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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youtube.com/watch?v=aX6EQUj7Pck
https://www.youtube.com/watch?v=-JKDFvMi2Kk&t=1s
국내 최고의 독일-소련 전쟁 전문가 중 한명인
채승병 카이스트 박사 , 역전다방에도 꾸준히 출연하고 있습니다.
(역전다방은 지금 2차 세계대전 이탈리아-북아프리카 전선 방송 중이고 곧 독일-소련 전쟁 들어갈테니 많이 관심가져주시길 ㅎ)
국내에도 번역된 데이비드 글랜츠의 '독소전쟁사'를 감수하며 여러 오류를 바로 잡기도한 과학 전문가이자 밀덕입니다.
이 분이 25년전쯤 다음에 올렸던
2차 세계대전 - 소련은 미국의 지원,참전이 없었더라도 독일에게 승리했을 것이라는 글이 굉장히 인상적이라 퍼왔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NPqgH0cNI1g
https://www.youtube.com/watch?v=KIRWbaba7pk
지금 쓰는 레포트도 다른 대학 석사나 박사논문을 베끼고 있어서 자괴감이 밀려들고 있는데 여기서도 남의 글 가져오니 참 개인적으로 착잡한 심정이군요.-_-;;;;
하이텔 군사동호회 mil에서 가지고 왔습니다. 작자와 id는 아래 표시되어있구요. 쓰신분의 허락을 받지 못한게 유감스럽군요.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채승병 님에게 더욱 미안해지네요.
[여담] 미국 없이도 소련은 승리했을겁니다
채승병(푸르른날) 2000/05/16 15:24 조회 : 393
안녕하세요, 채승병입니다. ;^)
아래에 미국의 (참전이 아닌) Lend-Lease 프로그램에 의한 지원이 없었더라면
소련이 독일과의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는가..하는 이야기들을 주제로 많은
이야기가 나왔군요. 그런데 이상하게 분위기가 미국의 지원이 없었으면 소련
이 반드시 졌을거라는 방향으로 이야기가 흘러가는군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
지 않습니다. 당시 소련의 능력은 그렇게 간단히 이야기할 수준이 아니었습니
다. 미국의 지원 없이도 결국 소련이 승리했을겁니다.
흔히 잘못된 판단이 내려지는 이유라면 독소전의 세세한 전개과정이 국내에는
많이 알려져 있지 않아서 전반적인 흐름을 바꾼 요인에 대해 체계적인 분석이
된 자료가 별로 없기 때문입니다. 특히 1943년 하반기에 이탈리아에서 전선이
형성된 이후 미국 참전이 본격화된 이후의 상황만 가지고 소련의 역할을 무시
하기 쉬운데 그래서는 안되지요.
소련이 진정한 저력있는 국가라는 말을 할 수 있는 것은, 바로 1941년 여름부
터 1942년까지의 전쟁 초반의 파국적인 상황 속에서도 꿋꿋이 버텨내었다는데
있습니다. 1941년 6월 개전 이래 1942년까지 전황은 독일군 입장에서도 가히
군사적 역량을 모조리 짜낸 상황이었지만, 소련은 그만한 타격을 받고서도 사
실상 "스스로" 전세를 돌려놓는데 성공한 나라입니다.
1941년 6월 당시에 독일군은 17개 기갑사단, 14개 자동차화보병사단을 비롯해
총 120개 사단 이상을 집결했고 7월까지 발칸에 전개되어 있던 사단들까지 불
러들여서 1941년에만 140여개 사단을 동부전선에 밀어넣었습니다. 당시 독일
군은 보병의 경우 제 16 차 전력증강까지 150여개 보병사단을 편성했는데, 이
중에 120 여개 보병사단이 투입되었으니 80% 가 넘는 전력이 투입된 셈입니다.
그리고 기갑부대는 21개 기갑사단 중에 19개 기갑사단에 이르렀고, 나머지 후
방에 잔류한 사단들도 통상의 3개 보병연대가 아닌 2개 보병연대로 편성된 사
단이라든가 해서 동부전선에 투입된 사단들과 단순 비교하기는 그렇습니다.
거기에 공군전력도 개전시에 일선 항공기의 2/3가 넘는 2770대가 이미 투입되
었고, 추가로 계속 증원이 이뤄져서 1941년 말까지는 사실상 80~90%에 가까운
항공기가 동부전선에서 활약하게 됩니다. 독일군 및 기타 추축 동맹국 군대를
모조리 합하면 오히려 당시 병력비는 1:1.4 정도로 독일쪽이 우세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수적으로만 봐도 1941년 독일의 소련 침공은 "영국" 이란 존재를
감안할때 총력을 기울인 작전이었습니다. 그 결과 소련군은 1941년 동안 무려
300만명이 전사 또는 실종, 130만명이 부상을 당하는 참담한 패배에 처했지만
독일군도 70만명 이상의 사상자와, 막대한 물적 피해를 입었다는 사실을 상기
해야 합니다. 이 단계까지는 아직 미국도 본격적인 전시체제로 돌입하지 않았
고 지원도 그다지 별로 없었으니, 이 무시무시한 피해 속에서도 1941년 겨울
독일군을 모스크바, 레닌그라드, 로스토프 앞에서 정지시킨건 오로지 소련의
힘입니다.
