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해동역사 속집 제9권 / 지리고(地理考) 9
발해(渤海)
[DCI]ITKC_BT_1433A_0820_010_0010_2007_008_XML DCI복사 URL복사
강역총론(疆域總論)
○ 발해는 말갈(靺鞨)의 종족이다. 당(唐)나라 측천무후(則天武后) 성력(聖曆) 연간에 옛 읍루(挹婁) 지역에
나라를 세웠는데, 지금의 영고탑(寧古塔) 지방이 바로 그곳이다.
《신당서(新唐書)》 발해열전(渤海列傳)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발해는 본디 속말말갈(粟末靺鞨)로서 고구려에 부속되었던 자로, 성은 대씨(大氏)이다. 만세통천(萬歲通天)
연간에 걸걸중상(乞乞仲象)이란 자가 있었는데, 동쪽으로 달아나 요수(遼水)를 건넜다. 그런 다음
태백산(太白山)의 동북쪽을 차지하고는 오루하(奧婁河)를 사이에 두고 성벽을 쌓고 굳게 지켰다. 이에
측천무후(則天武后)가 옥령위 대장군(玉鈴衛大將軍) 이해고(李楷固)를 보내어 쳤다. 이때에는 걸걸중상은
이미 죽고 그의 아들 대조영(大祚榮)이 패잔병을 이끌고 달아났는데, 이해고가 끝까지 추격하여
천문령(天門領)을 넘었으나, 이해고가 패하여 돌아왔다. 대조영은 멀리 떨어져 있음을 믿고 나라를 세워
스스로 진국왕(震國王)이라고 하였다. 예종(睿宗) 선천(先天) 연간에 사신을 파견하여 대조영을
발해군왕(渤海郡王)으로 삼았으며, 그가 거느리고 있는 지역을 홀한주(忽汗州)로 삼고는
영홀한주도독(領忽汗州都督)의 직을 더해 주었다. 이로부터 발해가 비로소 말갈의 호칭을 버리고 오로지
발해라고만 칭하였다.
《구당서(舊唐書)》 발해열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대조영이 이해고에게 맞서니, 당나라 군사가 크게 패하여 측천무후가 대조영을 토벌할 수가 없었다. 이에
대조영은 마침내 그의 무리들을 거느리고 동쪽으로 읍루(揖婁)의 옛 땅으로 들어가 동모산(東牟山)을
차지하여 성을 쌓고서 살았다. 그 뒤 성력(聖曆) 연간에 스스로 서서 진국왕(振國王)이 되었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발해에 대해서 《신당서》와 《구당서》의 발해열전을 참고해 보면, 고구려가 망하자
말갈의 종족인 대씨(大氏)가 가속을 이끌고 영주(營州)로 옮겨 가 살았다. 그 뒤 걸걸중상이란 자가
동쪽으로 달아나 요수(遼水)를 건너와 태백산 동북쪽의 읍루의 옛 지역을 차지하고 있었는데, 그의 아들
대조영이 이로 인하여 그곳에 나라를 세웠다. 태백산은 바로 백두산이다. 그리고 또 발해열전에 이르기를,
“읍루의 동모산을 차지하였는데, 영주에서 동쪽으로 2000리이다.” 하였는데, 《당서》 지리지를 상고해 보면,
영주는 지금의 요양주(遼陽州)에서 서쪽으로 600여 리 되는 지역에 있으며, 여기에서 동쪽으로 2000리
되는 곳은 바로 영고탑성(寧古塔城)이다. 대조영이 개국한 읍루의 옛 지역은 바로 이 지역이다.
○ 개원(開元) 이후로는 발해가 더욱더 커졌으며, 또 고구려의 옛 지역을 차지하였다. 이에 그 사방의
경계는 서쪽으로 개원현(開原縣)에서부터 동쪽으로 바다까지였으며, 북쪽은 흑룡강(黑龍江)에 닿았고 남쪽은
지금의 덕원군(德源郡)에서 서쪽으로 대동강(大同江)에 이어지는 지역까지 이르렀다.
《구당서》 발해열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발해는 영주(營州)에서 동쪽으로 2000리 되는 곳에 있는데, 남쪽으로는 신라와 접하였고, 서쪽으로는
월희말갈(越喜靺鞨)에서 동북쪽으로는 흑수말갈(黑水靺鞨)에까지 이르며, 땅은 사방 2000리이고, 호구는
10여 만 호이다.
《신당서》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발해열전에 이르기를, “발해는 읍루의 동모산(東牟山) 지역을 차지하였는바, 영주에서 동쪽으로 2000리
되는 곳에 있는데, 남쪽으로는 신라와 접하여 이하(泥河)로써 경계를 삼았고, 동쪽은 바다에 닿았으며,
서쪽은 거란과 접하였다. 땅은 사방 5000리이고, 호구는 10여 만 호이며, 부여(扶餘), 옥저(沃沮), 변한(弁韓),
조선(朝鮮) 등 바다 북쪽에 있는 여러 나라를 모두 차지하였다.” 하였다. -삼가 살펴보건대, 변한을
차지하였다고 한 것은 잘못된 것이다.-
○ 개원 7년(719)에 대조영이 죽었다. 대조영의 아들 대무예(大武藝)가 즉위하여 영토를 크게 개척하자,
동북방에 있던 여러 오랑캐 족속들이 모두 두려워하면서 그를 섬겼다.
○ 흑수말갈열전(黑水靺鞨列傳)에 이르기를, “흑수부(黑水部)만이 강역을 완전히 보존하여 16부락으로
나누어져 있으면서 남부(南部)와 북부(北部)로 일컬었으니, 그 위치가 가장 북쪽에 있는 것이다.
흑수말갈에는 불녈부(拂涅部), 우루부(虞婁部), 월희부(越喜部), 철리부(鐵利部) 등의 부가 있다. 그 땅은
남쪽으로는 발해에 닿아 있고, 북쪽과 동쪽은 바다이고, 서쪽으로는 실위(室韋)에 이르는데, 남북은
2000리이고, 동서는 1000리이다. 그 뒤에 발해가 강성해지자 말갈이 모두 발해에 투속(投屬)하였다.”
하였다.
《대청일통지(大淸一統志)》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평양부(平壤府)는 한(漢)나라 때에는 낙랑군이라 하였고, 그 뒤 고구려 왕이 이곳에 도읍하였고, 당나라
때에는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를 설치하였다가 그 뒤에 발해에게 함락되었으며, 오대(五代) 시대에는
고려가 다시 취하여 서경(西京)으로 삼았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발해의 부여부(扶餘府)는 서쪽으로는 거란에 접하였는데, 지금의 개원현이다.
그런즉 발해의 서쪽 경계는 개원까지이다. 흑수말갈은 흑룡강 안팎에 살다가 모두 발해에 투속(投屬)하였다.
그런즉 발해의 북쪽 경계는 흑룡강까지 미친다. 그리고 당나라 현종(玄宗)이 신라 왕에게 신칙한 조서에
이르기를, “경이 패강(浿江)에 방수(防戍)를 설치한 것이 이미 발해의 요충지에 해당된다.” 하였고,
가탐(賈耽)이 이르기를, “신라는 발해와 천정군(泉井郡)으로써 경계를 삼는다.” 하였는데, 천정은 지금의
덕원군이고, 패강은 지금의 대동강이다. 그런즉 동쪽으로 덕원에서부터 서쪽으로 대동강에 이르는 이
지역이 신라와 경계를 나눈 곳이다.
○ 발해는 그 지역을 나누어 5경(京), 15부(府), 62주(州)를 설치하였다.
《신당서》 발해열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그 지역에는 5경, 15부, 62주가 있다.
《요사(遼史)》 지리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태조(太祖)가 동쪽으로 발해를 병합하여 103개의 성읍을 차지하였다.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발해는 경(京), 부(府), 주(州)를 흑수말갈의 남쪽과 고구려의 옛 지역에 설치하였다. 살펴보건대, 발해가
설치한 5경, 15부, 62주는 대부분이 지금의 길림(吉林), 오라(烏喇), 영고탑(寧古塔) 및 조선(朝鮮)의 경계에
있다. 안동부(安東府)에서 통치한 요동의 옛 지역이 비록 발해에 편입되기는 하였으나 설치한 사실을 볼
수가 없다. 지리지와 가탐의 설에서 상고할 수 있는 요(遼)나라 때 동경(東京)의 주현(州縣)은 대부분 그
명호(名號)만을 답습한 것이지, 다시 옛 지역을 수복한 것은 아니다. 《요사》에서 모두 발해의 옛
지역이라고 한 것은 실은 다 그런 것은 아니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발해의 경(京)과 부(府)는 모두 영고탑, 오라 및 우리나라의 북쪽 경계 지역에
있었으며, 요동의 옛 지역은 애당초부터 발해의 강역에 포함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개원현이 비록 부여부가
되기는 하였으나, 이는 깊숙이 비껴 들어가 있는 서쪽 끝 지역의 경계일 뿐이다. 그리고 개원현의 동남쪽이
장령부(長嶺府)가 되고, 또 그 남쪽이 압록부(鴨綠府)가 되기는 하였으나, 모두가 그 변방 경계 지역이었다.
그런즉 발해의 서쪽 경계는 요동으로 한 발자국도 넘어가지 못한 것이 분명하다. 《대청일통지》에서 논한
바가 맞다.
○ 상경 용천부(上京龍泉府)는 지금의 영고탑 호이합하(虎爾哈河)의 동쪽에 있었다.
《신당서》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발해열전에 이르기를, “숙신(肅愼)의 옛 지역을 상경(上京)으로 삼고 부의 이름을 용천부(龍泉府)라고
하였는데, 용주(龍州), 호주(湖州), 발주(渤州)를 관할하였다.” 하였다.
○ 천보(天寶) 말기에 대흠무(大欽茂)가 도성을 상경으로 옮겼는데, 옛 도성에서 300리 떨어진
홀한하(忽汗河)의 동쪽이었다.
○ 지리지에 이르기를, “영주(營州)에서 동쪽으로 180리를 가면 연군성(燕郡城)에 이른다. 또 요수(遼水)를
건너서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까지는 500리인데, 안동도호부는 옛 한나라의 양평성(襄平城)이다.
안동도호부에서 동북쪽으로 옛 개모성(蓋牟城)과 신성(新城)을 경유하고 또다시 발해의 장령부(長嶺府)를
경유해 1500리를 가면 발해의 왕성(王城)에 이르는데, 왕성은 홀한하에 임해 있다. 왕성에서 서남쪽으로
30리 되는 곳에 옛 숙신성(肅愼城)이 있다. 여기에서 북쪽으로 덕리진(德理鎭)을 경유해 가면 남쪽의
흑수말갈에 이르는데, 1000리이다.” 하였다.
《성경통지(盛京通志)》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옛 호주(湖州)는 지금의 영고탑 경내에 있다. 발해에서 설치하였으며, 용천부에 예속되었다. 옛터는 상고할
수가 없다.
○ 옛 발주(勃州)는 지금의 영고탑 경내에 있다. 발해에서 설치하였으며, 용천부에 예속되었다. 옛터는
상고할 수가 없다.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발해의 상경성(上京城)은, 지금 《당서》로써 상고해 보건대, 마땅히 영고탑의 서남쪽 경계이면서
금(金)나라의 상경(上京)과 서로 가까운 곳에 있어야 한다. 《대명일통지(大明一統志)》에 이르기를, “금나라가
요나라를 멸하고 발해의 상경에 도읍하였다.” 한 것은 맞는 말이다.
○ 영고탑은 옛 숙신국의 지역이다. 양한(兩漢) 때에는 읍루(挹婁)라 하였고, 후위(後魏) 때에는 물길(勿吉),
수(隋)나라 때에는 말갈국의 지역이었다. 당나라 때에는 발해가 상경 용천부를 설치하였다. 그 동북쪽은
흑수말갈의 지역이다. 요나라 때에는 여직국(女直國)이었으며, 금나라 초기에는 이곳에 도읍을 세우고 상경
회령부(上京會寧府)라고 하였다. 원나라 때에는 합란부(合蘭府), 수달달로(水達達路) 등의 지역이었고, 명나라
때에는 건주위(建州衛), 모련위(毛憐衛) 등의 지역이었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홀한하는 지금의 호이합하이다. ‘금나라가 요나라를 멸하고서 발해의 상경에
도읍을 건설하였다.’는 것은, 금나라의 상경 회령부를 가리키는데, 상경 회령부는 지금의 영고탑이다.
《당서》에 의거하면, “발해의 상경은 홀한해(忽汗海)의 동쪽에 있는데, 성이 그 강에 임해 있다.” 하였다.
그런즉 지금의 영고탑 호이합하의 동쪽 물가 지역이 바로 용천부이다. 《대청일통지》에서 영고탑의
서남쪽에 있다고 한 것은 잘못된 것이다.
○ 중경 현덕부(中京顯德府)는 상경 용천부에서 서남쪽으로 300리 되는 곳에 있으니, 바로 오라(烏喇)의
동남쪽 경계이다.
《신당서》 발해열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숙신의 옛 지역을 상경으로 삼았다. 그 남쪽을 중경 현덕부라고 하며, 노주(盧州), 현주(顯州), 철주(鐵州),
탕주(湯州), 영주(榮州), 흥주(興州)를 관할한다.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중경 현덕부는 길림 오라성의 동쪽에 있다. 《신당서》 발해열전에, “상경의 남쪽을 중경 현덕부라고 하며,
노주, 현주, 철주, 탕주, 영주, 흥주를 관할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신당서》 지리지에는, “압록강 입구에서
뱃길로 100여 리를 가서 다시 작은 배를 타고 강을 거슬러 동북쪽으로 30리를 올라가면 박작구(泊灼口)에
이르러 발해의 경계에 다다를 수 있다. 여기에서 또다시 500리를 거슬러 올라가면 환도성(丸都城)에
이르는데, 환도성은 옛날에 고구려 왕이 도읍한 곳이다. 여기에서 또다시 동북쪽으로 200리를 거슬러
올라가면 신주(神州)에 이른다. 여기에서 또다시 육로로 400리를 가면 현주에 이르는데, 천보(天寶) 연간에
발해 왕이 도읍한 곳이다.” 하였다. 살펴보건대, 현주는 바로 중경 현덕부로, 당나라 선천(先天) 2년(713)에
홀한주(忽汗州)라고 이름을 하사한 곳이 바로 이곳이다. 《요사》에서 바로 평양성(平壤城)이라고 한 것이나,
또 요나라에서 설치한 동경(東京)의 현주(顯州)는 본디 발해의 중경 현덕부 지역이라고 한 것은 모두
잘못된 것이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신당서》 발해열전에, “천보 말기에 상경으로 도성을 옮겼는데, 옛 도성에서
300리 떨어진 곳이었다.” 하였고, 지리지에는 이르기를, “현주는 천보 연간에 발해 왕이 도읍한 곳이다.
