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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과하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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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행 사진---^^ 스크랩 북유럽 여행 ② : 찬란했던 러시아 문명의 야외박물관, 상트페테르부르크
가을하늘 추천 0 조회 942 17.10.02 03:22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여행지 : 북부 유럽 여행

 

여행일 : ‘17. 6. 19() - 7.1()

여행지 : 러시아(모스크바, 페테르부르크), 에스토니아(탈린). 핀란드(헬싱키), 스웨덴(스톡홀름), 노르웨이(오슬로, 베이토스톨렌, 요정의 길, 게이랑에르 피오르드, 뵈이야 빙하, 베르겐, 하당에르 피오르드, 하당에르비다국립공원), 덴마크(코펜하겐)

일 정 : 6.21() : 페테르부르크(여름궁전, 에르미타쥐 박물관, 유람선, 성이삭 성당

 

여행 둘째 날 : 러시아의 야외 박물관 상트 페테르부르크(Saint Petersburg)

 

특징 : 발트해 델타지대의 자연섬과, 운하로 인해 생긴 수많은 섬 위에 세워진 도시인 상트페테르부르크는 러시아 제2의 도시다. ‘상트 페테르부르크(Saint Petersburg)’표트르베드로의 러시아식 이름이다. 따라서 성스러운 베드로의 도시는 곧 표트르의 도시이기도 하다. 실제로 표트르 1(피터대제, Peter I the Great)’는 이곳 페테르부르크를 ()로마로 만들고자 했다. 그래선지 도시 문장도 바티칸의 문장에서 따왔다고 한다. 제정(帝政) 러시아의 차르 표트르 대제1703페테르스부르크라는 이름으로 건설한 이 도시는 1713년부터 1918년까지 러시아 제국의 수도이기도 했다. 그 영향으로 각종 산업과 문화가 발전한 대도시로 성장했으며, 다수의 학술 연구기관, 미술관, 박물관 등이 위치해 있다. 1914페트로그라드(Petrograd)‘로 개칭되었다가, 1924년 레닌이 죽자 그를 기념하여 레닌그라드라 불렀다. 1980년대 이후 개방화가 진전되면서 1991년에는 옛 이름인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되찾았으며, ’페테르부르크로 약칭하기도 한다. 이 도시는 네바강() 하구의 101개의 섬과 함께 강 양안(兩岸)에 계획적으로 건설되었다. 말라야()네바강·볼샤야()네바강을 비롯한 수십 개의 분류(分流)에 놓인 500여 개의 다리로 연결된 정연한 거리는 북방의 수도(水都)’로 불려왔다. 북위 60°의 고위도(高緯度) 지역이면서도 온화한 해양성 기후를 보여, 남쪽의 모스크바보다 기온이 높다. 겨울에 네바강과 해안의 바다가 얼지만, 쇄빙선(碎氷船)에 의해 항로는 연중 거의 유지된다. 참고로 습지(濕地)였던 이곳은 14세기까지만 해도 버려진 땅이었다. 이후 러시아 표트르 대제가 스웨덴의 소유였던 이곳을 빼앗은 다음 수비를 목적으로 페트로파블롭스크 요새를 건설하면서 점차 도시로 발전했다. 18세기 들어 러시아 최대의 무역항으로 발전하면서 도시가 급속히 성장했으며, 19세기 후반엔 러시아 혁명의 중심지로 급부상 했다. 현재 상트페테르부르크 역사지구와 관련 기념물군(Historic Centre of Saint Petersburg and Related Groups of Monuments)’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1990)돼 있다.

  

페테르부르크의 일정은 넵스키 대로(Nevsky Prospekt)‘에서 시작된다. 표트르대제의 여름별궁으로 가는 길이라서 버스를 탄 채로 차창 밖으로 스쳐지나가는 풍경을 가슴에 담아야 하는 탓에 주마간산(走馬看山)이 될 수밖에 없지만 그 정도만 갖고도 페테르부르크가 어떤 도시인지는 대충 감히 잡힌다. 그만큼 중세시대의 옛 건물들이 양쪽 길가를 빈틈없이 매우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누구의 생가(生家)‘이고 저것은 무슨 궁()‘, 그리고 저곳에서는 어떤 사건(事件이 일어났었다는 가이드의 말은 귀에 들어앉힐 여유조차 없다. 그런 건물들이 줄줄이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내 머리는 그 많은 양을 담아 둘만한 용량이 못되니 어쩌겠는가. 페테르부르크는 러시아의 야외 박물관쯤으로 보면 되지 않을까 싶다. ’표트르-파블로프스키 요새(要塞)‘의 건축으로 시작된 건설은 18, 19세기를 거치며 계속되어 수많은 대로(prospect), 광장, 궁전, 정원, 첨탑, 동상, 운하들로 이루어진 독특한 문화 공간을 형성하게 되었다. 오랜 시간을 두고 자연스럽게 팽창한 커다란 시골모스크바와 달리, 상트페테르부르크 건축과 토목 계획의 기본 원리는 철저하게 합리성에 의존했다. 당시 사람들이 마침내 이 도시에 기하학이 당도했다.’고 썼을 정도이다. 러시아인들에게 모스크바가 어머니이자 심장과 같다면, 페테르부르크는 머리’, 그것도 차가운아버지의 머리에 해당한다. 이 아버지의 두뇌와 함께 러시아의 근대는 시작되었다. 그곳은 최초의 러시아 과학 아카데미가 생긴 장소이며, 최초의 공공 도서관, 최초의 극장, 최초의 식물원, 평민 자녀를 위한 최초의 학교가 문을 연 장소다. 참고로 네바강의 거리라는 뜻의 넵스키대로(Nevskii prospekt)’는 이름 그대로 네바강() 어귀 왼쪽 기슭에 위치한 번화가이다. 페테르부르크의 모든 길들은 넵스키 대로로 통한다는 말이 있을 만큼 해군성에서 알렉산드르 넵스키 수도원까지 4.5로 뻗어 있는 이 거리에는 호텔과 레스토랑, 카페, 상점, 음악당 등이 위치하고 있다. 원래는 습한 늪지대였던 이곳은 1710년에 처음으로 길이 뚫리게 되면서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대표하는 문화, 상업의 중심지이자 가장 아름다운 거리 중 하나로 손꼽히게 되었다. 거리에는 19세기에 건축된 화려하면서도 아담한 건물들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어 더욱 운치가 있다.(아래 사진은 ’Ploshad Vosstaniya‘라는 이름의 메트로(metro) 역이다. 넵스키대로로 들어가는 입구쯤으로 봐도 되겠다.)




