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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년 다해 1월10일 [(백) 주님 세례 축일]
[수도회] 주일 세례 받은 사람다운 삶의 향기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 제1독서 이사 42,1-4.6-7
○ 제2독서 사도 10,34-38
† 복음 루카 3,15-16.21-22
‘주님 세례 축일’은 예수님께서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 받으신 일을 기념하는
날이다. 주님의 세례는 예수님께서 누구신지를 드러낸 사건이다. 그러므로
주님 공현 대축일과 깊은 관련이 있다. 전례력으로는 이 주님 세례 축일로
성탄 시기가 끝나고, 다음 날부터 연중 시기가 시작된다.
오늘 전례
○ 오늘은 예수님께서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공생활을 시작하심을
기념하는 주님 세례 축일입니다. 아기의 모습으로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시고
나자렛에서 자라신 예수님께서 이제 많은 이들 앞에 나타나시어 공적으로
활동하심을 기억하면서, 우리 가운데 계시는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입시다.
◈ 오늘의 묵상
예수님 당시에 사해 부근의 쿰란에는 독실한 마음으로 수계 생활을 하면서
하느님 나라를 기다리던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오늘날의 수도 생활처럼
공동체를 이루고 엄격하게 고행하며 단체 생활을 하였습니다. 이 공동체에
입문하려면 물로 씻는 예식, 곧 정화 예식을 거쳐야 했습니다. 여기서 세례는
회개를 전제한 죄의 용서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세례가 하느님의 자녀로 태어나고 죄의 용서를 받는 것이라면, 굳이
예수님께는 세례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요한에게 가시어 세례를
청하실 때, 요한도 당황하여 그분을 말리려 하였습니다(마태 3,14 참조).
논리적으로 말한다면 요한이 옳았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세례를 통하여, 죄인들과의 연대를 드러내십니다. 예수님께서 사람이
되심으로써 우리를 하느님의 자녀가 되게 하셨듯이, 세례를 받으심으로써
우리와 결합하시어 우리의 죄를 용서받게 하십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주님의 종은 꺼져 가는 심지도 끄지 않음으로써 민족들의
빛이 됩니다. 제2독서에서 베드로 사도가 예수님을 “만민의 주님”으로
고백하는 것은, 그분께서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시는 하느님의 뜻을 따라 모든
이를 낫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의인들과 건강한 이들만 당신 백성으로
삼으신다면, 예수님께서 모든 이의 주님이 되실 수는 없으셨을 것입니다.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아드님으로서 예수님께서 지니셨던 권위와 능력은,
높은 이들의 복종을 받아 내시는 것이 아니라 약하고 죄스러운 모든 이를
받아들이시는 것이었습니다.
세례자 요한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우리는 예수님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릴
자격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이신 예수님께서는 우리
죄인들을 위하여 우리와 같은 운명을 받아들이셨습니다. 몸 둘 바를 모르겠고
그저 송구스러울 따름입니다.
- 매일 미사 -
◈ [인천] 소중한 가치들이 바로 나에게 해당하는 소중한 가치
2016년 다해 1월10일 주님 세례 축일
제1독서
<여기에 나의 종이 있다. 그는 내 마음에 드는 이다.>
○ 이사야서의 말씀입니다. 42,1-4.6-7<또는 40,1-5.9-11>
제2독서
<하느님께서 예수님께 성령을 부어 주셨습니다.>
○ 사도행전의 말씀입니다. 10,34-38<또는 티토 2,11-14; 3,4-7>
복음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를 하시는데, 하늘이 열렸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3,15-16.21-22
언젠가 어떤 동화에서 본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자신의 그림자를 볼 때마다 마음에도 들지 않고, 보기가 싫어져서 괴로워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자기 그림자를 버리고 싶어 했지만, 걸을 때마다 그림자가
따라붙은 것입니다. 그럴수록 그는 점점 더 빨리 걸었고, 그만큼 그림자는
빠르게 따라왔습니다. 그는 더 빨리 뛰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그림자 역시
기를 쓰고 더 빨리 따라왔지요. 결국 그는 그림자를 피해 도망가다가 지쳐서
쓰러져 죽고 말았습니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아마 이런 내용이었던 것 같습니다. 만약 자신의 그림자가
정말로 싫다면 그림자가 생길 수 없는 어두운 그늘 속으로 들어가면
그만입니다. 그리고 그림자가 보이지 않으니 그 그늘 속에서 충분한 휴식도
취할 수가 있었겠지요.