이로부터 정북쪽에서 약간 동쪽으로 600리를 가면 발해의 왕성에 이른다.” 하였다. 현주는 바로 중경
현덕부로, 발해열전에서 이른 바 옛 나라가 이것이다. 왕성은 바로 천보 말기에 옮겨간 상경 용천부이다.
그렇다면 중경 현덕부는 마땅히 상경 용천부에서 서남쪽으로 300리 되는 곳에 있어야 한다. 다만
지리지에서 말한 거리는 발해열전에 나오는 것과 비교해 볼 때 300리나 더 먼데, 어느 것이 옳은지는 알
수가 없다. 그러나 호이합하의 서남쪽, 오라성의 동남쪽 지역에서 벗어나지는 않을 것이다.
○ 동경 용원부(東京龍原府)는 지금의 함경도 경성(鏡城), 부령(富寧) 등지이다.
《신당서》 발해열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예(穢), 맥(貊)의 옛 지역을 동경(東京)으로 삼고는 부의 이름을 용원부(龍原府)라고 하였으며, 또한
책성부(柵城府)라고도 하였는데, 경주(慶州), 염주(鹽州), 목주(穆州), 하주(賀州)를 관할하였다. ○ 용원부의
동남쪽 바닷가는 일본도(日本道)이다. ○ 대흠무(大欽茂)가 정원(貞元) 연간에 도성을 동남쪽에 있는
동경(東京)으로 옮겼다. 대화서(大華嶼)가 왕이 된 후 다시 도성을 상경(上京)으로 옮겼다.
《고금군국지(古今郡國志)》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발해국의 남해부(南海府), 압록부(鴨綠府), 부여부(扶餘府), 책성부(柵城府)는 본디 고구려의 옛 지역이다.
신라의 천정군(泉井郡)에서 책성부까지는 39개의 역(驛)이 있다. -김부식의 《삼국사기》 지리지에서
인용하였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책성이라는 명칭은 고구려에서 비롯되어 발해에서 그대로 답습한 것이다.
《후위서(後魏書)》에 이르기를, “고구려의 동쪽은 책성까지 이른다.” 하였고, 가탐(賈耽)은 말하기를, “책성은
본디 고구려 지역이다.” 한 것이 모두 이것을 두고 한 말이다. 그리고 신라의 천정군은 지금의
덕원군(德源郡)으로, 이곳에서 북쪽으로 39개의 역을 가는 거리를 재 보면 1170리이니 –당나라의 제도에는
30리마다 한 개의 역(驛)을 두었다-, 마땅히 부령부(富寧府)나 경성부(鏡城府)의 경계에 이르는바, 이곳이
동경 용원부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곳은 본디 옥저(沃沮)의 옛 지역인데, 예, 맥의 옛 지역이라고 한
것은 잘못된 것이다. 혹 옥저가 북쪽에 있고 예, 맥이 남쪽에 있으면서 지역이 서로 맞물려 있어 이처럼
혼동하여 말한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또 살펴보건대, 용원부의 동남쪽 바닷가는 일본도(日本道)이다. 《일본일사(日本逸史)》에 의거하면, “발해의
사신이 탄 배가 대부분 하이국(蝦夷國) 및 출우(出羽), 능등(能登)의 지역에 도착하였는데, 일본에서는
그것을 싫어하여 축자도(筑紫道)의 태재부(太宰府)를 경유하게 하였다. 그 뒤에 또 능등에 도착하자,
일본에서는 약속을 어긴 것을 따졌다. 그러자 발해의 사신인 사도몽(史都蒙)이 대답하기를, ‘실로 전에 그런
분부를 받았으므로 우리나라 남부(南府)의 토우포(吐亏浦)에서 출발하여 서쪽으로 대마도(對馬島)의
죽실진(竹室津)을 향해 갔는데, 도중에 바다에서 풍랑을 만나 이곳 금지 구역에 도착한 것이다.’ 하니,
일본에서 끝내 금지시키지 못하고는 드디어 능등에 발해의 사신을 접대할 정관(亭館)을 지었다.” 하였다.
하이국, 출우, 능등 등지는 우리나라의 함경북도와 바다를 사이에 두고 서로 마주 보고 있는 지역으로,
당시에 사신들이 탄 배가 동북쪽의 바다를 지나서 일본에 오간 것을 미루어서 알 수가 있다.
○ 남경 남해부(南京南海府)는 지금의 함경도 북청부(北靑府) 등지이다.
《신당서》 발해열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옥저의 옛 지역을 남경(南京)으로 삼고 부의 이름을 남해부라고 하였는데, 옥주(沃州), 정주(睛州),
초주(椒州)를 관할하였다.
○ 남해(南海)는 신라도(新羅道)이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옥저는 지금의 북청 등지이며, 뒤에 고구려에 편입되었다. -이에 대한 내용은
옥저조(沃沮條)에 상세하게 나온다.- 가탐(賈耽)이 이른바, “발해의 남해부는 옛 고구려 지역이다.”라고 한
것은 맞는 말이다. 남해부라는 칭호 역시 고구려에서 비롯된 것으로, 《삼국사기(三國史記)》 고구려본기에
이르기를, “태조왕(太祖王) 62년(114) 8월에 왕이 남해를 순수(巡狩)하였다.” 하였다. 대개 동북쪽의 지형이
왼쪽은 바다이고 오른쪽은 육지로, 흑룡강 지방에서 바닷가를 따라 서남쪽으로 오면 토문강(土門江)이 바다로 들어가는 곳에 이르고, 다시 바닷가를 따라 서남쪽으로 오면 함흥부(咸興府)의 도련포(都連浦)에
이른다. 토문강이 바다로 들어가는 곳에서 점점 서쪽으로 가면 영고탑 등지가 있으며, 영고탑에서
우리나라의 함경도 바다를 보면 정남쪽에 있다. 그러므로 남해라고 칭한 것이다. 함경도의 남쪽 경계는
바로 천정군(泉井郡)으로, 이곳이 신라와의 경계가 나누어진 곳이다. 그러므로 신라도(新羅道)라고 한
것이다.
○ 서경 압록부(西京鴨綠府)는 지금의 평안도 강계부(江界府) 서북쪽의 강 건너편 지역이다.
《신당서》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발해열전에 이르기를, “고구려의 옛 지역을 서경(西京)으로 삼고 부의 이름을 압록부(鴨綠府)라고 하였는데,
신주(神州), 풍주(豐州), 환주(桓州), 정주(正州)를 관할하였다.” 하였다.
○ 압록은 조공도(朝貢道)이다.
○ 지리지에 이르기를, “압록강 입구에서 뱃길로 100여 리를 가서 다시 작은 배를 타고 강을 거슬러
동북쪽으로 30리를 올라가면 박작구(泊灼口)에 이르러 발해의 경내에 다다를 수 있다. 여기에서 또다시
500리를 거슬러 올라가면 환도현성(丸都縣城)에 이르는데, 환도성은 옛날에 고구려 왕이 도읍한 곳이다.
여기에서 또다시 동북쪽으로 200리를 거슬러 올라가면 신주에 이른다. 여기에서 또다시 육로로 400리를
가면 현주(顯州)에 이르는데, 천보 연간에 발해 왕이 도읍한 곳이다. 이로부터 정북쪽에서 약간 동쪽으로
600리를 가면 발해의 왕성에 이른다.” 하였다.
《요사》 지리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녹주(綠州) 압록군(鴨綠軍)은 절도(節度)를 둔다. 본디 고구려의 옛 나라이다. 발해 때에는 서경
압록부(西京鴨綠府)라고 하였다. 신주, 풍주, 환주, 정주의 일을 도독(都督)한다. 옛 현은 셋으로 신록(神鹿),
신화(神化), 검문(劍門)인데, 모두 폐지되었다.
○ 환주는 고구려 환도성(丸都城)이다. 옛 현은 셋으로 환도(桓都), 신향(神鄕), 기수(淇水)인데, 모두
폐지되었다. 고구려 왕이 이곳에 궁궐을 창건하자 나랏사람들이 신국(新國)이라고 하였다. 5대손인
고쇠(高釗) 때에 이르러 진(晉)나라 강제(康帝) 건원(建元) 초에 모용황(慕容皝)에게 패하여 궁실이
분탕질당하였다. 녹주에 예속되었다. 서남쪽으로 200리 되는 곳에 있다.
○ 풍주는 발해 때 반안군(盤安郡)을 설치하였다. 옛 현은 넷으로 안풍(安豐), 발각(渤恪), 습양(隰壤),
협석(硤石)인데, 모두 폐지되었다. 녹주에 예속되었다.
○ 정주는 본디 비류왕(沸流王)의 옛 지역인데, 나라가 공손강(公孫康)에게 병합되었다. 발해 때에는
비류군(沸流郡)을 설치하였다. 비류수(沸流水)가 있다. 녹주(淥州)에 예속되었다.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녹주성(淥州城)은 평양 서쪽 지역에 있다. 《요사》 지리지에는 고구려의 옛 지역이라고 하였다. 발해 때에는
서경 압록부를 설치하였으며, 요나라 때에는 이를 고쳐서 녹주(淥州) 압록군(鴨淥軍)을 설치하였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박작구(泊灼口)는 지금의 의주와 강을 사이에 두고 있는 지역이다. 환도현성은
바로 환주로 지금의 초산부(楚山府) 강 바깥쪽 지역이다. 신주는 바로 압록부의 치소(治所)로, 고구려
때에는 국내성(國內城)이었고, 요나라 때에는 녹주였는데, 지금의 강계부(江界府) 만포진(滿浦鎭) 강 바깥쪽
지역이 그곳이다. -이에 대한 내용은 고구려 환도성조(丸都城條)에 상세하게 나온다.- 압록부의 치소가 비록
강 바깥쪽에 있었으나 평양(平壤) 서쪽 지역이 모두 그 관할지였다. 이 당시에 당나라에 통하는 길은
압록강 입구에서 배를 띄워 등주(登州)의 바다에 이르렀으므로 조공도(朝貢道)라고 한 것이다.
○ 장령부(長嶺府)는 지금의 영길주(永吉州) 등지이다.
《신당서》 발해열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고구려의 옛 지역을 장령부라고 하였는데, 하주(瑕州)와 하주(河州)를 관할한다.
○ 장령은 영주도(營州道)이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가탐(賈耽)이 이르기를, “안동도호부 -지금의 요양주(遼陽州)이다.- 에서 동북쪽으로
개모성(蓋牟城), 신성(新城)을 경유하고, 또 발해의 장령부를 경유해 1500리를 가면 발해의 왕성에 이른다.”
하였다. 대개 장령부는 당시에 발해가 요동과 왕래하는 길이었으며, 바로 발해의 서쪽 경계의 초입이었던
것이다. 지금 장백산(長白山)의 큰 줄기가 북쪽으로 뻗어 가 납록와집(納綠窩集)이 되고, 또다시 북쪽으로
뻗어 가 오라(烏喇)의 서남쪽에 이르러 고로눌와집(庫魯訥窩集)이 되고, 또다시 북쪽으로 뻗어 가
가이민주돈(歌爾民朱敦)이 되어, 산등성이가 수천 리에 걸쳐 뻗었는데, 이를 통틀어서 장령자(長嶺子)라고
한다. -이에 대한 내용은 《성경통지》에 나온다.- 장령이란 칭호는 예나 지금이나 바뀌지 않았으니 발해의
장령부는 마땅히 지금의 영길주 등지에 있었을 것이다.
○ 부여부(扶餘府)는 지금의 개원현(開原縣)이며, 여기에서 가까운 곳은 막힐부(鄚頡府)이다.
《신당서》 발해열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부여의 옛 지역을 부여부로 삼았다. 이곳에는 항상 강한 군대를 주둔시켜 거란(契丹)을 방어하였으며,
부주(扶州)와 선주(仙州)를 관할하였다. 막힐부는 막주(鄚州)와 고주(高州)를 관할하였다.
○ 부여는 거란도(契丹道)이다.
《요사》 지리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동경도(東京道) 통주(通州) 안원군(安遠軍)은 본디 부여국의 왕성이다. 발해 때에는 부여성(扶餘城)이라고
불렀다. 태조(太祖)가 용주(龍州)로 고쳤고, 성종(聖宗)이 다시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다. 통할하는 현은
넷인데, 통원현(通遠縣)은 본디 발해의 부여현(扶餘縣)이었다. -삼가 살펴보건대, 요나라의 통주(通州)에서
통할하는 통원(通遠), 안원(安遠), 귀인(歸仁), 어곡(漁谷) 네 현은 모두 발해의 현이라고 하는데, 분명한
증거가 없으므로 지금은 수록하지 않았다. 아래 미상(未詳)의 주현조(州縣條)에 나온다.- ○ 용주
황룡부(黃龍府)는 본디 발해의 부여부이다. 태조가 발해를 평정하고서 돌아오다가 이곳에 이르러
붕어(崩御)하자 황룡이 나타난 일이 있으므로 이름을 고쳤다.
《성경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옛 부여부는 당나라 때 발해가 설치한 것인데, 그 지역은 개원현성의 서쪽에 있다.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황룡고성(黃龍古城)이 개원현의 경내에 있는데, 본디 발해의 부여부였다. 지금 개원현이 길림(吉林),
오라(烏喇)의 서북쪽에 있으며, 옛 개원성(開元城)의 치소는 현의 경내에 있지 않은바, 이곳이 황룡부의 옛
성임을 알 수가 있다.
