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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건상(張建相, 1882.12.19~1974.5.14) 선생은 서구 열강의 한국에 대한 침략이 본격화되어 민족적 위기감이 고조되던 1882년 12월 19일 경북 칠곡(漆谷)에서 장운원(張雲遠)의 네 아들 중 막내로 태어났다. 아명은 명상(明相), 호는 소해(宵海), 본관은 인동(仁同)이다. 다음 해인 1883년 선생은 부산 좌천동(佐川洞)으로 이사하고 좌천재(佐川齋)라는 서당에서 한문을 익혔다. 얼마 후에는 신학문을 도입하여 운영하고 있던 육영재(育英齋)라는 서당으로 옮겨 공부하면서 신학문에 큰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 후 선생은 1903년 서울에서 한성순보(漢城旬報) 주필로 있던 장지연(張志淵)의 주선으로 공립영어학교에 입학하여 1년간 수학하였다. 그러나 기대와는 달리 신학문보다 한문에 치중했으므로 선생은 선교사 제임스 게일 (James Gale, 한국명 기일(奇一))을 만나 그로부터 영어를 배우게 되었다. 1888년 한국에 건너와 활발하게 선교활동을 벌이고 있던 게일 선교사와의 이 같은 인연은 후일 선생이 미국 유학을 가게 되는데 결정적인 도움을 주었다.
1905년 러일전쟁이 종결된 이후 선생은 조국의 국권회복을 위한 실력을 양성하기 위해 러일전쟁 전승 시가행진이 한창 벌어지고 있던 일본 동경의 와세다대학 (早稻田大學) 정치경제학부에 유학하였다. 그러나 선생은 일본 당국의 민족차별정책으로 인해 1년을 못 넘기고 자퇴하였다. 일본에 망명해 있던 박영효(朴泳孝)의 주선으로 주일미국 공사관 무관 이스트레이크의 집에서 선생은 류동열(柳東說) 등 유학생 50명과 함께 기초적인 군사훈련을 받게 되었다. 학생 수가 약 100명으로 늘어나고 체제가 정비되어가는 것을 지켜보던 일본 당국은 압력을 가해 이 학교를 폐교시켰다. 선생은 이 사건을 계기로 적국에서의 유학의 한계를 통감하고 1907년 귀국하였다.
귀국한지 1년만인 1908년 200원의 여비와 게일 선교사의 미국대학 추천장만 지니고 연해주, 시베리아, 유럽 등을 거치는 미국 유학 길에 올랐다. 당시는 한국의 외교권이 박탈된 상태이므로 통감부의 주선을 통한 정상적인 출국은 전혀 기대할 수 없었다. 때문에 선생의 미국 유학 길은 시베리아의 원시림을 뚫고 러시아와 유럽대륙을 거쳐 미국으로 가는 모험에 가까운 먼 길이었다. 시베리아를 횡단하여 유럽을 경유하고 대서양을 건너 미국으로 간 사람은 한국인으로서는 처음이었다고 할 정도로 그 이후 아시아, 유럽, 미주대륙에 걸친 선생의 활동범위는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였다. 먼저 1908년 3월 청진(淸津)에서 상선을 타고 블라디보스톡으로 건너 간 선생은 그곳에서 한인 거류민단장 정순만(鄭純萬), 거유(巨儒)이자 항일의병장이었던 류인석(柳麟錫) 등을 만나고 페테르스부르크, 모스크바에서는 이범진(李範晋), 이위종(李韋鍾) 부자를 만났다. 그 후 독일, 프랑스, 영국을 거쳐 마침내 6월 미국 뉴욕에 도착하였다. 하지만 여권을 소지하지 못했기 때문에 미국 이민관리국 구치소에 억류되는 신세가 되기도 했다. 다행히도 선생은 헤이그평화회의에 참석하고 귀국하는 도중 잠시 뉴욕에 머물고 있던 이상설(李相卨)의 신원보증으로 석방될 수 있었다. 선생은 즉시 미국의 중부지역인 인디애나주로 가서 게일 목사의 추천장에 힘입어 기독교계통의 발프레이조(Valparaiso) 대학교 법학과에 입학하였다. 1912년 졸업 후에는 미국에서 흥사단(興士團)을 조직하고 활동하고 있던 안창호(安昌浩)로부터 함께 활동하자는 제의를 받았으나 중국으로 건너갈 일념으로 거절하였다.
