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하인드 스토리] 소무 편: 제3회 한절을 잡고 양을 방목하다
(사진설명: 그림으로 보는 소무와 한절과 양)
제3회 한절을 잡고 양을 방목하다
어느새 또 서풍이 불고 북해의 기러기는 또 다시 한나라가 있는 남쪽으로 날아갔다. 소무가 벌써 6년이나 북해에서 남쪽으로 날아가는 기러기를 지켜보았다. 이 6년 동안 소무는 매일 한절을 손에 잡고 양을 방목하고 심지어 잠잘 때에도 한절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춘하추동 사계절이 아무리 바뀌어도 그는 하루도 한나라와 황제와 가족을 잊어본 적이 없었다.
이 곳에서 소무는 원시인이었다. 여름에는 그나마 살기가 괜찮았다. 산열매도 있고 산나물도 있으며 시냇물에는 물고기도 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긴긴 겨울은 지내기가 너무 힘들었다. 천지에는 눈만 덮혀 먹거리를 찾을 곳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었다. 가끔 먹거리가 없으면 소무는 쥐구멍을 찾아 쥐가 모아둔 쌀로 허기를 달랬다.
그날도 떼를 지은 기러기들이 남쪽으로 날아갔다. 장막 밖에서 궁노를 손질하던 소무가 슬픈 기러기 울음소리를 들으며 고향을 그리는데 한 사람이 그를 향해 달려왔다.
“아, 이릉! 자네가 여긴 어떻게?”
이릉이 흉노인의 차림을 했으나 소무는 한 눈에 그를 알아보았다. 이광(李廣)의 손자 이릉과 소건(蘇建)의 손자 소무는 모두 명장의 자손이어서 젊었을 때 함께 한나라 궁중 시중(侍中)을 지내며 친분을 맺었다. 소무가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이릉의 부하들이 장막에 술과 안주를 차렸다. 소무는 그제서야 이릉의 의도를 알아차렸다.
소무가 북해에 온 이듬해 이릉은 흉노에 항복했다. 하지만 그는 감히 소무를 만나러 오지 못했다. 소무를 만날 면목이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위율이 소무의 의지를 흔들고자 이릉이 흉노에 항복한 일을 소무에게 말했다. 그 때 소무는 그 말을 믿지 않았고 오히려 위율에게 한바탕 욕설을 퍼부었다. 그런데 오늘 소무는 이릉이 흉노에 항복했다는 사실을 믿을수밖에 없었다.
두 사람은 장막에 마주 앉았다. 소무가 굳은 얼굴로 물었다.
“선우가 항복을 권하러 자네를 보냈나?”
“그렇네. 선우는 우리의 친분을 알고 언제부터 자네를 권고하라고 했는데 내가 계속 대답하지 못했네. 나에게 그럴 자격이 없다는 것을 아니깐.”
소무가 억지로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럼 지금은 왜 온건가?”
“자네 이제 그만 고생을 끝낼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네.”
“내가 이 고생을 끝낼 때가 되었다고 생각하면 선우에게 말하게. 나를 대한으로 돌려보내라고 말이네.”
이릉이 갑자기 목소리를 높였다.
“자네 이제 돌아가서 뭘 하겠다는 건가? 내가 말해주지. 자네 큰 형은 봉거도위(奉車都尉)를 맡아 폐하의 어가를 붙잡고 계단을 내려가는 중에 기둥에 부딪쳐 어가의 채가 끊어지는 바람에 불경죄를 짓게 되어 자결했네. 자네 동생은 폐하를 따라 제사 지내러 갔다가 환관이 부마를 떠밀어 강물에 빠져 죽음에 이르게 해서 폐하의 황명으로 그 환관을 잡으러 쫓아 갔으나 끝내 잡지 못하는 바람에 역시 독약을 마시고 목숨을 끊었네. 내가 장안을 떠나기 전에 자네 부친도 돌아가시고 자네 부인은 자네가 죽은 줄 알고 개가했네. 세월이 흘러 자네 아들딸의 생사도 알 길이 없네. 자네 이제 집도 없고 가족도 다 잃었는데 그래도 돌아가겠다는 말인가?”
