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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림, 사화, 붕당정치
▣ 훈구파, 사림파에 대하여
◇관학파 ( 훈구파 勳舊派)
ㅇ 조선을 세운 신진사대부들은 숭유배불주의(崇儒排佛主義)를 내세워 성리학을 정치지도 이념으로 정착시키는 동시에 사회개혁과 국가운영의 기본이념으로 삼았다. 이러한 문화정책은 특히 세종-세조에 의해 주도되어 개성이 강한 관학의 학풍을 이룩하였다.
ㅇ 관학과 집현전을 통해서 학문을 닦고, 군주 비호하에 양성된 관료들이다.
ㅇ 지방적 붕당성이 약한 반면, 국가나 민족에 대한 자각이 강하였다.
ㅇ 국력을 키우고 민족의 위신을 높이는 문제에 관심, 부국강명 추구, 실용적학문 숭상
ㅇ 국가창업 과정에 기여한 정도전, 하륜(河崙), 권근(權近) 등과 그의 제자들로서, 집현전, 홍문관을 중심으로 관찬사업에 적극 참여하여 학문을 크게 진작시켰으며, 특히 사장(詞章)에 능하였다.
ㅇ 정인지(鄭麟趾), 최항(崔恒), 신숙주(申叔舟), 양성지(梁誠之), 서거정 등이 많은 업적을 남겼다.
◇사림파
ㅇ 조선의 개창을 둘러싸고 길재와 같은 일부 학자들은 왕조 교체가 유교적 윤리와 의리에 어긋난다고 생각하여 역성혁명에 참가하기를 거부하고 향촌에 내려가 학문과 교육에 주력하였다. 그들은 김종직에 이르러 그 수가 크게 늘어 영남을 중심으로 이른바 사림파를 형성하였다.
ㅇ 사학을 통해서 지방적 붕당을 형성, 일종의 야당적 입장.
ㅇ 사림을 주체로 하여 자치적으로 운영되는 사회체제 희구, 고시제도보다 천거제도 국가에서 진휼하는 의창보다 향촌에서 자치적으로 진대하는 사창제, 수령통제하의 오가작통제 보다 자치적 공동체로서의 향약실시 주장.
ㅇ 사림의 민주 이념은 어디까지나 사림을 주체로 하는 것이며, 사림외의 무인, 기술직인, 농공상 등을 사림의 지배하에 종속시키려는 신분적 편협성, 신분제를 더욱 경직시킴
ㅇ 사림은 성리학을 철저히 신봉, 그 밖의 학문, 사상 철저히 배격. 성리학에 세련된 만큼 민족 신앙에 대한 거부 반응이 컸고 중국과의 의리적 사대관계 희구
ㅇ 경학(經學)에 치중하고 경학의 기본 정신을 수기치인(修己治人)에 있다고 생각. 인간의 심성을 연구하는 데 주력하였다.
ㅇ 사림파는 길재의 제자인 김숙자의 아들 김종직(영남사류의 師宗)과 그의 제자들인 김굉필(金宏弼), 정여창(鄭汝昌), 김일손(金馹孫) 등으로서 훈구파의 일방적 비대를 막으려는 성종의 발탁으로 중앙 정계에 진출하지만, 훈구파와 정치적 갈등이 불가피하였고, 그러한 갈등 속에서 사림들은 치명적 타격을 받았다.
☞훈구파는 민족의 외향적 성장에 기여, 사림파는 민족의 내향적 성장에 공헌
◈ 왕도정치
16세기 조선왕조사회는 그동안 조선건국을 주도하여 정권을 독점해왔던 훈구세력의 양반지배체제가 여러 모순을 야기하였다.
과전법의 붕괴와 지주제의 발달, 상품의 유통과 공납제의 모순 심화, 군역제도의 붕괴 등이 그것이다. 이에 따라 국가재정은 고갈되었고 일반 민의 사회 경제적 처지는 열악해져 심지어 향촌에서 유리되어 도적이 되기도 하였다.
한마디로 사회와 국가가 불안한 상태였는데 이러한 불안한 상태를 지배층의 도덕에 근거한 왕도정치를 통해서 향촌의 안정과 국력의 신장을 도모한 것이 사림파였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학생도 알다시피 사림파의 왕도정치 추진은 기존 훈구세력의 거센 저항에 직면하여 여러 차례에 걸친 사화를 당하였습니다. 한마디로 지배층의 갈등으로 국력은 더욱 소진되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 산림과 사림의 차이?
조선초기에 유학을 공부하는 선비들을 가리켜 사류, 사족이라고 지칭하던 것이 16세기에 들어와 사림이란 용어로 불리어진 것은 그간 교육제도의 발달로 지배신분층의 저변인 재지중소지주층의 지식인화가 촉진된 결과였다. 사림은 현직의 관인보다 재야의 지식인들을 앞세우는 표현으로 대과에 합격하여 벼슬에 나갔다가 퇴직한 부류도 포함되나, 소과 합격자인 생원과 진사의 비중이 컸다. 이들은 관학인 4부학당이나 향교보다도 사학인 서재나 서원에서 교육받았다. 소학과 대학은 성리학의 목표인 수기치인을 이루기 위해 가장 중요시한 교과서였으며, 왕도정치를 구현하기 위한 여러 노력은 이른바 사화라고하는 훈신과 척신들의 계속된 반발을 받았다.
산림이라는 용어는 16세기말 정인홍 등이 정치와 긴밀한 연결을 가지면서 하나의 역사적인 용어로 정착되었다. 과거를 거친 관료보다 과거를 거치지 않고 향촌에 은둔해 있던 학자가 더 존중되는 분위기가 조선후기에 형성된데는 사화를 거치면서 벼슬길에 매력을 잃고 향촌에서 학문에 몰두한 일부 사림들의 성향 변화가 큰 영향을 주었다. 유교사회의 상징적 존재로서의 산림은 특히 17세기에 큰 역할을 하였는데 당시의 대표적인 산림으로는 김장생, 장현광, 김집, 송시열, 송준길 등을 들 수 있다. 이들은 유림을 대표하면서 국왕에게는 정국의 안정과 유지를 위한 명분과 실리를 제공하였다.
