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안 운일암 반일암 산행 (하늬물 산악회 176차)
►산행 일자 : 2022. 07. 24.(일)
►산행 코스 : 계곡 트레킹
►날씨 : 오전 보슬비 오후 흐림
▶산행 스케치 :
현재 세계 최고의 토목기술을 자랑하는
대한민국...전 국토가 마치 거미줄처럼
고속도로가 뚫려 있어 전국 어느 곳이든
이웃 동네 방문할 만큼 반나절 생활권이지만
1970~80년대만 해도 신문지상에는 산간벽지.
오지. 화전민 이라는 단어가 자주 등장했었다.
그 당시 무진장(무주. 진안. 장수)이란 명칭은
오지중의 오지.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는
머나 먼 지역. 미지의 땅으로 인식되곤 하였다
첩첩산중 무진장중에서
진안 “운일암 반일암”이 있다 지금은 계곡따라
도로가 생겨 천혜의 자연환경 맛은 덜하지만
계곡따라 오밀조밀하고 기기묘묘한 아름드리
바위가 즐비 멋진 경관을 자랑한다
►하늬물 산악회 제176차 운일암 반일암 산행....
이날 서울의 하늘엔 구름이 잔뜩 끼었으나
전날 장맛비가 내린 탓에 눈을 깨끗이 청소한
것 처럼 청명하고 상쾌한 기분이다
06:30분 화곡역에서 출발한 동영관광버스는
“운일암 반일암”계곡을 향해 경부고속도로를
달린다
장맛비가 전국을 깨끗이 청소한 탓에 차창너머로
동방의 등불 한반도를 맘껏 음미해본다 이것도
여행의 묘미요 영광이다~~~
►진안에는 명산(名山)이 많다
마이산. 구봉산. 운장산을 비롯한 크고 작은
아름다운 山이 즐비하고 특히 명도봉을 끼고
흐르는 운일암 반일암 계곡은 가히 깨끗한 물과
기암괴석으로 유명하다
진안에는 조선을 뒤흔든 최대의 옥사
기축옥사의 중심에 있는 정여립(鄭汝立)이
자결한 천반산 죽도가 있다
이날 이슬비 맞으며 “운일암 반일암“을 트래킹
하고 계곡에 풍덩~~~~
맑고 시원한 계곡의 소확행(小確幸)에 앞서
지척에 있는 같은 물줄기 천반산 죽도에 흐르는
정여립과 기축옥사의 아픔, 이율곡 십만양병설의
아쉬움 임진왜란의 슬픈 역사가 슬라이드처럼
흘러 엄숙함이 밀려왔다
산행 사진을 올리면서 나름 지난 역사를 조명해
본다~~~
▶정여립(鄭汝立)과 기축옥사(己丑獄事)
►기축옥사(己丑獄死)는 임진왜란 3년 전인
1589년(선조 22년)에 일어난 이른바 ‘정여립
모반사건’으로 1,000명의 희생자(사망자)를
낳은 “조선을 뒤흔든 최대 역모사건”이다
►정여립 (1544-1589)은 전북 완주군 상관면
월암리에서 전주의 명문으로 꼽히는 동래정씨
집안의 후손으로 태어났다.
그는 22세에 문과에 급제하고 성균관의 학유,
예조좌랑, 홍문관수찬 등 벼슬을 지냈다.
실록에 의하면 정여립은 자신을 조정에 천거한
이이를 비판한 것이 선조의 진노를 사 관복을
벗은 것으로 돼있다.
결국 낙향한 정여립이 처음에 터를 잡은 곳은
김제시 금산면 동곡마을이다.
이곳은 미륵신앙의 본거지 금산사가 근처에 있고
증산교의 본부건물이 자리잡고 있다.
강증산이 도를 깨쳤다는 대나무 숲 터 이야기도
전해진다.
30대 중반의 정여립은 이 일대에서 이름난
명당 제비산 자락에 집을 짓는다.
관직을 떠났지만 정여립의 영향력은 대단했다.
멀리서 선비들이 찾아오고 인근 관리들도 그를
방문했다. 그는 사람들과 함께 천문학과
풍수지리학 등의 책을 읽고 토론하기도 했다.
그는 또 시국을 비판하는 발언을 자주했다고
전해진다.
“천하는 공물(公物)인데 어찌 주인이 있겠는가.
누구든 능력 있는 사람이 나라를 다스려야 한다.”
이 말은 당시로서는 대단히 위험한 반체제적인
발언이었다. 정여립은 그 뒤 산속의 섬으로
불리는 진안군 죽도로 거처를 옮긴다.
