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상(頂上)
울릉도를 갈 때마다 성인봉을 오르고 싶은 충동이 일어났었다. 여럿이 동행했기에 시간 내기가 쉽지 않았다. 이번에는 다들 독도를 간다고 했다. 독도는 전에 갔기에 성인봉에 오를 절호의 기회가 왔다. 이번 기회를 놓친다면 영영 오를 수 없을 것 같았다.
아침에 일찍 서둘러 택시를 타고 KBS 중계소에서 내렸다. ‘성인봉 가는 길’이라는 푯말이 입구를 안내했다. 단출하게 물 한 병과 맥주 한 캔을 준비하여 산에 올랐다. 시간이 일러서 그런지 산행하는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목적지까지 가는데 젊은이 두 명과 오십 대쯤 보이는 부부를 만났을 뿐이다.
처음과 끝이 힘들었으나 중간에는 산허리를 지그재그로 가기에 힘들지 않았다. 하늘 높이 솟은 울창한 나무와 땅에는 고사리와 비슷한 식물이 길 좌우로 널리 깔려 있었다. 마치 인생길처럼 힘들기도 했지만, 평탄한 길도 있어 힘들 때는 땀이 돋았고 평탄한 길에는 땀이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가는 길에는 이따금 이정표가 나타나 남은 거리를 알려주었다. 정상에 오르니 성인봉(986m) 표지석이 서 있었다. 건너편 산에는 공군 레이다 기지가 있었다. 정상에서 맥주 한 캔을 마셨더니 짜릿한 맛이 무엇에 견줄 바가 아니었다. 운무가 나타났다 사라지기도 하는 것이 마치 인생역정을 말해주는 듯했다. 예상보다 빨리 올라 아직도 건재함에 하늘을 우러러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한참을 쉬었다가 왔던 길을 되돌아왔다. 그제야 많은 사람이 헉헉거리며 올라왔다. 내리막길은 쉬지 않고 곧장 내려왔더니 오를 때보다 20분이 단축되었다. 왕복 거리가 7,6km, 3시간 15분이 소요되었다, 목표보다 40여 분이 당겨져 기분이 좋았다. 오늘 정상을 밟은 의미는 시사하는 바가 컸다. 산티아고 순례길을 갈 수 있겠다는 희망을 주었다. 그 길은 십여 년 전에 꿈꾸었던 곳이다.
그때 산티아고 800km를 갈려고 했으나 병마가 찾아와 꿈을 접었으며 그 후로는 불가능의 마침표를 찍었다. 그러나 오늘 산행을 통해 가능성의 의미를 열어주었다. 목표는 크게 잡아야 한다고 말이다. 그 목표를 향해 꿈이 접근하기 때문이다. 건강달리기 5km에 목표를 두면 4km를 연습한다. 그러나 단축마라톤 10km에 목표를 두었더니 7-8km를 거뜬히 뛰었다. 목표는 꼭 달성하기보다는 동기유발의 수단이 되기 때문이다.
삼십여 년 전에 성인봉에 올랐으며, 오늘 또 정상을 밟았다. 다음에는 팔순 기념으로 성인봉에 오를 결심을 하고 산행을 마쳤다. 그때는 울릉도에 비행장이 생긴다고 한다. 그러면 하루에 등산하고 돌아올 수도 있지 않을까 싶다. 그때를 기대하니 삶의 의미가 한껏 부풀어 오른다. ‘정상이 이런 의미와 희망을 줄 줄이야.’라는 생각에 그게 살아가는 의미임을 깨닫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