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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030. 묵상글 ( 연중 제30주간 월요일. - 정신은 차리고, 영의 불은 끄지 않는.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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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030. 연중 제30주간 월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정신은 차리고, 영의 불은 끄지 않는
우리말에서 정신과 관련한 말들을 한번 생각나는 대로 모아봤습니다.
정신 나간 놈.
요즘 정신이 없어!
정신을 쏙 빼놓네.
그런 썩어빠진 정신을 가지고 뭘 할 수 있냐!
이것이 정신과 관련한 부정적인 표현이라면
좋은 의미의 표현과 사용도 있습니다.
제정신이 들다.
정신을 차리다.
정신 차려!
정신일도 하사불성(精神一到 何事不成: 정신을 한곳에 모으면 안 되는 일이 없다.)
우리가 잘못 사는 것은 정신없이 사는 경우와
정신이 있긴 있는데 그 정신이
썩어빠진 정신이거나 제정신이 아닌 상태로 사는 경우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정신없이 살거나 썩어빠진 정신으로 살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면
그때 우리는 썩어빠진 정신은 몰아내고 정신을 차리거나 제정신이 들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것으로 우리는 만족하지 말아야 합니다.
고작 정신 차리고 제정신 드는 것으로 만족 말고,
우리를 하느님의 자녀 되게 하는 주님의 영을 모셔 들여야 합니다.
사실 제정신 차리는 것은 온전한 인간이 되게 하는 것으로 그치지만
주님의 영을 모셔 들이면 우리는 하느님 자녀가 되게 한다는 뜻으로
오늘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얘기합니다.
“여러분은 사람을 다시 두려움에 빠뜨리는 종살이의 영을 받은 것이 아니라,
여러분을 자녀로 삼도록 해 주시는 영을 받았습니다.”
라틴말 Spiritus나 영어 Spirit을 우리말로 번역하면 ‘얼’이 되고,
한자어로 번역하면 ‘정신’ 또는 ‘영’으로 번역이 됩니다.
그러니까 한자어에서는 인간 안에 있는 Spirit은 정신이라고 하고,
인간 밖에 있는 Spirit은 악령이든 더러운 영이든 영이라고 쓰며,
하느님에게서 오는 영은 이런 잡령들과 구분하여
Holy Spirit 그러니까 거룩한 영 또는 성령이라고 하지요.
그리고 당연히 하느님에게서 오는 성령만이 우리를
하느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게 하고,
부모와 자식의 끈으로 단단히 묶어줘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해 준다고 바오로 사도는 얘기합니다.
그러므로 거듭 얘기하면 나간 정신을 차리는 것이나
잃었던 정신을 돌아오게 하는 것이나
썩어빠진 정신 대신 제정신이 들게 하는 것도 우리가 해야 할 바이지만
우리가 진정 신앙인이라면 우리를 하느님 자녀가 되게 하는 성령,
하느님을 우리 아빠 아버지가 되게 하는 성령을 모셔 들여야 합니다.
그래서 프란치스코는 이렇게도 얘기합니다.
“주님께서 일하는 은총을 주신 형제들은 충실하고 헌신적으로 일할 것입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영혼의 원수인 한가함을 쫓아내는 동시에
거룩한 기도와 헌신의 영을 끄지 않도록 할 것입니다.
현세의 다른 모든 것들은 이 영에 이바지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바오로 사도의 가르침대로 성령을 모셔 들이고,
프란치스코의 가르침대로 성령의 불을 끄지 않는 오늘 우리가 되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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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030. 연중 제30주간 월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여인아, 너는 병에서 풀려났다.”(루카 13,12)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열여덟 해 동안이나 병마에 시달려 허리가 굽은 여인’의 인생을 바꾸어 놓으십니다.