아래 사진은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있는 5개의 주요 터미널역 중 하나인 모스크바역이다. 역명의 유래는 모스크바 방면으로 가는 열차가 출발하는 곳이라는 뜻. 이곳 러시아는 가고자 하는 지역의 이름을 그곳으로 가는 열차가 출발하는 역의 이름으로 삼는 게 특징이다. 역사의 건축양식은 반대편 종점 모스크바 레닌그라드 역과 비슷하게 생겼다고 한다. 시베리아 횡단철도의 기점/종점역인 모스크바 야로슬라블 역과 블라디보스토크 역이 그러하듯 의도적으로 맞춘 것이 아닐까 싶다. 버스는 계속해서 넵스키대로를 따른다. 도스토옙스키가 즐겨 산책했고 피의 일요일 사건 때도 민중들은 차르를 외치며 이 대로를 행진했다. 도로는 아스팔트로 포장되어 차들이 다니지만 그 외 길가의 건축물들은 모두 당시부터 보존되는 것이 대부분이며 대단히 고풍스럽다. 모이카, 그리바이도바, 폰탄카 등의 3대 운하가 대로를 가로질러 네바강으로 흘러들고 에르미타주 박물관, 러시아 박물관, 카잔 대성당, 피의 성당 등 상트의 주요 관광지들이 대로 가까이에 모여 있어 관광객들의 필수코스가 된다.



눈에 보이는 건물마다 돌로 지어졌다. 중세 유럽건축물의 특징이 아닐까 싶다. ‘표트르 대제가 유럽의 문물을 그대로 받아들였다는 증거일 것이다. 표트르에게 페테르부르크는 그 자체로 근대러시아 문화의 새로운 방향성을 표상하는 상징적인 기호였다. 이 도시는 모든 면에서 하나의 도시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러시아인을 유럽인으로 개조하기 위한 유토피아적인 문화 공학의 계획인 것이다. 모스크바적인 중세를 거부하고 유럽식의 근대를 도입하는 것, 그러니까 유럽으로 열린 창인 페테르부르크를 통해 문화적 정체성의 코드를 철저하게 개편함으로써 과거 러시아의 무지하고 후진적인 관습을 버리고 진보적이고 계몽된 근대 서구 세계에 동참하려는 것, 바로 이것이 페테르부르크식 근대의 목표인 것이다. 이런 군주(君主)를 따르는 귀족들은 아마 죽을 맛이었을 게다. 가이드의 설명으로는 자신의 고국에서 하루아침에 외국인이 되는 경험과도 같았을 거란다. 먹고, 입고, 마시고, 인사하는 법과 같은 일상 행위의 모든 규범들을 마치 외국어를 배우듯이 새롭게 익히고 배워야만 했으니 어떠했겠는가. 표트르는 힘들다며 투정을 부리는 귀족들에게 자기가 직접 개작하고 윤색한 책 젊은이를 위한 예법을 나누어주며 따르라고 강요했단다. ‘항시 외국인들과 함께 있는 자신을 상상할 것’, ‘음식을 뱉거나, 나이프로 이를 쑤시거나, 큰 소리로 코를 풀지 말 것.’ 등등... 그렇게 만들어진 도시가 페테르부르크인것이다. 참고로 시인 칸테미르는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읊었다. ‘표트르의 영민한 교시를 소중히 하니, 그로써 우리가 갑자기 이미 새로운 민족이 되었기 때문이다.’



페테르부르크 시가지를 빠져나온 버스는 한참(시내에서 30km 정도 떨어져 있다고 한다)을 더 달리고 나서야 황금빛으로 빛나는 어느 화려한 건축물 앞에서 멈춰 선다. 표트르대제가 여름을 보내기 위해서 지었다는 여름궁전이다. 표트르대제가 만들었다고 해서 페트로 드보레츠(표트르의 궁전)’로도 불린다. 쉽게 말해 황제의 여름 휴양지쯤으로 보면 되지 않을까 싶다. 분수궁전(噴水宮殿) 혹은 페레르고프(Peterhof)로도 불리니 참조한다. 여름궁전(Summer Palace in St Petersburg)은 표트르대제가 파티 장소로 쓰기 위해 만든 것으로, 당시 러시아 제국의 위엄과 황제의 권위를 과시하기 위한 목적이었다고 한다. 1714~1725년에 걸쳐 완성되었지만 현재의 바로크(Baroque)풍 장식은 겨울궁전을 건축한 바르톨로메오 라스트렐리에 의해 1745년부터 10년간의 공사로 만들어졌다. 러시아와 유럽 최고 건축가들과 예술가들이 총동원되어, 20여 개의 궁전과 140개의 화려한 분수, 7개의 아름다운 공원이 만들어졌다. 현재 박물관으로 사용 중인 여름궁전의 내부는 라스트렐리의 바로크 양식과, 유리 펠텐 등이 예카테리나 대제를 위해 새로이 장식한 방들의 보다 차분한 신고전주의가 공존하고 있다. 1층에는 표트르 대제의 응접실과 서재, 침실 등이 있으며 2층에는 왕실 대대로 내려오는 가구와 도자기들이 전시되어 있다.



여름궁전의 얼굴은 호화롭기 짝이 없는 대궁전(大宮殿)이다. 프랑스 베르사유 궁전에 버금가는 궁전으로 만들려했던 결과물이라고 보면 된다. '대궁전''대 폭포', 즉 여러 개의 분수가 있는 기념비적인 워터 피처(연못, 시냇물, 폭포 등을 갖춰 물가의 경치처럼 조경해 놓은 정원)를 내려다보고 있다. 이 워터 피처는 22길이의 중력으로 작동하는 펌프 시스템에 의해 물이 흐르게 되어 있다. ‘대 폭포64개의 조각상들이 물을 내뿜는 계단식 폭포로 이루어져 있다. ‘삼손이라고도 불리는 이 폭포에서 시작되는 운하는 페테르부르크에서 배들이 도착하는 핀란드만()까지 직선으로 연결되어 있다. 언덕위의 궁전에서 핀란드만 방향을 바라볼 때 나타나는 전경이 일품이다.



여름궁전의 백미(白眉)는 사방에 널려있는 140여개의 크고 작은 분수(噴水)들이라 할 수 있다. 관광객들의 발걸음도 자연스레 분수들을 따라 이동한다. 이 정원은 1704년 표트르 1세가 처음으로 착상했으며 1712~1725년 네덜란드식 바로크 양식(Dutch Baroque style)으로 설계되었다. 그리고 모든 분수는 표트르 대제가 직접 설계에 참여해 분수전문가들과 기술자를 지휘했다고 한다. 분수 하나 하나의 기능과 모양을 살펴보면 약 300년 전에 설계했다기에 믿기 어려울 정도로 참신하다.




