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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와 일본의 역사에 있어서 가장 비밀스럽고 이해하기 힘든 역사가 바로 백제입니다. 백제는 지난 천 수백 년간 베일에 쌓여있는 수수께끼의 나라입니다. 백제의 비밀을 풀면 일본의 비밀이 풀리고, 일본의 비밀이 풀리면 삼국의 역사의 비밀이 풀리게 됩니다. 백제를 푸는 문제는 삼국사기나 중국 25사로는 풀 수 없습니다. 오로지 광개토태왕 비문에 그 열쇠가 있습니다. 부록으로 일본서기를 참고로 하면 그 비밀을 풀 수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삼국사기「한반도와 백제본기」에는 신하가 왕에게 고하기를 ①“동으로는 낙랑이 있고 북으로는 말갈이 있어 자주 강토를 침략합니다”. 또한 ②“어제 나가 한수의 남쪽을 이리저리 다녀보니 토지가 기름져서 마땅히 그 곳에 도읍을 정하셔서 길이 안전한 계책을 도모해야 하겠습니다.“라고 적혀 있습니다. 그런데 ①의 말은 백제가 요동에 있어야 성립하는 말이고 ②는 백제가 반도에 있어야 성립하는 말입니다.
그래서 이 기록은 2가지 내용을 짜깁기한 내용입니다. 즉 삼국사기 기록이 정확한 게 아니고 짜깁기에 기년조작에 제멋대로 라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면 백제의 미스터리를 풀 수 없습니다. 먼저 온조왕이야기는 역사적 사실이 아닙니다. 설화입니다. 설화를 바탕으로 이야기를 전개하니 앞뒤가 안맞고 내용도 안맞습니다.
이와 같이 『삼국사기』에 나타난 고구려·백제·신라 등의 삼국 기록들은 도무지 앞뒤가 맞지를 않고 사실과는 다른 부분이 많습니다. 그래서 학자들은 백제의 경우, 근초고왕(346~375) 이전까지의 내용들이 뒤죽박죽되어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근초고왕의 경우에도 역사가 20여 년이 도망가고 없습니다. 즉 『삼국사기』의 백제 본기를 보면 근초고왕은 왕 2년 기록이 있고 바로 왕 21년이 나타납니다. 즉 19년이 어디로 가버린 것이죠. 재미있는 것은 이 때 왜왕이 신라에 결혼을 요청했다는 기록이 도처에 나옵니다. 이 시기의 백제의 역사는 기록에 없습니다.
그런데 이 시기 일본에서는 매우 활발한 정복전쟁이 시작됩니다. 즉 4세기에서 7세기 초까지의 시대를 고고학상으로는 고분시대(古墳時代)라 부르고, 문헌학상으로는 야마토(大和) 시대라고 하는데, 이 시대에는 이상하게도 세토나이까이(瀨戶內海) 내의 각 지역에 고분이 출현하고 그것은 이후 전국적 현상으로 나타납니다. 이전과는 판이하게 다릅니다.
구태, 대방백제의 시조가 되다
백제라는 말이 어디에서 나왔는지에 대해서는 모두가 공감할 만한 견해는 없는 것 같습니다. 백제(百濟)라는 말의 명칭은 부여와 같은 의미로 '태양이 비치는 곳'이라는 것입니다. 이 명칭은 부여의 시조인 동명왕(東明王)의 의미와 같죠. 즉 '동명'이란 '동쪽의 밝은 나라'라는 뜻이니까요. 이는 일본(日本)이란 말과도 같습니다. 해뜨는 나라라는 뜻이죠.
당나라 초기(太宗~高宗)에 우리가 일반적으로 25사라고 부르는 중국의 정사(正史)들이 대거 편찬되는데 이 때 나온 책들이 『양서(梁書)』『주서(周書)』『수서(隋書)』『남사(南史)』『북사(北史)』등입니다. 이들 가운데서 백제의 건국과 관련된 장소를 기록한 것은 『수서』『북사』입니다. 특히 『북사』의 기록이 비교적 그 시대에 가깝고 여러 사서의 내용을 좀 더 상세하게 결집하고 있기 때문에 초기 백제의 실상을 파악하는데 도움이 되리라고 봅니다.『북사(北史)』에는 백제의 건국을 다음과 같이 애기합니다.
