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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강해 제 22장 혼인잔치 비유와 부활논쟁
본 장의 구성은 크게 세 부분으로 구분되는데 전장의 비유에 이어서 세 번째 비유이며, 그 다음으로 대적들의 질문에 대한 예수의 답변, 그리고 예수의 역질문과 자기 계시이다.
1. 혼인 잔치 비유 (22:1-14절)
이 비유는 앞의 두 비유와 연속되는 주제를 가지고 있지만 그 내용면에서는 차이를 보인다. 첫째, 앞의 두 비유가 인간의 패역한 행위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면 본문은 구원을 값없이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강조한다.
둘째, 앞의 두 비유에서는 책망의 대상이 유대교 종교 지도자들이었다면 여기서는 그 대상의 범위가 확대되어 전체 유대인이다.
셋째, 앞의 비유는 메시야이신 예수를 살해하기까지에 이르는 이스라엘의 패역한 역사를 돌아보는 회고의 성격이 짙은 반면 본 비유는 하나님의 종말론적 심판까지 시사하는 예언적 성격을 띠고 있다.
예수께서는 천국을 혼인 잔치에 비유하셨는데 2절에 보면 ‘천국은 마치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과 같다.’ 고 하는 말을 그대로 해석하면 ‘천국은 임금과 같다.’라고 오해할 수 있지만 그것은 잘못된 해석이며, 정확한 표현은 ‘천국은 어떤 왕이 자기 아들을 위하여 베푼 혼인 잔치와 같다.’고 이해해야 한다. 나아가 이 혼인 잔치는 임금이 ‘자기 아들을 위하여’ 베푼 잔치이다. 임금에게 자기 아들은 그 나라의 상속자이자 자기의 모든 것이다. 여기서 임금은 ‘하나님’을 상징하며, 아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한다. 그러므로 천국은 하나님께서 예수를 위하여 베푼 혼인 잔치인 것이다. ‘혼인 잔치’라는 말 ‘가무스’는 복수로 되어 있는데 두 가지의미가 있다. 첫째는 혼인 잔치가 여러 날 계속되기 때문인데 유대인들의 혼인 잔치는 7일 동안 밤낮으로 계속된다. 둘째로, 예수 그리스도의 혼인 잔치는 일개인에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각 나라와 민족과 족속과 방언에 모두 해당되는 전 우주적이고 전 시대적인 혼인 잔치인 것이다. 구약에서는 하나님 자신을 이스라엘을 아내로 맞아들인 남편이라고 말씀하셨다.
*사54:5 이는 너를 지으신 이가 네 남편이시라 그의 이름은 만군의 여호와이시며 네 구속자는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시라 그는 온 땅의 하나님이라 일컬음을 받으실 것이라.
신약에서도 그리스도께서 교회와 연합하시는 남편 되심을 말하고 있다.
*엡5:24 그러므로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 아내들도 범사에 자기 남편에게 복종할지니라.
이 혼인 잔치의 천국 묘사는 계시록에서 그 절정을 이룬다. 그리고 예수의 공생애 첫 이적이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시작했다는 것도 큰 의의가 있는 것이다.
당시 대개 부자들의 잔치는 날짜를 정하고 종들을 미리 보내어 손님을 청해 두지만 시각은 알리지 않고 당일에 준비를 마치는 대로 다시 종들이 나가서 인도하여 오는 관습이 있었다.
*에5:8 왕이 이르되 에스더가 말한 대로 하도록 하만을 급히 부르라 하고 이에 왕이 하만과 함께 에스더가 베푼 잔치에 가니라.
더구나 왕자의 잔치는 국가의 대사이므로 이런 절차를 아주 엄밀하고 신중하게 진행했는데 왕이 보낸 이 종들은 세례 요한으로부터 시작하여 그의 모든 사역자들을 지칭한다. 특히 세례 요한의 천국 초대장의 내용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라는 것이었으며 그는 자신이 신부를 취하는 신랑의 친구이기 때문에 자기에게 큰 기쁨이 있으며 예수를 신랑으로 소개하였다. ‘그 청한 사람들’이라는 말 ‘케클레메누스’는 그 초청이 한 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다시 종들을 보내는 시점까지 계속 유효하다는 것으로 혼인 잔치의 때가 되었기 때문에 초청이 시작되어 지금까지 계속 이어져 온다는 것이다.
왕궁의 행사인 혼인 잔치의 초청은 먼저 백성을 대표하는 고관대작들이 그 대상이었다. 그렇다면 천국 잔치의 초청 역시 이스라엘의 선생들과 지도자들에게 우선권이 주어졌다. 이들은 세례 요한에게 ‘네가 누구냐’ ‘왜 세례를 주느냐’고 묻던 사람들로서 지금 예수와 논쟁하고 있는 대제사장과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다. 이들은 ‘오기를 싫어했다.’고 했는데 ‘싫어하다’라는 말 ‘우크 에델론’은 그들의 왕의 초대는 끝까지 원하지 않았다는 것을 암시하는 말이다. 지극히 완고한 마음으로 왕의 초대에 응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아예 거절했던 것이다. 세상의 왕국에서 왕의 초대를 거절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로서 이러한 행동은 일종의 반역으로 간주될 수 있었다. 천국으로의 초대는 세례 요한으로부터 시작하여 작금의 예수에 이르기까지 계속하여 진행되었지만 이 순간까지도 저들은 왕의 초청을 거절하고 오히려 배척했던 것이다.
왕의 영광스러운 초청은 절대적인 명령인 동시에 신하로서는 필연적인 의무이다. 그런데 그 명령을 무시하고 거절하는 일은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왕이 다시 한 번 간청하다시피 종들을 보내는 것도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천국의 왕은 다시 한 번 다른 종들을 보내는데 이는 하나님의 그의 백성들에 대한 깊은 사랑과 오래 참으심을 보여주시는 것이다. 여기서 ‘다른 종들’은 바로 예수 자신과 그의 사역자들이다. 왕은 종들에게 초청장의 내용을 상세히 공개했는데 그것은 풍성한 오찬을 준비했다는 것이다. ‘오찬’이라는 말 ‘아리스톤’은 유대인의 하루 두 끼니 식사 중에 처음 식사를 말하지만 지금은 잔치를 위하여 준비한 식사를 말하는 것이다. 그 오찬은 왕이 친히 자기의 소유물로 정성껏 풍성하게 준비한 것이었다. 그 잔치를 위해서 양과 질적인 면에서 부족함이 없도록 배려한 것이다. 말하자면 천국의 백성들의 구원을 위하여 모든 것이 완벽하게 준비되었는데 신랑은 신부를 위하여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 주고, 권세 있는 말씀과 새로운 언약으로 생명의 떡과 영생의 물을 준비하여 영원히 목마르지 않게 하는 것이다. 이러한 왕의 간절한 초청에도 불구하고 저들은 ‘돌아보지도 않았다.’고 하였다. 이 말은 ‘도외시하다’ ‘개의치 않는다.’라는 의미로 전혀 관심이 없는 상태 즉 큰 무례함과 교만의 극치를 나타낸 말이다. 유대의 지도층들은 요한과 예수의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들이 기대한 메시야와 그의 왕국은 자신들의 전통과 이념과 지식 위에 세워져야 했기 때문이다. 그들이 고대하고 있는 메시야는 다윗의 뒤를 이은 용사로서 군사적인 프로그램에 따라 이스라엘의 독립을 선포하고 로마와 열방을 정복해 나가는 세계 최고, 최강의 나라를 세워야 하는데 예수는 오히려 자신들을 회개하라고 하고 예수의 가르침 속으로 들어오라고 하니 예수를 버리고 만 것이다.