《요사》 지리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동경도(東京道) 한주(韓州) 동평군(東平軍)은 본디 고리국(藁離國)의 옛 치소인 유하현(柳河縣)이다. 고구려가
막힐부를 설치하였다. 막주(鄚州)와 힐주(頡州)를 도독(都督)한다. 발해 때에는 이를 그대로 따랐다. 지금은
폐지되었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발해에서는 항상 강한 군대를 부여부에 두고서 거란을 방어하였다. 지금 개원현은
길림과 오라의 목구멍에 해당되는 반드시 지켜야만 할 요충지인바, 이곳이 부여부인 것이다.
또 살펴보건대, 막힐부 역시 부여의 옛 지역이다. 고리국은 바로 부여가 발생한 곳이며 부여의 북쪽에 있던
나라이다. 그리고 《대청일통지》를 보면 요나라 때에는 한주(韓州)였고, 금나라 때에는 함평로(咸平路)에
속하였고, 원나라 때에는 함평부(咸平府)에 속하였고, 명(明)나라 때에는 삼만위(三萬衛)에 속하였는데,
삼만위는 지금의 개원현이며, 개원의 서쪽은 바로 거란 지역이다. 이것으로 미루어 보건대, 막힐부는
마땅히 개원현의 동북쪽에서 가까운 지역에 있어야 한다.
○ 정리부(定理府)와 안변부(安邊府)는 마땅히 지금의 영고탑 지방에 있어야 한다.
《신당서》 발해열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읍루의 옛 지역을 정리부로 삼았는데, 정주(定州)와 심주(瀋州)를 관할하였다. 안변부는 안주(安州)와
경주(瓊州)를 관할하였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읍루의 옛 지역은 바로 발해가 처음 일어난 지역이며, 지금의 영고탑 지방이다.
-이에 대한 내용은 앞의 영고탑에서 건국하였다는 조항에 상세하게 나온다.- 안변부와 정리부는 바로 이
지역에 있었다.
○ 솔빈부(率賓府)는 지금의 함경도 삼수부(三水府) 서쪽, 압록강 안팎의 지역에 있었다.
《신당서》 발해열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솔빈(率賓)의 옛 지역을 솔빈부로 삼았는데, 화주(華州), 익주(益州), 건주(建州)를 관할하였다.
《요사》 지리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솔빈부는 자사(刺史)를 둔다. 옛 솔빈국의 지역이다.
《성경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휼품로(恤品路)는 금(金)나라에서 설치하였으며, 절도사가 있었다. 본디 요나라 때의 솔빈부 지역이었다.
원(元)나라 때에는 폐지하였고, 지금은 흥경(興京)의 동남쪽 변경 밖에 있다.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폐휼품로(廢恤品路)는 영고탑성의 동남쪽에 있다. 《금사(金史)》 지리지에 이르기를, “휼품로는 요나라 때의
솔빈부로, 본디 솔빈국의 옛 지역이다. 천회(天會) 2년(1124)에 야라로(耶懶路) 도발근(都孛菫)이 사는
지역이 척박하다고 하여 마침내 이곳으로 옮기고서는 인하여 속빈(速頻)이라고 이름하였다.” 하였다.
살펴보건대, 휼품이나 속빈은 바로 솔빈의 와음(訛音)이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솔빈부는 고구려 때에는 졸본(卒本)이라 하고, 금나라 때에는 휼품이라 하였는데,
휼품은 지금의 삼수부 서북쪽, 압록강 안팎의 지역이고, 졸본은 지금의 폐여연군(廢閭延郡)의 강 북쪽
지역이다. -이에 대한 내용은 고구려 흘승골성조(紇升骨城條) 및 고구려 동북계조(東北界條)에 상세하게
나온다.- 지금 삼수 등지의 서쪽에서부터 여연(閭延)의 강 북쪽에 이르기까지가 바로 발해의 솔빈부이다.
그리고 전사(前史)를 상고해 보면 솔빈국(率賓國)이라는 이름이 없는데, 생각건대 졸본이 고구려의 옛
도읍이므로 솔빈국이라고 한 듯하다.
○ 동평부(東平府)와 철리부(鐵利府)는 마땅히 지금의 영고탑 동북쪽의 흑룡강 지방에 있어야 한다.
《신당서》 발해열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불녈(拂涅)의 옛 지역을 동평부로 삼았는데, 이주(伊州), 몽주(蒙州), 타주(沱州), 흑주(黑州), 비주(比州)를
관할하였다. 철리(鐵利)의 옛 지역을 철리부로 삼았는데, 광주(廣州), 분주(汾州), 포주(蒲州), 해주(海州),
의주(義州), 귀주(歸州)를 관할하였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당서》에, “흑수말갈에는 불녈부(拂涅部), 월희부(越喜部), 철리부(鐵利部) 등의
부가 있는데, 모두 발해에 역속(役屬)하였다. 그 땅은 남쪽으로는 발해에 닿아 있고, 북쪽과 동쪽은
바다이고, 서쪽으로는 실위(室韋)에 이르는데, 사방이 수천 리이다.” 하였는데, 지금의 흑룡강 지역이다.
그리고 여러 부들 가운데 더 동쪽에 있는 것을 불녈부라고 하는데, 천보 연간에 당나라에 경정(鯨睛)을
바쳤다고 하였다. 그러니 불녈부는 마땅히 흑룡강 지역에서 가장 동쪽에 있어야 하며, 여기가 바로
동평부(東平府)이다. 철리부는 철리의 옛 땅이니 역시 흑룡강 지방에 있는 것이다.
○ 회원부(懷遠府)와 안원부(安遠府)는 마땅히 지금의 흑룡강 지방 서쪽 경계에 있어야 한다.
《신당서》 발해열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월희말갈(越喜靺鞨)의 옛 지역을 회원부로 삼았는데, 달주(達州), 월주(越州), 회주(懷州), 기주(紀州),
부주(富州), 미주(美州), 복주(福州), 사주(邪州), 지주(芝州)를 관할하였다. 안원부는 영주(寧州), 미주(郿州),
모주(慕州), 상주(常州)를 관할한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월희말갈은 흑수부(黑水部) 소속이다. 《구당서》에 이르기를, “발해는 서쪽으로는
월희말갈에 접하였고 동북쪽으로는 흑수말갈에 이른다.” 하였다. 그렇다면 월희말갈은 흑수부에서 가장
서남쪽에 있는 것으로, 마땅히 지금의 흑룡강주방(黑龍江駐防) 서쪽 경계의 낙니강(諾泥江) 근처 지역에
있어야 하는데, 이곳이 회원부와 안원부인 것이다.
○ 또 독주주(獨奏州)가 있는데, 영주(郢州), 동주(銅州), 속주(涑州)가 있으며, 지계(地界)는 미상이다.
《신당서》 발해열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또 영주, 동주, 속주를 독주주로 삼았다. 속주란 명칭은 속말강(涑沫江)과 가깝기 때문이다. 대개 속말강은
이른바 속말수(粟末水)이다. -삼가 살펴보건대, 독주(獨奏)는 다른 부(府)에 예속되지 않고 직접 진달하는
것을 이른다.
《요사》 지리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동경도(東京道) 영주(郢州) 창성군(彰聖軍)은 발해에서 설치하였다.
○ 동주 광리군(廣利軍)은 발해에서 설치하였다.
○ 속주는 발해에서 설치하였다.
《성경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옛 영주는, 살펴보건대 《요사》를 보면 발해에서 설치하였고, 요나라 때에는 그대로 따랐다. 지금의 영고탑
경내에 있었으며, 옛터는 상고할 수가 없다.
○ 옛 속주는 발해에서 설치하였으며, 요나라 때에 그대로 따랐고, 금나라 때에는 폐지하였는데, 옛터는
상고할 수가 없다. 살펴보건대, 《신당서》 발해열전을 보면, 속말하(粟末河)에 가깝기 때문에 그렇게
이름하였다. 이제 살펴보건대, 속말하는 바로 혼동강(混同江)이니 응당 혼동강 좌우의 지역에 있어야만
한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일본(日本)의 사서(史書)를 보면, 발해의 사신 가운데 약홀주 도독(若忽州都督)이니
현도주 자사(玄菟州刺史)니 하는 칭호가 있는데, 약홀주는 홀한주(忽汗州)의 와전인 듯하고, 현도주는
아마도 헛되이 붙인 관호(官號)일 것이다. 그리고 《구당서》 발해열전을 보면, 계루군왕(桂婁郡王)
대문예(大門藝)라는 칭호가 있는데, 계루는 혹 군명(郡名)인 듯하다. 그러나 모두 다른 사서에서 증명할 수
없기에 지금은 생략하였다.
○ 후당(後唐) 때에는 요나라가 발해를 멸망시켜서 그 지역을 여진(女眞)이 차지하였는바, 바로 금나라가
일어난 지역이다.
《원사(元史)》 지리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옛 숙신 지역은 수당(隋唐) 때에는 흑수말갈이라고 하였으며, 그 뒤에 발해가 강성해지자 말갈이 모두
역속(役屬)하였다. 또 그 뒤에는 발해가 거란의 공격을 받아 흑수말갈이 그 지역을 다시 차지하였다. 그
지역은 동쪽으로는 바다에 닿았고 남쪽 경계는 고려와 접하였고, 서쪽과 북쪽 경계는 거란과 접하였는데,
바로 금나라 시조(始祖)가 살던 부락이다. 초기에는 여진(女眞)이라고 불렀다가 뒤에는 요나라 흥종(興宗)의
휘(諱)를 피하여 여직(女直)으로 고쳤다. 태조(太祖)인 오고타(烏古打)가 요를 멸망시키고는 즉시
상경(上京)에 도읍을 세웠으며, 해릉(海陵)이 연(燕) 지방으로 천도하고는 회령부(會寧府)로 고쳤다.
발해의 경(京)과 부(府)에 대한 잘못된 설을 밝히다 군현(郡縣)의 명목(名目)을 덧붙이다.
○ 요나라가 발해를 병합하고는 그 주현(州縣)을 요동 지역으로 옮기면서 명칭을 그대로 가져다가 써서
강역(疆域)이 분명치 않게 되었다.
《성경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요(遼) 지역은 요나라와 금나라가 발해의 5경(京) 제도를 그대로 따르면서부터 형세가 분명해졌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발해의 지리에 대해서는 《당서》에서 비록 소략하게 서술하기는 하였으나 경과
부의 위치가 질서 정연하였는데, 《요사》에서 어지러워졌다. 요나라가 발해를 병합하고는 백성을 옮기고
고을을 옮기면서 대부분이 옛 명칭을 그대로 가지고 갔다. 그런데 지리지를 찬하는 자가 이를 다시
구별하지 않고 그대로 요동에 있는 주현을 가지고 견강부회하여 서술하였다. 《요사》의 설을 그대로
따른다면 동경(東京)이 서경(西京)의 서쪽에 있게 되고, 중경(中京)이 또 동경의 서쪽에 있게 되니, 그래서야
되겠는가. 《성경통지》에서 이른 바 요나라가 발해의 5경 제도를 답습하여 형세가 분명해졌다고 한 것은
전혀 근거가 없는 말이다. 《요사》 지리지에서 칭한 발해 군현의 명칭에 이르러서는 오히려 상고할 만한
것이 있으므로 모두 아래에 수록하였다. 그러나 역시 그 모두를 믿기는 어려우니, 글을 보는 자가 상세히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 상경 용천부의 위치를 요동이라고 하거나 혹 개원현이라고 한 것은 잘못된 것이다.
《요사》 지리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동경도(東京道) 호주(湖州) 흥리군(興利軍)은 발해에서 설치하였다.
○ 발주(勃州) 청화군(淸化郡)은 발해에서 설치하였다.
○ 상경도(上京道) 보화현(保化縣)은 본디 발해국의 부리현(富利縣) 사람들이다. 태조가 용주(龍州)를
격파하고는 부리현의 사람들을 모두 옮겨서 상경의 남쪽에 흩어져 살게 하였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요나라의 동경은 바로 요양고성(遼陽古城)으로, 그 사방 경계는 동쪽으로는
혼동강(混同江)에 이르고, 서쪽으로는 요수(遼水)를 넘고, 남쪽으로는 압록강에 이른다. 또 동경의 서북쪽에
상경을 설치하였는데, 지금의 광녕현(廣寧縣) 서북쪽의 변경 바깥 지역이다. 발해의 용주, 호주, 발주는 본디
용천부에 예속되어서 지금의 호이합하(虎爾哈河) 동쪽에 있었다. 그런데 요동과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그리고 용천부는 분명히 숙신의 옛 지역이니, 숙신이 또 요동과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원사》 지리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개원로(開元路)는 옛 숙신 지역이다. 수당(隋唐) 시대에는 흑수말갈이라 하였으며, 그 뒤 발해가 강성해지자
말갈이 모두 역속하였다. 또 그 뒤에는 여진(女眞)이 요나라를 멸망시키고는 즉시 상경(上京)에 도읍을
세우고 회령부(會寧府)로 삼았다. 금나라 말기에 금나라의 장수 포선만노(蒲鮮萬奴)가 요동 지역에
웅거하였다. 원나라 초기인 계사년(1233)에 군사를 출동시켜 정벌하여 포선만노를 사로잡았다. 군사가
개원(開元), 휼품(恤品)에 이르기까지 동쪽 지역을 모두 평정하였다. 개원이라는 명칭은 여기에서 처음
나온다. 을미년(1235)에 개원 만호부(開元萬戶府)와 남경 만호부(南京萬戶府)를 설치하였는데, 치소는
황룡부(黃龍府)였다. 지원(至元) 23년(1286)에 이르러서 개원로로 고쳤다.