이곳에서 서당을 짓고 학문을 가르쳤다.
그래서 <죽도선생>으로 불리기도 했다.
그는 또 이곳에서 무예를 가르치고 600여 명을
모아 <대동계>를 조직한다.
1587년 정해왜변 당시 전주부윤 남언경이
도움을 요청하자 정여립은 대동계를 모아
왜구를 격퇴했다.
실록에 의하면
<정여립은 대동계원을 모아 치밀하게 거사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사전에 탄로나고
조정에서는 즉시 체포령을 내린다. 정여립은
죽도로 도망쳐 그곳에서 자결했다>고 기록됐다.
►이 사건이 바로 임진왜란 발발 3년 前인
선조 22년 (1589)에 일어난 기축옥사다.
기축옥사는 조선조 최대의 옥사다.
정여립 역모사건에 연루돼 고문을 받다가
죽거나 사형당한 사람은 천 명이 넘는다.
조선의 4대 사화에서 죽은 사람을 모두
합친 것보다 많다.
이름 높은 학자에서부터 이름 없는 백성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다.
정여립과 조금이라도 알거나, 편지를 주고
받았다는 사실만으로 도 고문을 받고 숨졌다.
서산대사와 사명대사 같은 유명한 승려들도
연루돼 곤욕을 치렀다.
주모자 정여립의 시신은 만조백관이 보는
앞에서 능지처참된다.
그 부모와 자식들도 모두 교수형에 처한다.
조선 전체가 공포 분위기에 휩싸이면서
광풍을 몰고 왔다.
날조된 유언비어에 희생되는 사람들도 많았다.
당시 기록을 보면 <연루자들을 고문했던
의금부는 비명소리와 피비린내가 진동했다>고
한다.
자백을 받아내기 위해 상상을 초월한 갖은
고문이 행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뒤 17세기에 씌어진 당쟁에 관한
책 <동소만록>에는 정여립이 자살한 것이
아니라 타살됐다고 되어있다.
누군가 치밀한 사전 각본을 만들어 정여립을
죽이고 역모를 주장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정여립의 역모사건이 조작된 것이라는
주장에 공감하는 학자들이 의외로 많다.
왜구가 전주에 쳐들어 왔을 때 지방관의
요청에 의해 왜구를 물리쳤다면 대동계는
비밀조직이 아니라 공개된 조직이었다는
얘기다.
또한 대부분의 연루자들이 후대에 명예회복이
이루어졌던 점도 지적된다.
진짜 역모를 했다면 명예회복이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느냐는 것이다.
당시 정국은 동인의 주도하에 있었다.
정여립이나 당시 피해를 입은 사람들은
모두 동인에 속한 인사들이다. 이들은
역모에 가담할 이유가 없었다.
►결과적으로 동인의 유력 인사들이
정여립의 역모에 연루돼 화를 입고 서인이
정권을 장악했다.
기록에 의하면 정여립 역모 조작설에는
당시 서인의 중심인물이었던 송강 정철과
송익필이 관계됐다는 설이 나돌기도 했다.
따라서 정여립의 역모는 조작됐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 학계의 주장이다.
정여립 사건으로 동래정씨 집안은 고향에서
쫓겨나 전국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조상들의 무덤은 모두 파헤쳐져 다른 곳으로
이장됐다. 정여립의 이름을 꺼내는 것조차
금기시됐다. 그가 속한 문중 전체가 수백 년
동안 족보에서 사라졌다.
정여립이 능지처참된 후 조정에서는 그의
집터를 송두리째 파내고 그것도 모자라
물을 채워 연못으로 만들었다.
풀 한 포기라도 자라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 사건의 진상에 대해선 지금까지도
여러 설이 난무하고 있다.
“정여립이 이씨 왕조가 정씨 왕조로 바뀐다는
“정감록”을 바탕으로 일으킨 민중반란이라는 설.
서인 정철과 송익필이 교묘하게 조작한 사건
이라는 설. 선조의 괴팍한 성격 때문에
일어나게 된 사건이라는 설 등 많은 이견이
존재한다”고 한다.
►정여립에 대해 부정적이었던 성호 이익
(1681~1763)은 『성호사설』에서 이렇게 말했다.
“선조 이후 하나가 갈려 두 당이 되고, 둘이 갈려
네 당이 되고, 넷이 또 갈려 여덟 당이 되었다.
이것이 대대로 전해져서 그들의 자손은 그대로
원수가 되어 더러는 죽이기까지 했다.
조정에서 함께 벼슬하고 같은 마을에 살면서도
늙어 죽도록 서로 왕래도 하지 않았다. 길사나
흉사가 있으면 수군수군 서로 헐뜯으며
결혼이라도 하면 무리를 지어 공격했다.
