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주의 인자하심이(호주 시드니교회 안지현님 반주) / 교회음악이야기 626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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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이야기 75번 참고 / http://cafe.daum.net/galgeygolstory/9deQ/75
지리산 온천 다녀오는 길에 주천면 부페식당 앞에서
박미분권사
연세 : 91세
소천 : 2012년 7월 13일, 금, 늦은 5시 7분
장례식장 : 남원장례식장, 남원의료원 옆
입관예식 : 7/14일(토), 늦은 2시, 갈계교회에서
발인예식 : 7/16(월), 이른 6시, 갈계교회에서
화장예식 : 7/16(월), 이른 ..시, 진주 갈계교회에서
수목장 : 7/16(월), 이른 ..시, 선산에서, 갈계교회에서
박미분권사님이
오늘 늦은 5시 7분
남원의료원 응급실에서 돌아가셨다.
뇌출혈이 직접적인 사인이다.
연세가 드셔서
혼자 댁에 있기 불편해
양로원에 그간 계셨었다.
양로원으로 가신 뒤 강건하셨다.
최근 몸이 좋지 않았단다.
오늘도 몸상태가 좋지 않아 이른 9시경
양로원에서 남원의료원 응급실로 옮겼단다.
CT촬영을 하니 뇌출혈이라 연세가 있기에 수술하는 것보다는
손을 대지 않고 지켜보는 것이 좋겠다고 담당의사가
제안해서 가족들이 그러기로 했단다.
권사님 상황이 좋지 않아
온 가족에게 연락해서 6명의 따님 들 중
서울에 있는 따님을 빼곤 모두 임종을
지켜봤다니 감사하다.
이제 막
장례예식장으로 옮겼기에
장례일정을 조율하고 있는 중이다.
삼일장하려니 주일이라 쉽게
결정하지 못하는 듯하다.
내일과 모레
1박으로 생명평화결사팀
30명이 교회에 머물기로 했는데...
내일 4시부터 주일 2시까지는
이들과 함께해야한다.
강건하게 사시다가
91세의 연세로 부름을 받았으니
호상인 셈이다.
권사님이 하나님의 품에 안긴 줄 믿는다.
유가족에게 하나님의 위로가 함께하기를 빈다.
상동 / 민권사님과 함께 눈오는 중 구역예배(?, 봄대심방) 드리러 교회로 오실 때
내가 부임 후 권사님이셨던
세 분의 노권사님 중 이젠 민주식권사님만
생존해 계신다.
상동 / 지리산 온천 다녀오는 길에 주천면 부페식당에서
내가 늘 권사삼인방이라 불렀던 노권사님들이다.
이렇게 오붓하게 부페를 먹었을 때가 엊그제 같은데....
교회 공동체를 위해서 노 권사님들이 하신 일은
상상을 초월한다.
이 분들에 의해서
사실 청국장이 만들어졌다.
청국장으로 인해 갈계교회 기반이
든든해져 가고 있지 않는가?
노권사님들의
몸을 아끼지 않은
헌신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하나님께서 노권사님들이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면서
교회 공동체를 위해 헌신하는
그 마음을 기뻐받으셨기에 청국장이
교회를 위해 효자노릇을 한 듯 하다.
노구를 이끄시고 콩심고, 콩밭 풀뽑고
이권사님 가마솥에서 콩삶고, 안방에서 청국장 발효시키고
함께 포장하는 일들을 다 같이 하셨었다.
이제 민권사님만 남으셨다.
강건하셨으면 좋겠다.
오늘 민권사님께
전화 한 통 해
봐야겠다.
위급하다는 연락을 받고
왔지만 임종을 지켜보지 못해 아쉽다.
이곳에 있다가 갈계로 가야겠다.
상동
박미분권사님 사셨던 집
이젠 팔려 허물어져 버렸고
밭으로 바뀌어져 있다.
이런 터는
교회가 매입했어야 했는데
지금도 그 생각만 하면 아쉽다.
박미분권사님을 생각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사건은
치마자락 속에 보자기로 감싸 오신
쌈지돈 100만원이다.
2005년 6월 30일(목)
공식적인 갈계에 첫발을 내딛던 순간이였다.
그때 마티즈 두번째 회색차를 가지고 있었다.
그 차로 활동을 자유롭게 했다.