▣ 사화
◈ 무오사화 (戊午士禍)
ㅇ 유자광, 이극돈(김종직과 유자광은 일찍이 개인감정)은 김종직 일파를 증오하여 보복에 착수하였다.
1498년(연산군 4) 《성종실록》을 편찬하자, 실록청(實錄廳) 당상관(堂上官)이 된 이극돈은, 김일손이 사초에 삽입한 김종직의 조의제문(弔義帝文)이 세조가 단종으로부터 왕위를 빼앗은 일을 비방한 것이라 하고, 이를 문제삼아 선비를 싫어하는 연산군에게 고하였다.
ㅇ 사림파 김일손, 권오복(權五福), 이목(李穆) 등은 무록(誣錄)한 죄를 씌워 죽이고
ㅇ 정여창(鄭汝昌), 강겸(姜謙), 이수공(李守恭) 등은 난을 고하지 않은 죄로,
ㅇ 김굉필(金宏弼), 이종준(李宗準), 이주(李冑) 등은 김종직의 제자로서 붕당, 조의제문의 삽입을 방조한 죄로 귀양보냈다.
ㅇ 한편 이극돈, 유순(柳洵), 윤효손(尹孝孫) 등은 수사관(修史官)으로서 문제의 사초를 보고하지 않은 죄로 파면하였다. 이로써 사화 발단에 단서가 된 이극돈이 파면된 뒤 유자광은 그 위세가 더해진 반면, 많은 사림파 인사들이 희생되었다.
◇ 조의제문의 내용
'弔義帝文'은 '의제를 조문하는 글'이란 의미입니다.
의제는 중국 초나라의 왕이었는데, 항우에게 살해당하였습니다. 김종직이 의제의 꿈을 꾼후
그 혼령을 위로하기 위해 조의제문을 지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조의제문을 김종직의 제자 김일손이 사초에 실었고, 이것이 연산군대에 문제가 되어
무오사화의 빌미가 되었습니다. 즉 연산군은 김종직이 세조가 단종을 축출, 살해한 것을 항
우가 의제를 살해한 것에 빗대었다고 생각하여 옥사를 일으킨 것입니다.
조의제문의 내용이 길기 때문에 원문은 생략하고 해석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원문은 [연산군
일기] 30, 4년 7일 신해조에 나와있으므로 참조하시면 되겠습니다.
'(김종직의 제자 김일손이) 그 스승 김종직의 조의제문을 실었다. 그 내용에 이르기를
"정축 10월 어느날 나는 밀성으로부터 경산으로 향하다가 답계역에서 숙박하게 되었다. 꿈
에 훤칠하게 생긴 한 신이 일곱가지 문양이 새겨진 왕이 입는 옷을 입고 나타나 말하기를 '
나는 초나라 회왕 손심인데 서초패왕에게 살해되어 빈강에 버려졌다.'하였는데 문득 사라졌
다. 나는 꿈에서 깨어나 놀라 생각하기를 '회왕은 남초 사람이고 나는 동이 사람이다. 지역
으로도 만여리가 넘고 시간으로도 천여년이 훨씬 넘는데 꿈속에 나타나 감응하니 이것이 무
슨 상서일까? 또 역사를 살펴보아도 회왕이 강에 버려졌다는 기록이 없으니, 이것은 항우가
사람을 시켜 비밀리에 때려 죽이고 강물에 던진 것이 아닐까? 이는 알 수 없는 일이다.' 하
고는 드디어 글을 지어 조문하였다.
하늘이 법칙을 마련하여 사람에게 주었으니 어느 누가 四大와 五常이 높은 줄 모르겠는가?
중화라서 풍부하고 이적이라서 인색한 것이 아니거늘, 어찌 옛날에만 있고 지금은 없겠는
가? 나는 동이의 사람이요 또 천년 후의 사람이건만, 삼가 초 회왕을 조문하노라. 옛날 조룡 이 아각을 가지고 장난하니 사해의 물결이 붉어 피가 되었다. 비록 바다속의 철갑상어 같은 큰 물고기들이라도 어찌 보존할 것인가? 그물을 벗어나기 급급하였으니, 6국의 후손들이 숨고 도망가서 평민의 짝이 되었다네. 항량은 남국의 장군가문사람으로 물여우를 닮아 일을 일으켰다. 왕위를 얻되 백성의 소망을 따름이여. 끊어졌던 웅역의 제사를 보존하였네. 건부를 쥐고 남면을 함이여. 천하엔 진실로 미씨보다 큰 것이 없도다. 어른을 보내어 관중에 들어가게 함이여. 또한 족히 그 인의를 보겠도다. 羊흔狼貪이 군사들을 마음대로 죽임이여. 어찌 잡아다가 도끼위에 기름칠 아니했는고? 아아, 형세가 너무도 그렇지 아니함에 있어 나는왕을 위해 더욱 두렵게 생각한다. 도륙을 당하여 젓장과 포가 됨이여. 과연 하늘의 운수가 어그려졌구나. 빈의 산은 우뚝하여 하늘위로 솟았고 그림자는 해를 가리어 어두워 졌도다. 빈의 물은 밤낮으로 흘러 넘실거리는 물결은 돌아올 줄을 모르는구나. 하늘은 길고 땅은 영원하니 어찌 한이 다하리. 왕의 넑은 지금도 떠돌아다닌다. 내 마음이 금석을 꾀뚫음이여. 왕이 문득 나의 꿈속에 임하였네. 자양의 노필을 따라가자니 생각이 진돈하여 흠흠하도다. 술잔을 들어 땅에 부음이여. 바라건대 왕의 영령은 와서 흠향하소서."
