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시 연재 칼럼 18 (2025년 2월)
욕망欲望 과 욕망慾望
욕망欲望과 욕망慾望의 차이는 무엇일까? 한자어의 풀이를 보면 욕망欲望은 선의로 바라는 것이고, 욕망慾望은 사적 욕심으로 바라는 것이다. 국어사전에는 어떻게 풀이가 되어있을까 찾아보려다 말았다. 그저 느낌으로는 전자는 비교적 긍정적인 정서로 읽히고 후자는 부정적 정서를 거느린다. 우리가 흔히 쓰는 용어로는 아마 후자에 더 가까울 듯하다. 전자의 욕망은 사는 동안 우리의 생을 추진하는 에너지임에 틀림없지만, 후자의 욕망은 누군가가 반드시 상傷하고, 그로 인하여 욕망을 부린 자 스스로도 반드시 상傷하게 되기 때문이다. 간혹 사람 좋은 얼굴을 한 사람들의 내부 속에 또아리를 튼 시커먼 탐욕貪慾을 볼 때마다, 다혈질인 필자는 참지 못했다. 이유는 말할 것도 없이 성품이 원만하고 언뜻 보면 사람들을 잘 배려하는 모습에 속았던 작은 기대의 허물어짐을 견디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필자를 더 경악하게 하는 것은 그들은 그 욕망을 전자의 욕망 欲望, 상생相生의 원동력으로 치장하고 일말의 반성은커녕 오히려 자신을 합리화시키는 모습을 볼 때이다.
그럼 필자는 어떤 사람인가? 묻는다면 물론 나도 그들과 별다를 것이 없이 후자의 욕심에 사로잡힌 사람일 것이다. 그래서 그들에 대한 나의 분노는 뒤집어 보면 자신에 대한 자책의 칼질이라는 것을 최근 들어 뼈저리게 깨닫는다. 구태여 고백하자면 오늘 필자가 새삼스럽게 욕망이라는 같은 발음의 서로 다른 두 단어를 비교해 보는 것은 내 속에 사는 지긋지긋한 자책을 버리고 싶어서이다. 말처럼 무엇이든 버린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님을 안다. 그렇다고 해도 사는 동안 포기하지 않고 자신과 싸워보고 싶었던 필자의 욕망欲望을 잃고 싶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가벼운 욕심은 그래도 인간적이어서 귀여운 구석이 있다. 하지만 그 욕심이 누군가를 깊이 다치게 한다면 그때부터 범죄가 되기 때문이다.
이 글도 퇴직하기 전에 써 두었던 글이다. 퇴직 후 십여 년이 지났다. 그러니까 어김없이 저물녁에 든 필자는 시방 생애 세 번째의 비상계엄령과 후폭풍을 체험하는 중이다. 한결같이 불법이었고 막대한 국가적 재정적 손실과 많은 사람들이 생떼 같은 목숨을 잃거나 다치게 했던 계엄령과 그 후폭풍! 살아남은 사람들은 너무 억울하고 너무 괴롭고 도저히 치유되지 않는 악몽에 아직도 시달리고 있다. 결코, 단연코 용서가 되지 않는다! (2024년 12월 10일)
민초의 목소리 / 엘라 윌러 윌콕스(1850~1919) / 이루카 번역
아! 민초들이 밤낮으로 부르짖는 소리가 들린다
그들은 때가 오기를 바라며 부르짖는다.
선남선녀여, 그들의 애처로운 호소에
분노가 도사리고 있음에 유의하라.
땅을 점유한 자들은 들으라, 탐욕스러운 자들은 깊이 생각하라.
여기저기 솟아 불이 나는 그 불평의 의미를,
점점 더 크고 강해지는 그 소리의 의미를,
폭풍우를 나르는 물줄기가 계곡과 혼돈을 거쳐
새로운 힘을 얻어 커 가는 그 소리의 의미를.
하루가 다르게 저 여론의 위대한 강물이 불어나
급류가 되어 요동치며 탐욕의 땅 밑을 침수시키매
너희들이 탄압의 댐을 쌓고 금전의 다리를 세워 그 물결을 피하려 할지라도
공포에 휩싸여 달아날 때가 다가온다.
민초 들이 밤낮으로 부르짖는 소리가 들린다.
인생의 가을에 땀 흘려 일하는 이들, 인생의 봄철에 이미 지친 어린아이들 -
그들이 부르짖는다, 그들이 자신들 몫의 일과 즐거움을 찾아 부르짖는다.