이릉의 말에 소무는 멍하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이릉은 하얗게 질린 소무의 얼굴을 보며 눈물을 머금고 부드러운 억양으로 말을 이었다.
“인생은 아침 이슬과도 같은데 자네는 왜 그리도 스스로를 학대해 인적 하나 없는 이 허허벌판에서 이 고생을 하는가? 자네가 한나라 조정에 대한 신의와 절개를 지킨다고 해서 아는 사람이 있는가? 나도 금방 항복했을 때 미칠 것 같았네. 조정에 미안한 마음이 들고 나 때문에 갇혀 있을 모친을 생각하면 가슴이 찢어질 듯 해서 살아도 사는 게 아니었네. 항복하지 않는 자네 심정이 그 때의 나만 하겠는가? 지금 폐하께서는 연세도 계시고 변덕스러워 아침 저녁으로 어명을 바꿔 벌써 무고하게 목숨을 잃은 대신이 열 명도 넘네. 다른 신하들도 언제 죽을 지 몰라 불안해 하고 있네. 그러니 자네는 누구를 위해 절개를 지킨다는 말인가? 모두들 흉노를 야만인이라 욕하지만 내가 보기에 이렇게 혹독하게 신하를 대하고 신하를 인간으로 보지 않는 폐하께서 오히려 선우보다 더 야만적이시고 인간성이 없으시네. 이렇게 잔인한 폐하를 위해 절개를 지킬 가치가 있다고 보는가?”
“부친과 나는 모두 폐하께서 키워주시고 등용해주셨네. 또 우리 형제 셋 모두 장군이 되고 제후에 책봉된 폐하의 측근이네. 지금 스스로를 희생해 나라에 보답할 기회가 왔으니 극형을 당한다 해도 나는 달갑게 받겠네. 신하가 군주에게 충성하는 것은 아들이 부친에게 효도하는 것처럼 부친을 위해 죽는다 해도 아무런 유감도 없네. 자네 그만 하게.”
이릉은 소무의 장막에서 며칠 지내면서 한절에 달려 있던 들소의 꼬리털로 만든 술이 다 닳아서 떨어진 것을 보았다. 하지만 소무는 양을 방목하든 잠을 자든 언제나 술이 닳아 떨어진 그 한절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그것을 본 이릉은 마음 속 깊이 소무에게 감탄했다. 이릉은 소무의 생활여건이 하도 열악한 것을 보고 물었다.
“정령왕 위율이 여기서 멀지 않는 곳에 있는데 그가 자네를 보살펴 주지 않는가?”
소무가 쓴 웃음을 지었다.
“선우의 동생이 이 곳에 사냥하러 왔다가 소와 양, 장막을 주고 갔는데 위율이 그것을 알고 정령인들을 시켜 소와 양을 모두 훔쳐갔네. 나를 죽게 하려는 심보일 걸세.”
이릉이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도 자네를 핍박해서 항복하게 하려고 그런 것일세. 자네 이번엔 반드시 내 말 좀 듣게.”
“나는 이미 죽은 목숨이네. 선우가 반드시 나의 항복을 받아 내겠다면 나는 아예 자네 앞에서 죽어버리겠네!”
소무가 이토록 충성심이 강한 것을 본 이릉이 길게 탄식했다.
“정말로 진정한 의사(義士)가 따로 없구나! 나와 위율의 죄는 하늘보다 더 크구나!”
이릉은 흐르는 눈물을 걷잡을 수 없었다. 그는 자신은 차마 소무에게 선물을 주지 못하고 아내를 시켜 소무에게 소와 양 몇 십 마리를 주게 했다.
이릉이 떠난 후 소무는 여전히 북해에서 양을 방목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릉이 또 찾아와서 한나라 황제의 붕어 소식을 전했다. 소무는 남쪽을 향해 피를 토하도록 목 놓아 통곡했다. 그리고 수개월 동안 아침 저녁으로 황제를 위해 울었다.
소무의 마음 속에서 황제가 바로 조정이고 황제가 바로 고향이었으니 어찌 울지 않을 수 있겠는가?
(다음 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