표토르 대제가 처음 만든 이후 19세기에 이르기까지 뒤를 이은 황제들이 제각각 하부 공원에 덧붙인 폭포와 분수는 물을 사용하여 즐길 수 있는 세계에서 가장 빼어난 공간을 형성하고 있다. 공식 정원에 흩어져 있는 다양한 바로크 풍의 파빌리온(pavilion, 別宮)들은 르 블롱등의 작품으로 1714년부터 1726년에 걸쳐 지어졌다. 가장 두드러지는 건물은 동쪽에 위치한 스트렐나의 콘스탄틴 궁전(1797~1807, 안드레이 보로니킨 작)과 별장 궁전(1826~1829, 아담 메넬라프 작), 서쪽에 있는 로모노소프의 중국 궁전(1762~1768, 안토니오 리날디 작) 등이다.



공원의 끝에는 핀란드만이 있다. 물이 맑다 못해 투명한 바다이다. 궁전 앞 대 폭포에서 이곳까지 운하로 연결되니 황제와 귀족들에게는 이곳 또한 하나의 놀이터가 되었을 수도 있겠다.



핀란드만 쪽에서 바라보면 대궁전이 정면으로 보인다. 궁전 앞의 중앙 대폭포와 핀란드만은 운하(運河)로 연결시켜 놓았다. 이 운하는 황제와 귀족들이 배를 타고 핀란드만으로 나가기 위해 만들었단다.



작은 운하(運河)가 핀란드만()과 이어지는 중앙 대폭포는 이곳을 대표하는 명소다. 대궁전 아래쪽에 만들어진 이 폭포(瀑布)64개의 분수가 물을 뿜어대는 7개의 계단을 따라 흘러내리고, 그 주위에는 260개 고대 그리스와 로마 신화에 나오는 황금빛 조각상들이 세워져 있다. 바로크 예술의 극치를 보여주는 조각상들이다. 갑자기 사람들이 분수 곁으로 모여들기 시작한다. 그리고 기대에 가득 찬 눈초리로 분수를 바라보고 있다. 기다리기도 잠시. 순간 모든 분수에서 한꺼번에 물줄기가 뿜어져 나온다. 오전 11시 정각, 약속된 시간에 맞춰 음악이 흘러나오며 분수가 일제히 물을 뿜어내기 시작한 것이다.



대분수의 맨 아래 연못에는 황금빛 사자의 입을 찢고 있는 삼손의 동상(銅像)’이 만들어져 있는데 높이 20m의 물이 뿜어져 나온다. 표트르 대제가 스웨덴과의 포르트바 전쟁에서 승리한 날이 성 삼소니아(삼손)’의 기념일이었기 때문에 이를 기념하기 위해서 성서(聖書)속의 영웅인 삼손의 동상을 만들도록 했단다. ‘사자는 스웨덴의 국가적 상징물(스웨덴 문장에는 사자가 표시되어 있다)이니 이는 곧 러시아(삼손)가 스웨덴(사자)을 제압한다는 표현이라 할 수 있겠다.




궁전은 핀란드만에서 점점 높아지는 테라스 모양의 지형을 이용하여 공원과 궁전을 짓고 수많은 분수와 조각상을 만들었다. 총면적이 1000ha에 이르는 부지는 궁전 뒤편이 높기 때문에 윗공원과 아랫공원으로 나뉘어 만들어졌다. 윗 공원을 언덕위에 지은 이유는 물의 낙차를 이용해 분수를 만들기 위해서라고 한다. 그중에서도 '예술의 진주'라고 불리는 아랫공원은 아름다운 분수와 가로수길, 소궁전 등이 배치되어 야외 조각전시장 같은 느낌을 준다. 대폭포는 반원형의 수영장으로 흘러내리고 수영장의 중앙에는 삼손 상(라이온 입을 찢는 삼손)과 아랫공원 최대의 분수가 있다. 이 대분수에서 시작하는 운하는 상트 페테르부르크에서 배들이 도착하는 해변까지 연결되었다고 한다.



대폭포의 장관을 보는 것을 끝으로 여름궁전 투어는 끝을 맺는다. 궁을 빠져나오는데 뭔가가 허전하다. 그래 궁전 내부를 둘러보지 못한 것이다. 물론 궁전 내부에 들어가려면 별도로 입장권을 사야 한다. 그러나 돈이 문제는 아니다. 패키지여행의 특징인 시간제약이 내 발목을 잡았다. 돈이 들더라도 안에 들어가 보고 싶었지만 다른 일행들과 따로 행동할 수 없어 대세를 따르는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넓은 궁전을 극히 일부만 돌아보고 그 아름다움을 더 이상 볼 수 없다는 게 아쉬웠으나 다음을 기약하고 안타까운 발길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그래봤자 또 다시 찾아온 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겠지만 말이다.



페테르부르크 시가지로 돌아오면 또 다시 넵스키 대로(Nevsky Prospekt)’이다. 그만큼 시가지의 중심부에 위치하고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아무튼 식당으로 가는 길에 대로 주변에 있는 성당들을 둘러보기로 한다. 가이드의 배려지만 안으로 들어가 볼 시간은 주어지지 않는다. 이것 또한 일정에 ?기는 패키지여행의 특징이니 어쩌겠는가. 첫 번째 방문지는 페테르부르크의 랜드 마크(landmark)’ 역할을 하고 있는 성 이삭 대성당(St. Isaac's Cathedral)’이다. ‘몽페란드(A.Moontferrand)’가 설계한 이 성당은 1818년에 공사를 시작하여 1858년에 완공됐다. 공사기간만 40년이 걸렸으며 공사에 동원된 사람은 무려 50만여 명이나 된다고 한다. 성당 밑에는 24천 개의 말뚝이 박혀 있다는데, 원래 늪지대였던 이곳의 기초를 다지기 위해서라고 한다. 성당 내부에는 저명한 22명의 화가들이 참여하여 완성한 103점의 벽화와 52점의 캔버스 그림, 그리고 12000여개의 조각으로 만들어진 62개의 독특한 모자이크 프레스코화가 전시되어 있다. 또한 전망대가 설치되어 있어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아름다운 전경을 한눈에 감상할 수 있다.



