콩국수의 계절이다. 웰빙 바람을 타고 도시의 이름난 콩국수집들은 여름마다 문전성시를 이룬다. 어린 시절 콩국수는 더운 여름을 견디게 해준 어머니의 음식이었다. 서울 공릉동 옛 북부지원 뒷길에 자리한 ‘제일콩집’은 그런 추억의 맛을 찾는 도시인들의 음식 명가다. 추운 겨울날 설설 끓는 아랫목에서 띄워내던 구수한 청국장부터 순두부, 비지찌개 등 어머니의 손맛 같은 토속적이고 가정적인 음식으로 35년간 단골들의 사랑을 받아왔다. 특히 매년 4월 중순부터 8월 말까지는 진한 국물의 담백한 콩국수가 단연 인기다.
이 집 콩국수는 매니아층이 두껍다. 콩국수철이 되면 어른아이 할 것 없이 테이블마다 콩국수 후루룩거리는 소리로 즐겁다. 주문을 하면 투명한 볼 가득 담긴 걸쭉한 콩국수가 나오는데, 하얀 콩국과 초록색 국수 위로 오이채를 가지런히 올리고 통깨를 솔솔 뿌린 모양새가 보기만 해도 군침이 돈다. 이 집 콩국은 한마디로 어릴 적 집에서 해먹었던 바로 그 맛이다. 미세한 콩 알갱이가 느껴지는 빡빡하고 걸쭉한 콩국은 잡맛이 일절 섞이지 않은 콩 자체의 자연스러운 단맛과 신선한 맛이 특징이다. 클로렐라를 넣은 국수는 찰지고 쫄깃한 맛으로 걸쭉한 콩국과 완벽한 조화를 이룬다.
인심도 후하다. 콩국수를 먹다가 혹시 부족하면 얼마든지 콩국과 사리를 더 준다. 다른 메뉴를 먹을 때 콩국 맛을 보고 싶다면 ‘잔콩물’을 주문하면 된다. 단돈 2000원에 진한 콩국 한 잔을 먹을 수 있다. 1.8㎏짜리 콩국 포장, ‘통콩물’도 찾는 손님이 많다.
더운 여름엔 콩국수가 주력 메뉴지만 날씨가 서늘해지면 순두부, 청국장 등 따끈한 메뉴가 인기다. 이 집의 순두부는 빨간 양념이 아닌, 담백한 순두부의 매력을 그대로 느낄 수 있는 하얀 순두부다. 전통 방식으로 직접 띄워낸 청국장과 함께 제일콩집의 대표 메뉴로 창업 때부터 변치 않는 맛을 이어오고 있다.
창업주 류유순(65)씨는 1981년 공릉2동에서 태릉선수촌의 선수들과 서울북부지방법원 공무원 등을 겨냥해 콩요리 전문식당을 열었다. 조그맣게 시작했지만 장사가 잘되어 1988년 5월, 공릉동 지금의 넓은 자리로 이전했다. 그즈음 남편 유병규(65)씨는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합류했고 류씨는 조리사면허증을 따면서 본격적으로 콩맛 개발에 나섰다. 류씨 부부는 매일 새벽 4시부터 두부 만드는 일로 시작해 하루에 옷을 두 번씩 갈아입을 정도로 땀을 흘렸다. 양가 어머니와 친정언니 등 가족들까지 나서서 온갖 정성을 쏟으니 입소문이 절로 났고 손님들이 줄을 섰다. 류씨는 가게 일에 너무 전념한 나머지 일 년을 쉬어야 할 정도로 큰 병이 나서 단골들의 걱정을 사기도 했다. 이러한 노력으로 제일콩집은 서울 동북부의 맛집으로 우뚝 설 수 있었다.
류씨는 지난 4월 고향인 경기도 가평 유명산 어비계곡에 직영점을 냈다. 별다른 홍보를 하지 않아 모르고 들른 단골들이 류씨를 보고 반색하는 해프닝을 빚기도 했다. 두 곳을 총괄하느라 분주해진 류씨를 대신해 큰며느리인 문지영(41)씨가 공릉동 가게에 매일 나와 카운터를 보고 있다. 큰아들 유용재(42)씨가 곧 합류해 대물림을 받을 예정이라고 한다.
“청국장이나 두부 같은 콩 음식이 방송에 자주 나오면서 손님이 더 늘었어요.”