"동명의 후손에 구태(仇台)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어질고 신의가 깊어 따르는 사람들이 많아 대방(帶方) 땅에 나라를 세우고 공손도(公孫度)의 딸을 아내로 얻어 동이들 가운데 큰 세력을 떨치게 되었다. 처음에 백(百) 집의 사람을 거느리고 강을 건넌[濟] 까닭에 백제(百濟)라고 한다. 동쪽에는 신라와 고구려가 있고 서쪽에는 바다가 있다(『북사(北史)』94권 「백제」)."
이 기록에서는 백제가 구태에 의해 건국된 것으로 나타납니다. 그런데 이 시기는 서기 2세기말~3세기 초기인데 말이죠. 이 기록은 『삼국사기(三國史記)』의 전체 내용과는 좀 다릅니다.『삼국사기』는 백제의 건국 시기를 BC18년이라고 썼습니다. 그리고 위의 내용에서 특이한 인물이 나타납니다. 공손도(公孫度 : ? ~ 204)는 나관중『삼국지』에 나오는 공손강(公孫康)의 아버지요, 공손연(公孫淵 : ?~238)의 할아버지인 사람입니다. 공손도의 아버지는 공손연(公孫延)이므로 공손도의 입장에서 보면 자기 아버지와 손자의 이름이 많이 유사합니다.
즉 기록대로라면 구태는 공손강과는 처남-매부 사이입니다. 공손강은 잘 아시다시피 요동반도를 당시 중국의 중앙정부로부터 사실상 분리하여 독립적으로 지배한 사람입니다. 이것이 바로 연(燕)나라지요. 이 연나라는 순수한 의미에서 한족(漢族) 정권이라고 보기는 어려우나 일반적으로 공손씨를 한족(漢族) 계열로 보고 있으므로 이 논의는 다음 기회로 미루겠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삼국사기』에는 납득하기 힘든 기록이 있습니다. "(태조대왕 69년 : 121년) 왕이 마한과 예맥의 군사를 거느리고 현도성을 포위하자 부여왕의 아들 위구태(尉仇台)가 군사 2만을 이끌고 한나라 군대와 연합하여 고구려가 대패하였다(『三國史記』「高句麗本紀」大祖大王 )." 이 때 위구태라는 분이 공손도의 따님과 결혼한 사람처럼 보이기도 하지요? 그렇다면 공손도(公孫度)가 구태의 장인(丈人)이라는 것은 조금 문제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위구태가 활약한 시기(120~130년 전후)를 고려하면 공손도의 사망연도(204)와는 맞지 않죠.
위구태의 장인은 공손도가 아니라 아마 공손도의 아버지나 할아버지가 될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삼국지』에서 공손도의 아버지는 공손연(公孫延)인데 세력가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습니다. 공손연(公孫延)은 어떤 일로 연루되어 도망자의 신세였습니다. 따라서 공손도라는 기록은 분명히 잘못되었고 구태왕의 장인은 공손연(公孫淵 : ?~238) 이라고 봐야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위구태에게 공손연(公孫淵 : ?~238)이 딸을 주었다는 말이 없군요. 그러면 다시 미궁에 빠집니다.
그런데 공손도가 요동태수가 되는 시기는 동탁(董卓 : ?~192)의 집권 시기입니다. 시기적으로 보면 190년 전후이지요. 이후 공손도(公孫度)는 요동반도를 장악합니다. 『삼국지』의 영웅이자 위(魏)나라 무제(武帝) 조조(曹操)는 그를 무위장군(武威將軍)에 임명합니다. 그런데 요동반도는 중국과 너무 떨어져 있기 때문에 사실상 독립정부에 가까운 상태였습니다.
공손도는 이 위구태와 함께 요동에서 큰 위세를 떨치게 됩니다. 『삼국지』에 따르면 공손도는 동으로는 고구려를 치고 서로는 오환을 공격하여 그 위세가 밖으로 뻗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북사(北史)』에서는 당시 구태의 위세를 동이들 가운데 큰 세력을 떨쳤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190년경에 이르러 공손도는 “중원의 한나라의 운명이 끝나려 하므로 나는 여러분들과 함께 왕업을 취하기로 결정하였소(『三國志』「魏書」公孫度傳)."라고 합니다. 즉 중원을 정벌하여 새로운 왕조를 세우겠다는 결심을 한 것이죠. 이때가 동탁의 집권시기입니다.
