하는 것이 무엇이겠느냐? 그런 것은 다른 민족 사람들도 하지 않느냐? 그러므로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사랑이 간다>
그것이 참으로
사랑이라면
너에게서
나에게로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그 어느 것도
오기 전에
나에게서
너에게로
늘 먼저
가는 것이다
그것이 참으로
사랑이라면
너에게서
나에게로
바라는 것이든
바라지 않는 것이든
그 무엇이
오더라도
나에게서
너에게로
늘 멈추지 않고
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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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두려움을 넘어 자유로, 자유를 넘어 사랑으로>
우리가 신앙인이라면 자기 행복에 책임을 져야 합니다. 타인의 구원까지 챙길 수도자라면 더더욱 자기 행복에 책임을 져야 합니다.
장미의 꽃을 보지 않고 가시만 보고는 불행하다고 하지 말아야 합니다. 새소리는 듣지 않고 욕하는 소리만 듣고 불행하다고 하지 말아야 합니다. 빛을 보지 않고서 세상이 어둡다고 나는 불행하다고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행복하기 위해서 행복 의지를 가져야 합니다. 나는 무조건 행복하겠다는 행복 의지가 있어야 합니다. 행복하지 않으면 나만 손해기에 무조건 행복해야겠다는 의지가 있어야 합니다.
조건에 의해 나의 행불행이 좌우되지 않게 하겠다는 의지가 있어야 합니다. 누구에 의해 나의 행불행이 좌우되지 않게 하겠다는 의지가 있어야 합니다. 원수에 의해 나의 행불행이 좌우되지 않게 하겠다는 의지가 있어야 합니다.
사실 행복한 사람에게는 원수가 없고, 원수 때문에 불행한 사람에게만 원수가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나는 한때 원수 때문에 불행했었습니다. 그래서 미워했고 불행을 곱씹을 때마다 더 미워졌으며, 더 미워하니 더 불행해졌습니다.
그런데 다행히도 이때 깨달았습니다. 원수 때문에 불행해져서는 안 된다는 것을. 원수 때문에 과거 불행한 것도 억울한데 미래까지 불행하면 안 된다는 것을.과거 불행 때문에 원수에 매였었는데 내 인생 미래까지 매여서는 안 된다는 것을.
더 다행인 것은 이때 하느님의 사랑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원수에게 향했던 시선을 하느님 사랑에 향하게 되었습니다.
원수와 미움의 지옥에서 하느님과 사랑의 천국으로 나의 시선을 바꿨습니다. 그러나 한 번에 바뀐 것이 아니라 바꾸려고 노력한 것이었으며 행복 의지로 바꾸려고 노력한 거였고 그래서 행복 의지는 사랑 의지가 되었습니다.
선한 사람에게나 악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빛을 주시는 하느님의 사랑처럼 이웃이나 원수를 똑같이 사랑하는 완전한 사랑을 목표로 세우고, 그런 사랑의 의지를 계속 북돋웠습니다.
사랑의 의지는 강했지만,
사랑의 노력은 겸손했습니다.
‘목표는 높게, 시작은 낮게’ 입니다.
처음부터 큰 원수를 사랑하려고 하지 않고 작은 원수부터 단계적으로 사랑하였습니다.
계단을 오르는 것은 언제나 힘들지만 계단을 단계적으로 오르면 반드시 오를 수 있습니다. 태양광처럼 하느님 사랑을 받아 오르면 지치지 않고 오를 수 있습니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라.”
이 말씀은 불가능한 것이 아니라 가능한 것입니다. 이것을 오늘부터 믿기로 한 오늘 우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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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사랑의 여정>
-평생과제-
“사랑은 은총이자 선택이요, 훈련이자 습관이다”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한 것이 사랑입니다. 사랑이 답입니다. 사랑밖엔 길이 없습니다. 평생이 사랑의 여정입니다. 삶은 선물이요 평생과제가 사랑입니다. 영적성장과 성숙도 결국 사랑의 성장이자 성숙입니다. 외적성장은 멈춰도 내적 사랑의 성장은 계속되어야 합니다. 수도원의 아름다운 아름드리 메타세콰이어 하늘길 가로수들이 상징하는바 내적성장의 사랑입니다.