심지어 언동과 복색까지 모양을 달리해 길에서
만나도 가려낼 수 있었다.”
무오· 갑자· 기묘· 을사 4대 사화보다 더 많은
희생자를 낸 기축옥사는 당시 인구 500만이던
조선 전체를 참화 속에 몰아넣었기에 뒤이은
임진왜란조차 기축옥사의 황폐가 부른 재앙
이라는 얘기가 나돌 정도였다.
이와 관련, “만약 정여립이 역성혁명에
성공했다면 일본에게 국권을 상실한 조선
왕조에 비해서는 훨씬 우월한 민족 근대사를
창출했을지 모른다”라거나 “한 왕조가
제 역할을 하기에는 200여 년이 적당하다”는
말이 나오게 되었다.
정여립은 전주 출신이었기에 기축옥사는
지역문제로까지 비화되었다.
이이화는 “기축옥사의 여파로 전라도를 반역의
고을로 몰아 호남 인사의 등용을 억제하는 등
역사적 폐단이 끝내 이곳을 동학농민혁명의
진원지로 만들었다”고 했다.
►신정일은 기축옥사의 현재적 의미와 관련,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졌다.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가 갈라져 있고 학연을
따라 견고히 벽을 쌓은 채 허물 줄 모르고 있다.
조선시대에나 있음직한 파벌들, 혈연과 지연에
집착하는 희극이 21세기에도 존재하는 것이다.
나라 전체에 퍼져 있는 학맥 문제 하나 해결
못하면서 지역갈등을 해결할 수 있을까?
지역갈등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서 통일을
말하는 것은 어쩌면 공언(空言)에 불과하지
않을까?”
▶율곡 이이의 십만양병설....
조선 중기는 큰 난리가 없는 평화로운
시기였다.
당시 국방에 관한 일을 하고 있던
율곡 이이는 사회의 여러 가지 문제를
해결하고자 애썼다.
나라의 앞날을 걱정하던 이이는 임진왜란
발발(1592년)10년 前인 1583년 <시무육조>라는
장계에서 '십만양병설'을 주장했다.
"나라가 오랜 시간 평화롭다 보니 전쟁이
일어났을 때 나가서 싸울 수 있는 군대가 없다.
지금부터라도 10만의 군사를 길러 전쟁에
대비해야 한다." 고 주장하였으나
다른 벼슬아치들은 이이의 말에 귀 기울여
듣지 않았다.
몇 년 뒤 일본에서 새로운 소식이 들려왔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120여 년간 크고 작은
나라로 분열되어 있던 일본을 통일했다.
이제 일본 내부가 잠잠해졌기 때문에 밖으로
눈을 돌려 조선을 침략할지도 모른다."
선조는 일본에 두 명의 사신을 보내 일본의
상황을 정확히 살펴보고 오도록 했다.
두 사신은 돌아와서 각기 다른 말을 했다.
한 명은 전쟁 가능성을 얘기했고 한 명은
조선 침략 징조가 없다고 고(告) 했다.
조선의 조정 벼슬아치들은 편을 나누어
토론을 벌일 뿐 전쟁에 대한 대비는 하지
않았다.
►율곡 이이 선생이 10만 군대를 기르자는
'십만양병설'을 주장한 지 10년뒤 (정여립과
기축옥사 3년 뒤) 1592. 5. 23일 일본의
침략으로 임진왜란이 발발 1598. 12. 16일
까지 7년간의 전쟁으로 조선은 처절하게
유린되고 말았다
►만약 10년 전부터 전쟁을 대비했다면
임진왜란도. 조선의 치욕도 나아가 식민시대도
없었을지도 모른다.
▶목숨바쳐 나라(조선)를 지키고 민족의 혼을
이어오고 대한민국을 건국한 선조님들의 거룩한
정신을 기리고 후손인 우리들도 내부 싸움으로
힘이 약해진 틈을 타 외세침략으로 나라를
빼앗기고 무참히 유린 한민족을 탄압 살육된
굴욕적 역사를 뼈저리게 인식하고
국민모두 반대를 위한 반대 보다는 선의의
비판을 하되 화합 협력하고 혼연일체하여
국력(國力)을 기르고 국방. 안보가 튼튼한 나라.
잘 사는 나라. 문화 예술이 발달한 나라.
경제강국 대한민국. 선진국 대한민국을
희망한다~~~
▶자유와 평화를 원하거든 전쟁을 준비하라 했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고
역사를 모르는 민족에겐 희망이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