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리한 집사와 천국의 시민권
필리 3,17-4,1; 루카 16,1-8 / 연중 제31주간 금요일; 2024.11.8
가을이 깊어지더니 입동이었던 어제부터는 새벽녘에 기온이 영하로 떨어지면서 겨울 기운이 느껴집니다. 그러자 새벽 이슬은 서리가 되어 농작물에 내려 앉고 있습니다. 이때가 되면 농부는 애써 키운 농작물이 얼어 죽지 않도록 서둘러 수확해야 합니다. 무우나 배추 같은 가을 채소가 귀한 대접을 받는 때입니다. 이런 가을 채소로 김장을 담그면 겨우내내 우리네 밥상을 풍요롭게 해 줍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서릿발 같은 말씀으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는데, 바로 '영리한 집사'의 비유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여기에 한 술 더 떠서 '천국의 시민론'을 설파하였습니다.
고대 로마 제국에서 시민권은 노예 같은 비시민들에 비해서 특권을 보장해 주었습니다. 납세와 국방의 의무를 이행하면 로마 시민은 공직에도 나아갈 수 있고, 국가의 법적 보호를 보장받을 수 있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유다인으로서 그의 부모가 로마의 시민 자격을 얻었기에 그도 로마 시민권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유다인들로부터 고발을 당했을 때 로마 황제가 주관하는 재판을 요구할 수 있었고, 그래서 고발당한 예루살렘에서 로마로 이송될 수 있었으며 그 결과로 복음이 로마로 전파되는 계기를 마련할 수 있었습니다.
로마 제국의 체제를 모방한 현대 미국에도 시민권 제도가 이와 유사해서, 오늘날에도 미국의 시민권자가 되는 일은 전 세계에서 미국을 동경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선망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고대 로마제국에서나 현대 미국에서 시민권자가 되는 가장 큰 조건은 국가에 대한 충성을 서약하고 그 증거로서 납세와 국방과 공직 봉사 등의 기본 의무를 이행하는 일입니다. 그러니 세금을 납부하지 않거나 국방의 의무 이행을 거절하거나 공직을 맡아서 사리사욕으로 채우는 기회로 삼는 행위는 스스로 국가와 시민 사회에 대한 충성심이 없음을 반증하는 것이어서 시민권이 박탈되어야 하는 사유에 해당합니다.
오늘 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그가 그토록 아끼고 사랑하는 필리피 교우들에게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당부를 하는 가운데 천국의 시민권에 대해서 권고하고 있습니다: “형제 여러분, 다 함께 나를 본받는 사람이 되십시오. 여러분이 우리를 본보기로 삼는 것처럼 그렇게 살아가는 다른 이들도 눈 여겨 보십시오. 내가 이미 여러분에게 자주 말하였고 지금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는데,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들의 끝은 멸망입니다. 그들은 자기네 배를 하느님으로, 자기네 수치를 영광으로 삼으며 이 세상 것만 생각합니다.”(필리 3,17-19) 다른 공동체의 교우들에게는 차마 하기 어려운 이야기를 진정성 있게 털어 놓고 있는 것을 보면, 필리피 교우들과 사도 바오로는 서로 깊이 신뢰하는 사이였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에 반해서 당시의 세태는 신앙에 대한 무관심을 넘어 반신앙적으로 살아가고 있었고, 자기네 배를 하느님으로 삼고 자기네 수치를 영광으로 삼는 어리석은 자들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한 마디로 천국이 아닌 지옥이 판을 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필리피 교우들에게 천국 시민론을 설파합니다. 하늘의 시민이므로 시민권자답게 처신하라는 당부는 로마 시민권자로서, 아직 그 당시까지는 그 권리를 꺼내 들지 않고 있던 그가, 평소에 인식하고 있던 시민의 의무와 권리를 짐작하게 해 줍니다. 즉, 천국의 시민으로 인정받고 있던 필리피 교우들은 천국에 대한 충성을 서약한 이들로서 그로 말미암은 기본 의무를 성실하게 이행하고 있던 그리스도인들이었던 겁니다.
그런데 이미 예수님께서는 천국에 대한 충성과 의무 이행으로 하느님께 충실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신 바 있습니다. 그것이 오늘 복음 내용으로서, 약은 집사의 비유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불의하고 부당한 사회 현실을 직접 고발하는 일회적 처방을 내리시는 대신에, 이를 에둘러 비판하는 의미에 더하여 하느님과의 관계에 적용하는 근본적 처방을 내리신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회적으로는 ‘불의한’ 행실을 저지른 집사가 하느님 앞에서는 ‘약은’ 처신을 감행한 집사로 바뀝니다. 시민권자로서의 충성 서약과 의무 이행을 실천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역설적인 반어법으로써 근본적인 처방을 내리신 이유는 그동안 당신의 복음을 듣고 기적까지 목격하면서도 뜨뜻미지근한 반응만 보이던 군중에 대해서 답답하셨던 심경을 드러내신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의 자녀들이 저희끼리 거래하는 데에는 빛의 자녀들보다 영리하다.”(루카 16,8)고 푸념하듯 말씀하신 것만 보아도 어렵지 않게 그분의 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을 믿지 않는 이 세상의 사람들이 자기네 뱃속을 하느님으로 알거나 수치스러운 줄도 모르고 거리낌 없이 죄를 도모할 때에는 더 영리할 뿐만 아니라 독창적이기까지 하지요. 오늘날 요청되는 복음적 교회 쇄신에 있어서도 그 사정은 별로 다르지 않습니다. 저마다 위로부터 기운과 도움이 주어지기를 기대합니다. 그렇게 편하게 천국의 시민권이 얻어질 것 같지는 않은데도 그렇습니다. 그보다는 합리적이면서도 정성스러운 실사구시적 태도가 교회 쇄신이나 복음화 과업에 더 절실하게 필요합니다.
교우 여러분!
우리에게 주어진 인생은 누구나 단 한 번뿐입니다. 그리고 그 인생의 현재는 오늘 하루이고, 이 하루라는 시간은 우리가 만들고 가꾸고 발전시킬 수 있는 천국의 공간적 범주를 정해 줍니다. 이 시공을 우리가 복음적으로 바꾸고자 한다면 얼마든지 우리는 천국의 시민으로서 행세할 수 있습니다. 탈렌트의 비유에서 자기 재능을 썩히고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는 이에게 예수님께서는 그저 ‘게으른 종’이라고만 부르신 것이 아니고 ‘이 악하고 불충한 종’이라고까지 질책하신 까닭을 잊지 마시고, 영리한 처신으로 하늘 나라의 시민이 된 집사를 본받으시기 바랍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늘에서 내리는 된서리를 맞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