《성경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개원현(開元縣)은 숙신씨 지역이다. 한나라 때에는 부여국의 경계에 속하였고, 당나라 때에는 발해가 상경
용천부(上京龍泉府)라고 하였다.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옛 삼만위(三萬衛)는 개원현의 성안에 있으며, 명나라 홍무(洪武) 22년(1389)에 설치하였다. 살펴보건대,
《대명일통지》에, “삼만위는 본디 옛 숙신씨 지역이며, 뒤에 읍루(挹婁)라 하였고, 원위(元魏) 때에는
물길(勿吉)이라 하였고, 수나라 때에는 흑수말갈이라 하였다. 당나라 때에는 개원 연간에 흑수부(黑水府)를
설치하였고, 원화(元和) 연간 이후에는 발해에 복속되어 상경 용천부가 되었다. 거란이 발해를 공격하자
흑수말갈이 그 틈을 타서 그 지역을 다시 수복하고는 숙여직(熟女直)이라고 하였다. 그 뒤에 요나라를
멸망시키고는 드디어 여기에 도읍을 세우고서 국호를 금(金)이라고 하였다. 그 뒤에 연(燕) 지역으로 도읍을 옮기고는 이곳을 고쳐서 회령부(會寧府)로 삼고는 상경(上京)이라고 불렀다. 원나라 때에는 개원로(開元路)로
고쳤다. 홍무 21년(1388)에 올자야인걸례미여진군민부(兀者野人乞例迷女眞軍民府)를 설치하였다가 22년에
부를 혁파하고 삼만위를 설치하였다.” 하였다. 살펴보건대, 삼만위는 발해 때에는 부여부(扶餘府)라 하였고,
요나라 때에는 황룡부(黃龍府)라 하였고, 금나라 때에는 회령부라 하였고, 원나라 때에는 개원로라
하였는데, 사실은 같은 곳이다. 《성경통지》에는 이르기를, “옛 개원성(開元城)이 삼만위의 서문(西門) 밖에
있다. 금나라 말기에 금나라의 장수인 포선만노가 요동 지역에 웅거하였는데, 원나라가 군사를 출동시켜
정벌하여 포선만노를 사로잡고는 군사가 개원에 이르러서 동쪽 지역을 모두 평정하였다. 개원이라는
명칭은 여기에서 비롯되었다. 원나라가 그 지역에 개원 만호부(開元萬戶府)를 설치하였다. 그런즉 명나라의
삼만위가 바로 원나라의 개원 만호부임을 잘 알 수가 있다.” 하였다. 《성경통지》에 또 이르기를, “금나라
초기에 도읍을 세워 회령주(會寧州)를 설치하였다가 태종(太宗) 때 회령부로 승격시켜서 상경이라고 불렀다.
원나라 초기에 개원 만호부와 남경 만호부(南京萬戶府)를 설치하였다. 그런즉 원나라의 개원 만호부가 바로
금나라의 회령부임을 알 수가 있다.” 하였다.
《성경통지》에 또 이르기를, “요나라 때 용주(龍州)는 동경(東京)에 예속되었다. 금나라 태조가 도읍을 세워
회령주를 설치하였다. 《요사》에는 이르기를, ‘태조가 황룡부를 두었다가 보령(保寧) 연간에 폐지하였으며,
개태(開泰) 9년(1020)에 다시 용주를 설치하였다.’ 하였다. 그런즉 금나라의 회령부가 바로 요나라의
황룡부임을 알 수가 있다.” 하였다. 《성경통지》에 또 이르기를, “황룡부는 본디 발해의 부여부이다. 요나라
태조가 발해를 평정하다가 이곳에 이르렀을 때 황룡이 성 위에 나타났는데, 길이가 1리에 걸쳐 뻗었으며,
광채가 휘황찬란하였으므로, 이를 인하여 황룡부라고 이름하였다. 그런즉 요나라의 황룡부가 바로 발해의 부여부임을 알 수가 있다.” 하였다.
《성경통지》에 나오는 고적(古蹟)이 실려 있는 바를 상고해 보면, 부여성(扶餘城)은 본디 부여의 왕성으로
지금의 개원현 경내에 있는바, 더욱더 분명하게 알 수 있다. 혹자는 《전요지(全遼志)》에 나오는
‘함평(咸平)이 개원의 동북쪽 모퉁이에 있다’는 것을 근거로 하여 드디어는 명나라의 삼만위가 바로
금나라의 함평부(咸平府)라고 한다. 그러나 함평은 옛 동산(銅山)의 지역으로, 개원현의 남쪽에 있는 것이니,
그 설은 잘못된 것이다. -삼가 살펴보건대, 《전요지》의 설이 옳은 듯하다.-
○ 개원현은 봉천부(奉天府)에서 동북쪽으로 200리 되는 곳에 있다. 당우(唐虞) 시대에는
식신씨(息愼氏)라고 하였고, 상주(商周) 및 진(秦)나라 때에는 숙신씨(肅愼氏)라 하였고, 한(漢)나라 때에는
부여(扶餘)의 경계에 속하였고, 당나라 때에는 흑수주도독부(黑水州都督府)를 설치하였다. 그 뒤에는
발해에서 탈취하여 부여부라고 하였다가 얼마 뒤에 용천부라고 하였다. 요나라 때에는 용주에 속하였다.
금나라 초기에 도읍을 세우고 회령부를 설치하였다. 원나라 초기에는 개원로를 설치하였고, 명나라 때에는
개원(開元)을 개원(開原)으로 고쳤으며, 뒤에는 개원로를 폐지하고 삼만위를 설치하였다. 강희(康煕)
3년(1664, 현종5)에 개원현(開原縣)을 설치하여 봉천부에 예속시켰다. 살펴보건대, 옛 삼만위가 지금의
개원성 성안에 있다. 《대명일통지》를 보면, 옛 개원성이 삼만위의 서문(西門) 밖에 있는바, 개원(開元)이
개원(開原)으로 바뀐 것이지, 서로 다른 곳이 아님을 알 수가 있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개원현은 옛 부여 지역이다. 발해 때에는 부여부였고, 요나라 때에는 황룡부였고,
금나라 때에는 함평부였고, -《전요지》에 나온다.- 원나라 때에는 개원이었고, 명나라 때에는 삼만위였다.
영고탑은 옛 읍루국(挹婁國)이다. 발해 때에는 용천부였고, 요나라 때에는 여진국이었고, 금나라 때에는
회령부였고, 원나라 때에는 수달달로(水達達路)였고, 명나라 때에는 모련위(毛憐衛)였다. 전사(前史)를 두루
상고해 보면, 두 지역의 연혁(沿革)이 또렷하여 분명하게 알 수가 있다. 그런데 《대명일통지》나
《대청일통지》에서는 이를 뒤섞어서 말하여 잘못되게 되었다. 그리고 《대청일통지》를 가지고 말한다면,
영고탑의 연혁에 이르기를, “발해 때에는 용천부였고, 금나라 때에는 회령부였다.” 하고서 –이에 대한
내용은 위의 용천부조(龍泉府條)에 상세하게 나온다.- 또 개원현의 연혁에는 이르기를, “발해 때에는
부여부였다가 얼마 뒤에 용천부가 되었으며, 금나라 때에는 회령부를 설치하였다.” 하였다. 이미 영고탑이
회령부임을 알았으면서 또 개원현에 끌어댄 것은 무슨 이유에서인가?
《당서》를 상고하여 보면, 발해는 초기에 경(京)을 옮기고 부(府)를 옮긴 사실이 없다. 그런데도 “개원현이
처음에는 부여부가 되었다가 얼마 뒤에 용천부가 되었다.”고 한 것은 또 어디에 근거한 것인가? 그리고
성경(盛京)의 연혁에는 이르기를, “금나라 때에는 혼동강(混同江) 동쪽 지역을 상경 회령부로 삼고, 혼동강
서쪽 지역을 함평부로 삼았다.” 하였다. 이것은 과연 분명하고 정확한 견해여서 개원이 회령부가 아님을
더욱더 증명할 수가 있다. 그런데 유독 개원현의 연혁을 말하면서는 제대로 살펴보지 않고서 전에 한 말을
모두 뒤집었으니, 어쩜 그리도 잘못되었단 말인가.
《성경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오라(烏喇), 영고탑(寧古塔)은 주(周)나라 때에는 숙신씨국이었고, 한나라 때에는 읍루국이었고, 당나라
때에는 흑수부를 설치하였다. 발해 때에는 대씨(大氏)가 혼동강의 서쪽에 상경 용천부를 설치하였고, 금나라
때에는 혼동강의 좌우에 조주(肇州), 융주(隆州), 신주(信州)를 두고서 동쪽을 호리개로(呼里改路), 서쪽을
휼품로(恤品路)라고 하였고, 고려와 가까운 남쪽은 합라로(哈懶路)라고 하였다. 살펴보건대, 발해의
상경성(上京城)에 대해, 《대명일통지》에서는 바로 삼만위 지역이라고 하였다. 지금 삼만위의 위치를 상고해
보면, 바로 발해의 부여부 지역이다. 명나라 때에는 아극살산(牙克薩山)으로 경계를 삼았다. 지금
개원(開原)은 위원보(威遠堡)로 경계를 삼는다. 그런즉 발해의 상경은 응당 오라의 경계 안에 속한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성경통지》에서 용천부가 삼만위 지역이 아님을 변증한 것은 옳다. 그러나
혼동강의 서쪽에 있다고 한 것은 역시 잘못됨을 면치 못하였다.
○ 중경 현덕부(中京顯德府)의 위치를 요양주(遼陽州)라고 한 것은 잘못된 것이다.
《요사》 지리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동경(東京) 요양부(遼陽府)는 본디 조선 지역으로, 한나라 때에는 사군(四郡)이었다. 진(晉)나라 때에는
고구려를 함락하였다. 원위(元魏)의 태무제(太武帝)가 사신을 보내었는데 사신이 고구려 왕이 사는
평양성(平壤城)에 이르렀다. 요나라의 동경은 본래 이곳이다. 당나라 고종(高宗)이 고구려를 평정하고는
이곳에 안동도호부를 설치하였다. 그 뒤에는 발해의 대씨(大氏)가 차지하였다. 중종(中宗)이 도읍지에
홀한주(忽汗州)라는 이름을 하사하였는데, 바로 옛 평양성이다. 중경 현덕부라고 불렀다. 태조(太祖)가
발해를 공격하여 홀한성(忽汗城)을 함락하고는 발해 왕 대인선(大諲譔)을 사로잡아 동단국왕(東丹國王)으로
삼은 다음, 태자 도욕(圖欲)을 세워 인황왕(人皇王)으로 삼아 주관하게 하였다. 그런 다음 주(州), 부(府),
군(軍), 성(城)을 87개로 나누었다. 통할하는 현(縣)은 9개이다.
○ 요양현(遼陽縣)은 본디 발해국의 금락현(金樂縣) 지역이다. 한나라 때에는 패수현(浿水縣)이었다.
고구려 때에는 구려현(句麗縣)이라고 고쳤다. 발해 때에는 상락현(常樂縣)이었다. -삼가 살펴보건대,
《대청일통지》에는 금덕(金德)과 상락(常樂)이 현덕부의 현 이름으로 되어 있다. 아래에 상세하게 나온다.-
○ 선향현(仙鄕縣)은 본디 한나라의 요대현(遼隊縣)으로, 발해 때에는 영풍현(永豐縣)이었다. -또 이르기를, “현주(顯州) 산동현(山東縣)은 본디 한나라의 망평현(望平縣)이었다. 목종(穆宗)이 발해 영풍현의 백성들을
떼어 능호(陵戶)로 삼았다.” 하였다.-
○ 학야현(鶴野縣)은 본디 한나라의 거취현(居就縣) 지역으로, 발해 때에는 계산현(鷄山縣)이었는데, 옛날에
정령위(丁令威)의 집이 이곳에 있었다.
○ 탁목현(柝木縣)은 본디 한나라의 망평현 지역이었다. 발해 때에는 화산현(花山縣)이었다.
○ 흥료현(興遼縣)은 본디 한나라 때 평곽현(平郭縣) 지역이었다. 발해 때에는 장녕현(長寧縣)이라고 고쳤다.
당나라 원화(元和) 연간에 발해 왕 대인수(大仁秀)가 남쪽으로 신라를 평정하고 북쪽으로 여러 부(部)를
침략하여 군읍(郡邑)을 개설하면서 드디어 지금의 이름으로 정하였다. -또 이르기를, “상경도(上京道)
장녕현은 본디 현덕부의 현 이름이었다. 태조가 발해를 평정하고는 그 백성들을 이곳으로 옮겼다.” 하였다.-
○ 노주(盧州) 현덕군(玄德軍)은 본디 발해의 삼로군(杉盧郡)이었다. 옛 현은 다섯으로, 산양현(山陽縣),
삼로현(杉盧縣), 한양현(漢陽縣), 백암현(白巖縣), 상암현(霜巖縣)인데, 모두 폐지되었다. -또 이르기를,
“암주(巖州) 백암군(白巖軍)은 본디 발해의 백암성(白巖城)이다. ○ 백암현은 발해가 설치하였다.” 하였다.-
○ 철주(鐵州) 건무군(建武軍)은 본디 한나라 때의 안시현(安市縣)으로, 고구려 때에는 안시성이었다. 당나라
태종(太宗)이 공격하였으나 함락시키지 못하였을 때 설인귀(薛仁貴)가 흰옷을 입고 성 위로 올라간 곳이
바로 이곳이다. 발해 때에는 철주를 설치하였다. 옛 현은 넷으로, 위성현(位城縣), 하단현(河端縣),
창산현(蒼山縣), 용진현(龍珍縣)인데, 모두 폐지되었다. -《오대사(五代史)》에는 이르기를, “유주(幽州)로부터
10여 일을 가서 평산(平山)을 지나고 유관(楡關)을 나가 사적(沙磧) 가운데를 지나 7, 8일을 가면
금주(錦州)에 이른다. 또다시 5, 6일을 가면 해북주(海北州)를 지나고 다시 10여 일을 가면 요수(遼水)를
건너서 발해국의 철주(鐵州)에 이른다.” 하였다.-
○ 탕주(湯州)는 본디 한나라 때의 양평현(襄平縣) 지역이다. 옛 현은 다섯으로, 영봉현(靈峯縣),
상풍현(常豐縣), 백석현(白石縣), 균곡현(均谷縣), 가리현(嘉利縣)인데, 모두 폐지되었다. -또 이르기를,
“건주(乾州) 영산현(靈山縣)은 본디 발해의 영봉현 지역이다.” 하였다.-
○ 흥주(興州) 중흥군(中興軍)은 본디 한나라 때의 해명현(海冥縣) 지역인데, 발해 때 흥주를 설치하였다. 옛
현은 셋으로, 성길현(盛吉縣), 산산현(蒜山縣), 철산현(鐵山縣)인데, 모두 폐지되었다. -또 이르기를,
“중경도(中京道) 성길현은 태조가 발해를 평정하고서 흥주의 성길현 백성들을 포로로 잡아 이곳에 살게
하고는 이를 인하여 현을 설치하였다.” 하였다.-
○ 현주(顯州) 봉선군(奉先軍)은 본디 발해의 현덕부 지역이다.