그런데 8월경
자가용이 일개월에
3-4번이나 퍼지는 일이 생겼다.
폐차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 개인차가 아니라 교회 봉고차를
구해야겠다는 마음에 제직회를 열어
대책을 논의했다.
그때 교회차를 구하자는 결정이 났다.
주일날 예배 후 결정한 뒤 다음날 월요일
아침 10시경에 박미분권사님이 사택에 들어오시지도 않으시고
창문을 여시더니 치마를 걷어 붙이시고 허리춤에 찬 보자기를
꺼내시는게 아닌가?
그러면서 내 앞에 건내주신다.
그러면서 하셨던 말씀은
한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교회에서 중요한 결정을 했는데
그래도 내가 허리가 꼬부랑이 됐어도
교회에서 가장 연장자고 오래다닌 사람인데
내가 본을 보여야 덕이 되겠기에 이른 아침
농협 문 열기를 기다려 농협에
다녀왔습니다...."
그러곤 보자기는 가져가시고
신문지에 쌓인 것은 그대로 두고 가셨다.
권사님이 가신 뒤 신문지를 펼쳐보니
만원권 한 다발이 있는게 아닌가?
100만원이다.
나는 그때만해도
교인들이 17명이고
모두 노인들인데 헌금이
많이 걷히면 150만원을 생각했다.
내 차까지 폐차해서 헌금해서....
그런데 권사님이 첫날 첫시간
그렇게 한 뒤 한 주만에 내 상상을 뛰어 넘는
일들이 발생하고 말았다.
결국 870만원이 걷혀 버렸다.
100만원, 200만원, 50만원, 30만원.....
지금 교회에서 사용하고 있는 그레이스 봉고차다.
요즘 스타렉스를 거쳐 신형 스타렉스가 판치는 세상이다.
이젠 나오지도 않는 그레이스를 보고 어떤 생각을 할 지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이런 찐한 경험이 있기에 교회차가
남다르게 다가온다.
지금까지 그레이스 봉고차가
말없이 교회공동체를 위해서
아직까지도 변함없이 귀하게
쓰임은 이런 노권사님들의
마음정성이 있기때문이라
나는 본다.
돈 100만원도 쉬운 일이 아니다.
보다 더 중요한 것은 교회에 대한
책임의식을 느끼고 스스로 첫발을
내디딘 권사님의 마음 중심이 너무나
귀하게 다가온다.
그게 다른 교우들에게도
자연스럽게 전파되어 760만원이란
거금이 모아져 보험까지 깔끔하게
해결되었다는 사실이다.
이 사건을 경험하면서
나는 그때 새로운 깊은 깨달음이 왔다.
비록 지금 별 보잘 것 없는 것처럼 보이는
교회지만 80년이 넘는 역사가 있다보니
믿음의 선진들을 통해 쌓여온 노하우가
많음을 체험했다.
교인이 적고
미자립이지만
우습게 봐서는
절대 안되겠다는
생각을 그때 하게 되었다.
150만원이면
많이 걷히겠다는 내 생각이
얼마나 아둔하고 미련했음을
절감했던 시간이였다.
그래서 그때부터
부족하지만 내 뜻, 내 생각이 아니라
하나님의 길 인도하심에 더욱 철저히
내 맡겨야 함의 중요함을 절감했던
시간들이 있었다.
노권사님을
떠나보내면서 마음이 짠해져 온다.
유가족에 비할 수는 없겠지만 그럼에도
노권사님과 일상의 삶을 4년정도 나눴던
목회자로서 슬픔감정이 몰려온다.
더욱이 이 찬양을 선곡한 것은 나름의 이유가 있다.
박경종 집사님이 돌아가셨을 때부터 본격적으로
장송곡보다는 밝은 의미있는 희망의 노래를
배경음악으로 선곡했던 것을
나는 기억한다.
"아침에 주의 인자하심을..."
이 곡은 시편을 배경으로 지어진 것으로 안다.
대학시절 89년 서울지역 IVF 여름 연합수련회에서
큰 은혜를 받았던 찬양이다.
그때 이 찬양을 부르면서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던 나의 경험이 있다.
그때 한 주간의 수련회를 통해 많은 도전과
은혜를 받았다.