◈ 갑자사화 (甲子士禍)
ㅇ 1479년(성종 10) 성종비(成宗妃) 윤씨는 질투로 폐출(廢黜) 1480년 사사(賜死)되었다. 1504년(연산군 10) 연산군의 어머니 윤씨(尹氏)의 복위문제에 얽혀서 일어난 사화.
ㅇ 연산군의 사치와 낭비로 국고가 바닥이 나자 그는 공신들의 재산의 일부를 몰수하려 하였는데, 이때 임사홍(任士洪)사주하고, 폐비윤씨 폐출․사사의 경위도 연산군에게 알렸다.
ㅇ 먼저 정․엄 두 숙의를 죽이고 그들의 소생을 귀양보냈다가 후에 모두 죽이고, 조모 인수대비도 병상에서 타살하였다.
ㅇ 폐비윤씨를 복위, 성종묘에 배사(配祠)하려 하였는데, 반대한 권달수는 참형, 이행은 귀양보냈다.
ㅇ 윤씨를 폐출할 때 찬성한 윤필상(尹弼商), 이극균(李克均), 성준(成浚), 이세좌(李世佐), 권주(權柱), 김굉필(金宏弼), 이주(李冑) 등을 사형에 처하고,
ㅇ 이미 고인이 된 한치형(韓致亨), 한명회(韓明澮), 정창손(鄭昌孫), 어세겸(魚世謙), 심회(沈澮), 이파(李坡), 정여창(鄭汝昌), 남효온(南孝溫) 등의 명신거유(名臣巨儒)를 부관참시(剖棺斬屍), 가족 제자도 처벌.
ㅇ 연산군이 이같이 큰 참극을 벌인 까닭은 어머니의 원수를 갚는다는 명분도 있었지만, 평소에 눈엣가시처럼 싫어했던 선비들의 기를 꺾기 위해서였다.
이 무서운 사화는 그 이후 국정과 문화발전에 악영향을 끼쳤는데, 사형을 받았거나 부관참시의 욕을 당한 사람들 중에는 역사상 그 이름이 빛나는 명신과 대학자․충신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다.
ㅇ 연산군의 처사를 비난하는 한글 방서사건(榜書事件)을 계기로 이른바 언문학대(諺文虐待), 한글 비밀 투서 용의자 집과 그 앞, 뒤, 옆집까지 곤장, 귀양(三切隣) 수난, 국문학 발전에 악영향을 끼쳤다.
◈ 연산군(燕山君)-내죄를 내가 안다.
ㅇ 연산군은 조선 제10대의 왕(1476~1506/ 재위 1494~1506). 휘 융, 성종의 맏아들. 즉위 3년 동안은 별탈 없이 보냈으나, 1498 무오, 1504년 갑자 두 차례사화를 일으켰다.
ㅇ 각도에 채홍사(採紅使), 채청사(採靑使) 등을 파견해서 미녀와 양마(良馬)를 구해오게 하고, 미인을 가인, 재인, 여인 고인… 등 135 등급까지 분류하고, 따로 뽑은 여인을 興淸樂, 그들 친정집은 '흥청거리다.'의 어원이 됨.
ㅇ 큰어머니 월산대군 부인, 누이동생 惠愼옹주(임사홍자 임숭재 처, 40여 민가 철거, 임숭재 집과 창덕궁을 튀워 놓음) 근친 상간, 간사한 여인 장록수, 전비
ㅇ 성균관의 학생들을 몰아내고 그곳을 놀이터로 삼는 등 황음(荒淫)에 빠졌다.
ㅇ 생모는 연산 4살에 쫒겨나고 7세에 사사됨. 어린 연산은 애정결핍으로 너무 먹어댔다. 사슴을 발로 차다가 부왕의 꾸중을 듣고 아버지 공포증, 즉위 후 이틀만에 활로 쏘아(아버지 상징) 죽이고, 선왕 제삿날 소찬이 나오자 활로 부왕의 초상을 쏘았다. 효자 열녀를 죽였다.
ㅇ 내관 김처선이 간하자 죽이고 문서에 處자 善자도 못쓰게 함. 좋아하던 처용무 이름도 풍두무로 바꿈. 사람들의 입이 무서워지자 내시들 가슴엔 '是禍之門 舌是斬身刀 閉口心藏舌 安身處處牢' 라고 쓴 목판을 차고 다니게 함.
입은 재앙을 볼러오는 문이오, 혀는 자기의 몸을 베는 칼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입을 닫아 깊숙히 혀를 숨겨둔다면 어디에 있어서도 몸의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다. (唐 말 馮道의 시)
ㅇ 경연(經筵)을 없애 학문을 마다하였고, 사간원(司諫院)을 폐지해서 언로(言路)를 막는 등 그 비정(秕政)은 극에 달하였다.
ㅇ 1506(중종 1) 성희안(成希顔), 박원종(朴元宗) 등의 중종반정에 의해 폐왕이 되어 교동(喬桐 : 江華)으로 쫓겨나고, 연산군으로 강봉(降封)되었고, 귀양간지 두달만에 병으로 죽었다.
ㅇ 쫓겨날 때 '내죄를 내가 안다' 라고 하였고, 폭군의 마지막 소원은 '큰마누라 신씨를 한 번 보고 죽었으면' 이었다. 시를 좋아해서 문집이 있었는데 중종 때 불태워졌다. 자기 생각에도 미치광이 같았는지 狂자가 자주 보인다.
ㅇ 그의 치세로 성종 때 양성한 많은 선비가 수난을 당하여 학계는 침체되었다.
개국 100년의 조선조에 한 시대의 획을 긋게 하여, 이후 50년은 사화(士禍)라는 유혈극이 잇따라 일어나 그것은 선조 이후 붕당정치로 확대 악화되고, 한편으로는 임진-병자 등 국난으로 국운은 쇠퇴의 길을 밟게 되었다.
