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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불교학자 45. 하타니 료타이(羽溪了諦) / 정상교
훈고 비판으로 근대불교학의 길을 가다
1. 출생과 시대적 배경
하타니 료타이(羽溪了諦, 1883~1974)는 후쿠이현(福井県)에서 태어나 1896년 정토진종(浄土真宗) 본원사파(本願寺派)의 승려가 되었다. 1909년 교토제국(京都帝國)대학 문과대학 철학과 인도철학 강좌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 진학하여 본격적인 연구자의 길을 걷게 되었다. 그리고 1910년 붓쿄(佛敎)대학(현 류코쿠대학), 임제종(臨濟宗)대학(현 하나조노대학) 등의 강사를 거쳐 1921년 류코쿠대학 교수, 1935년 교토제국대학 교수, 1944년부터 2년간 류코쿠대학 학장을 지내고, 1952년 교토여자대학 교수를 역임하였다. 이와 같이 하타니는 교토의 대학들과 본원사파에 속하는 교육기관에서 중요 직책을 담당하며 불교학 연구와 후학 양성에 힘썼다.
그가 불교학자로 활동하던 시기는 당시로부터 약 1세기 전 유럽에서 시작된 근대적 불교학이 뿌리내려 성장해 가던 때였다. 일본은 중국 및 한국을 통해 전해진 한문 불교를 바탕으로 천 년 이상 다양한 불교문화를 꽃피웠다. 그런데 19세기 중반, 일본사회를 근본부터 뒤바꾼 메이지(明治) 유신은 천황을 국가 통치의 중심에 놓는 제정일치(祭政一致)의 복고 체제를 성립하기 위해 신도(神道)를 기본 이념으로 채택했다. 그로 인해 불교는 신도에서 분리되는 등 폐불훼석(廢佛毁釋)의 어려움을 맞이해야만 했다. 물론 초기 메이지 정부의 이러한 시도는 시대에 너무나 뒤떨어진 정책이었고 서구로부터 유입되는 크리스트교에 대항하기 위해서도 불교의 복권이 필요했다.
어쨌든 전례 없던 역사적 사건을 경험한 일본 불교계는 변화하는 시대에 맞춰 자체 개혁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되었고 그 변화 속에서 승려의 교육 역시 종파별로 자유로워졌다. 특히 하타니가 속한 정토진종은 우수한 인재들을 서양으로 보내 언어학·문헌학·고고학·역사학 등을 기반으로 하는 신식(서양식) 불교 교육을 도입하는 데 선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일본 근대 불교학의 기반을 세운 난조분유(南條文雄, 1849~ 1927), 가사하라 겐쥬(笠原研寿, 1852~1883)는 메이지 시대 제1세대 유학생들로 정토진종의 대곡파(眞宗大谷派) 소속이었다. 또한 대정신수대장경 편찬의 주역이었던 다카쿠스 준지로(高楠順次郎, 1866~1945) 등 뛰어난 불교학자들이 메이지 초기에 유럽 및 해외에 진출해 인도철학 및 불교학을 배우고 귀국하였고, 이들은 도쿄제국대학과 여러 불교계 대학에서 일본 근대 불교학의 기틀을 다졌다.
일본 불교학계는 이와 같은 새로운 방법론에 의해 전개된 불교학 연구를 시기적으로 구분하기 위해 메이지 초기부터 제2차 세계대전 패전까지를 일반적으로 ‘근대 불교’라고 명명한다. 따라서 다카쿠스 등 메이지 시대 학자를 사사한 도쿄제국대학의 기무라 타이켄(木村泰賢, 1881~1930), 우이 하쿠주(宇井伯寿, 1882~1963)가 하타니와 동시대이므로 하타니는 거칠게나마 일본 근대 불교학계의 2세대 학자로 분류될 수 있을 것이다. 즉, ‘불교학자 하타니 료타이’를 이해하는 중요한 관점 중 하나는 1세대 근대 불교 연구자가 닦아 놓은 서구식 불교학을 어떻게 수용하여 발전시켰는가이다.