류씨는 콩요리가 건강식으로 각광받는 시대의 흐름을 타면서 더욱 성공할 수 있었다고 한다. 사실 콩은 서민의 생명줄이라고 할 만큼 영양이 우수한 식재료로서 우리 조상들은 아주 오래전부터 청국장이나 두부 같은 콩요리로 건강을 지켜왔다. 또한 여름이면 콩국에 밀국수를 말아 더위를 이겨내왔다. 1800년대 말에 나온 시의전서(是議全書)를 보면 ‘콩을 물에 불린 다음 살짝 데치고 갈아서 가는 체에 걸러 소금으로 간을 맞춘다. 밀국수를 콩국에 말고 그 위에 채소 썬 것을 얹는다’라는 표현이 나온다.
▲ 제일콩집 대표 류유순씨
견과류 섞지 않고 오로지 콩만
건강식, 콩요리의 맛은 좋은 콩에서 비롯된다. 류씨에 따르면 추운 지방에서 자란 콩이 더운 지방 콩보다 더 맛있다고 한다. 간혹 수입콩을 섞는 일반 업자들 때문에 청국장이 제대로 뜨지 않는 곤란을 겪었던 류씨는 이제 의정부농협에서 국산 콩을 사온다. 일 년에 40㎏짜리 콩을 약 500가마니씩 계약하는데, 농협의 저장고에서 신선하게 보관해두고 필요한 만큼씩 가져다 쓴다.
“제 고향에서는 모내기 참으로 콩국수를 냈었지요.”
어릴 적부터 길들여진 입맛을 좇아 류씨가 정성껏 만든 콩국수는 창업 초기부터 매 여름마다 인기몰이를 했다. 이 집 콩국은 여느 콩국수집처럼 견과류를 일절 넣지 않고 오로지 콩 하나로 승부한다. 그날그날 사용할 만큼의 양만 삶아 껍질째 갈아서 콩의 고소한 풍미와 영양을 온전히 살린다. 맛의 비결은 알맞게 삶아내는 데 있다. 콩은 많이 삶으면 메주 맛이 나고 덜 삶으면 비린내가 난다. 끓는물에 불린 콩을 넣고 센불에서 대략 5분 정도 삶는데, 콩 서너 개를 먹어봐서 고소한 맛이 나면 바로 찬물에 담가 열을 식히고 특별히 주문제작한 전기 맷돌로 바특하게 갈아 콩국을 만든다. 진한 콩국에 소금을 바로 넣으면 소금 알갱이가 남을 수 있기 때문에 소금을 따로 물에 완전히 녹여 콩국 간을 맞춰내고 있다.
콩요리는 맛이 담백하고 순하기 때문에 반찬은 톡톡 튀는 맛으로 신경을 쓴다. 주인장 내외가 가평의 농장에서 직접 재배한 농산물과 믿을 수 있는 국내산 식재료만을 사용한다. 고구마줄기, 무말랭이, 짠무, 고추장아찌, 묵나물 등 계절에 따라 류씨가 직접 갈무리한 자연식 찬을 내는데, 특히 고추를 말려 튀겨낸 부각과 신김치볶음은 매콤하고 깊은 맛으로 콩요리와 환상의 궁합을 이룬다. 간장, 된장 등 장류는 직접 담가 몇 년씩 묵혀서 깊은 맛을 낸다.
정성에 세월이 보태지면서 음식 맛이 더욱 깊어지고 그것을 단골들이 몰라볼 리가 없으니 손님이 끊이지 않는다. 이 집은 이름만 대면 온 국민이 다 아는 스포츠 선수부터 배우, 정치인 등 유명인 단골들이 꽤 되지만 흔한 사인 한 장이 없다. 태릉선수촌과 서울북부지방법원은 이전한 지 오래지만 여전히 많은 손님들로 북적인다. 특히 주말이면 가족 단위 손님이 많다.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이 집 음식을 먹고 자란 아이들은 어른이 되어서도 새로 꾸린 가족과 함께 꾸준히 이곳을 찾는다.
“특히 감기 걸리거나 몸이 안 좋아 입맛이 없을 때 우리 집 음식을 먹어야 낫는다는 젊은이들을 보면 정말 보람을 느낍니다!”
자연 그대로의 건강식을 만든다고 자부하는 류씨는 이 더위에도 손님들에게 제대로 만든 음식을 대접할 수 있어 행복하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