《자치통감(資治通鑑)》 주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한나라의 요동군에는 요양현이 있는데, 대량수(大梁水)와 요수(遼水)가 만나는 곳이다. 거란이 이곳에
요양부를 두었다. 구양수(歐陽脩)의 《신당서》를 보면, 황룡부에서 서북쪽으로 1300리를 가면 요양부에
이른다고 하였다. 살펴보건대, 요양부는 거란의 동경(東京)인바, 옛 발해 지역은 연경(燕京)에서 2510리
거리이다.
《성경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요양주는 옛 발해성이다. 당나라 때 발해의 대씨가 세웠다. 지금은 주성(州城)의 동북쪽 모퉁이에 있다.
○ 옛 선향현은, 《요사》 지리지를 보면 발해 때에는 영풍현이었다. 살펴보건대, 《대명일통지》를 보면
지금의 해성현성(海城縣城)의 서쪽 60리 되는 곳에 있다.
○ 옛 학야현은, 《요사》 지리지를 보면 발해 때에는 계산현이었다. 살펴보건대, 《대명일통지》를 보면
지금의 요양주성의 서남쪽에 있다. ○ 금주는 당나라가 고구려를 평정하고서 설치하였는데, 뒤에 발해의
삼로군에 속하였다.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요양고성(遼陽古城)은 지금의 요양주(遼陽州) 치소이다. 살펴보건대, 요양은 본디 한나라의 현 이름으로
요동군에 속하였다. 그 뒤에 후한(後漢) 안제(安帝) 때 고쳐서 현도군(玄菟郡)에 속하였다. 진(晉)나라 때에는
폐지되어서 그 터가 오랫동안 인멸되었다. 《한서(漢書)》 지리지와 《수경주(水經注)》를 상고해 보건대, 그
지역은 마땅히 지금 주의 서북쪽 경계인 승덕현(承德縣)과 요양 사이, 양수(梁水)와 혼하(渾河)가 교차해
만나는 지점에 있어야 한다. 지금 요양주는 바로 요나라와 금나라 때의 요양이다.
그런데 《요사》 지리지에는, “요양현은 본디 한나라의 패수현으로, 고구려에서 고쳐서 고구려현이라고
하였으며, 발해 때에는 상락현(常樂縣)이었다.” 하였다. 패수는 한나라 낙랑군(樂浪郡)에 있는바, 지금 조선의
경계 안이며, 금덕(金德)과 상락(常樂)은 바로 발해 중경 현덕부의 현 이름으로, 모두 이곳에는 없다. 또
살펴보건대, 《신당서》를 보면 발해에서 건국한 부(府)와 주(州) 가운데 요양이란 이름은 없다. 그런데
《요사》 지리지에서는 요양고성이라고 하였으며, 《금사》 지리지에서는 곧바로 ‘발해의 요양고성’이라고
하였다. 이는 당나라 중엽에 안동도호부를 폐지한 뒤 발해가 이곳에 성(城)을 두고서 요양이라고 한 일이
혹 있어서 그렇게 말한 것인가? 상고해 보건대, 《요사》 본기(本紀)를 보면, “태조(太祖) 3년(909)에 요동에
행행(幸行)하였다. 신책(神冊) 3년(918)에 요양고성에 행행하였다. 4년에 동평군(東平郡)을 세웠다. 천현(天顯)
1년(926)에 비로소 발해의 부여성(扶餘城)을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진격해 홀한성(忽汗城)을 포위하자
대인선(大諲譔)이 항복하였다. 이에 동단국(東丹國)을 설치하였다. 태종(太宗) 3년(928)에 동단국의 백성을
동평군으로 옮겼다.” 하였다. 그런즉 이는 발해가 평정되기 전에 요양 지역이 일찌감치 거란에 편입되어
처음에는 요동이라고 하였다가 다시 요양이라고 한 것으로, 아마도 요나라 때 명명한 것이지 발해로
말미암은 것은 아닌 듯하다.
그런데 《요사》 지리지에서는 제대로 지리를 상고하지 않고서 드디어는 동경(東京)을 일러 곧바로
평양성이라고 하였으며, 또한 곧바로 홀한주라고 하고, 또다시 곧바로 중경 현덕부라고 하여, 서로 간에
거리가 각각 1000여 리나 되는 지역을 합하여 하나로 하였는바, 매우 잘못되었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요동 지역은 본디 발해에 편입되지 않았는데, -이에 대한 내용은 이미 위에
나왔다.- 어찌 요양주를 중경 현덕부라고 해서야 되겠는가. 요나라의 현주(顯州) 봉선군(奉先軍)은 본디 요수
서쪽 지역에 있었으니, 또 어찌 그곳을 일러 중경 현덕부의 옛 지역이라고 해서야 되겠는가.
《대청일통지》에서 논변한 것이 몹시 상세한바, 그 말이 옳다.
○ 동경 용원부(東京龍原府)의 위치를 봉황성(鳳凰城)이라고 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요사》 지리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동경도(東京道) 개주(開州) 진국군(鎭國軍)은 본디 예(濊), 맥(貊) 지역으로, 고구려 때에는 경주(慶州)가
되었고, 발해 때에는 동경 용원부가 되었다. 궁전(宮殿)이 있으며, 경주, 염주(鹽州), 목주(穆州), 하주(賀州)의
일을 도독(都督)하였다. 옛 현은 6개로 용원현(龍原縣), 영안현(永安縣), 오산현(烏山縣), 벽곡현(壁谷縣),
웅산현(熊山縣), 백양현(白楊縣)인데, 모두 폐지되었다. 돌을 포개 쌓아서 성을 축조하였으며, 성 둘레는
20리이다. 당나라 때 설인귀(薛仁貴)가 고구려를 정벌하면서 고구려의 대장 온사문(溫沙門)과 웅산에서
싸우다가 활 잘 쏘는 자를 석성(石城)에서 사로잡은 곳이 바로 이곳이다. 태조가 발해를 평정하고서 이곳
백성들을 대부락(大部落)으로 옮겨서 성이 마침내 폐지되었다. 성종(聖宗)이 신라를 정벌하고서 돌아오다가
성터를 두루 살펴보고는 다시금 수리하고서 개봉부(開封府)라고 하였다. 통할하는 주가 3개이고 현이
1개이다.
○ 개원현은 본디 책성(柵城) 지역으로, 고구려 때에는 용원현이 되었고, 발해 때에는 그대로 따랐다.
요나라 때에는 초기에 폐지하였다가 성종이 동쪽을 토벌하고서 다시 설치하였다. ○ 염주는 본디 발해의
용하군(龍河郡)이다. 옛 현은 4개로 해양현(海陽縣), 접해현(接海縣), 격천현(格川縣), 용하현(龍河縣)인데,
모두 폐지되었다.
○ 목주 보화군(保化軍)은 본디 발해의 회농군(會農郡)이다. 옛 현은 4개로 회농현(會農縣), 수기현(水岐縣),
순화현(順化縣), 미현현(美縣縣)인데, 모두 폐지되었다.
○ 하주는 본디 발해의 길리군(吉理郡)이다. 옛 현은 4개로 홍하현(洪賀縣), 송성현(送誠縣), 길리현(吉理縣),
석산현(石山縣)인데, 모두 폐지되었다.
○ 종주(宗州) 웅산현은 본디 발해현 지역이다. ○ 상경도(上京道) 영안현(永安縣)은 본디 발해의 용원부
경주의 현 이름인데, 태조가 발해를 평정할 적에 회주(懷州)의 영안현을 격파하고서 그곳 사람들을 옮겨서
성채(城寨)를 두고 현을 세웠다.
《성경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봉황성(鳳凰城)은, 주(周)나라 때에는 조선의 경계로 본디 예(濊) 지역이었으며, 한나라 때에는 현도군에
속하였고, 진(晉)나라 때에는 평주(平州)에 예속되었다. 수나라 때에는 고구려의 경주(慶州) 지역에 속하였다.
당나라가 고구려를 평정하고서는 안동도호부에 속하였다가 뒤에 발해 대씨가 그곳을 차지하여 동경
용원부로 삼았다. 살펴보건대, 《요사》 지리지를 살펴보면, “산 위에 돌을 포개 쌓아서 성을 축조하였으며,
폭이 20리이다.” 하였는데, 지금 봉황성 산 위에는 옛 성이 아직도 남아 있다. ○ 옛 개원현이 봉황성
경내에 있는데, 바로 발해의 용원현 지역이다.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조선의 개주성(開州城)은 함흥부 서북쪽에 있다. 《요사》 지리지를 보면, “본디 예, 맥 지역으로 고구려가
경주를 설치하였고, 발해 때에는 동경 용원부였다.” 하였다. 요나라 때에는 개봉부(開封府) 개원군(開遠軍)을
설치하였으며, 요나라 말기에는 고려에 편입되었는데, 혹 촉막군(蜀莫郡)이라고도 한다. -삼가 살펴보건대,
촉막군은 지금의 개성부(開城府)이다.- 《고려도경(高麗圖經)》을 보면, 군(郡)은 개주의 동쪽에 있으며, 또
개원폐현은 옛 개주의 치소이다. 《요사》 지리지에 이르기를, “본디 책성 지역이다. 고구려가 용원현으로
삼았는데, 경주의 치소였다. 발해 때에는 그대로 따랐다. 요나라 때에는 초기에 폐지하였다가 뒤에 다시
설치하였다.” 하였다.
○ 웅산성(熊山城)이 개주의 서쪽에 있다. 《요사》 지리지를 보면, 발해 때에는 동경 용원부였다. 통할하는
현은 여섯으로 용원현, 영안현, 오산현, 벽곡현, 웅산현, 백양현인데, 요나라 초기에 모두 폐지되었다.
○ 염주성(鹽州城)이 개주의 서북쪽에 있다. 《요사》 지리지를 보면, 염주는 개주에서의 거리가 140리로,
본디 발해에서 설치하였으며, 용하군이라고도 한다. 통할하는 현이 해양현, 접해현, 격천현, 용하현 등 네
현인데, 요나라 초기에 모두 폐지되었으나, 염주는 예전 그대로 설치하였다. 또 목주성(穆州城)이 개주에서
서남쪽으로 120리 되는 곳에 있는데, 발해에서 설치하였으며, 회농군(會農郡)이라고도 한다. 회농현, 수기현,
순화현, 미현현 네 현을 통할한다. 요나라 때에는 그대로 두고서 목주(穆州)라고 하였으며, 치소는
회농현이다. 또 하주성(賀州城) 역시 발해에서 설치하였으며, 길리군(吉理郡)이라고도 한다. 통할하는 현은
홍하현, 송성현, 길리현, 석산현 등 네 현인데, 요나라 때에는 모두 폐지하였으며, 그대로 하주라고 하였다.
그리고 하주는 염주, 목주와 더불어 모두 개주에 예속되었으며, 뒤에 고려에 함락당하였다.
○ 개주고성(開州故城)이 봉황성 동남쪽에 있다. 《요사》 지리지를 보면, 개주 진국군은 본디 예, 맥
지역으로, 고구려 때에는 경주고, 발해 때에는 동경 용원부였다. 태조가 발해를 평정하고서 이곳 백성들을
대부락(大部落)으로 옮겨 성이 마침내 폐지되었다. 성종(聖宗)이 다시금 수리하고서 개봉부(開封府)라고
호칭하였다. 통할하는 주는 염주, 목주, 하주 등 세 주이다. 금나라 때에 폐지되었다. 《전요지》를 보면,
개주성은 요양성에서 동쪽으로 360리 되는 곳에 있는데, 바로 지금의 봉황산보(鳳凰山堡)이다. 살펴보건대,
《후한서》에는, “예, 맥은 고구려, 옥저와 더불어 남쪽으로 진한(辰韓)과 접하였으며, 동쪽으로는 바다에
닿았고, 서쪽으로는 낙랑에 이르렀다.” 하였다. 《당서》에는, “발해는 예, 맥의 옛 지역을 동경으로 삼고는
부의 이름을 용원부라고 하였으며, 또한 책성부라고도 하였는데, 경주, 염주, 목주, 하주를 관할하였다.”
하였으며, 또 이르기를, “용원부의 동남쪽 바닷가는 일본도(日本道)이다.” 하였는바, 그 지역은 지금의 조선
동쪽 경계에 있었다. 상고해 보건대, 명나라 성화(成化) 연간에 조선의 사신이 귀국하다가 봉황산 아래에서
약탈당하고는 다시금 조공하는 길을 옛길의 남쪽으로 바꾸어 주기를 요청하였는데, 이로 인하여 이 성을
쌓았다. 그런즉 봉황성은 실로 조선의 동쪽에 있으며, 요나라 때에는 개주가 되었고, 발해 때에는 용원부가
되었다.
또 《성경통지》를 보면, 봉황성이 봉천부(奉天府)에서 동남쪽으로 420리 되는 곳에 있으며, 요양성은 120리
되는 곳에 있다. 420리에서 120리를 빼면 개주성과 요양성과의 거리가 과연 300여 리임을 알 수가 있다.