“여인아, 너는 병에서 풀려났다.”(루카 13,12)
그 여인이 치유를 간청하거나 믿음을 고백했던 것도 아니었지만, 예수님께서는 한 마디의 ‘말씀’과 ‘안수’로 병을 고쳐주셨습니다. 그런데, 그날은 ‘안식일’이었습니다. 회당장은 안식일에 병자를 고쳐주신 예수님께 대한 분노를 안식일에 몰려든 군중들에게 뒤집어씌우고 율법위반으로 단죄합니다. <신명기>(5,12-15)와 <탈출기>(20,8-18)에 따라, 안식일에 노동할 수 없다는 구실로 말입니다. 그러나 그 여자가 한 일은 치유를 받았을 뿐, 노동을 한 것은 없었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하신 활동도 ‘말씀’과 ‘안수’ 밖에 없었고. 치유자체는 하느님의 권능에 기인한 것이었습니다. 그럼에도 회당장은 치유를 하느님이 이루신 해방으로 보지 않고, 인간적 노동으로 간주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뜻에 따라 치유를 하셨지만, 회당장은 그것을 율법위반으로 간주했습니다.
그러나 안식일의 정신은 <탈출기>(20,8-11)에 따르면, 선행을 멈추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악행을 멈추고 죄와 질병으로부터 해방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곧 안식일은 장차 있을 휴식의 표상으로, 죄의 짐을 지지 말고 선행을 쌓아 미래의 안식을 누리라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회당장은 병마에 묶여있던 여인처럼, 문자(율법)에 묶여있고 질투(어둠과 죽음)에 묶여 있었습니다. 사실, 그가 ‘안식일에 병을 고쳐서는 안 된다’고 한 것은 예수님을 비난하기 위한 구실이었을 뿐, 그가 비난하는 진짜 이유는 예수님께서 찬양받는 것에 대한 질투였습니다. 그는 질투에 묶여 눈이 멀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를 위선자라고 질책하십니다.
“위선자들아, 너희는 저마다 안식일에도 자기 소나 나귀를 구유에서 풀어 물을 먹이러 끌고 가지 않느냐? 그렇다면, 아브라함의 딸인 이 여자를 사탄이 무려 열여덟 해 동안이나 묶어 놓았는데, 안식일일지라도 그 속박에서 풀어주어야 하지 않겠느냐?(루카 13,16)
이처럼, 유대인들이 안식일이더라도 가축을 사용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듯이,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날인 ‘안식일’에 아브라함의 병든 딸을 고쳐주시는 것을 당연한 일, 아니 반드시 해야 할 일로 여기셨습니다. 생명을 바로 세우고 살리는 일, 그것은 바로 하느님이 제정하신 안식일의 정신이었습니다. 이토록, 예수님께서는 치유를 통하여 안식일의 정신을 실현하시고, 하느님의 구원을 선포하십니다.
오늘, 우리도 이를 본 군중처럼, “그분께서 하신 그 모든 영광스러운 일을 두고 기뻐”(루카 13,17)하며, ‘허리 펴진 여인’처럼, 우리 주님 “하느님을 찬양”(루카 13,13)해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안식일일지라도 그 속박에서 풀어주어야 하지 않겠느냐?(루카 13,16)
주님!
꺾인 제 영혼에 당신 손을 얹으소서.
악행을 멈추고, 죄의 속박에서 벗어나게 하소서.
허리를 펴고, 하늘을 올려다보게 하소서.
무거운 등짐을 내려놓고, 하늘을 우러러 찬양하게 하시고,
당신 안에서 새롭게 창조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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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030. 연중 제30주간 월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사람이 희망이다
선한 것은 선한 것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런데 마음이 비딱한 사람은 아무리 선한 것이라도 트집을 잡게 됩니다. 그는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의 행동을 취합니다. 그래서 자기 마음대로 의견이나 행동을 갖다 붙입니다. 가끔은 전혀 사실과는 다른, 진실과는 거리가 있는 자기 생각을 사실처럼, 진실처럼 얘기하는 이들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권위 있는 가르침도 고집을 더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병마에 시달리는 여자에게 손을 얹어 병을 고쳐 주셨습니다. 그러자 회당장이 분개하여 군중에게 말했습니다. “일하는 날이 엿새나 있습니다. 그러니 그 엿새 동안에 와서 치료를 받으십시오. 안식일에는 안 됩니다.” 그러나 그는 아마도 자기가 병에 걸렸으면 자기 위치를 내세우며 병을 낫게 해 달라고 매달렸을 것입니다. 자기 병은 중하고 남의 병은 하찮게 여길 사람입니다. 그가 마음을 열어 주님의 능력을 받아들이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사실 안식일 법은 훌륭한 법입니다. 원래 안식일 제도는 사람들에게 자유와 해방을 가져다주는, 쉬게 하고 안식을 취하게 하는 제도였습니다. 그것을 지키는 일은 장려할 일입니다. 그러던 안식일 제도가 사람을 짓누르는 짐으로 변해 병자를 치유하는 일까지 금해 버렸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 짐을 벗겨 주십니다. ‘자기 소나 나귀는 안식일에도 구유에서 풀어 물을 먹이면서 열여덟 해 동안 병마에 시달린 이는 안식일이라 하여 풀어줄 수 없단 말이냐?’ 한마디로 ‘사람이 짐승만도 못하냐?’고 하셨습니다.
