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528
6월21일[성 알로이시오 곤자가 수도자 기념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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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강론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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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5GwHKWagI-s (김학배 안젤로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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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성도들은 맹수 앞에서도, 감옥에서도, 불길에 휩싸여서도, 기도합니다!>
예수님 시대 유다인들의 신앙은 급격한 하락세를 보이고 있었는데, 그 가장 큰 이유 중에 하나는 지도자들의 위선적 삶이었습니다. 안 그래도 로마 식민지 치하에서 고생하고 있던 백성들은 신앙 안에서나마 위로와 힘을 얻고자 기대했지만, 성전 주변에는 위선자들이 득실거렸던 것입니다.
위선자들은 기도할 때 조차도 집중하지 못하고 인간의 칭찬을 찾아 두리번거렸습니다. 그들의 기도가 겉으로는 그럴 듯 해보였지만, 그 기도에 진심이 담겨 있지 않았습니다. 엄청나게 요란스럽고 장황했지만, 그래서 사람들의 감탄을 자아냈지만, 정작 하느님 앞에 그들의 기도는 기도도 아니었습니다.
기도에 대한 힐라리우스 교부의 가르침이, 참으로 은혜롭습니다. “성도들은 맹수 앞에서도, 감옥에서도, 불길에 휩싸여서도, 바다 속 깊은 곳과 짐승의 배 속에서도 기도합니다.”
기도에는 진정성과 열정, 지극정성이 요청됩니다. 건성건성, 적당히, 물에 물탄 듯 술에 술탄듯한 어정쩡한 기도가 아니라, 때로 목숨을 건 기도, 삶 전체를 바친 기도가 필요합니다.
기도란 한 인간이 자신의 근원이자 시초인 하느님께로 거슬러 올라가는 일입니다. 따라서 기도하는 사람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몸과 마음의 방향을 하느님께로 돌리는 일입니다, 그리고 하느님께 마음을 활짝 여는 일입니다.
그런데 이토록 거룩하고 진지해야할 기도 행위에서 조차도 하느님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자신’을 돋보이게 하려는 이들이 있었으니, 바로 위선자들이었습니다. 예수님 시대 위선자들의 대표 선수로 손꼽히는 자들이 있었으니 율법학자들이요 바리사이들이었습니다.
다 그런 것은 아니었지만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은 평소에는 가만히 집에 잘 들어앉아 있다가도 기도하는 시간인 9시, 12시, 오후 3시만 되면 길거리로 뛰쳐나왔습니다. 그리고 사람들 왕래가 잦는 회당 앞이나 큰 길 모퉁이에 멈춰 서서 멋들어진 폼, 거룩한 표정까지 지으며 열렬히 기도를 바치곤 했습니다.
숨은 일도 다 보시는 예수님께서 가증스런 그 꼴을 어떻게 그냥 지나칠 수 있겠습니까? 기도의 가치와 위상을 추락시키고 기도를 하느님께 드리는 선물이 아니라 한 인간을 멋들어지게 포장하는 도구로 훼손시킨 위선자들을 향해 예수님께서 제대로 한방 날리십니다.
“너는 기도할 때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은 다음, 숨어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여라. 그러면 숨을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 주실 것이다.”(마태오 6장 6절)
공동체 전례, 하느님 백성과 함께 바치는 공적인 기도도 중요하지만 가끔씩 골방으로 들어갈 필요가 있습니다. 물론 하느님께서는 어디에나 계시고 어디서든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가끔씩 영혼의 깊은 궁방 속으로 들어갈 필요도 있습니다.
성당이나 수도원만이 영성의 보고이며 곡창지대가 절대 아닙니다. 아무도 없는 나만의 공간, 하느님과 내가 편안하게 통교할 수 있는 내 작은 독방 역시 하느님께서 현존하시는 거룩한 장소입니다.
자신의 골방에서 기도할 줄 아는 사람은 성당은 물론이고 이 세상 어디서나 기도할 수 있습니다. 기도의 방식에는 정답이 없습니다. 각 개인차가 있습니다. 참으로 다양하면서도 포괄적입니다. 따라서 한 가지 형태의 기도만 고수하고 거기에만 가치를 두어서는 안 됩니다.
공동체적 기도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개인적인 기도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됩니다. 장엄한 공동체 전례가 더 빛나기 위해서는 거기에 참석하는 개개인의 열정적인 기도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반대로 공동체와 무관한 개인기도는 자칫 고립되어 엉뚱한 방향으로 빠질 가능성이 있습니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골방에서도 열심히 기도하지만, 똑같은 열성으로 공동체 전례가 장엄하게 거행되는 성전으로도 나아가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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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 주실 것이다.”
<내적 인간>
미국에 한 중년 부부가 있었는데 그만 아내가 수술이 잘못되어 실명하고 말았습니다. 그 후 남편은 매일 같이 아내의 직장까지 아내를 출근시켜주고 하루 일과가 끝난 후에는 집까지 데려다 주었더랍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남편이 아내에게 서로 직장이 너무 머니까 혼자 출근하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에 아내는 남편에게 너무나 섭섭해 했고, 사랑하는 남편이 그런 말을 한 것에 대해 배신감까지 느꼈습니다.
그리곤 이를 악물고 살아야겠다는 결심을 한 후 그 다음 날부터 혼자 출근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지팡이를 짚고 버스를 타고 하면서 많이 넘어지기도 하고 울기도 하면서 혼자 다니는 훈련을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어느 정도 혼자 다니는 것이 익숙해진 2년 후 버스운전기사가 이 부인에게 이렇게 얘기를 하였습니다.
“아줌마는 복도 많소, 매일 남편이 버스에 함께 앉아 있어 주고 부인이 직장 건물에 들어가는 순간까지 지켜보다가 등 뒤에서 손을 흔들어 주는 보이지 않는 격려를 해주니까요.”
이 남편은 외적으로 자신의 사랑을 증명해 내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혹시라도 자신이 먼저 세상을 떠나게 되었을 때 혼자 남겨질 아내를 위해 아내로부터 인정받는 것을 포기하였습니다.
인정받으려고 한다면 모자라기 때문일 것입니다. 내적으로 만족하면 사람들의 인정은 중요하지 않게 됩니다.
제가 요즘 보니까 카카오 스토리에 부모님과 함께 한 사진을 많이 올리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그것만 보고 “신부님은 효자세요!”라고 말을 합니다.
그렇습니다. 제가 그렇게 생각하지 않기에 그런 말을 듣고 싶었던 것입니다. 진짜 효자라면 그런 말을 유도할 사진들을 올릴 필요는 없었을 것입니다.
어렸을 때 작은 형과 길을 걷고 있을 때 매우 비싼 옷에 반지, 목걸이, 그리고 화장까지 진하게 하고 턱을 들고 걸어가는 아주머니를 보고, “저 아줌마, 왜 저래?”라고 제가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역시 아이였던 형이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어, 속이 비어서 그래!”
