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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근원을 찾는 집
조선시대 도정궁터에 자리한 운경고택. 조선 왕 선조의 아버지이자 중종의 막내아들인 덕흥대원군이 살던 집을 인성군(선조의 일곱째 아들)의 후손인 운경 이재형 선생이 1953년에 매입해 의미가 크다.
집을 볼 때 세 가지 관점에서 본다. 첫째는 풍수이다. 그 터가 명당인가? 명당이 아니라도 터에 기운이 올라오는 집인가를 본다. 둘째는 주변 환경이다. 쾌적하면 두말할 필요없고, 그 어떤 문화적 분위기가 있는가를 본다. 싸구려 느낌이 드는 환경은 별로이다. 셋째는 그 집에 누가 살았는가 하는 것이다. 거주했던 사람의 기운이 그 집에 배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서울 종로구 사직동에 자리한 운경 이재형(1914~1992) 고택은 이 세 가지 조건을 충족한다. 서울의 경복궁을 중심으로 볼 때 우백호 자리가 인왕산이고, 좌청룡이 낙산이다. 낙산은 그저 평범한 야산처럼 부드럽게 흘러 내려간 지맥임에 비해 인왕산의 기운은 훨씬 강력하게 뻗어 있다. 인왕산은 전체가 바위산이고, 이 왕성한 암산의 기운이 외부로도 강하게 노출되어 있기 때문이다. 방향보다는 산의 기운을 중시했던 무학대사는 인왕산을 배경으로 조선 창업을 알리는 경복궁을 짓자는 주장을 펼쳤다.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 센 곳을 등 뒤로 받쳐야 하기 때문이다. 풍수 이론에 따르면 백호 자락의 기운이 강하면 장남보다는 차남 쪽이 실권을 잡는다고 본다. 인왕산을 배경으로 하면 현 청와대 뒷산인 백악봉이 좌청룡이 되는 것이다. 백악봉도 한 주먹 하는 산 아닌가. 그러나 ‘인군남면人君南面’이라는 남향 중시의 전통을 강조한 정도전은 현재의 경복궁 방향을 고집하였고, 결국 정도전 의견대로 방향이 결정되었다.
무학대사 관점에서 보자면 서울
의 주산은 인왕산이다. 겸재 정선의 ‘인왕제색도’에 나타난 인왕산의 장중한 기운은 서울의 심벌이 인왕산이라는 것을 말해준다. 비 온 뒤로 구름이 약간 끼어 있는 인왕산은 그 바위가 주는 묵직한 남성적 매력이 풍기는 산이다. 그 인왕산의 한 맥이 구불텅구불텅 내려온 곳이 바로 운경고택이 자리 잡은 곳이다. 바위산의 강한 기운이 몇번 굽이쳐 내려오면서 순화되었다. 강한 기운이 그대로 곧바로 내려오면 너무 강해서 살기가 된다. 몇 번 필터링을 해야 한다. 그러면 노기를 풀었다고 표현한다. 운경고택은 인왕산 자락이 필터링되어서 내려온 지점이다. 바위 기운을 솥단지에 몇 번 쪄서 부드럽게 법제法製하였다고나 할까. 이런 터를 확인할 때에는 한가지 방법이 더 있다. 기초공사를 하거나 아니면 화장실의 정화조를 묻기 위하여 땅을 파보면 알 수 있는 흙의 색깔이다. 하얀색 비석비토非石非土가 나오면 좋다. 돌도 아니고 흙도 아닌 상태이다. 화강암이 부스러져서 흙으로 변해가는 중간 단계의 상태를 가리킨다. 이걸 마사토라고 한다. 터에서 마사토가 나오면 좋은 곳이다. 기운이 약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강하지도 않다. 집터를 팔 때 반드시 그 흙의 상태도 눈여겨볼 일이다. 운경고택 공사할 때 보지는 못하였지만 주변 정황으로 보면 집터 밑에는 마사토가 깔려 있을 확률이 높다. 사랑채의 편액에는 긍구당肯構堂(조상의 유업을 잘 계승해 발전시킨다)이라고 적혀 있다.
운경고택의 사랑채. 이 집에서 정객과 풍류를 논한 이재형 선생의 숨결이 집 안 곳곳에 배어 있다.
