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르시아 전쟁
장선희
1.
페르시아 성문을 보았나 무너진 벽과 벽 사이.
구름들이 쐐기문자처럼 박혀있네 역사서 페이지 넘어가듯 하늘 한 편이 접혔다 펼쳐지네 성문에 찍힌 무수한 말발굽, 시민들 옷자락처럼 나부꼈네 올리브 열매를 빻던 맷돌 같은 사내들의 맨가슴, 화살도 막아낼 듯 단단했네
연꽃은 피었지 긴 회랑을 따라 수 백 그루 피었지 시간의 이끼조차 끼지 않았지 눈먼 거지들 중얼거리고 앵무새는 시계추처럼 떠들었지 몇 개의 태양이 주술사 표정을 지었으며 필경사들, 변방 소식에 고꾸라지기도 했지 모래의 시간, 천지사방을 진군했네
삼나무 숲이 붉게 물들었네
2.
바닷물의 흐름을 읽지 못한다면, 아내의 젖무덤에 묻힐 수 없네 전사들, 바람의 흐름을 눈치채야 했다네 황금물고기가 되고마는 그 성문을 기억하나, 철옹성의 위협을 안고 있는 그 성문 아래 황금 술잔을 쥐던 손들, 청동단검을 얻고서야 비로소 사내가 됐다네
염탐꾼의 괭이갈매기 부리 같은 입을 본 적이 있는가, 협잡꾼은 새의 눈을 갖고 있다네 망루에 오른 병사들의 눈빛, 마침내 달빛에 젖고 말겠지 뿔피리는 이제 그만 불어야 하네 집 지킴이는 노예가 아니라 거위라지
돌고래들이 궁궐 벽면에서 펄쩍 뛰고 있네
-전진, 전진... 파르티아로
고향은 멀어만 가고, 보병들의 군홧발 속에 파묻히네 모래성.
3.
왕의 길은 피로 물들었지. 원형 무덤을 파면 하얀 뼈가 누워있네
누대의 갑옷을 벗어던진 조각상, 부서진 갑옷에 얼룩진 피의 함성
아가멤논의 황금가면을 술잔처럼 치켜들어보네
폐허 속에서도 아이들은 자라고, 은화는 야자나무 가로수 지나 성벽에까지 매달렸지 굶주린 사자 모래구릉을 넘는 순간까지, 갈대로 물고기를 만들었지 용감한 테세우스를 닮고픈 아이들, 빈 칼집으로 전쟁영웅이 되기도 하네
어여쁜 왕비의 눈물, 가난한 백성을 구원할 수 없다지 탑에 갇힌 왕비들의 눈물이 메마른 땅에 거름이 될 수 있기를
4.
불사(不死)의 군대가 되는 비결은 낙타의 콧김에 도망가지 않는 것.
전령들, 주머니 속 따끈한 은화를 떠올리며 길을 달렸네 매의 머릴 가진 호루스처럼 눈 맑은 사람만이 가난한 시간을 버텼네 화살처럼 날아오던 ‘기억하라’던 말, 청동연꽃처럼 단단했던 그 말.
한순간 눈울 멀게 했던 전쟁터를 떠올려보네
새들이 솟구치고 모래시계는 멈추고 아, 세기를 건너 계속되는 전쟁.
가슴과 팔에 창, 방패를 이식했던 병사여, 벽과 벽 사이, 구름들이 세기의 문자처럼 박혔던 페르시아 성문을 본 적이 있는가
사랑, 십 분 전
장선희
‘카페는 이층입니다’ 안내판 걸개가 된 이젤
이젤의 노란 바탕이 해바라기밭 같다
난 돌아오던 지오반나처럼 계단을 오른다 해바라기밭, 오래된 나무 계단이 저음을 낸다
육중한 콘트라베이스, 마지막 음색을 자랑한 건 언제였을까
톱니바퀴 줄감개가 입을 막고 있다
피치카토 주법, 나만 듣는 것일까
램프 아래 ‘감자 먹는 사람들’
그들의 농가는 어둡다
난, 손가락으로 쓴다
커피를 악마의 입술이라 일컫던 ‘Baudelaire’
보르드 슈 페리어를 난, 보. 들. 레. 르 라 부르기로 한다
‘이봐요, 웨이터’
창밖은, 한 치 여백 없이 검은색이 점령했다
주머니를 뒤집는다
휘발된 사랑의 맹세처럼,
색을 잃어버린 유리잔,
그 투명을 따라 금이 번진다
죽은 새떼의 몸통을 질겅 밟으며 걸어가는 코발트청 여인.
바다는 여인의 입수(入水)를 거부한다 허리까지 물이 차오른다 여인은 물속으로 사라질 듯, 그러나 남자는 여인의 수장(水漿)을 원치 않는다
마흔 일곱의 남자는 안다 여인을 구하는 순간 사랑을 얻게 되리란 걸.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이 진공관 앰프에서 흐른다
피어나는 나무들, 빛화살이 태양을 가리고
선홍빛 피가 터져나온다
마침내 벽면의 두 남녀, 걸어나오는데…….
그들은 청년 샤갈과 그의 연인 벨라
비데스부르크는 온통 초록 마술에 빠져있다
대지도 집도 나무도.
