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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9월17일 수요일 말씀묵상 ♣
성경:누가복음8:16-18(신104P)
제목:등불의 비유
16.누구든지 등불을 켜서 그릇으로 덮거나 평상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는 들어가는 자들로 그 빛을 보게 하려 함이라/
17.숨은 것이 장차 드러나지 아니할 것이 없고 감추인 것이 장차 알려지고 나타나지 않을 것이 없느니라/
18.그러므로 너희가 어떻게 들을까 스스로 삼가라 누구든지 있는 자는 받겠고 없는 자는 그 있는 줄로 아는 것까지도 빼앗기리라 하시니라.
할렐루야! 오늘도 말씀을 묵상하시는 중에 하나님의 음성을 친히 들으시기를 소원합니다.
***{제목}***“등불의 비유”
여러분!똑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만 듣는 사람의 마음 자세에 따라 서로 다른 결과들이 나타납니다.
길가는 말씀을 들어도 구원받지 못하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바위 위는 말씀을 들어 구원받지만 어떤 순간에 배반하게 될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가시떨기 속은 말씀을 들어 구원받지만 열매없는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입니다. 좋은 땅은 말씀을 듣고 풍성한 열매를 맺는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어떤 분들은 아직도 고집스럽게 옛날부터 해오던 것들을 놓지 못해 복음이 들어갈 틈을 주지 않습니다.
그들에 전해졌던 복음은 길가에 뿌려진 씨와 같습니다.
어떤 분들은 그리스도를 보여주는 말씀보다도 주위 환경, 방언과 같은 신비적인 경험, 온갖 종교적인 형태들에 관심이 많습니다. 그들에게 전해졌던 복음은 바위 위에 떨어진 씨와 같습니다.
어떤 분들은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기로 했으나 늘 염려 속에서 헤맵니다. 또 세상의 재물과 쾌락에 빠져 자주 헤매곤 합니다.
그들에게 전해졌던 복음은 가시떨기 속에 떨어진 씨와 같습니다. 어떤 분들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무슨 일이 있어도 지킵니다.
그리고 반드시 인내 가운데 좋은 열매들을 보여줍니다. 그들에게 전해진 복음은 좋은 땅에 떨어진 씨와 같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100배의 결실을 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등불의 비유”(눅8:16-19)
오늘 봉독한 본문은 빛의 사명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본문 16절의 말씀을 다시 한번 함께 읽겠습니다.
“누구든지 등불을 켜서 그릇으로 덮거나 평상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는 들어가는 자들로 그 빛을 보게 하려 함이라”(16절)
1.빛의 목적.
그런데 빛은 어두움을 밝히는 데 목적이 있습니다. 성도를 빛으로 비유하는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입니다.
성도는 빛으로서 세상의 어두움을 밝히는 사명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성도들을 세상의 빛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사명을 주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취느니라/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5:14-16).
서당에서 아이들이 공부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쉬는 시간이 되면 아이들은 선생님에게 옛날 이야기를 해달라고 졸랐습니다.
하루는 쉬는 시간에 선생님이 수수께끼를 하나 냈습니다. 선생님은 자기 곁으로 우르르 모여 온 학생들에게 엽전 하나를 보여주며 이 엽전으로 방안을 가득 차게 할 물건을 사올 사람이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아이들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생각해 보았지만 뾰족한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런 것은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모두들 안 된다고 고개를 저었습니다.
그러자 평소에 말이 없던 아이 하나가 손을 들었습니다.
“선생님! 제가 사 오겠습니다. 그 돈을 이리 주십시오”
그 아이는 돈을 받아 가지고 나가더니 잠시 후에 돌아왔습니다. 그의 손에는 양초 한 자루가 들려 있었습니다. 아이가 양초에 불을 켜자 그 빛이 방안에 가득히 퍼졌습니다. 빛이 어두움을 몰아내고 세상을 충만케 한다는 비유의 이야기입니다.