운경 선생 생전에 늘 손님들로 북적이던 한옥. 뒤편에 자리한 장독대가 큰 살림을 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궁터의 기운과 종묘사직의 신성함이 만나
서울은 6백 년 넘은 한국의 수도이다. 그 나라의 수도에는 반드시 역사적 건축물이 있기 마련이다. 궁궐이 있고, 종교적 색채의 건축물이 있다. 먼저 궁궐 옆에 있는 집이 좋은 집이다. 로마 귀족들이 모여 살던 동네인 팔라티노 언덕이 그렇다. 팔라티노라는 이름도 팰리스, 즉 궁궐이 있던 자리에서 유래한 이름이라고 한다. 팔라티노 언덕에 서서 내려다보면 로마 제국의 핵심 건축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일급 주택지는 이러한 곳이다. 간송 전형필 선생은 일제강점기에 고가의 도자기들을 모았다. 10만 석 재산을 문화재 사 모으는 데 거의 다 쓸 정도였는데, 1930년대 후반에 일본 도쿄에 살고 있던 영국인 변호사가 그동안 자기가 모아 놓은 청자들을 내다 판다는 정보를 입수하였다. 그러자 간송이 김포에서 비행기를 타고 도쿄까지 날아갔다. 그 영국인 컬렉터의 집이 일본 천황이 살던 황궁 옆에 있었다고 한다. 황궁에서 살던 학들이 날아와 그 집 연못에서 부리로 고기를 찍어 먹던 장면이 인상적이었다는 이야기를 후일담으로 적어놓은 것을 보았다. 필자도 10여 년 전 베이징의 어느 찻집에 간 적이 있는데, 그 찻집의 위치가 자금성 바로 옆에 붙어 있었다. 찻집 2층에 올라가니 자금성의 담장 너머로 성 안 모습이 보였다. 베이징의 다른 곳들은 아무리 가보아도 싸구려 같았는데, 이 찻집만은 고급스러운 느낌을 받았다. 자금성 옆이라는 점 때문이다. 자기 집에서 역대 황제가 살던 궁궐의 모습을 보고 산다는 것은 특별한 혜택이라고 할 수 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고급문화의 근원은 궁궐이었다. 궁궐에서 흘러나와 아래로 내려가는 것이다. 로열패밀리가 아닌 다음에야 왕궁 옆에 사는 것이 고급문화의 세례를 받기에 좋은 위치인 것이다. 또한 운경고택은 사직단 바로 옆에 있다. 조선은 유교의 나라였고, 유교는 다른 종교와 달리 종교 색이 약한 특징이 있다. 그럼에도 유교라고 부르는 이유는 나름의 종교적 취향이 있기 때문이다. 유교에서 생각하는 신전은 종묘와 사직이었다. 경복궁을 앞에 두고 바라보았을 때 동쪽인 우측에는 종묘가 있고, 서쪽인 좌측에는 사직단이 배치되어 있다. 고대부터 내려오는 동양의 배치법이다. 종묘는 조상신을 모신 곳이고, 사직단은 토지신과 곡식의 신을 모신 제단이다. 그리스 아테네의 신전은 바위산 위에 석조로 지어 폼이 난다. 유사시에는 요새의 기능도 했으므로 험한 바위 언덕 위에 지었다. 그러나 조선의 신전인 사직단은 거의 평지에 가깝다. 폼 나는 높은 곳이 아닌 조용하고 소박한 지점에 자리 잡고 있다. 바다에서 배를 타고 장사를 하거나 도끼를 들고 해적과 싸워야 하는 그리스가 아니고, 그 자리에서 정착하여 자연의 리듬에 맞춰 농사를 지어서 먹고사는 조선은 그 신전터도 평화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운경고택은 바로 이 사직단과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자리한다. 사직단을 약간 내려다보는 위치다. 원래 운경고택이 자리 잡은 터는 조선시대 도정궁都正宮이 있던 터였다고 한다. 조선 왕 선조의 아버지이자 중종의 막내아들인 덕흥대원군이 살던 집이었다. 로열패밀리였으니까 사직단이 내려다보이는 위치에다 집을 지었을 것이다. 덕흥대원군의 3남인 선조가 왕위에 오르자 자기가 태어난 이 집을 사당으로 만들었고, 덕흥대원군을 비롯한 여섯 명의 조상 제사를 지내도록 하였다. 왕손의 불천위不遷位 제사를 모시는 궁으로 승격시킨 것이다. 덕흥대원군의 사손嗣孫들이 대대로 벼슬을 받았는데, 그게 정3품인 돈녕부敦寧府 도정都正이라는 벼슬이었다. 왕가의 제사를 지내는 사당이자 궁궐에 그 후손(사손)들이 세습적으로 ‘도정’ 벼슬을 받아서 머무르던 공간이라고 해서 ‘도정궁’이라는 이름이 생긴 모양이다. 돈녕부는 조선시대 종친부에 속하지 않은 종친과 외척을 위해 설치한 부서라고 한다. 운경고택은 도정궁이라고 하는 궁궐과 사직단이라고 하는 역사적 유적지에 속해 있는 위치라는 점이 주목된다. ㄴ자 형태의 안채. 방문, 옷장 문에 가득한 서화와 옛 글씨를 통해 운경 선생의 지성과 예술적 안목을 짐작할 수 있다.