이제 위구태 집안과 그 후손들 즉 남부여(南夫餘), 또는 요동부여(遼東夫餘) 또는 대방백제는 단순히 부여의 분국 수준을 넘어서 공손도와 함께 중원 땅을 정벌할 꿈을 꾸게 됩니다. 『삼국지』에 따르면 당시 위구태의 후손 가운데 권력자는 울구태(蔚仇台)라고 합니다. 부여왕의 계보가 매우 혼란스럽고 실체를 알기 어렵지만 『삼국지』(부여전)나 『후한서』(부여전), 『삼국사기』(고구려본기)를 토대로 보면 부여왕은 위구태(尉仇台) - 부태(夫台) - 울구태(蔚仇台) 등의 순서로 왕위를 승계한 듯이 보입니다. 이름들이 비슷하여 매우 혼란스럽지요. 특히 울(蔚)이나 위(尉)는 중국식으로 하면 발음도 같습니다.
『후한서』(부여전)에는 후한(後漢) 헌제(獻帝 : 190~219) 때 부여왕이 요동에 속하기를 요구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기록은 그대로 『삼국지』(부여전)에 나타납니다. "부여왕 울구태는 다시 요동군에 복속되었고 당시 구려(고구려)와 선비가 강성했는데 공손도는 부여가 두 적 가운데 위치하므로 종실의 딸을 울구태에게 시집보냈다(『三國志』「魏書」東夷傳)."
결국 백제의 시조라는 분이 바로 부여왕 울구태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백제의 시조가 부여왕이라는 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백제의 시조가 부여의 현직 왕이라니? 현직 왕이 새로운 나라를 건설할 이유가 있을 리 있습니까? 부여의 역사는 어떤 의미에서 분국을 만들어 가는 역사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북사(北史)』에서 "동명의 후손에 위구태(仇台)라는 사람이 있었는데"라는 말은 울구태(蔚仇台)를 의미하겠지만 "대방(帶方) 땅에 나라를 세우고" 라는 부분은 공손도와 구태(仇台)의 합작품이며 "공손도(公孫度)의 딸을 아내로 얻어 동이들 가운데 큰 세력을 떨치게 되었다."는 사람은 구태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대방 땅에 세운 나라를 남부여(南夫餘)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물론 남부여라는 말이 이 시기에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후일 백제가 남부여라고 하는 것으로 봐서 부여인 들이 요동 지역의 부여를 남부여라고 보았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남부여와 같은 말로 요동부여라는 말을 쓰고 있습니다. 참고로 송화강 지역에 있는 부여는 북부여(北夫餘), 또는 구부여(舊夫餘)·원부여(原夫餘)라고 합니다. 이를 온조부여로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말하는 대방(帶方)은 정황적으로 보았을 때 요동에 가까운 대방백제로 봐야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심각한 문제는 공손도가 중원을 정벌하기 위해 새 나라를 건국하려 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당시로서는 대역무도(大逆無道)한 일로 용서받을 수 없죠. 그렇지만 그 당시 황건 농민 봉기로 인하여 한(漢)나라 조정은 급격히 약화되었고 전국이 심하게 분열되고 있는 상황에서 요동지역을 견고히 장악하고 있었으니 이 같은 생각이 반드시 무리라고만 할 수는 없지요.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제 부여왕(위구태)은 공손도-공손강-공손연에 이르는 연나라 세력과는 떼려야 뗄 수 없는 혈맹 관계가 되고 말았지요. 만약 공손연이 대역무도한 죄로 몰락하게 되면 위구태의 세력도 성하지 못하게 된다는 것이지요. 적어도 요동지역으로 확장된 부여세력(요동부여, 또는 남부여)은 바람 앞의 등불이 되고 만 셈이지요.
결국 역사적 사실로 보면, 백제의 건국주체는 바로 부여왕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 애초에 우리가 알던 그 백제는 없었던 셈이지요. 부여왕 울구태는 공손도의 따님과 결혼함으로써 요동 지방에서 큰 세력이 되고 이 세력을 바탕으로 백제도 건국했다는 말이 됩니다. 그렇다면 백제 건국의 바탕이 되는 곳은 바로 요동 땅과 부여라는 말인데요. 그러면 우리가 알던 바와는 많이 다르게 됩니다. 다시 백제의 역사가 미궁 속으로 빠져 들어갑니다. 온조와 비류는 또 누구란 말입니
백제, 부여로 다시 태어나다
『삼국사기』에서 온조 부분의 신화에서는 온조가 분명히 고구려 계열로 나타납니다. 그런데 유리가 옴으로써 중앙권력에서 배제되었기 때문에 남하한 것으로 되어있습니다. 따라서 온조의 경우에는 고구려의 확장과정에서 논공행상에 반감을 품은 세력일 수가 있습니다. 온조가 한강 유역에 내려가 세운 나라를 십제(十濟)라고 합니다. 그래서 일단 백제 지역(현재의 서울지역)에 먼저 자리를 잡지요. 이 세력은 비류세력과 합치면서 백제로 거듭나지요. 즉 그 전에는 촌락 수준에 불과했던 십제(十濟)가 백제(百濟 : 사실은 伯濟國)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규모가 더 크진 것이지요.