여기서 가장 주목해볼만한 점은, 과연 독소전의 향방이 갈라진 시점이 언제부
터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흔히 생각하기는 1942년 스탈린그라드 전투를 통해
독일군의 42년 하계공세가 실패하면서 부터라는 이야기도 많고, 1943년 쿠르
스크 전투까지도 잡는 사가들도 있습니다만, 오히려 근래 사가들 사이에서 공
감대를 넓히고 있는 관점은 1941년 겨울, 모스크바를 지향한 공세가 실패하면
서부터 이미 독일은 한계에 부닥쳤다는 것입니다.
독일군은 1941년 12월 제 4 군이 모스크바 교외까지 이른 후에는 다시는 동부
전선 전체에 걸친 규모의 공세를 전개할 수 없었습니다. 이미 1941년 개전 당
시에 1:1.4 정도로 우세했던 전력비가 소련의 무차별적인 징병으로 2:1 수준
으로 역전되고, 심각한 손실로 수세로 전환하였죠. 이때 소련은 오히려 무모
할 정도였지만, 믿기지 않을 정도로 대규모의 반격작전을 다수 펼칩니다. 볼
코프 전선군과 레닌그라드 전선군의 4개월에 걸친 공세, 브리얀스크 전선군의
오렐 방면의 6주간에 걸친 공세, 북서전선군의1개월간의 공세 등등 지독하게
독일군의 힘을 뺐습니다.
그래서 독일군이 1942년 하계공세로 전환하는데는 무려 반년 가까운 재정비를
필요로 했고, 공세 목표 자체도 1941년과 비교해보면 훨씬 축소된 것이었습니
다. 남부에서의 공세를 위해 북부집단군과 중부집단군의 전력은 심각하게 약
화되었습니다. 중부집단군 같은 경우는 특히나 지속적인 소련군의 공세를 얻
어맞고 보급 순위에서 밀리면서 각 사단 예하에 사단포병이 전무하거나 야전
편제가 2/3 규모 이하로 축소되는 등 참담한 수준이었죠.
또 독일군은당시 하계공세를 위해서 동부전선에 가용 단발전투기 전력의 70%
이상을 집결했습니다. 물론 당시에도 본토방공전의 중요성이 떠오르고 있었기
에 야간전투기 전력의 거의 전부와, 쌍발전투기 전력의 50% 정도가 본토 주변
에 포진해 있던건 사실입니다. 그러나 폭격기 및 대지공격기 전력이 80% 이상
투입되었으니 그것도 당시 독일 체제 하에서는 총력전이라고 봐야했습니다.
사실 그래봤자 당시 독일공군은 당시 운용 가능한 전투기 및 폭격기 전력들이
각기 총 1000여대에 불과했습니다. 극심한 피해 속에서 1940년과 비교해도 전
혀 늘지 않은 전력을 그 광대한 전선에서 쪼개가며 싸워야 했던 것입니다. 그
러다보니 독일군은 42년 경우 초기에 어떠한 집중점(Schwerepunkt)에서 공세
를 시작할 때는 위력을 발휘했지만 전선이 급격히 넓어지면서 공세 중심을 상
실하고 전술공군과 기갑, 포병의 유기적인 협동이 힘들어지는 약점을 이미 심
각하게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1942년 하계공세의 타격을 입었어도 소련군은 여전히 그렇게 대책없이
비틀거리는 존재가 아니었습니다. 1942년 5월 남부전선군과 남서전선군의 제
2차 하르코프 공방전에서의 참패로 큰 전력공백이 생긴 상황에서, 남부전선군
이 다시 한번 대 통격을 당해서 남부의 혼란이 생겼지만 북부와 중부의 전선
에서 소련은 계속 독일을 위협했습니다. 1942년 남부에서 벌어진 그런 혼란의
와중에도 서부전선군은 6월부터 8월까지 독일군을 줄기차게 두들겨댈 전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독일군 하계공세가 그렇게 지속될 수 있었던 것은 스탈린
이 3/4분기 내내 북부와 중부에 예비대를 다수 확보해두길 바랬기 때문이었지
소련군 자체가 전면붕괴 직전에 갔다는 식으로 상상하는건 심각한 오류입니다.
