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리마다 오고가는 많은 솔로들이- 겨울 되면 외쳐 보는 말- [꼬셔줘- 으아아아
앙-]
아이들도 어른들도 ‘건수를 만들어’- 추운 겨울 함께 보내네- [꼬셔줘- 제발
좀- 애인을 구해줘- 올 겨울은 따뜻하게-] - By 네트를 떠도는 어떤 노래.
<2> 인언因言 둘.
기상청은 최근의 온난화 현상으로 인해 올해 크리스마스에 눈이 올 확률은
0.000000001%라고 밝혔습니다. 이에 질투동맹嫉妬同盟은 축제분위기입니다. 반면
국제연인연맹國際戀人聯盟에서는 ‘이것은 신세기 에반게리온 1화에서 나온 에바
초호기가 가동할 확률과 같다. 그러므로 올해는 눈이 올 것이다!’ 라고 하는 성
명을 발표했습니다.
한편 일각에서는 ‘기상청이 안 온다고 단언했으니 반드시 온다’라며 정부기관
불신을 부추기는 음해세력이…… (하략) - by 국제연합뉴스. 2002, 12, 13일 저녁
발표.
<3> 2002. 12. 24. 03시 27분. 질투동맹총본부嫉妬同盟總本部.
한 점의 빛도 들어오지 않는 어두운 방 안. 남녀노소를 포함해 대략 20여명이
초조한 표정으로 의자에 앉아 있었다.
“늦어. 실험은 역시 실패인가? 이래서야 사억육천만의 질투동맹 회원들을 볼
낯이 없는데…….”
“총제總帝가 제일 슬퍼하겠지. 가진 건 모두 쏟아 부었잖아.”
“그 정도에 절망해서야 질투동맹의 총제라는 이름이 아까울 뿐.”
차가운 목소리가 가라앉은 목소리들을 날려버렸다. 그녀야말로 질투동맹에서 총
제와 대등한 위치를 갖고 있는 여걸, 광황光凰이었다. 본래 그녀는 이 프로젝트
Poor Snow에 대해서 반대하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말이 그다지 곱게 나오지 않고
있었다.
계획의 입안자는 총제였다. 그동안 너무 유약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던 그가 프
로젝트 Poor Snow를 제안했을 때, 그녀는 솔직히 놀랐다. 이 무기 하나로 질투동
맹의 역사는 다시 쓰이게 될 것이라며 사람들은 환호를 아끼지 않았지만 그녀는
당혹감을 감출 수 없었다.
총제는 확실히 유약한 성격이다. 그녀 자신이 동맹 최고의 과격파라는 말을 듣
는 탓도 있겠지만, 다른 녀석들과 비교해도 확실히 연약한 성격이었다. 하지만 그
동안 무모한 계획을 일삼은 끝에 거의 멸망 직전까지 있던 질투동맹에는 총제 같
은 사람이 필요했다. 참고 견디면서 세력을 키워낼 인재가. 자신에게는 없는 그
점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기에 그녀도 별다른 불만은 표시하지 않았다.
그런 총제는 최근 들어 반쯤 미쳐있는 것 같았다. Project Poor Snow를 입안하
고, 동맹원의 동의를 이끌어내고, 직접 개발에 참가하기까지. 뭔가 강렬한 집념에
넋이 나간 듯한 그 모습이, 어쩐지 걱정되어서 견딜 수 없었다. 물론 그것은 한
개인이 아니라 질투동맹 전체의 미래에 대한 걱정 때문이었지만…….
덜컹!
문이 열리면서 강렬한 빛이 새어들었다. 총제는 휴대용 랜턴Lantern을 한 손에
들고 방 안으로 들어왔다. 개발비가 너무 많이 들었기 때문에 전기가 끊겨버린 총
본부. 사람들은 랜턴의 흐린 빛에 비치는 총제의 얼굴을 확인하러 애썼고, 그는
완전히 밀폐된 유리관을 한 손으로 들어 올리며 씨익 하고 웃었다. 환호성이 총본
부 전체에 퍼져나갔다!
<4> Project Poor Snow. 12월 13일 저녁 7시 프로젝트 입안. 입안자는 총제.
Poor Snow. 대지구전역무차별전격질투폭격기對地球全域無差別電擊嫉妬爆擊機.
