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리서 가까이서
김태길
멀리서 바라보면 아름다우나 가까이 다가가 살펴보면 실망을 주는 것은 잔디밭만이 아니다. 지붕 위에 고추를 널어 놓은 초가집 또는 갈매기 날아드는 선창가는 멀리서 바라보는 눈에는 더없이 아름다운 한 폭의 그림이다. 그러나 가까이 다가가 보면, 거긴 가난에 찌든 괴로움이 있고, 죽은 물고기의 악취가 있다.
사람의 모습은 자연의 보습보다도 원경과 근경의 차이가 더욱 심하다. 멀리서 그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또는 그 사람의 글을 읽고 존경하는 심정을 금치 못하는 수가 있다. 존경은 사숙私淑으로 발전하고, 사숙은 직접 만나보고 싶은 충동을 일으킨다. 처음 만나보았을 때는 감격이 더할 수도 있을지 모르나, 여러 번 만나게 되면 그도 보통 사람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깨닫고 실망을 느낀다. 그러기에 서양의 속담은 "하인 눈에는 위인이 없다."고 하였다.
세상에 여자가 존재한다는 것이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는, 여자가 하나도 없는 세상을 상상해보면 곧 알 수가 있다. 여자가 없는 세상은 꽃과 달이 없는 세상보다도 더 권태로울 것임에 틀림이 없다. 사람이 사는 곳이라면 어디를 가나 여자가 많지만 함부로 가까이 갈 수 없고, 상당한 거리를 두고 멀리서 바라보아야 하는 그런 전통사회 속에서 나는 자랐다. 멀리서 바라보았던 까닭에, 많은 여자들은 신비로운 가운데 아름다웠고, 아련한 꿈의 대상이었다. 남녀의 접촉이 자유로운 젊은 세대를 부러워한 적이 있다. 젊은 세월을 헛되이 보낸 듯한 억울함을 느끼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제는 칸막이가 많았던 옛날에도 그 나름의 장점이 있었음을 깨닫는다.
사람의 욕심에는 한계가 없다. 멀리서 바라보는 것만으로는 마음이 차지 않으며, 한 발 가까이 접근하여 아주 손으로 잡아야 직성이 풀린다. 그러나 손에 쥐고 보면 멀리서 바라보던 신비로움과 아름다움은 자취를 감춘다. 여자의 분결 같은 피부에 현미경을 들이대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욕심을 버리고 멀리서 바라보면 주간지가 떠들어 댄 연예인도 아름답고 화식집 호스테스도 아름답다. 굳이 그들의 사생활에까지 접근하여 못 볼 것을 들여다보는 것은 좋은 취미가 아니다. 겉과 속이 아름다우면 그 이상 바랄 것이 없겠지만, 인간이 어찌 완벽하기를 바라랴.
화장이 잘돼서 아름다운 것도 아름다움이요, 먼 눈에 옆 모습이 멋있는 것도 멋있음이다. 화장 속에 가리워진 잔주름에 구태여 신경을 쓸 필요는 없으며 앞으로 돌아가 정면의 모습을 가까이 확인할 필요도 없다. 라디오의 다이얼을 돌리면, 아름답고 상냥한 여자의 목소리가 도시 생활로 피로해진 신경에 약손처럼 와닿는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용모도 아름답고 마음씨도 상냥할 것 같은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그 상상이 들어맞으리라는 보장은 없다. 목소리만의 아름다움도 아름다움임에 틀림이 없으며, 이 세상에 아름다운 목소리가 있다는 것만도 고마운 일이다.
세상 일이란 예외도 많고 정반대의 현상도 있어서, 먼빛으로 본 모습이 언제나 더 아름답다고 일률적으로 말하기는 어렵다. 멀리서 보았을 때는 전혀 몰랐던 좋은 점을 가까이 다가가서 자세히 살펴봄으로써 비로소 발견하고 놀라는 경우도 있다. 들국화나 해당화가 아름답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많으나, 칡꽃이 아름답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농촌 출신에서도 드물다. 들국화나 해당화는 무심코 지나가는 사람의 눈에도 뜨이기 쉽지만, 작고 드문드문 피는 칡꽃은 무성한 덩굴과 잎에 묻혀서 무관심한 눈에는 잘 뜨이지 않는다. 그러나, 가까이 가서 자세히 들여다보면 보라색의 그 작은 모습이 아주 귀엽고 묘하게 생겼다는 것을 곧 알게 된다.
들판이나 산기슭에 앉아서 풀밭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잔디나 바랭이 따위의 억센 풀 사이에 아주 작고 연약한 식물들이 숨어서 살고 잇는 것을 발견할 수가 있다. 그런 이름 모를 작은 식물들도 대개는 꽃을 피우는데, 어두운 눈에는 잘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왜소한 꽃들이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그 생김새와 빛깔이 아주 신비로울 정도로 절묘함을 발견할 수 있다. 사람의 경우에 있어서도 간혹 비슷한 예를 보는 수가 있다. 평소 멀리서 바라보고 별로 대수롭지 않은 사람으로만 여겨 왔으나, 어떤 계기에 가까이서 자세히 보고, 대단히 훌륭한 인품이라는 사실을 알고 놀라는 경우가 있다. 흔히 '진국'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이 부류에 속한다.
억새풀이나 바랭이 그늘에 숨어서 피는 작은 꽃들처럼 사람도 진국은 화려한 인물들의 그늘에 묻혀서 사는 경우가 많다. 그들은 대개 세상의 한구석에서 신문 기자들도 모르게 조용히 살고 있다. 아주 가까운 사람들만의 알뜰한 사랑을 받으면서 조용히 살고 있다.
김태길(1920. 11.15 - 2009. 5. 27)
1920년 충청북도 충주에서 태어나 1947년 일본 도쿄대학[東京大學] 법학부를 중퇴한 뒤 귀국하여 서울대학교 문리대학 철학과를 졸업하였다. 1960년 미국 존스홉킨스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56년 건국대학교 부교수, 1961년 연세대학교 문리대학 부교수를 역임하고 1962년 서울대학교 문리대학 철학과 부교수가 되었다. 1974년 서울대학교 문리대학 학장과 한국철학회 회장으로 임명되었다.
1987년 서울대학교를 퇴직한 후 명예교수가 되었고, 2004년부터 대한민국학술원 회장을 지냈다. 계간지 <철학과 현실>의 발행인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김형석·안병욱과 함께 한국의 3대 철학자로 일컬어진다. 대한민국 학술원상을 받았다. 저서로는 〈윤리학〉·〈윤리학개론〉·〈소설에 나타난 한국인의 가치관〉·〈새인간상의 기초〉·〈듀이의 사회철학〉·〈변혁시대의 사회철학〉 등이 있다.
김태길, 안병욱, 김형석 세분은 한국의 3대 철학자로 알려져 있고, 생전에 깊은 우정을 나누셨으며 지금은 김형석 교수만 생존해 계신다.
첫댓글 여러 가지 사물을 예로 들어
갖추어야 할 덕목을 말씀하셨네요. 칡꽃, 이름 모를 꽃들이 존재감 없이 피었다가 발견되면 감동을 주듯이, 갖추고도 겸손한 사람, 욕심이 없는 인품이 감동을 줍니다. *좋은 글입니다.
아름다운 정감, 풍부한 유머 내지는 일상에서의 풍류,
간결한 표현가운데 함축이 담겨있는 글,
자신의 부족함을 털어놓을 수 있는 솔직함,
쉬운말로 된 깨끗한 문장 … 이 좋은 글이라 생각해요.
글은 곧 그사람의 인격이라고 하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