그러니 《전요지》의 설 역시 통한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요나라의 개주는 실로 지금의 봉황성에 있었다. 그러나 그것을 발해의 용원부라고
한 것은 잘못된 것이다. 《대청일통지》에서는 《요사》 지리지의 잘못된 설을 따져 보지 않고서 개주의
위치를 함흥부라고 하기도 하고, 봉황성이라고 하기도 하고, 개성부라고도 하여, 동쪽과 서쪽에다가 억지로
끌어다 붙였다. 그러고는 또 조공하는 길을 연 일을 끌어대면서 드디어는 봉황성이 조선의 동쪽에 있다고
하면서 실로 예, 맥의 옛 지역이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더욱더 잘못된 것이다. 예는 본디 우리나라 영동
지역인데 봉황성과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봉황성 지역은 또 동남쪽으로 바다에 접하고 있다고 할 수
없다. 그리고 발해의 서경은 분명히 압록강 상류에 있었다. 만약 봉황성이 용원부에 해당된다고 한다면,
이것은 동경이 도리어 서경의 서쪽에 있는 것이 되니, 말이 되겠는가. 용원부는 우리나라의 경성(鏡城)
지역임이 분명하다.
○ 남경 남해부(南京南海府)의 위치가 봉천부의 해성현이라고 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요사》 지리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동경도(東京道) 해주(海州) 남해군(南海軍)은 본디 옥저국 지역이다. 고구려 때에는 사비성(沙卑城)이었으며,
당나라 이세적(李世勣)이 일찍이 이곳을 공격하였다. 발해 때에는 남경 남해부라고 불렀다. 돌을 포개 쌓아
성을 축조하였으며, 폭이 9리이다. 옥주(沃州), 정주(睛州), 초주(椒州)를 도독(都督)한다. 옛 현은 여섯으로
옥저현(沃沮縣), 취암현(鷲巖縣), 용산현(龍山縣), 빈해현(濱海縣), 승평현(昇平縣), 영천현(靈泉縣)인데, 모두
폐지하였다.
○ 요주(耀州)는 본디 발해의 초주이다. 옛 현은 다섯으로 초산현(椒山縣), 초령현(貂嶺縣), 시천현(澌泉縣),
첨산현(尖山縣), 암연현(巖淵縣)인데, 모두 폐지하였다.
○ 빈주(嬪州) 유원군(柔遠軍)은 본디 발해의 정주이다. 옛 현은 다섯으로 천정현(天睛縣), 신양현(神陽縣),
연지현(蓮池縣), 낭산현(狼山縣), 선암현(仙巖縣)인데, 모두 폐지하였다.
《성경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발해의 남경(南京)은 돌을 포개 쌓아 성을 축조하였는데, 폭이 9리로, 발해 대씨(大氏)가 축조한 것이다.
지금의 해성현 경계에 있다.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해주고성(海州古城)은 지금의 해성현(海城縣) 치소에 있다. 요나라 때에는 해주 남해군을 설치하였고, 또
임명현(臨溟縣)을 두어 해주의 치소로 삼았다. 금나라 때에는 징주(澄州)로 고쳤고, 원나라 때에는 주와
현을 모두 폐지하였고, 명나라 때에는 이곳에 해주를 설치하였다. 살펴보건대, 《요사》 지리지에는 “해주는
본디 옥저국 지역이다. 고구려 때에는 사비성이었다.” 하였으며, 《성경통지》에는 이르기를, “해주에는
사비성이 있는데, 고구려 때 설치하였다. 당나라가 고구려를 정벌할 적에 정명진(程名振)이 사비성을
공격하면서 한밤중에 그 성의 서쪽 성곽으로 들어갔는데, 그 성이 바로 이곳 옛 옥저 지역이다.” 하였다.
상고해 보건대, 《후한서》를 보면, 동옥저는 고구려 개마대산(蓋馬大山)의 동쪽에 있는데, 한나라 때의
개마(蓋馬)는 바로 당나라 때의 개모(蓋牟)로, 지금의 개평현(蓋平縣)이다. 지금 해성은 서남쪽으로 개평
경계까지의 거리가 80리이다. 이는 해성이 바로 개평현의 경내에 있다는 것을 말해 준다. 이것을 가지고
설명해 보면, 해주는 한나라 때에는 옥저였고, 고구려 때에는 사비성이었고, 발해 때에는 남해부였고,
요나라 때에는 해주였음을 다시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
○ 요주고성(耀州古城)은 해성현에서 서남쪽으로 60리 되는 곳에 있다. 살펴보건대, 《요사》 지리지에,
“요주는 본디 발해의 초주이다.” 하였다. 상고해 보건대, 《성경통지》에 “해성은, 당나라 초기에 설치했을 때
개주(蓋州)였다가 발해에 들어와서는 남경 남해부가 되었는데, 옥주, 정주, 초주를 관할하였으며, 현은
6개였다. 요나라 때의 요주는 바로 해주 남해군에서 통치하였던 초주이다.” 하였다. 또 《한서》에는,
“고구려의 개마대산은 평양의 서쪽에 있다.” 하였다. 지금의 해성 서남쪽은 실로 개평의 경계이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옥저는 분명히 우리나라의 북청(北靑) 등지에 있었으며, 발해의 남해부는 바로 그
지역에 있었다. 그런데 해성현과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이미 옥저 강역조(疆域條)에서 다 말하였으므로
여기에서는 많이 논변하지 않는다.
○ 정리부(定理府)의 위치가 봉천부의 승덕현(承德縣)이라고 하거나 흥경(興京)이라고 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요사》 지리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동경도(東京道) 심주(瀋州) 소덕군(昭德軍)은 본디 읍루국 지역이며, 발해에서 심주를 세웠다. 옛 현은
9개인데 모두 폐지하였다가 태종(太宗)이 흥료군(興遼軍)을 설치하였으며, 뒤에 이름을 바꾸었다. ○
정리부에는 자사(刺史)를 둔다. 옛 읍루국 지역이다.
《원사》 지리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심양로(瀋陽路)는 본디 읍루의 옛 지역이다. 발해 대씨가 정리부를 두고서 심주와 정주(定州)를
도독하였는데, 이곳이 심주 지역이다.
《성경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봉천부 승덕현(承德縣)은 주(周)나라 때에는 숙신씨(肅愼氏) 지역이었고, 한나라 때에는 읍루국이었다.
당나라 예종(睿宗) 때에는 발해의 대씨에게 속하여 심주를 설치하였으며, 정리부에서 관할하였다.
○ 옛 심주는 당나라 때 발해가 설치하여 정리부에 예속되게 하였다. 옛터는 상고할 수가 없다. 지금
살펴보건대, 심수(瀋水)가 승덕현의 성에서 남쪽으로 4리 되는 곳에 있으며, 옛 심주가 지금 성안의 지역에
있다.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봉천부 승덕현은 진(秦)나라 이전에는 숙신씨 지역이었고, 한나라, 진(晉)나라, 당나라 때에는 읍루국에
속하였다. 당나라 예종(睿宗) 때 발해 대씨에게 속하여 심주를 설치하였는데, 정리부에서 관할하였다.
요나라 때에는 흥료군을 설치하였고, 뒤에 소덕군(昭德軍)으로 개칭하였다. 금나라 때에는 심주(瀋州)의
치소가 되었다. 원나라 초기에는 심주에 안무고려군민총관부(按撫高麗軍民摠管府)를 설치하였다가 얼마
뒤에 심양로(瀋陽路)로 고쳤다. 명나라 홍무(洪武) 연간에 심양중위(瀋陽中衛)를 두어
요동도지휘사(遼東都指揮司)에 예속시켰다. 본조에 들어와서는 성경(盛京)이 되었으며, 강희(康煕)
13년(1674)에 승덕현을 설치하여 수읍(首邑)으로 삼았다. 살펴보건대, 《당서》 발해열전을 보면, 읍루의 옛
지역이 정리부라고 하였다.
《요사》에는 이르기를, “심주는 본디 읍루국 지역이었다. 발해가 심주를 세웠다.” 하였는바, 두 설이 딱
들어맞는다. 《성경통지》의 고적조(古蹟條)에는 “승덕현에는 오루하(奧婁河)가 있다.”고 실려 있으며,
주(注)에는 이르기를, “오루(奧婁)는 바로 읍루(挹婁)이다.” 하였다. 지금의 승덕현은 실로 요심주(遼瀋州)인바,
이곳이 옛 읍루의 지역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 읍루고성(挹婁故城)이 철령현(鐵嶺縣)에서 남쪽으로 60리 되는 곳에 있다. 요나라 때에는 흥주(興州)
중흥군(中興軍)을 설치하였고 상안현(常安縣)을 설치하였다. 금나라 때에는 경주(慶州)였다. 대정(大定)
29년(1189)에 읍루현(挹婁縣)으로 고쳐서 심주에 속하게 하였다. 원나라 때에는 폐지되었으며, 명나라
때에는 와전(訛傳)되어 의로성(懿路城)이 되었으며, 지금은 의로참(懿路站)이 되었다. 살펴보건대, 《요사》
지리지에, “흥주는 본디 한나라 때의 해명현(海冥縣) 지역이다. 발해 때에는 흥주를 설치하였다.” 하였으며,
《금사》 지리지에는, “읍루현은 요나라 때에는 옛 흥주의 상안현이었다. 요나라가 일찍이 정리부를 이곳에
설치하였는데, 본디 읍루의 옛 지역이었다.” 하였다. 《요사》와 《금사》의 두 지리지가 서로 다른데, 마땅히
《금사》 지리지를 따라야 한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요나라의 심주는 실로 지금의 승덕현에 있었다. 그러나 그것을 일러 발해
정리부의 심주라고 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정리부는 바로 읍루의 옛 지역으로 영고탑 지방에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승덕현과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읍루가 승덕현 지역이 아님에 대해서는 이미
앞에서 다 말하였는바, -읍루 강역조에 나온다.- 다시금 논변할 필요가 없다. 그리고 정리부 한 조항에
대해서 말한다면, 부여부(扶餘府)가 거란도(契丹道)가 되었는바, 이는 서쪽 변경의 끝 경계이다. 만약
승덕현이 정리부에 해당된다면, 이는 정리부가 도리어 부여부의 서쪽에 있는 것이니, 그럴 수가 있겠는가.
《요사》 본기(本紀)에 “천현(天顯) 1년(926) 1월에 발해의 부여성(扶餘城)을 함락하고는 진격하여
홀한성(忽汗城)을 격파하자, 대인선(大諲譔)이 나와 항복하였다. 2월에 남해부(南海府)와 정리부 등 여러
부가 와서 조회하였다.” 하였다. 정리부가 만약 부여부의 서쪽에 있었다면 어찌하여 먼저 요나라 군사의
침략을 받지 않고 홀한성이 격파되어 망한 뒤에야 비로소 항복하였겠는가. 정리부가 홀한성 –바로
영고탑이다.- 의 동쪽에 있었음은 더욱더 분명하다. 후세에 지지(地志)를 찬하는 자가 이를 상고하지 않고
《요사》 지리지의 잘못된 설을 답습하였는바, 매우 잘못된 것이다.
《성경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흥경(興京)은 주(周)나라 때에는 숙신씨 지역이었고, 한나라 때에는 읍루 지역이었고, 남북조(南北朝)
시대에는 물길(勿吉) 지역이었고, 수(隋)나라 때에는 고구려 지역이었으며, 당나라 초기에는 연주(燕州)를
설치하였다. 뒤에 발해 대씨가 차지하여 이름을 고쳐서 정리부에 예속되게 하였다. 요나라 때에는 정리부의
지역이 심주(瀋州)에 속하였다. 원나라 때에는 심양로(瀋陽路)를 설치하였으며, 명나라 때에는
건주위(建州衛) 지역이 되었다.
○ 흥경의 고적(古蹟)인 옛 정주(定州)는 고구려가 설치하였으며, 발해 때에는 그대로 따라서 정리부에
속하였다. 요나라 때에는 고쳐서 정주(定州) 보령군(保寧軍)이 되었고, 금나라 때에는 폐지하였다. -삼가
살펴보건대, 흥경을 정리부라고 한 것은 역시 잘못되었다.
부(附)
《요사》 지리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쌍주(雙州) 보안군(保安軍)은 본디 읍루의 옛 지역이다. 발해 때에는 안정군(安定郡)을 설치하였으며,
통할하는 현은 1개이다. 쌍성현(雙城縣)은 본디 발해의 안이현(安夷縣) 지역이다.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쌍성폐현(雙城廢縣)은 철령현(鐵嶺縣)의 서쪽에 있다. 《요사》 지리지에, “쌍주 보안군은 본디 읍루의 옛
지역이다. 발해 때에는 안정군을 설치하였고, 오래 지나서는 폐지하였다.” 하였으며, 《전요지》에 이르기를,
“쌍성현은 철령성에서 서쪽으로 60리 되는 곳에 있다.” 하였다. 상고해 보건대, 《성경통지》를 보면
철령현이 실로 읍루국 지역에 있으며, 쌍주가 철령성 서쪽에 있는바, 역시 읍루고성임을 알 수가 있다.
-삼가 살펴보건대, 안정군은 본디 읍루의 지역이었으니, 이곳은 정리부와 안변부(安邊府) 가운데에서 한
부가 관할하였을 듯하다. 그러니 마땅히 영고탑 지방에 있어야 하는바, 철령현에 있다고 한 것도 잘못된
것이다.
○ 솔빈부(率賓府)의 위치를 요서(遼西) 지역이라고 하거나 봉황성(鳳凰城) 지역이라고 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요사》 지리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동경도(東京道) 현주(顯州) 봉선군(奉先軍)이 통할하는 강주(康州)는, 세종(世宗)이 발해 솔빈부의 백성들을
옮겨서 설치하였으며, 통할하는 현은 1개이다. 솔빈현(率賓縣)은 본디 발해의 솔빈부 지역이다.
《성경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옛 솔빈부는 발해가 설치하였고, 요나라 때에는 그대로 따랐는데, 옛터를 상고할 수가 없다. 살펴보건대,
발해열전을 보면, “발해는 옛 솔빈국 지역에 솔빈부를 설치하였는데, 화주(華州), 익주(益州), 건주(建州)를
관할하였다.” 하였다. 요나라 때에는 주(州)는 폐지하고 부(府)는 그대로 두었다. 금나라와 원나라 때에는
주와 부를 모두 폐지하였다. 지금 살펴보건대, 건주는 흥경의 경계 안에 있으며, 솔빈부와 화주, 익주는
모두 봉황성의 경계에서 가깝다.
○ 옛 화주는 당나라 때 발해에서 설치하였다. 요나라 때에는 솔빈부에 편입되었다. 지금 옛터는 상고할
수가 없다.