일본 불교계는 메이지 초기, 불교에 대한 여러 정책을 거치며 서구에서 들어온 불교학을 구축함과 동시에 국가 유지를 위한 보조 수단으로서 종교 교육과 윤리의 한 축을 담당하게 되었다. 하타니가 교토제국대학의 교수 등을 역임하며 중진 불교학자로 활동할 당시 일본은 만주사변과 제2차 세계대전 및 패전 이후라는 격변기를 지나고 있었다.
이때 하타니는 불교 교학 연구는 물론, 불교사상을 천황제 옹호를 위한 이론으로 활용하였다. 그러면서도 패전 후 미군정하에서는 천황제와 전쟁에 대한 반성을 위한 새로운 교육 철학을 구축할 때도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따라서 이 글은 ‘제2세대 근대 불교 연구자’라는 시대 상황에 맞춰 하타니의 생애와 연구를 살펴볼 것이다.
2. 근대 불교학의 발전 과정에서
일본 불교학계에서 메이지 시대의 불교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는 시마지 다이토(島地大等, 1875~1927)의 《메이지 종교사》(1920)에서 시작되었다. 이러한 흐름은 패전 이후에도 근대 불교라는 개념 속에 포함되어 계승되었다. 즉, 현재도 그렇지만 메이지 이후 불교학자들은 기존과는 완전히 다른 불교학이 도입된 앞선 세대의 성과를 중요한 연구 대상 중 하나로 인식하였다. 하타니 역시 메이지 시기 약 반세기 동안 일본 불교(학)계가 경험한 변화를 《메이지 불교학자의 해외 진출》(1933)에서 밝히고 있다. 그는 메이지 시대에 유럽은 물론 인도, 티베트, 실론 등으로 불교학 연구를 위해 유학을 떠난 많은 불교학자를 초기(1871년~1886년), 중기(1887년 이후), 후기(1902년 이후)로 나눠 상세히 소개하고 있다.
앞서 언급하였듯이 정토진종 소속으로 일본 근대 불교학의 초석을 다진 난조와 가사하라는 인도학 연구에 커다란 영향을 끼친 동양학자 막스 뮬러(Friedrich Max Müller, 1823~1900)를 사사하며 일본에 소장된 《무량수경》 《아미타경》 등의 산스끄리뜨어본 출판에 공헌한 사실을 알렸다. 또한 다카쿠스 역시 근대 불교학의 기반을 다진 헤르만 올덴베르크(Hermann Oldenberg, 1854~1920)와 폴 듀센(Paul Jakob Deussen, 1845~1919) 등을 사사하고 한역만 존재하던 《관무량수경》을 영역하여 막스 뮬러의 《동방성전》 일부를 구성하고 있음을 밝혔다.
약술하였지만 이와 같은 일본 근대 불교학의 도입 과정은 150여 년 전의 역사적 사실로서 현대의 불교 연구자들에게는 상식적인 내용일 것이다. 하지만 하타니가 이 논문을 쓰던 시점에서 바라보면 바로 앞 세대들의 발자취는 박제된 역사가 아니라 그에게 현재진행형으로 직접적인 영향을 끼치던 사건이었다. 하타니의 또 다른 저서인 《불교학 개론 서설》(1935)은 제목처럼 제1장 〈불교학의 범위와 목적〉 제2장 〈불교의 기원〉 제3장 〈불교의 구성과 법의 관념〉으로 편성된 개론서이다. 따라서 특정 주제를 심도 있게 논의한 서적은 아니지만 서구식 연구 방법론에 의해 탄생한 불교학이 무엇인지를 알리고 있다.
제1장 〈불교학의 범위와 목적〉에 의하면 기존의 불교 연구가 한문 경전에 기반한 훈고학적 분석에 지나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새로운 불교학은 한문은 물론 산스끄리뜨어·빨리어·티베트어 등에 기반한 언어학적 접근은 물론 사학·고고학·철학·예술에 대한 지식이 있어야 하는 종합적이고 복잡한 연구 체계임을 알려준다.