『삼국지』에 따르면, 조조(曹操)의 군대에 대패한 원소(袁紹)의 아들 원희(袁熹)와 원상(袁尙)이 공손강에게로 피신하여 도움을 청하자 공손강은 오히려 그들의 목을 베어 조조에게 보냅니다. 그리고 후일 계승자인 공손연은 위나라의 명장 사마의(司馬懿 : 179~251)의 공격을 받아서 멸망하고 참수 당합니다. 당시 위나라는 고구려의 위협보다는 공손연의 연나라를 더 성가시게 생각한 듯합니다. 그러니 일단 연나라를 정벌하고 다음으로 고구려를 노린 것이죠.
공손연이 조조의 군대에 궤멸당하고 그의 가계(家系)가 모두 주살 당하였다고 한다면 부여왕 위구태가 영도하는 요동 세력(남부여)도 성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즉 요동지역의 부여 세력은 치명적인 타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아마 일부는 북부여(부여본국)로 쫓겨 갔을 것이고, 또 일부는 다른 곳으로 이동했겠죠.
그런데 이들이 북부여 쪽으로 가기는 상대적으로 어려웠을 수도 있습니다. 당시 위나라 군대의 기세로 봐서는 북부여방면으로 갔을 경우에는 계속 공격해 들어갔을 수도 있기 때문이죠. 그래서 요동의 위기가 고조되는 210년경부터(원상과 원희의 죽음이 207년)는 이들 요동부여(남부여) 세력이 지속적으로 한반도 쪽으로 이동해 갔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바로 이런 점들이 부여계가 바닷길이나 육로(陸路)를 통해 한반도 방향으로 지속적으로 이동하는 배경이 된 것입니다. 그리고 당시만 해도 고구려가 압록강 하구까지 제대로 진출하지 못했기 때문에 남하하는 데 큰 지장은 없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반도의 한강 유역에 자리 잡은 백제는 작은 나라로 그 시조가 온조(또는 비류)일 수는 있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우리가 일반적으로 말하는 대국 백제는 온조왕의 백제를 말하는 것은 아니지요. 그것은 요동지역의 부여가 지속적으로 남하하다가 요동 부여세력이 궤멸된 후 잔존세력들이 한반도로 합류한 상태가 우리가 알고 있는 백제(百濟)라는 것이지요. 즉 이름 없는 백제가 강력한 부여(백제)로 다시 태어난 것이죠. 이것을 방증하는 것이 요동에서 심각할 정도로 부여세력이 궤멸된 후 오히려 한반도의 백제 세력이 강화된다는 사실입니다.
다시 안개 속으로
우리는 앞에서 고이왕을 일반적으로 구태라고 이해한다고 했습니다. 『삼국사기』에 나타난 기록대로라면 백제왕들은 일목요연하고 아무런 문제가 없이 계승이 되어 백제 전문가인 이도학교수의 말처럼 마치 일본식의 만세일계(萬世一繼)라는 느낌을 줍니다. 즉 고구려나 신라는 박씨 - 석씨 - 김씨에 이르는 왕실교체가 있었고 고구려도 소노부에서 계루부로 왕실이 교체되었는데 유독 백제만은 아무 탈이 없이 왕에서 왕으로 이어졌다는 말이지요.
