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 대 의 말 씀
반민족행위처벌법 제정 제65주년 기념식 및 강연회를 아래와 같이
개최코자 하오니 바쁘시더라도 참석하시어 자리를 빛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한국독립유공자협회 회장 임 우 철
- 아 래 -
일 시 : 2013. 9. 23(월) 오전 10시 30분
장 소 : 서울시청 서소문청사 후생동 4층 강당
주 최 : 한국독립유공자협회(T.02-323-5432)
후 원 : KT, 성남시청, 광복회
찾아오시는 길
[지하철] 지하철 1, 2호선 시청역 11번, 12번 출구에서 300M
[자가용] 서울특별시 중구 덕수궁길 15 (서소문동 37)
행 사 식 순
1부 (10:30-11:20) 기념식
- 개회선언
- 국민의례
- 내빈소개
○ 기 념 사..................................한국독립유공자협회 회장 임우철
○ 축 사...................................................박원순 서울특별시 시장
○ 축 사.............................................김명수 서울특별시의회 의장
○ 축 사..............................................................국회의원 강기윤
○ 축 사..............................................................국회의원 강석훈
○ 축 사..............................................................국회의원 김을동
○ 축 사..............................................................국회의원 박영선
○ 축 사..............................................................국회의원 홍영표
○ 축 사..............................단재신채호선생기념사업회회장 김원웅
○ 축 사........................................................서대문구청장 문석진
○ 독립군가.......................................................................합창단
○ 결 의 문............................................................청년,학생 대표
○ 만세삼창............................................................원로 애국지사
# 사진촬영
2부 (11:30-12:20) 특별 강연회
강사 : 김삼웅(전 독립기념관장)
주제 : 오늘에 돌아보는 반민특위의 의미
3부 (12:30-13:30) 중식 및 기념품 증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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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 오늘] 1948년 반민특위 국회에 설치
2012년 10월 22일 (월) 경기일보 webmaster@kyeonggi.com
일제 치하에서 친일 부역자를 단죄하고 국가의 기강을 바로잡기 위한 반민특위가 1948년 10월 22일 국회에 설치돼 23일 10명의 조사위원들이 첫 위원회를 소집함으로써 정식 발족됐다. 1948년 9월 22일 국회에서 통과된 반민족행위 처벌법 제9조에 의한 특별조사위원회 구성 동의안이 발족의 근거였다. 1년간의 짧은 기간이었지만 반민특위의 활동은 혁명을 방불케하는 눈부신 것이었다. 한때의 권세를 상징했던 인물들이 속속 쇠고랑을 찼다. 박흥식(실업인), 최린(3.1운동 33인의 한사람), 노덕술(악질고등계 형사), 이광수(소설가), 최남선(학자), 배정자(이등박문 양딸), 이기용(황족). 반민특위가 처리한 사건은 무려 6백82건이었다.
ⓒ 경기일보(http://www.kyeonggi.com)
경향신문
[어제의 오늘]1949년 반민특위 습격사건
ㆍ친일파 단죄·식민지 치욕 단절 좌절
1949년 6월6일,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 사무실은 아수라장이 됐다. 오전 8시30분, 윤기병 당시 서울중부경찰서장의 지휘로 시내 각 경찰서에서 차출된 경찰관 80여명이 반민특위 청사에 들이닥쳤다. 출근길의 반민특위 조사관들에게 주먹질과 발길질이 쏟아졌다. 책상 위에 있던 친일파 관련 조사 서류들은 찢겨졌다. 일제강점기의 친일 부역자를 단죄함으로써 식민통치의 치욕스러운 과거와 단절하기 위한 반민특위의 노력은 이렇게 수포로 돌아갔다.
앞서 48년 4월8일 국회는 해방 이전 악질적 반민족행위를 처벌하기 위한 반민특위 기초특별위원회 구성을 가결했다. 해방 이후 지속적으로 제기돼온 친일파 청산의 요구가 미군정의 회의적 태도로 이뤄지지 못하다가 3년 만에 실현된 것이다. 반민특위는 그해 10월23일 발족했다. 특별재판부와 특별검찰부, 특별경찰대가 설치된 반민특위는 독자적으로 조사권·사법권·경찰권을 갖고 활동할 수 있는 모양새를 갖췄다.
구성 초기 반민특위는 활발한 활동을 벌였다. 경찰·검찰·군인 등 형사사법계 인물들을 필두로 정·관계, 종교·문화계 인물 등이 속속 검거되기 시작했다. 당시 반민특위에 체포된 인원은 총 688명이었고, 이 중 경찰 출신이 37%에 달했다. 이런 반민특위의 활동은 정부 요직에 두루 참여하고 있던 친일세력에 커다란 위협이었다. 특히 군과 경찰 등 사정기관에는 일제 치하 조선총독부를 위해 일한 인사들이 다수 참여하고 있었다.
