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퍼옴]
<전라도가 혐오지역이 된 이유>
1. 권은희 (광주) - 경찰 뒤통수.
2. 김상욱 (전라도) - 국정원 뒤통수.
3. 백혜련 (전남 장흥) - 검찰 뒤통수.
4. 서기호 (전남 목포) - 법원 뒤통수.
5. 이문옥 (전남 나주 ) - 감사원 뒤통수
양심선언의 배후에는 거대한 세력이 존재하는 것은 아닌지...
1. 권은희
광주의 딸로 알려졌으니 대부분 다들 잘 알것이고.
2. 김상욱
대선 전 ‘댓글 작업’ 제보 김상욱 前 국정원 직원
2012년 대선을 앞두고 국가정보원의 댓글 활동을 외부에 유출했던 전 국정원 직원이 대가성 돈을 받은 혐의로 기소됐다.
인천지검 특수부(부장검사 정순신)는 22일 사건 무마 청탁과 함께 수천만원을 받은 혐의(특정범죄가중처벌법상 알선수재)로 김상욱(52)씨를 이날 구속기소했다.
검찰은 또 동료 약사로부터 돈을 받아 김씨에게 전달한 약사 A(48)씨를 같은 혐의로 불구속 기소했다.
김씨는 2010년 6월∼2011년 4월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의 요양급여 부당청구 실사를 받게 된 약사 B씨로부터 무마 청탁과 함께 2차례에 걸쳐 5천500만원을 받아 챙긴 혐의다.
김씨는 A씨가 검찰의 수사 선상에 오르자 은신처를 마련해 주고, 대포폰과 다른 사람의 주민등록증 등을 제공해 도피를 도운 혐의(범인 도피)도 받고 있다.
김씨는 2012년 대선 직전 국정원 심리전단 직원들의 ‘댓글 작업’을 당시 민주통합당측에 제보하고 직원들을 미행한 혐의(공직선거법 위반 등)로 기소된 뒤 거짓말로 국정원 심리전단 직원 3명의 주소를 알아내고 언론에 국정원 직원들의 댓글 활동을 폭로한 혐의(위계공무집행방해·국정원직원법 위반)로 추가 기소됐다.
지난해 7월 열린 항소심에서 원심과 달리 무죄를 선고받았다./양규원기자
3. 백혜련
[7.30 재보선에 새정치민주연합 후보로 출마하는 후보자 중엔 매우 닮은꼴 여성이 두 명이 있다. 이른바 권은희와 백혜련 두 사람이 그들이다]
[백혜련의 말 뒤집기]
백혜련은 어느 날인가 부터 종편 정치 프로그램에 출연하여 제법 알려진 인물이다. 백혜련이 정치입문 과정에서 보여준 모습은 권은희와 쏙 빼 닮았었다. 백혜련은 대구지검에서 검사로 재직했던 시절 자신이 마치 정의의 사도인양 '검찰이 정치적 중립성과 독립성을 지키지 못하고 있다'는 글을 검찰 내부 통신망에 올린 후 이내 사표를 낸 장본인이었다.
당시 검찰 주변에서는 지극히 정치 입문을 위한 제스츄어라는 말이 나돌았고 자신이 몸 담아왔던 조직을 비판했던 점으로 미루어 야당行이 될 것같다는 전망이 있었으나 백혜련 자신은 정계입문설을 부인하며 순수성을 강조했다. 이때가 2011년 11월 20일 경이었다. 그러나 그 다음 백혜련이 보여준 행동은 그의 순수성을 의심받기에 충분했다. 이듬해인 2012년은 총선이 있는 해였다.