결국 1941년 6월부터 1942년까지, 독일군은 동부전선에 사실상 사력을 다해서
공격을 퍼부었던 것입니다. "영국"이라는 만만치 않은 해양세력을 견제하는데
필요한 전력과, 한참 약체의 2선급 부대 이외에 그나마 제대로 장비 가능했던
부대들은 거의 전부 동부전선의 공세를 위해 투입되었다고 생각해도 될겁니다.
그런데도 독일은 소련을 꺾지 못하고 패배를 했습니다.
아직 미국은 본격적인 대규모의 참전을 하지도 않았고, Lend-Lease 프로그램
에 의한 물자는 1942년 하반기부터 서서히 들어오기 시작했으니 이 시기의 전
황에 미국이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고는 볼 수 없을 것입니다. 아직 전략폭격
의 피해가 극심하지 않던 독일, 그에 반해 이미 기존의 서부 주요 산업지대와
광물자원 산지를 빼앗겨서 2/3 가까운 산업생산의 감소로 허덕이던 소련의 상
황을 비교했을때, 그 모든 어려움을 딛고 전황을 극적으로 역전시킨건 오로지
소련 계획경제와 인민들의 저력이었습니다.
거꾸로 이야기하면, 그토록 소련을 암담한 구석으로 몰아넣고도 끝장을 보지
못하고 개전 6개월만에 전 전선에서의 공세 능력을 상실했으며, 또다시 6개월
을 준비했어도 결국 또 6개월만에 전력이 소진되어 밀릴 정도로 독일은 원래
소련과 1대 1로 비교해도 국가적인 역량에서 한계가 있었다는 이야기입니다.
혹자분은 그래도 영국이 견제해주니 그만큼이 아니냐...하실테지만 독일이 그
나마 버틴 것도 루마니아 등 추축동맹국의 헌신적인 노력들과 점령지로부터의
가혹한 수탈의 결과입니다. 그렇게 주변국가들을 침략해서 쥐어짜면서 전쟁한
상황에 영국의 견제까지 배제한 시나리오는 정말 현실성이 없는 것이지요. 독
일은 결코 세계를 상대로 나홀로 전쟁한 나라가 아닙니다.
또 그러다가 1942년 말부터 이제 독일의 산업 생산이 서서히 전시체제로 전환
되면서 증가세를 보인 것을 보고, 미국이 그 시점에서 소련을 돕지만 않았어
도 재역전이 가능하지 않았을까 하는 것도 여전히 무리가 있습니다. 그당시에
산업의 전시체제 전환 속도는 독일보다 소련이 훨씬 빨랐고 한발 앞섰습니다.
(흔히들 5개년 계획 등을 통한 계획경제의 경험이 주요인이라고 하죠) 독일이
1943년부터 완만한 증가세를 보여 1944년 2/4~3/4분기 무렵에 생산의 절정에
오를 동안 소련은 1943년 중반에 전시체제의 본궤도에 올랐습니다. 미국의 지
원이 없어 이것저것 다 생산해야했다 치더라도 소련은 물량측면에서 독일보다
잠재력이 더 큰 국가임은 분명합니다.
그럼 미국은 뭐냐...미국의 Lend-Lease 프로그램은 별거 아니었냐? 라고 반문
하시는 분들도 계시겠죠. 그건 또 성격이 조금 다른 이야기입니다. 미국의 지
원은 전쟁의 향방 자체를 바꾼건 절대 아닙니다. 그러나 전쟁의 종말을 가속
화하는데는 매우 크게 기여했습니다.
Lend-Lease 프로그램의 가장 중요한 물품으로는 각종 "광물자원"과 "차량"들
을 꼽을 수 있습니다. 소련은 전쟁 중에 이미 기존 5개년 계획들에서 개발이
시작된 우랄 부근의 콤비나트들의 확대에 열을 올리고, 새로운 광산 개발, 대
규모 제철 및 제련시설 확대를 추구했습니다. 하지만 미국 등에서 많은 원광
들이 들어오면서 잉여 노동력을 전장이나 기타 산업에 보낼 여지를 확보하죠.
또한 우수한 미제 차량(지프와 트럭)들이 1942년 말부터 대규모로 들어오면서
소련의 자동차산업의 부담을 크게 경감시켜 전차와 야포 생산에 놀랄만한 수
준의 역량을 집결할 수 있었습니다. 전시 소련의 트럭 등 자동차 생산량이 대
략 20만 5천대 수준인데 반하여, 미제 차량들은 8만대의 지프와 37만 5천대의
트럭이 들어왔습니다.