질투동맹 남성 중 특별히 선별된 이만명의 땀과, 질투동맹 여성 중 특별히 선별
된 이만명의 저주로 만들어진 결정체結晶體를 이렇게 부른다. 남자의 땀은 식지
않는 분노이고, 여자의 저주는 오뉴월에도 서리를 내리게 한다는 것이 이론기반.
진공상태의 Poor Snow는 평범한 눈의 결정체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대기권에
노출될 경우 Poor Snow는 주변의 수분과 냉기를 흡수, 급격히 자신을 복제한다.
그리고 복제 역시 원형과 똑같은 힘을 갖고 있기 때문에 앗 하는 사이에 Poor
Snow는 지구 전역을 뒤덮는다. 최근 연구되고 있는 나노머신 테크놀러지에 의한
인공강설계획에서는 각종 기술적 난제로 인해 완성까지 상당한 시간이 걸리리라
추정중이지만, 질투동맹에서는 오로지 순수한 인간의 질투심嫉妬心만으로 현실화
에 성공한 것이다.
눈이 되어 대지로 하강하는 Poor Snow는 자체에 질투병기Envy Weapon를 장착하
고 있으며, 무차별로 질투광선Envy Beam을 발사한다. 질투광선에 맞은 자는 짜증
을 부리거나 쉽게 화를 내게 되며, 결과적으로 옆에 있던 자와 싸우고 헤어지게
된다.
총제는 올해 크리스마스에는 눈이 절대로 오지 않는다는 보고가 있었기 때문에
Poor Snow를 본 쌍것-아베크에 대한 질투동맹의 공식적인 호칭, 그 자신은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호칭이었다.-들은 기뻐서 밖으로 뛰쳐나올 것이며, 반면 질투동맹-
잠재적 가입희망자 포함-은 절망하여 집 안에 틀어박힐 것이므로 잘못된 피폭은
없을 것이라 단언했다.
메기드 플레임은 질투동맹이 자랑하는 최첨단 질투공학으로 무장한 무적의 요새
였다. 시속 1100km로 땅 속을 달릴 수 있는 이 요새는 언제나 질투동맹의 최전선
에 서 있었다. 그리고 지금 이 메기드 플레임은, 국제연인연맹총사령부인 궤도 엘
리베이터 아크메Acme를 향해 돌진하고 있었다.
아크메라는 단어에는 절정絶頂이라던가, 정점頂点 같은 뜻이 있다. 말 그대로
그 건물은 이 지구에서 가장 높은 곳이었다.(설명하기 애매한 뜻도 존재한다. 자
세한 것은 사전 참조.) 지구의 절반을 단번에 바라볼 수 있는 것이다. 비교적 저
렴한 가격으로 특별한 경험을 할 수 있기 때문에 연인들에게는 대 인기였고, 질투
동맹에게는 언젠가 부수지 않으면 안 될 건물로 낙인찍혀 있었다. 그리고 총제는
Poor Snow를 퍼트려야 할 장소로 아크메를 점찍었던 것이다.
메기드 플레임 안의 사령실에서 거대한 디스플레이에 찍힌 아크메의 모습을 본
질투동맹의 간부들은 환호했다. 지금까지 몇 번이고 아크메를 붕괴시키기 위한 투
쟁이 있었지만, 언제나 철저한 방비에 걸려 실패해 왔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크리스마스 이브 새벽! 연인이 있는 자들은 모두 특별한 스케쥴을 짜느라 정신없
을 시간이다!
“아크메의 방어 장비, 메기드 플레임을 아직 인식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앞으
로 7초 후면 주포의 사정권에 들어옵니다. 7, 6, 5, 4, 3, 2, 1, 사거리 확보했습
니다!”
“함내 선원 전부 충격에 대비하라! 주포 최대 출력으로 충전! 오늘의 일격이
새로운 시대를 연다!”
함장의 명령과 함께 메기드 플레임의 서브 암Sub Arm이 함체를 지반에 단단히
고정시켰다. 에너지 충전과 함께 메기드 플레임의 거체가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하
고, 지반까지 따라서 흔들리고 있었다. 방전되어버린 에너지가 허공에서 플라즈마
를 일으키는 가운데, 이제야 눈치를 챈 아크메의 방어 시스템이 바리어 작동을 시
작하고 있었다.
“바리어인가?”
라고 중얼거리는 함장. 그 혼잣말에 아크메의 최상층에서 방위사령관이 응답했
다. 프레임 하나를 두 사람의 얼굴이 가득 메운다. 두 사람만의 세계.