그렇습니다. 열등감이 강한 사람은 더 잘나 보이려고 하고, 가난이 부끄러운 사람은 더 부자처럼 보이려고 합니다. 그래서 외적으로 보이려는 행동들은 대부분 내적으로 만족스럽지 못하기 때문이란 결론이 나오는 것입니다.
김창옥 교수는 가난한 집과 청력 장애와 도박을 좋아하셨던 아버지, 못 배우신 어머니 밑에서 자랐습니다. 물론 공부도 못해서 삼수를 해, 이름도 없는 대학에 들어갔습니다. 항상 열등감에 시달리던 그는 많은 노력 끝에 본인이 원하던 성악을 하게 되었고 유명 강사로 이름을 날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열등감은 완전히 가셔지지 않았습니다. 그는 졸업 후에도 대학 교수님께 성악 지도를 받았는데, 큰 회사들에 가서 수천 명 앞에서 강의하고 온 것에 대해 자랑을 늘어놓곤 하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교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그래, 참 잘하고 있구나... 그런데 네가 흘러야 돼!”
그렇습니다. 여전히 열등감을 극복 못 하고 있기에, 흐르지 못하고 변화하지 않기에, 그렇게 외적인 것으로 자랑을 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내적으로 부족하면 외적으로라도, 하느님에게가 아니면 사람에게라도 인정을 받으려 하는 것이 우리 마음입니다. 내가 외적으로 인정받고 싶다면 내적으로 하느님께 인정받지 못하고 있음을 자각해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선행도, 기도도, 단식도 아무도 모르게 혼자 하라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이것들은 보이지 않는 하느님과의 만남의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는 것은 내 안에 계신 분을 만나기 위한 목적이 아닙니다.
얼마 전에 키 높이 깔창을 넣은 구두에서 깔창을 뜯어냈습니다. 키는 더 작게 보일지언정 마음은 편했습니다. 누구를 속이고 있다는 가책에서 벗어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내 마음 가장 깊은 곳에 계십니다. 따라서 밖을 향하면 곧 그분을 볼 수 없고 잊어버리게 됩니다.
뱀을 보면 하느님을 보지 못하는 것처럼, 우리는 내적인 것 아니면 외적인 것 둘 중의 하나만 볼 수 있게 되어 있습니다. 하느님이 주시는 만족을 원하든지, 사람들이 주는 칭찬이나 인정을 원하든지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해야 합니다.
숨은 일도 보시는 하느님께만 집중할 수 있을 때 세상의 집착으로부터, 또 집착으로부터 오는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워 질 수 있을 것입니다. 내적 인간이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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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성지순례를 하면서 이런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기도로 시작하는 성지순례는 은총이 열매 맺는데 기도하지 않는 성지순례는 문제가 생깁니다.” 기도하면 불평할 것들도 감사하게 받아들이게 됩니다. 기도하면 곤란한 상황에서도 서로 격려하게 됩니다. 기도하면 작은 들꽃에서도 하느님의 사랑을 느끼게 됩니다. 단체로 이동하기에 시간 약속이 중요합니다. 성지순례를 하면서 모두들 약속 시간보다 이른 시간에 모이는 것을 보았습니다. 신랑을 기다리는 슬기로운 처녀들처럼 출발시간 전에 버스에 앉아 계시는 순례자들을 보는 것은 기쁨입니다. 버스에 탑승하면 먼저 기도로 순례를 시작합니다. ‘아침기도, 가정을 위한 기도, 부부를 위한 기도, 사제를 위한 기도, 성소를 위한 기도, 삼종기도, 묵주기도’를 함께합니다. 순례를 마치면서 ‘저녁기도, 수호천사에게 드리는 기도, 삼종기도’를 바치고 사제의 강복을 받습니다. 혼자 하는 기도는 자칫 소홀할 수 있고, 건너 뛸 때도 있는데 함께 하니 순례가 더욱 풍요로워 집니다. 기도로 시작하고, 기도로 마치는 순례는 감사와 찬미의 순례가 됩니다.
평화신문은 ‘자선’을 베푸는 사람들에 관한 기사를 보도하곤 합니다. 어떤 분은 고인이 된 아들을 추모하면서 신학교에 아들에게 줄 유산을 장학금으로 기부하였습니다. 어떤 분은 평생 폐휴지를 모아서 마련한 돈을 어려운 이웃을 위해 봉헌하였습니다. ‘사랑이 피어나는 곳’을 통해서 전해지는 사연을 읽고 많은 분이 도움을 주고 있습니다. 코로나만 전염력이 강한 것은 아닙니다. 나눔도 분명 전파력이 있습니다. 교회는 영리를 목적으로 사업을 하는 곳이 아닙니다. 교회는 공동체의 헌금과 교무금으로 운영됩니다. 공동체의 기부와 자선은 가난한 이들에게, 아픈 이들에게 큰 위로와 힘이 됩니다. 지면을 통해서 어려운 이웃을 소개하는 것은 두 가지 좋은 점이 있습니다. 도움을 받는 사람은 받아서 좋고, 도움을 주는 사람은 주니까 좋습니다. 본당에서 볼리비아 선교를 위한 기금 마련 골프대회를 하였습니다. 운동을 하면서 선교를 위한 나눔을 하니 좋은 일입니다. 하느님께서 좋은 날씨를 허락해 주셨습니다.
기도와 자선은 새의 날개와 같습니다. 기도와 자선을 통해서 우리는 하느님께 가까이 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늘 기도하였습니다. 제자들에게도 깨어서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이 마귀를 쫓아내지 못하는 것은 기도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기도하는 시간이 줄어들면 마귀는 어느새 우리의 마음으로 들어옵니다. 기도하는 시간이 줄어들면 우리는 세상의 것들에 마음을 빼앗기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측은한 마음으로 감사의 기도를 드리신 다음 빵과 물고기를 나누어 주셨습니다. 그런 나눔으로 오천 명이 배부르게 먹고도 12광주리가 남았습니다. 성체성사는 예수님께서 몸과 피를 나누어주신 것을 재현하는 것입니다. 되로 주면 말로 받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넘치게 받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기도와 자선’에 대한 태도를 말씀하십니다. 위선과 가식을 드러내는 기도는 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위선과 가식을 드러내는 자선은 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겉으로 드러나는 일, 생색내는 일, 남이 알아주기를 바라는 일을 경계하십니다. 다만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기를 바라십니다. 그러면 하늘이 알고, 땅이 알고, 하느님께서 알아주신다고 하십니다. 중용 23장은 이러한 삶을 드러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작은 일에도 최선을 다하면 정성스럽게 된다. 정성스럽게 되면 겉에 배어 나오고, 겉에 배어 나오면 겉으로 드러나고, 겉으로 드러나면 이내 밝아지고, 밝아지면 남을 감동시키고, 남을 감동시키면 이내 변하게 되고, 변하면 생육된다. 그러니 오직 세상에서 지극히 정성을 다하는 사람만이 나와 세상을 변하게 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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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6,1-6.16-18: 올바른 자선
우리가 자선을 베풀 때는 그 자선이 사람들에게 보이려는 뜻으로 사람들 앞에서 베풀 수도 있고, 사람들 앞에서 베풀되 보이지 않게 할 수도 있으며,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사람들 앞에서 베풀지만 남의 눈에 띄지 않을 수도 있고, 몰래 베풀지만 남의 눈에 띄고 말 수도 있다. 예수께서는 밖으로 드러난 결과가 아니라 마음속 생각을 말씀하신다. 예수께서는 현재의 것에 관한 관심을 버리라고 하신다.