이것이 위력을 발휘하게 된 것은 독소 양측 모두 극도로 곤란을 겪던 야전 수
송능력의 증대에 있었습니다. 독일이나 소련이나 어차피 수송 능력의 상당 부
분은 철도에 의존하는 체계였습니다. 그러다보니 전선 후방의 집적기지까지는
철도로 수송해도 거기서부터 전선으로 추진하는 능력이 많이 떨어지고, 일단
진격을 통해 전선이 앞으로 계속 이동하면 길어지는 보급선을 감당하는 능력
이 급전직하해서 대규모 기동의 경우 측면이 뻥뻥 뚫려 역습을 받거나 이후에
다음 공세로 나서기까지 상당한 시일이 소요되는 특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1943년부터는 차량 수송부대가 어느정도 보강되면서, 소련군은 대규모
공세 이후에 새로운 대공세로 이전하는 간격을 대단히 단축할 수 있었습니다.
1942-43년의 겨울의 혼전을 딛고 1943년 여름이 된 시점에서 이미 소련군측은
압도적인 양적 우세와 탄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독일군은 1943년 초반에 축
적한 상당부분의 지상전 역량을 가지고서도 쿠르스크 일대에서의 제한적인 목
표의 공세만을 추진할 수 있었을 뿐입니다. 반면 같은 기간 소련은 1943년 하
반기부터 3개월 동안 전선군 규모의 7개 공세를, 이후 2개월간 3개 공세를 펼
역량을 이미 확보하던 상태였습니다. 통상적이라면 철도 간선 및 수송로 확보
를 위해 간격이 단절되어야 할 시간이 줄어들면서 독일군을 그만큼 더 괴롭힐
수가 있었고 재정비의 시간을 뺏어서 붕괴를 가속화시켰습니다.
특히 1944년도의 대규모 종심작전을 통해 단번에 작전종심 500~700km 를 달성
하는 수준까지의 발전은 미국의 지원 없이는 힘들었을 것입니다. 당시 소련의
자체 생산 및 충원능력으로는 작전당 돌파 가능한 종심이 약 200~300km 수준
이라고 평가되니깐, 미군의 지원 없이는 2~3차의 공세를 통해 얻을 성과를 단
번에 얻는 정도의 발전이 있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 결과, 소련 자체의 능력
이라면 1946년이나 47년까지 끌었을 전쟁이 45년에 종결되었죠.
1943년 하반기부터 미국의 참전과 서부유럽에의 새로운 전선 형성으로 독일군
전력이 분산되기 시작한 것은 맞습니다만, 여전히 동부전선에는 독일 육군의
70% 가까운 전력이 몰려있었고, 서부전선의 독일군은 1944년 초에 확보해놓은
기갑사단들 이외에 보병사단들은 동부전선에 비해서도 한참 질적,양적으로 딸
리는 부대들이었습니다. 한번 코너에 몰리기 시작하여 방어에 급급한 독일군
입장에서 이만한 부대들이 동부로 전환된다 한들 전쟁의 흐름을 바꿔놓을수는
없었습니다.
아래 어떤 분은 독일이 동부전선에 집중했다면 최악의 경우에도 유리한 위치
에서 강화를 맺었을거라 하시지만, 실상은 반대에 가깝습니다. 도리어 최선의
시나리오라도 독일군 개전 이전의 독-소 국경에서 멈추는 정도에 지나지 않았
을 것입니다.
독일이 압도적인 연합국의 인적, 물적 우세 속에 버텨내었다는 점들을 본다면
독일 또한 대단한 국가라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것이 지나친 과대평가로 이어
지는 것도 명백한 오류입니다. 전쟁의 흐름을 돌려놓은 1941~42년의 혈투속에
나타난 소련 자체의 역량은 분명 독일을 능가하는 것이었고, 미국이 어쨌건간
에 소련은 결국 독일을 꺾었을 것입니다.
[답변/2163] 독-소 인적자원 통계비교
채승병(푸르른날) 2000/05/18 06:54 조회 : 328
안녕하십니까, 채승병입니다. ;^)
아래 서봉덕님의 두가지 질문에 한번에 다 답하려니깐 양이 무지무지 많군요.
일단 소련의 인적자원 문제부터 이야기를 풀어 나가겠습니다. 서봉덕님은 제
아무리 소련이어도 그만한 타격을 입고서 어찌 전쟁을 이끌어 나갈 수 있을
것인가.... 1차대전 당시 독일 체제와 같이 사실은 미국 지원이 없으면 금방
이라도 붕괴가능한 체제였는데 간신히 유지된게 아니냐는 의견을 제시해주셨
습니다. 그럼 소련의 인적자원을 독일과 비교해서 통계를 가지고 풀어나가죠.
먼저, 전쟁에서 국가가 가용한 인적자원을 동원하는데는 다음의 4단계가 있
다고 흔히 알려져 있습니다.
