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에세이 / 17>
가족은 상처와 치유의 공간이다
이승원 감독의 <세자매>
김 문 홍
흔들리는 카메라, 세 자매의 지리멸렬한 일상
가족은 혈연관계로 맺어진 구조라서 단단하게 보일지 모르지만, 실상 그 속내를 들여다보면 불온하고 위험할 수 있다. 가까운 관계에서 생긴 후유증은 그 상처가 깊어 좀체 풀리기 어렵다. 타인과의 관계에서 생긴 좋지 못한 기억과 상처는 그 대상을 멀리하거나 잊어버리면 상처가 쉽게 아물 수 있다. 그러나 혈연관계로 맺어진 가족은 쉽게 잊어버리거나 멀리 할 수 없는 존재라 더 큰 문제이다.
명절이면 멀리 떠나 있는 가족 구성원들이 한 자리에 모인다. 그 구성원들은 쉽게 자신의 속내를 내보이지도 않지만, 저마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 같은 응어리를 지닌 채 가식적인 웃음을 지어 보인다. 그것도 좋지 못한 기억이 있거나 상처를 지니고 있다면 불안하고 위험하다. 어느 누구라도 그 기억과 상처를 건드리면 금세 터져 걷잡을 수 없는 난장판으로 만들어 버릴 수 있다. 타인과의 기억과 상처는 안 보면 아물게 되는데, 가족은 서로 얼굴을 보기만 하면 아물어 가던 상처도 덧나 버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족 관계는 늘 문학 작품이나 영화나 드라마의 소재가 된다. 그 속에는 보이지 않는 갈등이나 대립이 도사리고 있어, 서사 전개의 강력한 추동력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이승원 감독의 작품 『세 자매』(2021, 115분) 역시 가족의 상처와 치유에 관한 영화이다. 이승원 감독은 2004년 영화 『모순』으로 데뷔한 이후, 2017년 『해피뻐스데이』에서 감독, 2017년 『소통과 거짓말』에사 감독과 각본, 2020년 『팡파레』에서 연기자, 그리고 2021년 『세자매』로 이름을 널리 알리고 주목을 받았다. 이 작품은 전주국제영화제와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먼저 선을 보인 다음에 일반 관객에게 선을 보였다.
영화의 오프닝 시퀀스에서는 세 자매의 지리멸렬한 일상의 한 부분들이 흔들리는 카메라 서로 병치되어 소개된다. 교회 성가대 지휘를 맡고 있는 둘째 미연(문소리 분), 어둑한 꽃집 안의 어둑한 공간 속에서 주눅 든 표정으로 손님을 맞고 있는 첫째 희숙(김선영 분), 그리고 낮술에 취한 채 컴퓨터 화면을 신경질적으로 들여다보고 있는 셋째 미옥(장윤주 분)의 일상의 편린들이 불안하게 펼쳐 보인다. 그 중에서도 둘째 미연은 가장 평온한 일상처럼 보이지만 뭔가 가식적으로 보이고, 첫째 희숙은 표정이나 치림새로 보아 피해의식에 사로잡혀 있는 것처럼 보이고, 흐트러진 차림세와 노랑머리, 그리고 낮술에 취해 있는 모습이 다소 반항적으로 비친다.
이런 세 자매의 일상의 편린을 카메라는 다소 흔들리는 관찰자의 시점으로 보여주고 있다. 금세 뭔가 심상찮아 보이며 관객을 심상을 불안하게 건드리기 시작한다. 셋째 미옥이 둘째인 미연에게 전화를 걸어 혀 꼬부라진 소리로 과거의 기억을 건드린다. 두 자매가 밤중에 맨발로 어딘가를 향해 허겁지겁 가고 있었는데, 왜 그랬는지 언니에게 확인하는 것으로 보아 뭔가 가족과의 관계 속에서 불안하고 불편한 기억이 있지 않았나 하는 궁금중을 유발시킨다.
이 영화는 러닝타임 거의 대부분을 세 자매의 지리멸렬하고 가식적인 현재에 초점을 맞추어 보여준다. 첫째 희숙과 막내 미옥의 흔들리는 가족의 지리멸렬한 풍경은 금세 드러나 보이지만, 다소 가식적이고 위선적인 속내는 양파 껍질이 벗겨지듯이 하나씩 드러나기 시작한다. 영화 후반부에 친정아버지의 생신에 모든 가족이 모이게 되면서, 세 자매의; 지리멸렬한 삶의 흔들림에 대한 원인이 드러나고, 지금까지 가슴속에 응어리로 남아 있던 상처의 기억들이 와르르 쏟아져 나온다. 세 자매의 기억 속에 또아리를 틀고 있던 상처의 기억은 아버지의 폭력임이 드러나고, 세 자매는 바닷가를 거닐며 비로소 음습하고 불안했던 어두운 터널을 빠져나오며 환하게 웃는다.