자신의 덕을 내보임으로써 사람들의 칭찬을 얻으려 하지도 말고, 남 앞에서 넘치게 기도함으로써 신심을 자랑하지도 말라고 하신다. 자선은 자랑하려고 베푸는 것이 아니다. “오른손”, “왼손”의 의미는 이것이다. 오른손은 의인이나 의로운 행위를 말하고, 왼손은 죄가 되는 행동이나 죄인들을 말한다. 그러므로 의인인 오른손은 왼손이 하는 일을 몰라야 하고, 우리가 충실하고 신심 깊게 행하기 위해서는 죄인들 앞에서 자랑하지 말아야 한다. 다른 사람에게 알려지기도 하지만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는 자선을 베풀 수 있어야 한다.
기도는 사람들에게 하는 것도 사람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 아니다. 기도할 때 우리는 천사의 무리와 하나가 되는 것이다. 기도는 천사의 무리와 하나가 되어 하느님께 찬미와 영광을 드리는 것이다. 대천사가 토비트에게 “너희의 기도를 주님 앞으로 전해 드린 이가 바로 나다.”(토빗 12,12)라고 했다. 골방이라는 것은 마음의 침실이다. 그 마음으로 자기가 기도하는 것과 자신이 기도를 바치는 분만을 생각하도록, 기도할 때는 다른 것은 보지 말고 하느님만 바라보라고 하신다. 그러한 기도를 들어주신다는 것이다.
자선과 기도가 그렇듯이 단식을 할 때도 겉꾸미는 행동을 하지 말라고 하신다. 예수께서는 남에게 보이려는 행위나 꾸밈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하시면서 “그들은 얼굴을 찌푸린다.”(16절) 하신다. 그렇게 하는 것은 남에게 드러내는 자랑거리일 뿐 아무것도 아니다. “너희는 그들이 맺은 열매를 보고 그들을 알아볼 수 있다.”(마태 7,16)라는 말씀으로 양의 옷차림을 한 이리들을 조심하라고 경고하신 바 있다. 그들이 맺는 열매를 보고 그들이 양의 옷을 입은 이리인지 실제로 양인지 결국 드러날 것이다. 말씀으로 언제나 참 열매를 맺는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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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위선>
“너희는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의로운 일을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그러지 않으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에게서 상을 받지 못한다. 그러므로 네가 자선을 베풀때에는, 위선자들이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듯이, 스스로 나팔을 불지 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들은 자기들이 받을 상을 이미 받았다. 네가 자선을 베풀때에는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라. 그렇게 하여 네 자선을 숨겨 두어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 주실 것이다.”(마태 6,1-4)
이 말씀에서 25장에 있는 ‘최후의 심판 이야기’가 연상됩니다. “그때에 임금이 자기 오른쪽에 있는 이들에게 이렇게 말할 것이다. ‘내 아버지께 복을 받은 이들아, 와서, 세상 창조 때부터 너희를 위하여 준비된 나라를 차지하여라.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내가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내가 나그네였을 때에 따뜻이 맞아들였다. 또 내가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고, 내가 병들었을 때에 돌보아 주었으며, 내가 감옥에 있을 때에 찾아 주었다.’ 그러면 그 의인들이 이렇게 말할 것이다. ‘주님, 저희가 언제 주님께서 굶주리신 것을 보고 먹을 것을 드렸고,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실 것을 드렸습니까? 언제 주님께서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따뜻이 맞아들였고, 헐벗으신 것을 보고 입을 것을 드렸습니까? 언제 주님께서 병드시거나 감옥에 계신 것을 보고 찾아가 뵈었습니까?’ 그러면 임금이 대답할 것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34-40)
이 이야기에 나오는 ‘의인들’은 자기들이 한 일을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말은, 선행을 실천했다는 것을 기억하고 있지만 주님께 한 적은 없다는 뜻이 아니라, 칭찬받을 일을 한 기억이 없다는 뜻입니다.> 그 의인들은 선행을 실천하면서도 그 일이 선행이라는 것을 의식하지 못한 사람들, 사랑을 실천하면서도 그 일이 사랑이라는 것을 의식하지 못한 사람들, 해야 할 일이니까 당연히 하는 것뿐이라고 생각한 사람들입니다.
선행과 사랑은 그렇게 실천해야 한다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너희도 분부를 받은 대로 다 하고 나서,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 하고 말하여라.”(루카 17,10) 그런데 마음속으로는 자랑하고 싶어 하면서도 “저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라고 말하면서 겸손한 척 하는 것도 ‘위선’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말로만 겸손한 척하지 말고 마음으로부터 겸손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눈치를 보지 말고 하느님의 눈치를 살피자고 말하는 이가 있는데, 그런 말도 옳지 않은 말입니다.>
“스스로 나팔을 불지 마라.”라는 말씀에서 루카복음 18장에 나오는 바리사이가 연상됩니다. “바리사이는 꼿꼿이 서서 혼잣말로 이렇게 기도하였다. ‘오, 하느님! 제가 다른 사람들, 강도짓을 하는 자나 불의를 저지르는 자나 간음을 하는 자와 같지 않고 저 세리와도 같지 않으니,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저는 일주일에 두 번 단식하고 모든 소득의 십일조를 바칩니다.’ ……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 바리사이가 아니라 이 세리가 의롭게 되어 집으로 돌아갔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루카 18,11-14)
사람들을 향해서나 하느님을 향해서나 스스로 나팔을 부는 것은 모두 위선입니다.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라.”라는 말씀은, “너 자신도 모르게 하여라.”라는 뜻입니다. 자선과 선행과 사랑을 실천하면서도 그것이 자선과 선행과 사랑인 줄도 모르는 수준에 도달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닐 텐데, 그래도 그 수준에 도달해서 그렇게 실천하는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 많이 있습니다. <이 말에 대해서, “사람들 모르게, 또 자기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선과 선행과 사랑을 실천한 다음에, 마음속에 저절로 기쁨과 행복감이 가득 차는 것도 옳지 않은 일인가?”라고 물을 수 있는데, 그것은 아니고, 자기 혼자서 속으로 느끼는 그 기쁨과 행복감은 하느님께서 내려 주시는 보상을 미리 알려 주는 표징일 수 있습니다.>
“너희는 기도할 때에 위선자들처럼 해서는 안 된다. 그들은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이려고 회당과 한길 모퉁이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한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들은 자기들이 받을 상을 이미 받았다.”(마태 6,5)