그런데 현대인의 모습이 마치 앞선 이야기의 주인공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즉, 일이라는 그림자에 쫓기면서 살고 있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입버릇처럼 하는 말이 무엇입니까?
“바쁘다, 바뻐.”
며칠 전에 어떤 분으로부터 인사이동 전에 식사나 한 번 하자는 말을
들었습니다. 저는 날짜를 잡으려고 일정표를 보았습니다. 하지만 계속해서
무엇인가가 있는 것입니다. 인사이동을 위해 짐을 싸야 할 시간조차
없어보여서, 나중에 기회를 만들자고 하면서 약속을 미뤘지요. 그런데 지난
시간을 생각해보니 충분히 시간을 낼 수도 있었습니다. 조급한 마음으로
인해서 단 한 시간도 낼 수 없다고 단정 지었던 것이지요. 저 역시
‘바쁘다.’ 병에 걸려서 여유 없는 생활을 한 것입니다.
급박하게 변해가는 세상의 흐름을 쫓다보면 사랑, 평화, 행복, 희망 등의
가치들을 잊어버리게 됩니다. 실제로 여유 있는 삶 안에서, 그리고 묵상과
기도의 삶 안에서 소중한 가치들을 더 많이 찾았었음을 조금만 생각해보면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은 예수님께서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공생활을 시작하심을
기념하는 주님 세례 축일입니다. 사실 주님께서는 전지전능하신 하느님으로
굳이 세례를 받으실 필요가 없는 분이십니다. 그런데도 세례를 받으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우리를 위해 직접 모범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아무런 죄가 없기에 세례를
받으실 필요도 없지만, 나약함과 부족함을 안고 있는 우리 인간들은 회개하고
기쁜 소식을 받아들이는 세례를 통해서만 하느님과 함께 할 수 있기에 반드시
그렇게 해야 한다고 직접 세례를 받으셨던 것입니다.
이 주님의 사랑 가득한 배려를 기억하면서, 이제는 세상의 바쁜 흐름 속에서
정말로 중요한 가치들을 잃어버리는 삶에서 벗어나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는 하느님과 함께 하면서 중요한 가치들을 우리들의 마음속에 하나씩
담아두어야 할 것입니다. 사랑, 평화, 행복, 희망 등의 소중한 가치들이
남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나에게 해당하는 소중한 가치임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날그날이 일생을 통해서 가장 좋은 날이라는 것을 마음속 깊이 새겨두라
(에머슨).
어제가 먼저 하늘나라에 간 제 동창신부의 기일이었습니다.
서두름에서 벗어납시다.
‘서두름은 악마가 고안한 것이다.’라는 이탈리아 속담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
서두름에서 벗어나기란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서두름의 이유가
세상의 일을 하다가 생긴다는 것입니다. 자신에게 무한한 시간이 있는 듯이,
정신없이 세상의 일만 하다가 어느 순간 뒤를 돌아보며 허탈감에 빠지게
됩니다. 실제로 죽음을 앞둔 사람들에게 가장 후회되는 것이 무엇이냐고
물어보면 “일 좀 덜 할 걸”이라고 대답하시는 분들이 참으로 많다고 하십니다.
세상일에 서두르다가 중요한 가치들을 놓쳐 버렸기 때문입니다.
혼자 살고 있는 저로써는 혼자 식사할 때가 많습니다. 식사하는 시간이 얼마나
될까요? 한 10분이나 될까요? 혼자 식사를 하다보면 아무리 천천히 먹으려고
해도 쉽지가 않습니다. 그런데 누군가와 함께 식사를 한다면 어떨까요?