선생은 34세가 되던 1916년 상해(上海)의 신규식(申圭植)으로부터 함께 일할 것을 희망한다는 연락을 받고 중국으로 건너갔다. 일찍이 신해혁명(辛亥革命)에 참가하여 중국의 혁명인사들과 교류하고 있던 신규식이 조직 운영하던 동제사(同濟社)에 가담하면서 선생은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전선에 뛰어들었다. 동제사는 1912년 7월 상해에서 신규식, 박은식(朴殷植) 등이 민족주의, 대동사상(大同思想) 이념으로 조직한 독립운동단체로서 각 지역에 지사를 설치하고 정보수집과 국내 독립운동의 활성화에 주력하고 있었다. 또한 박달학원(博達學院)을 설립하여 민족교육을 실시하는 등 상해지역 독립운동의 기반 조성에 주력하였다. 중국의 혁명인사들과 더불어 신아동제사(新亞同濟社)를 결성하여 한중연합의 기틀을 마련하기도 하였다.
선생은 동제사의 회원으로서 1917년 만주(滿洲) 안동현(安東縣)에 파견되어 영국상선(이륭양행 소속) 안동지사장 죠지 쇼우(George L. Show)와 친교를 맺으면서 국내로부터 오는 망명객의 길 안내역을 수행했다. 이때 길 안내를 해준 인물 가운데는 이후 독립운동에서 거목이 되는 김두봉(金枓奉), 김원봉(金元鳳)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특히 김원봉과는 의열단(義烈團), 민족혁명당(民族革命黨) 등 독립운동 전기간을 통해 동지적 관계를 유지하게 되었다.
1919년 국내에서 거족적인 3․1운동이 발발한 후 전민족의 독립운동을 지도하기 위한 임시정부 수립운동이 일어났다. 선생도 국내 독립운동가들의 망명길 안내로 동분서주하다가 김두봉과 함께 영국선박을 이용하여 상해로 갔다. 당시 상해에는 약 1천명에 가까운 독립운동지사들이 모여들어 임시정부 수립을 위해 활동하고 있었다. 이때 선생은 대한민국 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 수립을 위한 한인거류민단의 국민대회 준비위원이 되어 김규식(金奎植)․이시영(李始榮)과 함께 임정을 수립하기 위한 준비에 착수하였다.
1919년 4월 22일 임정의 수립․선포 직후 선생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임시의정원(臨時議政院) 회의에서 외무부(外務部)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때마침 외무부 총장 김규식이 파리강화회의 참석차 공석 중이었으므로 선생은 그를 대리하여 임정의 외교활동을 수행했으며 곧이어 외무부 차장에 선임되었다. 동시에 선생은 상해 임정의 외곽단체로서 1919년 7월 1일 회원 170여 명과 함께 대한적십자회(大韓赤十字會)를 조직하고 이광수(李光洙) 등과 함께 상의원(常議員)으로 선임되어 활동하였다.
그러나 상해 임정을 중심으로 모여든 독립운동가들 사이에 갈등이 잇달아 생기고 독립운동노선도 무력항쟁보다는 외교중심으로 치우치게 되었다. 이에 실망한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북경(北京)․만주 등지로 떠나가면서 임정은 처음의 기대와는 달리 군소 독립운동단체의 하나로 약화되었다. 1920년 겨울 무렵 평소 무장투쟁노선을 지향하여 일제의 의해 무단파(武斷派) 내지 과격파(過激派)로 불리던 선생도 임정의 활동에 회의를 느끼고 상해를 떠나 북경으로 가서 의열단 및 고려공산당(高麗共産黨), 국민대표회의(國民代表會議) 활동에 전념하였다.
1920년을 전후하여 북경에는 박용만(朴容萬)․신채호(申采浩)․신숙(申肅) 등 임시정부의 독립운동노선에 비판적인 인사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1921년 4월경 북경 서직문(西直門) 밖 삼패자화원(三牌子花園)에서 노령․만주․하와이 및 국내 등지의 8개 단체의 대표가 모여 군사통일회의(軍事統一會議)가 개최되었다. 이 회의에는 선생도 발기인으로 참여하였다. 군사통일회의는 만주지역의 독립군들과 연계하여 독립운동을 추진하자는 무장투쟁노선을 주장하였다. 또한 같은 시기 미국에 체재하고 있었던 이승만(李承晩)․정한경(鄭翰景)이 미국정부에 대해 우리나라를 위임통치해 달라는 청원서를 제출한 것이 알려지자 이를 동지와 같이 크게 성토하였다. 이승만은 물론 임시정부까지도 만장일치로 불신임하고 국민대표회의를 소집하기에 이르렀다.