왕의 초청을 거절한 사람들은 왕의 명령에 무관심하고 냉소적인 사람들이었는데 그들이 예수를 따르지 않은 것은 자신들의 ‘신’ 인 재물이나 의식주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세상을 향하여 갔기 때문이다. 즉 하나님께서 주시기 위하여 준비하신 상급보다 자기들의 밭과 상업을 더 가치있는 것으로 여겼던 것이다. 그들은 외형적이고 문자적인 율법을 준수함으로써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것으로 믿으면서 세상의 안전과 쾌락을 좋아했던 바리새인들이었다.
그러나 개인의 용무로 인해 떠나간 일부 바리새인들을 제외하고 남은 지도자들이나 백성들은 종들을 잡아 모욕하고 죽였는데 그 중에 헤롯 안티파스는 세례 요한을 잡아 죽였고 지금은 유대 지도층들이 그 마음속에 시기와 질투가 가득차서 예수에 대한 적대감과 살의를 노출시키고 있다. 물론 그들은 표면적으로는 자신들의 민족의 안전과 사회 질서를 위하여 예수를 죽이는 것이 유익하다고 했으나 실상은 자기들의 이권과 명예와 권력을 사수하기 위한 위선책에 불과했다. ‘모욕하고’라는 말 ‘휘브리산’은 ‘학대하다’라는 말보다 더 혹독하고 극심한 모욕과 처벌을 의미한다. 그들은 예수에게 침을 뱉고 주먹으로 얼굴을 강타하고 채찍으로 때리고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다.
왕의 간곡한 초청을 거절한 자들에게 왕이 분노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그것은 왕에게 대한 모욕이요 반역이기 때문이다. 이제 왕은 종들을 보내는 대신에 군대를 보내어 저들을 진멸하고 그 동네를 불살라 완전히 파멸시킨다. 하나님의 자비와 인내가 끝나는 시점에서 공의의 심판이 시작되는 것이다. 그들은 더 이상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었으며 반대로 살인자들이었다. 예수님의 이 예언은 주후 70년 경 로마의 장군 티토에 의해 문자 그대로 응하였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이 말씀은 예루살렘 성전의 멸망을 예언하시는 마지막 주간에 이스라엘 민족과 예루살렘 성의 멸망을 경고하시는 것이다. 이제 처음 초청을 받은 하나님의 선민인 이스라엘과 지도자들은 왕의 초청에 합당하지 않다는 선고를 받았는데 그 결과 그들에게 베푼 그 초청은 무효화 되었다. 이것은 하나님의 초청이 효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들이 하나님의 은혜와 초청을 거절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제는 혈통적 이스라엘이 아니라 회개한 이스라엘 즉 이방인을 포함한 새로운 이스라엘이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가 되는 권리를 갖는다.
왕은 처음 초청한 자들 대신에 새로운 사람들을 초청하도록 종들에게 명령을 내리는데 그것은 네거리 길에 가서 사람을 만나는 대로 청하여 오라는 것이었다. ‘네거리’는 성읍의 경계에서 지방으로 통하는 광장이다. 이곳은 많은 사람들이 모이고 왕래하기 때문에 이 사람들은 처음 초청받은 사람들과는 완전히 다른 사람들이다. 눅14:21절에는 ‘가난한 자들과 병신들과 소경들과 저는 자들’로 나타난다. 이는 바리새인들이 혐오하는 죄인들이다. 왕의 분노는 왕궁에 들어올 수 없는 무자격자들에게 무조건적인 호의로 나타났다. 다시 말하면 예수의 호의와 초청을 거부했던 자들은 버림을 당하고 세리와 창기, 죄인과 사마리아인과 같은 사람들이 천국에 들어가게 된 것이다.
이제 천국에 초청을 받는 사람은 악한 자나 선한 자나 만나는 대로 모두 데리고 오라는 왕의 지엄하신 명령에 따라 인종의 차별이나 민족의 차별이 없이, 빈부나 귀천의 차별이 없이, 죄인이나 선인의 차별이 없이 모두 전도의 대상이 되었고 초청에 일단 응한 사람은 누구나 왕궁에 들어올 수 있었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 벌어진 것이다. 일국의 왕자의 귀하고 엄한 혼인 예식장에 앉아 있는 손님들이 귀빈들이 아니라 귀천을 막론하고 모두 초청 받아 객석이 모자랄 정도로 손님이 가득하게 되었다. 잔치가 한창 무르익을 즈음에 왕은 잔치에 참여한 손님을 맞이하기 위하여 모습을 드러내었는데 유대인의 잔치는 주인이 처음부터 함께 하지 않고 식사 시간이 되면 자기의 모습을 드러내어 손님을 환영하는 것이 상례로 되어 있다. 이는 마지막 심판에 대한 비유로 예수께서 재림하셔서 양과 염소를 갈라내는 심판을 가리키는 것이다. ‘보러’라는 말 ‘데아사스다이’라는 말은 그냥 지나치며 인사하는 것이 아니라 대상의 참된 성질과 특성을 의도적으로 자세히 살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왕은 누구나 초청하도록 명령을 내렸지만 이 잔치에 부적격한 사람을 찾아내어 그에 합당한 처벌을 내리는 것이다. 고대에서는 잔치의 주인이 초청한 사람에게 예복을 한 벌씩 주는 것이 관례였다. 특별히 사람들이 왕 앞에 나아가려면 예복을 입어야 하는데 길거리에서 초청을 받은 사람들에게 예복이 있을 리가 없었기 때문에 왕궁에서 온 사람들에게 알맞은 예복을 준비했다가 나누어 주어 입게 했을 것이다. 이 예복은 영적으로 말하자면 하나님이 입혀주시는 의의 옷, 구원의 옷이며, 세례 요한과 예수께서 말씀하신 회개와 믿음의 옷이다.