“너희는 단식할 때에 위선자들처럼 침통한 표정을 짓지 마라. 그들은 단식한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이려고 얼굴을 찌푸린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들은 자기들이 받을 상을 이미 받았다.”(마태 6,16)
위선자들의 기도는 기도가 아니라, 기도하는 척 하는 ‘연기(演技)’일 뿐입니다. 또 위선자들의 단식은, 실제로 밥을 굶더라도, 단식이 아니라 단식하는 척 하는 연기일 뿐이고, 쓸데없이 헛고생하는 일입니다. 우리는 ‘몸으로만’이 아니라 온 마음과 몸으로 단식해야 합니다. <단식일로 정해져 있는 날에 단식하려고 그 전날에 미리 많이 먹거나, 아니면 단식일 다음 날에 많이 먹는 모습을 볼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그 단식이 거짓 단식이었음을 드러내는 일입니다. 우리 교회는 매주 금요일에 금육재를 지키는데, 목요일에 미리 고기를 먹거나, 아니면 토요일로 미루었다가 먹는 것도 위선이고, 고기만 안 먹으면 된다고 생각해서 고기보다 더 비싼 생선회를 먹는 경우도 위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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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인천교구 정천 사도 요한 신부님]
다른 사람과 함께 어울려 살아가는 우리는 자연스럽게 다른 사람의 눈을 의식합니다. 눈치를 보는 것은 관계성을 지닌 사람이라면 누구나 하게 되는 행동이고 꼭 필요하기도 합니다. 눈치가 있고 없고에 따라서 사회생활을 잘하고 못하고의 여부가 판가름 나기도 합니다. 그런데 ‘눈치를 너무 본다.’는 표현은 부정적인 의미로 인식되기도 합니다. 이는 남들 눈에 자신이 어떻게 비추어질지를 지나치게 염려하는 성향과도 관련이 있습니다. 좋은 사람, 착한 사람, 의로운 사람, 성실한 사람, 거룩한 사람으로 보이고 싶은 욕구에 사로잡혀 때로는 거짓된 행동으로 자신을 포장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오늘 복음에서 그저 사람들에게 잘 보이려고, 칭찬을 받으려고, 자신을 드러내고 뽐내려고, 겉으로만 그런 척 행동하는 사람들의 전형을 봅니다. 스스로 나팔을 불며 자선 행위를 동네방네 떠벌리려고 안간힘을 쓰는 자들, 사람들 눈에 잘 띄는 회당이나 길모퉁이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는 자들, 그리고 침통한 표정으로 단식하며 자신의 거룩함을 드러내기를 좋아하는 자들을 두고 예수님께서는 위선자라고 부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보이려는 노력 대신에, 하느님께 보이려고 노력하도록 주문하십니다. 그것은 반대로 사람들에게 드러내지 않으려는 행동들과 연관됩니다. 자선을 베푼 사실을 숨기고, 사람들 눈에 띄지 않는 골방에 들어가서 기도하며, 머리에 재를 뿌리는 대신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어 단식하는 티를 내지 않는 모습이야말로 숨은 일도 보시는 하느님께 진정한 자선이요 기도며 단식이 된다는 것입니다.
남들에게 인정받고 싶고, 사랑받고 싶으며, 잘 보이고 싶은 욕구가 왜 없겠습니까? 이를 반드시 나쁘다고 말할 수도 없는 노릇입니다. 다만 하느님께 인정받고, 사랑받으며, 잘 보이고 싶은 욕구도 과연 우리에게 있는지 자문하여 보았으면 합니다. 만일 그러한 욕구가 더 크게 자리하고 있다면, 우리는 티 내지 않는 선행을 실천할 동력을 충분히 가진 것입니다. 사람들 눈만 의식하지 말고, 숨은 일도 보시는 하느님 눈도 의식하며 살아야 합니다. 하느님 눈치도 살피는 신앙인이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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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박형순 바오로 신부님]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하는 의로움은 의로움이 아니며,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고자 행하는 자선은 자선이 아닐까요? 누구나 다 알아볼 수 있게 자선을 베푼다면, 그것은 거짓된 자선일까요?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이려고 하는 기도는 기도가 아니며, 단식을 알리면서 하는 단식은 헛된 단식일까요?
이것도 의로움이며 자선이고, 기도이며 단식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눈에 보이게 행한다고 하여 그 의로움이, 자선이, 기도가, 단식이 아니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행위의 정의가 아닌, 그 행위를 통하여 얻는 상의 질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받은 상’과 아버지에게 ‘받을 상’의 차이를 알려 주십니다. 사람들에게 ‘받은 상’은 현재적이고 즉각적입니다. 의로움을 행하였을 때, 사람들의 반응이 바로 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바로바로 보람을 느끼고 기분도 좋아집니다.
그러나 아버지에게 ‘받을 상’은 어떤가요? 그 상은 현재가 아닌, 나중을 위한 상입니다. 사람들이 알아 주지 않습니다. 마음은 뿌듯할 수 있지만, 내 행위가 인정받지 못한다는 아쉬움도 들 수 있습니다. 좋은 일, 착한 일을 하고 오해를 받을 수도 있습니다.
아버지에게 ‘받을 상’보다 사람들에게 ‘받은 상’이 더 좋아 보입니다. 그것이 솔직한 우리들의 마음이지요.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에게 ‘받을 상’이 더 좋은 상이라고 알려 주십니다. 그 말씀을 마음에 새겨봅시다.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로 여겨지고 빠르고 즉각적인 것을 추구하는 세상에서, 그래도 한 번쯤은 예수님 때문에 세상의 가치를 거스르며, 보이지 않는 아버지를 생각하고 아버지에게 ‘받을 좋은 상’을 생각해 보면 어떨까요?
나를 보는 사람이 아니라 숨어서 나를 바라보아 주시는 아버지를 우리가 함께 바라보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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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윤용선 바오로 신부님]
우리는 오늘 복음말씀 안에서 세 가지 단어를 접하게 됩니다. 즉, '자선', '기도', '단식'이 그것입니다.
유대교에 의하면, 자선을 베풀고, 기도하고, 단식하는 자는 율법의 위반을 속죄할 수 있고 더 나아가 특별한 공로를 쌓을 수 있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왜냐하면 자선과 기도와 단식은 율법이 요구하는 바를 훨씬 능가하는 것으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세 가지는 경건한 유대인을 나타내는 특별한 표지이기도 하였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이 세 가지에 대해 간단히 알아보기로 합시다. 유대교에 따르면, 가난한 사람을 특별하게 돌보는 '자선'은 매 주일 각기 다른 장소에서 필요한 금전과 물품을 제공함으로써 실천되었고, 금전과 물품이 공정하게 배분될 수 있도록 배려했습니다.
이 외에도 개별적으로 가난한 사람을 돌보는 일을 높이 평가하며, 자선을 실천하는 사람은 하느님의 일을 실천하는 사람이라고 보았습니다.
