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늘의 내력
서은영
그늘에 들어선다. 산책로를 덮고 펼쳐진 산그늘을 걷는다. 별스러울 것도 없지만 산이 생겨난 이래로 만들어진 깊이이니 태곳적 그늘이라 할 만하다. 등 뒤에서 언제나 나를 따르던 평생의 그림자도 어느새 산그늘이 품은 태고의 것이 되어버린 느낌이 든다. 얼마나 더 걸어 들어가면 나도 저 거대한 원시의 깊이에 가닿을 수 있을까. 내게 흘러들어 나를 이룬 것 가운데 태고가 무엇일까 생각해 본다.
산기슭을 따라 둘레길이 그리 넓어 보이지 않는 그늘을 품고 숲 사이로 길게 이어진다. 지난 계절도 그 이전의 세월도 쌓였는지 숲길이 짙다. 햇볕을 땅속까지 끌고 들어간 나무들이 빛을 삼킨 뒤 그 나머지를 다시 땅 위로 밀어낸 자국, 날마다 달아나는 햇살과 움켜쥐려 안달인 어둠의 중립지대, 하늘을 만져보고 싶었던 나무의 간절함이 잎이라면 어둠이 머물던 자리에 잎이 내려놓은 햇살의 기억, 이 모두가 그늘을 이루는 셈이다. 기억은 누구의 몸에 머무르던지 오래도록 따스함을 간직하고 그늘로 여문다. 가지가 부려놓는 그늘이 한낮을 떠받치고 있다.
숲의 그늘이 앉은 자리에 이끼가 무성하다. 이끼는 숲의 물기를 모아 연둣빛 솜으로 부풀리는 그늘의 다른 이름. 아주 조금의 햇살로 그늘을 느리게 데운다. 녹음의 빈자리를 채우려는 듯 이끼가 바위틈 사이로 조용히 뿌리를 옮긴다. 이끼에 다다른 달팽이가 홀연히 떨어지는 산벚꽃잎을 올려다보며 온순한 맨발을 쉬듯이 때론 바닥에 납작 엎디어 눅진한 때를 건너온 사람에게 기꺼이 푹신한 자리가 되어 미끄덩한 발바닥을 씻게 한다. 그늘이 몸을 갖는다면 이끼이지 않을까.
그늘은 바닥 이상의 높이를 가진 적이 없다. 부피가 전부일 뿐 무게를 갖지 않으니 무엇인들 밟아 보았겠는가. 나무가 발밑을 들춰봐도 바닥을 떠나지 않는 그늘은 비가 오면 제 몸도 사라지고 만다. 솟구치기 위해 그늘은 고작 옹벽에 기대어 일어서지만 결국 한 겹일 뿐 두께를 갖지 못한다. 움직일 수는 있어도 일어서거나 달아날 수 없는 게 그늘이다. 바닥을 전전해야 했던 골목의 시절은 내게 그런 그늘이었다. 나는 흐린 날의 눅눅한 지푸라기 같았고 가난 탓이라는 말로는 다 내색할 수 없었다. 바닥에 가까웠으며 희미해서 사라질 것 같았다. 기어오를 옹벽을 찾아 사방을 더듬는 담쟁이처럼 분주했으나 멈춘 듯 보였다. 나는 부피 이전의 홑겹에 가까웠고 그늘보다는 얼룩에 가까웠다.
새벽을 달려온 봉고 승합차가 토하듯 사람들을 부려놓으면 한 바가지 오물을 뒤집어쓴 듯한 사람들이 작업장으로 들어갔다. 흐린 불빛 속, 쉼 없이 돌아가는 공업용 재봉틀에는 가늘어서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은 실이 알록달록한 천을 박음질하기 바빴다. 뭉치를 이루고 쌓인 옷에 늘어진 실밥을 따거나 가지런히 단추를 채우노라면 내 그늘까지 딸려드는 것 같았다. 차라리 옷을 포장하던 상자 속으로 개켜져 토막잠이라도 잤으면 싶었다. 꿈 많던 대학 신입생 티를 벗지도 못한 첫 여름방학 아르바이트였다.