하타니는 일본에 어떻게 근대 불교학이 전해지고 그러한 연구 체계가 어떤 것인지 분석하는 것에 머물지 않는다. “우리나라(일본)의 불교 연구자를 흥분시킨” 근대식 연구 방법이 전래한 지 50여 년 만에 일본 불교학계의 수준이 이제는 그 발상지인 유럽과 거의 대등한 수준에 도달했다고 평가한다. 그 이유로 이제 일본 학자들의 인도, 티베트 등의 고전 문헌 연구가 가능함은 물론 서구의 연구자들이 접근하기 어려운 한문 경전 활용에서 비교 우위에 있다는 점, 그리고 일본 역시 산스끄리뜨어 사본의 수집 및 보유, 그리고 번역이 상당한 수준에 도달한 것으로 진단한다. 따라서 당시로서는 미개척 분야로 남아 있는 일본 및 조선 불교에 관해서도 일본 학자가 유리하다고 전망하고 있다.
20세기 초 불교학 관련 고문헌의 발굴에 관해 살펴보면, 당시 유럽 각국은 중앙아시아 등으로부터 불교 사본을 조사 발굴하여 불교학 연구의 살을 찌우고 있었다. 영국의 오렐 슈타인이 이미 1900년 초부터 1931년까지 총 4차례에 걸쳐 중앙아시아를 탐험하고 둔황은 물론 코탄, 쿠차, 투루판에서 불교학 연구에 매우 중요한 자료와 문헌을 확보하였다. 그리고 이에 대한 연구 성과를 발표하였다. 비슷한 시기인 1906~1909년에는 프랑스의 폴 펠리오 역시 둔황, 투르판, 쿠차 지역에서 중요한 문헌을 유럽으로 알렸다.
열강의 반열에 올라선 일본 역시 정토진종 본원사파의 오타니 코즈이(大谷光端, 1876~1948)가 탐험대를 꾸려 1902~1914년간 3차에 걸쳐 오타니 탐험대를 조직하여 투르판을 중심으로 쿠차 등에서 여러 유물과 자료를 확보해 일본으로 가져왔다. 즉, 하타니가 1909년 대학을 졸업하고 연구자의 길로 들어서 활동하던 시대에 서구의 불교학계는 기존의 내용을 새로 써야 할 만큼 가치 높은 자료가 속속 발견되던 때였다. 일본 역시 반세기 동안 축적한 연구 능력은 물론 유럽과 같은 탐험대의 수집을 바탕으로 ‘국제’ 불교학계와 대등한 수준으로 성장하고 있었다.
책의 앞부분에서 이러한 상황을 알린 하타니는 당면한 불교 연구 과제를 제시한다. 첫째, 당시도 이미 60종 이상의 학설이 존재하는 불멸 연대의 확정이다. 붓다의 생몰 연대뿐만 아니라 고대 인도의 인물이나 사건의 연대 확정은 여전히 쉽지 않은 문제다. 하타니가 이를 가장 중요한 문제로 제기하는 이유는 역시 새롭게 도입되어 일본에 뿌리내린 ‘과학적’ 불교의 정착에 맥이 닿아 있다. 즉, 불교를 역사학이라는 학술적 토대 위에 세우기 위해서 불교의 출발점인 붓다의 생몰 연대가 확정되어야 한다. 그렇게 되면 불교 사상사에 한 획을 그은 아슈바고샤(馬鳴), 나가르주나(龍樹), 아상가(無着), 바수반두(世親) 등의 활동 시기와 그들이 저술한 논서의 연대, 그리고 중요한 불교사 역시 확정할 수 있게 된다.
이어서 하타니는 교리적 측면의 연구 과제를 제시한다. 즉, 불교 출현 당시의 인도 사상과 문화를 기반으로 불교를 이해해야 현재(하타니의 시대)에도 충분히 규명되지 못한 근본불교의 십이지 연기나 법의 개념을 밝힐 수 있다고 지적한다. 그러한 성과 위에 근본불교, 부파의 사상, 그리고 대승불교의 종교적 이념을 체득하여 이를 철학적으로 고찰해 각 사상을 조직하는 ‘조직불교학’을 구축하는 것이 최종 목표라고 한다.