묵묵히 식사만 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대화를 나누면서 식사를 한다면 분명히
1시간 가까이 시간이 필요할 수밖에 없습니다.
서두르지 않기 위해서는 내 이웃들과 함께 하는 마음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그래야 소중한 가치들을 내 마음에 가득 간직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어제 동창신부 기일미사에 함께 했던 신부들입니다.
- 인천교구 갑곶 성지 조명연 마태오 신부 -
◈ [서울] 주님 세례 축일
2016년 다해 1월10일 주님 세례 축일
제1독서
<여기에 나의 종이 있다. 그는 내 마음에 드는 이다.>
○ 이사야서의 말씀입니다. 42,1-4.6-7<또는 40,1-5.9-11>
제2독서
<하느님께서 예수님께 성령을 부어 주셨습니다.>
○ 사도행전의 말씀입니다. 10,34-38<또는 티토 2,11-14; 3,4-7>
복음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를 하시는데, 하늘이 열렸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3,15-16.21-22
본당 ‘성소후원회’ 탐방을 다니고 있습니다. 어떤 본당은 미사, 강론,
성소후원회 회의 참관을 부탁하기도 합니다. 어떤 본당은 회의만 참석하면
좋겠다고 이야기 합니다. 어떤 본당은 하루 피정을 해 주면 좋겠다고 이야기
합니다. 탐방을 다니면서 한 가지 분명하게 느끼는 것이 있습니다. 교구청에
있으면 알 수 없는 것들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어떤 본당은 복음나누기와
같은 형식으로 성소후원회 모임을 갖습니다. 어떤 본당은 묵주기도를 하고,
기도문을 읽는 형식으로 성소후원회 모임을 갖습니다. 이번 탐방을 통해서
알 수 있었습니다. ‘성소’는 많은 분들의 기도와 관심이 있어야 자라는
것입니다. 본당 신부님의 격려, 성소후원회원들의 기도, 신학생들의 모범이
있으면 마치 좋은 밭에 뿌려진 씨앗처럼 ‘성소’의 열매가 맺어질 것입니다.
본당에 있을 때도 비슷한 일을 하였습니다. 구역을 찾아가서 미사를
하였습니다. 구역의 신자들과 함께 하는 미사는 본당에서 하는 미사와는 조금
달랐습니다. 쉬는 교우를 만나서 고백성사를 주기도 했고, 함께 음식을
나누면서 친교를 나누었습니다. 구역마다 특징이 있는 것을 알게 됩니다.
어떤 구역은 악기 연주를 잘 하기도 하고, 어떤 구역은 음식 장만을 잘 하기도
하고, 어떤 구역은 나눔을 잘 하기도 합니다. 모든 구역이 하느님 정원의
화사한 꽃밭을 일구는 것 같아서 좋았습니다.
매달 구청으로 가서 미사를 구청직원들과 미사를 함께 했었습니다. 미사를
통해서 하나 될 수 있었고, 서로에게 힘이 되어주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힘들고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구청미사를 준비하는 분들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신청사를 완공했을 때는 축복미사를 함께 했습니다. 구청은
문화공간으로, 열린 공간으로 지역 주민들에게 편의를 제공해 주었습니다.
서서울 지역의 교육을 구청의 다목적 홀에서 하기도 했습니다. 이 또한 함께
지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이 되셨습니다. 사람 사는 세상에서 우리와 함께 하시고자
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희로애락을 알게 되셨습니다. 관념이 아니라,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서 우리들의 음성을 들어주셨고, 사랑해 주셨습니다.
오늘은 예수님께서 세례를 축복해 주신 날입니다. 이제 세례는 단순히 정화의
예식에서 벗어나 인류 구원을 위한 출발점이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심으로 해서 세례는 ‘죄의 용서’를 받는 예식이 되었습니다. 하느님을
따르고,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살아가도록 결심을 새롭게 하는 것이
세례입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셨기 때문에 세례는 이제 ‘새로운 탄생’
이 되었습니다. 새로운 이름을 얻게 되며, 가족이나 혈연의 틀을 벗어나
하느님의 자녀로 태어나는 것이 세례입니다.