너희들은 그들에게 푼돈을 지불하고 금고를 가득 채우지
너희들은 하나님의 땅을 훔치고 돈주머니를 더 크게 부풀리지.
아! 이 땅의 형제자매들에게 환원하라. 그들의 탄원이 저주로 바뀌기 전에.
시의 제목부터 좌파의 구호처럼 들린다. 시인이 살던 그 시절에도 좌파 우파의 명료한 갈림이 있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어느 시대이건 민초 들의 분노와 저항은 정당했고 옳았으며 결국은 실현되었다. 그리고 대체로 혹독한 피의 댓가를 치루었다는 것이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작금에 이르기까지 몇몇 권력자들은 그 권력이 민초로부터 왔다는 만고의 진리를 까마득 잊어버리는 듯하다. 밤낮으로 부르짖는 민초 들의 소리에 귀를 기울리는 것이 그들의 의무라는 것과 민초의 소리를 외면하면 어김없이 비참한 말로를 맞이하곤 한다는 걸 기억하지 못하는 듯하다. 이들의 비참한 말로에 필자는 별 관심이 없다. 이들이 참수를 당하든 삼족을 멸하든! 다만 그들의 말로에 이르기까지 겪어야하는 민초 들의 고통에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낄 뿐이다. 세계 권력사의 가장 뚜렷한 공통점은 민초 위에 군림하고자 했던 위정자들은 반드시 혹독한 댓가를 치루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억울한 건 민초 들 뿐이었다는 것이다.
사색당쟁四色黨爭의 유전자
"저 정신 나간 주둥이를 찢어버려라!"라고 말한다면, 이 또한 필자도 막말 잔치에 한 발 들여놓는 셈이겠지. 하지만 이 정권이 촛불을 좋아하다 보니 계속 산불이 난다니, 기가 찰 노릇이다. 경주 포항 지진의 원인이 지난 보수 정권의 무리한 <지하 열발전 개발> 때문이라는 학계와 전문가들의 결론이 났음에도 그에 대한 사과의 말 한마디는커녕 몰랐던 일로 치부하는 철면피한 인사들에겐 촛불을 든 사람들이 현 정권이 아니라 대다수의 국민들이었다는 것이 보일리야 없겠지. 아니 보고 싶지 않겠지. 촛불은 태풍이 불면 꺼진다고 떠들어 대던 인간과 5.18 광주 민주화 운동 때 북한 특수부대가 내려와서 저지른 만행이라고 선동질하던 인간도 요즘 티브이에서 사라졌다. 자숙 중인지 징계 중인지 잘 모르겠지만 그 오기에 찬 비뚤어진 신념으로 덧칠한 뻔뻔한 눈빛은 잘 지워지지 않는다. 그가 말한 태풍이 설마 계엄군을 동원해 촛불을 쓸어버려야 한다는 말은 아니었겠지. 세월호 유가족들에 대한 말도 안 되는 야비하고 악의에 찬 입을 놀리던 인간들도 티브이에서 사라졌다. 허긴, 세월호 참사를 일종의 대형 교통사고라고 세치 혀를 놀리던 비교적 규모가 큰 공장을 운영하는 필자의 고등학교 동기도 있었다. 그 후, 필자는 그를 다신 보지 않았다. 혹시 뺨이라도 갈기게 될 일이 생길지 몰라서!
다시 밝히지만, 필자는 문재인 대통령에게 투표한 사람도 아니고 민주당을 지지하는 사람도 아니다. 물론 자칭 보수정당이라고 우기는 당도 지지하지 않는다. 구태여 정치적 성향을 밝히라면 필자는 그대들이 구별해 놓은 중도 보수에 가깝다. 다만 이 촛불 정부의 경제 정책의 실책으로 소규모 개인 사업을 하는 필자의 가까운 지인들과 제자들은 거의 지옥을 헤매고 있어 생각할수록 화가 나고 좌절감까지 든다. 하지만 그렇다고 국민이 뽑은 대통령을 아무리 생각이 다른 정적이라 해도 북한의 김정은 대변인이라고 떠드는 공당 대표의 혀 놀림을 볼 때마다 우린 아직 조선 시대의 지긋지긋하고 혐오스러운 사색 당쟁의 유전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두려움까지 들곤 한다.
이 글은 코로나가 세상을 휩쓸기 얼마 전에 써 두었던 글이다. 시방 필자가 왜 이 글을 꺼내 다시 읽는지는 독자 제위께서 헤아려 주시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