모든 법이 그렇듯이 법은 어디까지나 법입니다. 그 법이 인간 위에서 인간을 지배해서는 안 됩니다. 만일 어떤 법이 인간 위에 군림한다면 그 법은 마땅히 거부 되어야 합니다. 법은 인간을 위한 것이고 사람이 희망입니다. 우리 교회에서 낙태 반대운동을 하고 사형제도 철폐를 주장하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입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생명을 어느 누구도 함부로 할 수 없습니다. 법을 함부로 무시해서도 안 되지만 인간의 존엄을 해친다든지 이웃 사랑을 규제한다면 그 법은 존재의 의미를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일을 해서는 안 된다는 율법을 알면서도 안식일에 드러내 놓고 병을 고쳐 주셨습니다. 안식일은 은총의 날이요, 삶의 멍에로부터 해방되는 날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규범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규범은 하느님의 법 앞에서 자유로워야 합니다. 자기가 가지고 있는 지식으로 율법을 해석하고 인간의 전통에 집착하면 인간을 향한 예수님의 사랑과 연민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그리고 결국은 망신을 당하게 됩니다. 따라서 내가 아는 것이 다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주님의 사랑은 온갖 규범과 판례를 뛰어 넘습니다. 내가 잘한다고 하는 것이 그만 다른 사람을 옭아맬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마음을 바로 해야 하겠습니다. 주일미사참례를 의무이기 때문에, 계명을 지키기 위해 참례한다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지요? 우리는 주님을 흠숭하고 찬미하며 감사하기 위해 미사참례 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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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030. 연중 제30주간 월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성지순례 중에 ‘감곡 매괴 성모 순례 성당’엘 다녀왔습니다. 그곳에서는 1914년부터 매년 성체현양대회가 있다고 합니다. 이 행사는 매년 10월 첫 목요일, 성대한 사제단의 행렬로 시작하여 미사와 함께 성체강복으로 끝난다고 합니다. 전쟁으로 인해 몇 번 중단된 적이 있어서 올해는 105번째 성체현양대회가 지난 10월 5일에 있었다고 합니다. 성체성사에 대한 중요한 신심행사는 이곳을 찾는 모든 이에게 성체신심에 대한 믿음을 새롭게 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현존과 성체 공경을 표현하는 신심행위가 되고 있습니다. 성당 중앙의 제대 위에는 성모상이 있는데 그 성모상에는 표징이 있었습니다. 한국전쟁 때입니다. 북한군은 언덕 위에 있는 성당을 접수하였고, 성당을 부대로 사용하려고 했습니다. 성모상이 기분 나빴던 군인이 성모상에 총격을 가했습니다. 7발의 총알이 성모상을 관통했지만 성모상은 부서지지 않고 그대로 있었습니다. 이에 겁을 먹은 북한군은 다른 곳으로 이동했다고 합니다.