(dome)의 크기가 세계에서 세 번째라는 이삭성당은 러시아 최대 규모의 성당으로 101.5높이의 황금 돔과 8개의 돌기둥, 그리고 화강암 벽돌로 쌓아올린 견고한 건축물이다. 길이 111.2m에 폭이 97.6m, 14천명까지 수용할 수 있는 성당을 장식하는 데는 대리석과 반암, 벽옥 등 40여 가지가 넘는 다양한 석재가 사용되었다. 100kg의 금이 들어갔다는 돔 부분은 물론 내벽을 황금과 대리석, 유리, 화강암 등으로 수놓아 종교를 인정하지 않던 소비에트 정부에서도 훼손하지 못했을 만큼 그 예술성을 인정받았다고 하며 산이 없는 이 도시에서 가장 높은 건물 중 하나다. 그래서 도시의 어느 곳에서도 눈에 쉽게 띈다고 한다. 참고로 이삭이라는 성당 이름은 구약성서에 나오는 이삭이 아니고 러시아 정교회 성인의 이름에서 유래된 것이라고 한다. 그 이삭의 날이 530일인데, 마침 표트르 대제의 생일도 같은 날이어서 결국은 이 황제를 위한 성당으로 건립된 것이나 다름없다고 봐도 되겠다. ‘표트르 대제 성당이라는 다른 이름으로도 불리는 이유일 것이다.



광장에는 니콜라이 1의 청동 기마상이 세워져 있다. 이삭성당은 1818알렉산더 1때 짓기 시작해서 니콜라이 1세가 죽은 지 3년이 지난 1858년에 완공되었으니 니콜라이 1세가 지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래서 그의 동상을 성당 앞에다 세워놓은 모양이다. ‘니콜라이 1는 로마노프왕조가 배출한 차르 중 한사람으로써 파벨 1마리야 표도로브나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1825년 형이었던 알렉산드르 1가 갑자기 죽자, 뒤를 이어 러시아 제국의 새로운 차르에 올랐다. 이후 그는 프랑스혁명으로 유럽의 기존 질서가 위협을 받자 유럽의 헌병이라는 별칭으로 불렸을 정도로 기존의 질서를 유지하려고 애썼다. 그 과정에서 그는 강력한 전제주의를 실현하는 한편 반대편에 있는 자유와 민주주의에 대한 억압정책을 적극적으로 펼쳤다. 그의 이러한 정책들은 1853년 발발한 크림전쟁에서 러시아가 패하면서 끝을 맺게 된다. 그리고 이런 충격은 1855년 그의 생애를 마감하게 만든다.



성 이삭성당의 맞은편에는 마린스키궁(Mariinsky Palace)이라는 아름다운 건축물이 위치하고 있다. ‘니콜라이 1의 청동 기마상이 있는 광장을 사이에 두고 이삭성당과 마주보고 있는 형세로 두 건축물은 너비가 99m에 달하는 파란색 다리로 연결된다. 1839년부터 1844년까지 러시아 제국의 궁정 건축가였던 안드레이 시타켄시네이데르에 의해 건설되었다는데, 궁전의 이름은 이곳에서 살았던 니콜라이 1세 황제의 딸인 마리아 니콜라예브나(Maria Nikolayevna)’ 여대공(女大公)의 이름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그녀는 예술 아카데미의 총재를 지냈으며 예술계의 적극적인 후원자로 알려진다.



다음은 카잔성당(Our Lady of Kazan Cathedral)’이다. 페테르부르크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축물들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이 성당은 로마의 산피에트로 대성당을 본뜬 코린트식(네오클래식) 양식의 건물이다. 따라서 석고 대리석 94개를 이어서 성당 주위를 둘러싼 기둥들이 가장 눈길을 끈다. 성당은 스트로하노프 백작의 농노(農奴) 출신 건축가 바로니킨(A. Varonikhin)’에 의해 1801년부터 10년에 걸쳐 지어졌다. 안으로 들어가 보지는 못했지만 건물 내부에는 19세기 초의 거장들이 그린 이콘(icon)이 있고, 특히 카잔의 마리아 상(Our lady of Kazan)‘이 유명하다고 한다. 성당이 완성된 후 러시아는 나폴레옹 전쟁(1812-1813)에서 승리를 거두었는데, 성당 안에는 그때 프랑스군에게서 빼앗은 107개의 군기와 승리의 트로피 등이 걸려 있다. 나폴레옹 전쟁 승리의 영웅 쿠투초프(Kutuzov) 장군의 장례식이 여기서 거행됐고 그의 무덤 또한 여기에 있다.



페테르부르크를 대표하는 ’3대 성당중의 나머지 하나는 그리스도 부활 교회(Church of the Savior on Spilled Blood)‘이다. ’알렉산드르 2의 암살사건이 일어났던 곳으로 피의 사원이라는 별칭으로도 더 잘 알려져 있다. 모스크바에 바실리 성당이 있다면 페트로부르크에는 피의 성당이 있다. 바실리 성당이 동화 속 아름다운 그림 같은 건물이라면 피의 성당은 애잔한 듯 화려함이 돋보이는 건물이다. 개혁주의 황제였던 알렉산더 2가 아나키스트(anarchist)의 폭탄 테러에 의해 시해(1881) 당했던 자리에 세워졌기 때문에 그런 느낌을 받았었는지도 모르겠다. 개혁주의 황제가 세상을 떠난 곳이어서 그런지 교회 주변은 낭만과 표현의 공간이다. 거리 악사, 거리 예술가들이 솜씨를 뽐내며 자신을 주장하는 곳이기도 하다.



점심 후에는 에르미타주 미술관(The State Hermitage Museum)‘으로 향한다. 페테르부르크에서 가장 유명한 곳은 세계에서 가장 크고, 가장 오래된 미술관 중 하나로 꼽히는 에르미타주 미술관이 아닐까 싶다. 관광객 중 일부는 이곳만을 들러보기 위에 페테르부르크를 찾기도 한다니 두말하면 뭐하겠는가. 박물관에 오는 관광객만 연 300만 명에 이른단다. 제정러시아의 황궁이며 황제의 평소 집무실이 되었던 겨울궁전(冬宮)’을 포함해 4개의 건물이 서로 연결되어 있는 이곳은 그 자체로 페테르부르크 역사와 문화의 상징이다. 1764예카테리나 대제(Catherine the Great)’가 미술관 컬렉션의 기초를 마련하였으며, 외부에 공개되기 시작된 것은 1852년부터이다. 일반에 공개되기 전, 왕실이 겨울궁(Winter Palace)’ 옆에 작은 궁전을 지어 미술 컬렉션을 보관 전시했기 때문에, 그 궁전에 에르미타주(Ermitage: 불어로 은둔소라는 뜻)’라는 닉네임이 붙게 되었고, 이 별칭이 에르미타주 미술관의 기원이 되었다. 참고로 겨울궁전은 1754년부터 건축가 라스트렐리(Bartolomeo Francesco Rastrelli)가 세운 바로크 양식의 대표적인 러시아 건축물이며 에르미타주 미술관의 본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에르미타주 미술관은 겨울궁 뿐 아니라 소에르미타주, 구에르미타주, 신에르미타주, 에르미타주 극장, 예비 보관소(Reserve House) 6개의 건물들이 통로로 연결되어 있다.