학생운동의 영향으로
막 데모를 시작했던 초기였기에 더 많은
갈등과 번민들과 하나님에 대한 열정으로
정리되지 못한 괴로움이 있었던
시절이였다.
그런 찰나
여름대회에서
이 찬양을 부르면서
눈물을 쏟으면서 새로운
깨달음이 폭포수처럼 몰려왔던
시절이 나에겐 있었다.
이 카페를 통해
내가 기독교를 많이 비판하는
모습들이 많이 있다.
목사가 되어 왜 그러는가?
초신자들은 의아해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의 비판은 기독교를 부정하는게
절대 아니다.
정반대로
기독교, 성경, 야훼, 예수....
이것을 너무나 사랑하기때문에
터져 나오는 모습이다.
예수정신에 위배된
현실 기독교의 모습들때문이다.
기독교를 부정하는게 아니라
더 올곧게 기독교를 세워가려는
몸부림임을 깨달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천만 기독교 개가를
부르던 시절이 이젠 지났다.
90년대를 기점으로 이젠 천만이
아니라 750만으로 줄었다.
지금처럼 하다간 더 줄어들 것이다.
소망교회 장로 이명박대통령이다.
지금 대통령이 장로다. 그런데 제대로 하는게 없다.
단적인 사례다. 기독교가 이 모양이 되었다는 증거다.
오늘 이 시간 광주쪽에선 죽재 서남동교수의 28주년 기념 세미나가
일박으로 진행되고 있기에 김용복박사님과 이만열교수님이 초빙되어
세미나가 진행되고 있다.
그 현장을 가진 못했지만
페북으로 현장의 발제문 요약을 봤다.
일제강점기부터 해방이후 80년대까지
기독교인들, 교회가 해 왔던 쟁쟁한 모습들이
이만열교수에 의해 발표가 다시 되었다.
물론 역사전공인 뜻있는 교수님인지라
그런 발표나 책이 이미 출간되었다.
그럼에도 이 시대에 다시금
지난 세월을 되짚으며 새로운 시대를
준비하는 모습은 너무나 감동이라
일부러 내 페북에 스크랩해 뒀다.
개교회에 숫자가 불어나는 것을 복이라고 생각하며
철저히 부추겨 왔던 지난한 세월이 있었다. 기껏 한 세대다.
그런데 90년 초반 소련 붕괴를 기점으로 세계 냉전 이데올로기가
허물어지면서 전세계의 판도가 급변했다.
개교회 숫자 불어나는 것을
아직도 복으로 생각하는 많은
개신교인들이 한국사회에 90%는 될 것이다.
이번 CTS 방송 후 전화상담을 받으면서도
그런 느낌을 받았으니....
개교회주의는 우상숭배다.
지역연합으로 철저히 가야만 한다.
한 지역에 교회들이 우후죽순처럼
도심에 생겨나는 것이 축복이
절대 아니다.
저주의 씨앗임을
이젠 한국교계가 더 뼈저리게
깨달아야 할 것이다.
한 지역에 교회가 하나 있으면 된다.
천주교가 잘 하고 있다.
성공회도...
개신교가 중세 이후
잘 해 온 것은 부정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젠 도가 지나쳤다.
너무 개별화되었다.
이젠 더 이상 개교회를 강조해선 안된다.
지역연합으로 지역을 섬겨가야 한다.
그렇게 할 때 새로운 역사가
일어나게 되어 있다.
한 마을의 두 교회
그래서 나의 번민이 깊어진다.
통합까진 안되더라도 마을과 지역을 위해서
함께 힘을 모아 마을과 지역을
살려가야 한다.
페북에 오늘 일정을 정리한 뒤
다시 장례일정을 수정하다보니 막바지에 필이
꽂히는 바람에 권사님을 떠나보내는
게시판인데 평소 내 고민들이
쏟아져 나왔다.
부담되는 분들이 있겠지만
이게 나의 진솔한 본 모습이기에
그대로 두련다.
권사님.
이 생에서 그간 수고 많았습니다.
이젠 하나님 품에서 고이 안식하시고
하늘 나라에서 자녀손들과 교회를
바라보며 좋은 길로
인도해 주세요!!!
나중에 다시
하나님 나라에서 뵙겠습니다.
그때 얼싸안고 한바탕 신바람나게
춤춰 보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