저는 성모상에 있는 일곱 개의 총알구멍을 보면서 생각에 잠겼습니다. 하나는 성모님의 일곱 가지 고통입니다. 성모님은 헤로데의 박해를 피해 남편 요셉과 함께 어린 예수님을 안고 이집트로 피난 가는 고통을 겪었습니다. 성모님은 시메온에게 ‘가슴이 칼로 찔리는 것 같은 아픔을 겪을 것’이라는 예언을 들어야 했습니다. 성모님은 예루살렘 성전을 다녀오던 중 예수님을 잃어버렸습니다. 성모님은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성모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예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성모님은 돌아가신 예수님을 품에 안았습니다. 성모님은 무덤에 묻히시는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이것이 성모님의 일곱 가지 고통입니다. 다른 하나는 일곱 가지 죄의 뿌리입니다. 일곱 가지 죄의 뿌리는 ‘교만, 분노, 시기, 음욕, 탐욕, 인색, 나태’입니다. 성서는 일곱 가지 죄의 뿌리 때문에 하느님과 멀어지고, 넘어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전해 주고 있습니다. 아담의 교만, 카인의 분노, 사울의 시기, 다윗의 음욕, 아합의 탐욕, 부자의 인색, 기름을 준비하지 못한 어리석은 처녀가 있습니다. 성모님은 고통을 하느님께 의탁하였고, 죄의 뿌리는 이겨내셨습니다. 저도 고통은 하느님께 의탁하고, 죄의 뿌리는 이겨낼 수 있도록 성모님께 전구를 청하였습니다.
불가에서는 이런 가르침이 있다고 합니다. “깨닫기 전에 물을 길어오고 나무를 날랐다면 깨달은 후에도 물을 길어오고 나무를 날라야 합니다.” 깨달음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고, 일상의 삶 속에서 얻을 수 있다고 이야기 합니다. 깨달았으니 전혀 다른 차원의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깨달았으니 일상의 삶에서 깨달음을 드러내야 한다고 이야기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영원한 생명을 얻는 길은 초월적인 삶에 있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는 길은 세상을 떠나 깊은 산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늘 겸손을 이야기 하셨습니다. 조건 없는 나눔을 이야기 하셨습니다. 겸손으로 뿌리를 내리고, 조건 없이 나누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이라는 결실을 얻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오늘 복음 말씀을 묵상하면서 두 분의 신부님이 생각났습니다. 한분은 멀리 아프리카에서 가난한 이들을 위해 헌신하셨던 고 이태석 신부님입니다. 그분은 떨어지는 낙엽처럼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지만 그분의 숭고한 삶과 사랑은 더 많은 열매를 맺고 있습니다. 그분의 희생과 사랑은 믿지 않는 많은 사람들에게 신앙의 깊은 의미를 생생하게 알려 주었습니다. 다른 한분은 꽃동네를 만드신 오웅진 신부님입니다. 얻어먹을 힘만 있어도 은총이라고 이야기하신 오 신부님은 가난한 이, 병든 이, 버려진 이들에게 살아갈 수 있는 용기를 주었고, 따뜻한 삶의 울타리를 만들어 주었습니다. 꽃동네를 후원하는 많은 사람들은 작은 정성을 통하여 나눔의 기쁨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결혼을 하는 신랑과 신부가 축의금을 받으면서 그 축의금을 백혈병을 앓는 어린이들에게 기부하였다고 합니다. 부부로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면서 어려운 이웃들에게 나눔을 실천하는 모습이 참 아름다웠습니다.
세계의 인구가 80억 명을 넘어섰다고 합니다. 많은 어린이들이 굶주림에 시달리고 있고, 많은 장애인들이 불편한 삶을 살아가고 있고, 많은 병자들이 고통 중에 있습니다. 우리의 따뜻한 손길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아직은 많이 있습니다. “네가 잔치를 베풀 때에는 오히려 가난한 이들, 장애인들, 다리 저는 이들, 눈먼 이들을 초대하여라. 그들이 너에게 보답할 수 없기 때문에 너는 행복할 것이다. 의인들이 부활할 때에 네가 보답을 받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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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030. 연중 제30주간 월요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사람이 망신당하면 어떤 마음이 들까요?
