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에는 기도하게 하소서. 낙엽들이 지는 때를 기다려 내게 주신 겸허한 모국어로 나를 채우소서.
가을에는 사랑하게 하소서. 오직 한 사람을 택하게 하소서. 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위하여 이 비옥한 시간을 가꾸게 하소서.
가을에는 호올로 있게 하소서. 나의 영혼 굽이치는 바다와 백합의 골짜기를 지나 마른 나뭇가지 위에 다다른 까마귀 같이
가을밤 / 방정환
착한 아기 잠 잘 자는 베갯머리에 어머님이 혼자 앉아 꿰매는 바지 꿰매어도 꿰매어도 밤은 안 깊어
기러기떼 날아간 뒤 잠든 하늘에 둥근 달님 혼자 떠서 젖은 얼굴로 비치어도 비치어도 밤은 안 깊어.
지나가던 소낙비가 적신 하늘에 집을 잃은 부엉이가 혼자 앉아서 부엉부엉 울으니까 밤이 깊었네
가을 사랑 – 도종환
당신을 사랑할 때의 내 마음은 가을 햇살을 사랑할 때와 같습니다
당신을 사랑하였기 때문에 나의 마음은 바람 부는 저녁 숲이었으나 이제 나는 은은한 억새 하나로 있을 수 있습니다
당신을 사랑할 때의 내 마음은 눈부시지 않은 갈꽃 한 송이를 편안히 바라볼 때와 같습니다
당신을 사랑할 수 없었기 때문에 내가 끝없이 무너지는 어둠 속에 있었지만 이제는 조용히 다시 만나게 될 아침을 생각하며 저물 수 있습니다
지금 당신을 사랑하는 내 마음은 가을 햇살을 사랑하는 잔잔한 넉넉함입니다
가을 햇빛 아래 / 나태주
우리는 무엇을 기억하는가 좋았던 것 잠시라도 아주 잠시만이라도
우리는 무엇을 사랑하는가 아주 예쁜 것 작고 보잘 것 없을지라도 예쁘고 귀엽고 상냥한 것
결국은 사랑을 기억하고 기쁨을 기억한다 사랑을 사랑한다
가을 하늘 아래 내과 의사의 안경알처럼 투명하고 선한 가을 햇빛 아래
내가 너를 결국은 네가 나를
가을이 왔다 / 류근
가을이 왔다 뒤꿈치를 든 소녀처럼 왔다
하루는 내가 지붕 위에서 아직 붉게 달아오른 대못을 박고 있을 때 길 건너 은행나무에서 고요히 숨을 거두는 몇 잎의 발자국들을 보았다 사람들은 황급히 길에 오르고 아직 바람에 들지 못한 열매들은 지구에 집중된 중력들을 끌어 모으기 시작했다 우주의 가을이 지상에 다 모였으므로 내 흩어진 잔뼈들도 홀연 귀가를 생각했을까 문을 열고 저녁을 바라보면 갑자기 불안해져서 어느 등불 아래로든 호명되고 싶었다 이마가 붉어진 여자를 한 번 바라보고 어떤 언어도 베풀지 않는 것은 가을이 이제 막 시작됐다는 뜻 안경을 벗고 정류장에서 조금 기다리는 일이 그런대로 스스로에게 납득이 된다는 뜻 나는 식탁에서 검은 옛날의 소설을 다 읽고 또 옛날의 사람을 생각하고 오늘의 불안과 미래로 가는 단념 같은 것을 생각한다 가을이 내게서 데려갈 것들을 생각한다 가을이 왔다 처음 담을 넘은 심장처럼 덜컹거리며 빠르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