“그렇다.”
어째서 거리를 무시하고 의사가 통하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딸에게도 애인에게
도 버림받은 함장은 비웃음을 입가에 한 가득 띄웠다.
“미안하지만 7초차로 동맹의 승리다! 질투파동포嫉妬波動砲Envy Howling
Cannon 발사!”
강렬한 에너지가 포신에서 솟구쳤다. 눈에 보이지 않는 그것은 처음에는 주변의
대기를 흔들기 시작하더니 지반을 뒤흔들고, 아직 형성되기 전인 바리어를 흩트리
며 아크메를 습격했다. 하늘도 흔들리고 땅도 흔들린다, 질투의 혼, 비명이 되어
지구를 집어 삼키리라! 차인 남자의 절규에서 힌트를 얻은 질투파동포의 위용이었
다.
아크메의 방어 시스템 전체가 일격에 날아가고, 순간적 방전 상태로 인해 메기
드 플레임 역시 잠시간 작동불능 상태가 되었다. 곧 이어 하늘과 땅에서 아크메를
지키기 위한 전투기와 전차가 출격했고, 특수능력자들이 속속 등장하기 시작했다.
…………………………………………………………………………………
그 때 광황은 무장을 끝내고 메기드 플레임의 발진 포트에 몸을 고정시키고 있
었다. 메기드 플레임의 성능은 대단하지만, 국제연인연맹에는 메기드 플레임 쯤은
일격에 날려버릴 수 있는 괴물들이 상당수 존재하고 있었다. 넉 달 전 있었던 대
공세는 이상하게 생긴 커플 하나가 나와서 갈긴 ‘석파 러브러브♥ 천경권’이라
는 기술 한 방에 질투동맹의 패배로 결정 났던 것이다. 그녀 자신도 운이 좋다면
단신으로 아크메의 바리어를 깰 수 있다. 목숨을 걸어야 한다는 조건이지만.
고속 발사의 압력에 견디기 위한 특수 슈트를 입고 호흡을 가다듬던 그녀는, 자
신의 옆에 다가와 서는 한 남자를 눈치 챘다.
“총제?!”
살짝 고개를 끄덕여 보이는 총제. 놀랍게도 그 역시 對 G 슈트를 입고 있었다.
그가 직접 전투에 나가는 것을 한 번도 본 적 없는 광황은 당황을 감추지 못했다.
“최종결전이니까 선두에서 싸우고 싶다고 생각해서. 내가 뒤에 빠져 있는 걸
싫어하는 게 아니었어?”
총제는 가볍게 말하며 자신의 몸을 발진 포트에 고정시켰다. 한 손에는 Poor
Snow가 든 캡슐을 들고, 다른 한 손에는 Barett M82A1을 들고 있었다. 인간 랭크
에서는 강력한 병기라고 하겠지만, 괴물이 판치는 이 세상에선 그다지 믿음직스럽
지 못했다.
“제정신이야, 당신? 전투 같은 거 한번도 해 본 적 없잖아?”
“네가 보는 앞에서 하지 않았을 뿐이야. 필요한 만큼은 한다구. 그렇게 믿을
수 없는 거야, 아니면 걱정해주는 거야?”
“걱정은 무슨!”
그녀는 냉랭하게 쏘아 붙이고 출격 카운트를 기다렸다. 포격음과 비명소리가 밀
폐된 공간 안으로 스며들어온다. 카운트다운이 시작되었다. 그녀는 對 G 헬멧을
뒤집어쓰고, 곧 이어 시작될 전투를 생각하며 잠시 입술을 깨물었다. 그러나 긴장
된 신경은 사출시의 충격에 견디기 힘들다. 그녀는 억지로 스스로의 정신을 이완
시키며 주의를 다른 곳에 두려고 애썼다.
총제는 떨고 있었다. 헬멧을 뒤집어써서 얼굴은 잘 보이지 않지만 아마 울고 싶
은 기분일지도 모른다. 그녀는 사귀던 남자에게 버림 받고 나서 질투동맹에 들어
와 처음으로 전투에 참가했을 때를 생각했다. 그 때 그녀는 누군가가 자신의 손을
잡아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었다. 그렇게 해 준다면 이 떨림이 멎을 텐데……
라고.