‘모든 사람은 이성적으로 보이고 싶으나 감성에 의해 움직인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즉, 망신당하면 그 망신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왜 망신을 당했는지, 그 망신의 원인이 누구에게 있는지, 내 잘못이나, 나의 부족에서 온 것은 아닌지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망신당하면 그 이후에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로지 그 망신을 몇 배로 갚아주고 싶은 마음만이 들 뿐입니다. 잘잘못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망신을 당했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자존심이 상했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오늘 복음 안에서 회당장이 이런 입장입니다. 회당장은 망신당합니다.
그야 당연한 일입니다. 주님의 말씀이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지당한 말씀이었게 때문입니다. 처음에 사람들은 회당장의 발언에 솔깃했을 것입니다. 법의 권위 위에서 회당장이 말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이후 주님의 말씀을 들은 사람들은 회당장의 입장과 다른 쪽에 서게 되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는 사랑의 법 위에서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병마에 오랜 시간 시달린 여인에게도, 또한 그들 자신에게도 적용되기를 바랐기 때문입니다.
엊그제는 사두가이들을, 어제는 바리사이들을, 오늘은 회당장과 그 일당들을 주님께서는 사랑의 법으로 꼬집으십니다.
그렇게 그들은 그들 자신을 바라보지 못하고 망신에 대한, 모욕에 대한 복수의 마음을 불태우기 시작합니다.
그렇게 주님께서는 사랑의 법 때문에 십자가의 길을 선택하셨습니다.
엔니오 모리코네
엔니오 모리코네(이탈리아어: Ennio Morricone, Cavaliere di Gran Croce OMRI, 1928년 11월 10일 ~ 2020년 7월 6일)는 이탈리아의 작곡가, 지휘자, 트럼펫 연주자이다. 여러 공연 음악과 500 편이 넘는 영화 음악을 작곡한 그는 역대 가장 왕성하고 위대한 영화 음악의 거장으로 여겨지고 있다. 세르조 레오네 감독의 《황야의 무법자》, 《석양의 무법자》 등의 "스파게티 웨스턴", 《미션》, 《시네마 천국》 등의 음악이 잘 알려져 있다.그의 영화음악 작품 중 《석양의 무법자》(1966년)는 역사상 가장 잘 알려지고 영향력 있는 사운드트랙 중 하나로 손꼽히고 있으며 그래미 명예의 전당에 헌정된 바 있다.[위키백과]
엔니오 모리코네는 위와 같은 사람입니다. 저도 좋아하는 음악가입니다.
얼마 전 모리코네의 연미사가 들어왔습니다.
사실 조금 당황스러웠습니다. 갑자기 외국인 연미사가 들어와서 말입니다. 차분히 생각해 보지 못할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미사 중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많은 사람에게 감동과 기쁨을 준 그에게 주님 하늘의 행복을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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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030. 연중 제30주간 월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사제관을 나와사 엘리베이터의 내려가는 버튼을 눌렀습니다. 평상시에는 주로 계단으로 오르내리지만, 이날은 양손 가득히 짐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한참을 기다렸음에도 엘리베이터는 오지 않는 것입니다. 짐의 무게를 점점 느끼게 되면서 누가 엘리베이터 버튼을 이렇게 오래 누르고 있냐면서 불평이 나오기 시작합니다. 너무 짐이 무거워서 짐을 바닥에 잠시 내려놓은 뒤, 엘리베이터가 오지 않았던 이유를 알 수 있었습니다.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지 않은 것입니다. 눌렀다고 생각했지만, 실제로는 눌러지지 않아서 꼼짝하지 않고 가만히 있던 것입니다. 이렇게 버튼도 제대로 누르지 않고는 엘리베이터를 누가 잡고 있을 것이라면서 남 탓을 하고 있었던 것이지요.