그러나 실제에 있어서 백제처럼 불안한 국가가 없었습니다. 단적으로 말하면 백제는 그 시조만 해도 위구태, 온조, 비류 등 3개의 왕실이 존재했습니다. 그 만큼 나라가 혼란하거나 여러 개의 정권으로 나눠져 있었다는 말입니다.『삼국사기』의 기록으로 볼 때 백제 왕실의 계보는 여러 면에서 석연치가 않습니다. ①온조왕 - ②다루왕 - ③기루왕 - ④개루왕(128~166) - ⑤초고왕(166~214) - ⑥구수왕 - ⑦사반왕 까지가 모두 직계 자손에 의해 왕위계승이 이루어질 뿐만 아니라 대부분이 맏아들입니다. 당시로 보면 장자상속제가 정착된 것 같지도 않는데 너무 일목요연하게 왕위계승이 아무 탈 없이 이뤄진다는 것이 이해가 안 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⑧고이왕(236~286)의 경우는 전혀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고이왕은 사반왕의 아들이 아니고 전혀 엉뚱하게 ④개루왕(128~166)의 둘째 아들이자 초고왕(166~214)의 아우로 한참 올라가 버립니다. 그러면 나이가 어떻게 될까요? 아마도 고이왕의 수명이 거의 1백 50살은 되어야 될 것 같지요. 무언가 심각한 변화가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고이왕은 개루왕의 아들이 아니라 다만 그 이름을 빌려왔을 수도 있죠. 이름도 잘 모르는 사람이 와서 "나는 너의 고조부의 둘째 아들이라"는 식 말이죠. 고조부가 누군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그것도 둘째 아들이라니 더욱 모르지요. 어쨌거나 친척인 것은 분명한 것도 같은데 말이지요.
그런데 여기서 눈여겨 볼 대목은 바로 고이왕의 즉위 이전 20여 년간이 요동의 위기가 극대화되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고이왕의 즉위를 전후로 요동 지역을 장악하고 있던 위구태의 처가인 공손씨가 사마의와 관구검에 의해 몰살당하는 시기입니다. 즉 236년부터 위나라 황제 조예는 공손연의 토벌을 명합니다. 그래서 237년 위나라 명장 관구검(毌丘儉 : ? ~255)은 요동 입구인 요수로 출병했다가 가을장마 때문에 부득이 철군합니다. 238년 사마의는 고구려의 도움을 받아서 공손연을 토벌하고 공손연의 남은 가족과 고위 인사 또는 장수들을 색출하여 70여 명을 참형에 처합니다. 이로써 요동부여(남부여)도 거의 공황상태에 빠지게 된 것으로 보입니다.
남부 지역의 전쟁이 소강상태에 빠지자 위나라 황제 조예(조조의 손자)는 북방을 공격했는데 당시 부여 세력들은 상당수가 남하하였을 것으로 보입니다. 왜냐하면 당시 요동에서는 어느 한 시점에서 전격적으로 전쟁이 벌어진 것이 아니라 관도대전(200) - 원소의 몰락(206) - 원희ㆍ원상의 죽음(207) 등의 과정에서 요동에서는 위기가 극대화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위기가 고조되는 상황에서 울구태의 남부여와 사돈관계인 공손연은 오히려 강남의 오나라(손권)와 접촉을 하는 등 위나라에게 자극을 가하게 됩니다. 그러자 위나라가 공손연을 공격하게 되는데 이 때에도 공손연은 연나라 왕을 칭하는 등 위나라에 패배했을 경우에는 도저히 소생할 가능성이 없는 상태에 돌입하게 되지요.
이런 상황에서 위나라의 침공에 대해 직접적인 이해관계가 없는 울구태의 남부여 (요동부여)세력들은 미래를 대비하여 상당한 세력이 20년 이상을 반도 쪽으로 내려갔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것은 일본의 야마도 정권의 수립의 경우와 매우 유사합니다. 그리고 이때만 해도 압록강 하구를 고구려가 완전히 장악하지 못했기 때문에 남하에는 지장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고이왕대(236~286)에는 여러 가지 제도의 정비가 일어나는데 이것은 자신의 세력을 강화하는 것도 있겠지만 남부여에서 시행되던 많은 제도들이 반도부여에 그대로 이식되는 과정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고이왕 이전에 한반도 안에 존재했던 백제라는 나라는 거의 고려할 만한 수준이 못 되는 소국에 불과하다고 봐도 되겠습니다. 즉 3세기 후반에 씌어진 『삼국지』에서는 마한의 54개국 가운데 백제국(伯濟國)이 나타나고 있는데 당시 마한의 맹주는 목지국(目支國)이었으므로 한반도에 소재한 백제라는 나라는 전혀 고려의 대상이 되지 못합니다.
그러나 요동지역에 있던 울구태의 남부여 세력들이 사마의의 토벌로 인하여 대거 남하하자 이 세력들로 인하여 반도부여(백제)는 힘이 매우 강해졌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왜냐하면 연이은 고구려 - 위나라와의 전쟁으로 인하여 고구려가 큰 타격을 입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한강유역과 한반도 중북부 지역에서는 남부여 세력이 확장되는 것을 막을만한 세력이 없었을 것입니다. 이 기회에 소국 백제는 남부여(南夫餘)로 거듭 태어나고 강성해지게 되는 것이죠.
