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함과 약함 삿3:26~31절 2024.11.24. 주일설교
* 흥망은 주님의 손에 있다는 것 가르치기 위해서
본문에 보면 하나님이 강성케 하셨던 모압을 하나님이 치십니다. 28절에 보면 "무리에게 이르되 나를 따르라 여호와께서 너희 대적 모압 사람을 너희의 손에 붙이셨느니라 하매 무리가 에훗을 따라 내려가서 모압 맞은편 요단 강 나루를 잡아 지켜 한 사람도 건너지 못하게 하였고"라고 합니다. 여호와께서 강성케 하신 모압을 다시 이스라엘의 손에 붙이신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것은 여호와의 손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의지할 분은 하나님이지 세상의 힘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소유의 모든 것이 여호와의 손에 있습니다. 그러나 여호와의 뜻은 자기 백성의 소유를 늘리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모압을 강성케 하셨다가 다시 이스라엘에게 붙이십니다. 29~30절에 "그 때에 모압 사람 일만 명 가량을 죽였으니 다 역사요 용사라 한 사람도 피하지 못하였더라 그 날에 모압 사람이 이스라엘의 수하에 항복하매 그 땅이 팔십 년 동안 태평하였더라"고 합니다.
이스라엘이 죽인 모압 군대는 일만명 가량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하나같이 용사입니다. 이스라엘은 힘이 장사인 용사들을 일만명 가량이나 죽인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여호와께서 모압을 이스라엘에게 붙여 줬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모압이 이스라엘에게 항복을 하고 그 땅이 80년 동안이나 태평하게 된 것도 하나님이 모압을 이스라엘에게 붙이신 결과입니다. 승리도 태평도 하나님에게서 주어진 것입니다. 행복을 만들어 내고 태평성대를 이루기 위해서 우리가 힘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모든 것은 여호와의 손에 있습니다. 이것이 본문이 말해주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모든 것이 여호와의 손에 달렸다'는 것을 믿지 않습니다. 아니 처음부터 그 사실을 믿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여호와의 손에 달렸다'는 것을 믿는다면 지금 나의 실패도 여호와께서 하신 일이라는 것을 믿어야 하고, 그렇게 되면 자신의 실패를 성공으로 바꿔달라고 기도하는 것도 믿음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믿음이 있다고 하는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것이 여호와의 손에 달렸다' '하늘을 날아다니는 참새 하나가 떨어지는 것도 하나님의 뜻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말에 대해서 옳다라고 하면서 그 말씀을 우리의 삶에 비추어서 생각하기를 꺼려하는 것이 아닙니까? 그렇다면 그 이유는 과연 무엇입니까?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에 달린 것이라고 말하면서도 그것을 자신의 삶에서 인정하기를 피하려고 하는 것은, 결국 우리들의 속마음에 세상에서의 성공에 대한 열망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에 감사하고 살기보다는 내가 원하는 것을 받기를 더 원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자기 백성에게 주시는 것은 결코 세상의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세상의 것을 주기 위해서 자기 백성을 부르신 것이 아니라 더 귀하고 더 값진 예수 그리스도라는 독생자를 주셨습니다.
* 무엇으로 감사하고 낙심
아들을 내어놓으신 것입니다. 세상의 그 무엇으로도 비교할 수 없고 바꿀 수 없는 아들을 내어 놓으셨다면 그것으로 이미 모든 것을 다 주신 것이 됩니다. 사실 그러한 하나님 앞에서 지금 있는 소유로 감사하자는 말조차도 죄송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주신 아들의 은혜와 사랑을 안다면 감사는 자연히 나올 것입니다. 따라서 세상의 소유를 가지고 근심하고 걱정하고 흔들리고 살아가는 것은 하나님이 베푸신 사랑과 아들 안에서 주어지는 은혜의 맛을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아들이 이 세상에 가져오신 것, 아들로 인해서 우리에게 약속되어진 것, 그것의 귀함을 알고 살아간다면 과연 그가 세상의 것으로 인해서 마음 졸이며 살겠습니까? 그런데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약속의 땅 안에 있으면서도 하나님이 베푸신 사랑과 은혜에 대해서 무지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보이기보다는 가나안 백성들이 누리고 있던 문화와 문명들이 더 그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보다는 가나안의 문명과 문화가 더 비중 있게 그들의 마음을 차지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다 멸하라는 말씀을 어기고 철병거를 남겨놨고, 여호와의 목전에서 그들의 신을 섬기고 경배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이스라엘을 그냥 두지 않으시고 징계하십니다. 자기 백성이기 때문입니다. 이방인을 강성케 해서 이스라엘을 치게 합니다. 그리고 구원자를 세워서 이스라엘을 구원합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이스라엘은 자신들이 강하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닌 것을 가르치신 것입니다. 그래서 왼손잡이로 구원자로 세우시고, 31절에 "에훗의 후에 아낫의 아들 삼갈이 사사로 있어 소 모는 막대기로 블레셋 사람 육백 명을 죽였고 그도 이스라엘을 구원하였더라"는 말씀대로 삼갈은 소 모는 막대기로 블레셋 사람 육백 명을 죽입니다. 왼손잡이는 무시 받는 대상이었고, 소 모는 막대기는 결코 무기라고 할 수 없습니다. 블레셋 군사들은 강한 힘을 가졌습니다.