1단계. 실업인구 및 취업 부적격 인구를 소집
2단계. 불요불급한 소비산업의 종사자들을 소집
3단계. 낮은 우선순위의 전시 산업 종사자들을 소집
4단계. 전시 필수산업 종사자들의 점차적인 소집
보시면 아시겠지만 1,2단계에만 그치고 해결되면 전시 산업계에 미치는 영향
은 거의 없다고 보면 됩니다. 문제는 3단계 이상으로 넘어가면 자칫 군수품
보급에 악영향을 끼칠 위험이 커지고, 그러다 4단계의 체제가 장기간 지속되
파국으로 갈 위험이 농후해진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독소전의 각 단계에서 소련의 전투원 소집체제는 이중 어떤 상황에
놓여 있었는가를 따져볼까요?
처음 소련이 1941년 6월 전쟁에 돌입했을 당시 이미 소련은 2단계 동원체제
에 들어가 있었습니다. 소련과 같이 완전고용을 추구하는 공산주의 국가에서
실업자가 많이 있을 턱이 없죠. 그러다가 1941년의 파멸적인 패배를 겪으며
1942년에 들어가서는 3단계 동원체제로 이행합니다. 그러다가 지속적인 손실
을 겪으면서 1942년 말에는 4단계 동원체제로까지 넘어가는데 이때 소련에선
여성과 어린이들을 대거 군수산업으로 전환하여 산업에의 피해를 최소화하고
자 노력했습니다.
자세히 당시까지 소련의 피해를 추산해보면, 독일이 광대한 서부러시아를 장
악하므로서 총 6600만명에 달하는 인구가 독일 점령지구로 넘어갔습니다. 거
기에 1942년 12월까지 전투원 손실이 650만명 사망 또는 실종, 550만명 부상
에 이르러 농업 종사인구는 대전 전의 3540만명에서 1510만명으로 떨어졌고,
공업 종사인구는 1100만명에서 720만명으로, 기타 산업 종사인구는 2020만명
에서 1120만명으로 떨어졌습니다.
이렇다면 얼핏 생각하기에 과연 소련이 더이상 산업에 피해를 주지않고 무슨
수로 전투원 손실을 보충할 수 있었겠는가...는 말이 나오지만, 조금더 생각
해봐야 할 요소는 새롭게 동원 적령인구로 편입되는 청소년 연령층의 분포입
니다. 소련도 18세가 넘으면 병역에 동원되는데, 당시 신규 소집대상인 1920
년 경의 남자 출생인구는 대략 연간 200만명 수준이었습니다. 또한 적백내전
이후 소련도 베이비붐을 겪었기 때문에 이후 출생률은 폭증하여 1920년대 중
반엔 연간 남자 약 300만명 정도가 출생했습니다. (반면 농업집단화 등의 부
작용으로 1930년대엔 다시 출생률이 감소하게 됨) 그래서 1941년 소련 남성
인구 비율은 20대 미만이 약 4300만명(45%), 20대 및 30대가 3150만명(33%),
40대 및 50대가 1470만명(15.4%), 60대 이상이 620만명(6.6%) 정도의 구성비
를 보였습니다. 젊은층이 꽤 두터웠죠.
그리고 소련은 장기간의 의무병제를 통해 상당한 규모의 예비군을 가지고 있
었으며, 거기에 평시에 정기적인 군사훈련을 실시하고 있었습니다. 그중에는
이미 1차대전과 적백내전기에 활약한 전투경험을 가지고 있는 인구층도 매우
많았으며, 이들이 신규 동원 적령층와 함께 1941~42년 소련군의 주요 전투원
보충원이 되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소련군의 인력 보충 구조는 1941~42년의
파국적인 시기에는 30대 이상의 예비군 전력이 상당부분을 떠맡았고, 이후엔
새롭게 동원적령층에 포함되는 인구가 맡는 구조를 가졌다는 이야기입니다.
독일은 이미 이러한 소련의 전투원 규모를 1941년도에 추산하고 있었습니다.
독일 정보계통에서는 당시 독일이 19~45세의 동원 가능인구 1720만명 가운데
31%인 534만명의 동원체제를 가동하고 있는 것을 그대로 소련에 적용해 볼때,
소련의 15~50세 남성 연령층 4600만명을 고려하면 1426만명이 역시 동원가능
할 것으로 판단했죠. 거기에 그때까지 소련이 입은 450만명의 사상자와 350
만명의 포로를 생각해도 여전히 소련군은 약 620만명이 투입가능하여 독일군
340만명에 비해 큰 우위에 서 있음을 인지합니다.
거기에 1942년 초에 다시 추산하니 당시로 소련은 동원 인구(16~50세)의 80%
인 약 3800만명을 징집할 수 있는데, 이중 당시 활용되고 있던 인구는 전투
원으로 700만명, 당시까지 사망 및 실종자 600만명, 후방임무 600~800만명의
인원을 제하더라도 여전히 2000만명 가까운 동원 가능 인구가 대기중이란 결
론을 내립니다.
