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느날 아침 후배로부터 한통의 비보를 듣게 되었습니다.
한때는 한번 만나보고 싶어했던 젋은 목사가 갑자기 돌아가셨다는 슬픈 소식이었습니다.
그때가 수요일 아침이었으니 주일 강론 잘 인도 하시고 삼일째 돌아가신 것입니다.
나이도 사십대에 불과하고 인물도 잘났으며 기본적 학벌이 아주 좋은 똑똑한 사람입니다.
특히 대학가요제에서 대상까지 받은 가수였다는 사실로 관심끄는 스타 목사입니다.
이분은 얼마전까지 미국에서 교회를 섬기다 최근에 한국으로 들어왔습니다.
물론 미국에 있으면서 인터넷을 통해 이미 널리 알려진 목사이며 한국에도 팬들이 많았지요
이로인해 한국에 들어오자마자 순식간에 사~ 오백명 모여 들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교회를 시작한지 일년도 안되었는데 갑자기 죽음에 이른 것입니다
사인은 심장마비였다고 전해졌습니다.
얼마나 놀랍고 또 안타까웠던지 한동안 멍해졌습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다 주시지는 않는 모양이다라고 생각하면서....
저는 이분이 미국에서 목회할 때 강의한 내용들을 먼저 인터넷으로 들어보았습니다.
그런데 강의 내용이나 주제를 이해하는 방향이 저하고 하도 비슷해서 놀랐습니다.
동일한 성경을 읽고 동일하게 해석하는 것이야 당연할 것입니다.
하지만 현실을 보면 성경은 동일하게 읽어도 해석이 다른 것이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그런데 이분은 멀리 미국에있고, 저하고는 안면도없는데 동일한 부분이 아주 많았습니다.
교회론, 자유의지론, 죄성, 성화론에 대한 비판, 공로주의비판 등에서 일치했습니다.
특히, 네 이웃이 누구냐? 하는 비유에 대한 성경해석은 토씨하나 다르지 않고 동일하더군요
내용이하도 동일해서 이분이 혹시 내 강의 듣고 설교하는 것 아닌가? 생각할 정도였습니다.
물론 제가 이분보다 오래전부터 강론했음으로 이분 것을 제가 참조할 일은 없습니다.
다만 저는 아무리 말해도 반응이 별로 없는데 이분은 대단한 반응을 일으키더군요
한편으로는 부러워하면서 또 한편으로는 동역자가 생겼다고 얼마나 좋아했던지요
그때 제가 많이 외로왔던 시기라 더욱 기뻐했습니다.
오죽하면 교회에 공개적으로 이분을 소개하고 싸이트도 알려 주었겠습니까?
제가 어떤 목사님을 공개적으로 추천한 것은 아마 처음일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저의 커다란 실수였음을 깨닫는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더군요
가장 먼저 드러난 문제점이 바로 이분 사상이 선재론자라는 점이었습니다.
이분이 생각하는 기독교 사상은 모든 것이 묵시세계에서 이미 완성되어 선재합니다.
그리고 이것이 피조세계 역사로 드러나는 것이라고 이해하고 있더군요
이런 주장은 새로운 학설이 아니라 오래전부터 존재한 신플라톤 사상의 아류입니다.
중세 초기 저 유명한 오리겐이 가장 탁월한 선재론자였습니다.
이사상은 플라톤 철학에 기초한 이론이라는 점에서 이단사상으로 정죄되었습니다
이분은 이것을 알고 주장하는 것인지 모르지만 알만한 사람은 이미 다 아는 것입니다.
