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년 전 남편이 큰 수술을 받고 나서 장시간의 여행이나 운동들은 기약 없이 접게 되었는데, 주인이 기운을 잃고 돌아보지 않는 동안 사랑을 받지 못한 것들은 허접스러워졌다.
촉촉한 타올에 세제와 우유를 약간 발라 가방부터 시작하여 골프채를 닦기 시작했다. 운동 기구 중에서 곰팡이가 살아 붙지 않은 것은 골프공과 골프 티(tee) 뿐이었다. 알록달록한 티와 공을 정리하고 있으려니 고운 티에 하얀 공을 올려놓고 드라이브를 휘둘렀던 그 시절이 떠올랐다. 드라이브에 잘 맞은 공이 경쾌한 소리를 내며 하늘높이 날아갈 때의 그 상쾌함, 뉴질랜드 이민생활 오 년 여 동안 골프는 중요한 일과중의 하나였다. 회원 가입만 해 놓으면 따로 그린 피(green fee)를 내거나 부킹을 하지 않아도 새벽마다 골프를 즐길 수 있는 그 나라의 골프 환경, 그 좋은 이용의 기회를 놓칠세라 일년 365일 거의 하루도 빠지지 않고 새벽 골프를 즐겼다.
뉴질랜드 골프장
그 새벽의 두어 시간 동안에 나는 골프만 치는 것이 아니라 태평양 바다에서 솟아 오르는 새벽의 태양을 맞이하고, 바다를 붉게 물들이던 아침노을은 만날 수 있었다. 곱게 다듬어진 골프장의 잔디 위에서는 토끼 가족, 오리가족과 동행했으며 곱고 고운 새들과도 함께 했다. 일곱 가지 색으로 떠오르는 무지개의 시발점을 바로 곁에서 발견하고는 그 신기함에 몸을 떨기도 했으며 우리 꽃이라고 여겼던 민들레와 패랭이꽃도 낯선 땅에서 만나니 또 얼마나 반갑던지….
그렇게 새벽에 운동을 즐기고 골프가 마음먹은 데로 풀린 날에는 출근길에도 신바람이 났다. 나의 사업장을 찾아오는 모든 사람들을 향하여 베풀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데 물론 그런 날이면 종업원들에겐 더없이 인심 후한 사장이 되었다.
추억 속을 넘나들면서 손 운동을 하다가 보니 골프 가방과 골프채, 신발들도 윤기를 내며 반짝거린다. 언제 다시 사용하게 될 지 기약 없는 그들을 정리하면서 나를 돌아보고 또 내 마음 속도 들여다본다.
보드라운 면포에 세제를 살짝 발라 마음도 몸도 반짝반짝 빛이 나게 닦아 볼 수는 없을까. 정성 들여 닦으면 그것들도 빛이 나 줄까.
미장원을 제때에 드나들지 않아 정리되지 않은 체 제멋 데로 길어진 머리, 이젠 제법 길어서 둘둘 감아 걷어 올리니 어설프게나마 올림 머리가 되었다. 얼굴에 화장기가 있으면 모기나 벌이 따라 다니니 아예 선 크림도 사용하지 않는다. 거기에 구색을 맞추느라 늘 편안한 바지차림이니 외출복 꺼내보지 않은지가 서너 해를 넘기고 있다.
그렇다면 눈에 보이지 않는 마음 속을 들여다 본다. 누구도 사람을 만나지 않는 날이 많으니 자연 말을 할 기회도 적다. 물이 흘러가야 맑아지듯이 돌아가고 풀어내고 해야 정화될 가슴속이고 머리 속일 진데 그 또한 그리하지 못했으니 녹이 슬고 곰팡이가 슬었을 것이다. 그것도 덕지덕지…. 이곳으로 이동하는데 중요한 핑계가 되어 주었던 남편의 건강도 운동을 시작해도 좋을 만큼 좋아진 것도 아니니 내공을 쌓았다고도 볼 수 없다.