로코코 양식으로 지어진 미술관은 입구 중앙 계단부터 화려하다. 영접홀인 문장관에는 8의 황금을 입혀 러시아의 부를 자랑했다. 미술관은 1050개나 되는 방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한다. 황제의 집무실인 표트르1세의 홀과 황금으로 도금이 되어있는 황금의 방‘, 그리고 황실역사와 연관이 많은 게오르기 홀‘, ’문장(紋章) ‘, 러시아의 국장인 쌍두 독수리 문장 아래 금으로 만든 대 옥좌가 위용을 자랑하는 영웅들의 방등 수많은 홀들이 줄줄이 나타난다. 하나 같이 화려하기 짝이 없다는 게 특징이다.





금박으로 장식된 내부에 눈이 부시다. 그러다가 문득 많은 사람들의 시선을 붙들어 매고 있는 진열품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황금으로 만들어진 나뭇가지 위에 공작새 한 마리가 올라앉아 있는 조형물인데 시계라고 한다. 그것도 정확하게 돌아가고 있는 시계이다. 이 시계는 영국에서 들어왔는데 17세기 후반 영국의 기계공학자 제임스 콕스(James Cox)‘가 제작한 것이다. 4시간마다 공작이 날개를 펴면서 울었으나 현재는 특별한 날에만 운다고 한다. 그보다 이 시계는 다른 의미가 더 중요하다. ‘예카테리나 2의 음탕하고 사치스런 면목을 여실히 드러내주는 물건인 것이다. 그녀에게는 50명이나 되는 첩(?)이 있었는데 그중 한명이 이 시계를 선물했다고 한다. 여왕과 만날 시간을 미리 입력해두어 그 시간이 되면 황금공작새가 화려하게 꼬리를 펼치면서 울어댔다고 한다.



에르미타주의 하이라이트는 회화관이다. 렘브란트와 루벤스를 비롯해 일리야 레핀, 마티스, 샤갈, 고갱 등의 작품들이 너무나 많이 전시되어 있어 이들이 모두 진품일까 하는 의구심마저 들게 한다. 이중 가장 많은 사람들이 몰려드는 그림 가운데 하나는 루벤스의 로마식 자비(Roman Charity)’이다. 이 작품은, 로마 시대 죄를 지어 아사형에 처해졌던 아버지 시몬(Simon)이 갇혀있는 감옥에 면회 갔던 딸 페로(Pero)가 굶어 죽어가는 아버지를 위해 자신의 젖을 물리는 장면을 드라마틱하게 묘사했다. 에르미타주에서 만날 수 있는 루벤스의 또 다른 대작으로는 대지와 바다의 결합(The Union of Earth and Water)’이 있다. 이 작품은 높이 2미터가 넘는 대작으로 대지의 신과 바다의 신의 모습이 사람의 실물 크기로 묘사되어 있으며, 루벤스 특유의 격정적이며 강렬한 테크닉으로 신화의 세계를 표현해내고 있다.



아래 그림은 램브란트((Rembrandt Harmenszoon van Rijn, 1606-1669)가 그린 제우스를 기다리는 다나야(1636년 작)‘란 작품이다. 1985615, 이 그림은 생을 마감할 뻔 했단다. 괴한에 의해 칼질을 당했다는 것이다. 현재의 그림은 20년간의 작업 끝에 복원(復原)이 된 것으로 손상된 부분을 색조를 짙게 칠하거나 또는 옅게 처리해서 완성시켰다고 한다. 아무튼 렘브란트의 다나에는 남자를 기다리는 따뜻한 연인의 그리움이 강조되어 있다고 한다. 사람들이 하도 많이 몰려있어 사진촬영에 실패했지만 렘브란트의 대표작은 사실 돌아온 탕자라고 봐야 한다. 성경에 실린 유명한 이야기로 방탕하게 살았던 아들이 거지꼴로 집에 돌아와 가족들과 재회하는 그림이다. 아들을 받아주는 아버지의 표정이 매우 인상적인데, 깊은 체념과 고독이 묻어있다. 렘브란트가 이 작품을 그린 시기는 죽기 9년 전인 1660년으로 아버지의 표정에 자신의 모습을 투영한 듯 보인다.



이밖에도 신고전주의와 인상파, 신인상파 등의 작품들이 풍부한 것으로 유명하다. 2층의 일부 전시실 뿐 아니라 3층으로 이어져서 전시하고 있다. 20세기 초반의 근대 회화들은 3층의 남쪽 전시실에서 선보이고 있는데, 마티스(Matisse)를 비롯하여 입체파 화가들인 피카소(Picasso), 말레비치(Malevich), 칸딘스키(Kandinsky) 등의 작품들을 포함하고 있다. 근대 회화 갤러리 옆에 위치한 작은 전시실에서는 독일 낭만주의 회화들을 주로 전시하고 있는데, 특히 19세기 독일을 대표하는 화가 캐스퍼 다비드 프리드리히(Caspar David Friedrich)의 주요한 작품들을 감상할 수 있다. 한편 3층의 서관에는 중국, 인도, 몽고, 티베트 등 동양 미술품들도 전시되고 있다.



에르미타주 1층 전시실에서는 고대 유물들이 전시되고 있다. 선사 시대, 고대 이집트, 메소포타미아, 그리스, 로마 유물 등이 전시되고 있다. 고대 유물 컬렉션에서는 다양한 그리스 유물들도 선보인다. 기원전 5세기의 고대 그리스 도자기, 고대 그리스 도시들로부터 출토된 유물들, 헬레니즘 조각과 각종 카메오를 비롯한 보석류 등도 다양하다. 다만 고대 유물 컬렉션에 포함된 대부분의 그리스 조각상들과 기념비들은 카피본인 경우가 많다는 점을 참조한다.



서쪽 전시실에서 전시하고 있는 12세기부터 15세기에 이르는 서유럽의 장식 미술품들을 둘러봤다면 이젠 서서히 미술관을 빠져나가야할 차례이다. 아직도 구경해야할 게 수없이 많겠지만 다음 일정이 우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아무튼 1917년에 있었던 10월 혁명 후, 귀족들로부터 몰수된 수많은 미술품들이 에르미타주 미술관으로 유입되면서 컬렉션의 규모는 훨씬 더 커졌다. 현재 3백만 여 점의 컬렉션을 보유하고 있다고 한다. 따라서 에르미타주 미술관에 보관된 작품을 전부 감상하겠다는 욕심은 금물이다. 작품은 하나당 1분씩만 감상해도 17년이 넘는 시간이 필요하다니 말이다. 또한 미술관으로 사용 중인 건물의 둘레만도 2km나 되고, 350(혹자는 1050개라고도 한다) 개나 된다는 방을 어떻게 단번에 다 둘러볼 수 있겠는가.