백혜련은 사표를 낸지 한달 만에, 그것도 정계입문설을 부인한지 한 달 만에, 백혜련은 당시 민주당에 입당했고 안산시 당원갑 지역구 출마를 선언하기 이른다. 이때 이미 한 달 전에 순수하게 사표를 냈다고 했던 백혜련의 발언은 거짓이었음이 판명났고, 자신이 던진 사직서는 민주당 공천을 받기위한 의도였음이 확인되었다. 이 내용은 한국일보 2011년 12월 5일자에 나오는 백혜련의 인터뷰 기사가 증명하고 있다. 이랬던 백혜련이 7.30 재보선이 실시되는 '수원을' 지역구에서 새정치연합의 공천을 받았다. 이 공천 역시 보은공천의 성격이 짙어 보인다.
[권은희의 말 뒤집기]
하지만 백혜련의 말 뒤집기는 권은희에 비하면 약과에 불과했다. 권은희도 사표를 낼 당시에는 정계입문설을 부인했다. 하지만 자신의 말을 뒤집는데는 열흘도 채 걸리지 않았다. 권은희는 국정원 댓글 사건으로 인해 전국적으로 이름을 날린 이제 갓 40대의 인물이다. 권은희도 지휘계통상 상급기관에 있는 수장(首長)을 타킷으로 골라 외압폭로를 시도했다. 정치 입문을 노렸을 가능성이 매우 짙게 보이는 권은희가 악의적으로 수사에 끌어들여 물고 늘어졌던 인물은 당시 서울경찰청장 김용판이었다.
그 후 김용판은 법원의 1.2심 선고에서 외압이 확인될 만한 정황증거가 불충분하여 무죄를 선고받았으니 김 전 청장은 지독한 부하직원의 그물망에 걸린 운이 매우 나쁜 상관이었던 셈이다. 이 수사에 참여했던 다른 수사관들은 이구동성으로 외압이 없었다고 증언을 했지만 유독 권은희만 예외였다. 정치적 목적이 있었으니 끝까지 자신의 주장을 고집했을 것이라는 추론이 가능한 일이었다.
김용판 전 청장은 대법원 결심 재판에서도 무죄가 선고될 확률이 매우 높다. 만약 김용판이 최종적으로 무죄를 선고받는다면 이번엔 거꾸로 권은희가 위증혐의로 법원의 심판대에 서게 될 것이다. 이미 몇몇 시민단체에서는 권은희를 위증죄로 고발하기도 했다. 그러고 보면 권은희는 위증과 참으로 인연이 깊은 인물이다. 어쩌면 평생을 위증과 더불어 살아 갈 팔자인지도 알 수가 없다.
4. 서기호
2000년부터 2012년까지 판사로 재직하였다. 판사 재직시 SNS상에 '가카 빅엿'이라는 발언을 인용하면서 '표현의 자유'에 대한 사회적 논란을 불러일으켰고, 2012년 2월 판사 재임용에서 탈락했다. 이후 통합진보당에 입당하여 통합진보당 사법개혁위원장으로 활동했다.[2] 2012년 7월 9일 국회의원직을 승계했으나 2012년 9월 7일, 4.11 총선 통합진보당 당내 경선 파문으로 인해 통합진보당에서 제명당했다. 2012년 10월 7일 새진보정당추진회의 창당준비위원회 발기인으로 참여했고 2012년 10월 31일 진보정의당에 입당했다. 2013년 7월 21일 진보정의당에서 정의당으로 당명이 개정되었고 현재 법제사법위원회 위원이자 사법제도개혁특별위원회 위원으로 활동 중이다.
서기호는 2011년 12월 7일 방송통신위원회의 사회관계망서비스(SNS)의 심의규제를 비판하며 페이스북에 "방통위는 나의 트윗을 적극 심의하라. 심의할수록 감동과 훈훈함만 느낄 뿐이다. 앞으로 분식집 쫄면 메뉴도 점차 사라질 듯. 쫄면 시켰다가는 가카의 빅엿까지 먹게 되니"라는 글을 올렸다. 서울북부지법원장은 판사가 자신의 정치적 견해를 드러내는 것이 사회적 파장을 일으킬 수 있다고 판단해, "우려 표명" 입장을 서기호에게 전달했다.[3]
이에 대한 오마이뉴스의 단독 보도는 일파만파 퍼져 서기호를 SNS에서 일약 스타로 만든 계기가 됐다. 팔로어 수가 2천여 명에 불과하던 서기호(@gihos1)의 트위터는 2011년 12월 7일 오마이뉴스(김용국 기자)의 기사[4]가 나간 후 24시간 만에 2만 명을 넘어섰다. 이후 2013년 6월 현재, 서기호의 팔로어 수는 약 7만 9천여 명이다
판사의 막말이 공인된 입장에서 표현의 자유라는 명목으로 용인될 수 있는 것인가?