○ 옛 익주는 발해가 설치하였다. 요나라 때에는 폐지되었다. 지금 봉황성의 동남쪽 120여 리 되는 곳의
조선의 경계에 익주성(益州城)이 있는데, 세속에서는 애주(愛州)라고 잘못 부르고 있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요나라 때 솔빈현은 현주(顯州)에 예속되어 있었는데, 현주는 요서(遼西)에 있는
의무려산(醫巫閭山) 남쪽에 있는바, 그곳을 일러 발해의 솔빈부 지역이라고 하는 것은 매우 잘못된 것이다.
《성경통지》에 이른 바 익주는 우리나라의 의주(義州)를 가리킨다. 또 화주와 익주는 봉황성 경계 안에
있다고 하였는데, 봉황성이나 의주 등지는 발해 때에는 압록부(鴨淥府)에 속하였다. 그런데 어떻게 다시
솔빈부를 둘 수 있었겠는가. 그리고 솔빈부는 금나라 때에는 휼품로(恤品路) -지금의 삼수부(三水府)이다.-
가 되었은즉, 봉황성 등지와 휼품로는 동서 간의 간격이 멀어서 서로 속하지 않는다.
○ 동평부(東平府)의 위치를 승덕현(承德縣)이나 광녕(廣寧) 등지라고 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요사》 지리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동경도(東京道) 요주(遼州) 시평군(始平軍)은 본디 불녈국(拂涅國)의 국성(國城)인데, 발해 때에는 동평부였다.
당나라 태종이 고구려를 친히 정벌하였을 적에 이세적(李世勣)이 함락시킨 요성(遼城)과 고종(高宗)이
조서를 내려 정명진(程名振)ㆍ소정방(蘇定方)으로 하여금 고구려를 정토하게 하였을 적에 신성(新城)에
이르러서 크게 격파한 곳이 바로 이 지역이다. 태조(太祖)가 발해를 함락시킬 적에 먼저 동평부를 격파하고
백성들을 옮겨서 채웠다. 옛 동평부는 이주(伊州), 몽주(蒙州), 타주(陀州), 흑주(黑州), 비주(比州) 등 다섯
주를 도독(都督)하며, 관할하는 현이 모두 18개인데, 지금은 폐지되었다. 요하(遼河), 양장하(羊腸河),
추자하(錐子河), 사산(蛇山), 낭산(狼山), 흑산(黑山), 건자산(巾子山)이 있다. 통할하는 주는 1개이다.
기주(棋州) 우성군(祐聖軍)은 본디 발해의 몽주 지역이었다.
○ 요양부(遼陽府) 자몽현(紫蒙縣)은 본디 한나라의 누방현(鏤方縣) 지역이었다. 뒤에 불녈국에서 동평부를
두어 몽주 자몽현을 통치하게 하였다가 뒤에 요성으로 옮겨 황령현(黃嶺縣)에 병합되었다. 발해 때에는
다시 자몽현이 되었다.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지금 상고해 보건대, 《당서》를 보면, 속말말갈(粟末靺鞨)이 가장 남쪽에 위치하였고, 거기에서 조금
동북쪽에 있는 것이 골출부(汨泏部)이고, 더 동쪽은 불녈부(拂涅部)이다. 그 지역은 지금의
승덕현(承德縣)이나 광녕(廣寧)에서 아주 멀다. 《요사》 지리지에서는 요주에 동평군이라는 이름이 있다는
이유로 마침내는 그곳이 바로 발해의 동평부라고 하고, 또 주의 이름이 요(遼)임을 인하여 마침내는 그곳이
바로 당나라 때의 요성이나 신성이라고 하였는데, 이는 모두 잘못된 것이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동평부는 본디 흑룡강(黑龍江) 지방에 있었다. 그런데 광녕 등지와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대청일통지》에서 《요사》 지리지의 잘못을 논변한 것은 옳다.
부(附)
《요사》 지리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동경도(東京道) 상주(尙州) 진원군(鎭遠軍)은 본디 한나라 때의 양평현(襄平縣) 지역이다. 발해 때에는
동평채(東平寨)였다. -삼가 살펴보건대, 동평채는 동평부에 소속된 것인 듯하나, 상고할 수가 없다.
○ 철리부(鐵利府)의 위치를 요동 지역이라고 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요사》 지리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신책(神冊) 1년(916)에 발해를 평정하고서 광주(廣州)를 얻었다. 광주는 본디 발해의 철리부였는데, 고쳐서
철리주(鐵利州)라고 하였다.
○ 동경도 광주(廣州) 방어(防禦)는, 한나라 때에는 양평현에 속하였고, 고구려 때에는 당산현(當山縣)이었고,
발해 때에는 철리군(鐵利郡)이었다. 태조가 발해의 사람들을 옮겨서 살게 하고는 철리주를 세웠다.
○ 철리부(鐵利府)에는 자사(刺史)를 둔다. 옛 철리국(鐵利國) 지역이다.
○ 상경도(上京道) 영주(永州) 의풍현(義豐縣)은 본디 철리부 의주(義州)였는데, 요나라 군대가 이곳을
격파하고는 그 백성들을 남루(南樓)의 서북쪽으로 옮긴 다음 그대로 의주라고 하였다. -또 이르기를,
“회주(懷州) 부의현(富義縣)은 본디 의주(義州)로, 태종이 발해의 의주 백성을 이곳으로 옮겼다.” 하였다.
○ 회원부(懷遠府)의 위치를 지금의 철령현(鐵嶺縣) 지역이라고 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요사》 지리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동경도 신주(信州) 창성군(彰聖軍)은 본디 월희말갈(越喜靺鞨)의 옛 성이다. 발해 때에는 회원부(懷遠府)를
설치하였으며, 지금은 폐지되었다. 성종(聖宗)이 그 지역이 고려와 인접하였다는 이유로 개태(開泰)
1년(1012)에 주를 설치하였다.
○ 은주(銀州) 부국군(富國軍)은 본디 발해의 부주(富州)이다. 태조가 은(銀)을 제련하는 곳이라는 이유로
이름을 바꾸었다. 통치하는 현은 3개이다. 연진현(延津縣)은 본디 발해의 부수현(富壽縣) 경내에
연진고성(延津古城)이 있었으므로 이름을 바꾼 것이다. 신흥현(新興縣)은 본디 옛 월희국의 지역으로 발해가
은을 제련하는 곳을 설치하면서 일찍이 은주(銀州)를 설치하였다.
○ 수주(遂州)는 본디 발해의 미주(美州) 지역이었다.
《성경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철령현은 주(周)나라와 진(秦)나라 때 숙신씨 지역이며, 한(漢)나라와 진(晉)나라 때에는 읍루국 지역이고,
수(隋)나라 때에는 월희말갈 지역이었다. 당나라 때에는 발해 대씨가 월희말갈의 땅을 취하여
부주(富州)라고 고치고 회원부(懷遠府)에 속하게 하였다. 금나라와 원나라 때에는 함평부(咸平府)였다.
명나라 때에는 철령위(鐵嶺衛)로 고쳤다. 옛날에는 철령성(鐵嶺城)이 칠령위의 치소에서 동남쪽으로 500리
되는 곳에 있어서 고려와 경계를 접하고 있었다. 홍무(洪武) 21년(1388)에 그곳에 철령위를 설치하였다가
그 뒤 26년(1393)에 이곳으로 옮기고서는 그대로 철령위라고 하였다. 살펴보건대, 옛 철령성은 지금의
치소에서 동남쪽으로 500리 되는 곳에 있다.
○ 발해는 지금의 철령에 은을 제련하는 곳을 두었으므로 은주라고 불렀다.
○ 옛 신주는 본디 발해의 회원부 지역으로, 지금의 영고탑 경내에 있다.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신주는 옛 월희말갈의 지역으로, 지금의 개원현(開原縣) 남쪽에 있었다. 《전요지》에서 개원현의 동북쪽에
있다고 한 것은 잘못된 것이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철리부와 회원부는 모두 흑룡강 지방에 있다. 그런데 《요사》 지리지에서는 잘못
요동의 주현을 끌어다 붙였다. 《성경통지》에서는 한결같이 《요사》 지리지의 잘못된 설을 따라서 마침내는
지금의 철령현이 한나라 때에는 읍루의 지역이었고, 수나라 때에는 월희말갈의 지역이라고 하였으니, 아주
잘못되었다.
○ 안원부(安遠府)의 위치를 압록강 서쪽 지역이라고 하는 것은 잘못된 것으로, 이는 모두가 《요사》 지리지의 잘못된 설에서 말미암은 것이다.
《요사》 지리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동경도 녹주(淥州) 압록군(鴨淥軍)에서 통치하는 모주(慕州)는 본디 발해의 안원부(安遠府) 지역이다. 옛
현은 2개로 모화현(慕化縣)과 숭평현(崇平縣)인데, 오랫동안 폐지되었다. 녹주에 예속되었으며, 녹주에서
서북쪽으로 200리 되는 곳에 있다.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녹주성은 조선의 평양 서쪽 경계에 있다. 모주성(慕州城)은 녹주에서 서쪽으로 200리 되는 곳에 있는데,
본디 발해의 안원부 지역이며, 모화현 숭평현 두 현을 통할하였다. 요나라 때에는 모주(慕州)라고 고쳐서
녹주에 속하게 하였다가 뒤에 폐지하였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안원부 역시 흑룡강 지방에 있던 부이다. 요나라의 녹주는 지금의 강계부(江界府)
북쪽 강 건너편 지역에 있었다. -이에 대한 내용은 앞의 압록부조(鴨淥府條)에 나온다.- 그런즉 녹주에서
서쪽으로 200리 되는 곳이 어떻게 안원부가 될 수 있겠는가.
부(附) 미상의 군현(郡縣)
《요사》 지리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동경도 진주(辰州) 봉국군(奉國軍)은 본디 고구려의 개모성(蓋牟城)이다. 당나라 태종이 이세적(李世勣)과
함께 공격해 격파한 개모성이 바로 이 성이다. 발해 때에는 고쳐서 개주(蓋州)로 삼았다가 또다시
진주(辰州)로 고쳤는데, 진한(辰韓)으로 인해 진주라 한 것이다. 우물과 마을이 줄지어 있어서 가장 요충이
되는 곳이다.
○ 숭주(崇州) 융안군(隆安軍)은 본디 한(漢)나라의 장잠현(長岑縣) 지역이다. 발해가 주를 설치하였다. 옛
현은 3개로 숭산현(崇山縣), 위수현(潙水縣), 녹성현(淥城縣)인데, 모두 폐지되었다.
○ 건주(乾州) 광덕군(廣德軍) 사농현(司農縣)은 본디 발해의 녹군현(麓郡縣)으로, 녹파현(麓波縣)과
운천현(雲川縣)을 아울러서 편입시켰다.
○ 귀덕주(貴德州) 영원군(寧遠軍)은 본디 한나라의 양평현(襄平縣) 지역이다. 통할하는 현은 2개이다.
귀덕현(貴德縣)은 본디 한나라 양평현으로, 발해에서 숭산현이라고 하였다. 봉덕현(奉德縣)은 본디 발해의
녹성현 지역으로, 일찍이 봉덕주(奉德州)를 설치하였다.
○ 집주(集州) 회중군(懷衆軍)은 옛 비리군(陴離郡) 지역으로, 한나라 때에는 험독현(險瀆縣)에 속하였고,
고구려 때에는 상암현(霜巖縣)이었고, 발해 때에는 주(州)를 설치하였다. 통할하는 현은 1개로
봉집현(奉集縣)인데, 발해에서 설치하였다.
○ 수주(遂州)는 본디 발해의 미주(美州) 지역이다. 통할하는 현은 1개로 산하현(山河縣)이다. 산하현은 본디
발해의 현으로 흑천현(黑川縣)과 녹천현(麓川縣)을 병합하여 설치하였다.
○ 통주(通州) 안원군(安遠軍)은 본디 발해의 부여성(扶餘城)이다. -이에 대한 내용은 앞의
부여부조(扶餘府條)에 나온다.- 통할하는 현은 4개이다. 통원현(通遠縣)은 본디 발해의 부여현(扶餘縣)으로,
포다현(布多縣)을 병합해 설치하였다. 안원현(安遠縣)은 본디 발해의 현의현(顯義縣)으로, 작천현(鵲川縣)을
병합하여 설치하였다. 귀인현(歸仁縣)은 본디 발해의 강사현(强師縣)으로, 신안현(新安縣)을 병합하여
설치하였다. 어곡현(漁谷縣)은 본디 발해현(渤海縣)이었다. -또 이르기를, “상경도(上京道) 회주(懷州)
부여현은 본디 용천부(龍泉府)인데, 태조가 발해 부여현의 항복한 사람들을 이곳으로 옮겼다.” 하였다.-
○ 한주(韓州) 동평군(東平軍)은 본디 발해의 막힐부(鄚頡府)이다. -이에 대한 내용은 앞의
막힐부조(鄚頡府條)에 나온다.- 통할하는 현은 1개로 유하현(柳河縣)이다. 유하현은 본디 발해의
월희현(粵喜縣) 지역으로, 만안현(萬安縣)을 병합하여 설치하였다.
○ 은주(銀州) 부국군(富國軍) -이에 대한 내용은 회원부변오조(懷遠府辨誤條)에 나온다.- 에서 통할하는
영평현(永平縣)은 본디 발해의 우부현(優富縣) 지역이다. 태조가 포로로 잡은 호구(戶口)로 설치하였다.
예전에는 영평채(永平寨)가 있었다.
○ 함주(咸州) 안동군(安東軍)은 본디 고구려의 동산현(銅山縣) 지역으로, 발해 때에는 동산군(銅山郡)을
설치하였다. 그 위치는 한나라 때의 후성현(候城縣) 북쪽, 발해 때의 용천부 남쪽에 있었다. 통할하는 현은
1개로 함평현(咸平縣)이다. 함평현은 당나라 때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로, 천보(天寶) 연간에 영주(營州)와
평주(平州) 사이를 다스린 곳이 바로 이곳이다. 태조가 발해를 멸망시키고 다시 안동군(安東軍)을
설치하였다.