사실 독일이 더욱 놀란 것은 그런 단순한 인구 수뿐만이 아니라 소련이 유난
히 젊은층이 두껍다는 사실에 있었습니다. 당시 소련의 인구는 초반 중장년
층의 격심한 피해까지 겹쳐 20대 이하의 인구층이 전체의 50%에 달했는데 반
해 독일은 20대 이하 인구층이 30%도 안되었으니 신규 동원인력에서 더욱 큰
격차가 벌어진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위험은 점점 사실로 드러나 1944년 중반에 이르자소련은 그동안 사망 및
실종 850여만명, 포로 및 징용 750만명, 비적격 불구자 450만명 등 2000여만
명의 피해를 입었지만 여전히 적령 인구 중 군수산업에 480만명, 건설 및 농
업부문에 270만명 등 900만명을 산업부문에 활용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전
투원 임무를 위해 1600만명을 확보해놓고 이중 1100만명 정도가 입대하여 약
600만명이 독소전에 투입된 상태였습니다.
결국 1945년에 이르면 동원 적령층인 1888~1927년생 남성인구 5040만명 중에
그때까지의 완전손실(사망, 실종, 포로, 징용) 및 부적격자 2800만명을 제외
하고서도 2200만명의 인력을 가지게 되었고, 이중 1200만명이 전투원 임무에,
나머지는 각종 산업부문에 배치될 수 있었습니다.
즉, 소련은 이미 1942년말 이후에는 베이비붐 세대의 젊은층들이 지속적으로
동원 적령인구에 편입하면서, 안정적으로 1000~1200만명의 인력이 군무에 종
사하고(이중 약 600만명이 독소전에 투입) 1000만명 정도의 남성인력이 군수
및 건설,농업 등 각종 산업분야에서 일하는 체제가 정착되었던 것입니다. 그
리고 나머지 4000만명 수준의 산업인력은 모조리 여성과 어린이, 노인들로서
채워져 운영되었습니다. (그래도 각종 중공업 분야에는 적령기 남성인력 배
치가 우선시되어 약 50% 정도가 이들 적령기 남성이었고, 반면 농업이나 경
공업 분야는 거의 전부 여성, 어린이 등이 메꿨습니다.)
이러한 각 군무원 및 산업부문 인력구조의 안정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이냐면,
1941-42년의 위기를 겪고난 이후 소련은 오히려 전선의 손실을 상회하는 수
준의 인력 보충을 받을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소련군은 1943년에 이르면 연
간 완전손실 200만명 수준, 1944년에는 140만명 수준으로 점차 감소되었습니
다. 매년 250만명 이상의 징집에 적합한 신규연령층이 들어오는 추세는 1930
년대 출생률 감소기의 영향이 나타날 1950년 근방까지 유지가 가능했습니다.
그럼 그에 반해 독일은 어땠을까요? 독일은 당시 매년 동원 적령기로 편입하
는 인구 자체가 소련의 30% 수준에 불과했습니다. 대략 약 70~80만명 수준이
었죠. 그런 상황에서 독일이 1945년까지 동원 적령인구 중 전투원으로 적합
한 인력을 모조리 짜내봐도 가능한 인원이 누계 1100만명 정도였습니다. 이
중에 독일도 소련과 맞상대할만한 산업 규모를 유지하기 위해서 필요한 남성
인구 약 1000만명 수준을 고려하면 여유가 별로 없었습니다. 이미 독일도 43
년까지 300만명 이상이 사망 또는 실종, 포로, 불구 등의 손실을 입어서 군
무 종사인력을 500만명 수준에서 유지시키기가 힘들었고, 동부전선에 배치된
독일군은 250만 규모를 유지시키기가 힘들었습니다.
거기에 1943년 무렵부터 산업생산의 효율화와 확대를 통해 증산 노력을 기울
이자 산업부문의 인력수요가 더욱 증가하여 군에 보낼 인력들은 점점 질적으
로도 양적으로도 매우 불충분한 구조적 문제에 봉착하게 되었습니다. 결국에
1944년 말 새로운 총동원체제 하에서 동원인력을 16~60세로 확대해야만 하는
지경에 이르렀고요.
사실 통계수치로 독일과 소련을 비교하면, 독일이나 소련이나 남성인력을 쥐
어짠 정도는 거의 비슷합니다. 양측이 동원 적령기 인력에 대해 실제 군무로
끌어들인 인력 비율이 거의 같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독일은 소련에 비
해 전반적인 산업계에 여성 등의 인력을 끌어들이는데 매우 주저했기에 실제
남성층이 군무-산업 분담률이 소련보다도 과중했습니다. 소련이 전쟁지원 산
업 유지에 1000만명의 적령 남성 노동자와 4000만명의 여성 및 노약자를 활
용한데 반하여, 거꾸로 독일은 소련보다 양적으로 딸리는 산업구조나마 적령
남성인력을 1000만명 이상 필요로 했습니다. 이는 오히려 독일의 징병현실은
소련 이상으로 산업부문의 희생을 바탕으로 보충된 것이었음을 의미합니다.