왜 경찰, 검사, 판사들이 사직후에 정계에 진출하는지가 의문이다.
5. 이문옥
‘내부고발자’ 이문옥 총선 승리 도우려 광주로
1990년 나를 슬프게 한 사건이 또 하나 일어났다. 그해 5월 11, 12일치 <한겨레신문> 머리기사로, 이문옥 감사관의 양심선언 사실이 실렸다. ‘재벌의 로비로 감사원 감사가 중단된 사실과 재벌기업의 부동산 보유 비율이 은행감독원이 발표한 1.2%보다 훨씬 높은 43.3%에 이른 것으로 추정된다’는 내용이었다. 이 연속 보도의 제보자인 이문옥이 바로 재벌 감사 담당이었다.
이 보도가 나가자 땅투기를 일삼는 재벌기업에 대한 비난여론이 들끓었고, 이문옥은 5월15일 ‘공무상 비밀 누설 혐의’로 전격 구속되었다. 하지만 그는 검찰에서 재벌의 압력으로 관련 감사를 제대로 할 수 없었다고 진술했고, 감사관에게 압력을 넣은 ‘윗선’은 바로 청와대라고도 추가 폭로를 했다. 시민단체에서는 이 감사관의 즉각 석방과 재벌의 비업무용 토지 소유현황을 즉각 공개하라고 요구하고 나섰고, 그를 옹호하는 여론도 들끓었다.
이문옥은 사실 나와 광주고 동기동창이다. 나는 그를 지지하고 정부를 규탄하는 시민대회에도 참여했고 부인에게 전화를 걸어 위로의 말을 전하기도 했다. 양심선언 20돌을 맞아 지난 5월11일 프란치스코 교육회관에서 열린 기념행사 자리에서 만난 이문옥이 ‘그때 친구들도 거의 외면하더라’고 말해서 나는 결코 그러하지 않았다고 농담 아닌 진담을 하기도 했다.
이문옥의 양심선언을 계기로 ‘내부 고발자’라는 말이 유행어로 등장했다. 여론의 압력을 의식한 까닭인지, 다행히 이문옥은 구속된 지 한달 보름 만에 ‘도주의 우려가 없다’는 이유로 풀려났다.
석방된 뒤에도 그는 줄기차게 파면에 항의해 복직 투쟁을 벌였고 쉼없이 관계 사실을 알리고 다녔다. 용기 어린 행동이었다. 또 ‘공직신고자 보호법’을 국회에 내기도 했다. 나는 무엇보다 그에게 용기를 주려고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이문옥이 이런 활동을 벌이는 와중인 92년 3월 14대 총선을 맞이했다. 앞서 13대 때 광주에서 당선된 야당 민주당의 신아무개 의원은 광주민중항쟁 진상규명에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았고, 87년 대통령선거에서는 김대중·김영삼 후보가 단일화를 거부하는 바람에 노태우에게 정권을 넘겨주는 정치현실을 목격했다. 그래서 14대에서는 다음 대선을 앞두고 새로운 돌파구를 찾아야 할 시점이었다. 광주의 인사들, 곧 기독교 여성운동가인 조아라 여사와 불교민주운동가인 지선 스님 등이 민주시민후보로 이문옥을 추대했다. 이문옥은 사양했으나 압력을 견디지 못해 결국 응했다.