○ 신주(信州) 창성군(彰聖軍)은 -이에 대한 내용은 회원부변오조에 나온다.- 통할하는 현이 2개이다.
무창현(武昌縣)은 본디 발해의 회복현(懷福縣) 지역이다. 정무현(定武縣)은 본디 발해의 표산현(豹山縣)
지역인데, 유수현(乳水縣)의 인호(人戶)를 병합하여 설치하였다.
○ 빈주(賓州) 회화군(懷化軍)은 본디 발해성(渤海城)으로 통화(統和) 17년(999)에 올야부(兀惹部)의 사람들을
옮기고서 압자강(鴨子江)과 혼동강(混同江) 사이에 자사(刺史)를 두었다.
○ 용주(龍州) 황룡부(黃龍府)는 본디 발해의 부여부(扶餘府)로, -이에 대한 내용은 앞의
부여부조(扶餘府條)에 나온다.- 통할하는 현이 3개이다. 황룡현(黃龍縣)은 본디 발해의 장평현(長平縣)으로,
부리현(富利縣), 좌막현(佐幕縣), 숙신현(肅愼縣)을 병합하여 설치하였다. 천민현(遷民縣)은 본디 발해의
영녕현(永寧縣)으로, 풍수현(豐水縣), 부라현(扶羅縣)을 병합하여 설치하였다. 영평현은 발해에서 설치하였다.
-또 이르기를, “상경도(上京道) 장태현(長泰縣)은 본디 발해국의 장평현(長平縣) 백성들이다. 태조가
대인선(大諲譔)을 정벌하면서 먼저 이 고을을 취하여 그 백성들을 서울의 서북쪽으로 옮기고는
한민(漢民)들과 섞여 살게 하였다.” 하였다.-
○ 발주(渤州) 청화군(淸化軍)은 -이에 대한 내용은 용원부변오조(龍原府辨誤條)에 나온다.- 통할하는 현이
1개로 공진현(貢珍縣)이다. 공진현은 발해에서 설치하였다.
○ 녹주(麓州)는 발해에서 두었다.
○ 상경도 정패현(定霸縣)은 본디 발해의 부여부 강사현(强師縣) 백성들이다. 태조가 부여부를 함락시키고는
그 백성들을 서울의 서쪽으로 옮겨 한민(漢民)들과 섞여 살게 하였다.
○ 봉주(鳳州)는 고리국(藁離國)의 옛 지역으로, 발해의 안녕군(安寧郡) 경내이다. 남왕부오장(南王府五帳)과
지역을 나누었다. 한주(韓州)에서 북쪽으로 200리 되는 곳에 있으며, 서북쪽으로 상경(上京)과의 거리가
900리이다.
《성경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옛 무창현은 발해의 회복현 지역인데, 상고할 수가 없다.
○ 옛 정무현은 본디 발해의 표산현 지역인데, 상고할 수가 없다.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동나성(東那城)은 정주(正州)에서 서쪽으로 70리 되는 곳에 있다. 발해에서 설치하였으며, 요나라 때에는
그대로 따랐다가 이어 정주에 속하게 하였으며, 뒤에는 폐지하였다.
○ 조선의 곽주성(郭州城)은 평양의 서북쪽에 있다. 당나라에서 설치하였으며, 발해 때에는 그대로 따랐다.
지금은 곽산부(郭山府)라고 부른다.
○ 구지(舊志)를 보면, 정료전위(定遼前衛)의 치소가 요양성(遼陽城)의 동북쪽 모퉁이에 있었는데, 바로
발해(渤海)의 성으로, 전해 오기를 발해의 대씨가 세운 것이라고 한다.
[주-D001] 걸걸중상(乞乞仲象) :
걸걸중상과 대조영(大祚榮)의 관계에 대해서는 이 두 사람을 이명동인(異名同人)이라는 설, 기록대로
대조영의 아버지가 걸걸중상이라는 설, 대조영이 걸걸중상의 아들이 아니라 백산말갈인(白山靺鞨人)이며
걸걸중상은 거란인(契丹人)이라는 설이 있다.《한규철, 발해의 대외 관계사, 신서원, 1994, 91쪽 주》
[주-D002] 오루하(奧婁河) :
원문에는 ‘奧婁阿’로 되어 있는데, 《신당서》 권219에 의거하여 바로잡았다. 오루하는 송화강(松花江)의
지류인 목단강(牧丹江)이다. 읍루하(挹婁河), 홀한하(忽汗河), 호이합하(虎爾哈河)라고도 한다.
[주-D003] 천문령(天門領) :
천문령의 위치는 정겸(丁謙)의 장광재령설(張廣才嶺說),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의 승덕현(承德縣) 서쪽설,
송정등(松井等)의 휘발하(輝發河)와 혼하(渾河)의 분수령(分水嶺)인 장령자(長嶺子) 부근설 등이 있으며,
《발해의 대외 관계사 85쪽 주》 북한에서는 요령성 창무현 서쪽 산간 지대에 있는 고개라고
하였다.《조선전사 제5권, 21쪽》
[주-D004] 동모산(東牟山) :
동모산의 위치에 대해서는, 예전에는 길림성(吉林省) 돈화현(敦化縣) 부근의 오동성(敖東城)이라는 견해가
우세하였으나, 최근에는 길림성 돈화시의 성산자산성(城山子山城)을 동모산으로 보려는 견해가 우세하여
굳어지고 있다.《발해의 대외관계사 85쪽 주》 《조선전사》에는 “길림성 돈화현 오동성은 이전 고구려 영역의
동북부에 해당되는 곳으로, 말갈인들이 많이 살고 있었다. 백두산에서 북쪽으로 300여 리 되는 곳에
위치하고 있으며, 서북쪽으로는 매우 길고 험한 장광재령 산줄기, 서남쪽으로는 부이령 산줄기, 동쪽과
남쪽으로는 노야령 산줄기, 동북쪽으로는 목단강의 상류를 끼고 있어서 고구려의 유민들이 자리 잡기에
적당한 지점이었다.”고 하였다.《조선전사 제5권, 21쪽》
[주-D005] 월희말갈(越喜靺鞨) :
길림성(吉林省) 회덕부(懷德府) 근처에 있던 말갈의 한 부족이다. 발해의 건국과 더불어 회원부(懷遠府)에
편입되었다.
[주-D006] 이하(泥河) :
발해가 신라와 경계를 접했던 이하에 대해서는, 함경도 덕원(德源) 부근의 용흥강(龍興江)이라는 설이
정설로 되어 있으나, 이와는 달리 정약용(丁若鏞)은 강릉(江陵) 북쪽, 양양(襄陽)이라고 보고 있으며, 강원도
명주군에 있는 연곡천(連谷川)으로 보는 학자도 있다.
[주-D007] 5경(京) :
선왕(宣王) 때 설치한 것으로, 국도인 상경(上京)을 중심으로 5경을 설치하였는데, 이는 부여의
사출도(四出道)나 고구려의 오부(五部) 제도에 그 연원을 둔 것으로 생각된다. 5경은 지금의 영안현(寧安縣)
동경성(東京城)에 있었던 상경 용천부(上京龍泉府), 길림성(吉林省) 돈화현(敦化縣) 부근이나 길림성
화룡현(和龍縣)에 있었던 중경 현덕부(中京顯德府), 훈춘현(琿春縣) 부근이나 북한의 청진(淸津)에 있었던
동경 용원부(東京龍原府), 함경북도 경성(鏡城)에 있었던 남경 남해부(南京南海府), 집안현(輯安縣)
통구(通溝)에 있었던 서경 압록부(西京鴨綠府)이다. 《조선전사》에는 남경 남해부의 위치가 함경북도 동해안
지역인 신창 부근에 있었다고 되어 있다.
[주-D008] 15부(府) :
발해의 15부는 5경 외에 장령부(長嶺府), 부여부(扶餘府), 막힐부(鄚頡府), 정리부(定理府), 안변부(安邊府),
솔빈부(率賓府), 동평부(東平府), 철리부(鐵利府), 회원부(懷遠府), 안원부(安遠府)이다.
[주-D009] 호이합하(虎爾哈河) :
송화강(松花江)의 지류인 목단강(牧丹江)을 말한다. 홀한하(忽汗河), 읍루하(挹婁河), 오루하(奧婁河)라고도
한다.
[주-D010] 정북쪽에서 약간 동쪽으로 :
이 부분이 원문에는 ‘正東如北’으로 되어 있는데, 《신당서》 권43 하 지리지에 의거하여 ‘正北如東’으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11] 동경 용원부(東京龍原府) :
동경 용원부의 위치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다. 정약용(丁若鏞)은 《아방강역고(我邦疆域考)》에서 함경북도
종성(鍾城)이라 하였으며, 이병도는 지금의 훈춘(琿春)으로 보았다. 대개 길림성 훈춘현 팔련성(八連城)이
정설로 여겨져 왔는데, 최근 북한에서는 청진(淸津) 부거리설을 강력히 제기하고 있다.
[주-D012] 도성을 …… 옮겼다 :
한규철은, “발해가 수도를 상경 용천부(上京龍泉府)에서 동경 용원부(東京龍原府)로 옮긴 시기는 정원(貞元)
연간이고, 여기에서 다시 상경 용천부로 옮긴 시기는 대흥(大興) 연간이다. 동경 용원부는 약 9년 정도
수도였다고 생각된다.” 하였다.《발해의 대외 관계사 175쪽 주》
[주-D013] 축자도(筑紫道) :
축자는 구주(九洲)의 별칭이다.
[주-D014] 토우포(吐亏浦) :
원문에는 ‘吐弓浦’로 되어 있는데, 잘못된 것이기에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15] 남경 남해부(南京南海府) :
남경 남해부의 위치에 대해서는 정약용(丁若鏞)의 함흥설(咸興說)을 비롯하여 경성설(鏡城說),
종성설(鍾城說), 북청설(北靑說) 등이 있으나, 함흥설이 거의 정설로 되어 있다.
[주-D016] 서경 압록부(西京鴨綠府) :
서경 압록부의 위치에 대해서는 정약용의 자성북안설(慈城北岸說)을 비롯하여 통화(通化) 부근의
임강설(臨江說), 통구설(通溝說) 등이 있으나 아직은 확실하지 않다.
[주-D017] 정북쪽에서 약간 동쪽으로 :
이 부분이 원문에는 ‘正東如北’으로 되어 있는데, 《신당서》 권43 하 지리지에 의거하여 ‘正北如東’으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18] 환도성(丸都城) :
원문에는 ‘中都城’으로 되어 있는데, 잘못된 것이기에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19] 정주는 …… 지역인데 :
원문에는 ‘正州本沸流王故都’로 되어 있는데, 《요사》 권38 지리지에 의거하여 ‘正州本沸流王故地’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20] 등주(登州) :
원문에는 ‘登舟’로 되어 있는데, 조선광문회본 《해동역사》에 의거하여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21] 도발근(都孛菫) :
원문에는 ‘都學堇’으로 되어 있는데, 잘못된 것이기에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여진족 추장(酋長) 칭호이다.
[주-D022] 타주(沱州) :
《요사》 권38 지리지에는 ‘陀州’로 되어 있다.
[주-D023] 해릉(海陵) :
금나라의 폐제(廢帝)인 해릉서인(海陵庶人) 완안량(完顔亮)을 가리킨다. 본래의 이름은 적고내(迪古乃)이며,
요왕(遼王) 종간(宗幹)의 둘째 아들이다. 평장사(平章事)로 있다가 희종(煕宗)을 시해하고 황제에
즉위하였다가 뒤에 폐위되었다.《金史 卷5 海陵本紀》
[주-D024] 포선만노(蒲鮮萬奴) :
금나라의 무장(武將)이다. 함평로 선무사(咸平路宣撫使)로 있다가 정우(貞祐) 3년(1215)에 금나라를 배반하여
요동에 웅거하고는 국호를 대진(大眞)이라 하고 연호를 천태(天泰)라 하여 대요국(大僚國)과 대립하였다.
원나라 성길사한(成吉思汗)에게 쫓겨 두만강 유역으로 이주한 다음, 국호를 동진국(東眞國)으로 고치고
두만강과 압록강 주위에 있는 여진족을 통합하였다. 1217년(고종4)에 몽고와 화맹(和盟)하고는 고려를
구한다는 구실로 고려의 동북쪽을 쳐들어왔으며, 1233년(고종20)에 몽고의 공격으로 멸망당했다.
[주-D025] 봉천부(奉天府) :
원문에는 ‘奉天縣’으로 되어 있는데, 잘못된 것이기에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26] 정령위(丁令威) :
한(漢)나라 때의 신선이다. 한나라 때 요동 사람 정령위가 영허산(靈虛山)에서 도를 닦아 신선이 되었다. 그
뒤에 학이 되어 요동에 돌아와 화표주(華表柱)에 앉아 시를 지었는데, 그 시에, “새여 새여 정령위여, 집
떠난 지 천년 만에 오늘에야 돌아왔네. 성곽은 의구한데 사람들은 아니로세. 어찌 신선 아니 배워 무덤이
총총하뇨.[有鳥有鳥丁令威 去家千載今始歸 白骨如山陵谷變 何不學仙塜累累]”라고 하였다고 한다.《搜神後記》
[주-D027] 타주(陀州) :
《신당서》 권219 발해열전에는 ‘沱州’로 되어 있다.
[주-D028] 그대로 의주라고 하였다 :
원문에는 ‘仍兵義州’로 되어 있는데, 《요사》 권37 지리지에 의거하여 ‘仍名義州’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29] 올야부(兀惹部) :
여진족(女眞族)의 한 종족이다.
[주-D030] 그 백성들을 …… 옮기고는 :
원문에는 ‘遷其人於宋西北’으로 되어 있는데, 뜻이 통하지 않기에 ‘遷其人於京西北’으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31] 발주(渤州) :
원문에는 ‘渤海’로 되어 있는데, 《요사》 권38 지리지에 의거하여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32] 한주(韓州)에서 …… 있으며 :
원문에는 ‘古韓州北二百里’로 되어 있는데, 《요사》 권37 지리지에 의거하여 ‘在韓州北二百里’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 한국고전번역원 | 정선용 (역) | 20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