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여름 더위를 물리치는 음식으로 냉면만 한 게 있을까? 한 그릇만 먹어도 오싹오싹! 시원한 냉면 한 그릇이면 땀이 쑥 들어간다. 얼음 동동 냉면 하면 평양냉면을 흔히 떠올리지만 중국냉면을 반기는 매니아층도 제법 두꺼워졌다. 그래서일까 중국냉면을 계절식으로 내놓는 중식당들이 나날이 늘고 있다. 그런데 한여름에도 뜨거운 음식을 즐기는 중국 본토에는 우리나라처럼 시원한 국물 형태의 냉면이 없다. 중국냉면이 언제 어디서 만들어졌는지 명확히 알 수는 없지만 짜장면처럼 우리 입맛에 맞게 토착화된 음식인 것만은 분명하다.
서울 속 리틀차이나타운, 연남동의 ‘매화’는 화상(華商) 3대째로 내려오는 오래된 중국 음식 명가다. 여름 계절식으로 내는 이 집 비취냉면은 중국냉면 매니아들 사이에서도 손꼽힐 만큼 명성이 자자하다. 비취냉면은 갸름한 그릇에 담긴 비주얼부터 품격이 남다르다. 해파리, 오향장육, 새우, 오이 등 다채로운 고명의 담음새가 얼마나 정갈한지 먹기가 아까울 정도. 슬러시처럼 살얼음 낀 국물은 한입만 먹어도 더위가 싹 가신다. 팔각, 산초 등 중국 향신료의 오묘한 향이 올라오면서 새콤하고 톡 쏘는 맛이 절묘하다. 여기에 땅콩소스를 알맞게 풀면 고소한 맛까지 더해져 환상의 조화를 이룬다. 보기만 해도 시원한 비취색의 가는 면발은 부드러우면서도 찰지고 오돌오돌한 해파리와 어우러져 더욱 쫄깃거린다.
비취냉면과 함께 이 집 여름별미의 투톱인 매화냉면은 동치미국물을 기본으로 중국 향신료를 넣지 않아 누구나 편안하게 즐길 수 있다.
이 집의 인기 면요리로는 여름의 냉면 외에, 겨울에는 개운한 매생이굴짬뽕, 굴이 나지 않는 철에는 속 편한 북어짬뽕이 있다. 가늘게 썬 고기와 매운 고추를 넣고 볶아낸 실고기고추짜장면도 꼭 먹어봐야 할 메뉴.
비취냉면이 창업 때부터 이어온 메뉴라면 매화냉면과 북어짬뽕, 고추짜장 등은 모두 3대째 가업을 이은 조동원(51)·류은경(51)씨 부부가 개발한 메뉴다. “이 가게를 물려받으면서 우리만의 메뉴를 개발하고 싶었어요.” 이들 부부가 만든 몇 가지 메뉴가 히트를 치면서 3대 주인장으로서 부모님의 인정을 톡톡히 받았다.
이 집 음식의 전통은 80여년 전 조동원씨의 조부 조진의씨가 창업한 ‘금락원’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1930년대 중국 산동성에서 한국으로 건너온 조진의씨는 당시 명동 중앙극장 맞은편에 중식당을 열었다. 이후 한국 현대사의 수난과 화교의 어려움 등 이중고를 겪으면서 여러 곳을 전전했지만 음식을 만드는 마음과 맛은 변하지 않았다. 지금의 ‘매화’ 자리는 1982년 조동원씨의 부친 조윤근(74)씨가 건물을 지어 문을 열었고 2002년 조동원씨가 대를 이었다. 긴 세월, 그간 주방식구들이 여럿 바뀌었지만 어려서부터 이 집 요리에 익숙해진 그의 입맛은 그대로다. 전가복, 오향장육, 깐풍중새우 등 매화의 소문난 요리들이 언제나 한결같다는 평을 듣는 비결이 바로 여기에 있다. 조씨는 주방에서 나오는 음식을 일일이 점검하는데, 향만 슬쩍 맡아도 음식이 제대로인지 금방 알아본다.
조씨는 중식당뿐만 아니라 화가로도 성공한 부친의 그림솜씨까지 물려받았다. 홍익대학교 미대를 졸업하고 강단에도 섰던 그와 아내는 화가부부다. 이들은 가업에 소명을 다하면서도 일이 끝나면 각자 치열하게 그림을 그린다.
