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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기로운 음악방♬ 스크랩 Hymne A L"Amour (사랑의 찬가) - Edith Piaf
조나돈 추천 0 조회 18 08.05.12 10:53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Edith Piaf

    머리 숱도 얼마 없고 뻐드렁니에 키가 1m47㎝밖에 안 되는 여인, "프랑스의 목소리"라 불려온 전설적인 여가수 에디트 피아프(Edith Piaf)... 1915년에 태어나 제2차 세계대전 때인 1939년에 전국적 스타덤에 오르기 전까지 "작은 거인" 피아프의 인생은 비참했다. 에디트가 태어난 직후 서커스 곡예를 하던 아버지는 군대에 소집 되었고, 홀로 딸을 양육하기 버거웠던 어머니는 아기를 자신의 어머니에게 맡기고 멀리 떠나 버렸다. 외할머니는 술꾼들 틈에서 손녀를 키웠고 제대해 돌아온 아버지는 다시 아이를 노르 망디에서 사창가를 운영하던 자신의 어머니에게 맡겼다. 파란만장한 생애의 시작이었다. 에디트 피아프는 열다섯 나이에 파리의 거리에서 노래를 부르며 생계를 유지해야 했다. 1935년, 캬바레(뮤직홀)의 지배인이었던 루이 루프레가 길에서 노래하는 그녀의 재능을 눈여 겨 보고 당시 20살이던 그녀를 가게에 데려와 노래할 수 있게 했다.그리고 온갖 풍파에 시달린 삶이 배어나는 그녀의 노래 실력은 드디어 빛을 발하기 시작한다. 그때부터 그녀는 "La Mome Piaf"(The Kid Sparrow-작은 참새라는 뜻) 로 불리는 열정적인 가수로 알려지기 시작하게 된다. 그후 작곡가 레이몽 아소와 모리스 슈바리에의 도움으로 그녀의 삶이 다듬어진 노래로 표현 되면서 거칠고 굴곡 많은 그녀의 인생이 예술로 승화되었다.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고뇌에 찬 목소리를 가진 그녀는 서서히 샹송계의 스타가 된다. 많은 사람이 에디트 피아프하면 남자와의 스캔들, 잦은 파경, 교통사고 그리고 알코올과 마약 중독을 먼저 떠올린다. 57회 베를린국제영화제의 개막작인 올리비에 다한 감독의 영화 <장밋빛 인생>이 말해 주듯 그녀의 생애가 영화로, 드라마로, 또 책으로 자주 다뤄지는 이유다. 혹자는 그녀의 노래를 "신성한 광기"라고 묘사한다.노래의 터뜨릴 때를 알았던 것처럼 속삭일 때를 알았고 사람의 감정을 뒤흔들어놓은 만큼 가라앉혀줄 줄도 알았다. 폭발과 절제가 그처 럼 절묘하게 동거한 노래가 없다. 어떤 전문가는 결코 잘하는 노래가 아니었다고 주장하지만, 피아프를 "20세기 최고의 여가수" 로 숭앙하는 데는 노래에 실린 진실성과 불굴의 에너지만으 로도 충분하다. 세계의 여가수를 집대성한 저서 <시 밥>의 작가 루시 오브리엔은 그녀를 <잔 다르크와 동등한 팝 히로인>으로 일컬었다. 그녀의 노래가 오랜 세월에도 불구하고 무한한 감동을 주는 것은 상상이나 허구가 아닌 실제의 삶을 진하게 반영하고 있어서다. 영화 <파니 핑크>를 통해 재조명된 1960년 생애 후반기의 절창 "난 후회하지 않아요(Non je ne regrette rien)" 를 듣고 있으면 뼛속까지 파고드는 듯한 가공할 전율을 경험하게 된다. 사람들은 이 곡을 프랑스의 "마이 웨이(My way)"로 추억한다. 1963년 48세의 길지 않은 일기로 세상을 마감한 그녀가 역사에 남긴 자취는 거대하다. 그녀는 여가수의 텃밭이 된 <팝 발라드>의 영역을크게 넓힌 존재로 평가된다. 그녀가 출현한 이후, 사람들은 비로소 샹송을 세계의 주류 대중음악으로 인식하기 시작했다. 브로드웨이에서도 "미국판 피아프" 스타일이 생겨났다. <무지개 저편에(Over the rainbow)> 로 유명한 주디 갈란드도 그것을 따랐고 바브라 스트라이샌드 역시 그의 영향을 흡수하여 스타덤에 올랐다. 에디트 피아프가 "가수는 목숨을 걸고 노래해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무대에 설 자격이 없다"는 걸 우리에게 가르쳐줬다. "요즈음 도무지 혼으로, 가슴으로 노래하는 가수 가 없다"는 사람들의 아쉬움과 불만이 한층 에디프 피아프에 대한 그리움을 자극하고 때마다 그녀를 불러낸다. 그녀는 프랑스 사람들의 마음속에 아직도 살아 있다. 1963년 파리의 페르 라세즈 공동묘지에서 거행된 장례식에 4만명의 인파가 운집한 이래 그곳에는 43년의 세월이 흐른 오늘도 에디트 피 아프를 추모하는 행렬이 끊이지 않는다. 그들이 되새기는 것은 한 여인의 인생 드라마에 담긴 "프랑스의 얼"이다. "나는 키작은 사람들을 위해서, 뚱뚱한 사람들을 위해서, 소심한 사람들을 위해서 노래한다. 그리고 어느날 그들에게도 사랑이 찾아올 것이라는 희망을 준다."