그 결과 1923년 1월부터 6월까지 상해에서 각지의 독립운동단체 대표 140여 명이 모여 독립운동사상 최대 규모의 회의였던 국민대표회의가 개최되었다. 선생은 이때 서부 시베리아대표의 자격으로 상해에 왔으며 기존의 임시정부를 해체하고 새로운 정부를 수립할 것을 주장하는 이른바 창조파(創造派)의 일원으로 활동하였다. 그러나 회의는 결국 임시정부를 이름에 걸맞게 개혁시키자는 개조파와 임시정부를 없애고 신정부를 수립하자는 창조파, 기존의 임시정부를 그대로 유지하자는 정부옹호파로 팽팽하게 나뉘어짐으로써 5개월 여 동안 논쟁을 거듭하다 끝내 결렬되고 말았다.
같은 해 6월 북경(北京)에서 원세훈(元世勳)․신숙 등 창조파 세력은 국호를 ‘한(韓)’으로 하는 ‘국민위원회(國民委員會)’라는 독자적인 정부를 조직하였는데, 선생은 외무총장으로 선임되었다. 이 정부는 소련의 후원을 기대하면서 같은 해 8월 블라디보스톡으로 갔으나 레닌의 사망, 일로협상(日露協商)으로 한국독립운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할 처지가 못되었던 소련정부의 추방조치로 저절로 와해되어 버렸다.
한편 선생은 독립운동의 한 방편으로 새로운 돌파구를 찾기 위해 사회주의운동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선생은 러시아 볼셰비키당 산하의 이르쿠츠크 공산당 한인지부 간부인 조훈(趙勳)의 권유로 1921년 5월 이르쿠츠크에서 열린 고려공산당 창립대회에 참석하였다. 여기서 선생은 동당의 중앙위원 겸 7인 정치부의 한 사람으로 선출되고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공산당회의에 왕삼덕(王三德)․안병찬(安秉瓚) 등과 함께 대표로 참석하여 소련공산당 레닌을 면담하고 독립운동 자금 지원을 약속 받은 바도 있었다.
동년 9월에 선생은 이르쿠츠크 재로한인공산자대회(在露韓人共産者大會)에 참가하였으며, 그곳에서 보리스 슈미야츠키를 만났고, 이르쿠츠크회의에서 의장단으로 사회를 맡았다. 선생은 1922년에는 북경에서 의사개업을 했던 한진산(韓震山)과 손잡고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의 대외업무를 수행하였다. 같은 해 1월 22일에는 모스크바에서 열리는 극동피압박인민대회(極東被壓迫人民大會)의 참가대표 52인 중 1인으로 선발되어 참석하였다. 같은 해 12월에는 꼬르뷰로의 임원에 피선되었지만 오히려 선생은 블라디보스톡으로 가지 않음으로써 고려공산당에는 더 이상 직접 관여하지 않았다.
대신 1923년 겨울부터 선생은 북경에서 김성숙(金星淑), 장지락(張志樂) 등과 함께 창일당(創一黨)을 조직하고 급진적인 잡지 <혁명(革命)>을 간행하였다. 이 잡지는 격월로 발간되었고 1926년까지 3년간 계속되었다.
1926년부터 중국에서는 각지에서 분산되어 활동하고 있던 독립운동진영의 통일을 모색하기 위한 유일당 운동(唯一黨運動)이 일어났다. 유일당 운동은 국민대표회의 결렬 후 독립운동세력의 지역적 기반, 이념적 차이 등을 초월하여 민족대단결을 이루자는 것으로, 그 목표는 유일독립당을 결성하는 것이었다. 먼저 같은 해 10월 28일에 북경(北京)에서 한국유일독립당촉성회(韓國唯一獨立黨促成會)가 창립되어 각지에 집행위원들을 파견하였다. 이때 선생은 촉성회의 7인 집행위원 중 1인으로 선임되었으며 대표 조성환(曺成煥)의 요청으로 중국 남부지방에 특파되어 유일당 결성의 필요성을 호소하였다. 하지만 유일당운동은 중국의 국공합작이 붕괴되고, 또 좌우파 세력들간의 견해 차이가 노정되면서 좌절되었다.