'기도'에 있어서는, 구약의 시편뿐만 아니라 후대에 저술된 유대교의 문헌들 역시 기도를 매우 진지하게 그리고 전심전력을 다해 실천하라고 촉구하고 있습니다. 기도를 통해 인간은 하느님을 계속 그리고 영원히 찬미하게 된다고 보았습니다.
그리고 유대교에 있어서 '단식'은 속죄의 힘을 지닌 것으로서 공식적으로 규정된 단식 혹은 개인적인 단식을 통해 이스라엘 민족은 그들이 저지른 죄악에 대한 하느님의 진노를 막게 되고, 그 결과 이스라엘 민족은 불행으로부터 보호받게 된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세 가지 선업, 즉 자선과 기도와 단식은 그 당시에도 그러했거니와 지금에 와서도 좋은 것으로서 어떠한 경우에도 실천되어야 할 내용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의 복음말씀은 우리에게 이렇게 필요하고 실천되어야 할 선업들이 있다는 것을 소개하는 단계에 머물고 있습니까? 그것은 아닙니다. 오늘의 말씀에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려는 내용은 이 세 가지 선업의 소개가 아니라, 이들을 어떠한 자세로 행해야 하는지, 즉 '올바른 자세로써의 실천'을 전하려 하십니다.
올바른 자세로써의 실천이란, '나를 드러내기 위함 때문'이 아니라 오로지 '하느님 때문'에 실천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오늘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러기에, '위선자들처럼 하지 말라'는 말씀이 계속 반복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위선자들에게 해당되는 잘못된 자세들이 오늘의 말씀 안에서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남들이 보는 앞에서의 행동', '칭찬을 받으려는 행동', '스스로 나팔을 부는 자세', 남에게 보이려고 하는 행동' 등이 그것입니다.
이러한 자세들은 바로 위선자들의 자세로서, '하느님 때문'이 아닌 '나를 드러내기 위함 때문'의 자세라는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잘못된 자세 때문에, 비록 그것이 선업의 실천일지라도 아무런 의미나 효과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살아가며 실천해야 할 선업들이 많이 있습니다. 참으로 누구라도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는 선업들입니다.
그러나 실천에 앞서 더욱 중요히 생각해야 할 면은 그 자세입니다. 어떤 자세로써 내가 이 선업들을 실천하려는 지를 다시금 생각케 하는 오늘의 복음말씀이었습니다.
여러분들께서 하느님 때문에 행하는 선업들을 통해 받게 되는 보상이 있길 바랍니다. 그 보상이란 다름 아니라, 바로 '하느님 자신을 찾아 얻게 되는 기쁨'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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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하느님의 시선을 의식하라>
순수한 의향을 가지고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 아름답습니다. 최선을 다했을 때 결과에 구애 받지 않습니다. 우리는 성공으로 부름을 받은 것이 아니라 최선을 다하는 것으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결과가 아무리 좋아도 의향과 과정이 바람직하지 않다면 추합니다. 의학이 발달한 요즈음 M.R.I 를 통해 사람의 곳곳을 들여다볼 수 있습니다. PET-CT를 통해 암을 찾아내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사람의 마음은 들여다볼 수 없습니다. 아마 사람의 마음을 그렇게 들여다볼 수 있다면 많은 이들의 태도가 달라질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주님께서는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보시는 분이십니다.
받으려 노력하지 않아도 주어진 몫에 최선의 노력을 다하면 상은 주어지는 것입니다. 최선을 다하는 그 모습자체가 바로 상입니다. 남에게 잘 보이려고 하거나 허풍을 떨어서는 숨은 일도 보시는 아버지 하느님 앞에 부끄러움만 더할 뿐입니다. 사람들로부터 칭찬을 듣고 은인이라는 소리를 들을지언정 그것은 세상의 상일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늘의 것을 추구하고 하늘로부터 오는 상을 받아야 합니다. 세상의 것은 결국 모두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약속된 천상을 지향하고 지금 여기서부터 그 삶을 살아야 합니다. 아는 척, 가진 척, 잘난 척, 있는 척해봐야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겉치레는 구원에 아무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기도하든, 자선을 베풀든, 단식하든 그 자체가 아름다움이 되도록 해야 합니다. 기도는 하느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자선은 이웃과의 관계를 회복하며 단식은 나 자신과의 관계를 회복하게 합니다. 그런데 기도나 자선, 단식하면서 사람의 시선을 의식할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시선을 의식해야 관계가 회복됩니다. 사람의 시선을 의식하면 마음이 갈라집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시선을 명확히 하면 숨은 일도 보시는 아버지께서 갚아주실 것입니다. 우리의 선행이나 악행이 M.R.I보다 더 정확한 주님의 마음에 찍힌다는 것을 생각하면 감히 나의 처신을 함부로 할 수 없는 법입니다. 지금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 아름답고, 그리고 최선을 다하다 보면 주님의 상급이 주어질 것입니다. 상을 보지 말고 지금 할 수 있는 것에 마음을 쏟을 수 있으면 그것이 기쁨입니다. 지금 내가 하는 모든 것이 결코 남에게 잘 보이려고 하는 일이 아니기를 기도합니다. 그리고 오로지 주님 마음에 드는 것으로 감사할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길 희망합니다.
“성인은 숨어서 남모르게 일한다.”라고 했습니다.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는 것입니다. “외적인 드러남을 중시하는 사회에서 심지어 의로운 일마저 드러내려고 하는 시도를 자제할 수 있어야 합니다”(함께야). 우리는 사람들의 시선을 신경 쓰기에 앞서 하느님의 시선을 마음 안에 간직해야 합니다. 공연한 인간적 명성은 참된 길을 방해하는 요소로 작용하게 됩니다. 숨은 일도 보시는 하느님의 시선을 느끼는 하루가 되기를 희망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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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공부는 참 어렵습니다. 그런데 이 공부는 언제까지 하는 것일까요? 배워도 배워도 끝이 없다는 말을 많이 합니다. 즉, 철들어서 배우기 시작한 다음부터 죽을 때까지 고삐를 늦추지 말고 공부해야 하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아무리 공부해도 누가 알아주지도 않고, 얼마나 진보했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공부하면 할수록 더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공부의 어려움이 더 드러나게 됩니다.