왕은 초청 받고 들어온 사람들을 모두 알현하였는데 그 중에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을 발견하였다. 그 사람은 왕궁에서 주는 옷을 거부하고 자신의 본래의 차림 그대로 잔치 자리에 앉아 있었던 것이다. 왕은 그에게 말하기를 ‘친구여’라고 불렀는데 ‘헤타이레’라고 하는 이 말은 포도원의 비유에서 불평하는 일꾼에게 적용된 말로서 애정이나 선의가 담긴 말이 아니라 손 아래 사람에게 그저 무관심한 투로 하는 말이다. 왕이 ‘다른 사람들은 다 왕이 주는 예복을 입었는데 너는 어찌하여 그 옷을 입지 않고 신성한 잔치에 들어왔느냐.’ 고 물었으나 그 사람은 왕의 질문에도 대답하지 않고 묵묵부답으로 일관하여 왕의 체면을 무리들 앞에서 무참히 짓밟았다. 그가 예복을 입지 않았다는 것은 자신의 지식과 행위로 메시야의 잔치에 참여하는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왕의 물음에도 대답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실로 오만하고 거만한 행동이 아닐 수 없으며 왕의 진노를 사서 죽임을 당해야 마땅한 죄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이에 왕은 잔치를 담당하고 있는 신하에게 명하여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의 수족을 결박하여 움직이지 못하고 하고 그를 바깥 어둠에 내던지고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가는 마지막 형벌에 처하였다. 하나님의 형벌은 철저하고도 즉각적인 형벌이며 더 이상 자비나 기회가 없는 영원한 형벌이다. 그러나 그들의 의식은 생생하여 절망과 한탄과 분노로 불타오를 것이다.
예수께서는 이 비유의 결론적으로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고 하셨다. 처음 청함은 입은 자들은 모두 그 청함을 거절함으로 택함을 받지 못했고, 두 번째 청함을 받은 자들은 다수였으나 그 중에는 예복을 입지 않은 자들이 많아서 택함을 받은 자가 적게 된 것이다. 예복을 입지 않은 자들은 가라지들이고, 염소들이며, 주여, 주여 부르면서 불법을 행하는 자들이다. 여기서 택함을 입었다는 것은 혼인 잔치를 맛볼 수 있는 자격을 얻은 것을 말한다. 그 조건은 부르심을 받고 주께서 주시는 예복을 입는 것이다. 이렇게 하나님의 주권적 사역에 의하여 은혜로 구원을 받는 것이다.
2. 납세에 관한 질문 (22:15-22절)
지금까지 예수께서는 세 가지 비유를 통하여 대적들을 공박하시고 저들의 행위에 대하여 정죄하셨다. 이에 대해 대적들의 반격이 다시 시작되는데 저들은 연합전선을 펴서 각기 다른 교리로 정치적, 신학적, 종교적 질문들을 퍼부었으며 그 중에 첫 번째 질문이 바로 납세에 관한 것이었다.
바리새인들이 먼저 공격의 포문을 열었는데 저들은 서로 상론하기를 ‘어떻게 하면 예수를 말의 올무에 걸리게 할까.’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말로 예수를 시험하는 방법으로 주도면밀하게 함정이나 덫을 설치하여 예수를 죽이고자 한 것이며 저들의 종교적인 지식과 현실적인 모든 상황을 이용하여 덫을 놓고자 한 것이다. 저들은 예수를 정치적 올무에 빠지게 하려고 헤롯 당원들과 함께 제자들을 파송하였는데 서로 잦은 충돌을 일으키는 반대 세력이었으나 예수를 제거하는 데는 협력하고 일치를 이루었다. 저들은 예수의 대답을 이끌어 내기 위해 네 가지 칭찬을 시작하였다.
첫째로, 예수를 향해 ‘선생님이여’라고 불렀는데 그것은 구도자의 모습으로 가장하기 위함이었다. 저들은 전략을 완전히 바꾸어 예수께서 대답하지 않으면 안 되도록 최고의 칭찬을 아끼지 않기 위하여 ‘디다스칼레’라고 했는데 이 말은 랍비와 같은 의미로 진리와 권위를 갖춘 가르치는 자로 인정한 것이다. 이것은 ‘네가 무슨 권위로’ ‘누가 네게 이 권위를 주었느냐’ 물었던 것과는 전혀 달리 예수를 칭찬하고 추켜세우는 전략을 사용하였다.
둘째로, ‘당신은 참되시며’ 라고 하였는데 참으로 이 말은 바리새인들이 입에 담기 힘든 말이었으나 아첨하기 위해서는 불가피하게 사용하였다. 예수의 모든 행동이 참람하고 거짓되며 불의라고 여기는 사람들의 입에서 ‘당신은 참되신 분’이라는 거짓 고백이 나온 것이다.
셋째로, ‘진리로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시며’ 라고 하였다. 하나님의 도는 완전하기 때문에 그것을 참되게 가르치는 자는 어렵고 미묘한 문제라도 명쾌한 대답을 내릴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전제로 한 말이다.
넷째로, 아무로 꺼리는 일이 없으시니‘라고 하였다. 예수는 자신의 가르침을 설파하는데 백성들의 여론과 인기를 고려하지 않았고 권원들의 권세를 두려워하지 않았으며 천한 자나 병든 자나 가난한 자나 세리와 죄인의 친구가 되신 것을 두고 하는 말이다.
다섯째로,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평가하시는 방법인데 하나님은 사람의 중심을 보시며 그 폐부를 감찰하시며 그 마음의 생각을 아시고 그 사람을 판단하신다. 그런 판단을 가지신 분이라는 표현이다.
참으로 저들이 거짓과 아첨과 술수로 예수의 열렬한 지지자처럼 가장하여 예수를 칭찬하였다. 사람은 누구든지 과도한 칭찬을 받으면 잠시 우쭐한 마음이 생겨 교만해지고 진실한 판단의 눈이 흐려지고 만다. 그렇지만 이 칭찬은 모두 사실을 그대로 표현한 것이다. 겉으로는 꿀을 바르고 속으로는 독을 품고 있지만 이것은 예수의 인격과 사역에 대한 가장 공정하고 공평한 평가를 그들 스스로가 내린 것이었다.