      1948년 그녀는 권투선수 마셀 세르당(Marcel Cerdan)과 결혼하여 행복한 삶을 누리게 되지만 Cerdan은 이듬해 그녀를 뒤로한 채 비행기 사고로 사망한다. 그 후 그녀는 너무나 사랑했던 그에게 바치는 곡 <사랑의 찬가(L'Hymne A L'amour)> 를 만들었다. (이 애절한 러브송은 에디뜨가 마르셀의 사망소식을 듣고 쓰러져 있을 때 여류 작곡가인 마르그리트 모노에게 준 사랑의 시에다 곡을 붙인 것이다.) 이 곡은 50년 1월 플레이엘 음악당에서 초연돼 열렬한 사랑을 받았고, 곧 전세계 방방곡곡으로 퍼져나가 사랑을 앓는 연인들의 가슴에 그 숭고한 아름다움을 한올한올 새겨 넣게 된다. 이후 몇 장의 앨범에 영어로 실리기도 했으며,우리 나라의 음악 교과서에 실릴만큼 유명한 곡이다.

      Hymne A L"Amour (사랑의 찬가) - Edith Piaf 푸른 하늘이 우리들 위로 무너진다 해도 모든 대지가 허물어진다 해도 만약 당신이 나를 사랑해 주신다면 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아요 사랑이 매일 아침 내 마음에 넘쳐 흐르고 내 몸이 당신의 손 아래서 떨고 있는 한 세상 모든 것은 아무래도 좋아요 당신의 사랑이 있는 한 내게는 대단한 일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니에요 만약 당신이 나를 원하신다면 세상 끝까지라도 가겠어요 금발로 머리를 물들이기라도 하겠어요 만약 당신이 그렇게 원하신다면 하늘의 달을 따러, 보물을 훔치러 가겠어요 만약 당신이 원하신다면 조국도 버리고, 친구도 버리겠어요 만약 당신이 나를 사랑해 준다면 사람들이 아무리 비웃는다 해도 나는 무엇이건 해 내겠어요 만약 어느날 갑자기 나와 당신의 인생이 갈라진다고 해도 만약 당신이 죽어서 먼 곳에 가 버린다해도 당신이 나를 사랑한다면 내겐 아무 일도 아니에요 나 또한 당신과 함께 죽는 것이니까요 그리고 우리는 끝없는 푸르름 속에서 두사람을 위한 영원함을 가지는 거에요 이제 아무 문제도 없는 하늘 속에서... 우린 서로 사랑하고 있으니까요...




      난 아무 것도 후회하지 않아요

      장미빛 인생(La Vie En Ro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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