빛은 창조의 시작입니다.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실 때 제일 먼저 빛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나서 동물도 만드시고, 식물도 만드시고 사람도 만드셨습니다.
이처럼 빛은 창조의 시작이요 창조의 원동력입니다. 빛은 지금도 어두운 곳을 밝히며 재창조의 원동력이 되고 있습니다.
이 빛으로 새 역사가 이루어집니다. 이 빛으로 구원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이 빛으로 어두움을 물러가고 광명한 세계가 펼쳐지게 됩니다.
2.등불을 켜서.
그런데 오늘 봉독한 본문에서 “등불을 켜서”가 의미하는 것은 빛으로서의 성도의 모습입니다.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순간 새 생명을 갖게 됩니다. 그것은 꺼졌던 촛불에 불을 켜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 성도는 켜진 등불입니다.
예수님이 세상의 빛인 것처럼 성도도 세상의 빛입니다.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함으로 빛이 되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새 생명을 주심으로 세상의 빛이 되었습니다.
주안에서 생명과 빛은 하나입니다. 요한 복음 1장 4절에 보면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고 하였습니다.
주님 안에는 생명이 있고 이것이 빛으로 나타납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자녀가 됨으로 생명을 나누어 받고 이로써 세상의 빛으로 나타납니다.
물론 이 빛은 처음부터 큰 빛은 아닙니다. 처음에는 작은 빛이지만 점점 큰 빛으로 키워야 합니다. 빛이 되었다는 명목만 가지고는 사명을 다 했다고 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새 생명을 받았으니 빛을 드러내는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먼저 할 일은 빛을 키우는 일입니다. 작은 빛을 큰 빛이 되도록 키워야 합니다. 더 많은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밝은 빛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 빛을 밝히는데는 성령의 기름이 필요합니다.
스가랴 4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스가랴에게 환상을 보여주신 것이 있습니다. 스가랴가 보니 순금등대가 있었습니다. 등대의 꼭대기에는 주발같은 것이 있고 또 일곱 등잔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등대꼭대기의 등잔에는 일곱관이 있고 그 등대 곁에는 두 감람나무가 서 있었습니다. 한 감람나무는 주발 우편에 있고 다른 감람나무는 주발 좌편에 있었습니다. 즉 이 등대는 두 감람나무가 관을 통하여 주는 기름으로 빛을 밝히고 있었습니다.
그러면 두 감람나무는 누구를 가리키는 것입니까?
두 감람나무는 두 보혜사로서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님 이십니다.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님을 통하여 능력을 받고 세상의 빛이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님과 가까울 수록 더욱 큰 빛이 될 수 있습니다.
3.평상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그런데 사람들은 등불을 켜서 그릇으로 덮거나 평상 아래에 두지 않습니다. 오히려 등경 위에 두어 많은 사람들의 길을 밝혀 줍니다.
여기서 그릇으로 덮거나 평상 아래에 두지 않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불을 켰으면 가리지 말고 밝힐 수 있게 하라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새 생명을 받아 빛이 되었으니 빛을 밝혀야 합니다. 그런데 여러 가지 장애물로 인하여 빛을 밝히지 못하면 사명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신학적으로는 개인 구원을 강조하다가 빛을 가릴 수 있습니다. 개인 구원을 강조하는 사람들은 신앙의 열매를 맺는데 소홀합니다. 세상이야 어떻게 되든 별 신경을 쓰지 않습니다. 그들은 기도하는 일, 성경 읽고 은혜 받는 일에는 열심입니다.
그렇다고 이런 것들이 필요 없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게 열심히 해야 등불을 크게, 밝게 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등불을 켜는데는 열심을 다하지만 결국은 가려져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도 안타까운 일 중의 하나입니다.
어떤 이들은 내적인 평안과 가족의 안녕을 구하는 샤머니즘적 신앙으로 인하여 빛을 가리고 있습니다.
