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의 방향전환: 역(易)과 자기비허(自己脾虛)
필리 2,5-11; 루카 14,15-24 / 연중 제31주간 화요일; 2024.11.5.
오늘날 우리 교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은 어디일까요? 우리 신앙인들이 지향해야 할 바는 또 어디인가요? 오늘의 복음과 독서 말씀에서 찾아봅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하느님 나라를 혼인 잔치에 비유하신 이야기입니다. 이 비유가 나오게 된 맥락을 살펴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오래 전부터 하느님 나라를 기다려왔지만 정작 예수님께서 선포하시던 하느님 나라의 현실에 대해서는 마치 눈뜬 장님처럼 알아보지 못하는 기막힌 상황에서, 맥락과 상관없이 엉뚱한 질문을 받으신 예수님께서 다시 당신의 복음선포 상황에로 초점을 맞추어 답변하신 우문현답의 상황이 펼쳐지고 있습니다. 가난한 이들을 초대하여 대접해야 하느님 나라에서 보답을 받을 것이며 그 잔치에서는 끝자리에 앉으라고 가르치셨는데, “하느님의 나라에서 음식을 먹게 될 사람은 행복하겠지요?”라고 묻는 엉뚱한 질문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가 좋은지는 알아도 정작 그 나라에 초대를 받았어도 거절하고 있는 상황에 빗대어 혼인 잔치의 비유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동족으로부터 외면당하신 슬픔이 배어 있는 이 비유는 유다교와 이스라엘 민족이 스스로 버림받기를 자초한 상황과 하느님을 알지 못하는 다른 민족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할 선교적 전망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대부분의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의 복음선포 행적을 목격하고도 곡해하며 적대적으로 돌아섰지만 그분께 호의를 지니고 있어 식사 자리에 초대하기까지 했던 소수의 바리사이들도 그분이 처한 상황이나 그분 말씀의 맥락은 물론 자신들의 동료인 바리사이들이 그분께 저지른 적대적 언행의 무례함에 대해서는 도무지 파악을 하지 못하고 있었으므로, 예수님께서는 혼인 잔치의 비유 안에서 그 바리사이들을 세상 일에 마음을 빼앗기고 있어서 잔치에 올 수 없다고 핑계 대는 인간형으로 빗대어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바리사이들에 의해서 율법상 죄인으로 낙인 찍혔던 이들이 그들 대신에 초대받고 있습니다. 그들을 일컬어 비유에서는 ‘가난하고 눈 멀고 다리 저는 이들’이라고 불렀습니다. 하느님 나라를 상징하는 혼인 잔치가 부유하고 건강하며 유식한 이들의 거절로 말미암아 가난하고 장애를 지니고 있으며 무식한 이들을 위해 베풀어지게 되었다는 그분의 말씀은, 교회의 선교 방향에 있어서 일종의 방향전환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989년에 서울에서 열렸던 세계성체대회 이후 ‘그리스도 우리의 길’이라는 사목교서가 발표되고 서울대교구를 비롯한 전국 각 교구에서는 소공동체 운동이 전개되었습니다. 이 운동의 이름이 된 ‘소공동체’는 1974년에 열렸던 주교대의원회의에서 논의한 복음선교라는 주제에서 나온 결론으로서, 1975년에 바오로 6세 교황은 ‘현대의 복음선교’라는 사도적 권고로 수용한 바 있고, 이 권고에서 ‘기초 공동체’를 우선적인 사목대책으로 제시하였습니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라틴 아메리카의 가난한 신자들이 실천하여 퍼뜨린 이 기초 공동체를 한국 가톨릭교회에서는 이념적 편향성을 제거한다는 명분으로 보다 더 중산층 신자들이 받아들이기 쉽게 ‘소공동체’로 부드럽게 완화시켜 전국적인 운동으로 십여 년 이상 전개하였습니다. 그 결과는 80%의 영세자들의 냉담 사태와 코로나 19 바이러스 사태 이후에는 주일미사에 나오던 20%의 신자들마저 반토막나는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러니 한국 가톨릭교회가 전개했던 소공동체 운동은 소기의 성과를 올리지 못한 것으로 보입니다. 