하지만 마치 대단한 성경사상을 새로이 깨달은것 처럼 말하더군요
예를 들면 성경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하늘은 종이축이 말리는것 같이"
위의 구절을 인용해 말하기를 역사란 마치 둘둘마리 종이처럼 말려있는 것이 펼쳐진것이다. 그리고 끝에는 이것이 다시 원위치로 말려 올라가듯 순식간에 정리된다 라고 합니다
하지만 이 내용을 정확하게 읽어보면 다음 처럼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늘은 종이축이 말리는 것같이 떠나가고 각 산과 섬이 제 자리에서 옮기우매"
만약 이분이 말하듯 위의 구절이 종이축처럼 말리는 것이 곧 역사라고 말한다면 그 뒤에 나오는 각 산과 섬이 제 자리에서 옮기는 것은 과연 무엇이라고 해석해야 하겠습니까? 아마도 제가 이런 지적을 하면 혹자들은 그게 뭐가 그리 중요합니까? 라고 반문하겠지요 ..하지만 제가 말하고 싶은 것은 이분의 성경 읽기가 이미 빗나가있다는 뜻입니다.
내용 읽기를 잘못한 상태에서 해석하면 그 해석이 과연 옳겠습니까?
무엇을 증거하기 위해 내용을 인용했는데 그 내용이 거짓이면 어찌되는것입니까?
그러나 모르는분들은 마냥 신기한 해석인것 처럼 이해하고 좋아하지요
그런데 묵시론은 성경읽기의 오류보다 사상이 더 커다란 문제입니다.
이런 사상은 기독교 사상도 아니고 당연히 성경적 사상도 아닙니다.
오히려 철학사상이나 불교사상과 유사한것입니다.
묵시세계에 대한 동경심은 세상역사를 일장춘몽이라고 생각하게 만들어버립니다.
마치 장자철학의 사상과 비슷해지는 것입니다.
성경적 사상중에 중요한 기초는 바로 성도들의 믿음입니다.
믿음은 하나님 언약을 알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취하여주심으로 심겨지는 것입니다.
당연히 언약대로 임하신 그리스도의 십자가 성취가 놀라운 믿음의 증거가됩니다
역사란 바로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의 언약이 성취되는 것입니다.
하늘에서 이루어진 뜻이 땅에서도 이루어진다는 말입니다.
당연히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해 역사는 시작되었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마감될것입니다.
그 놀라운 역사적 섭리의 최절정이 바로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입니다.
하지만 선재론자들은 이러한 하나님의 역사적 섭리를 가볍게 여기게 됩니다.
모든 세상 역사해석을 소홀히 하고 왜곡하며 나아가서는 아예 부정합니다.
당연히 그리스도가 죄인들을 위해 죽으신 대속 사건조차 중요하지않게 이해합니다
소위 성경의 비역사성을 주장하는것이지요
이러한 묵시론에 심취하면 결과가 허무주의, 염세주의에 빠져들게됩니다.
세상을 멀리하고 영원한 세계를 동경함으로 세상을 자꾸 버리고 싶어합니다.
하지만 어떤이들은 이렇게 말로는 주장하는데 철저히 세속적이기도합니다.
말로는 세상 헛됨을노래하면서 재물에 욕심이과하고 인색하며 또 철저합니다.
세상 온갖 쾌락을 탐닉하고 또 권세와 명예를 아주 중요하게 여깁니다.
이들이 바로 사이비 묵시론자입니다 사상은 그러하지만 사실은 믿지도않는 자들입니다
그러나 스님들을 한번 보세요 그들은 진짜 진리를 찾아 세상을 등지고 살다 죽어갑니다
묵시론을 참 진리라고 주장한다면 적어도 고승들 처럼 살아야할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기독교 사상도 성경도 아니고 인본주의 철학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말하고자하는 목사님의 문제점은 이것으로 그치지 않고 더욱 진행합니다.
처음에는 분명 성경적이었는데 날이 갈수록 알레고리 해석을 하는 것입니다
알레고리 해석은 본문을 읽기는 읽고 그 내용과 상관없는 결론에 이르는 방법입니다.
이것은 신천지, 안산홍, 통일교, 정명석, 전도관, 이런곳 교주들이 잘사용합니다.
물론 선재론의 대가로 알려진 오리겐도 알레고리 해석으로 아주 유명했습니다
이분도 칠일창조를 가지고 십자가와 연결한 해석은 타의추종을 불허하는 알레고리 해석입니다
성경 본문 내용을 이렇게 무시하고 마음대로 이론을 세우면 성경이 과연 어찌되겠습니까?