세례를 받은 사람은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합니까? 오늘 제1독서는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 잘 알려주고 있습니다. “여기에 나의 종이 있다. 그는 내가
붙들어 주는 이, 내가 선택한 이, 내 마음에 드는 이다. 내가 그에게 나의 영을
주었으니, 그는 민족들에게 공정을 펴리라. 그는 외치지도 않고 목소리를
높이지도 않으며, 그 소리가 거리에서 들리게 하지도 않으리라. 그는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꺼져 가는 심지를 끄지 않으리라. 그는 성실하게 공정을
펴리라. 그는 지치지 않고 기가 꺾이는 일 없이, 마침내 세상에 공정을
세우리니, 섬들도 그의 가르침을 고대하리라.”
예수님께서는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성실하게 하느님의 뜻을 전하였고, 지치지 않고, 기가 꺾이지
않았으며 하느님 마음에 드는 삶을 사셨습니다. 세례는 우리를 하느님께로
이끌어 주는 필요조건이지만 그것이 우리를 하느님께로 이끌어 주는
필요하고도 충분한 조건은 아닙니다. 오늘 제2독서는 우리가 가야할 길을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이 예수님께서 두루 다니시며 좋은 일을 하시고,
악마에게 짓눌리는 이들을 모두 고쳐 주셨습니다. 하느님께서 그분과 함께
계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세례 축일입니다. 세례를 통해서 변화된 삶을 살았는지 돌아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모두 세례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단순히 이름이 예뻐서,
부르기 좋아서, 생일에 가까운 축일이 있어서 세례명을 정한 것은 아닐
것입니다. 우리가 세례명을 정하는 것은 이미 천국에서 영원한 삶을 살아가는
성인과 성녀들의 삶을 본받기 위해서입니다. 그분들의 도움을 청하며
세상이라는 험난한 파도를 이겨내기 위해서 세례명을 정하는 것입니다. 오늘
하루, 나의 세례명을 한번 묵상하면 좋겠습니다. 아직 세례를 받지 못한
분들은 죄의 용서를 받으며 하느님의 자녀로 새롭게 태어나는 ‘세례’를 잘
받을 수 있도록 열심히 준비를 해야 하겠습니다.
- 서울 대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서울] 자기 자신이 불일치면 인간 폐기물
2016년 다해 1월10일 주님 세례 축일
자기 자신이 불일치면 인간 폐기물
내가 한 말은 나를 표현한 것이며 언젠가 다시 내게 돌아올 겁니다.
나 자신이 불일치면 내가 무너지는 것, 그러면 나는 폐기물인 겁니다.
죽으면 역사가 당연히 폐기처분할 사람을 누가 인격자라 하겠습니까.
하늘과 일치한 사람 예수님을 믿고 사랑하는 신앙인 참 훌륭합니다.
하느님+예수님+성령님, 삼위일체 외형을 보이신 점 감탄스럽습니다.
우리도 자신이 한 말을 책임지는 나+말+책임, 언행일치는 해야지요.
“성령께서 비둘기 같은 형체로 그분 위에 내리시고, 하늘에서 소리가
들려왔다.‘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루카 3,22)”
- 서울 대 교구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 -
◈ [수도회] 주일 세례 받은 사람다운 삶의 향기 - 기 프란치스코 신부
2016년 다해 1월10일 주님 세례 축일 루카 3,15-16.21-22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루카 3,22)
세례 받은 사람다운 삶의 향기
오늘 복음은 요한의 증언과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발현을 통해 예수님이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선포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요한에게서 세례를 받고
메시아로서 공생활을 시작하십니다.
오늘의 축일을 지내면서 세례 받은 나는 누구이며,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생각해봅니다.
먼저 세례 받은 나는 하느님의 선택을 받았고, 그분 마음에 들며
하느님으로부터 성령과 힘을 받은 사람으로서
(이사 42,1; 루카 3,22; 사도 10,38) 모든 이의 빛(이사 42,3)으로 살아야 하는
존재입니다. 따라서 세속의 정신이나 나의 생각과 의지가 아니라 예수님을
중심에 모시고 주님의 영(靈)에 따라 살아야겠습니다.