박물관 창문 밖으로 아르미타주 광장이 내려다보인다. ‘궁전광장이라고도 불리는데 소비에트 연방을 탄생시킨 1917볼세비키 혁명이 일어났던 역사의 현장이다. 도시의 상징적인 곳으로 지금도 기념일마다 많은 인파로 넘쳐난다고 한다. 광장의 한가운데에 세워진 탑 모양의 구조물은 알렉산드르 기둥(알렉산드롭스카야 깔론나)’이다. 나폴레옹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세운 것으로, 높이가 47.5m나 되는 이 기둥 전체가 하나의 화강암 덩어리로 만들어있다는 게 특징이다. 그 뒤에 보이는 건물은 참모본부이다.



다음은 오늘의 하이라이트(highlight)라 할 수 있는 유람선(遊覽船) 투어이다. 페테르부르크는 도심(都心)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돼 있는 만큼 골목이나 운하를 따라 걷기만 해도 여행지의 낭만을 느끼기엔 충분하다. 시간에 여유가 있다면 그 길을 따라 걸어보겠지만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기껏해야 하루뿐이니 차선책을 택할 수밖에 없다. 버스의 차창 너머로 넵스키대로를 구경한 다음, 유람선을 타고 북방의 베니스로도 불리는 도시의 대표적인 민낯 운하(運河)를 둘러보는 것이다. 옛 건물들의 안까지는 들어가 볼 수 없으나 꼭 보아두어야 할 건물들의 외관(外觀)이라도 가슴에 담을 수 있으니 가장 효율적인 투어가 아닐까 싶다.



운하에는 꽤 많은 유람선(遊覽船)들이 떠다닌다. 네프스키 대로 못지않게 페테르부르크 교통의 요지가 되고 있는 곳이 운하이다. 수많은 수로(水路)들로 이루어진 이 도시를 편하게 둘러보는 데는 유람선만한 게 없다. 페테르부르크를 찾는 관광객들의 필수코스로 자리 잡은 이유일 것이다. 유람선은 선실 외에도 선미(船尾) 부분에 의자가 놓여있으니 원하는 곳에 앉아 주변 경관을 눈에 담기만 하면 된다. 다만 밖을 원할 경우에는 선글라스나 모자를 챙겨가는 것을 잊지 말자.



배가 출발하자마자 가이드의 설명이 시작된다. 페테르부르크란 도시가 만들어지기까지의 고통스런 역사이야기다. 황제 즉위 이전 유럽을 돌며 여러 나라에서 문화와 기술을 익힌 표트르 대제는 러시아의 수도를 모스크바에서 유럽을 향해 더 가까운 곳으로 옮기고 전 세계에 내세울만한 문화, 예술의 도시를 건설하고자 한다. 그래서 만들어진 도시가 페테르부르크이다. 1703년 표트르 대제에 의해 시작된 새 수도의 건설은 10년에 걸쳐 늪지대 위에 돌을 쌓아 올린다. 당시 이 아름다운 도시의 시민이 되기 위해서는 도시 건설에 필요한 커다란 돌을 지참하는 것이 시민권을 부여 받을 수 있는 조건이었다고 한다. 늪지데 도시를 만들었으니 그 공사가 순탄하게 진행되었을 리가 없다. 공사과정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갔다고 한다. 그 시신들은 공사의 원활을 기한다는 명목으로 돌들과 함께 늪에 버려졌다. ‘북방의 베네치아’, ‘유럽을 향한 창’, ‘거룩한 베드로(표트르)의 도시등 수많은 수식어의 끝에 꼭 따라다니는 뼈 위에 세운 도시라는 불명예스런 오명(汚名)을 얻게 된 원인이다.



페테르부르크는 101개의 섬 위에 세워진 물의 도시이자 운하의 도시이다. 86개의 강과 운하, 101개의 섬이 365개의 다리(교외까지 포함하면 623)로 연결되어 있다. 운하와 강의 사이사이에 들어앉은 뭍에는 고풍스런 건축물이 빼곡히 들어서 있다. 혁명의 혼란 속에서도 문화재는 물론이고 일반 건물에 이르기까지 페테르부르크 시대의 것을 그대로 보존해왔기 때문일 것이다. 시 전체가 박물관인 듯한 느낌을 주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표트르대제와 예카테리나 2세를 거친 후 알렉산드르 1(1801~1825)가 다스리던 시기의 러시아는 유럽의 맹주로 떠오르게 된다. 당연히 건축 수요가 증가하게 되었고, 당시 전 유럽의 유명한 조각가와 건축가들이 페테르부르크로 몰려왔다. 그들의 참여로 유럽을 풍미하던 최고의 양식과 스타일로 변한 도시는 18세기 유럽의 초호화판 도시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뾰쪽한 첨탑이 특징인 고딕양식(Gothic style)과 아케이드(arcade)에 반원형의 아치를 많이 사용한 로마네스크 양식(Romanesque style), 고딕양식의 구조에다 미적 요소를 가미한 르네상스양식Renaissance style), 그리고 르네상스양식이 진화한 바로크 양식(Baroque style) 등 중세유럽을 풍미했던 갖가지 건축기법들을 동원해 지은 옛 건물들이 줄줄이 늘어서있다. 하나같이 독특한 외형을 지닌 아름다운 건축물들이다.



유람선의 속도만큼이나 가이드의 입놀림도 빨라져 간다. 숫하게 많은 사람들의 이름이나 약력들이 쏟아져 나와 혼란스럽지만 하나의 공통점은 있다. 이름의 끝에 이라는 말이 따라 붙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옛날 귀족들은 운하의 가에다 집을 짓는 게 유행이었던가 보다.



운하의 둑을 따라 고풍스런 건축물들이 줄줄이 늘어서 있다. 수백, 수천 개의 건물이 모두 저마다 개성과 특색이 있어 보이다. 운하 자체를 살아있는 야외 박물관이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겠다. 눈의 호사가 계속된다. 그래서 유람선 투어를 일러 페테르부르크 관광의 백미(白眉)라고 칭송하는가 보다.