성경을 읽어도 이렇게 해석하면 그것이 틀린줄도 모르지만 답도 모르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말장난에 불과한것입니다.
서울 구경 한번 한적 없는 사람이 서울에 대해 마음대로 설명하면 그것이 거짓인지 아닌지 서울구경 한번 못한 사람들이 어찌 확인하겠습니까?
알레고리해석은 본문을 읽고 전혀 다른 결론으로 유도하는 속임수입니다.
예를들면 "원숭이 엉덩이는 빨게" 이렇게 시작했으면 그 빨간 원숭이 엉덩이를 주제로 설명해야 하는 것이 본문 해석입니다. 그런데 읽기는 분명히 원숭이 엉덩이는 빨개하고서는 이어지는 설명이 빨가면 사과~ 사과는 맛있어~ 이렇게 진행하면 전혀 다른 결론으로 가게됩니다 이런식의 설교가바로 알레고리 해석이라고 합니다 전하는 사람도 자신이 무슨말을 하는지 모르고하는 말이기 때문에 듣는 사람도 당연히 이해를 못하는 것입니다 다만 새롭다. 신기하다하는 막연한 감흥이있을 뿐입니다, 소위 언어유희라고 합니다.
그런데 가르치는 사람들이 왜 알레고리 해석을 즐겨사용할까요?
듣는 사람이 모르는 말을해야 자신의 우월성이 그리고 신비함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거기다 사람들의 습성이 항상 새로운 말을 듣고 싶어합니다.
그래서 알레고리 해석을 하면 날마다 새롭다, 신비스럽다하고 서로 좋아합니다.
하지만 성경내용을 벗어난 말장난이기 때문에 그때 그때 다릅니다
물론 날마다 배워도 진리에 이르지 못하며 거짓이 오히려 참인 것처럼 행세합니다.
이 목사님은 성경해석상 문제도 있지만 기독교 윤리관에도 문제가있습니다.
바로 성도의 성화론을 아예 부정하는 것입니다.
죄속에 태어나 죄속에 살다가 죄속에 죽는것이기 때문에 아무런 의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주장에 저도 공감하고 박수쳐주었습니다.
하지만 그 다음이 중요한 것입니다.
이분은 예수를 믿어도 성도들이 변하는 것이 전혀 없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즉 성도들이 여전히 죄인 상태로 존재하는 육신의 모습만 보고있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는것이 얼마나 커다란 변화인지를 모르는 것입니다.
이분은 아마 성령으로 거듭남이 무슨말인지도 이해 못한듯 합니다.
당연히 새로운 피조물이라는 말이 무슨 의미인지도 모를것입니다
더구나 성도들이 하나님이 거하실 거룩한 성전으로 지어져간다는 말이 무슨뜻인지나 아실까?
하나님을 전혀 모르던 사람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른다.
예수가 누구인지 모르던자가 그분을 자신의 메시야 곧 그리스도라고 믿는다
이것이 얼마나 커다란 변화인지를 모르시고 변화가없다니?
이분은 사람의 죄성은 충분히 설명합니다.
하지만 예수를 만난 이후를 성경이 허다하게 말하는데도 설명 못하는것입니다.
예수님이 "죄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에 말하신다는 것은 잘알고 전합니다.
그런데 동일한 내용에 있는 "의에 대하여" 말하심을 전혀 망각하고 있습니다.
"그가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이분은 공로주의나 성화론을 비판하다가 오히려 더중요한 그리스도 의를 부정하는 우를 범하고 있습니다. 사실 성도들에게 무슨 의가 있겠습니까? 공로가 무엇이 있습니까?
그래서 예수를 메시야로 믿습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이 말하는 그리스도의 의를 입는 것입니다.
죄인임을 깨닫는 것은 복음을 듣기 이전 상태입니다.
복음을 바르게 깨달았다면 자신의 공로나 의를 세우지않고 십자가의 도를 세우는 것입니다.
더구나 성도들이 자신의 죄인됨을 무슨 공로인줄로 알고 자랑자랑하다니요?