◈ 중종 반정 (中宗反正)
ㅇ 1506년(연산군 12) 9월 1일 밤. 성희안(成希顔), 박원종(朴元宗) 등이 연산군을 폐하고 진성대군(晉城大君:中宗)을 왕으로 추대한 사건.
ㅇ 이조참판(吏曹參判)을 지낸 성희안과 중추부지사(中樞府知事) 박원종은 재위 12년간 폭정으로 국가의 기틀을 흔들어놓은 연산군을 폐하기위하여 당시에 인망이 높던 이조판서 유순정(柳順汀), 연산군의 총애를 받고 있던 군자부정(軍資副正) 신윤무(申允武) 등의 호응을 얻어 왕이 장단(長湍) 석벽(石壁)에 유람하는 날을 기하여 거사하기로 계획을 꾸몄다.
ㅇ 1506년 9월 1일, 박원종, 성희안, 신윤무를 비롯해서 전 수원부사(前水原府使) 장정(張珽), 군기시첨정(軍器寺僉正) 박영문(朴永文), 사복시첨정(司僕寺僉正) 홍경주(洪景舟) 등이 무사를 규합하여 훈련원에 모았다. 그들은 먼저 권신(權臣) 임사홍(任士洪), 신수근(愼守勤)과 그 아우 신수영(愼守英) 및 임사영(任士英) 등 연산군의 측근을 죽인 다음 궁궐을 에워싸고 옥에 갇혀 있던 자들을 풀어 종군하게 하였다.
ㅇ 이튿날인 9월 2일 박원종 등은 군사를 몰아 텅 빈 경복궁에 들어가서 대비(大妃 : 成宗의 繼妃)의 윤허를 받아 연산군을 폐하고, 진성대군을 맞아 왕으로 옹립하니 그가 조선왕조 제11대 왕인 중종이다.
◈ 조광조 (趙光祖)
ㅇ 1482~1519, 본관 한양. 자 효직(孝直). 호 정암(靜庵). 시호 문정(文正). 개국공신 온(溫)의 5대손이며, 감찰 원강(元綱)의 아들이다. 어천찰방(魚川察訪)이던 아버지의 임지에서 무오사화로 유배 중인 김굉필(金宏弼)에게 수학.
ㅇ 1510년(중종 5) 진사시를 장원, 성균관 수학시 학문과 수양이 뛰어난 자를 천거하게 되자 유생 200여 명의 추천을 받아 조지서사지(造紙署司紙)에 임명되었고, 증광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에 들어갔으며 홍문관의 장관인 부제학을 거쳐 대사헌이 되었다.
ㅇ 성균관 유생들을 중심으로 한 사림파(士林派)의 절대적 지지를 바탕으로 도학정치(道學政治)의 실현.
ㅇ 성리학 이념의 전파를 위해서는 정몽주(鄭夢周)의 문묘종사(文廟從祀)와 김굉필․정여창(鄭汝昌)에 대한 관직 추증.
ㅇ 《여씨향약(呂氏鄕約)》을 간행하여 전국에 반포
ㅇ 천거를 통해 과거 급제자를 뽑는 현량과(賢良科)의 실시를 주장하여 이듬해에는 천거로 올라온 120명을 대책(對策)으로 시험하여 28인을 선발하였는데 그 급제자는 주로 사림파 인물들이었다. 훈구파로부터 시험이 불공평하다는 맹렬한 비난을 받았다. 조광조가 실각하자 폐지됨.
ㅇ 아버지 신수근(愼守勤)이 연산군 때에 좌의정을 지냈다는 이유로 반정(反正) 후에 폐위된 중종비 단경왕후(端敬王后) 신씨(愼氏)의 복위를 주장하였는데, 이것은 반정공신들의 자의적인 조치를 비판하는 것이었다. ㅇ 도교 신앙의 제사를 집행하는 관서로서 성리학적 의례에 어긋나는 소격서(昭格署)를 미신으로 몰아 혁파ㅇ 중종반정의 공신들이 너무 많을 뿐 아니라 부당한 녹훈자(錄勳者)가 있음을 비판하여 결국 105명의 공신 중 2등공신 이하 76명에 이르는 인원의 훈작(勳爵)을 삭제하였다.
ㅇ 훈구파의 격렬한 반발을 불러일으켜 홍경주(洪景舟)․남곤(南袞)․심정(沈貞) 등에 의해 기묘사화(己卯士禍)로 능주에 유배되었다가 사사되었다.
ㅇ 그러나 후일 사림파의 승리에 따라 선조 초에 신원되어 영의정이 추증되고, 문묘에 종사되었다.
◇ 조광조의 개혁정치
조광조는 어떤 것을 중심으로 개혁정치를 펼쳤는지, 개혁 내용 중에 백성들을 위한 것은
없었는지 알고 싶습니다. 책에서는 주로 현량과, 향약, 공물제도의 개선등이 나오는데 이런
개혁이 모두 사족의 지배를 확보하기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았나요?
조광조의 개혁정치는 무엇보다도 조선초기에 유교적 도덕주의에 입각한 정치를 실현시키려
하였다는데 의의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조선왕조가 유교를 지배이념으로 하여 건국되었지만, 조선초기의 훈구파들, 양반, 사회전반의 기풍 등은 유교적 도덕주의로 판단한다면 비도덕적 비유교적 요소들이 적지 않게 남아있었습니다.
이에 조광조는 위로는 국왕부터 아래로는 지방사회에 이르기까지 조선전체를 철저하게 유교
화시키려 하였습니다. 예컨대 소격서를 혁파하고, 지방에서 향약을 시행하려 한 것이 그것이 라 하겠습니다.
이와함께 조광조는 자신이 스스로 일상생활에서 유교예법을 솔선수범하였습니다. 이같은 조
광조의 사상과 행동은 당시에 선풍적인 인기를 끌게되었습니다. 혈기방장한 젊은 유학자들
이 조광조를 추종하여 강력한 정치세력을 형성하기까지 하였습니다.