그녀는 총제의 손에 자신의 한쪽 손을 올려놓고는 어색하게 웃었다. 헬멧 때문
에 그 얼굴이 보일 리 없으리라는 사실도 잊고서. 둔해진 감각이지만 총제의 떨림
이 멎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사출 카운트다운에 들어갑니다! 7, 6, 5, 4, 3, 2, 1, 사출!]
무시무시한 가속도가 붙으면서 광황이 지휘하는 삼만명의 특수결사대는 허공으
로 솟구쳤다. 때를 맞추어 시작된 메기드 플레임의 사격이 천지를 뒤흔들고, 그들
을 영격하기 위해 날아든 YF-19 한 대가 광황의 검에 콕핏을 꿰뚫려 추락했다.
훗날 <아크메의 농성>이라 불리우는 18시간의 대접전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6> 2002. 12. 24. 20시 13분. 아크메 제삼방위선第三防衛線.
주포 발사시의 반작용으로 움직일 수 없게 된 메기드 플레임에서 아크메까지의
거리는 대략 12km였다. 그러나 전투가 시작되고 대략 12시간이 지났는데도 질투동
맹은 그 거리의 절반밖에 진입하지 못하고 있었다.
제일방위선第一防衛線 : 도색의 거리紅燈街. 에로 잡지, 에로 게임, 에로 비디
오 등등이 총망라된 방위선. 이 영역 안에 접어든 질투동맹원들은 싸울 의지를 잃
고 버추얼에 몰두하게 되어버렸고(“클라나드 한정판이다앗-.”,“어눌한 시공 속
에도 있어!”,“앗, 이것은 도키메모 폐인‘s Side!!!" 등등), 설령 그런 쪽에 속
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잠시 동안 그것에 시선을 빼앗김으로서 통일된 진형을 갖추
지 못하게 되어 버렸다. 가장 난감했던 것은 질투동맹의 주력 중 하나인 질투전차
Envy Warmachine의 파일럿들이 이 거리를 포격하거나 훼손시키는 것에 반대의사를
표명한 것이었다.
결국 분노한 광황직속풍기문란척결위원회光凰直屬風紀紊亂剔抉委員會 108인이
심의삭제판매금지전량회수관계자전원구속審議削除販賣禁止全量回收關係者全員拘俗
이라는 신공을 사용해 제일방위선 전체를 날려버림으로서 간신히 돌파에 성공했
다. 그러나 질투동맹 내에서도 톱 클래스의 전투력을 자랑하는 그들이 과로로 쓰
러짐으로 해서, 전황에 대한 예상은 더욱 더 불안해지는 것이었다.
돌파시간 12시 16분.
제이방위선第二防衛線 : 추억의 거리絶望街. 질투동맹의 대부분은 뼈아픈 마음
의 상처를 안고 있었고, 이 곳은 그런 그들의 첫사랑에 대한 추억을 자극시켜 전
투력을 빼앗는 방위선이었다. 방위선을 지키고 있는 것은 단 한 명의 독전파 능력
자 키리시마 루리코였지만, 질투동맹은 이곳에서 엄청난 시간을 허비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순식간에 방위선은 옛 추억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 자신의 과오를 반
성하는 소리로 가득 찼다.
“아카리, 멀티, 세리오, 세리카, 아오이!!!!!!!!!!!!”
“유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키!”
“으흐흑! 하느님! 용서해주세요! 여동생이랑 잤어요!”
“몇 명이나? 난 열 두 명인데?”
“썅! 이 새끼 묻어버려! 사쿠야 돌려줘!”
아무래도 뚫릴 것 같지 않았던 이 곳은, 폭주하기 시작한 원념으로 더욱 더 강
력해진 독전파가 루리코의 제어를 잃으면서 붕괴 되었다. 무려 7시간에 걸친 사투
끝에 질투동맹은 다시 전진하기 시작했다.
돌파시간 19시 57분.
그리고 마침내 제삼방위선.
열명의 소녀가 지키는 거리十Girl集. 십걸집을 구성하고 있는 것은 피를 구하는
[누님] 카시와기 치즈루, 별을 보는 [로리] 호시노 루리, 달을 지키는 [여왕] 디
아나 소렐, 세계를 정복하는 [공주님] 시바무라 마이, 마음을 뒤흔드는 [바스토
모핑] 카스미, 공략이 불가능한 [여동생] 노에미, 사랑을 가르치는 [선생님] 미즈
호, H신에서도 벗지 않는 [안경] 시엘 선배, 백업이 중요한 [안드로이드] 마루치,
고백에 10년이 걸리는 [히로인] 후지사키 시오리였다.