유람선 투어 중에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의 주인공인 푸슈킨(Aleksandr (Sergeyevich) Pushkin, 1799-1837)의 생가(生家)를 만날 수 있었으나 사진촬영은 실패했다. 대신 가이드가 전해주는 얘기로 대체해 본다. 푸슈킨은 모스크바에서 태어나 열두 살 때 페테르부르크 교외에 있는 학습원에 입학해 문학의 길을 걷기 시작한 이래 생애의 대부분을 이곳에서 보냈다고 한다. 이곳을 무대로 예브게니 오네긴’ ‘대위의 딸등 주옥같은 시편들을 창작한다. 열혈 청년 푸슈킨은 사회의 부조리에 대해서도 가차 없는 메스를 들이댄다. 근대 러시아의 첫 혁명운동이라고 하는 데카리스트들의 반전제주의 투쟁(1825)과도 호흡을 같이 했음은 물론이다. 갑자기 가이드의 톤이 높아진다. 뭔가 불만이 있다는 표현일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그녀의 설명이 푸슈킨의 아내가 저질렀던 부정으로 치닫고 있다. 아직까지도 1837127일 오후 4시 반에 멈춰있다는 시계에 대한 얘기이다. 결투의 총성이 울렸던 시각이다. 시 외곽의 얼어붙은 대지에서 푸슈킨은 아내 나탈리아의 연인인 프랑스 사관생도 단테스와의 결투에서 상대방이 먼저 쏜 총알에 하복부를 맞고 쓰러졌다. 그리고 이틀 후 눈을 감는다. 그가 추구했다는 명예란 게 이해가 되지 않는다. 바람피운 마누라의 명예를 지켜주기 위해서 결투를 벌였다니 어디 이게 말이나 되는가 말이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 우울한 날들을 견디면, 믿으라, 기쁨의 날이 오리니’... 과연 그는 그가 남긴 싯귀대로 죽어갔을까? 이 도시를 상징하는 문호 도스토옙스키가 페테르부르크를 일러 고전과 퇴폐, 찬란한 아름다움과 우울함이 동시에 피고 지는 세속적인 도시라고 한 표현이 귓가를 맴돈다. 가이드의 설명을 듣고 있는 내 심정과 거의 유사했기 때문이다.



아래 주황색 건물은 파벨 1가 지은 미하일롭스키(Michailovska) 궁전이다. ‘예카테리나 여제표트르 3사이에서 태어난 황제인 파벨 1는 이 자리에 있던 엘리자베타 여제의 여름궁전에서 태어났다. 어머니인 예카테리나 여제의 권력에 대한 야망 탓에 파벨 1세는 42세의 나이가 되어서야 황제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는데, 5년 남짓한 통치기간 중 자신이 태어난 엘리자베타 여제의 여름궁전을 허물고 현재의 미하일롭스키 궁전을 건축했다. 그는 통치 5년 만에 귀족들의 궁정반란으로 살해된다. 그가 살해된 곳 역시 이곳이니 불운한 황제였던 파벨 1세의 생과 사의 역사가 이루어진 곳이라고 할 수 있겠다. 러시아 혁명 이후 기계공학대학이 이곳에 있었기 때문에 한때 기계공대궁이라는 별칭으로 불리기도 했으며 현재는 러시아 박물관 산하의 박물관으로 활용되고 있다.



지어진지 얼마 되어 보이지 않는 건물도 보이긴 한다. 무슨 용도로 쓰이는지는 모르겠다.



네바강에 가까워지자 왼편에 넓고 푸른 숲이 나타난다. 페테르부르크 시민들의 휴식처인 여름 정원이다. ‘표트르 대제가 살던 소박한 2층짜리 여름 궁전도 이 정원 안에 들어있다. 궁전 안의 실내 장식과 가구가 당시 모습 그대로 보존되어 일반인들에게 공개된다고 하니 시간이 날 경우 한번쯤 들러볼 일이다. 벽 하나를 가득 메울 만큼 커다란 시계도 보게 될 것이다. 아무튼 공원에는 250개나 되는 대리석 조각상(상당수는 그리스의 신화를 모티브)들과 가로수길, 그리고 연못이 조화롭게 잘 배열되어 있다.



네바강에 들어서자 반가운 풍경 하나가 시야(視野)에 잡힌다. ‘삼성기아자동차의 광고판이다. 가이드의 말로는 두 회사가 이루어낸 노력의 결과란다. 러시아의 경제가 어려웠을 당시 이곳 페테르부르크를 물심양면으로 도와주었다는 것이다. 그 결과 어느 누구에게도 내어주지 않던 자리에 광고판을 내걸 수 있게 해주었단다. 그래 대한민국 만세다. 저런 기업들이 있었기에 우리나라가 세계 10대 교역국에 자리 잡을 수 있었을 게다.



네바 강의 강폭이 넓어지는 곳에 이르면 건너편 저 멀리에 황금빛 첨탑이 나타난다. ‘표트르 대제가 스웨덴 군대를 방어하기 위해 네바강 유역에 구축한 페트로 파블로스키 요새(要塞)’이다. 네바강의 하구 델타지대에 위치한 토끼섬에 지어진 요새로 1706년부터 약 35년이 걸려 완성되었다. 요새를 둘러싼 두꺼운 벽(높이 12미터, 4미터)에는 5개의 문이 만들어져 있다. 6개의 성채 가운데 네바 강으로 향한 나리시킨스키 성채에서는 매일 정오를 알리는 공포를 쏜다고 하니 참조한다. 그건 그렇고 요새가 만들어진 뒤 정작 스웨덴 군대는 단 한 번도 쳐들어온 적이 없었고, 이후 요새는 정치범수용소로 사용됐다고 한다. 도스토예프스키, 고리키, 바쿠닌, 트로츠키 등이 이곳을 거쳐 가면서 이 요새는 러시아의 바스티유라는 별명이 붙었다. 감옥(監獄)으로 변한 요새의 첫 죄수는 아이러니하게도 표트르 대제의 아들 알렉세이 황태자였다. 죄명은 반역죄, 아버지의 정책에 반기를 들고 반란을 모의했다는 것이다. 표트르는 생존의 위협을 받으면서 황위에 올랐다. 외가는 멸문지화를 당했다. 그리고 그는 군인으로 반생을 전장에서 보냈다. 강력한 군주(君主)였지만 대신 남을 잘 믿지는 못했을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전쟁보다 평화를 추구했던 황태자는 유약했다. 계속되는 아버지의 질책에 두려움을 느낀 아들은 결국 러시아로부터의 탈출을 감행한다. 그러나 빈을 거쳐 나폴리까지 도망했지만 결국에는 러시아로 끌려올 수밖에 없었다. 표트르는 결국 황태자를 포기한다. 그리고 황제는 황태자를 반역죄로 가뒀다. 다들 어디선가 많이 들어본 스토리일 것이다. ‘영조와 사도세자얘기 말이다. 또한 표트르의 계획도시 상트페테르부르크와 사도세자의 아들 정조의 수원화성은 새 시대를 향한 야망의 결과물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뾰쪽하게 솟아오른 황금빛 첨탑은 같은 이름(파블로프스크)의 성당이다. 예수의 제자인 베드로와 바울을 기념하는 교회로 요새의 이름은 이 건축물에서 따왔다고 전해진다. 성당은 스위스인 건축가 도메니코 토레지니에 의해 1712년부터 건설이 시작되어 1733년에 완성되었다. 그 후 종루에 피뢰침이 없어서 몇 번의 화재를 입었는데, 1756년에는 첨탑과 네덜란드 시계가 불타 버린 일도 있다. 1850년대에는 높이 121.8미터의 새로운 첨탑이 세워져 페테르부르크 최고의 건축물이 되었다. 20년이나 걸려서 만든 만큼 매우 아름다운 건축물로 알려져 있다. 이곳에는 역대 로마노프 왕가의 황족들이 묻혀있다. ‘황제의 성당인 셈이다. 황제의 성당답게 넓은 공간에 충분한 빛을 받아들이며 지주, 벽기둥, 대리석으로 된 벽과 다양한 색채의 아치, 그리고 금박을 입힌 석고상과 갖가지 빛깔의 키르시탈 샹들리에 등 어느 것 하나 예술품이 아닌 것이 없다고 한다. 특히 이코노스타시스(iconostasis, 聖像 칸막이)는 떡갈나무를 조각하고 금박을 입혀 장엄함을 강조하고 있단다.