조광조의 도덕적 유교정치는 궁극적으로 반정을 통해 권력을 장악한 훈구공신들의 부정부패
를 공격하게 되었고 이는 결국 조광조를 대표로 하는 사림세력과 공신들을 주축으로 하는
훈구세력의 갈등을 유발하여 사화가 일어났습니다.
조광조를 중심한 세력들이 추구한 현량과, 향약 등은 일면 훈구파에 대응하는 사림세력의
성장과 직결되기도 합니다. 아울러 이는 사족의 지배질서확립이라는 면도 없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면과 함께 조광조의 개혁정치에는 백성들을 위한 면도 있었습니다. 현재의
기준에서 백성들은 어느 계층이고 또 이들을 위한다는 것이 어느정도인지 애매한 면이 있지
만, 당시의 입장에서 본다면 백성은 일반농민층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유교정치사상의 중요
한 부분은 일반농민층의 생활안정이라 할 수 있는데-이른바 위민정치-, 조광조는 일반농민
의 생활안정을 위해 과도한 공물의 수취를 비판하고 세금을 경감하여야 한다는 주장을 펴기
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조광조의 개혁정치는 어디까지나 조선시대라는 환경속에서 추구되었다는 점을 염두
에 두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조광조의 도덕적 유교정치는 무엇보다도 지배층 내부의 도덕적 무장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지배층이 도덕적이라면, 피지배층의 입장에서는 타락한 지배층에게 학대당하는 것보다는 좋
겠지요? 그러나 양반층의 신분적 지배자체를 비판적으로 본다면 이것은 또다른 해석도 가능
한 부분입니다.
조광조의 도덕적 유교정치는 사화로 좌절되었지만, 선조대 이후 사림세력이 중앙권력의 주
도층으로 성장하면서, 그의 이념은 사림세력의 이념으로 기능하였습니다. 따라서 조광조의
도덕적 유교정치는 선조대 이후 조선사회의 철저한 유교화에 대한 평가와 연결된다고 하겠
습니다.
사림세력에 의한 조선사회의 철저한 유교화는 훈구세력이 강성했던 시기에 비해 몇가지 면
에서 발전한 면도 있고, 또 그 나름대로 문제점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조광조가 살았던 당시의 시대적 환경을 이해하고 그러한 환경속에서 조광조가
추구한 개혁정치의 의의와 한계를 같이 평가할 수 있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하겠습니다.
▣ 붕당정치(朋黨政治) 전개
◈ 붕당론
ㅇ 중국에서는 당대(唐代)에 우이당쟁(牛李黨爭)이 있었고, 송대(宋代)에는 신법(新法)․구법(舊法) 양당의 큰 충돌이 있었다. 명(明)나라 때에는 유림(儒林) 출신인 동림파(東林派)와 환관(宦官)의 세력과 결탁한 비동림파 사이에 치열한 정치싸움이 벌어졌다.
ㅇ 사화는 본질적으로 그것은 신․구세력 간의 대립이고, 진보와 보수세력 간의 투쟁이었다.
여러 차례에 걸친 사화의 타격 속에서도 사림들은 성리학은 깊이 연구하며, 서원(書院)을 발달시키고 훈구파의 탄압인 사화(士禍)를 극복하여 마침내 선조초에는 정권을 장악하였다. 이후 그들 사이에 붕당(朋黨)이 분기되어 자체 경쟁과 대립이 심화되어 붕당정치 또는 사림정치ꡑ가 대두하게 된 것이다.
ㅇ 이익(李瀷)은 《곽우록(藿憂錄)》의 <붕당론(朋黨論)>에서 '이(利)가 하나이고 사람이 둘이면 곧 2개의 당(黨)을 이루고, 이가 하나이고 사람이 넷이면 4개의 당을 이룬다'고 하였다.
◈ 붕당의 발단, 이조 전랑직
ㅇ 1575년(선조 8) 이조전랑직(吏曹銓郞職)을 둘러싼 김효원(金孝元)과 심의겸(沈義謙)의 반목에서 비롯.
전랑직은 그 직위는 낮으나(정5품) 인사권을 쥐는 직책으로, 판서(判書)나 국왕이 임명하는 것이 아니고, 전임자가 후임자를 추천하면 공의(公議)에 부쳐서 선출하였으므로 관료들 간의 집단적인 대립의 초점이 됨.
ㅇ 김효원, 동인(東人)은 허엽(許曄)이 영수(領袖)/ 심의겸, 서인(西人)은 박순(朴淳)이 영수
ㅇ 처음에는 동인이 우세하여 서인을 공격하였으나, 동인은 다시 서인에 대한 강온(强穩) 양론으로 갈라져 강경파인 북인(北人)과 온건파인 남인으로 분파, 임진왜란 이전에 이미 서인, 남인, 북인의 삼색(三色)형성
-남인은 우성전(禹性傳), 유성룡(柳成龍)이 중심
-북인은 이발(李潑), 이산해(李山海)중심이, 임진왜란 후에 남인 유성룡은 화의(和議)를 주장하였다는 이유로 실각되자 북인 남이공(南以恭)이 정권을 잡게 되어 남인은 몰락.
◈ 광해군과 대복파, 인조 반정
ㅇ 득세한 북인은 다시 선조(宣祖)의 후사문제(後嗣問題)로 대북(大北)과 소북(小北)으로 갈라져 대립하다가, 대북파가 옹립하는 광해군이 왕위에 오르자 정권을 장악하고, 소북파를 일소하기 위하여 영창대군(永昌大君)을 모함, 살해하는 한편, 외척인 김제남(金悌男)과 그 일족을 처형하였다.
ㅇ 광해군과 대북파의 이러한 폭정은 오랫동안 대북파에게 눌려지내던 서인에게 집권할 기회를 주었으니, 곧 능양군(陵陽君:仁祖)을 왕으로 옹립한 인조반정(仁祖反正)이 바로 그것이다.