근접전에서도-치즈루, 카스미, 시엘 선배-, 포격전-나데시코, 소레이유-에서도,
응원전에서도-기타 인물들- 압도적 우위를 자랑하는 십걸집 앞에서 질투동맹은 맥
없이 무너져갔다. 상황을 주시하던 광황은 입술을 깨물었다. 직접 나가서 싸워야
할까? 하지만 그랬다가는 이 뒤의 일이……. 그렇지만 이대로 다른 사람들이 모두
쓰러지도록 놔 둘 수도 없다.
“잠깐!”
살육의 바다를 꿰뚫고 커다란 외침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어딘가에서 날아든
채찍이 카스미의 도복을 잡아 찢었다. 황급히 뒤로 뛰어 물러난 카스미는 잽싸게
토끼 헤어밴드를 꺼내 머리에 끼우고는 바니 걸 모드로 변형했다.
“설마?!”
“설마가 사람 잡지! 너희들 정도는 이 울게 만드는 사드 후작이 울려주겠다!”
“…….”
“크크크크.”
허공에서 들려온 삼 인의 목소리. 고전하던 질투동맹의 눈에 환희의 빛이 맴돌
았다.
“저, 저건 틀림없이 질투동맹 구대폭탄이다!”
환호성이 끝나는 것과 동시에 전장에 내려앉은 것은 질투동맹의 최강 전력중 하
나인 구대폭탄의 [울게 만드는] 사드 후작, [망나니] 이사쿠, [신행조루神行早漏]
루저 래빗Loser Rabbit의 삼인이었다.
드디어 최종방위선인 통곡의 벽 앞에 도착했을 때, 살아 있는 것은 겨우 여덟
명이었다. 불안한 표정으로 사방을 살핀 광황은 총제가 의외로 멀쩡하게 살아있는
것을 보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만약 전투 도중에 Poor Snow를 잃어버리거나
적에게 뺏기기라도 한다면, 이 처절한 전투는 의미를 잃어버리고 마는 것이다.
“용케 살아 있네?”
“아아……. 운이 좋았어. 게다가, 죽을 수 없는 이유가 있으니까.”
광황은 진지하게 대답하는 총제를 보고 살짝 웃었다. 근성 없는 성격이라고 생
각했는데, 그래도 어찌어찌 여기까지 온 걸 보면 장하다고 할까. 운이 좋은 것도
사실이지만, 그만큼 애쓴 탓도 있으리라.
그녀는 자신들의 앞에 놓인 통곡의 벽을 올려다보았다. 9만 톤에 달하는 건다리
움초합금뉴제트를 사랑의 불꽃과 키라메키 고교에서 자라는 전설의 나무를 써서
녹여 만들어진 궁극의 방어벽. 이 세상의 그 무엇으로도 부술 수 없는 사랑의 상
징이라고 국제연인연맹은 공언하고 있었다. 벽에는, ‘이 문을 더럽히거나 훼손
하려는 자는 모든 사랑을 버려라’라는 저주가 적힌 종이쪽지가 한 장 붙어 있었
다.
광황은 살짝 웃고는 검을 뽑아 들었다. 그리고 검을 높이 들어 올렸다. 피로 때
문인지 검이 무겁게 느껴졌다.
‘생각해보면 나는 너무 단순해서, 언제나 하나 이상은 생각할 수 없었어.’
그녀가 아는 검술은 단 하나, 위에서 아래로 내리치는 것이다. 검술이라기보다
는 도끼질이라는 말이 적합한 동작. 그러나 그녀는 그 일격에 엄청난 힘을 실을
수 있었고, 그래서 광황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바보 같다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그녀에게는 一心이라는 이름을 가진 그 검술이 제일 잘 어울렸던 것이다.
‘누군가에게 반했을 때도 그랬었지.’
그녀가 가진 사랑이라는 감정은 퇴색되지 않는 것이었다. 적어도 그녀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래서 헤어지자는 말을 들었을 때 납득할 수 없었다. 결국 그녀가 최
후에 들은 것은 구질구질하게 왜 그러냐는 한 마디였다. 좌절한 그녀는 질투동맹
에 몸을 맡기고 일개 전투원에서 시작해 최고의 자리까지 올라섰다. 그녀의 一心
을 인정받은 결과였다.