또 어떤 이들에게는 세상에 대한 미련 때문에 빛이 가려져 있습니다. 등불은 분명 켜져 있는데 드러나질 않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신앙 따로 생활 따로 입니다. 세상에 나가서는 세상 따라 재미있게 삽니다. 교회 와서는 또 은혜스럽게 하려고 애를 씁니다. 결국 등불을 끄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그 빛을 드러내지는 않습니다. 빛이 비추는 곳에는 어두움을 몰아내기 때문입니다. 어두움과 계속 짝을 하자니 빛을 드러낼 수 없는 것이지요, 그래서 등불을 켰으나 감추고 다니는 것입니다.
또 어떤 이들은 못된 기질 때문에 빛을 가리고 있습니다. 등불은 분명 켜져 있으나 나쁜 기질에 가려 빛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포악한 성격이 빛을 가립니다.
이기적인 생각들이 빛을 가립니다. 다혈질의 성격이 빛을 가립니다. 괴팍하고 편협한 성격으로 인하여 빛을 가립니다. 이런 사람들은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는 사람입니다. 등불을 켜서 평상 아래 두는 것과 같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등불을 켠 것만으로 만족하지 마십시다. 등불을 켜는데 의의가 있지 않습니다.
등불을 켰으면 등경 위에 두어 밝히 비춰야 합니다. 그런데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거나 평상 아래 둔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등불은 켜는데 의의가 있지 않고 비추는 데 있습니다. 아무리 등불이 켜져 있어도 비추지 못한다면 죽은 것과 같습니다.
4.등경위에 두나니.
등불은 켜서 등경 위에 두어야 합니다. 등불은 밝혀 어두움을 몰아내자는 데 목적이 있습니다. 등불을 켜서 등경 위에 두는 것은 빛의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빛을 가리던 것들을 제거하고 빛이 빛으로 드러날 수 있게 해야 합니다. 빛을 가리던 것이 개인구원을 지향하는 신학적인 사고입니까? 세상에 대한 미련입니까? 아니면 못된 기질입니까? 이런 것들을 벗겨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등불이 어두움을 몰아내고 빛으로서의 사명을 다해야 합니다.
“누구든지 있는 자는 받겠고 없는 자는 그 있는 줄로 아는 것까지도 빼앗기리라 하시니라”(18).
이것이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할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누구든지 있는 자는 받겠고...”
하나님의 말씀을 주의 깊게 듣고 인내로 결실 하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약속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깨달으려고 하면 더욱 깨닫는 은혜를 주십니다.
하나님은 사모하는 영혼을 만족케 하시고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을 주십니다. 나를 찾고 만나고자 하는 자를 내가 만나 주겠다고 하십니다. 이 약속은 주님이 하신 약속입니다.
“누구든지 있는 자는 받겠고...”
주님은 빛으로 오셨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은 어둠이었습니다. 어둠은 빛을 싫어합니다. 우리는 작은 등불이 되어 어두운 세상에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으로 빛을 비추어야 합니다.
돌이켜 생각하면 지금 어둠이 서서히 온 땅을 덮어가고 있습니다. 그래도 우리는 힘이 없습니다. 어둠 속에는 더럽고 추한 것들이 있습니다. 불의한 것들과 탐욕스러운 것들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마치 포도원을 허는 여우와 같이! 때로는 우는 사자와 같은 것들이 어둠 속에서 바쁘게 움직이고 있습니다.
지금이라도 이 어두움에 한 줄기의 빛이 비추어 지기를 기대합니다. 그러면 어둠은 순식간에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유감스럽게도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정의가 집행되지 않고 있습니다. 죄악을 행하여도 형통하고, 정직하고 성실하게 살아도 가난하고 멸시받으며 억울한 일을 당합니다.