나는 이 소식을 듣고 선거기간 광주로 달려갔다. 그때 나는, 첫째 정치지형에 따른 지역감정을 깨야 한다는 것, 둘째 다음 대선의 승리를 위해 광주에서 무소속으로 입후보한 이문옥과 부산의 민주당 후보인 노무현이 당선돼야 한다는 지론을 가지고 있었다. 사실 나는 그때까지 결코 정치판에 뛰어들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물론 기회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내가 이문옥 후보를 도우려 광주에 내려간다고 하자, 역문연 관계 인사들과 역사강좌에 출강하던 성심여대 교수들이 십시일반 후원회비를 모아 주었다. 나는 열심히 선거운동에 나섰다. 특히 계림국민학교에서 열린 유세에서 나는 찬조연설 연사로 나서, 공직사회의 청렴한 기풍을 불러일으키고 지역감정을 유발하는 정치 편향을 지양하려면 광주에서 이문옥, 부산에서 노무현을 당선시켜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때 광주 시민들의 여론은 아주 우호적이었고, 약이며 음료수며 후원금을 모아 내기도 했다. 하지만 막판 김대중 총재가 신아무개 후보 지지유세를 벌이자 분위기는 반전되고 말았다. 결과는 노무현·이문옥 모두 낙선이었다. 이문옥은 후일담으로 “부산에서는 김영삼 쪽으로 똘똘 뭉쳤다라는 지역감정 자극과 이문옥은 공무원 출신이어서 당선되면 민자당으로 간다는 따위 헛소문이 떠돌아 상심이 컸다”고 했다.(역문연 회보의 ‘시민운동가가 겪은 국회의원 선거’에서)
이이화 역사학자 |
이 대목에서 이문옥을 포함해 ‘광고 7회 민주운동가 4인방’을 소개해야겠다. 박재승은 71년 대선에서 김대중 후보가 박정희가 당선되면 선거가 없는 총통제가 실시된다는 등의 유세 발언 때문에 선거법 위반으로 고발되었을 때 담당 판사로 무죄를 선고해 미운털이 박혀 3년 동안 유배생활을 했다. 이후 변호사로 한겨레신문 감사, 대한변호사협회 회장을 지내며 민권운동가로 헌신하고 있다. 오종렬은 교사 출신으로 전교조 출범에 앞장선 이래 민주화운동과 통일운동가로 열정을 바치고 있다. 또 한 친구, 표명렬은 육군 정훈감 출신의 장성으로 군의 사조직인 하나회의 비리를 알리고 평화재향군인회 대표로 사재를 털어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다.
이들은 대체로 성격이 온순하고 정이 많은 친구들이었다. 그런데도 걸맞지 않게 왜 투사가 되었을까? 시대 탓일 게다.
이이화 역사학자
|
첫댓글 전라도 자체가 거대한 하나의 정치세력이다.
전라도 출신이라면 다 정치입문을 시키는 거 같다.
민주당조직내 전라도 비율이 얼마나 될까?
내가 들은 바로는 주요 요직에 전라도 출신들이 등용되는 거 같다.
박광온, 백혜련... 둘 다 전라도 출신인데, 수원지역에서 출마했다...
지난 재보궐선거에서 자기지역 출신이 아님에도, 전략공천을 해 준다.
전라도가 정치권력을 잡고자 하는 과정이 다 드러난다.
전라도 출신으로 유명세만 탓다하면, 거의가 정치에 입문하게되는 것으로 보이는 것이 나만의 생각은 아닌거 같다.
새정치민주연합 차기 지도부 선거에 출마한 당권주자들이 권리당원 투표를 하루 앞둔 2일 막판 득표전을 위해 잇달아 호남지역을 방문했다.
전체의 54%를 차지하는 호남 권리당원의 ARS 투표 참여와 선택이 선거 결과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치는 만큼 이들을 공략하기 위해서다.
=> 민주당 권리당원의 과반수이상(54%)이 전라도다.
민주주의에 원칙중 하나인 투표제에 의해 과반수이상이면 결론이 난 것이나 다름없을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