인조가 왕위에 오르자 천하는 서인의 수중으로 들어갔으며, 이이첨(李爾瞻)․정인홍(鄭仁弘) 등 대북파 수십 명이 처형되고, 수백 명이 유배되었다.
ㅇ 서인이 집권하는 동시에 남인 이원익(李元翼)이 입상(入相)하게 됨으로써 남인이 제2의 세력으로 등장하여 숙종 때까지 100여 년 동안 서인과 남인의 공존을 바탕으로 한 대립이 계속되었다.
즉, 효종이 즉위하자 서인 김자점(金自點)은 역모로 실각하였으나 같은 서인인 송시열파(宋時烈派)가 등장하여 서인의 집권은 현종(顯宗) 초까지 계속되었다.
◈ 남인 서인 2차 예송 논쟁
ㅇ 기해복제문제(己亥服制問題)
- 현종 즉위 후 효종이 죽자 효종의 모후(母后) 조대비(趙大妃)의 복상(服喪) 문제, 서인의 주장 (효종이 차남이다, 기년설(朞年說 : 1주년설)과 남인의 주장인 3년설( 대통이었으므로 종통으로, 2주년설)이 대립,
- 서인의 송시열과 남인의 윤휴(尹) 사이에 벌어진 예학논의(禮學論議)가 당론으로 전환. 서인의 주장이 채택, 정권에는 변동이 없었다.
ㅇ 2차 예송논쟁
-1674년(현종 15) 효종의 비 인선왕후(仁宣王后)의 상(喪)을 당하자 또다시 조대비의 복상문제가 터져 남인은 기년설, 서인은 대공설(大功說 : 9개월), 이번에는 남인의 주장이 채택, 남인이 정권, 서인정권 몰락.
-이 때, 남인은 송시열 등에 대한 극형을 주장하는 과격파와 이에 반대하는 온건파로 갈리어 이들을 청남(淸南)․탁남(濁南)으로 나뉘어 짐.
◈ 경신 대출척 庚申大黜陟, 庚申換局)
ㅇ1680 숙종 6, 남인 실각, 서인 득세
ㅇ 예송(禮訟)에서의 승리로 정권을 장악한 남인은 청남(淸南)․탁남(濁南)으로 갈라져 서로 싸워 숙종으로부터는 신임을 얻지 못했다.
ㅇ 경신년인 80년 3월 당시 남인의 영수이며 영의정인 허적(許積)의 집에 그의 조부 허잠(許潛)을 위한 연시연(延諡宴 : 시호를 받은 데 대한 잔치)이 있었다. 그 날 비가 오자 숙종은 궁중에서 쓰는 용봉차일(龍鳳遮日 : 기름을 칠하여 물이 새지 않도록 만든 천막)을 보내려고 하였으나 벌써 허적이 가져간 뒤였다. 숙종은 노하여 허적의 집을 염탐하니 남인은 다 모였으나 서인은 김만기․신여철(申汝哲) 등 몇 사람뿐이었다.
ㅇ 다음달인 4월 정원로(鄭元老)가 허견(許堅)이 숙종의 5촌인 복창군(福昌君)․복선군(福善君)․복평군(福平君) 3형제와 결탁하여 역모하였다고 고발.
그 내용은 허견이 복선군을 보고 ꡒ주상께서 몸이 약하고, 형제도 아들도 없는데 만일 불행한 일이 생기는 날에는 대감이 왕위를 이을 후계자가 될 것이오. 이때 만일 서인(西人)들이 임성군(臨城君)을 추대한다면 대감을 위해서 병력(兵力)으로 뒷받침하겠소ꡓ 하였으나 복선군은 아무 말도 없더라는 것이었다. 이들은 모두 잡혀와 고문 끝에 처형되었고 허견․허적(허경 서자), 복창군 3형제 등이 모두 죽음을 당하였다.
ㅇ 서인 사이에도 분열이 생겨 송시열을 중심으로 한 노론(老論)과 윤증(尹拯)을 중심으로 한 소론(少論)으로 갈리었다.
◈ 기사환국 (己巳換局)
ㅇ 1689 숙종15 → 서인 실각, 남인 득세
ㅇ 경신출척(庚申黜陟)으로 실세하였던 남인(南人)이 원자정호(元子定號) 문제로 숙종의 환심을 사서 서인(西人)을 몰아내고 재집권한 일. 그 여파로 민비는 폐출(廢黜)되고, 장희빈은 정비가 되었다.
소의 (장희빈) 소생 균을 세자로 삼고자 하니 남인은 지지, 서인 영수 송시열은 상소를 올려 반대 (建儲가 이르다, 正妃 민씨가 아직 나이 젊으므로 그의 몸에서 후사가 나기를 기다려 嫡子로써 왕위를 계승함이 옳다 하여 원자책봉을 반대하였다.) 하다가 제주도 유배 후 사사됨)
◈ 갑술환국 (甲戌換局)
ㅇ 1694 숙종 20→남인 실각, 소론 득세
ㅇ 소론 김춘택 등이 숙종의 폐비 민씨 복위운동에 대하여 남인 민암 등이 소론 일파를 제거하려다 민비폐비를 후회하던 숙종의 미움을 사서 실패하고 화를 당함.
ㅇ 왕비 장씨를 희빈으로 다시 강등시켰고 그때 민씨를 지지하여 2번이나 상소를 올렸다가 사사한 송시열(宋時烈)을 비롯하여 김수항(金壽恒) 등에게는 작위를 내렸다. 이 옥사의 타격으로 남인은 완전히 몰락하고
남구만 등 소론이 실권, 그 후부터는 노․소론(老少論) 간에 쟁론이 빈번하게 일어났다.
◈ 신임사화 (辛壬士禍)
ㅇ 1721년(경종 1)~22년 숙종의 후사 왕통문제와 관련하여 소론이 노론을 숙청한 사건.