한바탕 칭찬이 끝난 후에 저들은 예수에게 질문을 던졌는데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은가, 옳지 않은가.’하고 물었다. 당시 유대 지방의 납세 문제는 민감한 문제였다. 갈릴리 지방의 분봉 왕 헤롯은 종교적으로는 유대인이었으므로 그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은 종교적으로 어려움이 없었다. 그러나 유대 지방에 헤롯이 폐위되고 로마 총독이 다스리게 되자 유대 백성들은 로마 황제인 가이사에게 세금을 직접 바치는 격이 되었다. 이때 로마 황제는 티베리우스 황제였는데 로마 정부는 매 14년마다 한 번씩 각 지방에서 바치는 세금의 총량을 결정하기 위해 인구조사를 실시했다. 이스라엘은 바벨론 포로 시절부터 이방 지배자들에게 조공을 바치는 일이 문제가 되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하나님의 심판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구조사를 즈음하여 갈릴리 사람 유다가 이스라엘의 왕은 하나님이신데 이방 왕들에게 세금을 바쳐 그를 왕으로 인정한다면 이는 하나님께 대한 반역이라고 주장하였다. 그의 반란은 진압되었지만 가이사에 대한 납세의 적법성 문제는 계속하여 신학적 논쟁의 대상이 되었다. 더욱이 하나님의 선민이 예루살렘에 있는 유대 땅의 소출에서 십일조를 성전에 바치면서 그 동일한 소출에서 떼어 이방인 왕의 통치 아래에 있다는 표로 세금을 바치는 것은 대부분 유대인들이 꺼림직하게 여겼다. 나아가 과격분자들인 열심당은 그 일을 수치로 여겼으나 헤롯당은 헤롯 가문을 재흥시키기 위하여 납세를 적극 권장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가 납세를 찬성하면 열심당과 바리새인들과 일반 백성들로부터 외면을 당할 것이고, 납세를 반대하면 헤롯 당원들과 사두개인들과 로마 총독에게 정치범으로 몰리게 되는 것이다. 바리새인들의 생각에는 예수가 로마에 대한 납세를 찬성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율법을 온전히 지키면서 살려는 그들에게도 그 문제는 큰 고민이었다. 당시 로마 정부가 요구하는 세금은 세 가지인데 토지세, 소득세, 인두세이다. 여기서 세금이라는 것은 인두세를 말하는 것인데 남자는 14세 이상부터, 여자는 12세 이상부터 65세에 해당하는 모든 사람에게 부과하였다.
예수께서는 그들의 정중하고 호의적이며 간절한 물음 속에 살의와 악의가 있음을 보시고 저들에게 ‘외식하는 자들’이라고 책망하셨다. 그들은 자기 입으로 예수에게 ‘당신은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않는다.’고 했는데 사실 주님은 예수를 시험하고자 하는 저들의 중심을 다 아셨고 그것을 백성들 앞에 드러내신 것이다. 예수는 그 질문이 가지고 있는 함정과 덫을 바로 아셨던 것이다. 그래서 ‘어찌하여 나를 시험하느냐’고 반문하신 것이다. 이로써 저들은 납세에 대한 저들의 고민을 풀려고 한 것이 아니라 골치 아픈 납세 문제를 통하여 예수를 옭아매려는 악한 의도가 있었음이 만천하에 드러나고 만 것이다.
예수께서는 ‘세금 낼 돈을 내게 보이라.’고 하셨는데 이 세금은 황제가 발행하는 은화로 바쳐야 했다. 고대 사회에서 화폐는 왕권의 상징으로 어떤 왕이 왕위에 오르면 즉시 자신의 화폐를 주조하고 발행하여 왕권을 과시했는데 그 화폐에는 자신의 형상을 새기고 이름을 넣어 권세를 나타내었던 것이다. 이것이 데나리온인데 재임 중인 황제의 이름과 칭호가 찍혀 있고 황제의 재산임을 나타내었다. 현대 사회에서도 화폐에는 왕이나 대통령, 국정 최고 책임자의 형상이 새겨져 있는데 미국 달러에는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의 화상이 있고 중국 인민폐에도 모택동 주석의 사진이 실려 있으며, 우리나라의 만 원권 지폐에도 세종대왕의 형상이 그려져 있다.
세금은 매년 한 사람당 한 데나리온을 바쳤는데 이 인두세는 지금의 주민세와 동일하며, 우리는 일 년에 성인 한 사람 당 5,000원씩 바치는데 비하면 당시는 한 데나리온을 바쳤으므로 일군의 하루 품삯에 해당하는 금액 즉 지금의 화폐 단위로 환산하면 100,000원으로 4인 가족 기준이면 일 년에 400,000원의 세금을 내야 하는데 과도한 세금 징수라 할 수 있다.
바리새인들은 아무 생각도 없이 데나리온 하나를 예수께 가져왔고 예수께서는 동전에 그려져 있는 형상과 글에 대하여 누구의 것이냐고 물으셨다. 당시 데나리온의 한 면에는 황제의 신성을 표시하는 월계관을 쓰고 있는 황제 티베리우스의 두상과 ‘존엄한 신의 존엄한 아들 티베리우스 가이사’라고 쓰여져 있으며, 다른 한 면에는 ‘지극히 높은 사제 폰티펙스 막시무스’라는 라틴어 글과, 신들의 평화를 나타내는 홀과, 감람나무 가지를 각각 왼손과 오른손에 쥐고서 신들의 보좌에 앉아 있는 황제의 어머니의 그림이 새겨져 있었다. 그러므로 이 화폐는 이방인의 종교적인 우상 숭배의 형상이 그려져 있었기 때문에 유대인들에게는 혐오의 대상이 되었던 것이다. 반대로 로마 정부가 이 화폐를 쓰게 하는 것은 자기들이 지배하는 권세를 피지배인들로 하여금 피부로 느끼고 인식과 각성을 시키려는 것이었다.
유대 랍비들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겠다.’고 하신 약속은 구체적으로 아브라함과 사라의 형상이 새겨진 화폐가 세계에 통용되는 것으로 이루어진다고 믿었다. 유대인의 이런 종교관으로 인해 초대 헤롯 왕 시대에는 로마 황제의 형상을 새기는 일을 피했으나 분봉 왕 빌립이 이를 주화에 도입했고 헤롯 아그립바 왕이 이 일을 정식으로 채택하여 사용하였다. 이러한 일들은 현대 사회에도 계속되고 있는데 세계적인 화폐가 달러인 것도 이런 맥락이며, 이를 거부하고 중국이 인민폐를 세계 화폐로 통용하고자 시도하는 것 역시 이런 맥락인 것이다.
예수의 질문에 ‘가이사의 것이니이다.’라고 대답했는데 ‘가이사’라는 명칭은 최초의 로마 황제 ‘율리우스 가이사’의 ‘성’ 이었으나 나중에는 ‘황제’의 공식 명칭이 되었다. 예수의 질문이 너무나 무해하고 당연하게 보여서 바리새인들은 거침없이 대답했지만 그러나 예수께서는 항상 질문자의 입에서 대답을 이끌어 내셨던 것이다. 예수께서는 바리새인들의 말에서 나온 그대로 답변하셨는데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고 하신 것이다. 예수께서는 두 가지로 답변을 주셨다.