틈만 나면 내 생각이 앞서고 내 뜻대로 살려고 하는 ‘육’(肉)의 경향에
휩쓸리곤 하는 우리입니다. 주님의 영을 지니고 살려면 끊임없이 말씀을
경청하고 되새기며, 기도하면서 자신을 하느님 앞에 두어야겠지요. 주님의
뜻을 따를 것인지 현실과 타협할 것인지를 선택해야 하는 순간마다 내 생각과
의지를 내려놓는 수행을 시작할 때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예수님과 늘 함께 계셨습니다(사도 10,38). 세례 받은 나는 이
사실을 기억하며 살아야 합니다. 하느님과의 관계에서조차 ‘더 많이’,
‘더 빨리’라는 무의식의 작동에 자신을 내맡겨버리는 오늘입니다.
성인(聖人)이 되지 못하는 것은 몰라서가 아니라 이미 들은 말씀을
망각해서이고, 늘 함께 계시는 주님을 잊은 채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것 하나만 새기며 살아도 영적 성숙은 훨씬 빨라질 것입니다.
세례 받은 나는 무엇을 실행해야 할까요? 주님의 종처럼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꺼져 가는 심지를 끄지 않으며, 성실하게 공정을 펴고 세우며 살아야
합니다(이사 42,3-4). 곧 다른 이들의 희망이 되어주고 의로운 일을 행하며
바른 인생을 사는 것이 우리의 몫입니다.
세월호 침몰로 죄없이 희생된 이들의 가족들의 울부짖음이, 위안부
할머니들의 한숨소리가, 비정규직과 실직에 내몰린 이들과 농민들의 처절한
몸부림이, 가진 자와 힘 있는 이들의 부당하고 불의한 처사에 억울해 하는
이들의 분노가 세포 하나하나에까지 스미며 우리를 슬프게 하는 이 땅에서
신앙인의 자리는 어디일까요?
세례 받은 우리는 소경의 눈을 뜨게 하고, 갇힌 이들과 어둠 속에 있는 이들을
해방시켜 주도록 불림 받았습니다(이사 42,7). 예수님처럼 우리도 평화의
복음을 전하고(사도10,36), 좋은 일을 하며 악마에게 짓눌리는 이들을 고쳐
주어야겠습니다(10,38).
주변을 둘러보면 묶이고 매이고 맺힌 이웃이 너무나 많습니다. 지옥처럼
힘들고 고통스러워 떠나고 싶은 오늘의 한국의 상황을 ‘헬조선’
(Hell+ 朝鮮)이라 할 정도입니다. 그러나 이런 때일수록 누가 어디에서
묶이고 갇히고 맺혀 울부짖고 슬퍼하며 고통받고 있는지 사랑 지극한 눈으로
살피며 다가가, 자유와 해방이 되어주셨던 예수님을 삶으로
선포해야겠습니다.
오늘 하루 잠시 멈추어 세례 때의 약속을 회상하고, 세례 받은 나의 소명에
좀 더 충실하도록 마음을 다지며 그리스도의 향기가 되길 기도합니다.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
◈ [수도회] 알타반의 말씀사랑
2016년 다해 1월10일 주님 세례 축일
<여기에 나의 종이 있다. 그는 내가 붙들어 주는 이, 내가 선택한 이, 내
마음에 드는 이다.> (이사 42,1)
우리는 세례를 통해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큰 선물인지 우리는 잘 잊어 먹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세례 때에 예수님의 세례 때와 마찬가지로
하늘이 열리는 것을 보게 하시고 성령을 보내주시면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딸), 내 마음에 드는 아들(딸)"이라 하셨습니다.
이사야 예언자가 일찌기 예언한 말씀으로 여러분을 축복해 주셨습니다.
"여기에 나의 종이 있다.
너는 내가 붙들어 주는 이, 내가 선택한 이, 내 마음에 드는 이다."
세례는 이처럼 하느님의 우리에 대한 애정의 표현이고
우리를 당신 자녀로 삼으시는 축복입니다.