ㅇ 노론과 소론은 장희빈의 처벌문제를 놓고 대립하였다. 노론측은 장희빈이 정비인 인현왕후를 모해하였으므로 사사해야 된다는 주장을 한 데 반해, 소론측은 다음 왕이 될 세자를 위해 장희빈을 살려야 옳다고 주장하였다. 경종은 숙종 말년에 4년간 대리청정을 하다가 숙종이 죽자 왕위에 올랐다.
ㅇ 노론은 경종 즉위 뒤 1년 만에 연잉군을 세제(世弟)로 책봉하는 일을 주도하고, 세제의 대리청정을 강행하려 하였다. 소론은 노론이 대리청정을 주도하여 경종을 제거하려는 계획으로 이해하고 노론을 공격하였다.김창집(金昌集)․이이명(李命)․이건명(李健命)․조태채(趙泰采) 등 노론 4대신을 비롯한 노론의 대다수 인물이 화를 입었다.
◈ 탕평책
ㅇ ꡐ탕평책(蕩平策)ꡑ; 각 파에 걸친 공평한 인재등용에 힘써 재위 52년간에 정쟁이 크게 완화.
1728년 이인좌의 난을 계기로 점차 노론으로 기울어지고, 사도세자 사건이후로는 노론이 정치를 주도하였다. 탕평책의 반작용으로 대간(臺諫)의 기능은 크게 위축, 언로(言路)는 모든 시비와 공격이 당쟁완화라는 명분으로 억제되어, 앞 시기의 긴장과 혈기가 풀리는 반면 공리주의(功利主義)․이기주의의 새로운 시대풍조를 조장. 권세는 주로 노론의 수중에 있었다.
ㅇ 임오사건(壬午事件) ; 영조 말년부터 싹트기 시작한 새로운 대립은 1762년(영조 38) 즉 사도세자사건(思悼世子事件)을 둘러싸고, 세자를 동정하는 홍봉한(洪鳳漢) 중심의 시파(時派)와 세자의 실덕(失德)을 지적하고 영조의 처사를 옳다고 보는 김구주(金龜柱) 중심의 벽파(僻派)의 대립. 그후 남인과 소론도 시․벽으로 분파되었다. 영조 때 노론벽파 득세. 정조 때 남인시파 득세.
ㅇ 정조 때에는 지금까지 소외되었던 남인과 소론이 기용되어 이가환(李家煥)․정약용(丁若鏞)과 같은 남인 시파의 명사가 등장하였다. 순조이후 세도정치가 시작되면서 노론일당의 전제화가 가속화되었다. 1801년 신유사옥(辛酉邪獄)을 일으켜 사학일소(邪學一掃)라는 명목 아래 많은 시파의 가톨릭교인, 남인 실학자들이 말살되었다.
◈ 희빈장씨 (禧嬪張氏)
ㅇ 숙종은 오래도록 아들을 얻지 못하다가 당시 소의(昭儀)였던 장씨와 가까이 하여 왕자 균을 낳자 1689년(숙종 15) 1월 균을 세자로 봉하였다. 이에 따라 소의 장씨는 희빈에 오르고, 세자책봉은 불가하다고 상소한 송시열은 유배되어 사사(賜死)되었으며 나머지 서인들도 유배되어 권대운(權大運) 등 남인(南人)이 정권을 잡게 되었다(己巳換局).
ㅇ 이 해 5월 숙종이 인현왕후를 폐출하고 희빈 장씨를 왕비로 올리자 서인 박태보(朴泰輔) 등 80여 명이 이를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참혹한 형벌을 받았다. 1694년(숙종 20) 서인의 김춘택(金春澤) 등이 다시 인현왕후의 복위운동을 일으키자 인현왕후의 폐출을 후회한 바 있던 숙종이 남인을 몰아내고 인현왕후를 복위시켜 장씨를 희빈으로 강등시켰다.
ㅇ 1701년(숙종 27) 인현왕후가 죽은 뒤 취선당(就善堂) 서쪽에 신당(神堂)을 차려 놓고 인현왕후를 저주한 일이 발각된 장희빈은 오빠 장희재(張希載)와 함께 죽음을 당했다.
◈ 송시열( 宋時烈 / 1607~1689)
ㅇ 노론(老論)의 영수(領袖). 본관 은진(恩津). 자 영보(英甫). 호 우암(尤庵)․화양동주(華陽洞主). 시호 문정(文正). 1633년(인조 11) 생원시(生員試)에 장원급제
ㅇ 자의대비(慈懿大妃)의 복상문제(服喪問題)가 제기되자 기년설(朞年說:만 1년)을 주장하여 관철시키고 3년설을 주장하는 남인을 제거하여 정권을 장악, 좌참찬(左參贊) 등을 역임하면서 서인의 지도자로서의 자리를 굳혔다.
ㅇ 1674년 인선왕후(仁宣王后)의 별세로 다시 자의대비의 복상문제가 제기되어 대공설(大功說:9개월)을 주장하였으나 남인 쪽이 내세운 기년설이 채택됨으로써 실각, 제1차 복상문제 때 기년설을 채택하게 한 죄로 이듬해 덕원(德源)으로 유배, 그 뒤 여러 곳으로 유배장소가 옮겨졌다. 1680년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으로 남인이 실각하게 되자 중추부영사(中樞府領事)로 기용되었다.
ㅇ 제자 윤증(尹拯)과의 감정대립이 악화되어 마침내 서인은 윤증 등 소장파를 중심으로 한 소론(少論)과 그를 영수로 한 노장파의 노론(老論)으로 다시 분열되었다.
ㅇ 그 뒤 정계에서 은퇴하고 청주 화양동에서 은거생활을 하였는데 89년 왕세자가 책봉되자 이를 시기상조라 하여 반대하는 상소를 했다 서울로 오는 도중 정읍(井邑)에서 사사(賜死)되었다.
