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겨버린 마음
청춘 남녀가 한 직장에서 근무를 하다보면 좋아하는 경우가 생긴다. 은근한 마음을 건네보고 싶지만 보는 눈들이 많아서 여간 조심스럽지가 않다. 내게도 그런 아가씨가 한명 있었다. 나처럼 먼 시골에서 직장을 따라 부산으로 온, 아주 겸손하고 총명한 아가씨였다. 검정고시로 고교졸업 자격을 얻어 통신대학을 3개학과나 졸업하고 대학원을 다닐 정도로 학구파였다. 사람이 원체 완벽하고 빼어나니 많은 총각들이 냉가슴을 앓았다. 당시 함께 근무한 직원들이 이 글을 읽는다면 그녀가 누군지 대번에 알 수 있을 정도로 됨됨이가 반듯한 소문난 여성이었다. 적당한 키에 세관유니폼을 입고 있으면 참 멋스러워 보였다.
그녀는 누가 시키지도 않는데도 늘 일찍 출근하여 사무실 청소를 하였다. 남들이 부탁하는 문서의 타이핑을 거절하지 못하고 밤늦게까지 남아서 다 쳐 주었다. 어떤 날은 손가락이 아파 혼자 울고 있는 모습을 보기도 하였다. 나는 그녀가 안쓰러워서 내 문서 작성은 내가 해야겠다며 타이핑을 배웠다. 말수가 적고 나이에 비해 생각이 매우 깊은 아가씨였다.
총각이었던 나는 아침일찍 출근하여 밀대로 사무실 바닥청소를 하곤 했는데 유독 그 아가씨 자리를 깨끗하게 닦아 주었다. 그녀도 내 책상에 물걸레질 할 때는 더욱 야무지게 닦아주는 듯하였다. 영어도, 일본말도 유창하게 잘하였다. 나는 그녀의 품행에 감동되어 “그대의 손끝이 지나는 곳 마다 노란 국화꽃이 한 송이씩 피어난다.” 고 적은 쪽지를 슬며시 서랍에 넣어 준적이 있지만 농담 한번 건네 보지 못하였다.
어느 날 퇴근 후 사무실에 남아서 통신대학 출석 시험을 대비한다고 공부를 하고 있는데 그녀가 퇴근을 하다 말고 사무실로 되돌아 왔다. 사무실에는 아무도 없었다. 나는 겉으론 태연한 척 하였지만 속으로는 안절부절하였다. 비가 와서 혹시 헌 우산이라도 없는가 하여 들른 것이라 하였다. 마침, 내 책상 서랍에 헌 우산이 하나 있었다. 그것을 그녀에게 주었다. 원채 낡은 것이라서 돌려받을 생각도 없었다.
당시 나는 하숙생이었다. 그녀는 내가 공부하고 있는 책을 보더니만 통신대학교 시험은 시험문제집을 많이 풀어 봐야 한다고 조언을 해 주었다. 한 사무실에 근무하였지만 그게 그때까지 내가 그녀와 나눈 말의 전부였다. 그날 나는 비에 흠뻑 젖어 하숙집으로 돌아 왔는지는 기억이 없다.
다음 날인가 사무실에 아무도 없을 때 그녀는 말없이 책 두어 권을 나에게 주더니 누가 볼세라 제 빨리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통신대학교 시험 문제집이었다. 나도 무언가 답례를 해야 했다. 궁리 끝에 성경책을 한 권 샀다. 달리 생각나는 책도 없었을 뿐더러 그때는 내가 교회를 아주 열심히 다니던 때였다.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하게 ‘만나자’는 쪽지를 서랍에 넣었다. 퇴근 후 서면(부산)의 어느 레스토랑에서 만났다. 데이트 하러 나온 젊은 아가씨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남루한 차림이었지만 단정하였다. 적은 월급으로 공부하랴, 살림하랴, 옷 사 입을 형편이 아니었을 것이다.
성경책을 건넸다. 교회를 다니던 아니던 세상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이 읽었다는 책이니 그냥 한번 읽어 보라며 주었다. 그녀는 빌려간 헌 우산을 돌려주었다. 찢어진 곳을 전부 꿰매었다고 하였다. 버려도 되는데 괜한 일을 하였다면서 우산을 펼쳤다. 팽팽하게 탄력을 받으며 활짝 펴진 우산 속은 흠 잡을 곳 한군데 없이 꼼꼼하게도 꿰매어져 있었다. 완전히 새 우산으로 바꿔져 있었다. 남루하였지만 단정한 옷차림, 완벽하게 고쳐진 헌 우산, 차분하게 앉아 있는 그녀 앞에서 나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나보다 세살이나 어린 사람이었지만 함부로 대 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 이후로 그녀와 나 사이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녀는 자기 마음을 더욱 깊숙이 감추어 버렸고,나도 예전 처럼 말 한마디 건네지 못하다가 인사이동을 따라 헤어졌다.
구미(龜尾)세관 근무시 통근버스를 타면 늘 내 옆에 앉게 되는 K 양이 있었다. 요즈음 나이로는 노처녀도 아니지만 그때는 스물여섯 만 넘어도 노처녀로 여기던 시절이었다. 당시 나는 결혼 1년차의 새 신랑이었는데, 어느 날 버스 안에서 내게 책을 한권 보여 주었다. 유명한 분의 수필집이라 기억된다. 누군가가 그녀에게 선물로 주었다고 하였다. 나는 책을 선물로 준 그가 총각인지를 물었다. 그렇다고 하였다. 문득 부산세관 근무시절의 아가씨가 생각이 나서, 책을 선물로 준 것은 좋아 한다는 마음을 숨긴 것이니 이쪽에서 호감이 있다면 놓치지 말고 잡으라고 진지하게 말해 주었다. 둘은 얼마 후 결혼 하였고 지금까지 잘 살고 있다.
책이 끌어다 준 인연이었지만 어떤 인연은 피해 갔고 어떤 인연은 맺어졌다. 성경책, 그것이 너무 무거웠던 탓일까 ? 아니면 그녀도 나를 함부로 대할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한 것일까? 분명한 사실은 내가 마음을 전하는 방법이 서툴렀다는 것이다. (200자 원고지 12.6매)
첫댓글 오랜만에 가슴 따뜻해 지는 글 읽었습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배려하는 마음이 곱고 귀합니다.
다만 아쉬운 점은 그 아가씨와 결혼까지 이어졌다면 하는 마음입니다.
그랬다면 수필이 되기 어려웠을 듯^^
지금 그 아가씨는 어떻게 살고 있을까.
아마도 몸사리지 않고 여전히 열심히 살지 않을까 싶네요. 성격이 칼 같던 제게 눈길 주는 남자 한명 없었던 걸 생각하니 웃음이 나네요.
별것 아닌 인생사에서 찰나 간의 순간도 이렇게 수필화 시켜 낼 수가 있다는 것을 보여 준 것일 뿐입니다.
기억에 남았다는 것은 그 순간이 아름다웠던 순간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
"이 순간이 지나면~:"이라는 노래도 있던데요^^
어려운 환경에서 공부하는 방송대 학생이라서 제게는 그 아가씨가 친근감이 더 가네요.
회장님 수필 중에 제일 쉽게 이해가는 글입니다. 입가에 빙그레 미소가 지어집니다.
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