오늘 나를 이토록 예뻐하시고 마음에 들어하시고 붙들어 주시는
주 하느님의 자비와 따뜻함을 눈을 지긋이 감고 느껴봅시다.
그리고 내가 세례받은 날을 다시 회상해 봅시다.
하느님의 이토록 크신 사랑을 받으시는 여러분께 축하드립니다.
- 작은 형제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 -
◈ [수도회]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강론 묵상
2016년 다해 1월10일 주일 주님 세례 축일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루카 3,15-16. 21-22)
가장 좋으신 하느님의 사랑을 세례를 통해 보게 됩니다.
가장 좋으신 하느님의 마음을 세례를 통해 만나게 됩니다.
우리가 얼마나 귀한 존재인지를 주님 세례를 통해 배우게 됩니다.
또한 우리가 누구의 자녀인지를 절실히 깨닫게 됩니다.
하느님의 소중한 자녀들입니다.
결국 사랑과 세례는 하나입니다.
모두 하느님으로부터 출발한 성령의 선물입니다.
세례는 하느님을 향해 열려진 우리가 사랑의 신비에 동참하는
그리스도인의 참된 자유입니다.
세례는 세례의 삶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세례의 삶이란 자아를 내려놓고 하느님을 드러내는 삶입니다.
자아가 부서지는 십자가의 사랑없이는
사랑하는 세례의 삶이 될 수 없습니다.
사랑받는 세례에서 사랑하는 세례로 나아가야 합니다.
하느님과 우리 사이에는 십자가가 있습니다.
세례의 삶이란 십자가를 통해 하느님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랑이 있는 곳에 세례가 있고 세례의 삶이 있는 곳에 사랑의 삶이 있습니다.
진정한 세례의 삶은 성령을 통해 십자가를 품는 삶입니다.
-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 -
◈ [청주] 다시 태어난 사람|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6년 다해 1월10일 주님 세례 축일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를 하시는데, 하늘이 열렸다.>
+ 루카 3,15-16.21-22
다시 태어난 사람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사랑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불러 주셨습니다. 이 시간 하느님의 자녀로
새롭게 태어난 것에 감사를 드리는 가운데 주님의 풍성한 은총을 입으시기
바랍니다.
‘저는 어려서 세례를 받았습니다. 태중교우 입니다. 그런데 요즈음은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지 못했습니다. 생활이 바쁘다 보니 하느님도 잊고
지냈습니다. 이제 다시 시작하려고 합니다’ 하고 말씀하시는 분들을 종종
만나게 됩니다. 다시 시작한다고 하시니 박수를 보내드립니다. 사실 세례를
언제 받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세례의 의미를 지금 어떻게 살고
있느냐가 중요합니다. 어머니를 통해서 세상에 태어났음이 큰 기쁨이요,
세례성사로 하느님의 자녀로 태어남은 영생의 초대이기에 더더욱 큰 기쁨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 기쁨을 잘 간직해야 하겠습니다.
어느 깊은 산 속에서 산나물을 캐던 칠순 할머니가 산골짜기에서 솟아나는
샘물을 먹고 어여쁜 아가씨로 변하였습니다. 집에 돌아 온 그는 늙은 영감에게
이 같은 사연을 이야기하니, 자기도 젊어지겠다고 일러준 곳으로 갔습니다.
그러나 할아버지는 너무 욕심을 부려 지나치게 퍼먹었는지 갓난아기로
변해버렸답니다.