첫째,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바치라는 것이다.
유대인들이 가지고 다니며 사용하던 주화는 모두 로마 황제의 주화였고 그것은 곧 유대가 로마 황제의 통치 아래 있음을 증거하는 것이었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뜻으로 유대가 로마 황제의 통치 아래에 있다면 로마에 세금을 바칠 뿐만 아니라 그 법을 준수하고 그들의 합당한 요구에 응하는 것은 당연한 의무라는 것이다. 예수의 이 대답은 반민족적이며 친로마적 입장으로 오해 받을 수 있으며, 저들의 항의와 올무에 잡힐 만한 것이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이어서 또 한 가지 답변을 주신 것이다.
둘째,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십일조와 성전세와 헌물들이다. 예수께서는 상황의 본질을 정확히 아셨는데 실제로 저들은 로마에 세금을 바치는 핑계로 하나님께 바쳐야 할 것은 전혀 바치지 않고 있었다. 실로 그들은 하나님께 대한 의와 인과 신은 버렸던 것이다. 그들은 율법을 지키지 않았고 하나님의 것을 바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가이사의 것까지 가이사에게 바치지 않으려고 항거하다가 나라가 멸망당하고 만다. 결국 주후 70년 성전이 파괴되고 성전세 반 세겔까지 로마 정부의 강요로 로마에 있는 쥬피터 카피돌리누스에게 바치게 되었다. 사람들이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친다’할 때에는 ‘두나이’라는 말을 사용했는데 이 말은 ‘지불한다’라는 단순한 의미이지만 예수께서 ‘바치라’고 하신 말 ‘아포도테’는 마땅히 돌려주어야 할 것을 돌려준다는 의미이다. 그렇다면 가이사에게 바치는 것이나, 하나님께 드리는 것은 모두 우리가 당연히 해야 할 의무이며 반드시 지켜야 할 법인 것이다. 바리새인들은 예수께 이런 대답이 나오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그 대답은 바리새인들과 헤롯당원들의 협공을 피하면서 오히려 그들의 부패한 심장을 찌른 것이었다. 그들은 도리어 ‘하나님의 것’이라는 무거운 짐을 안게 되었다. 그들은 예수의 대답을 기이히 여겼는데 그저 놀라고 감탄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말을 전해들은 그들의 선생들은 누가복음에 보면 ‘예수가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지 말라고 선동했다.’고 고소했던 것이다.
3. 부활에 관한 질문 (22:23-33절)
이번에는 사두개인들이 부활에 관한 문제를 들고 나와 예수를 궁지에 몰아넣고자 하였는데 사두개인들은 주로 예루살렘 귀족들이나 대제사장 무리로 구성되었고 모세 오경만을 정경으로 인정하고 나머지 성경들은 모두 부인하였다. 교리적인 면에서 그들은 인간의 자유의지를 강조하였고 내세나 부활, 천사, 마귀 등의 영적 존재들을 믿지 않았기 때문에 유물론자들이었다. 사두개인들의 눈에는 예수는 부활의 교리를 받아들이고 있는 것으로 비쳐졌던 것이다. 이들은 자신들의 주장을 합리화시키기 위하여 예수를 시험했는데 예수는 그들의 결정적인 죄악을 드러내셨고 귀중한 부활 교리의 핵심을 천명하신 것이다.
사두개인들은 헬라 사상을 받아 들여 물질만이 유일한 실체라고 주장하며 만약 부활이 있다면 그것은 땅에서 생전의 동일한 조건이 그대로 유지되어 현생의 불합리하고 모순된 삶이 변함없이 계속되는 것이기 때문에 그러한 부활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당시 유대교는 사람이 죽으면 최후의 부활까지는 음부에서 그림자처럼 미약한 존재의 형태로 있게 된다고 믿었다. 그러나 사두개인은 사람은 죽음과 더불어 영혼과 육체가 다 없어진다고 믿었다. 왜냐하면 영혼의 존재와 부활의 교리가 모세오경에서 증명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신명기를 인용하여 부활을 증거하려 했던 것이다.
*신31:16 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네 조상과 함께 누우려니와..
구약에서 ‘눕는다’ '잔다‘ ’발을 모은다‘라는 표현은 다시 일어난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기 때문에 죽은 후에 부활한다는 것이다. 예수께서도 회당장 야이로의 딸의 죽음이나 나사로의 죽음에 대하여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고 하였는데 이는 ’일어난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는 것이다.
*신32:39 이제는 나 곧 내가 그인 줄 알라. 나 외에는 신이 없도다. 나는 죽이기도 하며 살리기도 하며 상하게도 하며 낫게도 하나니 내 손에서 능히 빼앗을 자가 없도다.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한다.’는 표현은 죽은 후에도 살아나는 일이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부활을 의미하는데 바리새인들은 이 말씀을 부활로 인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오경 외에 이사야서에도 부활을 증명할 수 있다고 하였다.
*사26:14 그들은 죽었은즉 다시 살지 못하겠고 사망하였은즉 일어나지 못할 것이니 이는 주께서 벌하여 그들을 멸하사 그들의 모든 기억을 없이하셨음이니이다.
악인들은 하나님의 벌을 받기 때문에 죽으면 다시 살지 못하고 사망하면 일어나지 못한다는 말씀은 의인에게는 부활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부활에 대하여 필요 없는 상상과 억측을 불러 일으켰다. 사람이 부활할 때에 어떤 옷을 입고 부활하는가, 어떤 모양으로 부활하는가에 대한 것이었다. 사무엘 선지자는 그 모습을 알아볼 수 있게 나타났는데 죽을 때에 가졌던 모양 그대로, 그 옷차림으로 부활했기 때문에 그러므로 불구자는 불구자의 모양 그대로 부활한다는 것이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유대인들이 성지 팔레스틴에서 부활하기 때문에 외국에서 죽으면 지하의 통로를 통하여 팔레스틴에 이르러야 부활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므로 바리새인 역시 육체의 부활 그 이상은 아니었으며, 이러한 주장에 대해 사두개인들은 비웃고 그 부활을 믿지 않았던 것이다. 또한 바리새인들과 헤롯 당원들의 실패를 보고 자신들의 입장과 논리로 예수를 굴복시켜 경쟁자들을 제압하고 우월성을 드러내고자 했던 것이다.
이들도 바리새인들과 마찬가지로 예수께 ‘선생님이여’라고 불렀는데 존경과 위엄으로 자신들의 악의를 감추고 가장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대제사장이라는 우월감 때문에 아첨은 하지 않았다. 그들은 모세를 언급하면서 유대교의 종교적 이론의 근거가 모세에게 있음을 은연중에 강조하고 신명기 말씀을 인용하여 질문을 시작하였다. 원래 레위기에서는 죽은 형제의 미망인과는 결혼을 금지했다.