상처의 그늘은 깊고 음험하다
누구나 작고 큰 상처의 기억을 조금씩 갖고 살아간다. 이 영화 속 세 자매의 상처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그들의 기억은 깊고 넓게 그 그늘을 드리우고 있다. 이 영화는 세 자매 중 가장 평온하게 살아가는 둘째 미연의 현재적 삶의 이중성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 있다. 첫째와 막내는 과거의 불온한 기억 속의 상처를 쉽게 드러내지만, 둘째는 짐짓 불온한 과거의 기억을 좀체 드러내지 않는다.
둘째 미연은 중산층으로 비교적 평온하게 살아가고 있다. 기억 속을 뚫고 나오려는 상처를 짐짓 감춘 채 가식적인 그럴듯함을 보여준다. 오히려 그 기억 속의 상처를 종교라는 틀 속에 감추고 위로받으려 하고 있다. 식사 전에는 반드시 기도를 올려야 하고, 사회관계 속에서도 어그러짐이 보이면 가식적인 비일상적 행동으로 포장하려고만 한다. 드라마를 쓰고 있는 막내 미옥은 불안하고 짜증날 때마다 미연에게 전화를 걸어, 감추고 싶어 하는 과거의 상처를 드러내려 안간힘을 쓴다. 교사인 남편은 미연의 그 광적인 종교 탐닉과 가식적인 삶에 환멸을 느끼고, 교회 성가대 솔로 파트인 여자와 몰래 바람을 피우게 된다.
첫째와 막내의 과거 기억 속의 상처는 다소 외형적이다. 미연의 상처는 그것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안간힘으로 드러나고 있지만, 첫째와 막내의 그늘은 감추기보다는 밖으로 터뜨린다. 막내는 가사는 팽개쳐 두고 늘 술에 젖어 살며 반항적인 기질로 상처의 기억을 터뜨린다. 첫째는 암에 걸려 있으면서도 그것을 감추고 반항적인 딸의 행동이 어긋나 자신처럼 상처를 입을까 늘 전전긍긍한다. 그들 둘의 상처에 대한 대응 태도는 조금 차이가 있기는 하다. 막내는 폭력에 대한 상처의 기억을 폭력과 술, 그리고 가사에 대한 무관심이라는 공격적인 기제로 대응한다. 첫째는 폭력의 상처에 의한 주눅 들림과 딸의 일탈된 행동에 대한 조바심이라는 운명적 소극적 방어기제로 일관하고 있다. 이들 두 사람이 상처의 그늘 속에서 자포자기로 살아가고 있다면, 둘째 미연은 상처의 기억으로부터 벗어나 그것을 감추려 하기에 실상 더 위험하다.
세 자매 중 첫째인 희숙은 아래 동생들과 이름이 다르다. 둘째인 미연과 막내인 미옥은 ‘미’자 돌림으로 이름이 지어져 있는데, 첫째인 희숙은 아버지의 외도로 태어났기 때문에 동생들과는 배가 다르다. 아버지의 폭력은 어머니에게서 자식들로 옮겨가게 되는데, 늘 그 폭력을 도맡아 떠안는 것은 첫째인 희숙과 남동생뿐이다. 희숙이 항상 주눅 들어 있고 대인관계를 기피하는 운명적인 수동성은, 항상 폭력의 중심에 놓여 있었기 때문에 생긴 일종의 자포자기일지도 모른다.
이 영화의 후반부는 위기와 절정으로 치닫는다. 아버지의 폭력으로 거의 폐인이 되다시피 한 아들이 아버지 곁으로 걸어가 오줌을 누면서 폭발한다. 남동생의 일탈적인 행동은 지금까지 가식적이고 위선적인 삶을 살고 있던 둘째 미연의 들끓는 속내에 불을 당기게 된다. 미연은 아버지에게 자신들에게 사과하라고 다그치며 몰아붙인다. 결국 아버지가 유리창에 자신의 이마를 찧으며 피를 흘리는 것으로 일단락되지만, 지금까지 세 자매의 흔들리는 지리멸렬한 삶에는 미치지 못하는 아쉬움을 남긴다.