한 철만 하는 짧은 일었지만 가정 형편은 고스란히 피곤한 얼굴로 옮겨놓아 짙은 그늘이 되었다. 분홍색 티셔츠를 입고 하늘색 모자를 써 봐도 그늘은 지워지지 않았다. 한껏 밝아 보이려던 치장이 어두운 낯빛을 강조할 뿐, 2학기 등록금은 마련되지 않았다. 남동생을 업고 집 안 구석구석을 걸레질하기 바빴던 맏이의 그늘이 여전히 쫓아와 짙고 길게 나를 다그치던 시절이었다.
내 몸에도 그늘이 숱하게 많았다. 눈물은 그늘의 표시인지도 모른다. 그늘의 부속이 되기라도 한 것처럼 나는 지나치게 자주 울었다. 눈물겹지 않은 곳이 없어서, 빨랫줄에 널어놓은 빨래에 물방울이 맺힌 것만 보아도 옷소매를 적시곤 했다. 축축한 마음은 다리 달린 생물처럼 온 데를 다녀서, 책상 뒤편에서 잃어버린 양말 한 짝을 찾아냈을 때 왜 눈물이 났는지 알 수 없었다. 모든 게 내가 속한 그늘의 짓이라 둘러댔다.
구김살을 감추기 위해 그늘을 끌고 부엌 위에 얹어있는 작고 낡은 다락방으로 숨어들곤 했다. 구석이 많아서 숨길 것도 찾을 것도 많은 거기엔 이상하게도 그늘이라곤 없었다. 다락방은 전부를 꿈으로 바꿔치기에도 그만이었다. 새것이라곤 없는, 낡아도 그럭저럭 허접해 보이지 않는 보따리 속엔 엄마의 볕 들던 날의 한때가 빨간 비로드 통치마로 여전히 환했다. 젖내 얼룩진 배냇저고리가 배시시 내 흉내로 웃고 있었다. 기억나지 않는 시간 속에 엎드려 있는 것만으로도 상상은 구김살 하나 없는 모습을 하고 슬금슬금 밝아졌다.
그림자가 그늘에 들어서면 그늘은 품는 것으로 그림자를 지울 줄 안다. 그런 면에서 나는 작고 비좁은 그늘이다. 늘 어떤 그림자든 다 품지는 못한다. 손바닥과 손등이 하나의 손인 것처럼 그림자는 그늘이 되기도 하는 섭리를 생각해 본다.
어느덧 산그늘을 지나는 산책길이 끝나간다. 해를 등지고 걷는 내 앞으로 그림자이면서 그늘이기도 한 또 다른 내가 걸어가고 있다. 바닥의 상태에 따라 수시로 길이를 달리하면서 내 앞에서 내가 걷는다. 내 안에 웅크린 그늘을 꺼내 펼쳐 누군가를 쉬게 할 날이 오기도 할까. 그때 나는 아이가 아니라 웅숭깊은 그늘을 품은 거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사람이 사람을 깨닫는 일은 자신의 그림자를 다 이해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고 말해도 틀리지는 않을 것 같다. 등을 떠미는 빛의 응원을 받으며 그림자와 그늘의 사이이지 싶은 나를 따라 집으로 간다.
집도 그늘이다. 온기가 가득하고 내게서 비롯된 이들이 함께 산다. 지붕이 이룬 그늘을 유지하는 온기는 가족으로부터 온다. 시시때때로 모여 앉아 서로의 그늘을 재고 그 속에서 서로를 나눈다. 다독이는 손길, 따뜻한 응원, 격려와 축하, 함께 할 수 있어 감사한 마음을 펼쳐 어디선가 묻어 든 얼룩을 씻는다. 이런 그늘을 누릴 수 있음은 그늘이 가진 역사 때문에 가능하다. 내게 그늘을 나눠준 부모들, 그들 어깨 뒤에 대를 이어 거슬러 오를 수 있는 그늘이란 흔한 말로는 담을 수 없는 숭고한 가치를 품는다.
새삼 내가 가진 그늘을 펼쳐본다. 또렷하진 않지만 어떤 형태가 어른댄다. 따뜻한 표정의 얼굴이 가득하다. 불편한 것이라 여겨 이제껏 그늘을 끌고 다녔구나. 그늘의 크기를 결정하는 것이 결국 나라는 것도 알 것 같다. 산다는 건 저 혼자 우격다짐하는 게 아니라 제 그늘에 덧붙인 여러 그늘의 연대라는 걸 알겠다. 이제야 평생 입을 한 벌의 옷, 몸 밖의 몸을 마주한다. 그늘에 산다.
ㅡ제14회 천강문학상 수필 우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