당연히 죄악을 행하는 자는 벌을 받고, 의롭고 착하게 산 사람들은 복을 받아야 하는데 이런 말은 이미 설득력을 잃어 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과 축복이 신속하게 집행되지 아니하니까 죄악을 행하는 자는 더욱 담대하게 악한 짓을 합니다. 대신에 착하고 의로운 사람들은 고통을 받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 낙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모든 사람이 하나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날이 있습니다.
장차 주님께서 다시 오실 날! 행한 대로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누구라도 예외 없이 말입니다. 자기가 세상에 사는 동안에 지은 죄가 낱낱이 드러나고 모든 행실이 밝혀집니다.
마치 빛이 비추이니 어둠 속에 있는 것이 나타나듯이 말입니다. 이 때에 예수 믿지 않는 자들은 멸망의 심판을 받지만 예수님을 믿는 성도들은 상급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잘 섬기고 주님의 이름으로 선행을 많이 한 사람은 상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믿지만 선행과 봉사와 헌신의 생활을 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상급이 주어지지 않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빛은 드러나야 맛입니다. 드러나는 것을 두려워하거나 불편하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설사 불편하더라도 이것이 사명이니 기쁘게 감당해야 합니다.
어떤 이들은 드러나는 것을 크게 불편해 합니다. 다소 불편하더라도 잘 감당하십시다. 빛이 숨어 있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빛으로 드러나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성도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결론}***
여러분!어떻게 사는 것이 빛으로 사는 것입니까?
빛은 주는 것입니다. 빛은 밝히는 것입니다.
빛으로서의 자의식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빛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면서 이미 등불은 켜졌습니다.
이 등불을 드러내어 세상을 밝혀야 합니다. 어떤 이유에서든지 등불을 가려서는 안됩니다. 빛은 혼자 즐기라고 주신 것이 아니라 어두움을 몰아내고 환하게 밝히라고 주신 것입니다.
여러분! 등불을 높이 듭시다. 어두운 세상에 희망의 빛이 되십시다.
여러분! 그러므로 우리는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때로는 불의가 잘되는 것과 같아도 실망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 다시 오실 그 날을 바라보면서 인내로서 믿음의 경주를 하여야 하겠습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어떻게 듣는가 스스로 삼가라 누구든지 있는 자는 받겠고 없는 자는 그 있는 줄로 아는 것까지도 빼앗기리라”(18절)
이것은 하늘 나라의 법칙입니다.
“있는 자에게는 더 주고, 없는 자에게는 있는 것까지도 빼앗는다”는 것이 하늘 나라의 법칙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있는 것을 감사하며 처한 환경에서도 감사해야 합니다.
등불을 보고 감사하면 전등불을 주시고, 전등불을 보고 감사하면 달빛을 주시고, 달빛을 보고 감사하면 햇빛을 주시고, 햇빛보고 감사하면 등불도, 전등불도, 달빛도, 햇빛도 필요 없는 천국을 주신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현재 처해있는 상황과 가지고 있는 것을 인정하고 감사하면 더 주실 것이지만 불평하고 원망하면 있는 것조차 빼앗아 가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있는 것을 바라보고 감사하고 감사하여야 합니다. 우리가 인생을 부정적으로 바라보느냐 아니면 긍정적으로 바라보느냐에 따라 우리 인생은 완전히 달라질 것입니다.
“없다, 못한다, 안 된다, 할 수 없다”라고 하는 사람은 복을 받지 못할 것입니다. 가진 것도 잃을 것입니다.
그러나 “있다. 할 수 있다, 하면 된다, 해보자”라고 하는 사람은 반드시 복을 받을 것이며 그 인생 길이 형통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한사람, 한사람이 어둠 속에 묻혀있는 불빛들이 되지 마시고 모든 사람을 비추이는 불빛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묵상:누가복음8:16-18절입니다. 오늘도 말씀을 묵상하시고 예수님의 빛을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여러분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시기를 소원합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어떻게 들을까 스스로 삼가라 누구든지 있는 자는 받겠고 없는 자는 그 있는 줄로 아는 것까지도 빼앗기리라 하시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