사랑은 아무나 하나? 사랑 역시 은총이자 의식적 선택이요, 훈련이자 습관임을 깨닫습니다. 그래서 평생공부가 사랑이요 사랑에는 영원한 초보자요 평생 사랑의 학인임을 깨닫습니다. 제가 평생 사랑을 강조하며 수십년간 매일 강론 해온대로 살았다면 성인이 되고도 남을 것입니다. 그러나 현실적 깨달음은 날마다 새롭게 시작하는 영원한 초보자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라.”(마태5,48)
오늘 ‘원수를 사랑하여라’라는 6번째 마지막 대당명제의 결론이자 6개 대당명제의 결론이기도 합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여 하늘 나라를 살게 하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아, 바로 평생학인이 되어 완전한 사람 되는 사랑 공부가 우리의 평생공부요 평생과제임을 깨닫습니다.
완전한(perfect)은 온전한(whole)을 뜻합니다.
온전함(wholeness)이 거룩함(holiness)이요 영어발음도 같습니다.
온전함은 원숙(圓熟)함과 원만(圓滿)함과 통합니다. 가을되어 익은 둥근 열매들을 보면 둥글 ‘원(圓)’자를 실감합니다. 바로 “둥근 삶, 둥근 마음” 바로 제 졸저의 제목이기도 합니다. 여기에 “둥근 사랑”을 추가하고 싶습니다. 정말 사랑도 익어 갈 때 둥근 사랑일 것입니다. ‘원숙(圓熟)’이란 시도 생각납니다.
“가을 열매는 태양의 자식들
호박, 배...
태양을 닮아 둥글둥글 환하다.
사람도 사랑으로 익어 열매되면
얼굴도 마음도 글도 말도 행동도 하느님 사랑 닮아, 성체를 닮아
둥글둥글 환하다”-1998.9.10.
무려 25년전 여기 배밭수도원에서 쓴글입니다.‘배밭’하니 ‘별밭’이라는 어제 쓴시도 생각납니다. 초록빛 하늘 배나무에 달린 흰봉지의 배열매들이 꼭 흰별들처럼 생각되어 쓴 시입니다.
“날마다
별밭사이
흰별들 사이 초록빛 하늘길을 걸을 때마다
기쁨 가득
충만한 행복이다
가을 열매익어
흰별들 배열매 딸때까지 계속될 거다
이 설렘, 이 기쁨 이 행복에 산다
날마다”-
정말 배밭이자 별밭을 산책할 때의 마음입니다. 불가의 성철 스님 말씀도 생각납니다. “나는 모나게 살았지만 너희들은 둥글게 살라” 하시며 많은 제자들의 법명에 둥글 원圓자를 넣어 줬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완전한 사랑, 온전한 사랑, 원숙한 사랑을 살 수 있을까요? 바로 복음 앞부분에 상세하게 밝혀줍니다. 바로 대자대비하신 공평무사하신 아버지 하느님을 닮으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원수를 사랑하여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것이다. 그분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를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신다.
사실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 그것은 세리들도 하지 않느냐? 너희가 자기 형제들에게만 인사한다면, 너희가 남보다 잘하는 것이 무엇이겠느냐? 그런 것은 다른 민족들도 하지 않느냐?”
원수를 사랑하여라, 맞습니다. 바로 이것이 하느님 마음, 하느님 사랑입니다. 하느님의 우리에 대한 믿음과 기대는 이처럼 높습니다. 내눈에 원수지 타인엔, 하느님께는 다를 수 있습니다. 원수에게도 피치 못할 원인이, 사연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니 대자대비하신 하느님을 닮아 한없이 너그럽고 자비로우라는 것입니다. 이건 이기적 심리적 사랑이 아니라 인간에 대한 보편적 연민과 존중, 배려의 사랑, 아가페 사랑입니다.