자, 이제는 이러한 통계를 바탕으로 "미국의 지원이 없던" 상황을 가정해 볼
까요? 소련은 당시 미국의 지원이 없었다면 부족한 부분을 충족하기 위해 약
500만명의 산업 인력의 추가 편성 또는 재배치가 필요했다고 합니다. 이러한
상황에 직면했다면 소련은 동등한 군수품 생산을 위해 100만명 수준의 남성
인력을 군무 인력에서 빼내야 했다하고요. (나머지는 여성 인력을 끌어 썼을
테니...) 여기서 한가지 주의할 점은 소련도 군무 종사인력중 약 50% 수준만
이 독소전에 투입되던 상황인지라 어느 정도의 버퍼가 존재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어쨌건 소련은 동부전선의 육군 병력규모를 500만명 이상으로 유지
시킬 수 있었을 거라는게 상당히 설득력있는 통계로 자리잡고 있습니다.
그 반면에 독일은 증가하던 소련의 양적인 산업생산 규모를 따라잡으려면 더
욱 많은 인력의 군수산업으로의 전환이 요청되던 시기였습니다. 이미 대전중
독일은 인력 부족으로 기존에 가지고 있던 여유설비도 가동하지 못하는 상황
이 발생하고 있던 터였지요. 설사 1943년 말 이후 미국이 참전하지 않았다해
도 1943년 경의 독일의 인력배치 상황은 소집연령층 총 1400만명 가운데 현
직 군무원 500만명을 제하고도 산업인력이 200만명 이상 모자랐으니, 미국이
없던 여력으로 군무원을 엄청나게 증가시킬 수 있다는 환상은 버려야 합니다.
물론 독일도 이를 보충하기 위해 점령지로부터 수많은 강제노동 인력을 끌어
왔긴 하지만, 독일은 소련에 비해 여기에서도 치명적인 문제를 더 안고 있었
습니다. 그것은 잘 아시다시피 독일의 군수품들은 소련의 그것에 비해 훨씬
복잡한 제품들이라 단순히 끌어온 저질 인력으로 완전 대체가 불가능한 약점
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소련은 훨씬 단순한 군수품 생산에 치중했기에
대다수 여성인력이 그자리를 메우고 들어갈 수 있었던데 반해 독일은 어차피
산업 자체의 체질을 바꾸고 여성인력의 활용범위를 대폭 늘이는 등의 구조조
정을 하지 않는한 산업인력의 군무원 대체 유연성에 한계가 있었습니다.
독일이 놀고있는 설비를 돌려 산업생산을 배가시키기 위해서는 100만명을 군
무원에서 빼돌려야 했는데... 가뜩이나 허덕대는 전선 상황에 그랬다간 자살
행위겠고, 거꾸로 야전의 소모를 보충하기 위해 산업 부문에서 100만명을 군
무원으로 돌렸다간 당장 들고 싸울 무기생산이 격감하고... 독일의 딜레마는
이렇듯 매우 심각했습니다.
결국 "미국이 없었더라도" 소련은 동부전선에 약 500만명의 일선 전투원들을
유지하면서 1950년까지 매년 약 250만명의 손실을 감당할수 있었던데 반해,
독일은 여전히 약 250~300만명의 일선 전투원 규모에 매년 약 70만명의 손실
을 감당할 수 있었을 뿐이었을겁니다. 인원과 각종 전차, 야포 등 대다수 측
면에서 몇배의 물량 우위를 소련이 누리는 상황에 이러한 소모전의 구도에서
독일이 승리할 수 있으리라고 저는 생각할 수 없습니다.
전선에서 그만큼 격렬하게 싸우면서 소련인만 죽어 나가고 소련 물자만 소모
되며, 소련의 숙련노동자 수급만 힘들던건 결코 아니었습니다. 그런 동안 독
일은 자체 산업의 특성 때문에 소련보다도 더욱 상대적인 어려움에 직면해야
했으며 역시 무지막지한 타격을 받고 있었습니다. 서봉덕님이 말씀하신 힌덴
부르크 계획과 유사한 문제점들은 아주 좋은 지적이십니다만, 그러한 문제는
분명 소련보다 독일에게 먼저 닥쳤을겁니다.