그렇다면 공부의 보상은 무엇일까요? 단순히 좋은 성적을 맞아 좋은 대학에 가고, 좋은 직장에 들어가는 것일까요? 이는 공부에 대한 좁은 생각입니다. 공부는 인생을 뜻있게 사는 데 가장 중요한 요소입니다. 알면 알수록 바른길로 나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공부라는 것은 자기 자신을 위해서 필요합니다. 누구에게 보여 주기 위한 것도 아니고, 자랑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저는 책을 많이 읽습니다. 남에게 보여 주기 위해 책 읽는 것이 아닙니다. 열심히 살고 남과 다른 삶을 산다는 것을 자랑하기 위함도 당연히 아닙니다.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지혜를 얻게 되고, 조금씩 성장하는 저 자신을 발견하기 때문입니다. 다른 이의 시선이 어떻게 되든 상관없습니다. 스스로 기쁘고 즐겁고 행복하기에 책을 읽습니다. 만약 남의 시선만을 생각한다면 항상 사람이 많은지를 볼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마음으로 과연 책이 눈에 들어올까요? 사람만 눈에 들어올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예전부터 유다인이 실천하고 있었던 종교적인 신심을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자선을 베푸는 것, 기도하는 것, 단식하는 것이었습니다. 유다인은 이를 율법을 넘어선 한 단계 위의 선행이라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래서 이를 통해 하느님으로부터 특별한 보상을 받고, 율법을 잘못 지킨 데 대한 보상도 얻을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심판 때, 이 공로로 다른 사람을 도울 수도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자체로 잘못되지 않았습니다. 분명히 우리가 실천해야 할 자선, 기도, 단식입니다. 문제는 남에게 보이기 위한 실천이라는 것입니다. 이를 예수님께서는 나쁘다고 경계하십니다. 자기 이름을 드러내기 위한 행동이라면 이를 위선자라고 하십니다. 우리를 위해 필요한 자선, 기도, 단식이지만, 다른 사람의 시선에 집중하다 보니 이 덕행이 주는 은총을 누릴 수가 없게 됩니다. 숨은 일도 보시는 하느님께서 갚아주실 것인데, 남의 시선만 신경 써서 덕행을 제대로 실천할 수 없어서 은총을 받을 수 없는 것입니다.
자선, 기도, 단식은 우리를 위해 필요한 덕목입니다. 그러나 그 자체의 의미를 잘 알고 제대로 따라야 합니다. 그래야 그 은총을 충만히 누릴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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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보이는 나 앞서 있는 나>
마태오 6,1-6.16-18 (올바른 자선, 올바른 기도, 올바른 단식)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의로운 일을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그러지 않으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에게서 상을 받지 못한다. 그러므로 네가 자선을 베풀 때에는, 위선자들이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듯이, 스스로 나팔을 불지 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들은 자기들이 받을 상을 이미 받았다. 네가 자선을 베풀 때에는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라. 그렇게 하여 네 자선을 숨겨 두어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 주실 것이다.
너희는 기도할 때에 위선자들처럼 해서는 안 된다. 그들은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이려고 회당과 한길 모퉁이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한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들은 자기들이 받을 상을 이미 받았다. 너는 기도할 때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은 다음, 숨어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여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 주실 것이다.
너희는 단식할 때에 위선자들처럼 침통한 표정을 짓지 마라. 그들은 단식한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이려고 얼굴을 찌푸린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들은 자기들이 받을 상을 이미 받았다. 너는 단식할 때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어라. 그리하여 네가 단식한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이지 말고, 숨어 계신 네 아버지께 보여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주실 것이다.”
<보이는 나 앞서 있는 나>
난 말이야
하느님과 내가
함께 빚은
나란 말이지
그래서 이렇게
내가 있거든
내가 있으니
내가 보이기는
할 테지만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내가 있는 만큼
내가 보이면
참 좋겠어
하지만
내가 있는 만큼
내가 보이지 않는다면
그래도 괜찮아
내가 보이지 않아도
나는 있는 거니까
그러니 괜히
어떻게든 보이려고
애쓰지 말고
하느님과 내가
함께 빚은
고운 나로 있자고
있음에 오롯하지 않으며
보임에 기웃거린다면
하느님과 나를
부끄럽게 여기는 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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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문을 열자>
문을 닫으면 아무것도 들어올 수 없습니다. 문을 열면 고통이 들어올 수 있습니다.
그래서 문을 닫으면 고통이 들어오지 않지만 그다음으로 들어올 은총도 들어올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문을 엽시다. 고통이 들어오면 그것을 은총으로 만들고, 은총이 들어오면 그것으로 사랑을 만들고, 사랑이 들어오면 그것으로 선행을 실천합시다.
오늘 주님은 자선에 대해서 말씀하시고, 바오로 사도는 선행에 대해서 말하는데, 선행은 사랑에서 오고 사랑은 하느님에게서 옵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씨를 뿌려야 거두고, 많이 뿌려야 많이 거둔다고 얘기한 다음 하느님은 "씨 뿌리는 사람에게 씨앗과 먹을 양식을 마련해 주시는 분"이라 합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에게 모든 은총을 넘치게 주실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여러분은 언제나 모든 면에서 모든 것을 넉넉히 가져 온갖 선행을 넘치도록 할 수 있게 됩니다."라고도 얘기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자문을 합니다. 나는 언제나, 모든 면에서, 모든 것을 넉넉히 가지고 있고, 넉넉히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가? 넉넉히 가지고 있지도 않고, 넉넉히 가지고 있지 않다고 생각하는가?
넉넉히 가지고 있지 않다면 하느님께서 주시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가? 주셔도 받지 않았거나 주시는 분이라고 믿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가?
우리가 넉넉지 않다면 그것은 곳간의 문을 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넉넉히 주시고자 하나 우리가 문을 열고 받지 않았기 때문이고, 열지도 받지도 않은 이유는 하느님께 바라지도 믿지도 않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자신을 믿었던 것이고, 자신이 가지려고 했던 것이며, 그래서 넉넉지 못했던 것이고, 그래서 나누지 못하는 겁니다.
그래서 다시 문을 열자고 말씀드립니다. 열린 문으로 하느님의 사랑도 받고 열린 문으로 이웃에게 사랑을 나눕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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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하느님 중심의 삶>
-무욕의 맑고 향기로운 섬김의 삶-
"내 마음이 당신을 향하여 있사오니,
주여, 이 종의 영혼에게 기쁨을 주소서."(시편 86,4)
요즘 은은하고 그윽한 자귀나무꽃 향기가 한창입니다. 대추꽃 향기도 이와 비슷합니다. 꽃보다 향기맡고 찾아내는 꽃입니다. 멀리까지 그 향기가 미칩니다. 해마다 이맘때쯤이면 피어나는 자귀나무꽃말은 ‘가슴 두근 거림’, ‘환희’로 며칠전 써놓은 시가 생각납니다.
“자귀나무꽃
향기맡고
찾아내는 꽃
한참가다
향기맡고 뒤돌아 보는 꽃
자귀나무꽃
존재의 향기
생명의 향기
사랑의 향기
겸손의 향기
당신은 이런 분이시다
이런 사람이 되고 싶다”
오늘 말씀 묵상중 떠오른 시가 참 반가웠습니다. 참으로 하느님 중심의 삶을 살아가는 무욕의 맑고 향기로운 사람을 상징하는 듯 했습니다. 꽃마다 향기가 있듯이 사람에게도 향기가 있습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평생 한결같이 하느님 중심의 무욕의 삶을 살아가는 이들에게서는 그리스도의 향기가 납니다. 자귀나무꽃처럼 존재의 향기, 생명의 향기, 사랑의 향기, 겸손의 향기를 발산합니다. 은은하고 그윽한 그리스도의 향기입니다.