이분이 설교한 내용중에 바울의 죄인 괴수론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아주 유명하고 많은 사람들이 감동받았을 그런 설교입니다.
하지만 그 설교는 본문내용의 시제조차 구분 못한 엉터리 해석에 불과합니다
바울은 그리스도를 알기 이전 과거에 죄인 괴수였었다...라고 회상하는 내용입니다.
이것을 가지고 바울이 노년에 이르러서 죄인중에 괴수라고 고백했다는 이해는 코메디입니다.
도대체 한글을 읽고 어떻게 이런 황당한 이해를 하고 또 설교를 할수있는지.......
바울은 노년에 죄인임을 자랑한것이 아니라 아래 처럼 의의 면류관을 소망했습니다.
" 관제와 같이 벌써 내가 부음이 되고 나의 떠날 기약이 가까왔도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
이런 바울의 고백을 과연 이해하고 설교한 것일까요?
안타깝게도 많은 분들이 바로 그 죄인괴수론에 감동했을것이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자신들이 감동했다고해서 그것이 곧 옳은 말이라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들은 거짓말을 듣고도 감동하고 유행가를 듣고도 잘 감동합니다.
오히려 진리를 바르게 알아듣는 귀가 부족한것입니다.
성도는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기전과 믿은 이후가 뚜렷하게 구분됩니다.
육신이 죄속에 여전히 있지만 변화가 없다는 말이 무슨 말입니까?
제가하는 말은 정욕에 살던 죄인이 예수를 믿으면 의인으로 산다 이런말이 아닙니다.
여전히 죄인이지만 그리스도를 만나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죄인이 어찌 거룩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습니까?
그리스도가 없다면 불가능한 것을 성도들이 현재 누리고 있는 것입니다.
계산과 측정이 불가능한 커다란 변화를 누리면서 변화가 없다니 무슨말입니까?
도대체 어떤 변화를 생각하는 것입니까?
성도는 세상 사람과 조금도 다르지 않고 여전히 욕심, 정욕 시달리지만 ....
그리스도의 은혜 곧 의를 덧입고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고 하나님은 성도라고 칭합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고 그리스도를 나의 주라고 부르는 것이 가장 큰 변화입니다
이것을 모른다면 복음의 진의를 모르는 것입니다.
또 싸구려 복음주의에 도취되어 사악한 범죄를 저질러도 부끄러워하지 않게됩니다
육신을 입은 사람이 다 그렇지 뭐... 핑계하면서 당당하게 합리화하게 될 것입니다.
바로 하나님을 알고 배우기도 했지만 그만 잊어버린 상태가되어버린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버지라는 사실을 잊어버린 자들이 과연 성도입니까?
이 목사님은 미국에서 전하던 내용과 국내로 들어와 전하는 내용에 커다란 변화가 생깁니다.
국내로 들어온 다음에도 그분의 강론을 몇편 들어보았습니다.
그런데 미국에서는 하지않던 이상한 강론을 시작하셨더군요
바로 원어를 들먹이면서 성도들에게 현학자적 자세를 취하는 것입니다.
이분이 갑자기 원어를 들고나온것은 사실 새로운 이론을 펼치려는 자세입니다
성도들이 이것을 어찌 판단하겠습니까?
목사가 강론하는 내용은 바로 객관적 진리인 성경입니다.
그런데 객관적 진리를 강론자가 마음대로 편집할수 있다면 그것이 무슨 진리가됩니까?
목사가 마음대로 편집하는 그런 내용을 어찌 참된 증거라고 열변 토하는지...?
그래도 무지한 성도들은 자신이 수준 높은 설교를 듣고있다고 착각할 것입니다.
이런 것을 바로 아전인수식 해석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원어를 핑계삼아 자신의 알레고리해석을 합리화한다는 뜻입니다
히브리어나 헬라어는 사전들고 단어 몇개 해석한다고 번역할수 있는 그런것이 아닙니다.
영어는 고급 언어에 해당하고 아주 세미한 부분까지 단어가 잘 정리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영어는 초보자라도 사전만 들고서 어느정도 번역이 가능합니다.