우리의 모습을 생각하게 합니다. 세례성사를 통해 하느님의 생명으로 다시
태어났다고 하면서도, 삶이 바뀌지 않고 자기 욕심만 차리고 산다면,
언제까지나 갓난아기로 머물러 있을 것입니다. 신앙이 조금도 성숙하지
못하면, 신앙생활이란 날로 짐스럽고 힘들어만 가며 신앙은 결코 달고
가벼워야 할 사랑의 짐이 되지 못할 것입니다. 자기 자신만을 위한 전능하신
하느님으로 행세해 주기를 바라는 사람이 있다면, 이웃이야 어찌되든 자기
욕심만 채워지기를 바라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그야말로 잘못된 기복신앙을
사는 사람입니다. 하느님의 자녀로 태어남은 죄악으로부터의 해방이요,
자유를 얻는 것이고 매일 매순간 거듭 태어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삶이 어렵다고는 하지만 하루끼니를 몽땅 거르고 지나는 분은 없습니다. 혹
그렇게 한다면 몸의 기운이 떨어져 할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하게 됩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인이라고 하면서 신앙의 영양을 섭취하는 기도와 미사를
소홀히 한다면 신앙의 맛을 느낄 수 없고 바른 신앙생활을 할 수 없게 됩니다.
밥맛이 없어도 기운을 차리려면 밥을 먹어야 합니다. 그렇듯이 기도가
무의미한 것처럼 느껴지더라도 기도해야 합니다. 그때야말로 기도할
때입니다. 기도를 하여야 그 무미건조함을 극복할 수 있고 더 큰 은총을 입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하여 하느님이시면서도 철저히
인간의 모습으로 다가오셨습니다. 그래서 죄 없으신 분이 죄인의 틈에 끼여서
세례를 받으셨고, 그것은 누구나 새로 태어나기 위해서는 세례를 받아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또 예수님께서는 죄인들과도 함께
하신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물로 씻는다’, ‘물에 잠긴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물에 잠긴다는 것은 죽음을 의미합니다. 세상의 욕망에 죽는 것입니다.
포기와 버림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모든 것을 내려놓고 종의
신분을 취하시고 이 세상에 오신 것 자체가 이미 죽음입니다.
그러나 물에 잠기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잠겼다가 씻고 다시 나옵니다. 물은
생명을 상징하고 다시 나오는 것은 다시 태어난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죽었다가 다시 태어나는 것’입니다. 부끄러운 나의
과거를 깨끗이 정화해 주시고 예수님과 더불어 새 삶을 시작하게 해 주셨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씀대로 ‘그리스도를 옷 입듯이 입은
것입니다.’ 따라서 매일 매일 또 하나의 그리스도로 거듭나는 삶을 살아서
세례의 의미를 새롭게 해야 하겠습니다. 사실 세례성사를 통해 하느님의
자녀로 새롭게 태어난 날은 육신적으로 태어난 날 보다 더 은혜로운 날입니다.
하늘에 나의 이름이 기록된 날이요, 내 인생을 천상의 삶으로 새롭게 출발하는
날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표징으로 새 이름, 세례명을 받았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천상의 이름을 자주 불러 주어야 하고 새 이름에 걸 맞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여러분은 쓰리고를 아십니까?
1. 불러주고(세례명) 이름을 불러주세요, 나 거기 서 있을께요. ‘당신은 새로
태어난 사람입니다.’ 확인 시켜 주는 것입니다. 세례명을 불러주십시오.
2. 보아주고, 불렀으면 그 사람을 봐줘야! 얼굴을 보면, 눈을 마주치면 그
사람의 마음을 읽을 수 있잖아요. 그의 필요를 채워줄 수 있습니다.
3. 잡아주고, 격려해 주는 것입니다. 등을 토닥여 주고, 손을 잡아주고 위로
해 주는 것입니다. 내가 너와 함께한다는 마음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즘 세상은 “쓰리고”하니까 놀고, 먹고, 마시고, 즐기는 육적인 것
에만 마음을 씁니다. 술 좋아 하는 사람 주변에는 어떤 사람이 모이겠어요?
노름 좋아하고 화투를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유유상종입니다. 우리는 세상
것의 매력을 극복해야 할 소명이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오히려 우리는
기도와 미사참례를 즐겨하고 전교를 기뻐하며 성경공부를 그리워하는 그룹이
되어야 합니다.
‘쓰레기통’의 동의어는 ‘성직자’랍니다.
‘정철’이라는 분은 이런 글을 썼습니다.
"쓰레기통 같은 사람.
남들이 인상 찌푸리는 것을 껴안는다. 아무 불평 없이.