바로 오늘 기념하는, 꽃다운 23세 나이에 애덕활동중 병사病死한 예수회 신학생 성 알로이시오 곤자가가 그러합니다. 1585년 예수회에 입회하여 신학공부에 전념하던 차, 4년째 되던 해 1590년 로마 전역에 페스트가 퍼졌고, 헌신적으로 병자들을 간호하다 이듬해 3월초 자신도 페스트에 전염되어 같은 해 6월21일 23세의 젊은 나이로 선종합니다.
-성 알로이시오는 신중하고 분별력있게 모든 일을 잘 처리하는 뛰어난 학생이었습니다. 그는 수도생활을 하면서 자신의 악습들을 극복하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기울였으며 자신의 자존심과 이기심을 이기기 위한 수련을 끊임없이 실천했습니다.
그의 시성 절차는 빠르게 진행되어 1605년 교황 바오로 5세에 의해 시복되었고, 1726년 교황 베네딕도 13세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고 청소년의 수호성인으로 선포됩니다. 다음 임종 얼마전 어머니께 드린 편지도 얼마나 하느님 중심의 철저한 효심깊은 삶이었는지 감동적이라 그 일부만 인용합니다.
“존경하올 어머니, 성령의 은총과 끊임없는 위로를 누리시길 빕니다. 어머니이 편지가 제 손에 닿았을 때 저는 아직도 산 이들의 땅인 이 세상에 있었습니다. 이제 심혈을 기울여 산 이들의 나라에서 영원하신 하느님을 찬미할 수 있는 천국을 갈망해야 합니다. 저로써는 벌써 그곳에 가 있고 싶었고 이미 그곳으로 여행을 떠난 줄로 진정코 생각했습니다.
존경하올 어머니, 어머니와 우리 온 가족이 제 죽음을 하느님의 기쁜 선물로 생각해 주십사고 간절히 희망하면서 이 모든 말씀을 드립니다. 제 희망의 성취인 그 항구를 향해 바다를 건너가는 동안 어머니께서 저를 친히 축복하시어 보호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아들로서 어머니께 바쳐야 하는 존경과 사랑을 더 확실히 보여 드릴 방도가 없기에, 어머니께 기꺼이 이 편지를 쓰게 된 것입니다.”-
놀랍습니다. 20대 초반에 이런 성덕에 도달해 있다니 성덕은 나이에 무관함을 느낍니다. 아무리 오래 살아도 하느님 중심이 아닌 자기 중심의 이기적 삶을 산다면 성덕은 요원할 뿐이겠습니다.
어제의 깨달음의 은총과 더불어 물리치료를 받게 된 감사한 사실도 나누고 싶습니다. 나름대로 주님의 전사로서 하느님 중심의 삶을 살려고 노력했는데 수행생활에 허점이 있었던 듯 81.5kg 과체중이 되었습니다. 어쨌든 하느님 중심의 수행생활에 소홀했음이 분명합니다. 34세 수도원 입회시 62kg 이었는데 몇년후 68kg, 그리고 평균 74kg을 유지하던중 60대 중반을 넘어 80kg을 넘게 된 것입니다. 예전 초등학교 교편시절이나 서품때 사진은 지금과는 판이합니다.
법정 스님의 수행자는 출가시 체중을 유지해야 한다는 말씀을 들을 때는 늘 부끄러움을 느꼈습니다만, 어제 뜻밖에 수도원 정원에서 봉사하는 참으로 하느님 중심의 삶에 한결같은 저보다 2세 연상의 세례자 요한 형제가 제가 대접한 배즙을 계기로 이야기가 전개되어 약 보름간 체중감량을 위한 집중적 물리치료를 해주겠다 하여 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원장수사에게 알렸더니 다음과 같은 짧은 답신도 받았습니다.
“최고입니다. 하느님 뜻입니다.”
하느님 중심의 무욕의 삶이 참으로 아름답고 매력적이며 맑고 향기롭습니다. 우리의 모든 수행이 결국은 하느님 중심의 삶을 확고히 하기 위함입니다. 바로 오늘 주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전통적인 수행인 자선과 기도, 단식을 통해 하느님 중심의 수행의 진수眞髓를 보여줍니다. 자기 중심의 수행과 하느님 중심의 수행이 극명한 대조를 이룹니다.
1.“네가 자선을 베풀때에는, 위선자들이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듯이 나팔을 불지 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들은 자기들이 받을 상을 이미 받았다.”
“네가 자선을 베풀때에는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라. 그렇게 하여 네 자선을 숨겨 두어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아 주실 것이다.”
올바른 자선에 대한 구체적 가르침이자 깨우침이 되는 만고불변의 진리입니다. 불가의 성철 스님이 극찬했던 내용입니다. 인색함보다 추한 것은 없습니다. 인생 노년에 노욕에 인색함까지 더한다면 참으로 부끄러운 일입니다. 숨겨진 자선의 선행은 하늘에 보물을 쌓는 일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코린토 교회 신도들에게 이런 자선의 실천을 강력히 권고합니다.
“하느님께서는 기쁘게 주는 이를 사랑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에게 모든 은총을 넘치게 주실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여러분은 언제나 모든 면에서 모든 것을 넉넉히 가져 온갖 선행을 넘치도록 할 수 있게 됩니다. ‘그가 가난한 이들에게 아낌없이 내주니, 그의 의로움이 영원히 존속하리라.’ 성경에 기록된 그대로입니다.”
부익부 빈익빈의 진리가 영적 현실에도 그대로 통하니 바로 자선의 수행을 통해서입니다. 날로 내외적으로 부유해지는 하느님 중심의 자선의 삶입니다.
2.“너희는 기도할 때에 위선자들처럼 해서는 안된다. 그들은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이려고 회당과 한길 모퉁이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한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들은 자기 들이 받을 상을 이미 다 받았다.”
“너는 기도할 때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은 다음, 숨어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여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아 주실 것이다.”
3.“너희는 단식할 때에 위선자들처럼 침통한 표정을 짓지 마라. 그들은 단식한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이려고 얼굴을 찌푸린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들은 자기들이 받을 상을 이미 받았다.”
“너는 단식할 때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어라. 그리하여 네가 단식한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보이지 말고, 숨어 계신 네 아버지께 보여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아 주실 것이다.”
자기 중심과 하느님 중심의 수행이 얼마나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지요! 침통함, 심각함, 우울함은 결코 영성의 표지가 아닙니다. 사람들에게 감쪽같이 자연스럽게 숨겨진 수행이 제일입니다.
자기 중심의 삶의 특징이 분명히 드러납니다. 무지하고, 외적이고, 육적이고, 부수적이고, 얕고, 닫혀있고, 드러나 있고, 허영, 교만으로 요약됩니다. 표리부동, 외화내빈의 삶이요, 주객전도, 본말전도의 무지에 눈먼 알맹이가 아닌 껍데기의 삶입니다. 결코 무지와 허무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결코 악순환의 늪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세상에, 우상에, 이기적 가아假我에 노예된 삶입니다. 아, 이건 사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을 잊으니 저절로 나도 잊습니다. 완전히 뿌리없이 표류하는 좀비같은 유령같은 삶입니다.