‘지금의 나는 이렇게 생각하고 있어. 어떤 감정도 영원하진 않아. 사랑도 마찬
가지야. 부서지지 않는 것 따윈 아무 것도 없어…… 라고.’
그녀는 빛을 발하고 있었다. 숨이 막힐 정도로 느릿느릿 아래로 떨어지는 검도
빛을 발하고 있었다. 거기에 닿은 모든 것들이 분자간의 결속을 잃고 흩어져 폭발
하며 빛을 발한다. 자신에게 들려주기라도 하듯이 그녀는 크게 외쳤다. 자신의 모
든 것을 담아서 외쳤다.
“빛이------ 돼라-------------------!!!!!!!!!!!”
검이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미처 바닥에 닿기도 전에 산산조각 나고는 빛의
파도가 되어 사방으로 흩어진다. 그것과 동시에 통곡의 벽은 사라졌다. 남아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그녀의 마음속에 있던 무엇인가도, 함께 부서져버리고 만
것 같았다. 그래서인지 피로가 몰려왔다. 전신이 무거워져 움직일 수가 없게 된
다.
‘헤에……. 부숴버렸다…….’
그녀는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조용히 눈을 감았다. 어째서인지 흘러나온
눈물 한 방울이 눈썹에 살짝 맺혔다.
<8> 2002. 12. 24. 23시 48분. 아크메의 최정상, 지구관람대地球觀覽臺.
광황이 다시 눈을 떴을 때, 그녀는 지구관람대 위에 누워 있었다. 정신을 차리
고 일어서자 한 쪽에 널부러져 있던 총제가 인사를 했다.
“아아, 일어났군…….”
총제는 피투성이였다. 언뜻 보기에도 심각한 상처라는 것을 알 수 있을 정도다.
어서 응급처치를 하지 않으면 목숨도 위험하리라고 그녀는 직감했다.
“괜찮아? 어서 응급처치를 하지 않으면……!”
그녀는 일어나서 총제에게 다가가려고 했다. 그러나 도무지 다리에 힘이 들어가
지 않는데다가 방향감각도 엉망이었다. 미끄러져 바닥에 쓰러진 그녀는 바로 아래
쪽에 지구가 있는 것을 발견했다. 자신에게 고소공포증이 있다고 생각해 본 적은
한 번도 없었지만, 이 순간은 확실히 무서웠다. 눈을 감았다가 다시 뜨고 관람대
아래를 응시한다.
그 곳에는 지구가 있었다. 지도에서 본 것과는 다르게, 살아 있는 지구가 그 곳
에 있었다. 대지와 바다는 하나로 어울려 있었고 시시각각으로 변하고 있었다. 지
도에서 보이는 것처럼 검은 색 선으로 갈라져 있는 것이 아니었다. 아직 태양이
뜨기 전이라서 어둑어둑한 실루엣밖에 보이지 않는데도, 그녀는 그것이 정말로 예
쁘다고 생각했다.
“예쁘지……?”
어느 샌가 다가온 총제가 물었다. 그녀는 무심코 고개를 끄덕이다말고 총제의
손에 들린 캡슐을 바라보았다. 충격에서 보호하기 위한 G-Protection을 제거한 캡
슐 안에는 육각형의 백색 결정체가 빛나고 있었다. 총제는 그녀를 바라보며 씨익
하고 웃었다.
“여기까지 오느라 너무 피곤했어. 이제 하나만 더 끝내면, 나도 쉴 수 있을 거
야.”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됐어?”
총제는 잠시 그녀의 눈치를 살폈다. 그리고 머뭇거리면서 대답했다.
“전향, 아니, 그러니까, 배신…… 했어. 이 안에는 최악의 상황에 대비해서 우
리들을 유혹하기 위한 미소년과 미소녀들이 잔뜩 잠복하고 있었거든. 여기까지 온
건 우리 둘 뿐이야.”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평상시였다면 무척이나 분노했을 텐데, 어째서인지 전
혀 화가 나지 않았다. 평상시와 다르게 농담 비슷한 걸 총제에게 던지기까지 했
다.
“용케도 넘어가지 않았네, 당신. 미소녀 좋아하는 주제에.”
“아아…….”