선생은 상해 임시정부, 고려공산당, 군사통일회의, 국민대표회의 등 다양한 활동을 전개하면서 김원봉이 이끌었던 의열단과도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그 조직과 활동방향에 대해 깊이 관여하였다. 주지하듯이 의열단은 1919년 11월 만주 길림성(吉林省)에서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 졸업생들이 주축이 되어 기존 독립운동단체들의 미온적인 활동을 개탄하고 급진적인 독립운동을 표방하여 결성되었던 한국독립운동사상 큰 획을 그었던 단체였다.
선생은 의열단이 정식으로 창단을 선언하기 이전부터 임정의 박용만과 더불어 의열단 창단의 주역인 김원봉과 수시로 연락하고 있었다. 선생은 김대지(金大池) 등과 더불어 의열단의 후원자, 고문의 자격으로 혹은 기밀부(機密部) 요직을 맡아 활동하였는데, 일제가 선생을 의열단총장(義烈團總長)으로 지목하여 단장인 김원봉보다 앞 서열로서 보고하는 것으로 보아 의열단 내에서의 선생의 비중을 넉넉히 짐작해 볼 수 있다.
선생은 의열단의 ‘제1차 암살파괴계획(第1次 暗殺․破壞計劃)’부터 이륭양행 안동지사장 쇼오에게 의뢰하여 거사용 폭탄이 국내로 들어갈 수 있게 주선하였다. 그리고 1922년 3월 의열단의 일본 육군대장 다나카(田中義一) 사살 기도 사건에 대해 임시정부가 그 사건이 임시정부와 하등 관계가 없으므로 그들의 행동에 절대 책임을 질 수 없다는 공식성명을 발표하자 의열단은 임정과의 관계를 철회하고 대신 고려공산당과의 제휴를 통해 자금을 지원받고자 하였다. 선생은 고려공산당과 의열단이 합작하는데 가교 역할을 수행하였다.
이어 선생은 의열단의 제2차 국내 적 기관 및 요인 총공격 거사계획을 발안하고 김원봉과 함께 총지휘를 맡았다. 선생은 고려공산당 당원이자 제2차 거사의 행동대장이었던 김시현(金始顯)에게 다량의 고성능폭탄을 서울까지 반입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국내의 폭탄 은닉처가 일제의 기습을 받아 전부 압수되고 관련자들이 체포됨으로써 거사 실행은 또 한번의 좌절을 맛보게 되었다. 그 결과 1925~ 6년 경 의열단은 파괴활동보다는 민중직접혁명의 노선으로 전환하기 시작하였다.
1926년 선생은 중국 독립기념일인 쌍십절(雙十節)을 맞아 북경대학의 초청으로 강연을 하였다. 강연내용이 문제가 되어 “중국 인민을 선동하여 국권을 혼란시켰다”는 죄명으로 일경의 사주를 받은 중국 경찰에게 체포되었다. 다행히 북경의 항일적인 언론에 힙 입어 일경에 넘겨지지 않고 중국정부 재판에서 2년 형을 선고 받고 옥고를 치르게 되었다. 1928년 가을에 출옥한 선생은 김원봉을 만나 의열단의 고문으로서 활동을 재개하였다. 김창숙(金昌淑)과 독립운동 자금관계를 의논한 뒤 상해(上海)로 돌아와 김원봉(金元鳳)과 만나 폭탄을 만들어 국내에 반입하는 일을 지휘했다. 1930년에는 한때 북경(北京) 화북대학(華北大學) 영어교수로 재직하기도 했다.
그 후 1935년 의열단을 중심으로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 신한독립당(新韓獨立黨), 조선혁명당(朝鮮革命黨) 등이 연합전선을 구축하여 민족혁명당을 창당하였다. 민족혁명당은 처음부터 무장독립노선을 채택하고 화북, 만주, 상해, 조선 등지에서 선전활동과 일본 및 만주국 요인 사살 및 철도, 관공서의 폭파 등 군사활동을 전개하였다.