당장 저부터 실천해야 할 것이 낯선 피정자들을 봐도 소 닭 보듯, 개 닭 보듯 할 것이 아니라 상냥하게 웃으며 목례하고 다정한 인사말 던져야 하겠다는 반성을 합니다. 사랑의 침묵이자 사랑의 말과 표정입니다. 유유상종의 배타적 사랑을 한없이 부끄럽게 합니다.
결코 값싼 사랑은 없음을 깨닫습니다. 새삼 환대의 사랑에 각별 힘써야 함을 깨닫습니다. 주님의 은총과 더불어 부단한 선택과 훈련, 습관의 최우선 대상이 이런 대자대비의 사랑공부요 실천임을 깨닫습니다. 바로 이의 빛나는 모범이 하느님 사랑의 화신인 우리 예수님이십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씀이 참 적절합니다.
“여러분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을 알고 있습니다. 그분께서는 부유하시면서도 여러분을 위하여 가난하게 되시어, 여러분이 그 가난으로 부유하게 되도록 하셨습니다.”
아, 바로 예수님의 사랑 은총이 우리의 작은 사랑을 격려합니다. 이웃 원수사랑과 더불어 우리 하느님을, 예수님을 열렬히, 한결같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 사랑을 늘 선택하고 훈련하여 습관화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느님을, 예수님을 치열하게 가열차게 한결같이 사랑할 때 주님은 지칠줄 모르는, 샘솟는 아가페 사랑을 선물하십니다.
바로 이 사랑이 두려움을 몰아내고 하느님 마음, 예수성심의 사랑으로 원수사랑도, 공평무사한 보편적 사랑을 하게 하십니다. 자주 고백성사시 보속으로 써드리는 말씀 처방전도 생각납니다.
“주님께 아뢰옵니다. ‘당신은 저의 주님, 저의 행복 당신밖에 없습니다.”(시편 16,2)
“저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주님, 저의 힘이시여.”(시편 18,2)
삶은 선물이자 숙제입니다. 결코 값싼 사랑은 없습니다. 분투의 노력을 다해야 하는 사랑의 수행입니다. 사랑밖엔 길이 없습니다. 사랑이 답입니다. 평생학인이 되어 평생 해야할 평생공부가, 평생과제가 사랑입니다. 사랑에는 늘 초보자요 날마다 용기를 내어 새롭게 시작하는 사랑입니다. 날로 하느님을, 예수님을 닮아가게 하는 사랑이요 이 거룩한 미사가 결정적 도움을 주십니다. 그리고 다음 고백기도대로 살 수 있도록 은총을 청하시고, 사랑의 수행에 분투의 노력을 다하시기 바랍니다.
“주님,
당신은 저의 전부이옵니다.
저의 사랑,
저의 생명,
저의 희망,
저의 기쁨,
저의 행복이옵니다.
하루하루가
감사와 감동이요 감탄이자,
새로움이요 놀라움입니다.
오, 날마다 당신과 함께 새롭게 시작하는 아름다운 하루이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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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마태5,44)
<그들이 예수님이지 않을까?>
오늘 복음(마태5,42-48)은 '원수를 사랑하여라.'는 말씀입니다. 인간의 보편적인 마음은 기울어져 있습니다. 내 이웃을 사랑하고 원수를 미워합니다. 나를 사랑하는 너를 사랑하고, 그런 사람에게만 인사하고, 그렇게 뜻이 맞고 마음이 맞는 사람들하고만 어울립니다. 그런 사람들하고만 식사합니다. 이것이 인지상정이고 기울어져 있는 인간의 보편마음입니다.
