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윗이 최전방에서 적군과 대치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다윗이 태어나고 자란 고향 땅 베들레헴을 적군에 빼앗기고 그 건너 편에서 대치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베들레헴 성문 곁에 어릴 때부터 양떼를 몰고 다니며 목을 축이던 우물이 있었습니다. 고향을 잃은 다윗은 그 우물이 그리웠습니다. 다윗은 무심코 스치듯이 한 마디 내뱉습니다. “베들레헴 성문 곁 우물 물을 누가 내게 마시게 할까.” 다윗의 한 마디에 세 명의 부하 장수들은 적지에 들어가 물을 떠왔습니다. 스치듯 지나친 말 한 마디조차 위력을 갖는 게 권력입니다.
하지만 다윗은 물을 받아든 순간 그것이 부하들의 목숨이라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자기 권력 안에 있는 타자의 생명을 본 것입니다. 타인을 희생시켜 자신의 지위와 권력을 누리는 게 얼마나 큰 죄악인지 깨달았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물을 여호와께 부어 드리며 맹세합니다. “내가 다시는 나를 위하여 이런 일을 결단코 하지 않겠습니다.”라고. 권력을 사적인 욕망을 위해 행사하지 않겠다는 하나님과의 신성한 약속입니다.
구약성서 사무엘하 23장에 나오는 이 에피소드는 군대 장군이나 한 나라의 지도자가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하는지를 말합니다. 이 에피소드 앞뒤에 다윗 군대의 지휘관들의 이름이 열거됩니다. 다윗 왕조의 구조적 완결성과 힘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열거된 이름들에 앞서 한 편의 시가 나옵니다. 다윗이 말년에 쓴 하나님을 찬양하는 시입니다. 이 시에서 다윗은 하나님을 ‘사람을 공의로 다스리는 자’라고 정의합니다. 히브리어 성서에 체데크의 형옹사형인 찻디크가 쓰였는데 공의(公義)라는 뜻입니다. 공정함과 올바름을 말하는 것입니다. 다윗 왕조가 강대하고 안정적일 수 있었던 것은 공정함을 지키려는 다윗의 의지와 실천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한 나라가 부강하고 안정되려면 권력자에게 건강한 윤리적 감수성과 권력의 공공성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한다는 가르침입니다. 이것은 타자에 대한 윤리에서 옵니다. 권력자인 나의 목숨과 부하의 목숨이 다르지 않다는 인식, 그래서 타자를 나의 이익을 위한 도구나 수단으로 생각하지 않으려는 인식이 바로 공의(체데크)입니다. 호화로운 궁정에 거하는 왕이나 궁벽한 시골에 사는 무지렁이 백성이나 목숨의 무게를 동일하게 여기는 것이 공의입니다. 어깨에 스타 계급장을 단 장성과 작대기 하나를 달고 있는 이등병은 그 역할이 다른 것이지 목숨의 무게까지 다른 게 아니라는 생각이 공의입니다.
이 공의가 사라지면 사람은 지워지고 계급만 남게 됩니다.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기 위한 군대 조직이 국민을 자기 이익의 수단으로 삼게 되는 것입니다. 특히 군대 같이 법으로 인정된 계급 체계 안에서 상위 계급은 하위 계급을 사람으로 보지 않고 도구로 보게 됩니다. 국민의힘 주진우 의원이 필리버스터를 하면서 채해병의 죽음을 장비 파손에 비유했습니다. “사망사고가 아니라 군 장비를 실수로 파손한 사건이라고 가정해 봅시다.”라고 말입니다. 이 사람의 머릿속에 사람의 목숨을 수단으로 사용할 수 있다는 생각이 있는 것입니다.
윤석열 정부 들어 검사 출신들이 국정의 주요 인사로 등용되면서 그들의 세계관이 얼마나 저급하고 천박한지 드러났습니다. 대한민국 정치검사들은 밀실에서 왜곡과 조작으로 사람 조지는 일만 해 온 자들입니다. 사람을 사람으로 보는 게 아니라 맘대로 도륙하고 요리해 먹을 수 있는 개돼지로 보는 것입니다. 서울 법대 출신의 검사들, 그들의 머릿속에는 ‘인간’이라는 가치가 없습니다. 권력을 위해, 자기 이익을 위해 야만적으로 물고 뜯는 짐승의 본능만 있습니다. 그 짐승의 본능이 뿌리내린 곳이 바로 인텔리의식입니다. 공부 잘 하는 사람, 서울대, 법대, 검사같이 인텔리를 표상하는 몇 개의 가짜 표지들이 있습니다. 채상병 죽음의 원인을 제공한 해병대 임성근 사단장의 머릿속에도 계급적 우월성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것은 한 인간을 아무렇게나 도구화하고 죽어도 되는 존재로 쉽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런 무도하고 야만적인 자들을 지지하고 선출해 준 세력이 있으니 보수 개신교회들입니다. 기독교의 구원관 안에 내재된 ‘선민사상’ 때문입니다. 그것은 유대교로부터 물려받은 나쁜 유산입니다. 행위와 무관하게 믿기만 하면 의롭다고 인정받고 구원에 이른다는, ‘칭의론’의 기저에 유대교로부터 흘러온 선민의식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구원받은 자의 특별한 신분과 지위를 무의식 가운데 심어놓고 다른 종교와 다른 견해를 가진 이들을 타자화했습니다. 서울 법대 출신 검사들의 엘리트의식과 닮아 있습니다. 이런 특권의식은 유전적 동질성을 기반으로 합니다. 검사와 목사가 동일한 세계관을 공유하고 있는 것입니다.
때문에 기독교는 힘을 배격하고 권력의 반대편에 섰던 종교에서 힘 있는 자들과 공감하고 그들의 편에 서는 종교로 변질 돼 버리고 말았습니다. 힘이 있으나 그 힘을 내려놓고 가장 나약한 인간의 모습으로 자기를 포기했던 예수의 모습이 아니라, 예수를 살해한 권력자의 진영에 가담하는 종교가 된 것입니다. 힘 있는 자의 편에 서는 것은 예수에게 있어서 가장 혐오스러운 짓입니다. 예수에겐 오늘의 기독교가 그렇습니다.
인간을 거부하고 도구화시키는 그 어떤 세력이나 권력도 존재해서는 안 된다는 게 기독교의 근본 가르침입니다. 이 가르침을 버리고 힘 있는 자가 만든 질서에 편입하여 안거하며 교세를 확장하려는 세력이 오늘의 정권을 탄생시켰습니다. 오늘 많은 이들이 고통당하고 있는 것은 예수를 죽여 예수교를 살리려 한 자들이 탄생시킨, 이 무지하고 무도한 정권 때문입니다. 일제 강점기에도 그랬습니다. 우상숭배라고 펄펄 뛰던 신사참배를 하는 것은 교회를 지키기 위해 어쩔 수 없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