하지만 헬라어는 원시 언어고 히브리어는 더욱더 원시 언어입니다.
원시언어라는 말은 그 용례가 단순하고 구체성이 없기 때문에 초보자는 함부로 번역하면 안되는 것입니다. 원어는 단어 한가지 뜻으로 사용되는 용례가 적어도 열개에서 많은것은 열다섯개 스무개 정도로 다양합니다. 분명히 동일한 뜻임에도 불구하고 문장에 들어가서는 전혀 다른 뜻으로 번역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예를 들면 현재도 전라도 지방에 가서 길을 물으면 어떤분은 이렇게 말해줍니다.
"거시기 뭐시냐 저짜 전뽓떼 보이쟈? 거기서 부터 거시기 혀라
그라고 말이시 거시기 헌 다음에 쭈욱~ 가다가 또 거시기 혀야혀
그라문 거시기가 나와부러....
위의 말은 제가 지어낸 것이 아닙니다.
정말 전라도 어디를 가다가 어떤 노인에게 길을 물었을때 제가 직접 들었던 답변입니다.
하도 재미있어서 제가 잘 기억하는 것입니다.
과연 무슨말인지 타 지역 사람들이 잘 이해 되십니까?
하지만 전라도 그분은 아주 설명을 잘하신 것이고 그 지방 사람은 누구라도 알아 들을 수 있는 그런 말이었습니다. "거시기"라는 단어 하나가 뜻은 같은데 이토록 많은 의미로 사용될줄 저도 몰랐습니다. 고대 원시언어란 이와 유사합니다.
고대언어에 대한 전문지식이 없는 사람이 사전만 들고 용감하게 해석하면 참으로 신기하고 놀라운 내용들이 무수하게 쏟아질 것입니다. 그리고 개역성경이 모두 엉터리 번역으로 보일 것입니다. 물론 새로운 진리라도 발견한 것처럼 자부심으로 가득해질 것입니다. 하지만 잘못된 해석은 당연히 새로운 말입니다 특히 목사들이 이런짓을 하는 것은 성경의 객관적 진리성을 스스로 무너트리는 아주 어리석은 행위입니다. 아마 평생 연구해도 성경이 무엇인지 모를 것입니다.
저는 이분에 대해 여기까지 확인하고 마음을 아예 접어 버렸습니다.
그런데 며칠전 이분 사인은 심장마비가 아니라 자살이라고 뉴스엔조이에 실렸더군요.
그것도 .......
|
첫댓글 우룰증으로 인한 자살이라고 하더군요.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만난 사람이 우울증 때문에
자살한다면 그 신앙이 잘못된 것이 틀림없겠지요. 연약한 인간이라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자살할 가능성은 있겠지요. 그러나 최소한 진리를 알고 붙잡힌 사람이라면 충분히 우울증
을 극복할 수 있겠지요....안타깝습니다. 한국교회의 수준을 또 보게 되는군요.
예 요즘 문제가 되는 설교나 또한 그들을 추종하는 사람들에게 교훈이 되는 좋은 글입니다.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면 구덩이에 빠집니다.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 이유는 소경이 코끼리 만지듯, 예수님을 알지 못해 그렇습니다.
맞습니다.....소경이 소경을 인도한느 현실이지요....ㅠㅠ
떨기나무님 긴 글에 수고하셨고요, 일깨워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작년 초 일에 일어난 사건이군요. 그런데 교인들은 지금도 설교 동영상 보며 예배. 하나님이 부르시는 방법에는 여러가지가 있다며.,,
유대교인과 같은 철저한 율법준수 사상도 아니고 첨부터 끝까지 하나님이 행하신다는 사상도 아닌 은혜와 율법의 혼재속에 갈팡질팡하게 하는 이 사회 개신교 분위기 속에서 율법으로부터의 자유를 '너무나도 강렬'하게 외치니 .. (여러 성경 해석에서 문제의 소지가 많은지는 둘째 문제든지.. 문제도 아니라고 생각하든지 하면서) 기존 교인들에게 어필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