그들의 무기도 강력했습니다. 그러한 블레셋 군사 육백 명을 소 모는 막대기로 죽이고 이스라엘을 구원했다는 것은 소 모는 막대기를 든 자를 세워서 강한 것을 추구하는 이스라엘을 부끄럽게 하신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소 모는 막대기를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하찮은 것으로 여기지 않겠습니까? 그것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한 것은 눈에 보이는 것으로 가치 판단을 하는 이스라엘을 치시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블레셋이 강한 나라였다면 이스라엘도 블레셋처럼 되기를 원했을 것입니다. 블레셋을 선망의 눈으로 바라보는 이스라엘에게 소 모는 막대기가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무기로 쓰인 것입니다. 소 모는 막대기는 강한 무기가 절대 아닙니다. 그렇다고 해서 삼갈이 강한 것도 아닙니다. 삼갈이나 소 모는 막대기는 모두가 약한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보기에 약한 것이 하나님이 쓰실 때는 그 누구도 이길 수 없는 강함을 드러냅니다. 결국 강한 것은 세상이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 강자인가 약자인가?
그런데 이스라엘의 눈에는 강하신 하나님은 보이지 않고 철병거만 보였고 모압의 용사들이 보였던 것입니다. 신앙이란 하나님만이 강하신 분임을 믿고 사는 것입니다. 이 믿음으로 사는 자라면 세상의 그 어떤 것도 강한 것으로 보지 않습니다. 강한 것으로 보지 않기 때문에 부러워 할 필요도 없고 그 앞에 기죽을 이유도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참된 성도의 신앙입니다. 하나님의 강하심을 마음속 깊이 느끼면서 살아가는 것, 이것이 신앙의 깊은 진수일 것입니다. 강하신 하나님이 나를 붙드시고 인도하시기 때문에 내가 강해질 필요가 없음을 깊이 깨닫고 살아가는 것,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면 느낄 수 없는 신앙의 참된 모습입니다. 하나님이 강하시다는 것을 알면서도 왜 여전히 세상의 강한 것을 추구하며 살아갑니까? 왜 나도 저들처럼 강해지기를 바라면서 항상 약한 것 같은 자신에 대해 부족함을 느끼고 불만을 가지고 살아갑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강하심을 엉뚱한 곳에서 찾기 때문입니다. 나를 대적하는 자를 치시는 강한 하나님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나를 강하게 만들어주시는 강한 하나님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강하신 분이다'라고 말하면서 강한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여전히 세상의 강한 것을 의지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가 자기 백성일 때 그냥 두지 않습니다. 평소 선망했던 강한 것에 의해서 실패하게 하시고, 평소 믿었던 강한 것을 무너뜨리셔서 오직 하나님만이 강하신 분임을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강한 자는 강하신 하나님을 의지하고 살아가는 성도입니다. 이들은 오직 말씀에 굴복할 뿐 세상의 그 어떤 것에도 굴복하지 않습니다. 이미 눈에 보이는 강한 것이 강한 것이 아님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비록 세상이 보기에는 나약하고 가진 것이 없어서 소 모는 막대기 같은 하찮은 존재로 살아간다고 할지라도 그가 하나님에게 붙들려 있을 때는 하나님의 강하심을 증거 하는 도구로 쓰여질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으로 강한 자 약한 자를 구분하지 마십시오. 이것은 세상의 사고방식일 뿐입니다. 이러한 사고방식으로 살아간다면 그가 선망하는 존재는 모압이나 블레셋처럼 힘있는 자들일 것입니다.
강한 자를 부러워하면서 자신의 약함과 무능에 대해서 한탄하며 살아갈 것입니다. 이러한 사고방식을 치기 위해서 하나님은 우리들 주변에 소 모는 막대기 같은 존재를 세우실 것입니다. 분명히 힘없는 존재인데도 불구하고 당당하고 부족함이 없는 충만으로 살아가는 하나님의 백성을 세우실 것입니다. 그것은 세상의 강함을 바라보는 우리를 치기 위해서입니다. 이것이 약한 것을 들어서 강한 것을 치시는 하나님의 이유입니다. 우리가 선망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강해지고 싶습니까?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됩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진심으로 불쌍한 자입니다. 그리스도를 말하면서 그리스도가 없이 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세상에서 약한 자였습니다. 내세울만한 것이 하나도 없는 하찮은 모습과 조건으로 오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약하지 않았습니다. 세상의 강한 힘에 패배하지 않았고 승리를 보이셨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