주인장이 화가인 만큼 실내 인테리어가 남다르다. 가게 밖에서부터 조씨의 독특한 필체로 쓴 빨간 메뉴표가 눈길을 사로잡는다. 실내는 주인장 가족의 역사가 느껴지는 사진 액자들과 조씨 부친이 여행 다니면서 수집한 세계의 지폐들 200여종, 추억의 피규어 장식들로 무척 아기자기하게 꾸며져 있다. 지하와 지상 1층으로 나뉘어 있는데 지하에는 단체손님을 위한 룸과 칸막이 테이블이 있고 1층에는 바 테이블을 마련해 혼자 오는 손님들도 편안하게 식사를 할 수 있다.
▲ 매화 대표 조동원씨
아이 손님이 어른이 돼서 찾는 곳
손님들은 이 집 음식 맛이 깔끔해서 먹고 난 뒤 입안이 텁텁하지 않고, 전체적으로 기본기가 탄탄하다고 입을 모은다. 사천식으로 방향을 잡아 매콤한 음식이 많은 이유도 있지만 무엇보다 맛있고 건강한 음식을 만들겠다는 주인장의 철학이 음식에 배어 있기 때문 아닐까. 가장 대표적인 예로 조씨는 잘 익은 황매실로 직접 담근 효소를 모든 면과 요리에 넣어 맛을 더하고, 냉면 반죽조차 몸에 좋은 시금치즙으로 푸른 물을 들인다.
비취냉면을 비롯한 이 집 음식의 모든 면발은 야들야들 부드럽기로 유명한데, 그 비결은 반죽을 오랫동안 치대어서 하룻밤 숙성시키는 데 있다. 그런데 예상외로 이 집은 수타가 아니다. “사람 손으로는 한계가 있어요. 힘 좋은 기계로 반죽을 세게 치대어야 더욱 쫀득하고 매끈한 면발이 나옵니다.”
대개 중국냉면은 고기육수를 사용하는 데 반해 이 집 비취냉면은 북어, 새우, 가리비 등 비린내가 나지 않는 건조 해물로 우려내어 더욱 개운하고 깨끗한 맛을 낸다. 조씨가 개발한 매화냉면은 직접 담근 동치미국물에 매실장아찌와 닭고기 육수를 섞어 새콤달콤하게 입맛을 돋운다.
많은 경우 오랜 시간 조리해야 하는 메뉴는 인스턴트 제품을 사다가 쓰는데, 이 집에서는 언제나 신선한 재료로 직접 만드는 정성을 들인다. 비취냉면의 고명으로도 올라가는 오향장육이나 동파육(홍소육)도 직접 만들기에 육질이 살아 있다. 그런데 육질이 흐물거리는 통조림 맛에 익숙한 일부 손님들이 왜 살살 녹지 않느냐며 불평할 때는 정말 안타깝다고 한다.
한국의 중국 요리는 오랜 세월 나름의 맛으로 한국화되었기 때문에 중국 정통음식을 하는 본토의 요리사들은 한국의 오래된 중식당 음식 맛을 내지 못한다. 중국과 수교 이후 본토에서 주방장을 초청한 대형 중식당이 줄줄이 문을 닫은 이유다. 조씨는 한국화된 중식의 맛을 유지하기 위해 인건비가 아무리 비싸도 예전 화교들에게서 음식을 배운 사람만 주방식구로 들인다.
이 집은 연세 드신 분부터 학생까지 손님층이 다양하다. 외국 잡지에도 소개되어 일본 손님, 중국 손님들도 종종 찾는다. 최근에는 연남동이 뜨면서 젊은층 손님이 늘었다. 노포인 만큼 어린 시절 맛을 잊지 못하고 멀리서 찾아오는 젊은이들도 꽤 된다.
“얼굴에 온통 짜장 범벅이던 아이가 훌쩍 커서 친구를 데리고 왔어요. 우리 집을 보물 같은 집이라고 소개하는데 그 순간 가슴이 찡하더군요.” 조씨 부부는 손님들의 칭찬 한마디에 최고의 힘을 얻는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