총제는 얼굴을 빨갛게 물들였다. 뭔가 할 말을 못 찾고 버벅거리더니, 난간을
붙들고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한다.
“어, 어쨌든 어서 이걸 깨뜨리자.”
“그만둬.”
그녀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렇게 중얼거렸다. 낮은 목소리였기 때문에 제대
로 듣지 못한 걸까, 총제는 고개를 돌리며 얼굴에 물음표를 가득 띄웠다.
“그만두라고 했어. 바보 같은 일이니까 말야, 그거.”
“응?”
“바보 같은 일이라구. 억지로 커플을 찢거나 하는 거 말야. 어차피 대부분은
헤어지게 되어 있잖아.”
“……?!”
총제는 당황해서 그녀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그녀는 아래를, 지구만을 쳐다보며
계속 말했다.
“나 말야, 질투니 뭐니 하면서 바보 같은 짓을 해 왔는데, 생각해보면 역시 차
인 게 억울해서 그랬던 것뿐이었어. 내가 잘 안 된 게 억울하니까, 남도 그렇게
돼라……는 생각으로 날뛰었던 거지. 하지만 그러는 동안에도 속으로는 생각하고
있었던 거야. 혼자는 싫다, 혼자는 무섭다……라고.”
처음으로 對 G 슈트를 입고 헬멧을 착용했을 때, 외부와 완전히 차단된 그녀는
정말로 무서웠다. 간절히 빌었었다. 누군가와 함께 있고 싶다고. 연인이라는 이름
이 붙든, 친구라는 이름이 붙든 그건 알 바 아니지만, 지금 내 속에 있는 두려움
을 털어놓을 수 있는 상대라면 누구라도 괜찮았다.
“함께 있고 싶은 사람을 만나면, 누구라도 질투동맹 같은 이름은 버리고 싶어
질 거야. 만약 누군가가 그 사이를 방해하려고 하면 용서하고 싶지 않을 테고. 그
러니까 Poor Snow니 뭐니 하는 바보짓은 그만둬. 언젠가 생길 당신의 애인에게도
상처를 줄지 몰라.”
총제는 복잡한 시선으로 광황을 쳐다보았다. 두 사람의 시선이 교차하고, 총제
는 풀이 죽은 듯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나는 근성이 없는 걸…….”
그 표정이나 그 말이나 어쩐지 어린애 같아서 그녀는 피식 하고 웃어버리고 말
았다.
“분명히 내가 당신을 처음 봤을 때는, 심약하고 근성도 없어 보였어. 하지만
그런 상처를 입고서도 여기까지 왔잖아? 게다가…….”
그녀는 스스로 말하면서 깨달았다. 그 때 같이 있던 다른 사람들이 모두 배신했
다면, 정신을 잃고 쓰러진 자신이 여기에 와 있을 리가 없다. 즉, 총제는 저렇게
심한 상처를 입고서도 자신을 데리고 이 곳까지 올라왔다는 이야기가 된다. 약간
경탄하면서, 입가에 웃음이 떠오르는 것을 느낀다.
“나까지 데리고 여기에 올라왔잖아. 미소녀 좋아하는 주제에 유혹에도 안 넘어
가고 꿋꿋하게 말야. 그 정도면 당신에겐 충분히 근성이 있는 거라고 생각해. 내
가 보증해 줄께.”
총제는 그렇게 말하면서 Poor Snow가 든 캡슐을 들어 난간에 내리쳤다. 유리가
깨지면서 육각형의 백색 결정이 허공을 날았다. 그녀가 뭔가 반응할 틈도 없이 백
색 결정은 공기에 반응해 크기를 늘리고 구름을 만들었다. 눈을 몇 번 깜빡거리는
사이에, 눈구름은 지구 전역을 뒤덮었다.
“아…….”
그녀가 입을 벌린 시각은 24시 정각. 25일이 시작되는 것과 동시에, 지구 전역
에 폭설이 내리기 시작했다. 축복해야만 할 화이트 크리스마스였다…….
<9> 그리하여 최종장.
눈이 내려 세상을 뒤덮었다. 똑바로 사고할 능력을 잊은 것처럼 멍해져 있던 광
황은 정신을 차리고 총제를 향했다. 그는 똑바로 서 있을 힘이 없는지, 난간에 기
댄 채로 무너져 내려서 폭설이 내리는 지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예쁘다……. 내가 생각한 것보다 더 예뻐…….”