다시, 근원으로
운경 이재형은 1980년대 중반에 국회의장을 지냈다. 그가 이 도정궁에 집을 갖게 된 것은 1953년, 한국전쟁 직후이다. 이재형은 경기도 산본 일대의 대지주 아들이었는데, 선조의 일곱째 아들인 인성군의 후손이다. 인성군 후손의 세 거지가 산본이었던 것이다. 왕실의 후손 집안이지만 서울에 살지 않고 서울 근교에 대대로 살았던 셈이다. 그러다보니 산본 일대의 땅은 거의 이 집안 소유였다. 5천 석 부자였다고 한다. 일제강점기 대지주 부잣집 아들들이 일본 유학을 갔고, 이재형도 일본 중앙대학을 졸업하고 금융조합에 다녔다. 해방 이후에는 철기 이범석, 장택상과 친하였다. 대지주의 아들이지만 족청族靑(조선민족청년단) 계열이었던 이재형은 토지개혁에 찬성했다. 운경의 아들이자 현운경재단 이사장인 이두용 씨는 토지개혁 발의자 중 한 사람이 아버지였고, 할아버지는 토지개혁으로 많은 전답이 헐값에 수용되자 돌아가셨는데, 아마도 화병으로 돌아가시지 않았나 싶다”고 술회한다. 우리나라 전통 부잣집들의 재산이 1950년의 토지개혁으로 거의 날아갔다. 이북의 토지개혁은 국가가 부자들의 토지를 뺏는 것이었지만, 남한의 토지개혁은 소작인과 땅이 없던 가난한 농부들에게 싼값에 살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였다. ‘유상몰수 유상분배’이지만 효과는 남한이 더 컸다고 보아야 한다.
운경은 부산에 있다가 한국전쟁이 끝난 직후 서울로 왔을 때 도정궁터가 매물로 나와 있는 것을 보고 바로 구입하였다. 구입한 계기 중하나가 이 집터의 사랑채 자리에서 바로 선조 임금이 출생했다는 역사적 사실이다. 선조의 일곱째 아들인 인성군의 후손이 조상인 선조 임금이 태어난 그 집터에 들어간다는 것은 의미가 깊다. 이걸 두고 환지본처還至本處라고 한다. 자기가 나온 근원으로 다시 되돌아간다는 것은 연어가 대양을 돌아다니다가 자기 모천母川으로 회귀하는 것과 비슷하다. 4백 년의 시공을 떠나 있다가 다시 복귀한 셈이다. 운경고택은 면적이 2백70평쯤 된다. 북촌 한옥의 30~50평 정도 크기의 한옥과는 격이 다르다. 한옥은 이처럼 면적이 넓고, 사랑채가 분리되어 있어야 한옥 맛이 난다. 운경고택은 대문을 열고 들어서면 오른쪽에 조그만 행랑채가 있다. 집 관리하는 사람이 사는 곳이다. 그리고 이어서 다시 조그만 문을 통과하면 사랑채가 나타난다. 사랑채 현판은 긍구당肯構堂이라고 쓰여 있다. <서경>에 나오는 대목으로 ‘조상의 유업을 잘 계승 발전시킨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전통을 잘 지키고 보호하는 집이라는 의미로도 해석된다. 우리는 너무 전통을 보존하지 않는다. 아파트에 살면서 자꾸 옮겨 다닌다. 집값 오르면 팔고 다른 데로 이사 가는 유목민의 삶을 살았다. 마당 있는 집에서 수백 년간 터를 유지하면서 살아온 집안이 거의 없는 것이다. 긍구당이라는 현판은 ‘뿌리 깊은 집안을 유지하자’로 읽힌다.