우리가 아는 백제는 사실은 부여의 분국(分國), 남부여라는 것입니다. 다만 겉보기로 백제라는 국호를 사용했지만 사실은 부여를 계승한 정권이라는 말입니다. 무엇보다도 백제왕들은 일관되게 부여의 시조이신 동명왕에 제사를 지내고 있습니다. 개로왕(蓋鹵王 : 455~475)이 북위의 황제에게 보낸 국서(473)에 "신은 고구려와 더불어 그 근원이 부여에서 나왔으므로 선대에는 옛 정의를 돈독히 존중하였습니다."라는 말이 나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삼국유사(三國遺事)』에도 '남부여(南扶餘)와 전백제(前百濟)'라고 하나의 항목으로 처리하여 백제를 남부여라고 보았습니다.
중국사서들 가운데 백제가 처음으로 등장하는 사서가 바로 남북조 시대 『송서(宋書)』입니다. 송나라(420~478)는 사마씨의 동진(東晋)을 이은 한족의 왕조입니다. 그리고 이 『송서(宋書)』를 포함하여 『남제서(南齊書)』『위서(魏書)』등에는 백제가 등장하지요. 따라서 적어도 5세기 중엽까지도 백제보다는 부여로 인식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6세기에는 바로 남부여(538 : 성왕 16년)로 바뀌고 말지요.
이 점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이 시기에 중국 측에서는 이미 역사학이나 사관의 기록 체제가 많이 발달해 있는 상태인데도 『삼국사기』에 의거하면, BC18년에 건국하여 무려 3백~4백년 건재한 나라에 대하여 일언반구도 없다는 것이 말이 됩니까? 특히 『후한서』는 남북조 시대에 편찬되었고 『진서(晋書)』는 당나라 때 편찬되었으니 백제의 건국 기점으로 본다면 무려 8백년이 지나서 편찬된 책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백제는 없고 부여만 있죠? 그 말은 무얼 의미할까요?
백제를 건국했다는 말보다는 부여의 분국이 끊임없이 만들어져서 원래의 부여가 멸망하더라도 그 부여의 불씨가 꺼지지 않도록 했다고 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러다 보니 여러 사서들에서 백제를 건국한 지역을 요동의 대방 지역, 즉 울구태의 남부여를 지목하고 있는 것이죠. 『북사(北史)』에는 "백제는 처음으로 그 나라를 대방의 옛 땅에 세웠다."고 하고 『수서(隋書)』(『隋書』「百濟傳」 : 始立其國帶方故地)에도 이 기록은 그대로 있습니다.
동부여(285)의 경우를 봐도 알 수 있습니다. 즉 모용선비의 침입이라는 국가적 위기를 맞아서 두만강 쪽으로 피난하여 일종의 임시정부를 만들어 두었지만 중국의 정사에서는 이를 두고 동부여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마치 우리의 정부청사가 광화문에도 있고, 과천에도 있고 세종시에도 있지 않습니까? 이것은 지금도 한반도가 준전시상황(휴전)이기 때문입니다. 부여의 경우도 선비와 고구려의 침입으로 사실상 거의 준전시상태(準戰時狀態)였다고 봐야합니다. 이런 과정에서 정치적 격변에 따라 요동으로 한반도로 분국을 만들었다는 얘기지요.
그래서 백제의 시조에 대해서도 울구태라고 새롭게 볼 필요도 없고 그저 동명(東明)이지요. 『삼국사기』「백제본기」에서도 일관되게 나타나는 한 가지는 백제의 모든 왕들이 하나같이 시조이신 동명왕 사당에 제사를 지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즉 부여의 시조와 백제의 시조가 완전히 같다는 말이지요. 다만 그 중시조는 울구태이며 반도에 일찍 남하했던 무리들이 온조와 비류라는 것이지요. 이들은 후일 요동과 만주지역의 부여세력과 연합하여 부여계의 국가로 다시 태어나는데 그 이름이 백제였다는 말이지요. 아마도 만주나 요동 지역으로부터 이주하는 사람들과 토착민 사이의 관계를 원활히 하고 덕업(德業 : 왕업)을 일신한다는 의미에서 백제(伯濟)라는 말을 사용하되 좀 변경된 이름인 백제(百濟)를 사용한 듯합니다. 그러나 이 국호도 남부여(538)로 다시 바뀌어 원래로 돌아가지요. 그래서 굳이 백제라는 말을 사용할 필요성이 없고 반도부여(백제)라고 부르는 것이 옳다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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