하지만 하느님이신 예수님의 모습, 예수님의 마음은 인간의 보편적인 것과는 너무 다릅니다. 예수님께서는 '원수를 사랑하고 나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해 기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것이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길', '영원한 생명에 이르는 길인 완덕에 이르는 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태5,48)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분리될 수 없는 하나입니다. 완전한 사람이 되는 길은 모두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분(하느님)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신다."(마태5,45)
최후의 심판기사의 말씀처럼 하느님이신 예수님께서는 가장 작은 이들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오십니다. 하지만 나를 힘들게 하는 원수와 박해자의 모습으로도 오실 수 있습니다. 이는 '나의 구원과 나의 회개와 나의 완전함을 위해 주시는 하느님의 선물'일 수 있습니다.
'고통이 선물이다.' 참으로 이해하기 받아들이기 힘든 말이지만, 예수님의 고통과 완전한 고통인 그분의 죽음과 부활을 믿으면, 이해할 수 있고 받아들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나를 힘들게 하는 원수는 누구이고, 박해자는 누구인가?'
그들이 하느님이고 예수님 일 수 있습니다. 오늘도 그 하느님, 그 예수님을 사랑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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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4mhERw4mmw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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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1)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마태 5, 44)
사랑과
원망 사이를
살고 있는
우리들
삶입니다.
원한으로
기진맥진한
우리들
삶입니다.
더 아프게
우리의 삶을
망가뜨리는 것은
언제나
우리자신입니다.
원수의 세상이
되길 바라지
않으십니다.
누굴 위한
삶인지를
묻게 됩니다.
우리자신과
하느님을 위한
삶입니다.
원한 때문에
더 나쁜 쪽으로
우리를
밀어넣고자 하는
거센 반항심을
하느님 앞에
내려놓습니다.
하느님의 뜻과는
정반대로 살았음을
반성합니다.
삶의 간섭이
아닌 극복으로
다시 태어나는
삶을 사랑으로
깨우쳐주십니다.
원수를
사랑하려는
기도와 노력의
삶을 응원하십니다.
삶을 낭비하지
않는 것은
도망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랑으로
불러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사랑을 모르던
우리를
당신 사랑으로
보여주십니다.
사랑은
불가능이 아닌
가능의 벅찬
복음의
이름입니다.
하느님 사랑으로
원수를 사랑하게
됩니다.
+++++++++++++++++++++
(2)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박해하는 사람이나 박해받는 사람이나 우린 모두 같은 사람들입니다. 같은 사람으로서 누굴 위한 박해와 광기인지를 물게 됩니다.
다시금 삶의 무지를 인정하게 됩니다. 잘못된 믿음이 얼마나 우리를 천박하게 만듭니까. 하느님조차 다가서지 못하게 만듭니다. 그 어떤 것도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은 그 어떤 것도 믿을 수 없는 사람입니다. 참된 신앙은 자신의 삶에 정직해지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기도하는 신앙인이 되어야 합니다. 안전하고 확실한 도피처가 마치 신앙의 본질인양 마구 왜곡시켜서는 안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낮추시어 사람이 되어오신 이유를 묻고 또 물어봐야 합니다.
우리 시대에 더욱 필요한 것은 온전한 기도입니다. 온전한 기도가 참된 사랑의 시작이 됩니다. 자신이 먼저 정화되지 않고서는 다른 이를 진정 사랑할 수 없습니다.
화려한 종교적 건물 사이로 쓰러져있는 수많은 사람을 봅니다. 우리가 박해한 사람들입니다. 더 이상 종교가 또 다른 권력이 되어 사람을 박해하지 않기를 기도합시다.
우리 시대에 필요한 사람은 ‘착한 사마리아 사람’처럼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입니다. 종교에 사랑과 기도가 빠져있다면 더이상 종교가 아닙니다.
침묵속에서 우리를 위해 기도하시는 하느님의 시선처럼 길 잃은 한마리 양이 우리자신이라는 것을 새롭게 만납니다.
오늘 이 하루는 우리 자신이 참된 씨앗이 될 수 있도록 우리를 위해 먼저 기도하는 하루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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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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