개론서에서 밝힌 이러한 제안은 상당히 일반론적이기는 하다. 하지만 불교를 동양 사상의 핵심으로 본 하타니는 교조인 붓다와 불교 사상가들을 역사적 흐름 위에 자리매김한 후 그들의 사상을 철학적으로 분석하는 것은 그 시대에 가장 중요한 원칙이었을 것이다. 이렇게 되면 불교는 명확한 근거 위에 수립된 종교 및 사상이 될 것이다. 이는 곧 불교가 메이지 이래 수립된 근대적 관점에 맞는 학문 연구의 대상이 될 것임은 당연한 귀결이기 때문이다.
그의 연구 성과물은 대체로 이러한 목적의식을 따르고 있다. 불교 출현 당시의 인도 상황, 용수 및 중관 사상, 둔황 출토의 용수 및 마명의 저서, 구마라집 연구, 중앙아시아의 불교문화, 정토진종의 핵심인 아미타불 신앙, 세친의 《정토론》 해설, 근본불교와 진종의 관계, 일본 천태의 원조로서 도수(道邃), 빨리어 《사문과경》의 일역 등 그는 매우 폭넓은 연구 성과를 발표하였다.
특히 그가 일본종교학회가 발행하는 《종교연구》 1권 1~4호(1916~1917)에 걸쳐 투고한 《유식종(唯識宗)의 이파(異派)-조선계의 유식종》에서는 중국 유식학파의 주류가 된 현장(玄奘)-규기(窺基)의 소위 자은사(慈恩寺) 계열에 비해 그 세력이 약했던 서명사(西明寺)에 주석했던 신라 출신인 서명 대사 원측(圓測) 및 신라 유식 사상을 탐구한다. 이 논문은 훗날 하타니의 미수(米壽) 기념 논집인 《하타니 박사 불교 논설 선집(羽溪博士佛敎論說選集)》(1971)에서도 가장 긴 분량(pp.781-857)으로, 원측 사상에 대한 연구가 많지 않았을 때 하타니가 2년여의 노력을 통해 완성한 성과이다. 논문에서 하타니는 신라로 전해진 원측-도증(道證)-대현(大賢) 계통의 사상적 특징을 ‘포괄적 조화적 정신’으로 포착하여 흔히 한국불교를 표현할 때 쓰는 화쟁의 의미를 분석한다. 그리고 이러한 경향은 현장-규기의 해석에서는 보이지 않는 독특한 신라계 유식의 특징으로 결론짓는다.
일본에서는 근대 이전부터 대승비불설을 둘러싼 논쟁이 상당히 오랜 역사를 가졌다. 따라서 서구식 연구 방법론을 익힌 근대기 불교학자들에게도 ‘대승불교’의 나라 일본의 불교가 불설인가 아닌가는 중요한 문제였다. 정토진종의 하타니 역시 《대승경전의 성립》(1964)의 머리말에서 ‘대승이 불설인가를 둘러싼 최근 불교계의 뜨거운 논의’에 다소나마 기여하기 위해 책을 쓴다고 밝히고 있다. 그는 대승과 소승 경전의 차이는 붓다 교설에 대한 수용의 이해 차이에 지나지 않고 그 근원은 같다고 한다. 종래 소승은 무아만, 대승은 이에 더해 법공(法空)까지 설한 차이가 있다고 보았지만 현재(출판 당시)는 대승과 소승 모두 교리적 구별이 없다고 한다.
그러면서도 소승 부파는 ‘편집분열주의(偏執分裂主義)’임에 비해 대승불교는 ‘귀본통일주의(歸本統一主義)’라고 표현한다. 붓다 깨달음의 중핵은 연기·공·무아를 체득한 대지혜와 타인에 대한 대자비이다. 이를 하타니는 “일체 존재를 자신의 구체적 내용으로서 통섭하는 대지혜의 빛과 그 빛이 비추어 필연적으로 빛으로 나타나는 자타일여(自他一如), 절대동체관(絶對同體觀)으로부터 스스로에 대한 자애처럼 다른 모든 것을 평등하고 자애롭게 대하고, 타인의 자애를 스스로의 자애로서 동감동정(同感同情) 하는 한없는 대자비의 생명에 다름 아니다.”라고 설명한다. 물론 90페이지 남짓한 이 책자는 엄밀한 논증이 필요한 연구서가 아니다. 그런데 뒤에서도 다루겠지만 하타니는 불교 교육을 통한 천황 및 전쟁 옹호를 주장할 때도 이와 같이 상당히 거시적이고 추상적인 장문의 문장을 즐겨 사용한다.