사실 우리는 습관적으로 남 탓을 하곤 합니다. 나의 역할보다 남의 역할이 더 크지 않을 텐데, 늘 ‘누구 때문에’를 외치곤 했습니다. 버튼을 누르지 않으면 엘리베이터가 움직이지 않는 것처럼, 자신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않으면 어떤 변화도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강조하신 사랑 실천도 남이 해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내가 해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사랑을 실천하는 ‘나’에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남을 보지 않고 온전히 주님의 뜻을 따를 수 있게 됩니다. 남 탓으로 불편한 마음을 만들 것이 아니라, 나의 사랑으로 우리 모두 편할 수 있는 세상을 만들어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먼저 완벽한 사랑을 직접 보여주셨습니다. 그 사랑은 어떤 것보다도 우선되었습니다. 유다인들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율법보다 사랑의 계명이 더 우위에 있다는 것을 밝히십니다.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어떤 회당에서 가르치고 계셨는데, 열여덟 해 동안이나 병마에 시달리는 여자를 만나게 되십니다. 이 여자는 허리가 굽어 몸을 조금도 펼 수가 없었습니다. 그만큼 큰 고통 속에 있는 분으로,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일분일초라도 빨리 고통 속에서 자유롭게 해 주려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날이 마침 안식일이었습니다. 그래서 회당장은 “일하는 날이 엿새나 있습니다. 그러니 그 엿새 동안에 와서 치료를 받으십시오. 안식일에는 안 됩니다.”라고 말하지요. 맞는 말처럼 들리지만, 사랑한다면 이렇게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사랑은 그 어떤 것보다 우선시됩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나부터가 시작되어야 합니다. 남 탓을 하면서 사랑할 수 없는 이유를 찾는 것이 아니라, 지금 당장 어떤 경우에도 곧바로 실천할 수 있는 사랑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제1독서의 바오로 사도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또 우리를 위하여 당신 자신을 하느님께 바치는 향기로운 예물과 제물로 내놓으신 것처럼, 여러분도 사랑 안에서 살아가십시오.”(에페 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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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인간을 치유하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인간을 전제로 보아야 하고, 궁극적인 치유는 하느님 사랑뿐임을 알아야 합니다(베네딕토 16세 교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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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030. 연중 제30주간 월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예닮의 여정
-하느님의 자녀로서 자유로운 삶-
어제 강론시 인용했지만 저에게 가벼운 충격이자 새로운 깨달음이었습니다. 무려 강론에 사랑이란 단어가 112회나 사용되었다는 것이 한편 부끄러웠고, 사랑이 빠진 인생이 얼마나 아무것도 아닌 것인가 하는 깨달음이 깊이 각인된 날이기도 합니다. 기도는 사랑입니다. 사랑은 판단의 잣대입니다. 자유롭게 하는, 생명을 주는 사랑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이 그러합니다. 오늘 복음의 예수님을 대하니 저절로 참 많이 나눴던 사랑의 고백, 예닮기도를 바치고 싶습니다. 이런 사랑의 고백기도는 늘 바쳐도 늘 새롭고 좋습니다.
“주님,
사랑합니다.
찬미합니다.
감사합니다.
기뻐합니다.
차고 넘치는 행복이옵니다.
이 행복으로 살아갑니다.
주님,
눈이 열리니
온통 당신의 선물이옵니다.
당신을 찾아 어디로 가겠나이까
새삼 무엇을 청하겠나이까
오늘 지금 여기가 하늘 나라 천국이옵니다.
곳곳에서 발견하는
기쁨, 평화, 감사, 행복이옵니다.
살 줄 몰라 불행이요
살 줄 알면 행복임을 깨닫나이다.
끊임없는 찬미와 감사의 삶중에
당신을 만나니
당신은 우리를 위로하시고 치유하시며
기쁨과 평화, 희망과 자유를 선사하시나이다
주님,
당신은 저의 전부이옵니다.
저의 사랑, 저의 생명, 저의 기쁨, 저의 행복이옵니다.
하루하루가 감사와 감동이요 감탄이옵니다.
날마다 당신과 함께 새롭게 시작하는 아름다운 하루이옵니다.
이제 당신을 닮아
온유와 겸손, 인내의 사람이 되는 것이
제 소망이오니 간절히 청하는 제 기도를 들어주소서.
당신께 영광이 영원무궁하기를 빕니다.”-2018.10.16.