사랑채는 ㄱ자 형태로 되어 있고, 안채는 ㄴ자 형태이다. 사랑채와 안채를 오므린다면 ㅁ자 형상이다. 그 안이 자그마한 정원이다. 중정中庭이라고 해야 할까, 내정內庭이라고 해야 할까. 연못도 있다. 휘어진 소나무가 있고, 그 옆으로 키가 큰 해당화가 서 있다. 토종 해당화와는 다르다. 중국 서부가 원산지라고 해서 ‘서해당화’라고도 부른다. 중정에는 모란도 심어놓았고, 작약도 있고, 붉은 영산홍도 피어 있다. 사랑채 앞에는 1950년대에 운경이 이 집에 처음 이사 와서 심었다는 라일락이 피어서 방문객의 코를 자극 한다. 라일락 향은 젊은 시절의 싱싱함을 회상하게 해주고, 노스탤지어를 불러일으키는 향이다. 이 긍구당 사랑채에 드나들었던 수많은 정객도 매년 4월 말에는 이 라일락 향을 맡고 이 방에 들어갔을 것을 생각하니, 운경이 꽤 낭만적인 취향이 있었던 것 같다. 사랑채와 안채 사이에 연못을 파고 꽃나무를 심었다. 소나무와 해당화, 라일락, 작약, 영산홍 등 다양한 수종이 계절을 알린다.
1953년에 매입해 40여 년간 살면서 살기 편하도록 조금씩 개조한 한옥. 안채 끝 방은 입식 주방으로 개조하고, 대청과 안방 너머에 현대식 욕실을 구성했다.
늘 겸손한 마음가짐을 강조했다는 운경 선생.‘대어재연, 소어재저’, 즉 큰 물고기는 깊은 물에서, 작은 물고기는 얕은 물에서 노닌다는 뜻이다.
정객과 풍류를 논하다
긍구당 사랑채는 1970~1980년대에 수많은 정치인의 사랑방이었다. 이 방에서 운경은 방문객과 함께 밥도 먹고 차도 마시며 서화를 논하기도 하였다. 긍구당 사랑채는 음식점이나 호텔과는 격이 다른 느낌을 준다. 중정을 사이에 두고 안채와 분리되어 있어서 외부 손님들이 드나들기에 편하다. 요즘 같은 아파트는 외부 손님의 방문을 거절하는 구조이다. 크게 보면 아파트는 대문이 하나이므로 원룸이다. 남자들의 공간이 없다. 공간이 생각을 지배하기도 하는데 시간, 공간, 인간의 3간間 중에서 공간을 바꾸면 시간과 인간이 바뀌기도 한다. 서울의 전통 한옥 가운데 사랑채가 제 역할을 제대로 한 두 집이 있는데 하나는 안국동에 있는 윤보선 고택이고, 다른 하나는 사직동의 운경고택이다. 단골손님은 정객들이었다.
조선왕조를 수호하는 토지신과 곡식의 신을 모셔놓은 신전인 사직단을 끼고 돌아서 자리 잡았던 도정궁. 그 도정궁에서 선조 임금이 태어났으며, 선조 임금 이래로 4백여 년만에 그 후손이 다시 들어와 살면서 정치를 하고 국회의장을 지냈다. 라일락이 만발하였을 때 하단전으로 그 라일락 향을 깊이 들이마시며 신발을 벗고 사랑채 긍구당에 들어간다. 기름 먹인 한지 장판에 앉아 <논어>의 기서호其恕乎를 이야기하고 소상팔경瀟湘八景을 그린 그림을 감상하면서 화기가 내려가고 나면 한 나라의 정치를 논한다. 안채에서 솜씨 좋은 안주인이 요리한 신선로를 내오면 그 맛에 시름이 녹는다. 그러다가 청주 한잔을 하면서 중정에 핀 영산홍의 붉은 꽃잎을 보면 ‘이만하면 인생이 나쁘지 않다’는 생각을 할 것 같다. 운경고택은 당대 서울 상류층 가옥의 품격과 풍류가 배어 있는 집이다.
청운 조용헌 선생은 동양학자이자 칼럼니스트. 2008년부터 <행복>에 ‘조용헌의 백가 기행’ 칼럼을 연재하며 가내구원, 즉 이 시대 집의 역할과 의미에 대한 담론을 펼쳤다. 단순한 풍수를 넘어 집의 역사와 건축적 특성, 사는 이의 스토리까지 이 시대 명당에 관한 통찰을 엿볼 수 있다. 현재 건국대학교 문화콘텐츠학과 석좌교수로, 저서로는 <조용헌의 백가 기행> <조용헌의 동양학 강의> <5백 년 내력의 명문가 이야기> 등이 있다.
글 조용헌 사진 이우경 기자 담당 이지현 기자
출처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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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남방집이내요
꼭 살아보고 싶은집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