이러한 대비심은 《법화경》이 설하고 있지만 《무량수경》은 이를 더욱 철저하게 드러낸다고 보고 있다. 따라서 대승 경전이 소승 경전보다 붓다의 깨달음을 더욱 잘 나타낸다고 주장한다. 대승비불설을 둘러싼 논쟁은 특히 역사적 붓다의 직설을 강조하는 《법화경》과 정토삼부경에 기반한 일본의 종파들에게 민감한 문제였다. 따라서 그의 해석은 정토진종에 속한 하타니의 호교론적인 시각으로 보인다. 그런데 ‘정토진종 소속 불교학자’로서 하타니의 연구 이력에 간과할 수 없는 또 하나의 중요한 부분은 바로 천황제와 전쟁에 관한 불교 이론의 활용이다.
3. 천황, 국체 그리고 불교
제2차 세계대전 패전 이후 하타니는 향후 종교 교육의 방향을 제시하는 중요한 국가 직책을 수행한다. 그것은 이미 그가 1930년대 불교를 어떻게 천황 중심의 국체(國體)와 연결할 수 있는지에 대한 저서를 발표한 이력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불교(종교) 교육 이론가’라는 이력은 하타니를 이해하는 또 하나의 중요한 항목이므로 이에 관해 살펴보기로 한다.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서 승리하고 조선을 식민지로 만든 일본은 20세기 초에 제국주의 열강의 반열에 올라섰다. 이후 일본의 군국주의 정부는 국내외의 여러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 1931년 만주를 침략했다. 이에 대한 국제사회의 비판에 직면한 일본은 국제연맹을 탈퇴하였고 1935년에 그 효력이 발생하였다. 이와 같이 1930년대의 일본은 해외 침략을 통한 팽창주의로 치닫고 있었다. 이러한 사회적 흐름 속에서 하타니는 1936년 대동출판사에 발행한 ‘불교사상대계(佛敎思想大系)’ 시리즈 제8권 《불교 교육학》을 집필하였다. 이 책은 불교사상을 어떻게 천황 중심의 국가주의에 활용할 수 있는가를 논의하고 있다.
하타니는 머리말에서 교육학은 독립된 학문 체계이므로 불교를 기반으로 교육학을 구축하려는 새로운 시도가 가능할지 운을 뗀 후 논리를 전개한다. 총론에 해당하는 도입부에는 그가 중요하게 여기는 몇 가지 관점을 살펴볼 수 있으므로 다소 길지만 간추려 보면 다음과 같다. 하타니는 불교에서 최고 교화 가치의 실행은 자신과 타인을 깨달음으로 이끄는 것이라고 한다. 왜냐하면 붓다의 가르침은 각 개인에 머무는 것이 아니고 일체유정과 모든 존재에게 보편타당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서 ‘절대 가치’를 보편적·객관적으로 실현하려는 중생성취·국토성취의 본원(本願)이 약동해 각타(覺他)의 행을 낳는다. 불교에 따르면 지혜(自覺)와 자비(覺他)는 별개가 아니다. 전자는 후자에 대한 올바른 지도 원리가 되고 이로 인해 ‘절대 자유’의 입장에서 발동하는 순수한 이타행이 이루어진다. 그와 동시에 후자는 전자를 현실계에서 구체화시키는 동력이 되고, 결국 양자의 상호작용에 의해 ‘최고 가치’의 법이 성취된다.