1937년 4월 17일 선생은 상해에서 민족혁명당원으로 활동하던 중 일본영사관 형사에게 피체되어 일본영사관에 6개월간 감금되었다. 그 후 결국 국내로 압송되어 1년 동안 국내 각 경찰서로 끌려 다니며 모진 고문을 받았다. 일제가 더 이상 기소할 법적 근거를 찾지 못하자 선생은 증거불충분으로 기소유예 석방되어 가택연금 상태에서 휴양하면서 국외로 탈출할 기회를 기다렸다.
마침 선생을 감시하고 있던 형사가 김원봉을 체포하기 위해 도움을 요청하자 그 기회를 역이용하여 1942년 국내를 탈출하여 만주․상해․홍콩을 경유, 중경(重慶)에 도착할 수 있었다. 1937년 중일전쟁 발발로 피난길에 나선 임시정부는 중국 각지를 전전한 끝에 최종적으로 중경에 안착하게 되었다. 그리고 1941년 12월의 태평양전쟁 발발을 계기로 중국 내 민족운동세력을 산하에 결집하는 한편 한국광복군(韓國光復軍)을 확대 강화하여 전면적인 항일전쟁을 준비하고 있었다. 선생이 중경에서 활동을 재개하면서 임정과 관계를 맺은 것은 1942년 제35차 임정 국무회의에서 외교연구위원, 국무위원으로 당선되면서부터였다. 나아가 1943년 4월에는 학무부장(學務部長)의 요직에 선출되었다.
1943년 8월 인도주둔 영국군과의 군사합작으로 한국광복군(韓國光復軍) 인면전구공작대(印緬戰區工作隊)가 파견되어 대적활동에서 눈부신 성과를 거두었다. 이어 같은 해 10월 조선민족혁명당에서 인도에 공작대원을 추가로 파견하기 위하여 중국 당국에 여권을 신청하였으나 중국국민당(中國國民黨)의 견제로 성사되지 못하였다. 이때 선생도 추가 파견 명단에 포함되어 있었다. 당시 선생은 이미 환갑을 넘은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다른 젊은 당원들과 함께 열악한 조건하의 인도․버마전선으로 가서 항일 전에서 일익을 담당하고자 하는 뜨거운 조국애를 발휘했던 것이다.
1944년 4월 제36회 임시의정원(臨時議政院) 회의에서 제4차 개헌이 단행되어 약 20명의 국무위원들이 선출되었는데, 선생은 조선민족혁명당 소속으로 무임소 국무위원에 선임되어 활약하였다.
1945년 4월 일본의 패전을 몇 개월 앞둔 시기 선생은 김구(金九) 주석의 요청으로 좌우합작 대동단결 협상을 위한 임정대표로서 조선독립동맹(朝鮮獨立同盟)의 본거지인 연안(延安)에 파견되었다. 일제에 대한 최후의 결전을 위해서는 임정과 조선독립동맹의 항일연합전선 결성이 초미의 과제로 부각되었으며 그 임무에 선생이 임정내에서 가장 적절한 인물로 판단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임정세력과 더불어 8․15직전 3대 해외항일운동세력의 하나였던 조선독립동맹은 산하에 조선의용군(朝鮮義勇軍)을 창설하여 화북지방 일대에서 활발한 항일운동을 벌이고 있었다.
중경을 출발한 선생은 광복군 제2지대 본부가 있던 서안(西安)까지 기차로 가 그곳의 광복군 제2지대장 이범석(李範奭)을 만나 연안까지 갈 길을 의논하였다. 서안을 출발하여 도보로 3일만에 연안에 도착한 선생은 경남 동래군 출신으로 전부터 알고 지내던 독립동맹 위원장 김두봉을 만난 자리에서 모든 해외의 독립운동세력이 대표자를 선정, 중경에 모여 연합전선 구축에 관해 협의할 것을 제의했다. 김두봉도 이에 찬성, 중경으로 떠날 것을 약속하는 등 조선독립동맹측 요인들과 좌우합작에 대한 합의점을 도출하게 되었다. 독립동맹측도 역시 일제 패전과 해방을 목전에 두고 해외항일세력의 통일․단결의 시급함을 절감하고 있었다. 그러나 일제의 무조건항복으로 광복을 연안에서 맞은 선생은 바로 만주를 거쳐 환국하자는 조선독립동맹측의 제의를 뿌리치고 다시 중경 임정으로 돌아왔다. 1945년 12월 1일 임정 2진으로 환국했는데, 선생의 나이 63세 때였다.