가운데 자리 마다하고 구석으로 간다. 아무 불만 없이.
화려한 것, 화려한 곳만 찾는 성직자가 있다면
그는 쓰레기통 같은 사람이 아니라 쓰레기일지도 모른다."
저에게만 해당되는 얘기일까요? 각자의 본분에 충실하지 못한 사람은 어느새
쓰레기가 되고 맙니다. 이러저러한 환경이나 여건을 탓하거나 핑계 대는 일
없이 근본에 충실해야 하겠습니다.
온 백성이 세례를 받으신 뒤에 예수님께서도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하시는데,
하늘이 열리며 성령께서 비둘기 같은 형체로 그분 위에 내리시고, 하늘에서
소리가 들려 왔습니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루카3,22) 이 말씀은 다른 말로 표현하면, “너는 나의 귀염둥이,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나의 사랑이다” 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이 말씀은 결코 예수님께만 국한된 말씀이 아닙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세례성사를 통하여 하느님의 자녀로 태어날 때 듣게 된 음성입니다.
내가 잘나고 똑똑해서, 그런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한없는 사랑이
우리를 들어 높여 주시고 사랑해 주시며 마음에 들어 하십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삶의 모범을 당신 자신을
십자가의 희생 제물로 바침으로써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바라보며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자녀로 사는 법을 철저히 배워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죽을 때까지 거듭나야 합니다. 지속적인 회개생활 안에 하느님의
자녀로서 주님 안에 항상 거듭나야 합니다. 세례로 말미암아 얻은 은총을
새롭게 하는 오늘이기를 희망합니다.
우리는 세례를 받으며 고백했습니다. “마귀와 마귀의 모든 행실과 마귀의
모든 유혹을 끊어 버립니까?” “끊어버립니다.” “천지의 창조주 전능하신
하느님을 믿습니까?”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님 동정 마리아에게서
나시고 고난을 받으시고 묻히셨으며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하시고 성부
오른편에 앉아 계심을 믿습니까? 성령을 믿으며 거룩하고 보편된 교회와
모든 성인의 통공을 믿으며 죄의 용서와 육신의 부활을 믿으며 영원한 삶을
믿습니까?” “믿습니다.” 이렇게 고백하며 하느님의 자녀로 새롭게
태어났습니다. 그러므로 세례받기 이전의 삶과 이 후의 삶은 분명히 달라야
합니다.
그런데 정초를 맞이해서 해맞이를 간다고 야단법석을 떱니다. 해가 복을
주나요? 해를 주신 하느님이 복의 주체이십니다. ‘점집’에 드나드는 사람도
있습니다. 사주팔자를 보러 소위 ‘용하다는 집’을 찾는답니다. 용하다는
사람이 왜 자기의 앞은 못보고 그렇게 사는지 모르겠습니다. ‘신천지’에
기웃거리는 사람, 이미 발을 담그고 다른 사람을 한 번 와보라고 유혹하는
사람도 있답니다. 그는 한입으로 두말 하는 사람이요, 주님을 배반하는
사람입니다. 그에게는 하느님께서 주시는 축복이 점점 멀어지고 있습니다.
세상에 대해서 죽고, 천상 것에 마음을 두는 기쁨을 회복하시길 기도합니다.
바닷물이 썩지 않고 늘 푸른 생명력으로 살아있는 것은 그 안에 3%의 소금이
있기 때문입니다. 어디에서든 소금역할을 하는 3%의 사람이 있다면 그 곳은
생명이 살아 움직이고 맑고 밝아질 것입니다. 우리가 그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을 잊지 않기 바랍니다.
티토서의 말씀으로 마무리 하겠습니다. “우리 구세주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인자와 사랑을 나타내셔서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우리가 무슨 올바른 일을
했다고 해서 구원하신 것이 아니라 오직 그분이 자비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성령으로 우리를 깨끗이 씻어서 다시 나게 하시고 새롭게 해 주심으로써
우리를 구원하신 것입니다”(티도3,4-5). 우리를 구원하신 구세주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합니다. 사랑에 사랑을 더하여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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