ㅇ 갑술옥사(甲戌獄事) 뒤에 신원(伸寃)되었다. 주자학(朱子學)의 대가로서 이이(李珥)의 학통을 계승하여 기호학파(畿湖學派)의 주류를 이루었으며 이황(李滉)의 이원론적(二元論的)인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을 배격하고 이이의 기발이승일도설(氣發理乘一途說)을 지지, 사단칠정(四端七情)이 모두 이(理)라 하여 일원론적(一元論的) 사상을 발전시켰으며 예론(禮論)에도 밝았다. 성격
◈ 붕당정치(당쟁)의 이해
질문 : 붕당정치(朋黨政治)란 조선중․후기에 있었던 당쟁(黨爭)을 새로운 각도에서 보기 위해 일부 학자들이 처음 사용한 용어인데, 지금은 교과서에까지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당쟁이라고 하든지 붕당정치라고 하든지 거기에는 긍정적인 측면과 부정적인 측면이 다 있었습니다. 정치에 당파가 생겨서 경쟁을 하기도 하고 싸움을 하기도 하는 것은 어느 시대, 어느 나라에나 있던 일이었습니다.
[ 답변 ] 선조 때부터 나타나기 시작한 당파의 형성이나 분열, 그리고 정치 싸움에는 여러 가지 원인과 배경이 있었습니다.
첫째, 조선시대에는 벼슬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큰 특권을 보장하는 것이었는데, 전체 양반들의 수나 과거에 급제한 사람들의 수에 비해 그들에게 줄 수 있는 관직의 수는 매우 적었습니다. 적은 관직을 서로 차지하기 위하여 무리를 지어 다투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었습니다. 혼자 싸우는 것보다는 그룹으로 싸우는 것이 유리하니까요.
둘째, 조선시대는 도덕과 명분을 지나치게 중시하는 유교사회였기 때문에 조금만 잘못하는 일이 있더라도 서로 비판 공격하는 일이 자주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셋째 삼사(사헌부․사간원․홍문관)라는 기구가 있어 왕과 관리들의 잘잘못을 무제한 비판하는 언론활동을 허용하여 걸핏하면 정치가 시끄러워지고 싸우게 되는 원인을 제공하였습니다.
넷째, 이조에는 전랑(정랑․좌랑)이라는 관직이 있어 중․하위 요직의 인사를 담당하였는데, 그 권한과 영향력이 너무 커서 정치판을 좌우하는 일이 많았는데 이 자리를 차지하기 위하여 당파싸움을 하는 일이 많았습니다.
다섯째, 조선중기 이후에 많이 세워진 서원에는 지방 학자들이 모여 학문
도 하였지만, 여론을 형성하고 정치를 비판하는 일이 많아 당파싸움을 조장하고 지속시키는
역할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일제시대의 일본학자들은 식민지 통치를 합리화하기 위하여, 우리 민족사학자들은
나라를 빼앗긴데 대한 뼈아픈 자기반성에서 당쟁을 지나치게 부정적․비판적으로 보았습니
다. 그들은 마치 당쟁이 우리 민족의 분열적이고 고질적인 민족성 때문에 있었던 것처럼, 또 조선후기의 정치와 사회를 파탄시킨 원흉인 것처럼, 또 나라를 멸망시킨 결정적 요인이었던 것처럼 말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모두 과장된 말이며 사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당쟁은 때로는 치열한 정치 싸움을 하기도 하였지만, 때로는 서로를 인정하면서 견제하고 비판하는 가운데 도덕적이고 깨끗한 정치를 추구하기도 하였습니다. 따라서 당쟁이란 조선시대의 문 치주의(文治主義)로 인한 사림정치(士林政治)의 독특한 한 형태이며, 거기에는 긍적적인 측 면과 부정적인 측면이 다 있었다고 보는 것이 옳습니다. 붕당정치가 가졌던 긍적적인 면은 첫째, 정치에서의 명분과 도덕성을 강조함으로써 부정부패를 서로 견제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깨끗하지 않으면 상대를 비판할 수 없었으 니까요. 둘째, 정책 선택에서의 탄력성을 들 수 있습니다. 당쟁을 하다가 정권이 바뀌면 이 전과는 다른 정책이 나타나고 시행될 수 있는 것이지요. 셋째는 좀 부수적인 것인데, 당쟁은무력이나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명분과 이론으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 명분과 이론을 내세우기 위하여 학문적 연구를 심오하게 하기도 하였습니다. 즉 학문과 문화의 발달을 가져오는 것이지요. 조선후기 성리학이나 예학(禮學)의 발달에는 이러한 당쟁의 영향이 적지 않았습니다.
반대로 붕당정치의 부정적인 측면을 보면, 첫째 문치주의의 만연에 의한 국방․군사력의 저
하를 가져오기도 하였습니다. 임진왜란 때 처음부터 잘 막아내지 못하였던 것은 그 때문이
었습니다. 둘째 장기간에 걸쳐 지속된 파벌의 형성과 투쟁으로 인한 원한의 지속, 소모적인
정치싸움에 의한 국력의 낭비와 비효율을 들 수 있습니다. 파벌싸움은 우리의 민족성이라고
는 할 수 없지만 그것이 지나치게 오래 계속되었기 때문에 그것이 습관적인 정치행태가 되
기도 하였던 것입니다. 셋째, 진정한 의미에서 조선후기 정치의 혼탁은 여러 당파가 경쟁하
는 당쟁체제가 무너져 견제의 기능이 상실되고, 결국 노론이 정권을 잡아 일당정치를 함으
로써, 그것이 세도정치로 발전하게 되고 여러 가지 부정과 부패가 나타나게 된 것이라고 봅
니다.
이와 같이 당쟁(붕당정치)은 복잡한 원인 때문에 나타난 것이고, 그 성격도 긍정적인 면 부
정적인 면이 다 있습니다. 대원군 때 쇄국정치를 하고, 1910년에 일제에 나라를 빼앗기게 된것은 여러 가지 요인을 내포한 또 다른 문제이며, 당쟁(붕당정치)이 우리의 민족성이라거나 망국의 직접적 원인이라고 하는 것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