이 영화는 세 자매의 흔들리는 현재의 삶에 서사의 대부분을 할애하고 있지만, 그 지리멸렬한 삶을 있게 한 폭력의 근원에는 근접하지 못하고 끝나 버리는 도식적인 구조가 아쉽다. 과거 상처의 기억이 얼마나 깊었는가에 대한 심리적인 추이과정에는 다소 소홀하다는 점이 그렇다. 폭력에 대한 상처의 그늘이 깊고 음습해 세 자매의 현재적 삶이 그럴 수밖에 없다는 도식적인 인과관계가 다소 불편하다는 점이다. 폭력의 실상에는 소홀하고 그 결과에만 집착하고 있다는 점이 다소 황당하다. 어떻게 보면 가부장적 남성 권력이 세 자매의 삶을 망가뜨리고 말았다는 것으로, 그러한 폭력을 야기한 남성성을 몰아붙이는 흑백론의 함정에 빠트릴 위험성이 크다.
폭력의 그늘은 영혼을 잠식한다
이 영화는 타이틀 롤인 세 자매의 연기력이 서사 전개의 추동력이 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첫째인 희숙 역의 김선영은 감독인 이승원의 아내로, 대인관계의 서투름과 주눅 들린 태도를 특유의 눈빛을 비롯한 표정연기로 승부를 걸고 있다. 그리고 막내인 장윤주는 모델 출신의 연기자로 거칠고 반항적인 외형적 연기는 그런대로 소화하고 있지만, 폭력의 그늘 속에 도사린 황량한 내면의 풍경을 드러내는 마임으로서서늘함의 표현은 다소 아쉽다. 그러나 둘째 미연 역을 맡고 있는 문소리의 연기는 압권으로 서사의 추동력이 되고 있다.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내면의 응축된 갈등을 섬세한 표정연기와 섬세한 대사의 결을 통해 잘 전달해 주고 있다. 이 영화에서 문소리의 연기는 서사를 밀어붙이는 하나의 추동력이 되고 있다.
이 영화는 극적 서사가 다소 평면적이다. 세 자매의 지리멸렬한 일상이 교차 편집되어 진행되면서 후반부의 클라이맥스로 치닫기 때문에 자칫 지루해지기 쉽다. 그것도 세 자매가 앙상블을 이루어 장면으로 구성됨이 없이 개별적으로 연기하고 있기 때문에 화학 작용이 일어나지 않는다. 그나마 미연 역의 문소리의 연기가 생동감이 있고 서사의 추진력이 되어 평면적인 구성에 활력을 불어넣고 있다.
관객은 후반부의 클라이맥스가 되기 전까지는 내내 불편한 감정으로 서사 전개를 지켜보게 된다. 가족으로 인한 상처의 기억이 있는 이들은 극중 인물에 동화되어 기억을 반추할 것이고, 상처가 없는 이들은 동화보다는 이화 작용을 일으켜 서사를 관찰자적인 시각으로 지켜볼 것이다. 세 자매의 지리멸렬한 일상이 후반부 클라이맥스의 한바탕 소동으로 평온한 일상으로 회복되기에는 상처가 너무 깊다. 그런데도 이 영화는 세 자매가 바닷가를 거니는 엔딩 시퀀스로 안이하게 상처의 치유를 은유하고 있는 것도 다소 아쉽다.
가족으로 인한 상처의 기억은 가족의 화해와 용서로 풀어야 한다는 것이 이 영화의 메시지이다. 가족 구성원은 가깝고도 먼 존재이다. 갈등과 대립이 없으면 아주 가깝지만, 서로에게 상처를 주게 되면 드리운 그늘이 너무 깊고 음습해 쉽게 해결되지 않는다. 서로가 서로에게 입힌 상처는 영혼을 잠식하여, 회복이 된다 하더라도 그 상처의 흔적은 화인처럼 남아 있게 된다.
가깝고 친밀한 존재일수록 예의를 지켜야 한다. 친밀성이 강할수록 깨지기 쉽다. 한 번 상처를 입은 영혼은 원상회복이 어렵다. 육체의 상처는 시간으로 치유할 수 있지만, 영혼의 상처는 치명적인 기억을 뚜렷하게 남기기 때문에 치유가 어렵다. 영화 속 세 자매는 그 이후 어떻게 되었을까? 그들이 행복해지기를 빌어본다. 그래야 우리도 행복해질 수 있을 것이다.
- 계간 <문장> 2020 년 12월호
첫댓글 좋은 평 잘 보았습니다.
<나를 버리고 떠난 남편의 아이라 싫었다>
최근 아이를 홀로 방치해 죽게 한
친모 이야기가 뉴스에 나옵니다.
이 영화에서 첫딸은 외도로 데려온 자식이네요.
그런데 아버지는 왜 모든 자식을 폭력으로 대했을까요?
아버지의 폭력성에도 이유가 있어야 합니다.
모든 예술 장르는
균형감을 유지하는 게
동화되지 못하는 독자층까지 흡수할 수 있습니다.
김문홍 선생님! 늘 건강하십시오.
영화 한 편을 보는 리드가 되어 주셨어 감사합니다^^
설들력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