유람선은 토끼(자야치) 바실레오스트롭스키 섬을 이어주는 트로이츠키 다리를 통과한 후 조금 더 올라가다가 방향을 튼다. 더 이상은 볼만한 게 없다는 얘기일 것이다. ‘트로이츠키 다리1897-1903년에 프랑스의 에펠에 의해 건설되었다고 한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그 구스타프 에펠(Alexandre Gustave Eiffel)’이다. 이 다리가 철제(鐵製) 다리라는 증거가 아닐까 싶다. 아무튼 이 다리는 페테르부르크 2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지난 2003년이 300주년이었다니 벌써 100년이 훨씬 넘은 셈이다.



트로이츠키 다리 근처에는 범선(帆船)이 한 척이 정박해 있다. ‘페트롭스키 호위함을 복제(複製)해 만든 것인데, 현재 수상 레스토랑인 '블라고다티(Благодать)'가 문을 열고 있단다. 가이드의 말로는 조금 더 가면 주요 역사유적 가운데 하나인 표트르 대제의 목조 오두막집이 있다고 한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최초로 지은(1703) 건물인데 표트르는 이 오두막에서 8년 동안을 살면서 수도 건설에 잠심몰두(潛心沒頭)했다고 한다. 그래서 이 오두막에 전시된 소박한 거실과 침실, 서재와 식당, 그가 직접 만든 보트 등 유물은 보는 이로 하여금 숙연하게 만든단다. 마지막으로 가이드는 이 오두막이 덮개로 덮여있는데다 정원으로 둘러싸여 있어 울타리 뒤에 있는 청동흉상에 주목하지 않으면 모르고 지나치기 쉽다는 주의사항까지 전해준다.



높이 32m로스트랄 등대 (Rostal Column)’가 있는 바실레오스트롭스키 섬(Vasilievsky Island)‘, 로스트랄이란 라틴어로 뱃머리라는 뜻이다. 이것은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해전에서 승리를 기념하여 원주를 세우고 포획한 배의 뱃머리로 기둥을 장식하였던 것에서 그 이름이 유래 되었는데 러시아도 이를 모방하여 해전의 승리를 기념하여 세운 등대다. 러시아가 바이킹 왕국으로 명성을 떨치던 과거 스웨덴과의 해전시 침몰시킨 스웨덴 뱃머리를 잘라다가 등대에 붙여놓은 것이다. 이는 러시아의 국가적 자부심의 표증이자 세계 최강으로 군림하던 바이킹 해군과의 전투에서 승리하였음을 기념하는 등대다. 등대를 둘러싼 공원과 바다가 만나는 이곳은 신혼부부들의 화보 촬영이나 관광객들 그리고 시민들의 휴식공간으로 사랑받고 있다. 돌아오는 뱃머리에 서니 자연스레 우리의 한강과 비교가 된다. 네바강은 우리의 한강처럼 물이 많이 흐른다. 강폭도 무척 넓어서 건너편의 건축물들이 조그맣게 보일 정도이다. 한강변에도 저런 유적들이 많았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한강도 나름대로의 장점은 갖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아름다운 둔치와 주변의 녹지들을 잘만 포장하면 훌륭한 눈요깃감이 되지 않을까 싶다. 그리고 성냥갑을 쌓아놓은 것 같은 삭막한 풍경의 아파트들이지만 이것 또한 관광용으로 활용할 수 있는 방법도 찾아보면서 말이다.



하룻밤을 머물렀던 옥타브리스카야 호텔(Oktiabrskaya hotel)’, 졸지에 호텔이 변경되는 변고가 생겼다. 예약되어 있던 호텔에서 방을 내줄 수가 없다는 것이다. 지역행사로 인해 손님들이 몰려온 탓이란다. 백야(白夜) 기간 동안 이곳 페테르부르크에서 축제(祝祭)가 열린다고 하더니 그 정보가 옳았던 모양이다. 그나저나 러시아는 자본주의 시장체제로 들어오려면 아직도 멀었나 보다. 우리나라라면 이미 예약을 해놓은 손님들을 어떻게 내쫓을 수가 있겠는가. 그래서 옮겨간 곳이 ‘ibis hotel', 다음 날 우린 또 다시 짐을 싸야만 했다. 또 다른 호텔로 옮겨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찾아든 것이 옥타브리스카야 호텔(Oktiabrskaya hotel)’이다. 옮겨 다녀야 하는 불편에도 불구하고 두 호텔의 시설은 깔끔했고 제공되는 서비스도 좋았다. 시내 중심가에 위치한다는 입지여건도 장점 중의 하나였다. 특히 옥타브리스카야 호텔은 손가락을 치켜세워 주어도 괜찮을 것 같다. 방까지 널찍했기 때문이다. 거기다 일정상 6시 경에 체크아웃(check out)을 해야만 하는 우리에게 제공되는 도시락은 그동안의 여행에서 받아보지 못했던 훌륭한 내용물들이 포장되어 있었다.



에필로그(epilogue), 커튼(curtain)을 꼭 닫고 자라는 가이드의 당부가 반복된다. 아예 두 겹의 커튼을 모두 펼쳐놓으란다. 외부로부터 들어오는 빛을 완전히 차단하라는 것이다. 9시 경에 해가 떨어지는데 그 이후에도 어둠이 찾아오지 않아 자칫 커튼이라도 열어둘 경우엔 사방이 훤해서 잠을 이를 수가 없단다. 이게 바로 그 유명한 백야(白夜) 현상이다. 매년 67월이면 나타나는데 우리가 찾아온 지금이 마침 621일이 아니겠는가. 백야가 극에 달한다는 하지(夏至)가 코앞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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