처음 이곳으로 이사 올 때 이웃하고 살게 된 한 여인이 ‘여기에 삼 년 만 살면 사람 버려요’하던데 정말 그런가. 나 이곳에서 삼 년 째 살고 있으니 나는 버린 사람인가.
뒤뜰의 느티나무 아래에 노트북 들고 앉아 이 글을 적고 있는데 매미가 목에 곰팡이라도 슬을 까 봐 죽어라 고 울어댄다. 오늘은 그들의 노래가 아우성으로 들려온다.
몸과 마음에 슬은 곰팡이가 걸레질을 한다고 말끔해 질 리도 없을테니 그럼 매미나 개구리처럼 소리라도 질러 볼까,
아서라 다 부질없는 짓이로다. 이름 없는 여인이 되어 살고 싶다고 세상을 바라보며 소리치고 선택한 삶이 아니던가. 버린 사람이면 어떻고 머리에 가슴에 녹이 슬고 또 곰팡이가 좀 피면 어떤가. 그냥 이렇게 물이 흘러가듯이 살아보리라. 버려지면 버린 데로 또 녹이 슬고 곰팡이가 피면 또 그런 데로 모든 것들 주어진 데로 편안하게 받아 들이다가 보면 세월은 흘러가겠지.
오늘, 지금 이순간이 나에게 주어진 것이 소중하고 감사하지 않느냐. 오늘도 단내 풍기는 햇살은 내가 까치발을 딛고 따라 다니지 않아도 나에게까지 공평하게 나누어지고 가을향내 품은 하늬바람도 나를 건너뛰지 않았다. 거기다가 온갖 풀꽃과 새들이 노래하는 평온과 고요가 고여 있는 산골마을, 거기에서 오늘도 소풍 온 기분으로 하루를 맞이 할 수 있으니 더 이상 무엇을 바라리~. (끝)
첫댓글 강촌선생님께서 서울 근교에 텃밭이 있는 곳에 살기 편한 전원주택을 마련한 것은 행운이 아닌가 싶습니다.
친구가 산을 경매 받아서 남편과 거의 10년 넘게 일구어서 주말이면 산에서 살았다고 하는데 자기 산에 다니면서 부터는 전국 어디를 가도 자기 농장만큼 좋은 곳이 없다고 합니다.
우리는 시골을 떠나있어서 늘 산을 그리워하고 들판을 그리워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부군께서 빨리 건강을 회복하셔서 좋아하시는 골프도 하시고 여행도 많이 다니시고 선생님의 활동 반경도 더 넓어졌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요, 고맙습니다.
시골은 우리 누구나 좋아하는 환경이지만 실천하고 적응하기는 어렵죠,
사실 강촌네도 적응 어려워하고 있습니다.
옆지기가 더욱... 손에 흙 묻는 것 싫어하다니...에구
이쌤. 오늘도 '좋은 데이'
{ 오늘, 지금 이순간이 나에게 주어진 것이 소중하고 감사하지 않느냐. 오늘도 단내 풍기는 햇살은 내가 까치발을 딛고 따라 다니지 않아도 나에게까지 공평하게 나누어지고 가을향내 품은 하늬바람도 나를 건너뛰지 않았다. 거기다가 온갖 풀과 새들이 노래하는 평온과 고요가 고여 있는 산골마을, 거기에서 오늘도 소풍 온 기분으로 하루를 맞이 할 수 있으니 더 이상 무엇을 바라리}
우리 강촌님 ※ 이 이상 더 아름답고 소중하고 행복한 결론이 없겠지요 가 되니, 해솔이 가족들,대구의 가족들 다 모이면 또 좀 보여주세요.참 행복한 모습들을...
저는 괜히 하는 일도 없으면서 마음만 바빠서 이제야...
※ 바로
감사합니다. 선생님,
저도 답글이 늦었네요.
자동차 지붕위 고추가 참으로 이쁩니다
갖고갑니다 호호
그렇죠,그 사진 예쁘죠,
그런데 각도가 조금. 호호, 제 실력이 거기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