*레18:16 너는 네 형제의 아내의 하체를 범하지 말라 이는 네 형제의 하체니라.
*레20:21 누구든지 그의 형제의 아내를 데리고 살면 더러운 일이라 그가 그의 형제의 하체를 범함이니 그들에게 자식이 없으리라.
그러나 형제가 자식이 없이 죽으면 그 형제가 형수를 취하여 아내를 삼도록 했다. 원문에는 ‘아들이 없이 죽으면’이라고 되어 있어 딸은 상관이 없는 것이다.
*신25:5-6 형제들이 함께 사는데 그 중 하나가 죽고 아들이 없거든 그 죽은 자의 아내는 나가서 타인에게 시집가지 말 것이요 그의 남편의 형제가 그에게로 들어가서 그를 맞이하여 아내로 삼아 그의 남편의 형제된 의무를 다 행할 것이요 그 여인이 낳은 첫 아들이 그 죽은 형제의 이름을 잇게 하여 그 이름이 이스라엘 중에서 끊어지지 않게 할 것이니라.
이 수혼법이 적용되는 무자한 과부를 취할 수 있는 이웃 친척도 같은 지경에 사는 형제에게 국한되었으며 그 의무는 거부할 수 있었다. 만약 그 의무를 거부하는 경우에는 당사자가 증인들 앞에서 그 남자의 신을 벗기고, 침을 뱉고, 저주했다. 그러나 예수님 당시에는 거의 퇴화된 법으로 시행하는 이가 드물었다.
사두개인들은 대단히 현실적인 예증을 들었는데 일곱 형제가 수혼법으로 모두 형수와 결혼했지만 아이를 생산하는 데는 실패했다는 것이다. 아이가 있었다면 부활 때에는 아이를 낳은 형제의 아내가 되는 것은 당연하지만 끝까지 아이를 낳지 못했기 때문에 누구의 아내가 될 것인지에 대한 문제가 발생한 것이다. 부활 후의 삶이 이 세상에서의 삶과 정확히 대응된다면 부활한 그 여인은 근친상간의 죄에 대한 책임을 지든지, 아니면 형제들 중의 한 아내로 지목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여인이 부활한 후에 누구의 아내가 될 것인지 그 대답이 주어지지 않는다면 부활의 개념은 불합리한 것이 되는 것이다. 사두개인들은 이 계대 결혼법이 모세가 만든 법인데 모세가 그런 육체의 부활을 믿었다면 율법을 준수했을 때 그런 불합리한 문제가 발생되는 계명을 명했을 리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부활의 교리는 모세도 알지 못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부활의 문제는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바리새인들이 대답할 수 없는 어려운 문제였으며 인간이 대답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사람을 만드시고 그 존재와 운명을 아시는 하나님만이 대답하실 수 있는 것이다.
사두개인들의 질문에 대해 예수께서는 두 가지로 대답하셨다.
첫째, 너희가 성경을 알지 못했다는 것이다.
‘성경’에 해당하는 말 ‘하이 그라파이’는 구약성경 전체를 가리킨다. 예수께서는 부활의 교리가 전 성경에 걸쳐 지지를 받고 있다고 가르치시며, 만약 부활의 교리를 모든 성경에서 가르치지 않는다면 예수의 부활도 불가능한 것이 되고 마는 것이다. 성경은 처음부터 인간이 범죄 함으로 사망에 이르렀고, 어린 양의 대속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아 새 생명에 이르는 것을 계속해서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둘째, 하나님의 능력도 오해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능력’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신 창조주의 능력이다.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흙으로 사람을 만드시고 그 몸에 생기를 불어 넣어 영적인 몸 즉 생령을 만드시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더군다나 죄를 범하고 죽은 인간의 몸에 구세주로 말미암아 다시 한 번 하나님의 영을 불어넣어 생령이 되게 하시는 것 역시 하나님의 능력으로 충분한 것이다. 그러나 사두개인들은 사람을 육체로 만드신 것을 하나님의 최고의 능력이라고 알고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능력을 제한하고 경시하는 큰 죄악을 범하고 있는 것이다. ‘알지 못하는 고로’라는 말 ‘메 에이도테스’는 ‘보지 못하고 있다.’라는 말로서 눈으로 성경을 보고, 현실을 보면서도 그 안에서 바른 진리와 하나님의 성품과 능력을 깨닫지 못하고 있는 사두개인들을 책망하시는 말씀인데 저들은 세상의 철학으로 성경과 하나님을 판단했던 것이다. ‘오해하였도다.’라는 말 ‘폴라나스데’는 ‘너희가 너희 자신을 위하여 스스로 기만하고 있다.’는 뜻인데 이것은 그들의 마음의 완악함으로 인해 하나님의 진리에 대해 무감각한 상태를 지적하는 말이다. 다시 말하면 성경의 진리에 대해 깊이 묵상하고 연구하면 우리 속에 계시는 성령의 감화 감동의 역사로 인해 진리가 깨달아지고 밝히 알 수 있는 일들인데 인간이 하나님의 진리를 알려고 하지도 않고 깨닫기를 원하지도 않으며 오직 인간의 지식과 판단에 의해 하나님의 말씀을 임의로 해석하고 주장하여 진리를 곡해했다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먼저 부활의 성격을 통하여 하나님의 능력을 입증하고 다음에 성경으로 부활을 해석하시는데 현생에서의 인간의 결혼은 하나님께서 인류를 번성시키기 위한 창조 법칙이기 때문에 결혼의 중요한 기능의 하나는 출산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부활 때에는 창조의 목표가 완성되어 개개인이 신령한 몸으로 변화되는 것이기 때문에 더 이상 가정이나 출산은 필요가 없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부활 시에는 결혼으로 인한 자손의 번성은 있을 수 없기 때문에 누구의 아내가 되는 것은 불필요한 것이 된다. 부활 시에는 더 이상 이 세상의 쾌락이나 만족과는 관계가 없고 현세에서는 바랄 수 없는 영원한 즐거움과 안식과 생명에 들어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부활 시에는 지나간 세상의 일들에 대한 미련이나 관계나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서로의 인격을 존중하며 서로 사랑하며 동등한 위치에서 신성의 충만함 속에 거하게 되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이러한 상태를 천사와 비교해서 말씀하시는데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다.’고 하신 것이다. 즉 천사들이 영적인 존재이듯이 부활한 인간의 몸도 영적인 존재이다. 그러나 천사가 되는 것이 아니라 천사의 존재의 특성과 유사한 존재가 되는 것이다.