이어서 하타니는 불교적 자각은 자연적 자아 및 대립적 존재에 집착하여 고정된 실재로 보는 편견을 부정하는 것이며, 일체를 종합하고 통섭하는 ‘순수 최고’의 ‘능통일자(能統一者)’의 입장에서 깨달음에 도달함과 동시에 유한한 상대의 지상적(地上的) 존재 모두의 내부에 간직된 ‘무한 절대’의 실상을 직관함에 다름 아니라고 한다. 그리고 일체를 통섭하는 ‘절대 최고’의 실상은 모든 가치를 창조하는 무한 생명 그 자체이고, 그 무한 생명의 성스러운 원류에 저절로 하나 됨에 불교의 ‘초인적’인 대자각(大自覺)의 경지가 전개된다고 설명한다.
1930년대 문장이라는 점을 고려해도 하타니는 불교를 사상적으로 설명할 때면 앞의 대승과 소승 불교를 설명할 때처럼 상당히 거시적이고 추상적인 장문의 표현을 자주 사용한다. 이러한 특징은 그가 불교의 궁극적 이상을 표현하기 위해 즐겨 쓰는 ‘절대 가치’ ‘절대 자유’ ‘최고 가치’ ‘절대 최고’ ‘순수 최고’ 등의 단어로 인해 더욱 두드러진다. 재론하겠지만 결국 ‘절대’와 ‘최고’로 수식되는 가치는 불교(종교) 교육의 핵심 기제로 작동하는 천황이라는 만세일계(萬世一系)의 존재이며 그 존재를 국가 제도 속에서 품어온 일본 국체와 융합되는 개념이다.
그럼 왜 붓다의 가르침이 교육(학)일 수밖에 없는가? 이에 대해 하타니는 붓다가 평생 중생교화에 몸을 바쳤기 때문에 현대 교육학의 주류가 이미 붓다에 의해 종합되어 있고, 서구식 교육학의 근본 주장도 이미 붓다에 의해 이상적으로 실행되었음이 판명되었다고 한다. 따라서 이 세상에 어떠한 이념이 생겨나도 불교와 같은 교육적 이상을 확립시킬 수는 없다고 한다. 그리고 하타니는 붓다 재세 시의 교화행은 물론 불교가 전개된 중국과 일본에서 전개된 교상판석을 불교 교육의 구체적인 예로 제시한다.
또한 종교에 기반한 교육의 정당성을 주장하기 위해 그는 종교적 가치에 기반하지 않는 교육가는 교육가의 자격이 없고, 종교적 교육이 아니고는 생명이 약동하는 진정한 교육이 되지 않는다고 한다. 물론 이러한 관점은 정교분리를 기반으로 하는 민주주의 정신과는 거리가 멀지만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그는 대단히 국수주의적 시각을 드러낸다.
즉, 불교에 기반한 교육이 필요한 이유는 메이지 이래 과학만능주의, 유물론에 입각한 편지적(偏知的)·현실적·반종교적 교육에 의해 일본 국민이 물질 중심의 인생관, 감각주의, 이기주의, 향락주의에 빠져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는 일본 특유의 전통문화는 서구문화에 물든 나머지 유린당하고 있으며 경망스럽고 궤격(詭激)한 탁류가 넘치고 있다고 자신의 시대를 진단한다. 그래서 하타니는 “그 폐해에 가슴을 치며 통탄해하던” 당국자와 선각자는 그 뿌리를 뽑기 위해 분투하던 찰나, 만주사변을 계기로 일본이 내치, 외교, 사상, 경제 모든 방면의 어려움에 당면해 있기 때문에 국가 비상시를 돌파하기 위해서는 일본 국민을 조국 특유의 전통적 정신을 재인식하는 의기분천이 있어야 한다고 피력한다. 종교적 절규는 일본 정신을 고양하고 살리는 방도가 된다. 결국 하타니에게 불교 교육의 목적은 서구 사상으로 인해 상실된 일본 정신의 회복과 만주사변에 의한 국내의 어려움을 돌파하는 것이다. 바꿔 말하면 불교 교육은 전시 국민의 정신 무장을 위함에 다름 아니다.