독일의 산업구조, 인력 수급구조는 소련과의 물량대결에서 도저히 버텨낼 재
간이 없었습니다. 또 그건 결국 각 체제가 현실의 물량전에 적합하게 조직화
하는 능력의 차이와 맞닿아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굳이 한가지 덧붙이자면, 저는 "소련은 미국없이도 이길수 있었다"는
것이 왜 "미국의 지원이 의미가 없었다"와 동등하게 인식되어야 하는지가 잘
이해가 안되는군요. 미국의 Lend-Lease 프로그램은 나름대로 충분히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없었다면 아마 독일은 한 100만명쯤, 소
련은 한 200만명쯤 더 죽고 나서야 전쟁이 끝을 맺었을테죠. 독소전 자체가
지독한 비극이지만, 차라리 그 선에서라도 끝이 났다는게 오히려 다행이라면
다행이고 미국의 힘이 투영된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P.S. 옛날에 봤던 가물가물한 통계 뒤져가며 정리하려니 지독하게 힘들군요...
저도 이런 소모전(?) 계속 하다가는 뻗겠습니다. 웬만하면 토론장까지
가지 않고 적당히 끝났으면... ^^
* 참고문헌
[1] R. Overy, "Why the Allies Won", W.W.Norton & Company
[2] W. S. Dunn, Jr., "Hitler's Nemesis", Praeger
[3] D. M. Glantz and J. House, "When Titans Clashed", Kansas Univ. Press
[4] J. Erickson, "The Road to Stalingrad", Weidenfeld & Nicolson
[5] J. Ellis, "The World War II Databook", Aurum Press
[6] D. M. Glantz, "Stumbling Colossus", Kansas Univ. Press
[7] S. J. Zaloga and L. S.Ness, "Red Army Handbook 1939-1945", Sutton Pub.
[8] G. F. Krivosheev (ed.), "Soviet Casualties and Combat Losses
in the Twenteenth Century", Stackpole Books
...et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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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밀덕으로서 개인 의견을 조금 덧붙이면
독일군이 프로이센 시절로부터 이어받은 뛰어난 장군참모 시스템과 '나라가 군대를 가진 것이 아니라 군대가 나라를 소유했다'라는 말이 있었던 당시 프로이센-독일제국-나치독일의 전통으로 인해
뛰어난 전투력을 보여줬던 역사에 남을 강군임에는 분명했으나
소련도 군사강대국이었고
산업역량과 자원,인구 등의 전쟁 수행능력이 독일보다 훨씬 뛰어났기 때문에
(독일은 기술력은 소련에 밀리지 않거나 앞서는 부분도 있었지만, 산업동원능력과 표준화,대량생산체계는 소련이 월등히 뛰어났습니다.)
나치독일이 영국,미국의 지원이 없는 소련과 단독으로 전쟁했어도 졌을 거라고 저도 많은 책과 영상을 보면서
확신하고 있긴 합니다.
그리고 전쟁 말기인 1944년부터는 전쟁초기의 독일군 정예병력들이 이미 전사,부상,실종 등으로 녹아없어지고 그만큼 전투력이 하락하고 있었지만 소련은 계속 더 강해져가고 있었고 1944년부터는 전투도 소련이 더 잘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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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양면전선, 말도 안되게 긴 보급선, 라스푸티차와 추운겨울, 우랄너머로 산업시설 빤스런(청야전술). 갈려나가는 숫자의 차이일뿐이지 막기는 막았을거 같긴합니다
네
단독 전쟁으로 했어도 저는 베를린이 함락될 정도로 완패했을 거라고 생각이 드네요.
물론 미국의 랜드리스 지원과
미영 연합군의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없었으면 소련 붉은군대가 더 갈려나가고 이기긴 했겠지만요.
저도 그리 생각함 피해는 더 컸겠지만 러시아는 절대 정복할수 없는 대상임
히틀러에 붙이는 주석이라는, 그냥 히틀러의 광기 어린 띨빵한 선택이라고만 보기엔 이해할 수 없는 점들을 들여다보는 독일에서 나온 책이 있는데, 여기에 보면 히틀러가 시간을 벌고자 고의로 미국을 끌어들였다는 얘기가 있음. 누구를 위해서도 심지어 히틀러 자신을 위해서도 타당하지 않아보이는 이런 자폭에 가까운 선택을 히틀러가 한 이유는, 쇼아(홀로코스트: 유대인들은 이 단어를 싫어한다더라고요)를 조금이라도 더 오래 지속하기 위해서라는 얘기가 있음. 무리한 러시아 원정으로 인해 이미 패배가 자명한 상황이었는데, 이렇게 노골적으로 말해도 된다면 아직 못 죽인 많은 유대인을 마저 말살하기 위해 미국을 끌어들인 거라는 말인데, 이 설명이 좀 엽기적이기는 해도 그게 제일 정합성을 가진 설명이기는 하더군요
ㅇ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