반면 하느님 중심의 삶은 참사람이, 성인이, 하느님의 자녀가 되게 합니다. 지혜롭고, 내적이고, 영적이고, 본질적이고, 깊고, 하느님과 이웃과 나에 활짝 열려있고, 숨겨져 있고, 진실, 겸손으로 특징지어 집니다. 말그대로 무욕의 맑고 향기로운 삶이요 아름답고 매력적인 삶에 존재의 향기, 생명의 향기, 사랑의 향기, 겸손의 향기를 발산하니 그대로 그리스도의 향기요 천리향, 만리향같은 존재들입니다.
이런 이들이 진정 신비가요 관상가요 영성가요 각자覺者요 현인이요 내적 자유에 내적 부요의 참행복한 사람들입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여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하늘 나라를 사는 이들입니다. 하느님 중심의 부단한 수행과 더불어 마음의 순수요 자유로움입니다. 그러나 자유는 최종 목적이 아니라 사랑의 섬김입니다. 하느님과 이웃을 위한 사랑의 섬김에서 비로소 완성되는 참 자유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영적 삶은 은총이자 선택이자 훈련이자 습관입니다. 두말할 것 없이 하느님 중심의 삶을 선택하여 이에 따라 자선, 기도, 단식은 물론 모든 수행의 부단한 자발적 훈련을 습관화하시기 바랍니다. 날로 주님을 닮아 참나의 실현이 이뤄질 것이며 날마다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결정적 도움을 줍니다.
"하느님 내 주시여,
이 마음 다하여 감사하리이다.
영원토록 당신 이름을 찬양하리이다." (시편86,12).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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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 주실 것이다."(마태6,4.6.18)
<기쁘게 내어주자!>
오늘 복음(마태6,1-6.16-18)은 '올바른 자선'과 '올바른 기도'와 '올바른 단식'에 대한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사순시기의 시작을 알리는 '재의 수요일' 때 매년 듣는 말씀입니다. 자선과 기도와 단식에 관한 말씀의 핵심은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 주실 것이다."입니다. 그리고 그 대전제는 '나의 거룩한 행위를 드러내지 말고 감추라는 것'입니다.
"네가 자선을 베풀 때에는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라."(6,3)
"너는 기도할 때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은 다음, 숨어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여라."(6,6)
"너는 단식할 때에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어라."(6,17)
자선과 기도와 단식은 신앙인들의 기본 활동이자 구원활동입니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주님을 만나는 것이 '기도'요, 그 기도의 힘으로 내 안에 자리잡고 있는 악의 모습들을 끊어내는 것이 '단식'이요, 그 결과로 이어지는 구체적인 사랑의 모습이 '자선'입니다.
오늘 독서(2코린9,6ㄴ-11)에서 사도 바오로는 말합니다.
"적게 뿌리는 이는 적게 거두어 들이고 많이 뿌리는 이는 많이 거두어 들입니다. 저마다 마음에 작정한 대로 해야지, 마지못해 하거나 억지로 해서는 안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기쁘게 주는 이를 사랑하십니다."(9,6-7)
이번에 지어진 배둔성전은 바로 이러한 마음을 지닌 많은 하느님의 자녀들이 보내주신 기도와 단식과 자선의 힘으로 지어진 하느님의 성전입니다.
오늘 우리가 기억하는 청소년들의 수호성인이신 '성 알로이시오 곤자가 수도자'는 예수회 신학생으로서 1591년 로마 전역에 흑사병이 퍼졌을 때 그들을 정성껏 돌보다가 감염되어 젊은 나이(23세)에 선종하셨습니다.
기쁘게 내어줍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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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Yg7qKLQoNF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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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1)
"네가 자선을 베풀 때에는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라."(마태 6, 3)
우리 마음의
손길은
어디에 있습니까.
삶을 바로
잡아주는
자선입니다.
가장 뜨거운
사랑의
손길이란
아무도 모르게
베푸는 사랑의
손길입니다.
아무도 모르게
우리를
도와주시는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우리만 모르는
하느님의
자비였습니다.
자선은
하느님의
것입니다.
도와주는 것이
서로를 키우는
완성된 사랑임을
깨닫게 됩니다.
아무도 모르게
베푸는 자선으로
우리의
가난한 마음과
참된 평화를
만나게 됩니다.
막혀있는 세상을
다시 흐르게
하는 자선의
엄청난
힘입니다.
자선은
구원의
길입니다.
평등한 사랑의
실천이며
이웃을
이롭게 하는
참된 나눔입니다.
그래서
자선은 서로를
살필 줄 아는
진정한
마음입니다.
살필 줄 아는
마음이 서로를
살리는 사람의
참된 마음입니다.
자선은
따뜻한
말 한마디에서
시작되는
관심입니다.
무관심은
단절과 불통을
낳지만
자선은
사랑과 소통
자립을 낳습니다.
주는 이가
받는 이고
받는 이가
주는 이입니다.
아무도 모르게
베푸는 자선으로
우리의 세상
우리의 삶은
더욱
아름다워집니다.
우리의 손길
우리의 실천 또한
이와 같기를
기도드립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자비가 언제나
더 클 뿐입니다.
자선도
기도도
단식도
하느님께 올리는
우리의 진실한
마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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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 주실 것이다.”
우리는 외롭지 않습니다. 가장 좋으신 주님께서 우리의 외로움까지도 갚아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갚아 주시는’ 주님의 마음에서 따뜻한 사랑을 만납니다. 모든 길과 자리는 주님께서 함께 계시며 갚아 줄 넘치는 사랑입니다.
향기로운 주님의 말씀입니다. 무엇이 신앙의 참된 자세인지를 제대로 일깨워주시는 말씀입니다. 메마른 우리 영혼을 위해 주님께서는 자선과 단식, 기도를 선물로 주셨습니다.
척박한 우리 영혼을 자라게 하는 것은 자선과 단식, 기도입니다. 이렇듯 자선과 단식, 기도를 통해 우리는 지금 이순간이 얼마나 큰 주님의 은총인지를 다시 만나게 됩니다.
주님 은총없이는 한 발짝도 내딛을 수 없는 우리의 삶입니다. 원래 우리가 존재해야 할 자리는 주님께서 이끌어가시는 은총의 자리입니다.
어찌보면 매순간이 은총입니다. 아름다운 영혼은 언제나 은총을 먼저 기억합니다. 궂은 일도 좋은 일도 주님께서 다 갚아 주십니다. 이와 같이 모든 시간의 중심에는 주님께서 계십니다.
가장 아름다운 순간은 이와같이 자선과 단식, 기도라는 사랑의 순간입니다. 멈출 수 없는 것이 사랑이기에 숨은 일도 보시는 하느님께 사랑으로 갚아 주실 것을 겸손되이 청해봅니다.
삶을 빛나게 하는 것은 자선과 단식, 기도라는 사랑입니다. 이미 충만하고 풍요롭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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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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