선생은 환국 후 동제사, 임시정부, 고려공산당 시절부터 절친하게 지내던 여운형(呂運亨)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주로 진보진영 내지 혁신계열에서 활동하였다. 선생은 환국후 가장 먼저 여운형을 만났고 그가 조직한 조선인민당(朝鮮人民黨)의 부위원장에 추대되어 해방정국의 정치에 처음으로 참여하게 되었다. 선생은 당시 해방정국의 극좌․극우의 편향성을 극복하고 중간좌파의 노선을 지향하였다.
그 후 임정의 독자적인 기구 비상정치회의주비회(非常政治會議籌備會)에 참여하였으나 우경적인 색채가 강해지자 1946년 2월 김성숙, 김원봉, 성주식(成周寔) 등과 함께 탈퇴하였다. 선생은 좌익진영이 중심이 되어 우익의 비상정치회의에 맞서 결성된 민주주의 민족전선(民族主義 民族戰線)에 참가하여 의장단으로 선임되었으며 그 해 민전 서울지부 공동의장단 일원이 되었다. 선생은 민주주의 단체와 협력하여 좌우 양익의 통일과 단결로 자주적 통일정권의 수립을 위해 열정적으로 활동하였다. 특히 선생은 민전 강연단의 일원으로 경상․전라․충청 일원을 순회하면서 자주국가를 세우기 위한 대동단결을 열성적으로 강연했다.
한편 민전이 미군정의 탄압으로 쇠퇴하면서 1946년 8월초부터 조선인민당, 조선신민당(朝鮮新民黨), 조선공산당(朝鮮共産黨)의 3당이 합동하여 남조선노동당(南朝鮮勞動黨)을 결성하자 여운형을 중심으로 사회노동당(社會勞動黨)이 발족되었다. 선생은 이 당의 중앙위원으로 선출되었다. 사회노동당도 남로당의 끈질긴 와해공작으로 해체되었으나 여운형을 중심으로 한 세력은 ‘광범한 민주세력의 결집’이라는 기치를 내걸고 1947년 5월 24일 근로인민당(勤勞人民黨)을 창당하였다. 선생은 부위원장에 선출되었으나 같은 해 7월 19일 동당의 위원장 여운형이 피살되자 구심점을 상실하게 되었다. 선생은 여운형의 뒤를 이어 동당의 위원장대리로 선출되어 근민당을 이끌어나갔다.
1948년 4월 선생은 근로인민당 위원장대리의 자격으로 평양에서 열린 전조선 정당․사회단체 연석회의(南北連席會議)에 참석하기 위해 38선을 넘어 평양으로 갔다. 회의에서 “우리 겨레는 공산주의를 가지고는 살 수 없다. 우리가 근로인민당 운동을 하는 까닭은 공산사회를 만들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평등의 이념으로 평화롭게 살려는 데 있다”는 문제발언으로 연금되었다가 북로당 위원장 김두봉의 도움으로 선생은 다른 인사들에 비해 보름이나 늦게 서울로 돌아왔다.
선생은 해방정국과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미군정청의 하지, 이승만 정권으로부터의 입각 요청 등 권력의 핵심에 진입할 수 있는 기회가 여러 차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때마다 거부하였다. 선생은 통일정부를 자주적으로 세우는 길은 남한 안에서는 좌우합작을 성사시키고, 한반도 안에서는 남북협상을 성사시키는 길 밖에 없다는 신념 때문에 정부의 요직에 입각하기 보다는 좌우합작운동과 남북협상운동에 전력을 기울였던 것이다.
1950년 5월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선생은 부산 을구에 입후보하여 전국 제4위의 다득표로 옥중당선되기도 하였다. 그 후 선생은 혁신계열의 정당․단체 활동으로 여러 차례 구속되어 옥고를 치르는 등 고난을 겪다가 1974년 5월 14일 91세를 일기로 서울 정릉 오두막에서 파란 많은 생애를 끝마쳤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86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