신자 관리도 실패했고, 가난한 이들의 복음화는 시도하지도 못했으며, 신앙의 활성화와 교회 쇄신도 이루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한국 가톨릭교회의 현실은 오늘 복음의 비유 상황을 빼어 닮은 모습입니다. 밭과 겨릿소와 장가 등 온갖 현실적인 핑계는 오늘날 먹고 살기 바쁘다는 핑계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우리 한국 가톨릭교회가 사목적 역량을 집중해 온 중산층 이데올로기의 냉엄하고도 참담한 현실입니다. 오늘 비유에서 예수님께서 암시해 주신 결론적 권고가 다시 한 번 절실히 요청되는 상황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미 1984년 ‘한국 천주교 선교 2백주년 기념 전국 사목회의’에서 제시된 바 있는 사목의안에 나와 있던 제안들이 주목받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예수님의 결론적 권고를 따라서 초대 교회 신자들이 토로했던 신앙고백을 필리피 신자들에게 들려주고 있습니다. 이른바 ‘자기비허(自己備虛, kenosis)’의 그리스도론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지니셨던 바로 그 마음을 간직하라는 것이지요. 하느님이셨지만 당신 자신을 비우시고 낮추시어 가난한 사람처럼 되시고 또 그렇게 가난한 사람으로서 가난한 이들에게 다가가셨던 바로 그 예수님의 마음을 본받으라는 것입니다. 그 낮추심이 이미 가난한 이들이 당하고 있는 십자가의 박해처럼 똑같이 십자가를 짊어지시느라 순종하셨지만, 하느님께서는 그런 그분을 부활시키시어 드높이 올리셨음을 잊지 말라고 사도 바오로는 강조하였습니다.
중국 고전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경전인 주역(周易)은 주(周)나라 시대에 역(易)에 대해 성찰해 놓은 경전입니다. 여기서 ‘역’(易)이란 자연계와 인간사회에서 나타나는 온갖 종류의 변화를 뜻하고, 이에 대한 고찰로서의 ‘주역’은 이를 관찰한 결과 나름대로 일정한 변화의 규칙과 질서를 찾아보고자 한 지적 산물입니다. 이를 모르는 혹자들은 알 수 없는 미래를 점치는 수단으로 삼기도 하지만, 그런 천박하고 상업적인 관심에 비해서는 훨씬 진지한 경전입니다. 조선의 유림 선비들 안에서도 주역은 의식과 사상의 변증법적 사유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세상과 인생의 이치를 내다보려고 할 때 반드시 참조해야 하는 고전이었습니다. 우리 교회의 상황은 공의회의 교회 쇄신 기치에도 불구하고 좀처럼 변하려 들지 않는 세계 교회의 흐름에 비추어 편승하는 듯 보입니다. 워낙 서구 교회가 침체되어 있고, 아시아 교회 역시 신앙의 활력이 두드러지지 않는 형편에서 상대적으로 안정되어 있는 처지에 안주하려 드는 것 같기 때문입니다. 박해 시대 당시에 치명하기를 불사하며 신앙을 증거했던 우리 신앙 선조들의 기개에 비하면 훨씬 못 미치는 실정이 아닐 수 없습니다. 주역의 가르침에 비추어 보더라도 이제는 떨쳐 일어나 민족 복음화를 위해 힘써야 할 때입니다.
교우 여러분!
오늘 독서에서 우리에게 계시된 신앙진리는 자기비허의 인생론을 들려줍니다. 낮추고 비워서 서로에게 봉사해야 하는 이치야말로 처세의 진리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세상이 변화무쌍하게 돌아가고, 개인의 인생 역시 그에 묻혀 돌아가도 자기비허 이상의 기준은 없습니다. 박해가 종식되고 신앙과 선교의 자유가 허용된 이후 비슷비슷한 범주에서 돌고 도는 각 교구들의 사목정책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와 믿는 이들이 지녀야 할 기준은 자기비허이고, 섬겨야 할 대상은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이며, 중산층은 이를 위해 껴안고 나서야 할 중추입니다. 우리 교회와 신자들이 지향해야 할 선교의 방향이 이렇게 전환되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