*요일3;2-3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지는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나시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참모습 그대로 볼 것이기 때문이니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
예수께서는 이제 성경의 증거를 들어 부활의 사실을 입증하시는데 예수께서는 하나님께서 호렙 산에서 모세에게 하신 말씀을 읽어보지 못하였느냐고 물으셨다. 당시 모세는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으나 타지 아니하는 것을 보고 이상히 여겨 가까이 다가갔는데 그때 그 불꽃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왔던 것이다.
*출3:6 또 이르시되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이니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니라. 모세가 하나님 뵈옵기를 두려워하여 얼굴을 가리매..
‘나는 ...의 하나님이다.’ ‘에고 에이미 호 데오스’ 이 말씀은 당신의 언약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자기소개 형식이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었노라.’라고 과거형 시제를 쓰지 않고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라는 현제 시제를 사용하셨다는 것이다. 누가는 ‘하나님에게는 모든 사람이 살았느니라.’고 예수의 해석에 첨가했다. 실로 예수는 부활과 영혼의 존재적 관점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해석하신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 현재 시제를 사용하셨다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더 이상 죽은 자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들의 존재가 소멸되어 버린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살아 있다는 것이다. 비록 그들의 육체는 썩어 흙이 된 지 오래되었지만 그 영혼들은 하나님과 함께 있어서 실제적으로, 그리고 구체적으로 살아 있는 것이다. 그들이 죽어 멸절되었다면 그들과 후손에 대한 하나님의 언약이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일까. 그들이 참여할 수도 없고 지켜볼 수 없는 언약의 성취는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일까. 그러므로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라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이라.’고 하신 것이다. ‘나는 지금 현재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나는 지금 현재 이삭의 하나님이요, 나는 지금 현재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하셨다. 그렇다면 현재 살아 있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께서 그들의 후손인 모세를 만나주시고, 출애굽의 대 사명을 내리시는 것이다. 이 얼마나 부활에 대한 확실한 증거인가. 더 이상 다른 말이나 설명이 필요 없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부활하여 지금 현재 살아 있다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오경의 기록자인 모세의 권위에 호소하여 자기들의 논리를 합리화시키려는 사두개인들에게 오경에 있는 하나님의 직접적인 말씀을 통하여 부활의 교리를 확증하신 것이다. 예수의 이 말씀에 대해 누가는 바리새인으로 확실시 되는 어떤 서기관이 ‘선생님이여 말씀이 옳으니이다.’라고 대답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것은 물론 바리새인들이 반대파인 사두개인들을 완전히 격파하신 것을 기뻐한 것도 있겠지만 그렇게 어려운 신학적 난제를 단지 성경 한 절만으로 해결하신 예수의 신적 지식에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던 것이다.
4. 가장 큰 계명 (22:34-40절)
예수의 탁월한 신적 지혜와 권세 있는 가르침 앞에 사두개인들의 입이 봉해지자 끝으로 바리새인들이 재차 질문에 나섰다. 바리새인들은 성경에서 613개의 계명을 취하여 그것들을 다 지켜 행하려고 했는데 너무나 많은 계명들 중에 어느 계명을 우선적으로 충실해야 할 것인지를 놓고 사실상 고민했던 것이다. 그와 같은 상황에서 율법의 전문가인 한 율법사는 예수를 시험하기 위하여 가장 큰 계명이 무엇인지 물었던 것이다. 그들은 예수에 대하여 외식으로 시작했지만 배우려는 자세 역시 끝까지 견지하면서 논쟁을 끝내려는 의도가 있었다. 사실 예수께서 우월한 가르침을 베풀었기 때문에 내심으로는 동요하고 있었으며 율법에 대한 논쟁은 경건한 사람들이 자주 벌렸던 진지한 주제로서 다양한 규례와 방대한 유전들의 가닥을 잡고 체계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필요했던 것이다.
율법사는 율법의 해설자이고 가르치는 박사들로서 넓게는 서기관에 속한다. 이들은 율법에 정통한 신학자들이며 법률 전문가였다. 예수께서 사두개인들을 물리치신 것 때문에 당시 분위기는 상당히 우호적이며 책잡기 위한 것이기보다는 배우려는 자세가 많았다.
‘율법 중에 어느 것이 큽니까.’ 라는 말 중에 ‘크다’라는 말은 제일 중요한 것을 의미한다. 유대인들은 율법을 연구함으로써 영생을 얻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러한 질문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신명기 6장5절의 말씀을 인용하여 유대인들이 가정이나 성전에서 신앙 고백으로 매일 소리 높여 암송하는 쉐마의 한 부분을 말씀하셨다.
*신6:5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전 인격을 다하고, 전 존재를 다하고, 전 기능을 다하여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는 것이다. ‘사랑하라’는 말 ‘아가페세이스’는 단순한 애정이나 사랑을 나타내는 ‘필레오’가 아니라 자기 이해를 초월한 순수하고 무목적, 무조건적인 사랑을 말하는 것이다. 이런 사랑은 우리 인간에게는 없다. 이 사랑을 하려면 하나님의 근원적인 사랑을 필요로 하는 것이며, 이 사랑의 온전한 모습은 예수에게서만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이 계명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라 하셨는데 마가복음에는 ‘이에서 더 큰 계명은 없다.’고 하였다. 그리고 분명히 이웃 사랑은 두 번째이다. 하나님은 항상 처음이며 인간은 두 번째이지만 그렇다고 둘째를 첫째보다 약화시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둘째를 포괄하며 아우르는 것이다. 하나님은 모든 것의 원인이며 기초이기 때문에 항상 첫째라야 하는 것뿐이다. 이처럼 예수께서는 첫째 계명과 둘째 계명을 동일한 것으로 보신 것이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하나의 계명으로 보신 것인데 이것이 바리새인들의 견해와 다른 것이다. 그들은 사람의 유전으로 하나님께 대한 의무를 다하면 이웃에 대한 의무, 부모에 대한 의무를 하지 않아도 되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들은 원수를 미워했고 조건적인 사랑을 추구했고 죄인들을 미워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사람의 유전을 배제하고 두 계명을 사랑으로 연결하여 하나로 만드시고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라고 하셨다. 모든 율법과 선지자들은 구약 성경의 전체를 말하는 것으로 그 계명들의 근본정신은 여호와 사랑과 이웃 사랑인 것이다. 이 근본정신이 무시되면 법조문은 껍데기에 불과한 것이 된다. 예수의 이 사랑의 계명은 모든 율법 준수의 동기와 그 자세를 규정하고 있으며 적극적인 헌신과 자기희생과 관용을 요구하는 것이다. 바리새인들은 예수의 입을 통하여 사두개파보다 자신들의 입장을 강화하려고 질문을 했지만 예수께서는 저들의 옳은 점은 칭찬하셨으나 그들의 치명적인 허점 즉 그리스도에 대해 오해하고 있는 부분을 ‘다윗의 자손’이라는 질문을 통해 가르치셨다.