반민특위는 이승만 정권과 친일 잔재세력의 거센 반발과 집요한 방해공작에 시달리게 된다. 반민특위 위원들에 대한 암살 시도가 이어졌고 49년 3월에는 진보적 소장파 의원 13명을 체포한 ‘남로당 국회 프락치 사건’이 터진다. 6월3일 군중 300~400명이 반민특위 사무실에 몰려와 “반민특위 내 공산당을 숙청하라”는 구호를 외치며 특별조사위원회를 습격하는 사건이 벌어지기도 한다.
이승만 대통령은 노덕술, 최연 등 자신의 심복이던 경찰 간부들이 반민특위에 연이어 체포되자, 반민특위 해체를 추진해 6월6일 청사 습격을 지시한다. 이 대통령은 6월9일 AP통신과의 인터뷰에서 반민특위 습격을 자신이 직접 지시했다고 밝힌다. 7월6일 공소시효 단축을 골자로 하는 정부의 반민특위법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하고 이에 반대한 반민특위 위원장 및 구성원이 사임하면서 반민특위 활동은 무력화된다. 그리고 한국 현대사에 친일파 청산은 ‘미완의 과제’로 남게 됐다.
<이영경 기자>
입력 : 2011-06-05 21:47:02ㅣ수정 : 2011-06-05 21:4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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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진혁 전 EBS PD. 김진혁 PD는 현재 한예종 영상원 방송영상과에서
TV 다큐·교양 연출을 가르치고 있다.
‘친일 주제 다큐’ 김진혁 EBS 피디, 결국 사표
‘나는 독립유공자의 후손…’ 돌연 제작 중단, 다른부서 발령
지난 광우병 영상 ‘17년 후’ 결방되어 정부 외압 논란 빚기도 …
교육방송(EBS) <다큐프라임> 홈페이지.
‘나는 독립유공자의 후손…’ 돌연 제작 중단, 다른부서 발령
지난 광우병 영상 ‘17년 후’ 결방되어 정부 외압 논란 빚기도 …
<교육방송>(EBS) <다큐프라임>에서 ‘친일’ 관련 프로그램을 제작하다 사쪽과 갈등을 빚은 김진혁 피디(PD)가 결국 회사를 떠나게 됐다.
김진혁 피디는 27일 트위터를 통해 “프로그램을 제대로 마치지 못하고 ebs를 떠나게 돼서 반민특위 후손분들께 너무 죄송한 마음입니다. 함께 마음을 모아준 ebs 선후배동료분들에게 역시 죄송한 마음이고요”라는 글을 남겼다. <교육방송>은 ‘나는 독립유공자의 후손입니다’의 제작을 중단시킨 뒤, 지난 주말 김진혁 피디가 제출한 사표를 26일 수리한 것으로 알려졌다.
김진혁 피디는 해방 뒤 친일파를 조사한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의 활동 등을 담은 ‘나는 독립유공자 후손입니다’ 편을 제작하다 지난 4월8일 돌연 다른 부서인 수학교육팀으로 발령받은 바 있다. ‘나는 독립유공자 후손입니다’는 2011년 <교육방송>의 교육다큐위원회에서 공식 절차를 거쳐 제작에 들어가 올해 8월 방영 예정인 프로그램이었다. 김진혁 피디의 전출로 이 프로그램의 제작은 중단됐다. 교육방송 노조는 ‘친일이라는 주제에 약점이 있는 현 정권의 눈치를 본 것이 아니냐’며 발령이 부당하다고 항의했지만, 회사 쪽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김진혁 피디는 지난 2008년에도 <교육방송> 간판 다큐 프로그램이었던 ‘지식채널e’ 피디로 일하며 광우병에 대한 5분짜리 영상 ‘17년 후’를 연출했다가 제작 부서가 아닌 부서로 발령을 받은 바 있다. ‘광우병 논란’으로 촛불시위가 한창이던 당시, ‘17년 후’는 한차례 결방되며 정부의 외압 논란을 빚기도 했다. 김진혁 피디는 이후 3년 뒤 제작부서로 다시 돌아오며, 한 인터뷰에서 “부역 언론인, 당신을 평가하겠다”는 말을 남긴 바 있다. 하지만 그는 결국 반민특위 관련 다큐 제작을 끝내지 못하고 자리를 옮기게 됐다. 김진혁 피디는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방송영상과 교수 모집 공채에 지원해 최근 임용이 확정된 것으로 알려졌다.
이완 기자 wani@hani.co.kr
기사등록 : 2013-06-28 오전 11:32:06 기사수정 : 2013-06-28 오전 11:38:22
ⓒ 한겨레 (http://www.hani.co.kr)
첫댓글 존경받아 마땅한 언론인도 있네요!^^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