“무, 무슨 짓을 한 거야!”
그녀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리에서 일어나 그의 멱살을 잡고 흔들었다. 하
지만 대답하기에는 총제의 체력이 너무 떨어져 있었던 모양이다. 대답조차 하지
못하고 정신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급한 김에 허겁지겁 응급처치를 하고 나자 5분
정도 시간이 지난 뒤였다. 실혈량이 많긴 하지만 의외로 튼튼해서 죽을 것 같지는
않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난 후 Poor Snow가 걱정된 그녀는 급하게 지구를 내
려다보았다.
그것은 총제가 마지막으로 했던 말 그대로,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흰 눈이 떨어져 쌓이고, 아직 밤이었던 대륙에 밝은 빛이 켜지고 있
었다. 바로 아래쪽, 싸움에 지쳐 잠든 질투동맹과 국제연인연맹의 아크메 방위군
도 모두 눈을 보기 위해 불을 켜고 있었다.
그렇지만 거기에는 싸움이 없었다. 그녀도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지금 내리는
눈은 질투의 혼을 갖지 못한 평범한 눈에 지나지 않는다. 프로젝트는 실패했던 걸
까? 하지만 총제는 자신만만했었다. 이 프로젝트는 절대로 실패했을 리가 없
다……. 기묘한 예감에 그녀는 몸을 떨었다.
그 때 총제가 신음소리를 냈다. 그녀는 쓰러져 있는 그에게 다가가 따귀를 갈겼
다.
“아악!”
비명을 지르며 총제가 깨어났다. 그녀는 양손으로 그의 멱살을 쥐고 들어올린
후 물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물어봐도 될까? 어째서 Poor Snow가 발동하지 않은 거
지? 뭔가 계산에 착오라도 있었던 거야?”
“나…… 난 처음부터 이럴 생각이었어……. 프로젝트는 완벽하게 성공했다구.
Poor Snow가 아니라 Pure Snow이긴 하지만…….”
총제는 가쁜 숨을 내쉬며 힘겹게 대답했다.
“무슨 뜻이야?”
“내, 내 셔츠 주머니에 보면 개요서가 있을 거야……. 놔, 놔줘, 숨이 막혀!”
그녀는 한 손으로 그를 들고, 다른 한 손으로 그의 셔츠 주머니에서 꼬깃꼬깃해
진 낡은 종이를 꺼냈다. 얼마나 됐는지, 몇 번이나 접었다 폈는지 완전히 새카매
진 종이에는 네 줄의 문장이 적혀 있었다. 그녀는 총제를 바닥에 떨구고 나서 쪽
지를 읽기 시작했다.
<Project Pure Snow>
2000년 01월 01일 : 올해 크리스마스에 눈이 오면 광황에게 고백한다.
2001년 01월 01일 : 올해 크리스마스에 눈이 오면 광황에게 고백한다.
2001년 12월 25일 : 내년 크리스마스에는 억지로 눈이 오게 해서라도 광황에게
고백할테다!
그녀는 잠시 캄캄해진 시야를 원래대로 되돌리기 위해 쉼호흡을 했다. 생각해보
니 총제가 Project Poor Snow인지 뭔지 하는 계획을 내뱉은 것은 올해 크리스마스
에는 절대로 눈이 안 올 거라는 보도가 있었던 날 저녁이었다.
뭔가 끓어오르려 하는 것을 억지로 참고 있는 그녀를 향해 바닥에 쓰러져 캑캑
거리던 총제가 입을 열었다.
“사, 상대가 광황이다보니 뭔가 멋들어진 건수를 만들지 않으면 도저히 고백할
수 없을 것 같아서 그만…….”
그녀는 웃었다. 지구관람대 위를 살폈지만 검은 보이지 않았다. 할 수 없이 주
먹을 치켜들고 총제를 향해 상냥하게 말했다.
질투동맹의 잡병으로서 용케도 살아남아 헥헥거리고 있던 용당주군은 하늘에서
붉은 눈이 떨어지는 것을 보고 잠시 경악했다. 쌍것-그러니까 커플이라는 뜻-에
대한 분노에 잠시 이성을 잃었던 그지만, 이성이 돌아온 이후에는 붉은 눈이건 어
쨌건 크리스마스에는 눈이 오는 쪽이 좋다고 생각하며 신에게 감사 기도를 올리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