눈을 감는다
행복이 차오르면, 공중부양 되는 걸까
주문을 걸자
카페는 바다가 된다
카레앙카
장선희
우즈베키스탄행 열차는 연발이다
눈보라에 시야가 어지럽다
Expired day. 28. December
필 박스 눌러쓴 여인들이 지나간다
카레앙카 3세*를 그려본다
그녀와 오늘 인터뷰를 하기로 했다
반인반수‘바란짜의 땅, 우랄 산맥을 넘으면 배꼽 빠지게 과장된 이야기도 사실이 된다
할아버진 잠을 자다 붙잡혔다 죄명은 조선족 17세, 시베리아 그 유형지로 떠나는 행렬 아무르, 아무르 그 강처럼 흐르는 사람들 북극성 농장에서 끝내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한 채 맞는 28번째 생일의 주인공 블라디미르 박. 카레앙카, 눈발 속에 우뚝 서 있는 법을 아는, 오줌발이 순식간에 얼어버리는 순간에도 눈빛만은 초록빛.
-안뇽하세뇨?
둥둥 떠다니는 빙산 같은 말,
오래 만지작거려 빛나는 마트로시카처럼 딸려나온다 말을 잃으면 조국을 잃는다는 할아버지의 말.
상자 속에서 그녀, 자작나무 브로치를 꺼낸다 생채기 난 말들 겹겹 딸려나온다 희미한 모국어만큼이나 옅어진 박 뾰돌.
오로촌족의 사촌들, 숲의 숨결 따라 침엽수를 따라 결빙처럼 떠돌던 한국말 몇 마디.
- 깜싸합니다
그래, 그녀와 나, 오래 전부터 카레앙카였다
Today is 29 of December
* 한국인, 또는 ‘한국인 입니까?’의 뜻. 카레앙카 3세는 우즈베키스탄 태권도 국가대표로 발탁된 여성임. 태권도와 한국어를 통해 잃어버린 할아버지의 조국을 러시아에 알리고 있음
바그다드 카페
장선희
가슴 속 지도를 펼쳐놓고, 먼 항해를 떠나듯 설레고 있어
회벽에 걸린 시계, 새처럼 날 보고 있어
그 새, 피아노의 떨림판인 양 발자국이 지난 뒤에도 한참을 울지
면도날이 지나갔어,
바람에게 손이 없다는 건 거짓말이야, 커피머쉰에선 검은 강이 쏟아졌다는 건 정말이야, 주말이면 불꽃 문양의 팔뚝들이 신기루 따라 지나갔어
객(客)들은 목적도 없이 목적지도 없이 어디론가 떠날 채비를 하지, 아니, 돌아오는 게 여행의 목적인 사람들도 있지 사막엔 붉은 장미가 필요없어, 검은 페드라모자도 필요없어
낙타 속눈썹을 한 무희가 마룻바닥에서 수피춤을 추었어 누가 저 넘쳐흐르는 소리를 잠가줘, 열여섯 량 모래폭풍도 잠가줘
사막은 매직,
혼자서도 춤을 출 줄 알아
회오리아이스크림 비행기가 사막을 횡단하는 동안 여행가방은 구석에서 졸다 넘어졌지 가방주인은 뭐가 들었는지도 궁금해하지 않아, 마침내 맨발로 사막을 횡단할 결심을 했지
기면(嗜眠)의 음악이 흘러, 낡은 전투화를 매만지던 늙은 손들이 하나 둘 흘러간 뒤였어, 오렌지색 나무창문이 모래구릉을 야금야금 뜯어 먹던 늦여름, 모래바람을 주문했지
구름과 총성이 주술처럼 내달리는, 열여섯 량 모래폭풍이 지나간 뒤였어
바람의 굴곡을 따라 달라지는 꿈의 방향들, 자오선 긋듯 우뚝 일어서는 불꽃문양의 팔뚝들, 익숙한 거리 익숙한 얼굴을 지나치면 모서리에서 마주치는 낯선 얼굴들. 마침내 모래바람 속으로 떠난 여행가방, 주인의 거친 손아귀에 덥석, 낚아채이지
장터의 무스타파
장선희
무스타파가 장터에 나타나자 달과 별도 따라온다
걸어온 길을 양탄자로 말아놓고
낯선 관광지에 펼친 좌판,
벚꽃이 머리 위에서 예포를 터뜨린다
아이스크림 통 위로 두 뼘 남짓 올라온 무스타파
성소피아 聖像에 박힌 유리알은
자신의 운명을 저울질 한 적 없다
짙은 속눈썹 속에서 되살아나는 쌍봉 낙타
태양 아래 무릎 꿇던 기억이 떠오른다
서툰 한국말이 벚꽃잎 따라 장터를 날면
아이들은 아이스크림 통 주위를 붕붕댄다
엿장수 장구소리에 파묻힌 한국말
코브라처럼 슬슬 목을 치켜든다
-아이스크림 마. 띠. 써. 요
마법의 손 같은 쇠국자를 휘두른다
빙글빙글, 반달국자 속 아이스크림
거짓말같이 떨어지지 않는다
아이의 기다림 가득한 손에
이스탄불의 언덕 하나 얹어주는 무스타파
고깔과자 속엔 에게 해의 석양이 배어 있다
돌아온 시간은 또다시 둥글게 녹는데
꽃잎들의 몸부림 속,
회오리치는 그의 몸
가던 걸음들이 되돌아서고
케밥을 말아 쥐던 손으로 긴 국잘 다시 잡는다
마법의 맷돌에서 흘러나온 이국의 노랫가락
무스타파의 목에 오래도록 감긴다
<<장선희 시인 약력>>
*1964년 경남 마산에서 출생.
*부산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2012년 제1회 웹진 《시인광장》 신인상에 당선되어 등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