벌써 5년째 참 많이 나눴던 예닮기도 전문입니다. 명칭도 감사기도에서 행복기도로 이어 예닮기도로 바뀌었습니다. 우리의 영원한 사랑의 대상, 예수님은 이런 분입니다. 이런 사랑의 예수님의 진면목은 오늘 복음에서 유감없이 발휘됩니다. 등굽은 여자를 치유해주시는 장면에서 회당장의 첫눈에 들어온 것은 율법의 잣대 였지만, 예수님께는 사랑의 잣대였습니다.
열여덟해 병마에 시달리던 등굽은 여자가 상징하는 바, 온갖 세상 짐들 무게에 짓눌리며 살아가는 모든 불쌍하고 가련한, 참으로 해방과 자유가, 안식이 필요한 민초들이요 바로 이것이 안식일의 참된 취지이겠습니다. 이미 루카복음 앞부분에서 공생애가 시작될 때 선포된 주님의 사명이 실현되기 시작된 것입니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예나 이제나 계속되는 부자유하고 무지한 인간의 내적 현실이요 예수님이 아니고는 누가 우리를 참으로 해방과 자유의 길로 이끌수 있겠는지요! 등굽은 병마에 시달리던 여자가 상징하는 바 우리 약한 인간 모두들입니다.
“여인아. 너는 병에서 풀려났다.”하시고 그 여자에 손을 얹으시자 그 여자는 즉시 똑바로 일어서서 하느님을 찬양하였다 하니 얼마나 멋지고 통쾌한 장면인지요! 그대로 부활의 기쁨에 주님을 찬양하는 치유받은 여인이요, 바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을 상징합니다. 똑같은 주님께서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온갖 근심과 걱정, 두려움과 불안으로 마음의 등 굽은 우리를 똑바로 일으켜 주십니다.
여전히 안식일법의 잣대에 사로잡힌, 안식일법의 참된 취지를 망각한 회당장에 대한 주님의 질책은 오늘날의 법지상주의자들에 대한 회개의 촉구이기도 합니다. 안식일에도 소나 나귀를 풀어 물을 먹이는 실례를 예시하면서 회당장의 위선의 무지를 꾸짖습니다.
“위선자들아, 아브라함의 딸인 이 여자들 사탄이 무려 열여덟 해 동안이나 묶어 놓았는데, 안식일일지라도 그 속박에서 풀어 주어야 하지 않느냐?”
안식일법 너머 병마에 시달리는 여자의 절박한 현실을 깊이 통찰한 연민 가득한 주님의 해방과 치유의 활동입니다. 안식일법의 근본취지도 이런 모두의 해방과 자유, 안식에 있는데 회당장은 이를 까맣게 잊었던 것입니다. 적대자들은 망신을 당했고 마음이 순수한 민초들은 모두 그분께서 하신 그 모든 영광스러운 일을 두고 기뻐하니 새삼 민심이 천심임을 입증합니다. 예수님을 통해 드러나는 하느님의 세 스타일- 친밀함, 연민, 부드러움-이 잘 드러납니다.
그러나 이제부터가 중요합니다. 오늘 복음을 잘 보완하는 제1독서 바오로 사도의 말씀이 고맙습니다. 우리를 하느님의 자녀로서 참으로 자유롭게 살게 하는 성령의 은총입니다. 성령은 사랑입니다. 파스카 예수님의 치유활동은 성령을 통해 오늘도 영원히 계속됩니다.
“하느님의 영의 인도를 받는 이들은 모두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여러분은 사람을 다시 두려움에 빠뜨리는 종살이의 영을 받은 것이 아니라, 자녀로 삼도록 해 주시는 성령을 받았습니다. 이 성령의 힘으로 우리는 ‘아빠! 아버지!’하고 외치는 것입니다. 이 성령께서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임을 우리의 영에게 증언해 주십니다. 자녀이면 상속자입다. 그리스도와 더불어 하느님의 공동상속자인 우리들입니다.”
‘그리스도와 더불어 하느님의 공동상속자’ 얼마나 영예스러운 우리의 신원인지요!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성령을 통해 그리스도 예수님과 깊어가는 일치와 더불어 날로 하느님의 자녀로서 자유로운 삶을 살게 하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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