5. 다윗의 주이신 그리스도 (22:41-46절)
본문은 세 차례에 걸친 대적들의 질문에 대한 결론적 성격을 띠고 있으며 그들에 대한 경고를 실은 다음 장의 도입부 역할을 한다. 지금까지 질문을 받던 예수께서 도리어 그들에게 역질문을 하신 것이다. 예수께서는 그들이 예수를 핍박하는 이유가 결국 그리스도 관에 잘못된 문제가 있었기 때문임을 아셨다. 따라서 예수는 그들에게 ‘그리스도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누구의 자손이냐’고 물으신 것이다.
이 질문은 유대 지도층과의 공식적인 논쟁의 출발이 된 그들의 질문 곧 ‘네가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느냐.’ ‘누가 이 권세를 주었느냐.’고 물은데 대한 예수의 역습이다. 예수께서는 당신 자신이 ‘그리스도’라고 주장하시는 대신에 그리스도에 대한 바리새인들의 무지와 편견을 드러내서 그들의 판단의 한계를 깨우치시는 것이다. 저들은 이 질문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않고 대답하기를 ‘다윗의 자손입니다.’라고 하였다. 그 견해는 가장 보편적으로 인식되었으며 선지자와 시편에 예언되어 있기 때문이다. 장차 오실 메시야가 다윗의 자손이라는 사실은 예수님 자신도 기쁘게 받아들이셨다. 마태는 예수께서 다윗의 자손이라는 사실을 호칭이나 족보뿐만 아니라 유대인의 왕이라는 표현으로 강조하고 있다. 예수께서도 이러한 사실을 부인하시려는 것이 아니다. 단지 저들이 알고 있는 메시야 개념이 세속화되어 있기 때문에 이에 대한 근본적이고도 철저한 변혁을 이루고자 하신 것이다.
예수께서는 시편 110편을 인용하여 그리스도께서 다윗의 주가 되시는 사실을 밝히신다. 유대인들은 시편 110편이 메시야 예언이라는 점과 그것이 다윗이 성령의 감동을 받아 기록했다는 점에서는 이론이 없었다. 예수께서는 다윗이 성령에 감동되어 그리스도를 자신의 ‘주’라 칭하였다고 했는데 다윗의 자손인 그리스도가 그 조상인 다윗 자신에 의해서 이미 성령이 깨닫게 하심으로 ‘주’로 불렀다는 것이다. 이는 메시야의 초월성을 조상인 다윗의 입의 증거로 입증하시는 것이다. 예수께서 유대인들에게 책잡힌 유일한 것은 자신의 신성 주장 때문이었다. 예수의 신성 주장은 메시야의 초월성 예언을 응하게 하는 것이었는데 유대인들은 메시야의 신성에 대한 이해가 없었던 것이다. 그들이 기다린 메시야는 신성을 가지신 초월자가 아니라 인간적인 용사, 다윗의 전투적인 용맹을 물려받은 한 자손을 기다린 것이다. 또한 메시야가 하나님 자신이거나 아니면 하나님의 아들을 기다린 것이 아니라 모세와 같은 하나님의 종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 메시야가 굉장한 능력과 권세를 가지고 그의 존재와 나라를 영원하게 하리라는 기대감에 부풀어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한 메시야 즉 ‘한 아들을 주셨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는 분을 인정할 수 없었던 것이다. 영원하신 하나님, 만물보다 선재하신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고 그 아버지와 하나가 되는 그런 메시야를 소화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이 점을 가르치시는데 ‘다윗의 많은 자손 중에 누가 그리스도가 되겠느냐, 다윗의 자손이라는 이유만으로 어찌 그리스도가 되겠느냐.’고 하시면서 다윗의 자손이면서 다윗의 주가 되시는 분이 바로 그리스도라는 것이다.
*시110:1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들로 네 발판이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오른쪽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
종이 주인에게 ‘주’라고 부르고, 아내가 남편에게 ‘주’라 부르는 경우는 있지만 왕이 된 다윗이 ‘나의 주’라고 불러야 될 사람은 하나님 한 분 뿐이시다. 그는 이스라엘의 가장 강력한 왕이었고 그보다 더 큰 영광을 누린 사람은 없다. 그러므로 다윗이 성령의 깨닫게 하심으로 이미 자기의 후손인 메시야가 한낱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으로 오시는 분, 하나님과 동등하신 분임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스도의 원수는 마귀와 그의 세력들인데 이들을 발 아래 둔다는 것은 완전한 패배와 굴복을 시킨다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부활하여 승천하심으로 죄와 죽음의 악의 세력들로부터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셨으며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신 것이다. ‘우편이 앉으셨다.’라는 말은 장소적 개념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과 영광과 위엄에 동참하여 통치권을 행사하는 것을 의미한다.
유대인들이 알기로 예수는 갈릴리 출신이며 목수의 아들로 태어났기 때문에 그를 다윗의 후손으로 인정할 수 없었다. 또한 갈릴리에서 선한 것이 나올 수 없다는 사실을 들어 인간 예수를 초월적 존재로 인정하지 않았다. 예수께서 공생애 동안 당신이 그리스도이신 것을 증거하셨는데 즉 권세 있는 가르침과 표적과 기사로 자신을 충분히 나타내셨으나 저들은 자기들의 전통과 왜곡된 성경 해석으로 그리스도를 심사하고 평가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였은즉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고 반문하신 것이다. 바리새인들은 다윗의 자손인 그리스도가 동시에 다윗의 주로서 하나님이시라는 영감된 말씀을 듣고 누구도 감히 이 사실을 부인할 수 없었다. 이것은 그들 중에 누구도 누가 그리스도인지 심사할 자격이 없음을 드러낸 것이다. 마태는 이 해설로 논쟁 기사 전체를 종결짓는다. 예수는 그들의 질문에 다 대답하셨으나 그들은 예수의 질문에 한 번도 바르게 대답하지 못했다. 여기서 유대 지도층과의 합법적이고 공식적인 대화는 끝이 났다. 그러나 저들은 자기들이 알지 못하는 것을 고려하지 않고 자기들이 아는 잘못된 지식으로 자기들의 주를 죽이려는 일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들은 이제 불법으로 예수를 체포하고 거짓으로 고소하는 일 밖에 할 수 없었던 것이다. 예수의 이 말씀은 나중에 성령의 감동을 받은 베드로에 의해 오순절 설교에서 다시 언급되면서 유대 백성들의 마음을 찔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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