하타니의 이러한 의도는 책의 마지막 제10장 〈불교와 국민교육〉에서 종합적으로 나타난다. 그는 중국 국민이 보여준 개인주의의 극단으로 국가가 혼란을 맞이했다는 자의적 해석과 독일이 편협한 국가주의에 빠져 1차대전을 일으켜 패전했다고 분석한다. 따라서 정당한 국가주의를 위해서는 명확한 국가관, 그리고 세계 평화와 인류 행복을 염원하는 초국가적 입장을 존중해야 한다고 한다. 그러한 정신은 다름 아닌 메이지 천황이 1908년 발표한 무신조서(戊申詔書)의 “동서(東西)가 서로 의지하고, 피차(彼此)가 서로 도와 그 행복과 이익을 함께 누린다”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일본이 (만주 침략으로 인해) 어쩔 수 없이 국제연맹을 탈퇴한 것은 결코 편협한 국가주의는 아니라고 한다.
하타니에게 불교는 양극단의 개인주의와 국가주의를 넘어선 보편타당한 원리인데 그러한 불교 정신을 구체화하기 위해서는 국가와 민족이 기반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천황제 국가와 불교가 공존할 수 있는 이유는, 일본의 국체가 인류 역사상 유례없는 만세일계의 천황으로 표현되는데, 그 본질은 보편적 대도인 ‘신 그대로의 길(神ながらの道)’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는 곧 무아무집(無我無執)에 의해 이끄는 연기 중도의 체득과 상통한다고 한다. 물론 억지스러운 논리지만 이 대목에서 그가 천황제와 국가중심주의를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는지 엿볼 수 있다.
패전 후 종교 교육가로서의 하타니를 분석한 야마다 토시아키(山田智敬)의 《진종에 있어 종교 교육의 전전과 전후-하타니 료타이를 중심으로(真宗における宗教教育の戦前と戦後-羽溪了諦を視座として)》(2023)에 의하면 하타니가 속한 정토진종 본원사파는 이미 종파적 교의를 통해 천황제를 긍정적으로 지원하고 있다고 한다. 즉, 본원사파는 메이지 천황이 1890년에 발표한 교육칙어(敎育勅語)를 불교의 진속이제(眞俗二諦)에 기반해 “진제는 내세에 서방 왕생을 통해 고난에서 벗어나고, 속제로는 현생에 황국의 충성되고 선량한 인재가 되어 국가의 은혜에 보답함”이라고 한다. 즉 천황을 중시하는 하타니의 사상 역시 이러한 교단의 가르침과 맞닿아 있다는 것이다.
패전 이후 일본은 연합국에 의해 천황제에 기반한 국가 통치 시스템과 교육 이념을 바꿔야만 했다. 이때 내각 교육 쇄신위원회의 주사(主査)로 선출된 하타니는 붓다의 깨달음과 연기, 무아, 자연이라는 정토진종의 가르침을 새로운 시대의 ‘종교적 정조(情操)’ 개념으로 수립하여 종교 교육의 기반으로 제시했다. 물론 패전 이후에도 천황제가 존속되기도 했지만 하타니에게 천황에 대한 경외심은 그와는 별개로 지속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그는 대화(大和) 민족은 황실의 피를 본원으로 우러러보며 전 국민이 한 가족같이 된다고 하며 천황은 국가의 실질적 상징으로 작동한다고 보았다.
이상 살펴본 바와 같이 하타니는 메이지를 지나 당시 이미 뿌리 내린 근대적 불교 연구를 기반으로 성장한 제2세대 불교학자였다. 그는 새로운 연구 방법론을 바탕으로 인도불교는 물론 티베트, 중앙아시아, 일본 및 신라의 불교와 사상적으로는 중관, 유식과 정토에 이르기까지 매우 폭넓은 연구 범위를 보여주었다. 하지만 하타니는 전시와 패전 이후라는 시대 상황에서 불교 사상을 천황제와 일본 국체를 위해 무리하게 활용한 학자라는 지적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
정상교 sunsbar@naver.com
금강대학교 불교학과 졸업. 도쿄대학 대학원 인도철학-불교학과 석사, 박사. 동국대(와이즈) 티벳대장경 역경원 전임연구원 역임. 주요 저서로 《도쿄대학 불교학과》 《상월원각 대조사 법어 연구》 《천 번을 부서져도 그대는 여전히 바다다》 등이 있다. 현재 금강대학교 불교인문학부 조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